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25일 수요일

훈민정음. [訓民正音]

훈민정음"
업제학 정인지() 등이 세종의 명으로 새로 창제한 훈민정음을 설명한 한문해설서. 목판본. 전권 33장. 1책 국보 제70호 간송미술관() 소장. 9월 상한()에 완성되었다. 책이름을 글자이름인 훈민정음과 똑같이 ‘훈민정음’이라고도 하고, 해례()가 붙어 있어서 ‘훈민정음 해례본’ 또는 ‘훈민정음 원본’ 이라고도 한다. 내용은 세종어제() 서문과 훈민정음(새 글자)의 음가() 및 운용법()을 밝힌 예의편()이 본문처럼 되어 적은 바로 훈민정음을 만들었읍니다. 이제 훈민정음에 대해 알아볼까? 1446년(세종 28) 집현전 대있고 이를 해설한 해례편이 제자해() · 초성해() · 중성해() · 종성해() · 합자해() · 용자례()의 순으로 나누어져 기술되고 있으며, 책 끝에 정인지의 서문이 실려 있다. 집필자들은 정인지 · 신숙주() · 성삼문() · 최항() · 박팽년() · 강희안() · 이개() · 이선로() 등 집현전의 8학자이다.

이 책도 발견 당시 완전한 것은 아니고, 처음 2장이 빠져 있던 것을 나중에 붓글씨로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임금, 세종 대왕" 조선의 네 번째 임금은 세종 대왕이야. 세종 대왕은 태종 임금의 셋째 아들(충녕 대군)로 태어났지. 태종은 원래 맏아들인 양녕 대군을 세자로 삼았어, 그런데 양녕은 세자 자리에 걸맞지 않은 행실을 자꾸만 해서 결국 세자 자리에서 쫓겨나게 돼, 태종은 총명하고 학문이 뛰어난 충녕을 세자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었지. 그 결과 우리 역사에서 누구보다 백성을 사랑한 임금인 세종 대왕이 즉위하게 되었어며. 왜 우리는 세종을 다른 임금과는 달리 세종 대왕이라고 부를까?

그의 업적을 살펴보면 그 까닭을 쉽게 알 수 있어. 먼저 세종은 왕도 정치를 내세워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정치를 펼치고자 했어. 그래서 유능한 인재를 널리 구하고, 황희 정승처럼 청렴한 재상을 관리로 앉혀 깨끗한 정치를 했으며. 훈민정음이 창제된 지 거의 3년만인 세종 28년(1446) 음력 9월 상한에 발행한 훈민정음 해설서인데, 1책으로 된 목판본이다. 이 훈민정음 해례본의 한자는 해행서체, 한글은 돋움체 획형으로 나타냈다. 국보 70호인 이 책은 1940년 경북 안동에서 발견되어 현재 서울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세계 기록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 책의 한글 글꼴 특징은 자형을 정사각형에 가깝고 서선의 굵기가 일정하며 수평, 수직으로 서선 방향을 나타냈다.

다음으로 여진족을 정벌하거나 왜구를 쫓아내 영토를 확장하고 국방을 튼튼히 했어. 또 여러 가지 제도를 정비하고, 집현전2)을 설치하여 인재를 키우고 문화를 발달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지.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는 과학 기술도 놀랍도록 발전했어. 하지만 세종 대왕의 가장 큰 적었던 것인데, 적을 때 실수하여 세종 어제서문의 끝 자 ‘이()’가 ‘의()’로 되는 등 오자가 있다.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갈다."

① 본문(예의) : 어제서문(훈민정음 창제목적을 밝힘), 예의(새 글자의 음가, 운용법을 설명함),

② 해례 : 제자해(제자원리, 제자기준, 자음체계, 모음체계, 등에 관하여 설명함) · 초성해(초성이 무엇인가를 다시 설명함) · 중성해(중성이 무엇인가를 다시 설명하고 중성글자의 합용법을 보임) · 종성해(종성의 본질과 등을 설명함) · 합자해(초성 · 중성 · 종성 글자가 합해져서 음절 단위로 표기되는 보기를 보이고, 중세국어의 성조에 대하여 설명함) · 용자례(단어의 표기례를 보임),

③ 정인지 서문 : 훈민정음의 창제이유, 창제자, 훈민정음의 우수성, 이 책의 편찰자, 편찰 연월일을 분명히 밝혔다. ‘훈민정음해례본’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세종어제 서문에서는, 표기수단을 가지지 못한 비지식층 백성들에게 표기수단을 가지게 하기 위하여 세종이 친히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고 창제목적이 밝혀져 있다. 중국36자모표에 나오는 한자를 그대로 이용하지 않고, 외래어한자어의 전래자음()을 이용하여 새로 만든 훈민정음(글자)의 음가를 설명하였다. 이 중에서 초성 23자모 체계는, 비록 전래자음을 가지고 음가를 설명하기는 하였으나 중국 36자모체계의 영향을 받은 체계였으며, 인위적인 개신() 의도를 가지고 정리하였던 ≪동국정운()≫ 23자모체계와도 일치하여, 15세기중세국어의 초성체계와 부합되지 않는 면도 조금 있다


"우리역사 에 가장위대한 임금"
조선의 네 번째 임금은 세종 대왕이야. 세종 대왕은 태종 임금의 셋째 아들(충녕 대군)로 태어났지. 태종은 원래 맏아들인 양녕 대군을 세자로 삼았어. 그런데 양녕은 세자 자리에 걸맞지 않은 행실을 자꾸만 해서 결국 세자 자리에서 쫓겨나게 돼. 태종은 총명하고 학문이 뛰어난 충녕을 세자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었지. 그 결과 우리 역사에서 누구보다 백성을 사랑한 임금인 세종 대왕이 즉위하게 되었어. 왜 우리는 세종을 다른 임금과는 달리 세종 대왕이라고 부를까?
그의 업적을 살펴보면 그 까닭을 쉽게 알 수 있어. 먼저 세종은 왕도 정치를 내세워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정치를 펼치고자 했어. 그래서 유능한 인재를 널리 구하고, 황희 정승처럼 청렴한 재상을 관리로 앉혀 깨끗한 정치를 했지. 다음으로 여진족을 정벌하거나 왜구를 쫓아내 영토를 확장하고 국방을 튼튼히 했어. 또 여러 가지 제도를 정비하고, 집현전2)을 설치하여 인재를 키우고 문화를 발달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지.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는 과학 기술도 놀랍도록 발전했어. 하지만 세종 대왕의 가장 큰 업적은 바로 훈민정음을 만든 거야. 이제 훈민정음에 대해?

혜례본"
광곽()은 가로 16.8㎝, 세로 23.3㎝이고, 본문(예의) 부분은 4장 7면으로 면마다 7행에 매행 11자, 해례 부분은 26장 51면 3행으로 면마다 8행에 매행 13자, 정인지의 서문은 3장 6면에 한 자씩 낮추어서 매행 12자로 되어 있다. 그리고 끝에는 ‘정통 11년(1446) 9월 상한’이라는 반포일이 기록되어 있다. 이 책도 발견 당시 완전한 것은 아니고, 처음 2장이 빠져 있던 것을 나중에 붓글씨로 적어 넣었던 것인데, 적을 때 실수하여 세종 어제서문의 끝 자 ‘이()’가 ‘의()’로 되는 등 오자가 있다.

1) 본문(예의)
① 어제서문(훈민정음 창제목적을 밝혔다.) ② 예의 (새 글자의 음가, 운용법을 설명하였다.) 2) 해;
① 제자해(제자원리, 제자기준, 자음체계, 모음체계, 음상 등에 관하여 설명하였다.)
② 초성해(초성이 무엇인가를 다시 설명하였다.)
③ 중성해(중성이 무엇인가를 다시 설명하고, 중성글자의 합용법을 제시하였다.)
④ 종성해(종성의 본질과 사성 등을 설명하였다.)
⑤ 합자해(초성·중성·종성 글자가 합해져서 음절 단위로 표기되는 보기를 보이고, 중세국어의 성조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⑥ 용자례(단어의 표기례를 제시였다.)
3) 정인지서문; 훈민정음의 창제이유,
창제자, 훈민정음의 우수성, 이 책의 편찬자, 편찬연월일을 분명히 밝혔다. "다음으로 위의 내용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2) 본문 (서문과예의)
① 어제서문;
세종어제 서문에서는, 표기수단을 가지지 못한 비지식층 백성들에게 표기수단을 가지게 하기 위하여 세종이 친히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고 창제목적이 밝혀져 있다.
② 예의;
어제서문에 이어서 중국 36자모표에 나오는 한자를 그대로 이용하지 않고, 외래어인 한자어의 전래자음()을 이용하여 새로 만든 훈민정음(글자)의 음가를 설명하였다. 이 중에서 초성 23자모체계는, 비록 전래자음을 가지고 음가를 설명하기는 하였으나, 중국 36자모체계의 영향을 받은 체계였으며, 인위적인 개신() 의도를 가지고 정리하였던 『동국정운()』 23자모체계와도 일치하여, 15세기 중세국어의 초성체계와 부합되지 않는 면도 조금 있다.
1446년 음력 9월에 반포된 훈민정음() 판본에는 1443년에 창제된 한국의 문자 한글을 공표하는 조선왕조 제4대 임금 세종대왕(재위 1418-1450)의 반포문()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정인지() 등 집현전 학자들이 해설과 용례를 덧붙여 쓴 해설서 해례본()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판본을 『훈민정음 해례본』이라 하며, 간송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세계적 중요성·독창성·대체 불가능성" 
훈민정음은 한국인에게 문자체계의 혁명을 불러왔다. 무엇보다 한자로는 쓸 수 없던 한국인의 말까지 완벽히 표기할 수 있게 되었다. 한자는 중국인을 위한 문자 체계이며, 음운 체계와 문법 구조가 한국어와는 완전히 달랐다. 이를 두고 정인지는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한자로 한국말을 적는다는 것은 네모난 손잡이를 둥근 구멍 안에 억지로 밀어 넣는 것만큼 어울리지 않는다.”고 표현했다. 그렇듯 한국인이 한자로 말을 적으려면 소리를 한자로 바꾸어 적어야만 했는데, 이 때문에 의사소통이 결코 쉽지 않았다.
한자로 의사소통하는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한국인들은 이두()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이두는 조정의 관리와 평범한 백성이 한자를 이용하여 한국말을 기록하는 문자 체계였다.
한자로써 한국말을 순서대로 적고, 심지어 한국말의 조사와 어미까지도 적었다. 그러나 이두는 한자를 사용하여 표기하는 것이므로 한국말의 소리를 특징적으로 나타낼 수 없을뿐더러 조사와 어미의 미묘한 차이를 반영할 수도 없었다. 이런 이유로 세종대왕이 한국말의 음운체계를 반영하는 문자를 창제하였고, 이로써 한국인은 말을 글로 온전히 적을 수 있게 되었다.
두 번째 측면은 한국인이 글자를 아주 쉽게 배우고 쓸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표의문자()인 한자는 각각의 개념을 나타내는 문자를 일일이 배워야 했기에 매우 어려웠다. 또한 글자의 획이 복잡하여 쓰기도 쉽지 않았다. 이런 한자를 배운다는 것이 한국인과 같은 외국인에게는 매우 어려워서 대부분의 한국인은 한자를 비실용적이라고 생각하였으며, 문자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세종대왕이 창제한 문자는 단 28자이며 그 획도 단순했기 때문에 배우고 사용하기가 쉬웠다. 한국인은 누구라도 한글을 배워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 한국인은 독특한 민족의 말을 완벽하게 적을 수 있게 됨으로써 민족문화가 새로운 차원으로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오늘날 한국의 식자율()이 높은 이유가 누구나 문자를 쉽게 배울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장기적으로 볼 때, 이것은 유네스코의 문맹 퇴치 운동에 기여하고 있다. 게일(J.S. Gale, 캐나다 출신 선교사‧한국어 학자)의 선언문에서 “세종대왕은 단지 동양에만 기여한 것이 아니라 세계에 이바지한 왕이다. 훌륭한 일을 많이 하였지만 한글(즉, 훈민정음이라는 새로운 글자) 창제가 그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일이었다.”라고 말함으로써 그 사실은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았다(『한글』, 왕립 아시아 학회의 조선 지회 회보, IV권, 제1부, 1912). 한국 정부는 양력으로

『훈민정음 해례본』
해례본의 발간일을 계산하여 10월 9일을 한글날로 지정한 뒤 1946년부터 매년 국가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그만큼 이 책은 한국인에게 중요하다. 오늘날 유네스코가 문맹 퇴치에 기여한 이에게 주는 상을 세종대왕상(King Sejong Prize)이라고 일컫는 사실이 이 책이 세계의 문화에 끼친 영향을 보여준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다. 목판본으로 2권 2책이다.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책으로서의 훈민정음에는 "나라말씀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니…"라고 한 《훈민정음예의본》과, 글자를 지은 뜻과 사용법 등을 풀이한 《훈민정음해례본》이 있다. 전자에 대해서는 《세종실록》과 《월인석보()》 첫권에 같은 내용이 실려 있어 널리 알려졌으나, 후자에 대하여는 1940년 발견될 때까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한글의 형체에 대하여 고대글자 모방설, 고전() 기원설, 범자() 기원설, 몽골문자 기원설, 심지어는 창살 모양의 기원설까지 나올 정도로 구구한 억설이 있었으나, 이 책의 출현으로 모두 일소되고 발음기관 상형설()이 제자원리()였음이 밝혀졌다.
후자는 예의()·해례(정인지 서문 등 3부분 33장으로 되었는데, 예의는 세종이 직접 지었고, 해례는 정인지(박팽년(신숙주(성삼문(최항(강희안(이개()·이선로() 등 집현전(殿) 학사가 집필하였다. 정인지가 대표로 쓴 서문에는 1446년 9월 상순으로 발간일을 명시하고 있어, 후일 한글날 제정의 바탕이 되었다. 낙장된 이유는 연산군의 언문책을 가진 자를 처벌하는 언문정책 때문에 부득이 앞의 두 장을 찢어내고 보관하였다고 하며, 이를 입수한 전형필은 6·25전쟁 때 이 한 권만을 오동상자에 넣고 피란을 떠났으며, 잘 때에도 베개 삼아 베고 잤다는 일화가 전한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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