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28일 토요일

광개토대왕.

광개토대왕"
이름은 담덕()이고 고국양왕의 아들이다. 완전한 묘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다. 이를 줄여서 광개토태왕(), 호태왕()으로 부르기도 하나, 일반적으로 광개토대왕()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재위 시의 칭호는 영락대왕()이었는데, '영락()'은 우리나라에서 사용된 최초의 연호로 알려져 있다. 최대의 영토를 확장한 정복 군주로서 완전한 묘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다. 이를 줄여서 광개토태왕()으로 부르기도 하나, 일반적으로 광개토대왕()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재위시의 칭호는 영락대왕()이었는데, '영락()'은 한국에서 사용된 최초의 연호로 알려져 있다.
 광개토대왕(王), 374~412, 재위 391∼412)은 18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이 갖추어준 바탕에서 대정복 전쟁을 수행하였다. 
국경 북쪽으로 연 나라와 남쪽으로 백제 그리고 바다 건너 일본에까지 고구려의 튼튼한 힘을 과시하며 자신의 지경을 넓혔으며, 숙신과 동부여마저 그 위력 앞에 떨게 하였다. 그가 이룬 최강 고구려는 아들 장수왕에 이르러 절정을 치닫는데, 그 같은고구려의 화려한 면면은 광개토왕비의 비문으로 남아 오늘날 우리에게 여실히 전해진다. 
39년의 짧은 생애 동안 그가 이룩한 이 공적은 서양의 정복왕 알렉산드로스와도 비견되는 우리 민족의 자랑이다. 고구려 19대 왕(재위 391∼413). 소수림왕의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영토를 확장한 정복 군주이다. 한국 최초의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동예를 통합하고 동부여를 정벌하였다. 
“왕의 은택이 하늘까지 미쳤고, 위엄은 온 세상에 떨쳤다.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자 백성이 모두 생업에 힘쓰고 편안하게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풍족해졌으며, 온갖 곡식이 가득 익었다. 그런데 하늘이 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나 보다. 39세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었다.” 

광개토대왕비문" 
고구려의 탄탄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영토를 확장하였으며 신라를 도와 왜의 침입을 물리쳤어요. 384년 소수림왕이 죽자 왕위계승 1순위자인 소수림왕의 동생 이연이 왕위에 올라 고국양왕이 되었다. 이제 11살이 된 담덕은 왕자로 신분이 바뀌었다. 이때부터 담덕은 자신이 다음번 왕이 될 존재임을 자각하면서 더욱 학문에 힘쓰고 높은 이상을 꿈꾸면서 성장했을 것이다. 
고국양왕은 재위 3년째인 386년 13살의 담덕을 태자로 삼았다. 고구려에서 왕이 태자를 삼는 나이는 대체로 성인의 대접을 받기 시작하는 15세를 전후로 한다. 고국양왕이 담덕을 그보다 일찍 태자로 책봉한 것은 그가 나이에 비해 성숙하고 재주가 남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담덕은 태자시절에 직접 군대를 지휘하여 백제, 후연과의 전쟁에 참여하여 용병술을 익혔다. 그의 용맹과 지략은 백제를 비롯한 이웃나라에게도 알려졌다. 그가 왕위에 오른 다음해에 백제를 공격하러 직접 출정했을 때에 백제의 진사왕은 그의 용병술이 뛰어남을 알고 감히 대적하지도 못했다. 이때 담덕의 나이가 19세였으니 그가 10대 태자시절에 얼마나 많은 전공()을 쌓았는가를 짐작할 수 있겠다. 
391년 18살의 나이로 고국양왕의 뒤를 이어서 고구려 제19대 왕위에 올랐다. 그가 곧 고구려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광개토대왕인 것이다. 광개토대왕은 4세기 말에 등장합니다. 이름 그대로 엄청나게 영토를 확장한 왕이에요.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 영토를 개척했기 때문에 대왕 혹은, 태왕이라는 호칭으로 부릅니다.
<태왕사신기> 드라마에서 태왕이 광개토대왕 입니다.  
광개토대왕은 우리나라 최초로 연호를 썼어요. 연호는 해()의 이름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우리는 지금 서기(기원 후) 2015년에 살고 있죠. 예수 탄생 이후를 서기라고 하는데 서양식 구분이라고 할 수 있어요. 예전에는 해를 구분할 때 연호를 썼어요. 
연호란 왕이 새롭게 왕위에 올랐을 때 자신이 다스리기 시작한 해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지요. 고구려가 고구려만의 연호를 사용했다는 말은 그만큼 고구려의 동북아시아에서 위치가 높았음을 의미해요.연호는 왕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본인들이 만약에 2015년에 왕이 되면 제 이름을 따서 올해부터 ‘다지 1년’이 됩니다. 그러다 왕이 바뀌면 다시 그 왕의 이름을 따라 ‘○○ 1년’이 되는 거죠. 우리는 고유의 연호를 사용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바로 중국 때문이죠. 옛날에는 중국을 큰형님으로 대접해줬기 때문에 우리가 중국과 똑같이 연호를 사용하면 중국에서 버릇없다면서 시비를 툭툭 걸었어요. 그래서 독자적인 연호보다는 중국의 연호를 따서 썼습니다. 그러니까 중국에서 황제가 바뀌면 우리나라는 왕이 바뀌지 않았는 데도 해의 이름이 바뀌었으며, 광개토대왕처럼 중국의 것을 안 따르고 독자적인 연호를 썼던 시기가 있습니다. 다른 시기보다 더 국력이 강하고 자주성이 강했던 시기들이죠. 광개토대왕의 연호는 영락이었어요. 영원한(영) 즐거움(락)이란 뜻인데, 정말 저 이름처럼 살고 싶네요. 
광개토대왕은 즉위하자마자 대대적인 정복사업을 했어요. 먼저 누구부터 쳤을까? 고구려의 철천지원수! 백제였죠. 전통의 라이벌이자 숙적인 백제를 공격해서 한강 이북을 차지했습니다. 다음이 만주 지방으로 진출해서 여러 민족을 복속시켰습니다. 정말 대단하지요? 광개토대왕 하면 여러분들 머릿속엔 아마 강인하고 중후한 무장이 떠오를 거예요. 하지만 광개토대왕이 이렇게 화려하게 만주 벌판을 호령했던 나이는 겨우 18살이었습니다. 
역사 속에서 18살은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는 나이입니다. 3 · 15 부정선거 규탄을 하다 최루탄에 맞고 사망해 4 · 19혁명의 도화선이 된 김주열의 나이가 몇 살인지 아시나요? 겨우, 17살이었습니다. 3 · 1운동 이후 최대 독립만세운동인 광주학생항일운동의 불씨가 된 학생운동을 이끈 박준채의 나이는 당시 15살이었어요. 
광개토 대왕이 왕위에 올랐을 당시 중국의 상황은 좋지 않았어요. 많은 나라들이 생겼다가 무너지는 혼란기였죠. 광개토 대왕은 이런 상황을 틈타 곳곳으로 정복 활동을 떠났습니다. 북쪽으로는 만주를 공략했다면 남쪽으로는 신라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는 고구려의 공격에 화가 난 백제가 왜와 가야를 끌어들여 만만한 신라를 공격했던 거예요. 당시 고구려와 신라 그리고 백제와 가야의 관계는 ‘광개토대왕릉비문’ 속에 아주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왕이라고 다 같은 왕이 아니다. 왕 중의 왕이 있다. 
우리 역사에서는 그 왕중의 왕이 고구려의 제19대 광개토대왕이다. 공적만큼이나 그 생애를 적은 비석 또한 널리 알려져 있다. 어쩌면 [삼국사기] 같은 역사서에 남은 내용보다도 더 풍부할 뿐만 아니라 그 글도 웅혼하다. 바로 지금 중국 땅 집안()에 서 있는 ‘광개토대왕비’이다. 그래서 그를 비석으로 남은 왕이라 불러 이상하지 않다. 
광개토 대왕은 북쪽으로 진출하기로 하고, 선비족 국가인 ‘후연’과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 결과 중국의 동북 지역인 만주를 지배하게 됩니다. 이밖에 고구려의 북쪽에 위치한 거란, 숙신, 동부여 지역을 차례대로 정복해 영토를 넓혔어요. 
광개토 대왕의 군대가 신라의 요청으로 활약한 이후, 고구려는 신라에 많은 영향을 끼쳤어요. 이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호우명 그릇’이에요. 청동으로 만들어진 호우명 그릇 바닥에는 ‘광개토지호태왕’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요. 광개토 대왕에 대한 감사한 마음으로 새긴 것이라고 볼수 있읍니다. 신라가 고구려의 영향권 아래 있었음을 보여주는 유물이에요. 고구려의 국력이 최고조에 달한 이때, 자신감으로 가득 찬 사회분위기와 고양된 역사의식이 깔려 있으리라는 점도 첨부된다. 사실 그러다보니 초안을 중국의 문장가에게 보여 윤문하였으리라는 추측까지 나올 정도이다. 나아가 비문의 글씨에 매료되는 사람도 있다. 
서예가 김응현 선생은 이 비문의 글씨를 모방하여 새로운 자기 서체를 개발했는데, 흔히 ‘호태왕비체’라 부른다. 호태왕은 광개토대왕을 줄여 부르는 이름이다.오늘날 연구자들은 아마도 5세기 무렵 고구려 당대의 최고 문장가가 온갖 심혈을 기울여 지은 문장일 것이라고 말한다. 이 비는 장수왕 3년(414년)에 세워졌다. 광개토대왕이 죽고 2년 뒤의 일이었다. 비석의 높이는 6.39미터, 글자는 모두 1,775자 정도 되는데, 이 가운데 150여 자는 판독이 되지 않는다. 
일찍이 역사학자 민영규 선생은, “무서운 문장력이다. 어느 한 구절, 전후 사방으로 치밀하게 그 역학관계가 계산되지 않은 구석이 없다.”라고 칭송하였다. 고구려의 국력이 최고조에 달한 이때, 자신감으로 가득 찬 사회분위기와 고양된 역사의식이 깔려 있으리라는 점도 첨부된다. 사실 그러다보니 초안을 중국의 문장가에게 보여 윤문하였으리라는 추측까지 나올 정도이다. 나아가 비문의 글씨에 매료되는 사람도 있다. 서예가 김응현 선생은 이 비문의 글씨를 모방하여 새로운 자기 서체를 개발했는데, 흔히 ‘호태왕비체’라 부른다. 
호태왕은 광개토대왕을 줄여 부르는 이름이다. 광개토대왕은 18세에 왕의 자리에 올라, 그 은택이 하늘까지 미쳤을 뿐만 아니라, 위엄은 온 세상에 떨쳤다고, 비문은 한껏 대왕을 칭송하고 있다. 그런데 “하늘이 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않아, 39세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었다.”며 안타까워한다. 흥미롭기로는 광개토대왕의 비문이 동명성왕 주몽의 탄생 담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연재 2회 고주몽 편을 보기 바람) 비문을 지은 이가 주몽을 ‘천제의 아들’이라 부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다 보면, 광개토대왕도 천제의 자손임에 결코 부족함이 없음을 강조하려 한 뜻을 곧장 알아차리게 된다. 이때까지의 후손 가운데 특히 그렇다는 말이기도 할 게다. 광개토대왕이 살아서 쓴 영락대왕이라는 이름을 알려주는 것도 비석에서이다. 그러면서 이 비석의 첫 부분에는 매우 감격적으로 그의 일생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정리해 주었다. 왕의 은택이 하늘까지 미쳤고, 위엄은 온 세상에 떨쳤다.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자 백성이 모두 생업에 힘쓰고 편안하게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풍족해졌으며, 온갖 곡식이 가득 익었다. 그런데 하늘이 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나 보다. 39세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었다. 
386년(고국양왕 3)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391년 고국양왕 사후에 즉위하였다. 즉위 초부터 대방()을 탈환하고자 백제의 북쪽을 공격하여 석현() 등 10성을 함락하였고, 396년(광개토왕 6)에는 친히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여 58성을 차지하였으며, 왕제()와 대신 10인을 볼모로 삼아 개선하였다. 이리하여 한강 이북과 예성강 이동의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400년에는 신라 내물왕의 요청으로 5만의 원군을 보내어 왜구를 격퇴시켰으며, 동예()를 통합하고(410), 신라와는 하슬라()를 경계로 삼았다. 또 연()나라의 모용희()를 반격하여 신성()·남소()의 2성 등 700여 리의 땅을 탈취하였고, 405∼406년 후연()의 모용희의 침입을 2번 받았으나 요동성()과 목저성()에서 모두 격퇴하였다. 
407년 모용희를 죽이고 자립한 고운()과는 수교를 맺기도 하였다. 410년에는 동부여()를 정벌하여 64성을 공파함으로써 동부여가 고구려의 판도 안에 들게 되었다. 또한 남하하여 한강선까지 진출하였으며, 서쪽으로 후연을 격파하고 요동지역을 확보함으로써 만주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였다. 능은 소재 미상이나 414년 장수왕이 중국 지린성[] 지안현[] 퉁거우[]에 건립한 광개토대왕릉비에 업적이 기록되어 있다. 
영락 9년에서, 영락은 광개토대왕의 연호입니다. ‘백잔’이라는 단어에서 당시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가 매우 안 좋았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잔’은 지금으로 치면 아주 심한 욕이거든요. 굳이 번역한다면 ‘백제 쓰레기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아마 백제는 고구려로부터 일본(왜)과 친하게 지내지 말라는 경고를 들었는데 그걸 어기고 자꾸 어울리니까 광개토대왕이 이걸 감시했던 거죠. 
왕의 은택과 위엄, 부강하고 풍족한 나라를 이렇게 간명하게 쓰기란 쉽지 않다. 더욱이 이때는 서기 5세기 초이다. 한문의 쓰임이 그다지 자유롭거나 널리 퍼져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 문장에서 마지막의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었다’의 원문은 ‘안가기국()’이다. 여기서 안가()를 직역하면 ‘임금의 수레가 늦는다’고 하게 되는데, 왕의 죽음에 붙이는 무척 높은 수준의 말 꾸밈이다. 이런 문장구사력은 우연의 소산이 아니다. 당대 고구려의 문명이 국력의 신장과 함께 이렇게 올라와 있었음을 증언하는 것이다. 
광개토대왕비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다음의 짧은 문장이다. 백제와 신라는 옛적부터 고구려에 조공을 바쳐왔다. 신묘년에 왜 나라가 쳐들어오자, 고구려는 바다를 건너가 왜를 쳐부쉈다. 그런데 백제가 왜와 (연합하여 신라로 쳐들어가) 그들의 백성으로 삼으려 했다. 6년 곧 병신년에 왕이 몸소 군대를 이끌고 백제를 토벌했다. 이를 원문으로 보면 모두 44자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 3자가 지워져 있다. ‘백잔□□□라(□□□)’라는 부분이다. 세 글자를 복원하여 번역하면 위의 인용에서 괄호 친 부분이 된다. 백잔()은 백제를 낮추어 부른 말이고, 마지막 라()는 그 앞에 신()을 넣어 신라가 된다. 그리고 나머지 두 자는 연()과 침()이다. 그래서 ‘연합하여 신라를 쳤다’고 번역하는 것이다. 이렇게 세 글자를 처음으로 채워 넣은 이는 정인보 선생이었다. 그렇다면 이를 두고 무엇 때문에 논란이 되었다는 것일까. 
일제강점기에 일본 학자들은, “신묘년에 왜 나라가 쳐들어오자, 고구려는 바다를 건너가 왜를 쳐부쉈다. 그런데 백제가 왜와 (연합하여 신라로 쳐들어가) 그들의 백성으로 삼으려 했다.”는 대목을 세 글자가 없는 상태에서, “신묘년에 왜 나라가 바다를 건너 백제와 신라를 치고 백성으로 삼았다.”라고 번역하였다. 이것은 곧 이 무렵 일본이 김해 지역을 식민 통치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입증하려는 저들의 조급함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면서 지워진 세 글자를 제멋대로 ‘백제와 신라’라고 보았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자신이 즉위하던 해인 신묘년, 곧 391년에 왜 나라와의 해상전에서 이겼다. 그런데 왜 나라와 가까운 백제가 그들과 연합하여 신라를 쳤다. 그러자 광개토대왕 6년, 곧 병신년(396)에 신라를 돕기 위해 몸소 군대를 이끌고 가 토벌했다. 
[삼국사기]에 나오지 않는, 고구려와 일본 그리고 백제와 신라 사이의 숨 막히는 외교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다 보니 사라진 세 글자를 놓고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일본이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잘 훈련된 군인을 보내 비문에서 이 세 글자를 없애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소문으로만 떠도는 이야기이고, 소문이 어찌됐건 정인보 같은 눈 밝은 학자에 의해 본디 글자가 복원되어, 지금 학계에서는 더 이상 이론이 없는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광개토대왕이 태어난 해는 소수림왕 4년, 곧 374년이었다. 소수림왕은 광개토대왕의 큰아버지인데, 자타가 공인하듯 초기 고구려를 반석에 올려놓은 왕이다. 
소수림왕이 아들 없이 죽자 동생인 고국양왕이 왕위에 올랐으며, 이 왕 3년 곧 386년에 12세의 나이로 광개토대왕은 태자가 되었다. ‘나면서부터 허우대가 컸으며 뛰어나고 활달한 뜻이 있었다.’고 [삼국사기]는 전하여 준다. 왕 9년 이후에는 후연과의 분쟁이 끊이질 않았다. 이때 후연의 왕은 모용성()이었는데, 처음에는 우세한 군사력으로 고구려를 압박하였으나, 고구려는 왕 11년 이후 전세를 가다듬고 착실한 공격 작전을 펴 점차 주도권을 잡아 나갔다. 
왕 14년, 모용성을 이어 후연의 왕이 된 모용희()가 요동으로 쳐들어왔을 때는 성이 함락 당하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으나, 끝내 성을 내주지 않고 지켜냈다. 이 일 이후 모용희는 백성의 신임을 잃고 살해되어 후연이 망했으며, 뒤를 이어 모용운()이 북연()을 세우자 비로소 화친의 관계를 맺었다. 그야말로 고구려의 끈질긴 힘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광개토대왕은 즉위 18년, 곧 408년에 왕자 거련()을 태자로 삼았다. 나중에 장수왕이 되는 바로 그이이다. 사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라 광개토대왕의 시대를 이렇게만 정리해 놓고 보면 다소 심심하다. 대국의 건설자가 겨우 백제와 후연과만 싸우다 일생을 마쳤단 말일까? 여기서 우리는 다시 광개토대왕비로 돌아가야 한다. 숙신과 동부여를 친 일도 역시 대왕비에서만 나오는 사적이다.
“영락 8년, 곧 무술년(398년)에 숙신을 쳐서 항복을 받고, 남녀 3백여 명을 잡아왔다. 이후로 숙신은 고구려에 조공을 바쳤다.”는 대목은 숙신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또한, “영락 20년, 곧 경술년(410년)이었다. 동부여는 옛적에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여 고구려에 조공을 하지 않았다. 왕이 몸소 군대를 끌고 가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부여성에 이르자, 동부여의 온 나라가 놀라 두려워하며 (항복하였다.) 왕의 은덕이 동부여의 모든 곳에 두루 미치게 되었다. 이에 개선하였다.”는 대목은 동부여에 대해 알려주는 기록이다. 광개토대왕의 사적을 적고 있는 [삼국사기]에는 왕의 활약이 크게 두 방향에서 적혀졌다. 하나는 백제와의 치열한 영토전쟁이었고, 다른 하나는 중국 후연()과의 분쟁이었다. 즉위하자마자 백제의 10개 성을 쳐서 빼앗았고, 왕 4년까지 매년 백제와 크고 작은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한반도의 한강 이남까지 고구려의 영토를 늘렸다. 
광개토대왕비가 전해주는 영락대왕의 빛나는 업적은 이뿐만이 아니다. 고구려가 백제와의 싸움에서 이기며 영토를 넓혀 간 사실은 이미 [삼국사기]에도 여러 차례 나왔다. 비문에서도 이 같은 사실은 여러 군데에서 보이는데, 이 밖에도 백제와 왜가 연합하여 신라를 괴롭히고, 이에 대해 끊임없이 대왕이 신라에 구원의 손길을 뻗쳐준 일이 적잖이 기록되었다. 앞서 소개한 396년의 싸움 외에, 바로 3년 뒤, 신라의 왕은 고구려에 긴급히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때 신라의 왕이라면 내물왕이다. 그러자 “왕은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기고,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왕의 계획을 돌아가 알리게 하였다. 다음 해, 곧 경자년(400년)에 왕이 보병과 기병을 합쳐 5만 명을 보내 신라를 구하게 하였다. 신라에 이르자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고구려군을 보자 멀리 물러났다.”고 비문에서는 적고 있다. 이는 [삼국사기]에 나오지 않는 기록이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왜 자신의 이름을 영락()이라 지었을까? 비문의 마지막에는 이런 일화가 나오고 있어, 그 까닭을 짐작하게 해 준다. 곧 그때까지 고구려에서는 왕릉에도 비석을 세우지 않고 있었다. 당연히 섞갈릴 수밖에 없었겠다. 벌써 열여덟 분의 왕릉이 자리 잡을 즈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은 선조 왕들을 위해 묘 앞에 비석을 세우고, 지키는 이를 기록하여 착오가 없도록 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규정을 만들었다. “묘를 지키는 이는 이제부터 서로 팔아 넘겨서는 안 되고, 부유한 이라 할지라도 또한 함부로 사들여서는 안 된다. 만약 이 법령을 위반한 자가 있으면, 판 자는 형벌을 받을 것이고, 산 자는 자신이 묘를 지키도록 하라.” 열아홉 번째 왕으로, 영토는 넓어질 만큼 넓어졌고 나라의 기강도 세워졌으니 이제 중요한 것은 영원히 이 영화를 누리고 지키는 일이다. 
조상의 이름을 기억하면서 이 나라를 대대로 크고 부강하게 이어나가자는 뜻이 광개토대왕의 이름 ‘영락’에는 들어있지 않았을까. 그가 죽은 후 고구려 사람들이 그를 부른 정식 명칭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다. 이 말은 ‘국강상 지역 무덤에 계시는 넓은 영토를 개척하시고 나라를 평안하게 하셨던 사랑스런 큰 임금님’이라는 뜻이다. 그의 업적이 넓은 영토의 개척에 있었음은 분명하지만, 고구려 사람들은 그를 영토를 넓혀 준 임금일 뿐만 아니라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준 좋은 위대한 임금님으로 기억했던 것이다. 
광개토대왕의 할아버지는 고국원왕이다. 그는 광개토대왕이 태어나기 전인 371년 백제의 영웅 근초고왕과 평양에서 싸우다가 화살을 맞고 죽었다. 전쟁중에 왕이 죽은 이 사건은 고구려인에게는 최고의 수치였다. 미천왕이 개척했던 황해도 지역 또한 백제에게 빼앗겼기에 고구려인들이 백제에게 가진 원한은 깊었다. 
“아버님의 원수인 백제. 백제에 맺힌 한을 내가 반드시 풀고야 말리라.” 그의 아들 소수림왕은 이러한 결심을 했을 것이다. 그 때문인지 소수림왕은 375년과 376년, 377년 연이어 백제를 공격했다. 이때는 담덕이 태어난 직후였다. 처음 말을 배우고 사물에 대한 이해를 갖게 될 때에 담덕이 본 것은 고구려 군대가 백제를 공격하러 가는 장면들이었다. 어린 담덕에게 고구려가 반드시 극복해야 할 적이 백제라는 사실은 뇌리에 깊이 각인될 수밖에 없었다.
담덕은 고국원왕의 비극에 대해서는 큰아버지인 소수림왕과 아버지 고국양왕을 통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것이다. 고국원왕의 비극은 광개토대왕의 영역확장 작업에 있어서 중요한 동기와 방향설정의 지표가 되었다. 백제만이 아니었다. 고국원왕의 비극은 또 있었다. 그것은 모용선비에게 342년에 고구려의 수도가 점령당하고 미천왕의 시신과 주씨태후를 저들이 끌고 가는 바람에 이를 돌려받기 위해 13년 동안이나 저들에게 질질 끌려다녔던 아픈 경험이다. 고국원왕 자신은 모용선비에게 제대로 복수를 하지 못했다. 
모용선비가 세운 전연이 370년에 멸망했기 때문이다. 모용선비는 한동안 나라를 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소수림왕 시기에는 고구려와 충돌이 없었다. 하지만 384년 모용선비는 다시 후연을 세워 짧은 시간 내에 옛 전연의 영토를 다시 차지하고 고구려의 이웃나라가 되었다. 고구려는 당연히 과거를 기억해냈다. 384년에 왕위에 오른 고국양왕은 다음해 군사 4만 명을 이끌고 후연을 공격하여 요동, 현도 두 군을 함락하고 포로 1만 명을 잡아오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곧 후연의 반격을 받아서 요동, 현도를 다시 빼앗기고 말았다. 
고구려는 386년과 389년 후연과 거듭된 전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담덕은 태자시절에 직접 후연을 상대해 보았고, 고구려가 제대로 승리하지 못했던 한계도 익히 보아 왔다. 따라서 그가 왕위에 오른 후에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는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이 거듭 노력했지만 실패했던 고국원왕의 수모를 씻어내는 일이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에 비해 유리한 점이 있었다. 그것은 두 왕이 백제, 후연과의 전쟁을 치르면서도 무엇보다 내치에 힘써 고구려의 국력을 크게 신장시켜 놓았다는 점이다. 
소수림왕은 백제를 공격하기도 했지만, 안으로는 내치에 힘썼다. 북중국의 패자 전진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으면서 서쪽 국경의 안정을 도모하는 한편, 전진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여 고구려 내부의 사상적 발전을 이루었으며, 태학을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했다. 무엇보다 율령을 제정하여 고구려 체제를 한층 정비했다. 
고국양왕 역시 내치에 힘써 고구려를 주변국들 가운데 가장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특히 공정한 조세 수취, 진대법의 시행 등으로 농민들이 잘산다는 소문이 퍼져서 후연의 백성들이 대거 이주해 오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늘어난 인구는 고구려의 생산력을 향상시켰고 국력을 증강시켰다. 이러한 두 왕의 노력이 있었기에 광개토대왕은 즉위하자마자 밖으로 팽창정책을 펼칠 수 있었다. 
광개토대왕이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에 비해 가장 뛰어난 점은 무엇보다 그의 군사적 재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즉위한 다음해 7월 광개토대왕은 친히 4만의 군대를 이끌고 백제의 북쪽 지역을 공격하여 10여 개 성을 빼앗아 한강 유역까지 밀고 내려갔다. 백제의 진사왕은 광개토대왕이 병법에 능하다는 말을 듣고 나가 싸우지도 못했다. 
광개토대왕은 9월에 북쪽의 거란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고, 다시 10월에 백제의 북방을 지키는 요충지인 관미성을 공격했다. “관미성은 백제가 자랑하는 저들의 중요한 수군기지다. 4면이 가파른 절벽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 고구려군은 반드시 관미성을 차지할 것이다. 이번 관미성 전투에서 승리해야만 앞으로 백제를 굴복시킬 수 있다. 이제부터 우리 군은 7개의 길로 나누어 관미성을 공격한다. 제아무리 백제군이 천연의 요새를 지키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의 신출귀몰한 작전을 당해낼 수는 없을 것이다. 자, 총공격이다.” 
광개토대왕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4면이 절벽인 관미성을 해군을 이용하여 7개 길로 공격했다. 백제군은 다채로운 고구려의 공격 앞에 난공불락이라고 믿었던 관미성을 20일 만에 고스란히 내주고 말았다. 관미성이 함락되자 백제는 크게 동요했다. 서해의 지배권이 고구려에게 넘어가는 것도 문제지만, 백제의 수도인 한성이 곧 고구려의 침략 위협에 노출된 것이었다. 광개토대왕은 백제를 몰아붙일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관미성의 패전은 백제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백제 진사왕에게는 조카 아신이 있었다. 그는 전왕인 침류왕의 아들이다. 침류왕이 죽자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침류왕의 동생인 진사왕이 왕이 되는 바람에 그는 불만이 많았다. 
진사왕이 8년간 왕위에 있는 동안 아신도 청년으로 성장했다. 아신이 한성 별궁에서 태어날 때 신령한 빛이 밤하늘을 비추었다고 한다. 그것은 그가 보통이 넘는 빼어난 인물이었음을 전하는 것이다. 성격도 호탕하고 매사냥을 좋아하는 용맹한 사람이었다. 아신은 관미성 전투의 패전을 핑계삼아 숙부인 진사왕을 몰아내고 자신이 직접 왕위에 올랐다. 
백제와 고구려 두 젊은 왕간의 대결은 393년 아신왕이 먼저 도전장을 보내 옴으로써 시작되었다. 광개토대왕에게 빼앗긴 관미성을 아신왕 자신이 직접 1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공격해 온 것이다. 하지만 첫 승부부터 아신왕은 광개토대왕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아신왕은 고구려군의 저항 앞에 끝내 관미성을 빼앗지 못했다. 백제 아신왕은 관미성의 패배를 만회하고자 다음해에 황해도 지역의 수곡성을 공격해 왔다. 이번에는 광개토대왕이 직접 정예기병 5천을 거느리고 나갔다. 두 젊은 왕의 대결에서 광개토대왕은 여지없이 아신왕을 격파했다. 백제왕 아신은 패배를 인정할 수 없어서인지 다음해 8월 다시 한 번 고구려를 공격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두려웠는지 자신은 빠지고 부하인 좌장진무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공격하게 했다. 그러자 광개토대왕은 7천의 병사로 예성강에서 싸움을 벌였다. 이 싸움에서 광개토대왕은 고구려군보다 많은 백제군 8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거듭된 패전으로 궁지에 몰린 백제 아신왕은 다시 한 번 자신이 직접 7천의 군사로 겨울철에 고구려를 향해 진격했다. 그런데 한강을 건너 청목령에 이르렀을 때 큰 눈이 내려 백제군은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되돌아가고 말았다. 
백제군은 서서히 고구려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백제의 움직임을 정확히 보고 있던 광개토대왕은 396년 과거와는 다른 결단을 내렸다. “자, 이제 백제의 국력은 바닥이 났다. 저들은 거듭된 패배로 고구려 군대만 보면 겁부터 먹고 있다. 이제 백제에게 항복을 받을 때가 되었다. 자, 백제의 항복을 받아 선대왕이신 고국원왕의 한을 풀어 드리자. 백제 정벌은 우리 고구려가 위대한 제국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출정하라.” 396년 광개토대왕은 친히 해군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했다. 이번 싸움은 백제의 수도가 목표였다. 한강변에 위치한 백제의 수도 풍납토성은 고구려의 총공격을 받아 완전히 포위되고 말았다. 백제는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한 채 고구려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아신왕은 황급히 많은 선물을 바치면서 광개토대왕 앞에 무릎을 꿇고 맹세했다. “지금부터 영원히 고구려의 신하가 되겠습니다.” 광개토대왕은 아신왕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대가 나에게 복종하는 정성이 지극하니 내가 은혜를 베풀어 지난 허물들을 용서하겠노라. 앞으로 정성을 다해 고구려를 섬기거라. 만약 복종하지 않는다면 너의 목숨을 빼앗을 것이니라. 명심하거라.” 광개토대왕은 항복의 증거로서 백제 왕의 아우와 신하들 10명, 백성 1천여 명을 포로로 하고, 많은 재물과 함께 백제의 58개 성과 700개 부락을 빼앗아 돌아왔다. 광개토대왕은 백제를 굴복시켰고, 황해도와 인천을 중심으로 한 경기도 서부 해안지역, 한강 이북의 경기도 지역을 모두 빼앗았다. 백제는 비록 고구려에게 항복했지만 결코 쉽게 굴복할 약소국이 아니었다. 
백제는 재기를 꿈꾸며 왜, 가야와 연합하여 먼저 신라를 공격했다. 신라는 당시 고구려에게 복종하고 있던 나라였다.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한 발판을 만들려는 백제의 작전이었다. 399년 신라 내물이사금은 급히 광개토대왕에게 사신을 보냈다. “대왕마마, 백제놈들과 왜놈들이 신라 영토로 들어와서 성을 파괴하고 있사옵니다. 저희 신라 사람들을 고구려의 백성이라 여기시어 구원하여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신라가 사신을 보내서 아뢰기를 “왜인이 국경선 근처로 와 신라의 성을 다 부쉈습니다. 노객(신라 내물왕)은 고구려의 백성으로서 광개토대왕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은 인자하게도 신라의 충성을 칭찬하고, 신라 사신을 돌려보내면서 비밀 계획을 알려주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는 매우 좋았습니다. 백제가 가야와 왜를 끌어들여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의 내물왕이 광개토대왕에게SOS를 청하는 모습입니다. 여기서 국력의 중요성을 알 수 있는 거 같아요. 당시 광개토대왕의 나이는 겨우 19세였습니다 (정말 알면 알수록 대단하죠?). 반면,SOS를 보낸 내물왕의 나이는 무려 44살이었어요. 그런데 내물왕이 자기 아들뻘인 광개토대왕에게 이 늙은이 한 번만 살려달라고, 당신 신하이지 않느냐고 간청하는 거예요.  
광개토대왕은 고구려에게 복종하고 있는 신라를 공격한 것은 백제가 곧 고구려에게 저항하겠다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다음해 광개토대왕은 보병과 기병 5만을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보냈다. 신라가 백제의 침입을 받을 때 고구려에게 구원을 요청한 것은 이미 391년에 신라에서 고구려에 인질을 보내면서 고구려와 상호 밀접한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신라는 이때까지 경상도 일부 지역에 자리한 작은 나라에 불과했다. 대왕은 신라가 고구려에 속한 제후의 나라이기에 도와준 것이기도 하지만, 만일 신라를 백제가 차지하면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될까 우려해서 대군을 파견했다. 또한 대군으로 이 기회에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겠다는 의도도 있었다. 
고구려군은 신라에 가서 왜군을 물리치고, 이어서 가야 지방까지 쫓아가 왜군을 완전히 물리쳤다. 이때 금관가야가 고구려군에 의해 멸망당해 김해 지역에서 일본열도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영락 10년,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신라에 보내 구원해주었다. 
남거성으로부터 신라성에 걸쳐 왜인이 가득했다. 고구려 군대가 도착하자 왜놈들은 도망갔다. 그 뒤를 급히 추격해서 가야 지역에 이르니 곧 모두 항복하였다. 
백제와 사이가 안 좋던 고구려도 신라의 요청을 받아들여 군대를 파견한 겁니다. 고구려 군대가 오니까 당황한 왜군이 한반도의 최남단 금관가야 있는 곳까지 가요. 실제로 가야와 왜는 당시 연합국이기도 했고요. 
당시 고구려 군대는 무적 이었읍니다. 바로 쫓아가서 박살을 내준 거죠. 이 과정에서 덩달아 전쟁의 무대가 된 금관가야도 약해지게 돼고, 그러면서 가야 연맹의 주도권이 금관가야에서 고령의 대가야로 바뀌게 됩니다. 
신라를 구원한 고구려는 군대를 신라 땅에 그대로 주둔 시키면서 영향력을 행사 했읍니다. 그 증거가 바로 경주 호우총에서 발굴된 호우명 그릇입니다. 이 호우명 그릇 밑바닥에는 ‘광개토대왕 킹왕짱’과 같은 의미의 글씨가 새겨져 있었어요. 
왜 신라의 서울이었던 경주에서 고구려 왕의 이름이 적힌 유물이 나온 걸까요? 간단합니다. 호우명 그릇은 ‘기념품’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당시 왜와 가야를 토벌하고 신라를 지켜준 광개토대왕의 공적을 기념하며 만든 그릇이었던 거죠. 비슷한 예로,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미군기지가 있습니다. 
6 · 25 때 대한민국을 도와주러 온 이후로 계속 대한민국에 주둔하게되고 만약 시간이 아주 많이 흘러 평택에서 미국 국기가 새겨진 유물이 발견된다면 우리나라에 미국이 영향력을 미쳤다는 명백한 증거가 되며 마찬가지로 이 영향력이 신라도 싫지만은 않은 상황 이 되게 되었읍니다. 
한반도 남쪽 동남부에 위치해 중국과 직접 교역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손길을 통해 중국 문물을 들여올 수 있었읍니다. 이쯤에서 신라는 고구려 덕 좀 보게 됩니다. 고구려 군대는 경남 해안지방에 일시 주둔하여 신라를 보호하며, 경주에도 따로 군대를 주둔시켜 신라를 완전히 복종시켰다. 신라는 이후 100년간 고구려의 제후국으로 전락했다.  
신라는 이 기간 동안 군사제도, 무기, 법률, 수공업 기술 등 많은 부분을 고구려로부터 배웠다. 신라가 장차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한반도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의 높은 문명을 배워 국력이 크게 신장되었기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경주 호우총에서는 광개토대왕 제사에 사용된 제기가 출토되었고, 서봉총에서는 장수왕의 연호가 새겨진 은그릇이 출토되었다. 이것들은 당시 신라가 고구려의 철저한 속국으로 존재했음을 알려 주는 유물들이다. 
울산에는 고구려의 전형적인 무덤인 적석총이 있다. 이는 그곳에 주둔했던 고구려 장군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고구려는 이 작전의 성공으로 남해안까지 세력을 뻗었다. 
광개토대왕이 일본열도까지 군사를 보내 공격했던 흔적도 있다. 반면 백제는 너무나 큰 타격을 받았다. 백제는 왜의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에 몇 번 더 저항하기도 했지만, 번번이 광개토대왕의 거듭된 공격에 굴복하고 말았다. 백제는 이후 수십 년간 고구려에 저항하지 못했다. 남쪽을 정벌하는 도중에도 광개토대왕은 북으로 눈을 돌려 거란을 공격했다. 거란은 요하 서쪽의 시라무렌강 유역에 사는 유목민이다. 그들이 위치한 곳은 과거 선비족이 살던 곳으로 고구려가 진정한 강대국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차지해야만 하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거란은 378년 고구려 변방을 공격하고 사람들을 잡아간 적이 있다. 
광개토대왕은 그 일도 일이지만, 장차 모용선비의 후연을 공격하기 위해 반드시 거란을 굴복시켜야 했다.광개토대왕은 393년 거란을 공격하여 500명의 포로를 잡아왔다. 이때 거란땅에는 잡혀오거나 흉년 등을 피해 이곳에 온 고구려인 1만여 명이 살고 있었다.“나는 그대들의 조국 고구려의 대왕이다. 그대들이 이곳으로 온 이유는 고구려에서 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대들이 조국으로 돌아가면 풍족히 먹고 살 수 있도록 땅을 나누어 줄 것이다. 백성이 있고 난 후에 임금이 있는 것이 아니냐. 나를 믿고 조국으로 돌아가서 대제국 고구려, 살기 좋은 고구려를 함께 만들어 보자.” 
395년에는 광개토대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가서 부산 등을 지나 염수에 이르러 3개 부족과 600~700개의 유목민 마을을 정복하고, 소와 말, 양 등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빼앗아 왔다. 광개토대왕은 정벌을 마치고 수레를 돌려 북풍 등을 지나 고구려의 국경지대를 시찰하고 돌아왔다. 
광개토대왕이 간 염수 지역은 시라무렌강 유역으로 요하를 건너 한참 서북쪽으로 간 곳이다. 돌아올 때 국경지대를 시찰한 것은 장차 후연을 공격하기 위한 사전준비였다. 대왕은 동북방의 숙신족에 대한 지배권도 강화하였다. 숙신은 서천왕 이후 고구려에 복속된 무리들이다. 398년 한무리의 군대를 파견하여 숙신땅을 시찰하고 포로를 잡아오자 숙신의 무리들이 신하의 예를 다한 선물을 바치고 복종하였다. 
400년에는 신라 내물왕의 요청으로 5만의 원군을 보내어 왜구를 격퇴시켰으며, 동예()를 통합하고 (410), 신라와는 하슬라()를 경계로 삼았다. 
연()나라의 모용희()를 반격하여 신성()·남소()의 2성 등 700여 리의 땅을 탈취하였고, 405 ∼ 406년 후연()의 모용희의 침입을 2번 받았으나 요동성()과 목저성()에서 모두 격퇴하였다. 407년 모용희를 죽이고 자립한 고운()과는 수교를 맺기도 하였다. 410년에는 동부여()를 정벌하여 64성을 공파함으로써 동부여가 고구려의 판도 안에 들게 되었다. 또한 남하하여 한강선까지 진출하였으며, 서쪽으로 후연을 격파하고 요동지역을 확보함으로써 만주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였다. 능은 소재 미상이나 414년 장수왕이 중국 지린성[] 지안현[] 퉁거우[]에 건립한 광개토대왕릉비에 업적이 기록되어 있다. 
동부여가 신하의 예를 다한 선물을 바치지 않자, 직접 광개토대왕이 군대를 거느리고 동부여의 수도를 공격했다. 그러자 동부여 사람들이 모두 놀랐고, 동부여의 귀족들이 자진해서 항복하여 64개의 성과 1,400개의 촌을 함락시켰다. 
부여는 494년 문자명왕 때 고구려에게 완전히 흡수되어 사라지지만, 이미 광개토대왕 시절에 고구려에게 굴복하고 말았던 것이다. 대왕의 정복활동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것은 후연을 공격하여 멸망시킨 일이다. 광개토대왕은 백제를 굴복시킨 후 402년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후연 공격을 시작했다. 첫 목표는 후연의 평주자사가 있는 숙군성. 이곳은 후연의 수도인 용성과 얼마 멀지 않은 곳으로 현재의 조양시 부근이다. 
광개토대왕이 숙군성을 공격하자, 후연의 평주자사 모용귀는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고구려군의 대승리였고, 후연은 수도방위가 위태로워졌다. 404년 광개토대왕은 기습적으로 북경지역인 후연의 연군을 기병과 수군으로 공격했다. 후연의 후방을 공격한 것은 후연을 혼란에 빠뜨리고자 함이었다. 405년 후연의 왕 모용희는 고구려 요동성을 공격했으나, 고구려군에 의해 격퇴되었다. 다음해 모용희는 고구려의 속민으로 후연의 북쪽에 위치한 거란을 공격하다가 실패하고, 고구려군과 거란군에게 3천 리나 쫓겨다녔다. 
「광개토대왕릉비문」에 의하면 광개토대왕은 407년에 5만 명의 군대로 사방에서 적을 공격했다. 후연의 수도인 용성을 동남쪽인 북경지역에서 공격하고, 북쪽에서는 거란의 군대를 이끌고 밀고 내려오고, 서북쪽에서는 고구려 정예군이 공격했으며, 서남쪽에서도 고구려군이 공격했던 것이다. 이때 고구려군은 적으로부터 갑옷 1만여 벌을 비롯한 수많은 군수물자를 빼앗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후연은 바람 앞의 촛불과도 같았다. 이렇게 되자 후연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풍발이란 자가 고구려 사람인 고운을 왕으로 추대하여 대연(북연)이란 나라를 세운 것이었다. 대왕은 408년 고운을 고구려의 제후왕으로 인정하고 그 지역에서 철수하였다. 광개토대왕은 후연 지역이 한족과 선비족 등 이민족이 많은데다가 중원의 여러 나라와 자주 다툼을 벌여야 하는 특성이 있는 만큼 직접 지배를 하지 않고, 이처럼 고구려에 복종하는 제후국을 세우고 철수했다. 북연은 철저히 고구려의 영향 아래 있었다. 그러다가 435년 북위에 멸망당했다. 하지만 이때에도 북연은 고구려에게 구원을 요청하였고, 장수왕은 군대를 보내 북연의 왕과 백성들을 고구려땅으로 데려왔다. 북연의 수도였던 용성, 즉 오늘날의 조양 지방은 고구려가 중원의 세력들과 그 힘을 겨루었던 완충지역이었다. 
광개토대왕은 그곳에 살던 고구려인들을 설득해 귀순시켰다. 광개토대왕은 백성들을 사랑하는 임금이었다. 정복활동만이 아니라 고구려의 내실을 다지는 작업도 충실히 했던 것이다. 평안남도 대안시에 있는 덕흥리 고분은 408년에 죽은 광개토대왕의 부하였던 유주자사 진의 무덤이다. 무덤 내부에는 고구려 귀족의 생활상을 잘 보여 주는 벽화와 함께, 그가 고구려에서 국소대형을 비롯해서 여러 벼슬을 하다가 마지막으로 13개 군을 관할하는 유주자사를 했음을 알려 주는 글이 쓰여 있다. 그의 부하들이 다스린 13개 군은 모두 그 위치가 오늘의 북경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다. 고구려가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한때 북경 지역을 다스렸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학자들 사이에서 진이 다른 나라에서 망명해 온 사람이라는 주장도 있기는 하지만, 고구려가 북경 지역까지 세력을 뻗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대왕의 무덤은 집안시에 있는 태왕릉으로 알려져 있다. 동양의 피라미드로 알려진 장군총은 장수왕의 무덤이라고 보고 있다. 장군총은 높이 12.4미터, 바닥 한 변의 길이가 31.6미터지만, 태왕릉은 높이 30미터에 바닥 한 변의 길이가 65미터로 장군총에 비해 엄청나게 크다. 광개토대왕은 이 무덤이 산처럼 튼튼하게 만년의 세월이 지나도 그대로 보존되기를 바랐지만, 현지에 가 보면 원래의 모습에서 많이 파괴되어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하지만 지금도 그 웅장한 무덤의 규모는 여전하다. 고구려 수도였던 만주의 집안시에 가 보면 높이가 무려 6.39미터나 되며 무게만 해도 37톤이나 되는 거대한 돌에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새긴 비석이 있다. 비석에는 고구려 건국에서 광개토대왕에 이르는 역사, 광개토대왕의 정복활동, 그리고 광개토대왕의 무덤을 지키는 수묘인에 대한 규정 등이 담긴 1,775자의 글귀가 있다.  

"광개토대왕릉비문"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이 414년에 부친의 무덤을 만들면서 함께 새긴 것이다. 광개토대왕릉비는 그 크기가 엄청날 뿐만 아니라 비문내용도 뛰어난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다. 이 비석을 직접 만나 보면 거대한 석비를 만든 고구려인의 힘과 문화능력에 감탄하게 될 것이다. 대왕은 싸움만 잘한 왕은 아니었다. 고구려 사람들은 광개토대왕을 땅을 넓힌 정복왕만이 아닌 나라를 평안하게 다스렸던 대왕으로 기억했다. 고구려인들의 평을 들어 보자. “대왕의 은혜와 혜택이 하늘에까지 이르고, 대왕의 위력은 사해에 떨치셨다. 또한 적들을 쓸어 없애셨으니 백성들은 평안히 자기 직업에 종사했고, 나라가 부강하니 백성이 편안했으며 오곡마저도 풍성하게 익었다.” 
고구려인의 평가이기에 과장된 면도 있지만, 광개토대왕이 얼마나 백성들에게 사랑받은 임금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대왕은 백성들이 편안히 살기 위한 여러 가지 제도를 정비하고, 고구려 국토를 개발하고 정비하는 일에도 열심이었다. 고구려인의 정신적 단결을 위해 하늘 신과 조상님에게 제사하는 국사와 종묘를 수리하여 고유한 신앙체계를 정비했다. 또 새로 전래된 불교를 믿는 자를 위해 절을 9개나 짓는 등 다양한 믿음을 가진 자들을 배려했다. 보다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행정제도도 개편했다. 지방 행정조직을 세분화하고 새로운 벼슬도 만들었다. 또한 군사제도도 정비하여 힘있는 귀족들이 가진 사병들을 줄이고 왕이 직접 이끄는 군대, 국가의 직접 관할하에 있는 군대를 증가시켰다. 또한 군대도 고구려의 자랑인 철갑기병대를 주축으로 하는 외에 강력한 해군을 육성하여 백제와 왜, 후연을 공격할 때 활용했다. 이외에도 왕실과 관련된 법령도 정비하고, 무덤을 관리하는 사람들인 수묘인에 대한 규정도 정비했다. 
광개토대왕은 거대한 영토만을 개척한 것이 아니라 그 영토를 다스릴 수 있는 여러 제도까지 함께 개혁했던 것이다. 광개토대왕이 개척한 지역의 평지는 백성들이 농사를 짓는 땅으로 개발되었다. 그가 개척한 거대한 영토는 더욱 많은 물자를 생산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국내 상업과 해외무역이 함께 발달하여 백성들의 삶은 더욱 윤택해졌다. 
광개토대왕의 업적 가운데 하나는 백제와 신라, 가야가 모두 고구려의 직접, 간접적인 지배하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비록 삼국이 완전 통일된 것은 아니었지만, 이들 나라에 고구려 문화가 전파됨으로써 서로간의 문화적 일체감이 강화되고, 민족의식이 생겨난 것은 차후 삼국통일의 기반이 되었다고 하겠다. 
고구려의 성을 쌓는 기법이나 토기제작 기법, 무덤의 형태, 건축술, 무기와 갑옷, 여러 제도 등이 두 나라에 전파되어 5세기 이후에는 삼국간의 문화적 차이가 많이 줄어들었다. 광개토대왕이 위대한 것은 결코 영토를 크게 넓혔기 때문만은 아니다. 
광개토대왕 이전의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강국에 불과했을 뿐 진정한 대국은 아니었다. 하지만 광개토대왕 이후 고구려는 세계질서를 좌우하는 거대 국가가 되었다. 당시 중원땅에는 황하 유역에 북위, 양자강 유역에 송나라가 남북조라 일컬으며 맞서고 있었다. 또 몽골 초원에는 유연이 통일국가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만리장성과 대흥안령 산맥 동쪽 지역을 모두 관할하는 고구려와 함께 4강에 의한 국제질서를 만들었다. 광개토대왕 하면 말을 타고 만주 벌판을 주름잡는 모습이? 

‘광개토대왕=육전’ 
우리의 생각과 달리 광개토대왕은 수전으로 유명하셨습니다. 백제와의 관미성 싸움이 그 대표적인 전투였어요. 관미성은 백제의 수도 한성을 지키는 최고의 전략적 요충지였어요. 위치에 대해선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한강 입구 유역이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기록에 따르면 사방이 절벽이고 바다로 에워싸인 관미성은 백제 천하제일의 수비성이었죠. 광개토대왕은 가히 전쟁의 신이었습니다. 발상의 전환으로 백제의 가장 완벽한 요새인 관미성을 공략하기로 합니다. 
광개토대왕은 정예기병으로 이루어진 기동력 있는 육군과 날렵한 전함을 주축으로 한 수군을 여러 갈래로 나누어 공격했어요. 그래서 20여 일 만에 성을 함락할 수 있었습니다.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지 겨우 다섯 달 만의 일이었어요. 
백제는 해외 무역으로 부강해진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관미성을 잃게 되면서 서해안을 잃게 되고 해상 무역이 위축되죠. 뿐만 아니라 남쪽에 있는 영토로부터 세금을 가져오는 것도 어렵게 되죠. 반대로 고구려는 한강 유역 북쪽을 장악하면서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근초고왕 때의 굴욕에 대한 복수혈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거죠! 고구려의 전성기를 연 광개토대왕. 그의 위대함은 단지 영토를 넓힌 것만이 아니라 이처럼 고구려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 위대한 문명을 건설할 힘을 만든 것이다. 더욱이 광개토대왕의 정복활동 덕택에 삼국이 점차 하나의 일체감을 갖게 된 점은 우리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일이 될 것이다.  
중국의 역사서 가운데 광개토대왕 시기를 다룬 『진서』는 그들의 역사전통과는 다르게 고구려에 관한 별도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삼국사기] 기록중에"
광개토대왕에 대한 기록이 매우 간략하다. 따라서 그가 누구와 결혼했고, 자식은 얼마나 두었는지, 왜 그렇게 일찍 죽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다큐멘터리를 보듯 그의 행동만을 살펴볼 수밖에 없는 아쉬움이 남는다. 안타깝게도 광개토대왕은 오래 살지 못했어요, 대왕은 정복지를 순행하다가 화살에 맞아 죽게 되죠. 정말 불꽃처럼 살다가 돌아가신 분입니다. 
그 아들이 유명한 장수왕입니다. 광개토 대왕의 업적은 광개토 대왕릉비에도 기록되어 있어요. 광개토 대왕릉비는 당시고구려의 도읍이었던 국내성(지금의 중국 만주 지반현)에 세워졌어요. 이 비석은 그의 아들 장수왕이 아버지의 정복 활동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입니다. 
광개토 대왕릉비에는 1170글자가 새겨져 있고 무게는 무려 37톤에 달해요. 이 비석에서는 광개토 대왕을 ‘태왕()’, ‘하늘의 자손’이라 칭하고 있어요. 총 13회에 걸친 광개토 대왕의 정복 전쟁의 역사가 아주 상세히 기록되어 있읍니다.
광개토대왕은 412년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아쉬운 것은 그에 관한 기록이 매우 적다는 점이다. 하늘이 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나 보다. 광개토대왕릉비에는 412년, 삼국사기에는 413년으로 사망년도가 다르게 표기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