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22일 금요일

돼지국밥,순대국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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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한국전쟁 당시 경상도 지방으로 피난온 피난민들이 먹을 것이 부족하자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돼지뼈를 이용해 설렁탕을 만들어 먹은 데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경상도에서는 남녀노소 누구나 편하게 즐기는 음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지역을 대표하는 향토 음식의 하나로 부산에는 돼지국밥 골목까지 있을 정도이다. 돼지뼈로 진하게 우려낸 육수에 돼지 수육을 넣고 밥을 말아 먹는 국밥으로 부산을 비롯한 경남 지역의 대표적 향토음식이다. 진하게 우려낸 돼지뼈 육수에 돼지고기, 고춧가루 다진 양념, 새우젓을 넣고 끓인 뒤 부추김치나 깍두기를 얹어 먹는다. 허영만 화백은 만화 『식객』에서 돼지국밥에 대해 “소 사골로 끓인 설렁탕이 잘 닦여진 길을 가는 모범생 같다면, 돼지국밥은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반항아 같은 맛이다”라고 말하였다.

 돼지국밥 애호가인 부산의 최영철 시인은 “돼지국밥을 먹으면 숨어 있던 야성이 깨어난다”고 말한다. 돼지국밥은 향신료와 내장을 상대적으로 많이 넣는 ‘대구식’, 설렁탕을 연상시키는 뽀얀 색깔의 국물로 대표되는 ‘밀양식’, 곰탕식의 맑은 국물로 대표되는 ‘부산식[신창 국밥식]’ 등으로 구분되는데, 현재는 일부 특색을 유지하는 식당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식당에서 모든 방식이 혼합되어 나타나고 있다. 

북한 지역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에 의해 북한 지역의 향토 음식이던 순대국밥이 유입되었고, 1960년대 이후 순대가 귀해져 순대를 대신하여 편육을 넣어 현재의 형태로 변형되었다는 설[1952년에 개업한 부산 돼지국밥 의 시발점 이라 할수가 있다. 

돼지고기와 무를 밑간해서 중불에 볶은 뒤, 여기에 돼지 사골[다리뼈]을 고아 낸 육수를 부어 삶는다. 뚝배기에 밥과 함께 삶은 돼지고기를 한 입 크기로 썰어[편육] 넣고, 돼지 사골 육수를 토렴(退)[밥이나 국수에 뜨거운 국물을 부었다 따랐다 하여 덥게 함]하여 고춧가루 등으로 만든 다진 양념을 넣는다. 
기호에 따라 새우젓·부추 겉절이 등을 첨가하기도 하며, 통상 반찬으로 양파·풋고추·마늘·깍두기 등을 함께 먹는다. 

소량의 소면이 사리로 들어가기도 한다.부산의 돼지국밥 음식점들은 대부분 돼지국밥[편육만 들어간], 순대국밥[편육과 순대가 들어간], 내장국밥[편육 대신 내장 부위가 들어간], 섞어국밥[편육과 내장이 들어간], 모듬국밥[편육·내장·순대 등이 모두 들어간], 수육백반[편육·국물·밥이 따로 나오는] 등의 차림을 제공하고 있다. 

돼지국밥은 밀면과 함께 부산의 대표적인 향토 음식으로 손꼽히며, 또한 피난 음식으로도 불리고 있다. 타지에서 생활하는 부산 출신 사람들이 돼지국밥이 그립다는 말을 많이 할 정도로 부산의 상징적인 향토 음식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과거 돼지국밥은 주로 ‘남성용’ 음식으로 여겨졌으나, 현재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랑을 받고 있으며, 돼지 냄새[돼지고기 특유의 누린내]를 없애기 위한 음식점들의 비법 또한 다양하게 개발되었고, 영양을 고려하여 육수를 고아 낼 때 소 사골이 들어가기도 할 정도로 계속 진화하고 있다. 

부산광역시의 돼지국밥 음식점 중 서구 토성동의 신창 국밥[2009년 지정], 북구 구포동의 덕천 고가[2009년 지정], 연제구 연산동의 경주 박가 국밥[2009년 지정] 등이 부산 향토 음식점으로 지정되어 있고 동구 범일동의 조선방직 앞과 부산진구 부전동의 서면 등지에 돼지국밥 음식점이 밀집되어 있는 이른바 ‘돼지국밥 골목’이 형성되어 있다. 

돼지고기와 무를 밑간해서 중불에 볶은 뒤, 여기에 돼지 사골[다리뼈]을 고아 낸 육수를 부어 삶는다.돼지 뼈로 우려낸 육수에 돼지고기편육과 밥을 넣어 먹는 국밥류의 요리로, 부산광역시의 향토 음식이다. 

돼지국밥의 유래에는 다양한 설이 있으나, 전쟁 중에 피난길을 전전하던 이들이 쉽게 구할 수 있는 돼지의 부속물로 끓인 데서 유래하였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본래 돼지국밥은 밀양과 부산, 대구 지역에서 각각의 방식으로 발전하여 오다가 현재는 그 세 가지 방식이 혼합된 형태에 이르렀다.지역별 특성을 살펴보면 밀양의 돼지국밥은 소뼈로 육수를 내 국물 색이 진한 것이 특징적이며, 대구의 돼지국밥은 내장과 같은 부속 부위를 다양하게 첨가한 점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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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식 돼지국밥은 돼지의 뼈로 우려내기 때문에 색이 탁하다. 세 지역 중, 돼지국밥이 대중적으로 인지도를 얻게 된 곳이 부산이어서, 돼지국밥은 부산의 향토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만드는 법은 먼저 돼지의 사골과 돼지고기를 찬물에 담가 핏물을 뺀다. 냄비에 물이 끓으면 사골을 넣어 한 번 데친 뒤 건져낸다. 

다시 냄비에 물을 붓고 대파, 양파, 후춧가루, 청주 등을 넣어 끓이다, 

사골과 돼지고기를 넣고 6시간 이상 푹 끓여낸다. 이때, 돼지고기는 삼십분 정도 끓이다 건져낸다. 

돼지고기는 편으로 썰고, 부추는 4cm 간격으로 썰어 고춧가루, 새우젓, 들깨가루와 함께 무친다. 

고춧가루, 간장, 다진 마늘, 참기름, 새우젓 등을 섞어 다진 양념을 만든다. 

그릇에 밥을 담고, 썰어놓은 돼지고기를 얹는다. 

여기에 육수를 붓고 그 위에 만들어 놓은 부추무침을 얹는다. 기호에 따라 다진 양념으로 간하거나, 새우젓이나 소금으로 간한다.

돼지고기는 육질이 연하고 부드러워 소화가 쉽고 단백질이 풍부하여 근육 형성, 체력 보강에도 도움을 주는 식품이다. 

불포화지방산이 함유되어 있어 혈관의 콜레스테롤 축적을 막아주어 동맥경화와 같은 성인병 예방에 효과적이다. 

뚝배기에 밥과 함께 삶은 돼지고기를 한 입 크기로 썰어[편육] 넣고, 돼지 사골 육수를 토렴(退)[밥이나 국수에 뜨거운 국물을 부었다 따랐다 하여 덥게 함]하여 고춧가루 등으로 만든 다진 양념을 넣는다. 

개인 취향에 따라 새우젓·부추 겉절이 등을 첨가하기도 하며, 통상 반찬으로 양파·풋고추·마늘·깍두기 등을 함께 먹는다. 

소면이 사리로 들어가기도 한다.돼지국밥은 밀면과 함께 부산의 대표적인 향토 음식으로 손꼽히며, 또한 피난 음식으로도 불리고 있다. 

타지에서 생활하는 부산 출신 사람들이 돼지국밥이 그립다는 말을 많이 할 정도로 부산의 상징적인 향토 음식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과거 돼지국밥은 주로 ‘남성용’ 음식으로 여겨졌으나, 현재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랑을 받고 있으며, 돼지 냄새[돼지고기 특유의 누린내]를 없애기 위한 음식점들의 비법 또한 다양하게 개발되었고, 영양을 고려하여 육수를 고아 낼 때 소 사골이 들어가기도 할 정도로 계속 진화하고 있다.

부산의 돼지국밥 음식점들은 대부분 돼지국밥[편육만 들어간], 순대국밥[편육과 순대가 들어간], 내장국밥[편육 대신 내장 부위가 들어간], 섞어국밥[편육과 내장이 들어간], 모듬국밥[편육·내장·순대 등이 모두 들어간], 수육백반[편육·국물·밥이 따로 나오는] 등의 차림을 제공하고 있다.

2012년 현재, 부산광역시의 돼지국밥 음식점 중 서구 토성동의 신창 국밥[2009년 지정], 북구 구포동의 덕천 고가[2009년 지정], 연제구 연산동의 경주 박가 국밥[2009년 지정] 등이 부산 향토 음식점으로 지정되어 있고 동구 범일동의 조선방직 앞과 부산진구 부전동의 서면,사상 터미널 주변 등지에 돼지국밥 음식점이 밀집되어 있는 이른바 ‘돼지국밥 골목’이 형성되어 있다.

돼지고기를 푹 삶은 국물에 건져 썬 고기, 양파, 무를 넣고 끓이다가 밥, 다진 마늘, 고춧가루, 소금을 넣어 끓인 것으로 돼지편육, 내장, 순대 등을 넣기도 한다. 
순대국밥이라고도 한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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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의 학자 이이.

이이 (李, 1536~1584) 

조선 중기의 유학자이자 정치가로 <동호문답>, <성학집요> 등의 저술을 남겼다. 현실ㆍ원리의 조화와 실공()ㆍ실효()를 강조하는 철학사상을 제시했으며, <동호문답>ㆍ<만언봉사>ㆍ<시무육조> 등을 통해 조선 사회의 제도 개혁을 주장했다. 우리나라의 18대 명현() 가운데 한 명으로 문묘()에 배향되어 있다.이미지 크게보기
출생-사망1536 ~ 1584
본관덕수
숙헌
율곡·석담
시호문성
활동분야정치
출생지강원도 강릉

본관은 덕수(), 자는 숙헌(), 호는 율곡()·석담()·우재()이다. 1536년(중종 31) 음력 12월 26일에 사헌부 감찰을 지낸 이원수()와 사임당() 신씨()의 셋째 아들로 외가가 있던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1548년(명종 3) 진사시에 13세의 나이로 합격했으며, 조광조의 문인인 휴암() 백인걸()에게 학문을 배웠다. 1554년 금강산 마하연()으로 들어가 불교를 공부했으나, 이듬해 하산하여 외가인 강릉으로 돌아와 자경문()을 짓고 다시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자경문은 입지()·과언() 등 11개의 조항으로 되어 있는데,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세운 것이다.
22세(1557년)에 성주목사(使) 노경린()의 딸과 혼인하였고, 이듬해 예안()에 낙향해 있던 이황()을 찾아가 성리학에 관한 논변을 나누었다. 1558년(명종 13) 별시()에서 천문·기상의 순행과 이변 등에 대해 논한 천도책()을 지어 장원으로 급제했으며, 1564년(명종 19년)에 실시된 대과()에서 문과()의 초시()·복시()·전시(殿)에 모두 장원으로 합격하여 삼장장원()으로 불렸다. 생원시()·진사시()를 포함해 응시한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으로 합격하여 사람들에게 구도장원공()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대과에 급제한 1564년에 정6품 호조(좌랑()으로 관직에 나선 뒤에 예조()와 이조()의 좌랑을 거쳐 왕에 대한 간쟁과 논박을 담당하던 사간원() 정언()과 사헌부() 지평() 등의 대간()의 직위에 있었다. 1568년(선조 1)에는 천추사(使)의 서장관()으로 명() 나라에 다녀왔으며, 1569년 홍문관() 부교리()로서 역사의 기록과 편찬을 담당하던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여 <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다. 또한 정철()과 함께 경세제민()의 사회개혁안에 대해 논한 <동호문답()>을 써서 선조에게 바쳤다.
1570년(선조 3년)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황해도 해주()에서 학문에 전념했다. 1571년 청주목사로 다시 관직에 올랐으나 이듬해 관직에서 물러나 해주로 낙향했다가 파주 율곡촌()으로 거처를 옮겼다. 1573년(선조 6)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아 승정원()의 동부승지()·우부승지()를 역임했으며, 1574년(선조 7) 당시의 사회문제들에 대한 구체적인 대책을 논한 <만언봉사()>를 써서 선조에게 바쳤다. 그해 사간원 대사간()으로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낙향하였다. 하지만 다시 황해도 관찰사가 되어 관직에 올랐고, 그 뒤 대사헌(), 홍문관 부제학() 등을 역임했다.
율곡이이의 영정
율곡이이의 영정,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던 1575년(선조 8) 선조에게 제왕학()의 지침서인 <성학집요()>를 저술하여 제출하였고, 1577년(선조 10)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해주로 낙향하여 어린이 교육을 위해 <격몽요결()>을 편찬했으며, 1580년에는 <기자실기()>를 저술했다. 이 무렵 해주 석담()에 은병정사()를 건립하여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향약과 사창()을 실시하기도 했다.
1581년 대사헌과 예문관() 제학()을 겸임하며 다시 관직에 올라, 동지중추부사(使)를 거쳐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지냈다. 1582년에 이조판서, 1583년에 병조판서가 되어 선조에게 <시무육조()>를 바치며 십만양병설 등의 개혁안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쟁을 조장한다는 동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이후 다시 이조판서와 판돈령부사() 등으로 임명되었다. 1584년 음력 1월 16일에 49세의 나이로 서울 대사동()에서 죽었다. 죽은 뒤에는 파주 자운산의 선영에 묻혔으며, 1624년(인조 2)에 문성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파주의 자운서원(), 강릉의 송담서원(), 풍덕의 구암서원(), 황주의 백록동서원(鹿) 등 전국 20여 개 서원에 배향되었으며, 1682년(숙종 8)에는 성혼()과 함께 공자()를 섬기는 문묘()에 우리나라의 명현()으로 배향되었다.
저술로는 <성학집요()>, <동호문답()>, <경연일기()>, <천도책()>, <역수책()>, <문식책()>, <격몽요결()>, <만언봉사()>, <학교모범()>, <육조계()>, <시폐칠조책()>, <답성호원서()> 등이 있으며, ‘고산구곡가()’ 등의 문학 작품도 전해진다. 그의 저술들은 1611년(광해군 3) 박여룡()과 성혼() 등이 간행한 <율곡문집()>과 1742년(영조 18)에 이재()와 이진오() 등이 편찬한 <율곡전서()>에 실려 전해진다.
이이 연보
출생 1536~ 사망 1584
1536
사헌부 감찰을 지낸 이원수와 사임당 신씨의 아들로 강원도 강릉에서 출생.
1548
13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
1554
금강산 마하연에서 불교를 공부.
1558
별시에서 천도책을 지어 장원으로 급제.
1564
정6품 호조 좌랑으로 관식에 나섦.
1569
홍문관 부교리로서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여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
1570
관직에서 물러나 황해도 해주로 가 학문에 전념.
1573
왕의 부름으로 승정원 동부승지와 우부승지를 지냄.
1581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지냄.
1583
병조판서로서 선조에게 <시무육조>를 바침.
1584
한양 대사동에서 사망.
이이는 현재 우리와 일상생활에서 항상 호흡을 같이하고 있지 않는가! 애환과 시비가 교차되는 화폐 속 인물로써 말이다. 그는 임진왜란 이전 국방력 강화를 위해 10만양병설을 주장하였던 선각자였다.또한 어려서는 신동으로 성장한뒤 에는 모두 9번의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구도장원공()이라 불리며 그 우수함과 뛰어남이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또한 주기설을 주창하며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대유학자로서, 근엄하고 단아한 풍모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이이는 1536년(중종 31) 강릉 외가에서 태어났다. 오늘날 강릉의 명소로 꼽히는 오죽헌의 몽룡실이 바로 그곳이라 한다. 오죽헌은 모친인 신사임당이 거주하던 집이었다. 신사임당은 이이의 부친인 이원수와 혼인하고서도 37살 되던 해 집안 살림을 맡아 하기 전까지는 서울의 시가보다는 친정에서 주로 살았다. 이런 풍습은 16세기까지 우리나라의 보편적 결혼 풍속과 관련된 것으로 당시까지는 남자가 여자 집에 가서 혼인하여 자식을 낳고 이내 계속 생활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를 남귀여가혼()이라고도 한다. 
이이가 6살 때까지 강릉 오죽헌에서 생활하게 된 것은 이런 까닭이었다.강릉에서 외조모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생활하던 이이는 6살 때 서울 본가로 왔다. 본래 이이 집안은 파주에 선산과 함께 화석정() 등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조부가 벼슬을 하지 못했고 부친 또한 낮은 관직을 전전긍긍한 이유로 넉넉한 가정형편은 아니었다. 물론 집안이 구차하였다고 하여 이이의 가문이 한미했던 것은 아니었다. 
개성 밑 덕수를 본관으로 하는 이이 가문은 16세기에 크게 일어나서,훈척적 성향을 보이던 이이의 가문은 그러나 서서히 사림계열로 전환하였다. 이이 스스로 지적하듯이 “마음 속으로는 요순시대를 그리워하고 몸으로는 유학의 실행에 힘쓰며 항상 바른 말”을 하는 사림이 되었다. 그런 이이에게도 정신적 방황기가 있었다. 모친을 여읜 후 한 때 불교에 깊이 빠져 입산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정신적 갈등과 방황은 이이에게 인간적인 성숙과 함께 단지 경전을 들추거나 시 구절을 짓는 데에 머물게 하지 않고 장차 국가를 경영할 통유()로서의 자기 수련과 경륜을 쌓게 하는 토대가 되었다. 
이이 증조부의 6형제 중 이의무의 아들 이행과 이기가 각기 중종 명종 때 좌의정과 영의정을 지냈으며 그 아들들이 청요직에 진출한 것이다. 물론 이들은 이 시기에 새로이 대두하던 사림들과는 정치성향을 달리하여서 이행의 경우 언로를 막는다 하여 조광조로부터 탄핵을 받았고, 특히 이기는 명종 초외척 윤원형과 결탁하여 을사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그들은 흔히 말하는 훈척계였다.
예안의 도산으로 퇴계 이황을 찾아가 도학적 분위기에 고무되고 평생의 지기 우계 성혼과 함께 성리설의 탐구에 마음껏 몰두한 것이 바로 이때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관직에 나가서 그가 펼쳤던 경세론이 이 기간에 형성될 수 있었다. 
그의 향리인 파주에는 명종초 을사사화로 죄를 입었다가 귀양에서 풀려난 백인걸이 살고 있었다. 
이이는 원로인 백인걸을 존경하여 자주 찾아보고 성리설 등의 학문을 논하였다. 백인걸은 정암 조광조의 으뜸가는 문인으로서 스승의 추숭과 그 주장의 계승, 실현에 앞장선 인물이었다. 따라서 이이는 이런 백인걸을 통해 소문으로만 듣던 정암의 인물 됨을 알게 되고 그 도학정치론의 핵심에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이는 선조 초반부터 자신의 경장론을 담은 [동호문답]이나 [만언봉사] 등의 시무 관련 상 소를 계속 올려 임금의 자질과 당대 정치의 폐단을 극론하고 경장을 위한 대책 을 제시하였다. 
1575년(선조 8)에는 유교적 이상을 담은 제왕의 정치 교 과서인 [성학집요]를 편찬해서 임금에게 올렸다.관직 생활은 약 20여 년간 이 었다. 이 기간 동안 이이는 당시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모순과 폐단의 변통을 주장 하 였다. 이러한 주장은 이이가 자신이 살던 시대를 조선이 건국된 지 200여 년이 되었으므로 중간 쇠퇴기로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였다. 
이이는 아무리 좋고 튼튼 하게 지은 건물이라도 세월이 흐르다 보면 상한 곳이 생기고 집이 기울게 마련 이듯이 나라도 시대가 달라지면 처음에 만든 제도의 결함이 하나 둘 나타 나기 시작하여 마침내 국가 전체가 무너질 위기를 맞는다고 하였다.  
오래 된 집을 유지하려면 유능한 기술자를 시켜 기둥을 갈고 수리해야 하듯 같은 이 유로 국가도 달라진 시대에 맞게끔 제도를 고쳐야 하며 바로 이것 이 경장()이라는 것이었다. 
더욱 이이 생존 당시 조선은 국가와 백성이 마치 큰 병을 앓고 있는 사람과 같이 원기가 모두 쇠진하고 겨우 숨만 붙어 있는 정도 라며 이러한 때 외국으로부터 침략을 당하거나 혹시 백성 가운데 반란이라도 일어난다면 나라는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만다는 것이다경장은 바로 이런 환자 에게 원기를 북돋우게 하는 영약이었다.
경장에 소극적이고 옛 제도 의 묵수를 바라는 쪽인 대신들의 의견을 외면하지 못하는 임금 선조를 자기 쪽으로 돌리게 하는 회천()을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었다.   이이의 경장론이 당시 에 적용 되기는 쉽지 않았다.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느니 차라리 경장이라도 하자”며 분발하여 경 장에 매진할 것을 역설하였다.서인측 심의겸은 외척이면서도 이전에 사 림을 보호한 공이 있고, 동인측 김효원은 명류()을 끌어들여 조정을 청명하게 한 공이 있어 양시()라는 것이다.  
심의겸은 외척 으 로서의 행동을 조심하지 못하고 정치에 관여하는 잘못을 저질렀고. 김효 원은 유생신분으로서 한때 권간(, 윤원형을 지칭함)의 집에 출입 하 였던 허물이 있으니 이를 양비()라고 하였다. 
이이가 양시 양비 론으로 분쟁이 종식되리라 생각 하지는 않았다. 단, 소모적인 정쟁으로 인해 국가적 현안 문제가 논의 조차 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타개책이었던 것이었다.당시와 같이 사림이 동인과 서인이 분열된 상황에서 경장은 더 욱 바랄 수 없는 상황 이었다. 
이이는 당쟁을 종식시키는 것이 급선 무라고 판단, 이를 위한 방안 으로 동인과 서인의 명목을 타파하고, 이를 바탕으로 조제보합(調)하자고 호소하였다. 분열된 사림의 결속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한 현실은 이이가 기대한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 여서, 오히려 동인과 서인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이는 동·서 갈등의 당사자인심의겸김효원에 대해서 양시양비론()을 제 기 하여 이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경장론이 이같이 점진적이지만, 그것 조차도 그의 생전에 실현되지 못하였다. 오히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진 가가 제대로 발휘되었다. 당면한 국난 극복을 위해서는 어떠한 형태 로든 대책 마련이 요구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이의 경장론과 다양한 변통 책은 비로소 진지한 검토의 대상이 되어 당국자들의 손을 거쳐 국가 재건 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어려서는 신동으로, 성장한 뒤에는 9번의 과거에 장원급제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이이는 당시 사회를 큰 병을 앓고 있는 사회로 진단하며 여러 부면에서 경장론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경장을 위해서는 국론 통일이 필요하다고 하며 조제보합론을 주장하였다. 한국 역사상 위대한 많은 인물들이 있지만 그 가운데 이이만큼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도 많지 않다. 대개 어릴 때부터 접하는 각종의 한국 위인전에서 시작해 긴 시간의 학창 생활을 보내면서 교과서와 각종 매체를 통해 그 인물과 활동, 그리고 사상 등에 관해 듣고 배우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조정에 만연되어 있는 무사안 일주의의 인습 으로 관리들은 보신에 급급하여 혹시나 남의 비난을 받을까 눈치나 보고, 혹은 변통하자는 말이라도 나오면 임금의 뜻을 돌리기가 어렵다는 구실을 내세워 운명 탓으로 돌릴 뿐 어떻게 해보려는 마음조차 먹지 않기 때문 이었다. 여기에 더해 그동안 악습에 편승해 사리사욕을 채워왔던 소 인배 들이 경장을 하게 되면 그 이익을 잃게 되므로 한사코 방해하려 하기 때문이 라는 것이다. 

참조항목


출처 ^ 참고문헌,
[네이버 지식백과] 이이 [李珥]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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