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23일 금요일

영양왕

영양왕

시대고구려

영양왕은 ?

영양왕()[평양()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원()[대원()이라고도 한다.]이며, 평원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풍채가 준수하고 쾌활하였으며,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안정시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생각하였다. 
평원왕 재위 7년(서기 565)에 태자가 되었다. 
32년에 임금이 돌아가시자, 태자가 왕위에 올랐다. 

살수대첩. 
세계 전쟁역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로 기록될 만한 살수대첩. 
중원땅을 통일한 거대 제국 수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살수대첩. 
우리는 그 승리의 주인공으로 을지문덕 장군을 기억한다. 
그 당시 고구려 왕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을지문덕 못지않은 담대한 배포와 뛰어난 용병술을 가진 고구려 26대 영양왕.

그는 평원왕의 장남으로 이름은 원, 또는 대원이다. 

566년 일찍이 태자로 책봉되어 25년간 왕이 될 수업을 받았으며, 590년부터 618년까지 나라를 다스렸다. 
그는 훤칠한 외모 못지않게 드높은 이상을 품은 인물이다. 
그는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히 할 임무가 자신에게 있다고 자임하면서 훌륭한 왕이 되고자 노력했다.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 가장 큰 위협은 589년 양자강 유역의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을 통일한 수나라였다. 
5~6세기 동아시아의 국제정치는 고구려를 포함하여 중원의 남북조, 북방의 유연 등 4~5강의 국가들이 서로를 견제하는 다원화 시대였다. 
6세기 말 중원이 통일되고 북방의 돌궐이 약화되자, 패권을 지향하는 수·당의 중원국가와 이를 저지하고 다원화 세계를 지속하려는 고구려간의 긴장이 고조될 수 밖에 없었다.

고구려는 수나라와 천하의 패권을 놓고 일대 격전이 벌어질 것을 예상했다. 
590년경부터 시작된 전쟁준비는 영양왕이 태자시절부터 진두지휘했다고 할 수 있다. 
병기를 수리하고, 곡식을 저장하고, 방어대책을 세우고, 적의 정보를 수집하는 활동이 활발히 벌어졌다.

수나라를 공격하라

우리 겨레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외국과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가 먼저 그들을 침략한 사실이 없는 줄로 착각하곤 한다. 
진정한 평화는 지킬 각오가 되어 있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법이다.

고구려는 바보처럼 적의 침입만을 받은 것이 아니다. 
수없이 적을 침략했고, 그 이익을 얻었다. 
특히 수나라와의 대전쟁은 고구려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수나라의 인구는 4,600만, 당시 고구려 인구는 속국의 인구까지 포함해도 아무리 많아야 1천만 명이 안 되었다. 
고구려에게 수나라는 강적임이 분명했다.

598년 2월 영양왕은 수나라를 향해 칼을 빼들었다.

“수나라가 중원을 통일하고 돌궐을 굴복시켰다. 
그렇다면 다음 목표는 고구려가 될 것이다. 
이미 몇 차례 사신을 보내 노골적인 침략의도를 밝힌 수나라가 아니냐. 게다가 우리의 속민인 거란족을 지배하려는 야심까지 품고 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대결이라면 우리가 먼저 공격하여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들이 고구려를 공격해 오는 데 있어서 중간 보급기지가 될 영주 지역을 철저히 파괴하는 것이 이번 작전의 목표다. 
이 작전의 성공은 장차 있을 수와의 전쟁의 승리를 예고하는 것이 될 것이다. 
자, 출격하라.”

영양왕은 자신이 직접 말갈의 군대 1만 명을 거느리고 요하를 건너 요서 지방의 수나라 군사기지를 침략했다. 
수나라 영주총관 위충이 나와서 막아내기는 했지만, 수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준비한 전진기지들은 큰 타격을 받았다.

영양왕은 수나라와 한번 크게 싸울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했고, 그렇다면 선제공격이야말로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지름길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수나라는 고구려와 전쟁할 뜻이 있었던 것일까?

수나라를 세운 양견, 즉 문제는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중원땅을 통일한 여세를 몰아 진정한 천하의 주인이 되려고 했다.

그는 오랫동안 북중국을 괴롭히던 돌궐을 먼저 공격했다. 

583년 이간정책을 펼쳐 돌궐을 동돌궐과 서돌궐로 분열시키고, 585년에는 동돌궐을 공격하여 굴복시켰다. 
서돌궐도 거듭된 공격을 통해 약화시켰다. 
589년에는 숙원이던 진나라를 멸망시켜 중원을 통일했다. 
수문제는 유일하게 대항하는 강국 고구려마저 굴복시켜 진정한 천하의 주인이 되려고 했고, 고구려는 이를 당연히 거부했던 것이다.

당시 고구려는 요서 지역에 위치한 거란족을 돌궐과 함께 나누어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데 수는 거란족의 비주류계를 일부 복종시키면서 요서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려고 했다. 
요서 지역을 지배하면 고구려와 북방 유목세력과의 관계를 끊고, 고구려 배후의 말갈족에 대한 영향력도 행사할 수 있다. 
고구려의 숨통을 죌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야심을 가졌기에 수나라는 이미 고구려를 공격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고구려의 선제공격을 막아낸 후, 한 달도 못되어 30만 대군이 고구려와의 전쟁에 투입된 것은 이미 수나라가 전쟁준비를 완료했음을 알려 주는 것이다.

영양왕의 선제공격은 적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입수한 후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영양왕의 선제공격으로 수나라 30만 대군은 전진기지를 상실한 채 고구려 원정길에 나서야 했다.

598년 전쟁의 대승

수문제는 고구려의 선제공격을 받았다는 보고를 받는 즉시 자신의 넷째아들 양량과 왕세적, 고경과 주라후 등을 앞세워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양량의 군대는 북경에서 출발하여 만리장성의 출입구인 임유관을 거쳐 요서 지방으로 진군했다. 

군량의 수송이 원활하지 못하여 군사들은 굶주렸고, 역병까지 걸려 요하에 이르지도 못한 채 6월에는 장마까지 만나 퇴각하였다. 
왕세적의 군대는 대릉하 주변의 조양 지방에서 퇴각했다. 
산동 반도에서 출발한 주라후가 이끄는 수나라 해군은 평양을 목표로 출발했지만, 폭풍을 만나 병선의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결국 9월에 수군이 모두 철수하였는데 열에 여덟, 아홉이 죽었다고 한다.

수군은 고구려 영토를 제대로 밟아 보지도 못하고 자연재해로 인해 커다란 피해만을 입고 물러났다고 중국인들이 쓴 책들에는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실제 사실을 숨긴 것이다.

고구려의 대장군 강이식이란 분이 만리장성 부근의 임유관과 바다에서 수군을 맞서 싸워 대승리를 거두었는데,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패배를 감추기 위해 역사기록을 왜곡했다고 하였다.

이번 전쟁에서 실질적으로 수군을 지휘한 인물은 양량이 아니라 원로대신인 고경이었다. 

수문제의 왕후는 고구려와의 전쟁패배 원인을 고경이 전쟁에 힘을 다하지 않은 탓으로 돌렸다. 
그의 지략이 부족해서 패전했다는 수양제의 평가도 있었다. 
이런 평가들은 당시 수군이 자연재해 때문에 패배한 것이 아님을 알려 준다. 
자연재해로 인해 퇴각했다고 보기에는 수군의 피해가 너무나 엄청났다. 
자연재해 앞에 무슨 지략이 필요하겠는가. 
고구려군에게 호되게 당했던 것이 분명하다. 

고구려군은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바다와 육지에서 정면으로 맞서 피곤에 지친 적들을 물리쳤던 것이다.

이미 요서 지방의 수나라 군사기지들이 영양왕의 선제공격으로 파괴되었기 때문에 적들은 요서 지방에서 군사를 출동하지 못하고, 멀리 북경에서 군대를 출발했다. 
이것이 수나라 군대의 전쟁 수행능력이 떨어진 이유였다.

기록 속에 감춰진 고구려 군대의 활약상을 제대로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분명한 것은 영양왕의 선제공격이 결국 598년 전쟁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신집』 5권의 편찬

고구려는 오랜 역사를 가진 나라다. 
그런 많은 역사책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역사책이 국사 100권으로 유기라고 불렸다. 
『유기』는 그 양에서 보듯 오랜 기록문화의 소산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기록하기를 좋아했다. 

아차산에 있는 고구려 군사유적지에서 발굴된 토기에는 고구려 사람들이 토기에 자신의 것을 나타내기 위해 글자를 새긴 것을 볼 수 있다. 
덕흥리 벽화고분에는 활쏘기 경기를 할 때 그 성적을 기록하는 자가 있음을 볼 수 있다. 
귀족들만 문자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경당에서 일반 백성들까지 글자를 배워서 널리 활용했음을 알려 주는 것이다.

영양왕은 백성들에게 고구려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널리 알리고 싶었다.

“수나라를 물리친 위대한 고구려의 역사를 백성들에게 알려야 한다. 
『유기』 100권은 너무 어렵고 양이 많다. 
백성들도 쉽게 알 수 있는 책이 필요하다. 
고구려 역사를 가르쳐 백성들의 사기를 드높여야겠다.”

영양왕은 이런 마음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고구려 최고 교육기관인 태학의 박사 이문진이 『유기』 100권을 다듬어서 새로 『신집』 5권으로 만들었다. 
고대국가에서 역사서는 개인이 함부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국가에서 인정해 주지 않으면 만들 수 없는 것이다.

진을 비롯한 학자들에게 일반 백성들까지도 널리 고구려 역사를 알 수 있도록 압축된 내용을 담은 『신집』 5권을 만들도록 명령했음이 분명하다. 
신집 5권은 고구려가 수나라를 무찌른 다음 다음해인 서기 600년에 완성되었다.

『신집』 5권은 고구려인의 넘치는 자부심이 표현된 책이다. 
불행히도 『유기』 100권과 『신집』 5권은 현재까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만약 이 책들이 발견된다면 우리는 고구려사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강 유역을'

영양왕이 수와의 전쟁 못지않게 큰 중점을 둔 문제는 한강 유역 회복이었다. 
양원왕 시절 어쩔 수 없이 신라에 한강 유역을 양보한 고구려였지만 언제든지 국력이 회복되면 한강 유역은 반드시 회복해야 할 땅이었다.

영양왕은 매제인 온달을 보내 한강 유역을 회복하고자 했다. 
온달은 아차성 아래에서 신라군과 싸우다가 적의 화살을 맞고 죽었다.

온달이 실패했지만 영양왕은 한강 유역을 회복하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수나라와의 싸움이 조용해진 603년 영양왕은 장군 고승을 보내어 북한산성을 공격하게 했다.

신라에서는 진평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한강을 건너오고, 성 안에서는 북을 치고 떠들면서 고구려군에게 대항했다. 
고승은 적군이 많고 아군이 적음을 알고 군대를 철수해 버렸다.

영양왕은 608년 다시 장군을 보내 신라의 북쪽을 공격하여 8천 명을 포로로 잡아오는 전과를 거두고, 이어서 우명산성을 빼앗는 승리를 거두었다.

영양왕의 분명한 한수 유역 회복의지는 신라에게 대단한 위협이었다. 

신라 진평왕은 장차 고구려가 전력을 다해 한강 유역을 회복하려고 한다면 이를 막을 수 없다고 여겼다. 
진평왕은 608년 수나라에 고구려를 공격해 달라는 외교문서를 보냈다.

수나라의 힘을 빌어 고구려의 공격을 막아 보려는 신라의 태도는 고구려의 분개를 사기에 충분했다. 

영양왕은 눈앞에 다가온 수나라와의 전면전을 앞두고 있기에 한강 유역을 회복하기 위해 더 이상 군대를 동원하지는 못했다. 
신라는 611년에도 재차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해 달라고 부탁했다. 
고구려의 공격을 막기 위한 신라의 외교노력이었다.

수양제와 돌궐 외교전

비록 싸움에는 졌지만, 수문제는 뛰어난 정치가였다. 
그는 오랜 남북조시대의 분열을 끝내고 거대 제국을 세운 왕이었다. 
그는 고구려 공격 실패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고 안으로 국력을 다졌다.

수문제는 나쁜 아들을 두었다. 
둘째아들 양광은 욕심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왕이 되고자 태자인 형 양용과 아버지를 살해하고 왕이 되었다. 
그가 곧 수양제다.

대군만밑고"

수양제는 욕심 많고 사치스러운 사람이었으며, 백성들의 고통 따위는 신경쓰지도 않는 자였다. 
그는 100만 명을 동원해 대운하를 만들고, 고구려와 돌궐이 공격해 올까 두려워 만리장성을 수리하였고, 커다란 궁궐을 지었다. 
아버지와 형을 죽인 사람이니 백성들이 죽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 

지금도 중국인들은 수양제를 아주 싫어한다.

수양제는 욕망으로 가득찬 나머지 자신이 온 세계의 지배자가 되기를 바랐다.

607년 수나라에게 굴복한 동돌궐의 수도에 고구려 사신이 나타났다. 

영양왕은 동돌궐을 설득해서 고구려와 함께 수나라를 견제하자는 뜻으로 사신을 보낸 것이었다. 
동돌궐이 수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는 최악의 사태를 막고, 동돌궐이 수나라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도록 도와주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이때 수양제가 동돌궐의 왕인 계민가한의 막사를 방문하여 고구려 사신과 마주쳤다. 

수양제도 영양왕과 마찬가지로 동돌궐이 고구려와 연합하여 수나라를 공격해 오면 큰일이라고 판단했다. 
수양제는 아버지가 정복하지 못한 고구려를 굴복시킨다면 그것은 자신이 진정한 세계의 지배자가 됨을 의미한다고 믿고서 야욕을 드러내었다.

“사신은 들어라. 
나는 계민가한이 우리를 성심껏 받드는 까닭에 친히 이곳에 온 것이다. 
내년에는 내가 탁군(현재 북경)에 갈 것이니 그대는 귀국하는 날에 국왕에게 말하여 나에게 조공을 바치라고 일러라. 
그렇지 않으면 계민가한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공격할 것이다.”

수양제는 공개적으로 고구려에게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영양왕은 이 소식을 듣고 다시 전쟁준비를 했다.

“자기 아비를 죽이더니, 오만무도한 놈이로구나. 
너의 오만무도한 콧대를 꺾어 주리라.”

영양왕은 철저하게 전쟁준비를 했다. 
마찬가지로 수양제도 귀국하여 대규모로 군사들을 모아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명했다. 

수의 대신들은 고구려를 공격하다가 실패할 것을 두려워했다. 
특히 지혜로운 전술로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수가 통일국가를 이루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고경은 고구려 침공을 반대하였다. 
598년 고구려와의 1차 전쟁에서 크게 패배한 경험이 있어서 고구려를 두려워했다. 
양제는 그를 죽여 버렸다.

전쟁준비를 서두르다

수양제는 철저한 준비 끝에 612년 정규군 113만 8천 명, 보급병을 비롯한 보조인원을 합치면 거의 300만 명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의 대군으로 고구려를 공격했다. 
뿐만 아니라 성을 쉽게 오르는 데 쓰는 사다리인 운제, 성문을 부수는 충차, 불화살을 쏘는 화차, 큰 돌을 던지는 발석차 등 다양한 신무기를 개발하여 전쟁에 투입하였다.

612년은 영양왕 22년이다. 
영양왕은 어린 나이에 태자가 되어 25년간 왕이 될 수업을 받았기에 이때에 이미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노련한 영양왕은 육군은 을지문덕에게, 해군은 자신의 동생인 건무에게 각각 임무를 맡겼다.

수백만에 달하는 수군을 고구려는 어떻게 물리쳤을까. 을지문덕 장군이 뛰어난 지략을 발휘하여 살수대첩이 결정적 승리를 거둔 것은 사실이다. 

을지문덕이 혼자힘으로 수나라 대군을 무찌른 것은 아니다. 
살수대첩이 있기까지 고구려 군대는 여러모로 치밀한 준비를 했던 것이다.

원정군인 저들의 약점이 군량보급에 있었으므로 고구려는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 갈 준비를 했다. 
먼저 요동성을 비롯한 전방의 중요한 성들에 충분한 군량과 식수, 각종 무기와 의복, 생활도구 등을 준비했다. 

특히 적군이 갖고 있는 성을 공격하는 무기에 대비하여 방어용 무기도 충분히 만들어 준비시켰다. 
저들이 고구려에 와서 식량을 구하지 못하도록 지역별로 백성들을 이주시켰다. 
해군을 강화하여 적군이 해로를 통해 군량을 공급하는 것을 차단하도록 했다.

거란족과 말갈족 등 고구려에 복속한 무리들을 더욱 철저히 단속하여 고구려를 적극 돕도록 했다. 
영양왕은 여기에 수를 도우려고 한 백제를 먼저 공격하여 백제가 함부로 나서지 못하게 했다. 

백제는 말로는 수나라를 돕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중립을 지켰다. 
신라 역시 고구려의 위협이 무서워서 수나라를 제대로 돕지 못했다.

두 나라가 중립을 지키고 거란, 말갈이 고구려 편에서 활동함에 따라 고구려는 수나라만 막으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외교적 노력과 내부 정비는 을지문덕 장군이 아니라 영양왕과 고구려 백성들의 공적이다.

고구려 26대 영양왕(, 재위: 590〜618)은 재위 기간 동안 수나라의 침략을 네 차례나 받았지만, 모두 물리친 임금이었다. 
수나라 대군을 물리친 공은 모두 을지문덕(, ?~?)에게로 돌아가, 정작 당시 임금이었던 영양왕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영양왕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25년간의 태자 시절

영양왕은 고구려 25대 평원왕(, 재위: 559〜590)의 장남으로 이름은 원(), 또는 대원()이다. 
훤칠한 외모를 가진 그는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히 할 임무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 왕이었다. 
566년 태자로 책봉되어 25년 동안을 태자로 생활하다가, 590년 왕위에 올라 618년까지 29년간 재위하였다. 
고구려인의 평균 수명을 고려해 보았을 때, 영양왕은 매우 어린 나이에 태자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평원왕이 즉위한 559년 무렵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평원왕 재위 기간 동안 고구려는 유목 제국인 돌궐(), 북중국의 강자인 북주() 등과 전쟁을 하였고, 안으로는 강력한 귀족 세력의 틈바구니에서 을지문덕, 온달, 연태조 등 신흥 무장 세력이 새롭게 부상하는 정치적 격변기를 치렀다. 
586년 수도를 평양 장안성으로 옮기는 등 고구려에는 많은 변동이 있었다. 
영양왕은 어린 시절부터 당시 고구려가 겪었던 다양한 사건들을 지켜보며 왕이 될 자질을 키워갔다.

요동치는 국제 정세"

590년 영양왕이 즉위하였을 때, 그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과제는 요동치는 국제 정세에 어떻게 대응하느냐는 문제였다. 
5〜6세기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는 고구려를 포함하여 중원의 남조(, 송, 제, 양, 진)와 북조(, 북위, 동위와 서위, 북주와 북제), 그리고 북방의 유목 제국(유연, 돌궐) 등이 4강 내지는 5강을 이루며 서로를 견제하던 시대였다. 

고구려는 이같이 다원화된 국제 질서 속에서 상대적인 평화를 누리며 경제, 문화 등에서 큰 발전을 이룰 수가 있었다. 
589년 양자강 유역의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을 통일한 수나라의 등장은 고구려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수나라는 583년 이간정책을 펼쳐 북방의 강자인 돌궐을 동돌궐과 서돌궐로 분열시킨 뒤 585년에는 동돌궐을 굴복시키고, 서돌궐마저 약화시켰다. 
수나라의 초대 황제 문제(, 재위: 581〜604)는 이른바 ‘개황의 치’라 불리는 뛰어난 정치를 펼쳐 수나라를 초강대국의 지위로 격상시켰다.

수나라가 동아시아의 패권질서를 재편하면서 고구려는 수나라와 대결하느냐, 아니면 굴복하느냐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영양왕은 이때 수나라와의 대결을 선택했다. 
고구려는 당시 말갈, 거란 등 주변의 여러 세력들 위에 군림하던 강대국이었다. 

신흥 강대국이 등장할 때 기존의 약소국은 신흥 강대국에게 붙어 기존 강대국을 견제해 줄 것을 요구하지만, 기존의 강대국은 신흥 강대국과 대결을 통해 힘의 우위를 확인해야만 한다. 
싸우지도 않고 굴복할 경우에는 강대국의 지위를 순식간에 상실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영양왕은 진나라가 멸망한 직후부터 수나라와의 대결을 준비하며, 군사를 훈련시키고 군량미를 비축하는 등 국방을 강화하는 대비책을 세웠다.

영양왕, 선제공격에 나서다

수나라 문제는 고구려에게 성의와 예절을 다해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조서를 보내왔다. 
영양왕은 수나라와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영양왕은 선제공격에 나서 적의 보급기지를 파괴하는 전략을 택했다. 
성과 무기를 보수하는 방어 전략이 아니라, 선제공격으로 적과의 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는 공세 전략이었다. 
당시 수나라는 4,600만의 인구를 가진 세계 최고의 대국이었으며, 군사력 또한 최강이었다. 
영양왕은 이를 개의치 않았다.
598년 2월, 그는 궁성을 나와 요동으로 말을 달렸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말갈인으로 구성된 1만 기병과 만났다. 
그들은 요하를 건너 요서 지역을 기습 공격했다. 
수나라의 전진기지와 보급기지들을 파괴하기 위함이었다. 
수나라 영주총관 위충이 나와서 막았지만, 영양왕은 기습에 성공한 후 서둘러 퇴각했다.

수 나라의 공격을 막아내다

영양왕의 선제공격은 수나라의 자존심을 크게 건드렸다. 
수 문제는 즉시 자신의 4남 양량과 고경, 왕세적, 주라후 등을 앞세워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명했다. 
양량의 군대는 북경을 출발해 요서 지방으로 진군했지만, 군량 수송이 원활하지 못해 군사들은 굶주렸고 역병에 걸려 요하에 이르지 못하였으며, 심지어 장마까지 만나 퇴각하고 말았다. 

왕세적의 군대는 영주에서 퇴각했고, 주라후가 이끄는 해군은 폭풍을 만나 병선 대부분이 파괴되어 열의 여덟이나 아홉이 죽었다.
수나라의 패배는 질병과 홍수, 폭풍 등 자연재해가 주된 원인이었던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수나라 측의 기록에 원정군 참모인 고경이 최선을 다하지 않았고 지략이 부족한 것을 전쟁 패배의 원인으로 돌렸다는 사실이 있는 것을 보면, 단순히 자연재해 때문에 수나라 원정군이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영양왕의 선제공격으로 인해 군량 수송에 문제가 생겼고, 기록되지 않은 고구려군의 활약으로 패배한 것이 분명하다. 
수 문제는 전쟁에서 패하자, 고구려를 굴복시키겠다는 전략을 완전히 포기한다. 
영양왕의 과감한 선택이 고구려에 평화를 가져온 것이다.

신집 5권의 편찬

서기 600년 태학() 박사 이문진(, ?~?)은 고구려 초기에 만들어진 역사서 [유기()] 100권을 다듬어 [신집()] 5권을 완성했다. 
고대국가에서 역사서는 개인이 함부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국가가 자료를 독점하고 있어, 왕의 허락이 있지 않으면 함부로 만들 수 없었던 것이다. 
신집 5권 편찬은 이문진이 실무를 담당했지만, 이 책을 만들도록 명령한 영양왕의 업적으로 보는 것이 옳다. 
완성된 연대로 볼 때 고-수(고구려-수나라) 전쟁의 승리로 인한 고구려인의 자부심을 드높이기 위해 이 작업이 진행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신라에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라

[삼국사기] 온달 열전에 따르면 온달(, ?~590) 장군은 영양왕이 즉위한 후, 고구려가 지배했었던 한강 유역을 회복하기 위해 출전()했다가 아차성 아래에서 죽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온달이 신라의 영토를 공격한 것은 대체로 590년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비록 온달은 실패하였지만, 영양왕은 한강 유역을 회복하겠다는 의지를 버리지 않았다. 
603년 영양왕은 장군 고승()을 보내어 북한산성을 공격했다. 
신라 진평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방어에 나섬에 따라 북한산성을 차지하지는 못했다.

영왕왕은 포기하지 않고 608년 다시금 신라의 북쪽을 공격해 우명산성을 빼앗고 8천 명을 포로로 사로잡는 전과를 올린다. 
다급해진 신라는 608년과 611년 두 차례에 걸쳐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신라를 도와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왜국과의 관계 개선

400년, 신라 내물왕의 요청으로 고구려군이 신라 영토를 공격해온 왜군을 격퇴한 이래로, 고구려와 왜국의 관계는 소원한 상태였다. 
영양왕은 왜국과의 관계를 크게 개선했다. 
595년 영양왕은 혜자(, ? ~ 622) 스님을 왜국에 파견했고, 혜자는 615년까지 20년간 왜국에 머물면서 왜국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영양왕은 605년, 왜국에서 호류사()에 장육불상()을 만든다고 하자 황금 300량을 보내고, 담징(, 579~ 631) 등의 승려와 기술자, 화가 등을 파견하기도 했다.

영양왕이 왜국에 대한 원조를 아끼지 않은 것은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해 왜국으로 하여금 신라를 견제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고구려가 수나라와 대립하는 상황에서 신라가 고구려의 후방을 공격하지 않아야 수나라와의 전쟁에 모든 것을 쏟아 부을 수 있기 때문에, 왜국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고구려에게 큰 실익이 될 수 있었다.

신라 또한 이러한 상황에서 591년 남산성 축성, 593년 명활산성 증축, 서형산성 축성 등 왕경 주변에 요새를 건설하기에 나섰다. 
고구려와 왜국, 백제의 신라 견제가 심각한 위협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602년 왜국은 래목황자를 신라 정벌 장군으로 임명하고, 2만 5천의 군사를 준비시켰다. 
602년 8월 백제군은 남원에 집결하여, 신라의 아막성을 공격했다. 
왜국도 이에 맞춰 신라를 공격하고자 했으나, 왜국의 총사령관 래목황자가 병이 드는 바람에 출전하지 못했다. 
왜국이 참전하지 못함에 따라 고구려군도 출격을 미루고 있었다. 
이에 백제군이 홀로 신라군과 싸우다 아막성 전투에서 신라군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비록 고구려-왜-백제의 신라 공격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왜를 끌어들임으로써, 고구려로서는 신라를 견제하는 것에 성공하고 있었다.

돌궐에 보낸 사신

604년 수나라에서는 정변이 일어났다. 
고구려와 전쟁을 포기한 수 문제 대신, 그의 욕심 많은 둘째 아들 양광이 아버지 문제와 형인 양용을 죽이고 수 양제(, 재위: 604〜618)가 된 것이었다. 
수 양제는 토욕혼, 고창국, 돌궐 등을 정복한 후, 고구려마저 굴복시키려고 준비했다. 
다시금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영양왕은 수 양제의 위협에 대비하고자 사신을 돌궐에 보냈다. 
당시 돌궐에는 수 양제가 직접 군사들을 거느리고 동돌궐의 왕 계민가한(, ?〜609)을 만나러 왔었다. 
돌궐에서 고구려 사신을 만난 수양제는 고구려에 선전포고를 했다. 
고구려가 돌궐과 연합하는 것은 수나라가 몹시 두려워하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수 양제, 세 번걸쳐 고구려를 공격"

영양왕은 왜국, 돌궐 등과의 외교 교섭, 말갈족에 대한 지배권 강화, 신라에 대한 견제 등 수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했다. 
612년 수나라는 무려 113만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해왔다. 
이 전쟁은 요동성 방어 전투, 영양왕의 이복동생인 건무 장군의 평양성 전투, 그리고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 등으로 인해 고구려군의 완승으로 끝났다. 
전쟁 영웅은 을지문덕, 건무 등이지만, 여기에는 영양왕의 역할도 매우 중요했다. 

그가 집중한 것은 외교와 내치였다. 
을지문덕 장군이 살수대첩을 거두기 위해 청야전술(: 적이 이용할 식량과 물자를 없애 적을 지치게 만드는 전술)을 실시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인들이 한마음이 되어 식량을 적에게 주지 않기 위해 모두 들판을 비우고 성에 피신하는 단결력을 보여주었던 덕분이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영양왕의 내치가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613년 수나라가 30만 대군으로 다시 쳐들어오자, 고구려는 요동성에서 다시금 적을 물리쳤다. 
영양왕은 수나라군을 상대로 승리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지는 않았다. 

614년 수나라가 또 다시 군사를 내어 쳐들어오자 이미 항복해온 수나라 병부시랑 곡사정()을 되돌려 보냄으로써 싸우지 않고 적을 퇴각시켰다. 
수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엄청난 국력을 쏟았음에도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결국 나라가 흔들려 618년 멸망하고 말았다.
반면 영양왕은 수나라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고구려의 국제적 위상을 한껏 드높였다. 

요동 지역이 주요 전쟁터가 된 탓에 고구려의 패해도 컸다. 
영양왕은 전쟁에서 잡은 수나라 포로들을 적극 수용해 이들을 고구려에서 정착하게 살도록 하여, 이들과 함께 전후 복구 사업을 전개했다.



후손들이 기억한 영양왕

1456년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 1415~1482)는 세조에게 전대의 임금과 재상에게 제사를 지낼 것을 상소하였다. 
이로 인해 단군을 비롯해 삼국과 고려의 시조 등 12명의 역대 임금과 을지문덕 등 16명의 역대 신하들이 사당에 배향() 되었는데, 여기에는 영양왕도 포함되었다. 
그가 수나라 대군을 대파하고 고구려를 지킨 공을 후손들도 인정한 것이었다.

당나라의 역사가 두우()가 766년부터 30년에 걸쳐 편찬한 중국의 제도사 [통전()]의 <고구려전>에는 “고구려의 땅이 후한 시기(1~2세기)에는 사방 2천리였고, 위나라 시기(3세기)에는 남북이 점점 좁혀져 겨우 1천여 리였으나, 수나라 시기(581~618)에 이르러서는 점점 커져 동서 6천리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영양왕이 재위하던 시기에 고구려의 영토가 가장 커졌던 것이다. 
영양왕은 고-수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룩한 임금이었다.

수()나라의 문제()가 사신을 보내어 임금을 상개부의동삼사()로 임명하고, 평원왕의 요동군공()의 관직을 계승케 하고, 한 벌의 옷을 내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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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왕 2년(서기 591)

2년(서기 591) 봄 정월,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서 은혜에 감사하고 선물을 바친 다음, 임금으로 봉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문제가 이를 허락하고 3월에 임금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하고, 수레와 복식을 주었다.
여름 5월, 임금이 사신을 보내어 은혜에 감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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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왕 3년(서기 592)

3년(서기 592) 봄 정월,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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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왕 8년(서기 597)

8년(서기 597) 여름 5월,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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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왕 9년(서기 598)

9년(서기 598), 임금이 말갈의 군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서(西)를 침공하였으나, 영주총관() 위충()이 우리의 군사를 물리쳤다. 
수나라의 문제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화를 내면서, 한왕() 양()과 왕세적() 등을 모두 원수()로 임명하여 수륙군 30만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여름 6월, 문제가 조서를 내려 임금의 관작을 박탈하였다. 
한왕 양의 군대가 유관()에 도착하였을 때, 장마로 인하여 군량미의 수송이 이어지지 못했다. 
이로 말미암아 군중에 식량이 떨어지고 또한 전염병이 돌았다. 
주나후()의 수군은 동래()에서 바다를 건너 평양성()으로 오다가 풍파를 만나서 그의 선박이 거의 모두 유실되거나 침몰되었다.

가을 9월, 이들이 돌아갔으나 그들 대부분이 죽었다. 
임금은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고 표문을 올렸다. 
표문에서 자신을 ‘요동 미천한 곳의 신하 아무개’라고 자칭하였다. 
문제가 그때서야 군대를 철수하고 처음과 같이 대우하였다. 
백제의 왕 창(위덕왕)이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리고, 고구려로 향하는 수나라 군사의 길을 안내하겠다고 자청하였다. 
문제가 백제의 왕에게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고구려가 죄를 자복하여 내가 이미 용서하였으므로 그들을 칠 수가 없다.”
문제가 백제의 사신을 후하게 대접하여 보냈다.
임금이 이 사실을 알고 백제의 국경을 침공하였다.


  西 退                  使    使      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