2019년 4월 9일 화요일

괭이

괭이.
흙을 파고 고르는 데 쓰이는 연장.
돌괭이는 신석기시대 초기부터 나타나 함북 서포항 · 평남 궁산 · 양양 오산리 · 서울 암사동 유적 등에서 출토되었다. 신석기 전기에 속하는 서포항유적에서 출토된 돌괭이는 길이가 13~17cm 정도의 신바닥 모양이었지만 중기 이후에 나오는 것들은 가늘고 길어서 그 길이가 10~28cm 안팎이 된다.
고고학에서는 돌괭이와 함께 돌삽돌보습과 석기()를 통칭하여 굴지구()라고 한다.

돌괭이의 날은 자루에 매기 위해 어깨가 날 부분에 비해 좁은 편이고, 작은 것은 길이는 13~20cm 정도에서 큰 것은 30cm가 넘는 것도 있다. 각암 · 안산암과 같이 단단한 돌을 깨서 만든 것이 많고, 드물게는 갈아서 만든 것도 있다. 나무 자루를 붙이는 방법에 따라 따비나 삽으로도 사용될 수도 있고, 농사이외에 야생식물의 뿌리를 채취하거나 집터를 파고 산림을 개간하는데도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초기 하위지()의 유서에는 ‘괘이()’로 표기되었으며, 『고사신서 』 농포문()에 쓰인 ‘노작()’도 괭이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농정촬요 』에는 ‘송곳광이’·‘곳광이’·‘가래갓튼광이’·‘장도리갓튼광이’라고 적혀 있다. 지역에 따라 ‘광이’(경기도 안산, 강원도 도계)·‘깽이’(경상남도 창녕)·‘꽹이’(전라남도 구례·강진·거문도)·‘쾡이’(인천광역시 덕적)·‘곽지’·‘괘기’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날을 이루는 넓적한 쇠 끝은 ‘ㄱ’자로 구부러져 괴구멍을 이루고 여기에 자루가 달렸다. 괭이 날의 형태는 매우 다양한데, 이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위아래의 날 너비가 같은 것으로 너비는 매우 좁으며 날 끝만 둥그레한 것.
"볼이 엷고 넓적하며 자루를 끼는 부분이 수숫잎의 밑동처럼 된 것으로 자루와 날 사이의 각도가 좁은 것.
"날의 위쪽은 둥그레하나 끝이 뾰족하게 좁아져 가지의 잎과 비슷한 ‘가짓잎괭이’.
"위는 넓으나 날 끝으로 가면서 차차 좁아지는 괭이인 ‘토란잎괭이’.
"날이 엄지손톱과 같이 판판하고 끝이 둥그레한 것.

"황새의 주둥이처럼 가늘고 뾰족한 것으로 날이 양쪽에 달린 것은 가운데의 괴통에 자루를 박은 것과 외날뿐인 것이 있는데, ‘곡괭이’ 또는 ‘뿔괭이’라고도 한다. 이와 같이 괭이는 토질에 따라 날의 길이와 너비, 자루와의 각도, 중량 따위가 다르다. 

예전에는 날 끝에 강철을 입혔으나, 현재는 전부 강철로 만들어서 흙이 날에 들러붙는 일이 드물다. 자루는 대개 참나무·느티나무와 같이 단단하고 질이 치밀한 목재로 만든다. 길이는 날의 형태, 토질, 사용자의 키, 목재의 종류에 따라 다르나 대체로 150㎝ 내외이며, 지름은 3, 4㎝이다. 괭이의 생김새는 길이 약 1~1.5m의 긴 자루 막대기에 쇠로 만든 'ㄱ'자 모양으로 구부러진 날을 꽂아 만든다. 괭이의 날은 날카롭게 다듬어 사용하는데 날이 무뎌지면 숫돌에 갈아서 사용했다. 주로 겨울동안 굳어버린 땅을 파서 토질을 부드럽게 한 다음 씨앗을 뿌리기 위한 용도로 사용하며,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경지를 확보하는 일에도 괭이가 주도적으로 사용된다. 나무의 뿌리를 캐내거나 자르는데도 괭이는 제몫을 한다. 

괭이를 높게 쳐든 다음 찍어내리듯 땅을 찍어내어 흙을 파내거나 뒤집어 씨앗이 뿌리를 내리는데 용이하게 한다. 괭이는 지역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조금씩 차이가 나는데, 함경도에서는 '곽지'또는 '괘기'라고 불렀다. 괭이는 그 모양과 크기도 조금씩 다르지만 사용 원리나 용도는 같다. 농사에서 괭이는 씨를 뿌리기 위해 골을 켤 때, 덩어리진 흙을 잘게 부술 때, 땅을 판판하게 고를 때 쓴다. 이것으로 김을 매거나 극젱이로 갈고 남은 땅을 갈기도 하며, 구덩이를 팔 때도 쓴다. 기능은 토질에 따라 큰 차이가 있으나, 강원도 도계에서는 남자 한 사람이 하루에 논은 30평, 밭은 1백 평 정도 다룰 수 있으며, 무게는 1㎏ 내외이나 2㎏에 이르는 것도 있다.

괭이의 부분 명칭은 다음과 같다.
"괴통: 자루를 박기 위해 날의 다른 끝이 둥글게 목을 이룬 부분.
"등씸: 괭이 바닥 복판에 우뚝 선 날.
"괴구멍: 자루를 박는 괴통의 구멍.
이와 같은 부분 명칭은 지역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경상남도 지방에서는 칠월 초순경, 세번째의 논을 다 맨 뒤에 그 동안의 노고를 치하하는 뜻으로 일꾼들을 하루 쉬게한다. 이때에는 농사가 제일 잘 된 집을 골라 그 집의 일꾼을 괭이자루에 태우고 농악을 울리며 마을을 돌아다니는데, 주인집에서는 그들에게 술과 음식을 낸다. 이를 ‘괭이자리탄다’라고 한다.

남부지방에서는 새해 첫 장에 가서 괭이는 사지 않는다. 이 연장은 땅이나 흙을 파헤치는 데 쓰므로, 괭이를 사면 그 해의 재복이 뿔뿔이 흩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괭이는 `ㄱ`자 모양의 넓적한 쇠 날과 나무 자루로 이루어져 있다. 지역에 따라 명칭에 차이가 있어, 광이·깽이·꽹이·쾡이·?이·꾕이·곽지·괘기 등으로 불린다.

신석기 시대의 유물인 뿔괭이·돌괭이·곰배괭이 등으로 보아 괭이의 사용은 매우 오래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괭이는 땅을 파는 데에도 쓸 수 있지만 그보다는 씨를 뿌리기 위해 골을 내거나 땅을 평평하게 고를 때, 그리고 흙덩이를 잘게 부술 때 알맞은 농사도구이다. 한반도의 신석기·청동기문화 유적에서 출토되는 괭이는 대체로 날이 넓고 어깨가 좁은 이른바 곰배괭이 형태이다. 그런데 흔히 돌괭이로 분류하는 석기는 나무자루를 어떻게 묶느냐에 따라 호미·따비·삽 등으로 그 쓰임새가 달라질 수도 있다. 

평안남도 온천군의 궁산()유적에서는 돌괭이와 뿔괭이가 함께 발견되었다. 이로써 신석기시대 전기부터 괭이의 쓰임새가 다양하고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밖에 함경북도 선봉군 서포항유적, 함경북도 무산군 범의구석유적, 경상남도 통영시 상노대도유적 등에서도 신석기시대의 곰배괭이 형태의 돌괭이가 출토되었다. 

청동기시대에는 나무 농기구를 많이 만들었으므로 나무괭이도 적지 않았겠지만, 돌괭이가 반달돌칼·돌낫·돌보습 등과 함께 자주 쓰였다. 대표적인 유적으로 함경북도 회령시 오동유적, 경상남도 진주시 어은유적·옥방유적 등이 있다. 대전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농경문청동기()에는 따비와 괭이로 밭고랑을 일구는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괭이의 재질이 나무인지 돌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돌괭이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괭이는 농기구 중에서 땅을 가는데 쓰는 도구이다. 땅을 가는 도구에는, 소에게 매달아 사용하는 세모꼴의 쟁기, 쟁기의 전신()으로 보이는 따비, 생나무의 끝을 넓적하게 남기고 깎아 자루와 몸이 하나로 연결되게 하고 그 끝에 쇠 날을 끼워 만든 가래, `ㄱ`자로 구부러진 넓적한 쇠 날을 자루에 붙여 만든 괭이, 갈퀴 모양의 발이 서너 개 달려 있고 `ㄱ`자 모양으로 구부러진 날이 긴 나무 자루에 붙어 있는 쇠스랑 등이 있다.

괭이의 일반적인 형태는 넓적한 쇠끝이 `ㄱ`자로 구부러져 괴구멍(자루를 박기 위해 둥글게 목을 만든 날의 한쪽 부분 중 자루를 박는 구멍)을 이룬 날에 긴 자루를 박은 것이다. 괭이는 날의 모양에 따라 그 종류를 나눌 수 있는데, 날의 위쪽이 넓고 끝이 뾰족하게 좁은 가짓잎괭이, 토란잎처럼 위는 넓고 끝으로 갈수록 완만하게 좁아지는 토란잎 괭이, 가로로 길고 가는 날의 양쪽이나 한쪽이 뾰족하며 날 가운데 자루를 박은 곡괭이, 그리고 삽괭이·왜괭이·벽채 등이 있다. 괭이 날의 형태는 토질에 따라 길이와 너비, 자루와의 각도, 중량 등에 차이가 심하다.

자루는 대개 참나무나 느티나무 등 단단한 목재를 사용하며, 자루의 길이는 날의 종류·토질·사용자의 키 등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1.5m 정도이며, 굵기는 3-4cm이며 원형이나 타원형을 이룬다. 괭이는 주로 흙을 파고 깨며 골타기(밭에 고랑을 만드는 일)나 김매기 등에 쓰고 밭을 일구거나 정지(:땅을 반반하게 고르는 일)작업을 할 때에도 사용된다.

예전의 괭이는 날 끝에 강철을 입혀서 사용했지만, 현재는 날을 강철이나 주철로 만들어 사용하며, 날의 모양이 위와 아래의 너비가 같고 끝이 둥근 것을 주로 사용한다. 단단한 땅을 파고 고르는데 사용하는 연장으로 농경초기의 뒤지개에서 발달한 원시적인 형태지만 지금까지 그 형태가 변화되지 않고 남아 있는 연장이다〈그림 1-11〉〈사진 1-14〉. 나비가 5∼10cm 되는 쇠날을 ‘ㄱ’자로 구부리고 짧은 쪽에 괴통을 만들어 1m 가량의 자루를 박았다. 그러나 보다 전통적인 괭이는 나무를 가지와 함께 잘라서 가지는 자루로 하고 가지가 난 줄기 부분을 괭이의 몸통으로 깎아 거기에 말굽쇠 모양의 쇠날을 박았다.

오늘날의 괭이는 땅을 파거나 일구는 기능을 가진 괭이, 단단한 땅을 쪼아 일구는 곡괭이, 쟁기를 간 흙덩이를 부수고 골을 타거나 김을 매는데 쓰는 가짓잎괭이 · 수수잎괭이 · 삽괭이 · 긁괭이, 그리고 무논을 가는데 사용하는 화가래〈사진 1-15〉, 자갈밭을 일구는데 쓰는 벽채괭이 뿌리가 깊은 인삼이나 황기 따위를 캐는데 쓰는 약초괭이 따위가 있다. 가짓잎괭이나 수수잎괭이는 ‘괭이’라는 이름은 가졌지만 자루가 긴 호미(선호미)의 일종이다.

조선조 말 정병하(, ?∼1896)가 지은 『농정활요』에는 ‘송곳광이’ · ‘곳광이’ · ‘가래같은 광이’ · ‘장도리 같은 광이’가 있는데 이는 오늘날의 약초괭이 · 곡괭이 · 화가래 · 괭이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해동농서』에 등장하는 과  〈그림 1-12〉은 오늘날의 괭이와 가짓잎괭이와 다를 바가 없다. 예전에는 ‘광이’(『역어류해』 · 『해동농서』) · ‘광히’(『물보』)라 했고, 한자음으로는 (『하위지 유권』) · (『증보산림경제』) · (『천일록』)로 썼으며, 한문으로는 (『해동농서』 · 『물보』) · (『역어류해』)라고 적었다. 괭이로 한사람이 하루 150여 평의 밭을 일굴 수 있다.

괭이는 인류가 고대부터 사용한 농기구 중에서 가장 오래된 도구에 속한다. 농경문화의 발상과 함께 출현한 것으로 추측되며 그 발달과정과 거의 궤()를 같이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미 신석기시대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돌괭이가 발견되었고 경작을 하거나 김을 매는데 사용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당시에는 곡식을 수확하기 위해 돌낫도 함께 사용되었다. 

그 후 신석기시대가 끝날 무렵, 시베리아 ·화북() ·만주를 거쳐 청동기시대 문화가 한국에 들어왔고, BC 200년 경 화북의 주민들이 랴오둥[]을 거쳐 한반도로 들어오면서 철제()의 괭이와 낫, 따비 등을 만드는 철기문화()를 가져온 것으로 여겨진다. 1927년 발견된 평북 위원군 용연면()의 적석총()에서는 그러한 농기구들이 명도전(), 철제무기와 함께 출토되었다. 괭이는 농법의 발달과 용도에 따라 여러 가지로 변화를 거듭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유사·관련용어
광이(경기 안산·강원 도계), 깽이(경남 영산), 꽹이(전남 구례·강진·거문도), 쾡이(경기 덕적), 곽지, 괘기, 왜괭이, 가짓잎괭이, 삽괭이, 수숫잎괭이, 나무괭이, 긁괭이, 물고괭이, 보토괭이.

 

문헌

  • 『한국농기구고』(김광언, 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6)
  • 『한국의 농기구』(김광언, 문화공보부문화재관리국, 1969)
  • 빛깔 있는 책들-농기구(박대순, 대원사, 1990년)
  • 한국의 농기구(김광언, 문화재관리국, 1969년)
  • 괭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괭이 (한국의 농기구, 2001.)
  • 괭이 [hoe] (두산백과)
  • 괭이 (e뮤지엄)
  • 돌괭이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