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28일 목요일

거북선

거북선,

조선 수군의 최선봉 돌격선.
고려말 조선초에 왜적을 격퇴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여겨지며, 기록상으로는 조선초 문헌에 처음 나타난다. 
임진왜란 직전에 이순신() 장군이 창제귀선을 건조하여 왜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세계 최초의 돌격용 철갑전선()으로 평가된다.
시대 : 조선시대(1795년)
정의 : 1795년에 편찬된 <이충무공전서>의 기록에 따라 복원한 18C의 거북선.
거북선이 먼저 돌진하고 판옥선이 뒤따라 진격하여 연이어 지자·현자 총통을 쏘고, 포환과 화살과 돌을 빗발치듯 우박 퍼붓듯 하면 적의 사기가 쉽게 꺾이어 물에 빠져 죽기에 바쁘니 이것이 해전의 쉬운 점입니다.”
<이순신, 조진수륙전사장(條陳水陸戰事狀), 1593년 9월>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개전 이듬해인 1593년 조정에 보낸 보고서의 한 구절이다. 이순신 장군이 이 장계에서 자신 있게 언급했듯이 거북선()과 판옥선은 임진왜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를 뒷받침한 가장 강력한 물적 토대 중 하나였다.
고려말 조선초에 왜적을 격퇴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여겨지며, 기록상으로는 조선초 문헌에 처음 나타난다. 
임진왜란 직전에 이순신() 장군이 창제귀선을 건조하여 왜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세계 최초의 돌격용 철갑전선()으로 평가된다.
이순신 장군이 건조한 창제귀선()의 일반적인 외부의 형태와 전투력에 관해서만 기록하고 있으며, 실제 건조에 필요한 세부적인 치수에 대해서는 기록한 것이 없다. 
태종 때의 거북선과 이순신이 말한 거북선과의 관계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때 거북선은 이순신의 고안에 의해서 군관 나대용() 등이 실제로 건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거북선이 임진왜란 때 돌격전선으로서 기능을 발휘함에 따라 전란 후에는 그 모양이 조금씩 변하여 용머리[]는 거북머리[]로 바뀌고, 치수도 일반적으로 장대()해지는 등 차차 크게 건조되었는데, 1795년(정조 19)에 간행된 《이충무공전서()》에 ‘전라좌수영 거북선’ 및 ‘통제영 거북선’의 그림과 함께 건조에 필요한 부분적인 치수가 어느 정도 기록되어 있다. 
현재까지 전해오는 문헌 중에서 ‘거북선[]'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타나는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에는 1413년(태종 13) 5월 초에 “왕이 임진강 나루를 지나다가 거북선이 왜선으로 꾸민 배와 싸우는 모습을 보았다”고 하였고, 2년 후에는 다시 “거북선이 매우 견고하여 적선이 해치지를 못한다”고 되어 있으나, 어떤 형태와 규모였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적혀 있지 않아서 알 길이 없다. 
그 후 180여년 간 거북선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 않다가 이순신 장군의 임진년(1592) 일기인 《난중일기()》 2월 8일 기사에 “거북선에 사용할 돛 베() 29필을 받다”라는 기록이 있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거북선에 비치한 포()를 처음 발사한 날은 임진년(:1592) 3월 27일이며, 처음 해전에 참가한 것은 장계()에서 “5월 29일 사천해전()”이라 기록하고 있다.

거북선 – 갑판 위에 덮개를 씌운 특수한 구조의 군함.

거북선은 지붕 혹은 덮개 역할을 하는 개판()이 갑판의 윗부분을 덮고 있는 특수한 구조를 가진 군함이다. 그 덕택에 갑판에 근무하는 승조원들과 전투요원들이 적의 공격에 직접 노출되지 않고 내부에서 안전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일본군들은 해전에서도 적의 배로 뛰어들어 칼과 창으로 승부를 가리는 것을 선호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왜군들이 조선의 배로 뛰어들어 단병접전을 시도하지 못하게 막고, 조선의 장기인 활쏘기와 화약무기 사격으로 적을 제압할 수 있다면 이상적이었다. 그 같은 필요에 따라 기본 갑판 위에 갑판을 한 층 더 높인 군함이 판옥선이고, 갑판 위에 아예 덮개를 씌운 군함이 거북선이다.
거북선은 두꺼운 개판과 개판 위에 설치한 뾰족한 철침으로 적이 뛰어드는 것을 원천봉쇄할 수 있고, 적의 화살 공격은 물론이고 조총 사격도 어느 정도 막아낼 수 있었다. 
조선 수군의 주력 군함이었던 판옥선은 1층 갑판에 있는 인원들만 보호할 수 있고 2층 상장갑판의 전투요원은 노출된 공간에서 전투할 수 밖에 없었다. 거북선은 배에 탄 모든 사람을 실내에 보호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거북선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돌격함이다. 전선( ; 판옥선)의 윗갑판을 떼어내고 대신 둥근 개판을 설치한 것이 특징이다. 적군이 배 위에 올라올 수 없도록 개판 위에 과선처럼 칼과 송곳을 꽃아두었다. 
배앞과 좌우 방패판, 개판에 총포 구멍을 내고 대포를 장착하여 강력한 화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좌우에는 16개의 노와 2개의 돛이 있어 기동력(약11놋트)을 발휘할 수 있었다. 
승선 인원은 최대 150명이었으며, 내부가 2층으로 되어 있고 아래에선 노를 젓고 짐을 실었으며, 위에서는 총포를 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앞 뒤 2개의 출입문과 지붕에 4개의 비상문이 있고 앞의 용머리에서는 유황과 염초를 태워 연기를 퍼뜨려 적을 교란시켰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197년 뒤인 1795년에 편찬된 <이충무공전서>()가 있는데, 여기에는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통제영거북선과 전라좌수영 거북선의 45도 투시도 및 치수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거북선의 생김새와 만드는 방법, 전투 성능과 각 구조의 기능을 알아볼 수 있는 유익한 자료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배밑의 10쪽을 이어 붙였는데 길이는 64자 8치이고, 머리 쪽(이물) 너비는 12자, 허리(한판)의 너비는 14자 5치, 꼬리 쪽(고물) 너비는 10자 6치이다.

좌우 삼판은 각각 7폭을 이어 쌓아 올렸는데, 높이는 7자 5치이다. 맨 아래 첫째 판(부자리)의 길이는 68자이고, 차차 길어져서 맨 위 일곱째 판의 길이는 113자가 된다. 두께는 다 같이 4치이다.

이물비우는 가로다지로 4쪽을 이어 붙였는데 높이는 4자이고, 둘째 판 좌우에 현자총통 대포구멍을 각각 1개씩 뚫었다. 
고물비우는 가로다지로 7장을 이어 붙였는데 높이는 7자 5치이고, 위쪽 너비는 14자 5치, 아래쪽 너비는 10자 6치이다. 여섯째 판 한 가운데에 직경 1자 2치가 되는 구멍을 뚫어 키(치)를 꽂았다.

좌우 뱃전 밖으로 멍에 뺄목 위에 신방(도리)을 걸고 신방 머리 쪽에 멍에(가룡)를 가로로 걸쳤는데, 바로 이물(뱃머리) 앞에 닿게 되어 마치 소나 말의 가슴에 멍에를 맨 것 같다. 
신방을 따라 가면서 안쪽으로 널빤지를 깔고 신방 위에 기둥을 세우고 방패를 둘러 세웠다. 방패 위에 또한 언방(살림집의 도리와 같음)을 걸었는데 신방(현란)에서 언방(패란)까지의 높이는 4자 3치이다.

언방(패란)의 좌우 안쪽으로 각각 11장의 거북 잔등판을 겹쳐서 올려 덮었다. 그 잔등에는 1자 5치의 틈(등골)을 내서 돛대를 세웠다 뉘었다 하기 편하게 하였다.

뱃머리(이물)에 거북머리(용머리)를 달았는데 길이는 4자3치, 너비는 3자가 된다. 안에서 유황과 염초를 태워 입을 벌려서 마치 안개처럼 연기를 토함으로써 적을 혼란시켰다.

좌우에 노가 각각 10척씩 있고, 방패가 14개씩 있다. 그 방패에는 대포구멍이 뚫려 있다. 뱃머리(이물)의 거북머리(용머리) 위쪽에 2개의 대포구멍이 있고, 거북머리(용머리) 아래에 2개의 문을 냈다. 문 옆에 각각 1개씩의 대포구멍이 있다. 
거북잔등판 좌우에 각각 12개의 대포구멍을 뚫었다. 거북 ‘귀()’자 기를 꽂았다.
배의 좌우 겻집(포판) 아래에 방이 각각 12칸씩 있는데, 2칸은 철물을 쌓아두고 3칸은 대포와 활, 화살, 창, 검 등을 쌓아놓고, 나머지 19칸은 병사들이 휴식하는 곳으로 활용했다. 배 위 왼쪽 포판 위에 있는 방 1칸에서는 선장이 생활하고, 오른쪽 포판 위에 있는 방 1칸에서는 장교들이 생활했다.

거북선은 기본적으로 재질이 단단한 나무를 두껍게 사용해 배를 만드는 한선()의 DNA를 그대로 계승한 군함이었다. 1795년에 편찬된 [이충무공전서]는 거북선의 외판 두께가 4치(약 12~13cm)라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 연구자들이 구경 9mm급 조총의 관통력을 시험한 결과를 보면 30m에서 두께 4.8cm의 전나무 판자를 관통했지만, 거리 50m에서는 두께 4.8cm의 전나무 판자를 관통하지 못했다. 
조선 시대 군함은 전나무보다 더 단단한 소나무를 써서 주로 만들었다. 결국 조총으로 50m 이상 거리에서 두께 12~13cm의 거북선 외판을 관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군함에서 방패판 등 강도가 필요한 부분은 소나무보다 더 단단한 참나무를 이용했으므로 주요 부위의 방호력은 더욱 강력했을 개연성이 높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후기에 걸쳐 우리나라에서 널리 사용한 조총은 구경 13~16mm급이 많았는데, 김육(1580~1658)은 [잠곡유고]에서 “대포는 비록 3척(약 90cm) 두께의 방패라도 쉽게 뚫으나 (조총의) 철환은 1촌(약 3cm)도 뚫지 못한다”고 기록한 것도 참조가 된다.
일본에서 구경 9mm급 이상의 조총도 널리 사용했지만 위와 같은 여러 기록을 본다면 어지간한 조총으로는 50m 이상 거리에서 거북선의 외판을 관통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연희전문학교 3대 교장이기도 했던 H. H. 언더우드(Horace Horton Underwood, 1890~1951)도 1933년 영국왕립아시아학회 조선분과지에 발표한 그의 논문(Korea Boats and ships)에서 “거북선 개판의 두꺼운 나무 판자만으로도 충분히 일본군의 조총 사격은 막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돌격선.

거북선은 판옥선과 달리 갑판 윗부분까지 완전히 덮개를 씌우고 있었으므로 방호력 측면에서 훨씬 강력했다. 덮개를 씌웠을 때의 또 다른 장점은 적이 아군의 움직임을 전혀 볼 수 없다는 점이었다. 다시 말해 적이 아군에게 조준 사격을 하려 해도 그것조차 쉽지 않았다. 이순신은 조정에 승전 보고를 올리면서 이 같은 거북선의 특성에 대해 강조한다.
“신이 일찍이 왜적들의 침입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별도로 거북선을 만들었는데, 앞에는 용머리를 붙여 그 입으로 대포를 쏘게 하고, 등에는 쇠못을 꽂았으며 안에서는 능히 밖을 내다볼 수 있어도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게 하여 비록 적선 수백 척 속에라도 쉽게 돌입하여 포를 쏘게 되어 있으므로 이번 출전 때에 돌격장이 그것을 타고 나왔습니다.” 
<이순신,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 1592년 6월14일>
방호력을 바탕으로 거북선은 최선봉에서 돌격선 역할을 수행했다. 거북선이 최초로 출전한 전투로 알려져 있는 사천해전의 상황을 조정에 보고하면서 이순신 장군은 “먼저 거북선으로 하여금 적선이 있는 곳으로 돌진케 하여 먼저 천자, 지자, 현자, 황자 등 여러 종류의 총통을 쏘게 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은 1592년에 5월 벌어진 1차 당포해전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거북선으로 하여금 층루선() 밑을 치고 들어가 용의 입으로 현자철환을 치쏘게 하고 또 천자, 지자 철환과 대장군전을 쏘아 그 배를 깨뜨리자, 뒤따르고 있던 여러 전선들도 철환과 화살을 교대로 쏘았다.” 마치 인파이터 스타일을 구사하는 권투선수처럼 거북선이 적의 기함 역할을 했던 층루선에 바짝 붙어 함포를 대량 발사했다는 이야기다. 
거북선이 이처럼 초근거리로 접근해서 전투를 했다는 목격담은 일본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일본 측 기록인 [고려선전기()]는 1592년 7월10일 벌어진 안골포해전에서 거북선이 일본 배에 3~5칸(5.4~9m)까지 접근한 상태에서 총통으로 대형 화살형 발사체를 쏘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큰 배 중에 3척은 메꾸라 부네(:장님배)인데, 철로 요해하고 있었다. 석화시·봉화시·안고식 화살촉 등을 쏘며 오후 6시까지 번갈아 달려들어 공격을 걸어와 망루로부터 복도, 방패까지 모조리 격파되고 말았다. 석화시라고 하는 것은 길이가 5척6촌에 달하는 견고한 나무기둥이며, 봉화시의 끝은 철로 둥글게 든든히 붙인 것이다. 이와 같은 화살로 5칸, 혹은 3칸 이내까지 접근해서 쏘았다.”
조선 수군은 어느 정도 적선과 떨어진 거리에서 화약무기로 승부는 가르는 것을 선호했다. 하지만 파도가 치는 바다에서 대포를 쏘아 적함을 맞추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해상에서 사거리가 100미터가 넘는 경우 명중 정확도에 한계가 있었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쓰인 배가 거북선이었다고 할 수 있다. 
거북선은 판옥선보다 강한 방호력을 바탕으로 적선에 최대한 가깝게 접근해 코앞에서 명중탄을 날려 보낼 능력이 있었다. 최선봉에서 인파이터처럼 돌격하는 거북선은 그 후방의 판옥선이 적선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데도 도움이 됐고, 적의 전투대형을 직접적으로 교란하는데도 그만이었다. 거북선은 판옥선의 가장 훌륭한 전투 파트너였던 셈이다.

거북선의 발명?
거북선이 탁월한 배라면 거북선의 모든 것에 대해 명쾌한 결론이 나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문제다. 당장 거북선의 발명자를 놓고서도 다양한 견해가 있다. [태종실록]에는 1413년(태종 13년)에 한강에서 거북선()과 가상 왜선이 해전 시범을 보였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2년 뒤인 1415년에도 ‘거북선이 수많은 적에 충돌해도 적이 우리를 해칠 수 없다’는 설명도 나온다.


1979년 작성한 설계도에 따라1999년 다시 제작한 해군사관학교의 1대1크기 거북선 모형

해군사관학교 1대1 크기 거북선 복원 모형이 진해만을 항해하고 있는 모습

거북선의 발명자가 이순신 휘하의 군관이었던 나대용(1556 ~ 1612)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순신 장군이 실제 배를 만들 수 있는 조선 기술자는 아니었으므로 임진왜란 이후에도 해골선 등 여러 가지 새로운 군함을 만든 나대용이 실질적 발명자라는 주장이다. 

(태종 대) 이후 이순신 장군이 다시 거북선을 만들기까지 200여 년 동안 거북선에 대한 기록이 전혀 등장하지 않고 각종 함선의 보유량을 규정한 경국대전에도 거북선이 누락되어 있으므로 당시 거북선과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을 같은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최근에는 거북선의 발명자가 이덕홍(1541 ~ 1596)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거북선 그림과 구조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 이덕홍의 문집 [간재집]과 “이덕홍이 전쟁 직전에 류성룡에게 거북선 구상을 전달했고, 류성룡이 이를 다시 이순신에게 전달했다”는 안동 지역의 전설을 근거로 든다.

이 같은 주장은 모두 사료적 근거가 불투명한 개인 문집이나 지방지, 전설에 근거하고 있는 주장이어서 신뢰도에 한계가 있다. 

이순신의 장계나 조선후기의 모든 공식 기록에서 거북선을 이순신이 창제했다고 일관되게 기록하고 있다. 
당시 사회에서 거북선이라는 법 규정 외의 새로운 군함을 만드는 것은 지휘관의 결단이 필요한 일인데, 그 같은 결단을 내린 사람은 결국 이순신 장군이란 점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 개전 초반 이순신 장군이 보유했던 거북선은 3척이었다. 임진왜란 중 중국에 보낸 외교문서를 모아둔 [사대문궤]에는 전라좌수영 거북선이 5척으로 기록되어 있어 2척을 추가로 건조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최대 7~8척의 거북선을 보유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에는 한동안 이 숫자가 유지되다가 1746년 편찬된 [속대전]에는 거북선 보유량이 14척, 1770년의 [동국문헌비고]에는 40척으로 늘어났다. 1808년에 편찬한 [만기요람]은 30척, 1817년에 편찬된 수군의 함선 목록인 [선안]에는 18척으로 줄어들고 있다. 
 
거북선 숫자는 주력 군함인 판옥선의 보유량에 비하면 매우 적은 것이다. 1746년을 기준으로 거북선 보유량은 14척으로 판옥선 보유량은 117척에 비해 8분의 1에 불과했다. 기록상 가장 많은 거북선이 등장하는 1770년을 기준으로 따져도 판옥선 보유량은 83척으로 거북선 40척의 2배가 넘었다. 보유 척수로 보자면 판옥선이 조선 수군의 주력이고, 거북선은 돌격선이라는 특수한 역할을 맡은 군함이었던 셈이다.
현재까지 전해오는 문헌 중에서 ‘거북선[]'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타나는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에는 1413년(태종 13) 5월 초에 “왕이 임진강 나루를 지나다가 거북선이 왜선으로 꾸민 배와 싸우는 모습을 보았다”고 하였고, 2년 후에는 다시 “거북선이 매우 견고하여 적선이 해치지를 못한다”고 되어 있으나, 어떤 형태와 규모였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적혀 있지 않아서 알 길이 없다. 
그 후 180여년 간 거북선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 않다가 이순신 장군의 임진년(1592) 일기인 《난중일기()》 2월 8일 기사에 “거북선에 사용할 돛 베() 29필을 받다”라는 기록이 있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거북선에 비치한 포()를 처음 발사한 날은 임진년(:1592) 3월 27일이며, 처음 해전에 참가한 것은 장계()에서 “5월 29일 사천해전()”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이 건조한 창제귀선()의 일반적인 외부의 형태와 전투력에 관해서만 기록하고 있으며, 실제 건조에 필요한 세부적인 치수에 대해서는 기록한 것이 없다. 
태종 때의 거북선과 이순신이 말한 거북선과의 관계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때 거북선은 이순신의 고안에 의해서 군관 나대용() 등이 실제로 건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거북선이 임진왜란 때 돌격전선으로서 기능을 발휘함에 따라 전란 후에는 그 모양이 조금씩 변하여 용머리[]는 거북머리[]로 바뀌고, 치수도 일반적으로 장대()해지는 등 차차 크게 건조되었는데, 1795년(정조 19)에 간행된 《이충무공전서()》에 ‘전라좌수영 거북선’ 및 ‘통제영 거북선’의 그림과 함께 건조에 필요한 부분적인 치수가 어느 정도 기록되어 있다. 
16세기 말 건조된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의 모형. 경남 진해시 해군사관학교 앞바다 에있다.



1795년대의 통제영 거북선
출처/소장 : 이충무공전서(청주판)/ 이원식
<이충무공전서>의 권두에 거북선에 대한 구조, 성능, 설명문과 통제영 거북선 및 전라좌수영 거북선 그림이 그려져 있다. 
우리 나라의 역사 서적이나 학교의 교과서에는 전라좌수영거북선의 그림을 인용하고 이를 이순신 창제 거북선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이는 1795년식 으로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만든 것과는 구조와 형태 성능이 다르다.
1795년대의 거북선 복원 모형 측면(축적 : /)
출처/소장 : 원인고대선박연구소 복원/한국해양대학교 박물관
거북선의 복원 도면은 <이충무공전서>에 그려져 있는 전라좌수영 거북선 그림을 기본으로 하였으며 <조선왕조실록>, <비변사등록>, <각선도본>, <헌성유고>, <조선삼도수군조련전진도>, <귀선의 과학적연구>, <조선왕조군선연구> 등을 참고로 하고 김재근 교수의 고증 및 지도에 따라 전통한선의 설계 기법으로 도면을 작성했다. 
전통한선 조선 기술 기능 보유자가 전통한선의 조선 공작 기법으로 복원 건조하였다.


고증 : 김재근/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해양조선공학과 명예교수
설계 감리 및 공작 : 이원식/한국해양대학교 해양박물관 명예겸임교수, 장보고연구소 연구원, 원인고대선박연구소 소장
선장( = 배 목수) : 이동수, 안광천

1795년대의 거북배 복원 도면(축적 : /)
이원식/한국해양대학교 장보고연구소 연구원 및 명예겸임교수, 원인고대선박연구소 소장
1795년대 거북선을 만들기 위한 추정 복원 설계 도면

배밑의 길이 : 65자(20.30m)
너비 : 14자5치(4.53m)
길이 : 105자(32.8m) - 추정 치수
너비 : 34자(10.62m) - 추정 치수
깊이 : 7자5치(2.34m)
1795년대의 거북선 복원 3D Data,  그래픽 - Camera view
제공자 : 코리아비주얼스
설명 : 1795년대의 거북선을 디지털화 하기 위한 3D 디지털 복원 작업, 
1795년대의 거북선은 1592년대의 거북선과는 달리 덩치가 커지고 용두의 목도 길어졌다.

복원과정 특징: 1795년대의 거북선 복원 도면(정면, 좌측면, 우측면, 윗면, 아래면)을 토대로 3D 툴을 활용하여 모델링, 매핑, 라이팅 작업으로 디지털 복원하였다. 거북선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돌격함이다. 
전선( ; 판옥선)의 윗갑판을 떼어내고 대신 둥근 개판을 설치한 것이 특징이다. 
적군이 배 위에 올라올 수 없도록 개판 위에 과선처럼 칼과 송곳을 꽃아두었다. 

배앞과 좌우 방패판, 개판에 총포 구멍을 내고 대포를 장착하여 강력한 화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좌우에는 16개의 노와 2개의 돛이 있어 기동력(약11놋트)을 발휘할 수 있었다. 

승선 인원은 최대 150명이었으며, 내부가 2층으로 되어 있고 아래에선 노를 젓고 짐을 실었으며, 위에서는 총포를 쏠 수 있게 하였다. 
앞 뒤 2개의 출입문과 지붕에 4개의 비상문이 있고 앞의 용머리에서는 유황과 염초를 태워 연기를 퍼뜨려 적을 교란시켰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197년 뒤인 1795년에 편찬된 <이충무공전서>()가 있는데, 여기에는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통제영거북선과 전라좌수영 거북선의 45도 투시도 및 치수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거북선의 생김새와 만드는 방법, 전투 성능과 각 구조의 기능을 알아볼 수 있는 유익한 자료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뱃머리(이물)에 거북머리(용머리)를 달았는데 길이는 4자3치, 너비는 3자가 된다. 안에서 유황과 염초를 태워 입을 벌려서 마치 안개처럼 연기를 토함으로써 적을 혼란시켰다.

배의 좌우 겻집(포판) 아래에 방이 각각 12칸씩 있는데, 2칸은 철물을 쌓아두고 3칸은 대포와 활, 화살, 창, 검 등을 쌓아놓고, 나머지 19칸은 병사들이 휴식하는 곳으로 활용했다. 
배 위 왼쪽 포판 위에 있는 방 1칸에서는 선장이 생활하고, 오른쪽 포판 위에 있는 방 1칸에서는 장교들이 생활했다.

배밑의 10쪽을 이어 붙였는데 길이는 64자 8치이고, 머리 쪽(이물) 너비는 12자, 허리(한판)의 너비는 14자 5치, 꼬리 쪽(고물) 너비는 10자 6치이다.

좌우 삼판은 각각 7폭을 이어 쌓아 올렸는데, 높이는 7자 5치이다. 맨 아래 첫째 판(부자리)의 길이는 68자이고, 차차 길어져서 맨 위 일곱째 판의 길이는 113자가 된다. 두께는 다 같이 4치이다.

이물비우는 가로다지로 4쪽을 이어 붙였는데 높이는 4자이고, 둘째 판 좌우에 현자총통 대포구멍을 각각 1개씩 뚫었다. 고물비우는 가로다지로 7장을 이어 붙였는데 높이는 7자 5치이고, 위쪽 너비는 14자 5치, 아래쪽 너비는 10자 6치이다. 여섯째 판 한 가운데에 직경 1자 2치가 되는 구멍을 뚫어 키(치)를 꽂았다.

좌우 뱃전 밖으로 멍에 뺄목 위에 신방(도리)을 걸고 신방 머리 쪽에 멍에(가룡)를 가로로 걸쳤는데, 바로 이물(뱃머리) 앞에 닿게 되어 마치 소나 말의 가슴에 멍에를 맨 것 같다. 
신방을 따라 가면서 안쪽으로 널빤지를 깔고 신방 위에 기둥을 세우고 방패를 둘러 세웠다. 방패 위에 또한 언방(살림집의 도리와 같음)을 걸었는데 신방(현란)에서 언방(패란)까지의 높이는 4자 3치이다.

언방(패란)의 좌우 안쪽으로 각각 11장의 거북 잔등판을 겹쳐서 올려 덮었다. 
그 잔등에는 1자 5치의 틈(등골)을 내서 돛대를 세웠다 뉘었다 하기 편하게 하였다.
뱃머리(이물)의 거북머리(용머리) 위쪽에 2개의 대포구멍이 있고, 거북머리(용머리) 아래에 2개의 문을 냈다. 
좌우에 노가 각각 10척씩 있고, 방패가 14개씩 있다. 
그 방패에는 대포구멍이 뚫려 있다.
문 옆에 각각 1개씩의 대포구멍이 있다. 

거북잔등판 좌우에 각각 12개의 대포구멍을 뚫었다. 그리고 거북 ‘귀()’자 기를 꽂았다.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

칠천량해전,戰.

정유재란 때인 1597년(선조 30) 7월 15일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일본 수군과 벌인 해전.
칠천량()해전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중 일본은 명나라와의 화의가 결렬되자 1597년 조선을 재차 침략하기 시작했다. 같은해 7월 일본은 앞서 조선 수군에게 패배하였던 한산도를 다시 공격하기 위하여 먼저 정탐으로 가나메 도키쓰라[]를 밀파하여 조선군을 유혹하니 도원수(권율()은 원균을 불러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명령하였다.
이에 원균은 전병력을 동원하여 7월 7일 다대포()에서 일본군의 빈 군함 8척을 불사르고 서생포(西)에 이르러 적의 주력함대를 만나 패전하고 일부 군사는 풍랑으로 표류하는 지경이 되었다. 간신히 가덕도()에 당도한 원균은 다시 일본군의 복병을 만나 막대한 손해를 입고 거제도 앞 칠천에 정박하고 말았다. 
이 전투의 패전으로 사기가 떨어진 원균은 도원수 권율에게 패전의 책임을 추궁당하여 태형()까지 받게 되었는데, 이에 원균은 불만과 실의에 빠져 군사를 돌보지 않고 전략상 해전에 불리한 칠천에서 이진()도 않고 그대로 있다가 다시 일본군 함대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일본군은 도도 다카토라[]와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전함 수백 척을 이끌고 부산에서 출진()하고, 고니시 유키나가[西], 시마즈 다다유타[] 등의 육군도 칠천으로 향하였으며 가토 요시아키[]의 수군까지 합세하여 공격하였다. 
결국 원균은 일본군의 수륙양면공격을 받아 대패하고 자신도 육지로 탈출하다가 전사하였다. 이 해전의 승리로 일본군은 한때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조선군은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의 용사가 전사하고 경상우수사 배설()만이 생존하여 12척의 전함을 이끌고 한산도로 후퇴하였다.
임진왜란·정유재란 가운데 조선 수군이 유일하게 패배한 해전이다. 
임진왜란 중 명나라와의 화의가 결렬되자, 일본은 1597년 1월 다시 조선을 침범했다. 일본은 지난번 조선 침범이 실패한 것은 바다를 제패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해 먼저 수군통제사 이순신()을 제거하려는 이간책을 꾸몄다.
당시 조정에서는 중신들이 당쟁에 휘말려 이순신을 하옥하고 원균을 수군통제사로 임명한 상태였다. 일본군은 조선 수군을 부산 근해로 유인해 섬멸하려고 일본의 이중첩자인 요시라()를 시켜 유혹했다.
이에 도원수 권율()은 도체찰사 이원익()과 상의해 원균에게 출전명령을 내렸다. 원균은 무모하게 출전해 보성군수 안홍국() 등을 잃고 되돌아왔다. 그리고 한산도의 본영()에 앉아서 경상우수사 배설()이 웅천()을 급습하도록 하였다.
배설이 전선() 수십 척을 잃고 패하자, 권율은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원균을 태형()에 처한 뒤 다시 출전하라고 명하였다.
원균은 부산의 적 본진()을 급습하려고 삼도 수군 160여 척을 이끌고 한산도를 출발하였다. 7월 14일 원균은 부산 근해에 이르러, 이 사실을 미리 탐지한 적들의 교란작전에 말려들어 고전하였다.
더욱이 되돌아오던 중 가덕도에서 복병한 적의 기습을 받아 400여 명을 잃었다. 원균이 칠천량(지금의 거제시 하청면)으로 이동하여 무방비 휴식 상태에 있을 때 적은 조선 수군을 기습할 계획을 세웠다.
도도()·와키사카()·가토() 등 수군 장수들이 7월 14일 거제도 북쪽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15일 달밤을 이용해 일제히 수륙양면 기습작전을 개시하였다.
이에 당황한 원균과 여러 장수들은 응전했으나 적을 당해낼 수 없어 대부분의 전선들이 불타고 부서졌다.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충청수사 최호() 등 수군 장수들이 전사하였다. 원균도 선전관 김식()과 함께 육지로 탈출하였다.
그러나 원균은 일본군의 추격을 받아 전사하였다. 경상우수사 배설만이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남해 쪽으로 후퇴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삼도 수군은 일시에 무너지고 적군은 남해 일원의 제해권을 장악해 서해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우키타()·고니시(西)·모리() 등은 쉽게 남원 및 진주 등지로 침범하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7월 21일 원균과 함께 탈출하다가 원균은 죽고 겨우 살아 나온 김식에게서 패전 보고를 듣고 크게 놀라 백의종군()하고 있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해 수군을 수습하게 하였다.

북관대첩, 北關大捷.


유형사건
시대조선/조선후기
성격사건, 전투
발생·시작 일시1592년(선조 25) 9월
종결 일시1593년(선조 26) 2월
관련장소길주, 경성, 명천
관련인물·단체정문부, 가토 기요마사


임진왜란 때 북평사 정문부가 경성의 선비 이붕수 등 수백 명의 의병과 함께 함경북도 길주군의 쌍포와 함경남도의 단천 등지에서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를 격파하여, 함경도 지역에서 왜군을 몰아낸 싸움.

함경북도 김책시 임명동에 세운 전승기념비. 임진왜란 당시 함경북도 북평사 직을 맡고 있던 정문부(鄭文孚) 장군이 의병을 모아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왜군을 무찌른 전투를 소상히 기록한 전승비이다.

1592년(선조 25) 9월부터 1593년 2월까지 정문부의 조선군에 의해 수행된 함경도 북부인 북관() 지역 수복 전투.
1592년 9월부터 1593년 2월까지 함경도 북평사 정문부는 군사를 정비하여 경성, 장평, 임명, 백탑교 등 네 곳에서 승첩을 거두어 관북() 지역을 회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를 통칭하여 ‘북관대첩()’이라고 한다. 북관대첩을 통해 함경도에 주둔한 가토 휘하 일본군의 한성 철수를 강요하여 평양성 전투와 함께 전쟁의 국면을 조선에게 유리하게 이끌었다.
1592년(선조 25) 4월, 조선을 침공한 일본군은 5월 초 한성을 함락시킨 이후 곧바로 북상하기 시작하였다.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의 일본군은 6월 함경도로 진입하여 안변()에 본진을 두고 계속 북상하면서 7월 중순에는 성진()에서 북병사 한극성()의 조선군을 격파하였다.
한편 회령의 토관 국경인() 등은 반란을 일으켜 가토에게 투항하고 반란군이 붙잡은 조선의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가토에게 넘겨주었다. 가토는 명천() 이북의 8고을을 국경인 등의 반란 세력에게 맡기고, 길주, 성진, 단천, 이원, 북청의 5지역을 자신의 부대에서 나누어 주둔하도록 하였다.
경성()에 있던 북평사() 정문부()가 9월 초에 이 지역 군사를 모아 반격을 준비하자, 종성부사 정현룡(), 경원부사 오응태() 등이 합세하여 병력이 1천여명에 이르렀다. 북도의병 대장으로 추대된 정문부는 9월 16일 경성을 공격하여 이 지역을 지배하던 반역자 국세필()을 처단하고, 이어서 회령과 명천 지역의 반란 세력을 토벌하고 이 지역을 수복하였다. 여세를 몰아 정문부는 10월 말 정현룡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길주() 주변 지역을 약탈하던 일본군을 장평()에서 공격하여 수백 명을 참수하는 큰 전공을 세웠다. 이에 놀란 길주성의 일본군은 성문을 닫고 방어에 급급하였다.
고립된 길주의 일본군을 구원하기 위해 마천령() 이남의 일본군이 지원에 나섰으나, 12월 이들을 쌍포()에서 맞아 승리하였다. 이에 길주성에서 고립된 일본군은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 1월 19일 결사대 1백여 명이 출격하여 길주성에서 탈출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남문에서 매복한 정문부이 이끄는 군대의 공격을 받아 다시 성으로 돌아갔다. 한편 길주 남쪽의 단천()에 주둔한 일본군을 구축하기 위해 1월 22일에는 정문부의 기병 2백여 명이 출동하여 단천 인근에서 일본군을 격멸함에 따라 길주의 일본군은 더욱 고립되었다.
길주성의 일본군이 완전 고립 상태에 빠지고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공격하여 수복하였다는 소식을 접하자, 안변에 주둔하던 가토는 길주성의 일본군을 구출하여 철수하기 위해 직접 2만여 군사를 거느리고 마천령을 넘어 전진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정문부는 단천을 공격 중이던 군사를 일단 철수시켰다. 정문부는 군사 3천명을 거느리고 길주 남쪽 임명()에 매복하여 가토 군을 기다렸다. 1월 28일 임명 북쪽 백탑교()에서 가토 군을 요격하여 피해를 입혔으나, 조선군도 피해가 적지 않아 일단 길주 북방인 명천()으로 철수하여 전열을 정비하였다. 가토의 일본군은 간신히 길주성으로 들어가 길주에 고립된 부대와 합류하여 그날 밤중으로 서둘러 안변으로 돌아갔다.
북관 일대의 패배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고 길주의 고립된 일본군을 구출한 가토는 길주 이남의 일본군을 2월 20일까지 함흥에 집결시켰다가 안변부로 이동시키고 동시에 안변의 병력과 함께 한성으로 철수하였다. 아울러 안전한 철수를 위해 가토는 함경도의 맹산, 양덕을 거쳐 평양성을 공격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려 가토 군의 철수 중 측후방의 위협을 받지 않고 2월 말 안전하게 한성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정문부의 북관대첩을 통해 국경인 등 반란자를 제거하고 주민을 수습하여 내전의 화를 면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군과 맞서 싸울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아울러 북관대첩을 통해 함경도에 주둔한 가토 휘하 일본군의 신속한 한성으로의 철수를 강요함으로써 조명연합군에 의한 평양성 전투와 함께 임진왜란의 국면을 조선에게 유리하게 이끌었다.

북관대첩비, 北.
임진왜란 때 정문부()를 대장으로 한 함경도 의병의 전승을 기념한 전공비.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19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비에는 함경도 의병이 가토 기요마사[]가 거느린 왜군을 무찌른 일, 왜란이 일어나자 반란을 일으켜 함경도로 피난한 두 왕자를 왜적에게 넘긴 국경인()을 처형한 전말등 사실이 1,500자 비문에 소상히 적혀 있다. 
임진왜란 당시 함경북도 북평사 직을 맡고 있던 정문부(鄭文孚) 장군이 의병을 모아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왜군을 무찌른 전투를 소상히 기록한 전승비이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함경북도 길주지역에서 당시 의병장 정문부(鄭文孚·1565∼1624)가 이끌었던 함경도지역 의병들의 왜군 격퇴를 기념하기 위해 100여년이 지난 후인 숙종 때(1707년) 함북 길주군 임명 지역에 세웠던 승전비.

높이 187㎝, 폭 66㎝, 두께 13㎝. 함경도 의병이 가토[加藤淸正]가 거느린 왜군을 무찌른 것, 왜란이 일어나자 반란을 일으켜 함경도로 피난한 두 왕자를 왜적에게 넘긴 국경인(鞠敬仁)을 처형한 전말 등이 1,500자 비문에 소상히 적혀 있다.

임진왜란 당시 함북 길주지역의 전투는 정문부의 빼어난 전투 지휘 등에 힘입어 임진왜란 전사에 길이 남을 만한 대승으로 평가받고 있다. 

1905년 러일전쟁 당시 함경도 지방에 진출한 일본군이 주민들을 협박해 이 비석을 파내어 일본으로 강탈해 간 이후 일본 야스쿠니신사 경내 구석에 방치돼 왔다. 그러다가 1978년 한국사 연구자인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이 북관대첩비를 발견한 이후 반환 운동이 일어났고, 결국 2005년 10월 한국에 반환되었다.

2006년 3월 한국 정부는 북관대첩비를 원래 위치에 복원시키기 위해 북한에 인도하였다.

조선 숙종 때 함경도 북평사()로 부임한 최창대()가, 함경북도 길주군 임명()에 건립하였다. 1905년 러일전쟁 때 함경지방에 진출한 일본군 제2예비사단 여단장 소장 이케다 마시스케[]는 주민들을 협박하여 비석을 파내 일본으로 옮겼다. '군국일본'의 상징인 도쿄 지요다[]구의 야스쿠니신사[]에 방치되었다.
비문에 이름이 있는 의병의 후손들이 일본 정부에 청원서를 내는 등 반환운동을 벌인 끝에 2005년 10월 20일에 한국에 반환되었다.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에 안치되어 일반인들에게 공개되다가 2006년 3월 1일에 비석이 원래 있던 곳에 복원하기 위해 북한으로 전달 되고 국립중앙박물관, 독립기념관, 의정부 정문부장군묘역의 세곳에 복제비를 세웠다.
함경북도 북평사 직을 맡고 있던 정문부()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모아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군을 무찌른 전투를 소상히 기록한 전승비이다. 높이 187cm, 너비 66cm 두께 13cm로 1500자가 새겨져 있다. 
1707년(숙종 34) 북평사 최창대가 함경북도 길주군 임명면(현 김책시 임명동)에 세웠다. 1905년 러일 전쟁 당시 일본군 제2사단 17여단장 이케다 마시스케() 소장이 일본으로 가져갔고, 그 후 반환될 때까지 야스쿠니 신사에서 보관되었다.
1978년 재일 한국인이자 한일 관계의 권위있는 연구자인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이 우연하게 야스쿠니 신사에서 북관대첩비를 발견하였다. 그 후 한국 정부는 일본에 반환을 요청하였으나 성사되지 못하였다. 
2005년 3월 28일한일 불교복지협의회가 베이징에서 북한의 조선불교도연맹과 만나 최종적으로 북관대첩비를 북조선에 반환하기로 합의하였다. 동년 10월 20일한국으로 반환되었으며, 28일에는 서울 용산구로 신축 이전된 국립중앙박물관 이전 개관식 때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각계 인사와 일반인들이 참여한 가운데 공개되었다.
2006년 2월 13일 남북간에 북관대첩비 북조선 환송에 관한 협의를 가져, 3월 1일에 개성에서 인도하기로 하였으며, 3월 23일북관대첩비가 원래 자리에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4월 25일에는 북관대첩비의 복제비가 건립되어 경복궁에 전시되었다. 
현재 북한은 2만 여m² 보호구역을 조성하여 보존하고 있으며, 받침돌도 건립 당시의 받침돌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비문 번역은 북한 사회과학원 민족고전연구소에서 진행했으며, 작업은 후보원사이자 교수, 박사인 최동언 연구사가 담당했다.
임진왜란 때인 1592년 정문부가 이끈 의병이 왜군을 물리치고 함경도를 탈환한 전투.
1592년 10월 20일부터 1593년 2월 28일까지 함경도에서 정문부()가 이끈 의병이 가토 기요마사[]가 이끈 왜군을 물리치고 함경도를 탈환한 전투이다. 
함경도를 가리키는 ‘북관()’이라는 명칭을 써서 ‘북관대첩’이라고 하며, 《조선왕조실록》의 ‘선조실록()’, 《연려실기술()》, 《북관대첩비()》 등에 관련된 기록이 전해진다.
1592년(선조 25) 5월 22일 부산에 도착한 일본군은 6월 11일에는 조선의 수도인 한양을 점령했으며, 6월 26일 임진강전투에서 조선군을 물리치고 평안도와 함경도로 진격했다. 
고니시 유키나가[西]가 이끈 제1군과 구로다 나가마사[]가 이끈 제3군은 조선의 조정이 피신해 있는 평양성 공략에 나섰으며, 가토 기요마사가 이끈 일본군 제2군은 함경도 방면으로 향했다.

선조는 6월 9일(음력 4월 30일) 한양을 벗어나 피난을 가면서 아들인 임해군() 이진()과 순화군() 이보.

임진왜란  한양을 함락시킨 조선침공군 제2군인 가토 기요마사의 2만 2000 군대는 곧바로 함경도로 진격했다. 곳곳에서 조선군이 속수무책으로 대응했기 때문에 함경도도 곧바로 무너지고 왕자 임해군 순화군이 붙잡혔으며 국토의 끝 온성까지 왜군이 진격해 만주의 여진족과도 전투를 벌일 지경이었다.
만주의 여진족이 준동하고 정말수, 국경인, 국세필 함경도 토호반란까지 일어나고 있었다.

당시 북평사로 있던 정문부 1592년 10월 20일(음력 9월 16일) 이붕수, 지달원, 강문우, 최배천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정문부는 먼저 강문우에게 기병을 몇을 주어 국세필 반란군이 있는 경성 길주 간의 소식통이 끊기게 하였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거병하여 정문부는 창의대장, 종성부사 정현룡은 부장, 이붕수는 창의별장, 강문우는 척후장이 되었다.

경성 전투.
먼저 정문부는 의병 300명을 이끌고 반란군 대장 국세필이 있는 경성으로 갔다. 정문부는 국세필의 권한을 인정하고 회유하여 경성에 입성할 수 있었다. 왜군의 순찰병 40명이 성 근처로 왔으나 강문우의 20명 기병대에 의해 모두 죽임을 당했다.
정문부는 경성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의병들을 훈련시켰으나 그를 받아들인 국세필은 정문부를 자주 의심해 죽음의 위협까지 주었으나 정문부는 절대 내색하지 않았다. 
경성과의 연락이 끊긴 것을 눈치 챈 길주 가토 우마노조는 휘하 장수에게 92명의 군사를 주어 경성으로 가게 하였다.
국세필과 그의 아들 국생이 왜국 장수를 죽였고 김범 이희당이 화살을 쏘아 왜군 다수를 사살하고 도망가던 왜군은 강문우의 기병대가 모두 쓸어버렸다.

회령-명천 전투.
1592년 10월 회령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국경인 신세준과 그의 유생들에 의해 살해당하자 정문부는 남은 반란자인 정말수를 치기 위해 명천으로 군사를 몰았다. 명천에서는 정말수를 몰아내려는 농민 봉기가 일어났으나 정말수가 화포를 동원해 막아 실패하였다.
정문부는 오촌권관 구황과 강문우에게 각각 30명의 기병과 몇몇의 제장들을 주어 총 60명의 기병대로 명천을 습격하라 명했다. 갑작스런 공격에 정말수는 성을 빠져나와 산에 숨었는데 경성 토병 진덕인에 의해 붙잡혀 그의 부장으로 함께 처형당했다.
정말수의 반란을 평정한 정문부는 그 동안 경성을 지배하던 국세필과 그의 일당들을 처형하여 함경도의 반란군들을 모두 진압하였고 백성들이 경성으로 모여들어 함경북도가 왜군의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1592년 10월 20일까지 약 3,000여 명의 군사를 확보하게 되었다.

길주성 포위.
정문부는 왜군이 지키는 길주성으로 가기 위해 군사 1000명을 이끌고 명천성으로 나아갔다. 몇몇 사람들이 말렸으나 정문부는 왜군과의 전면전으로 주장하며 진격했다. 이 무렵 길주성에는 약 1000명, 성 남쪽 영동에는 300명이 주둔하며 서로 의지하고 있었다.
정문부는 군사를 3개로 나누어 경성 이북 출신 군사 1000명은 자신과 정현룡이 맡고 길주 출신 군사 1000명은 고령 첨사 유경천에게 주어 갯마을에 진을 쳐 왜군을 감시하게 하고 경원 부사 오응태에게 길주 양리와 서북보의 토병을 관리하게 하고 정병을 징병해 복병을 두었다. 
정문부는 인의지방 사람 원충서에게 군사 200명을 주어 길주 북쪽 야간창에 진을 치게 하고 또한 명천에서 400명의 군사를 중요 고참 지방에 배치시켰다.

석성령 전투.
1592년 12월 3일(음력 10월 30일) 왜군 1000명은 명천 갯마을 가파리를 약탈하고 돌아오던 중 석성령에서 원충서의 200명 군대와 맞닥드렸다. 이에 왜군이 후퇴하자 원충서는 추격하기 시작했다. 왜군의 수가 많아 잠시 병사를 물리고 방어하던 중 고참에 매복하던 방원 만호 한인제의 기병 300명이 원충서와 합류했다.
한인제 외에 여러 복병들이 원충서와 합류하자 왜군 장수 5명이 400명의 정예 군사를 이끌고 돌격한다. 그러나 조선군의 기병을 중심으로 평지 돌격전을 펼쳐 왜군은 퇴각하기 시작했고 퇴각 도중 곳곳에서 등장하는 조선군 복병들을 당해내지 못하고 장덕산 위에서 괴멸당하고 말았다.
정문부는 남은 잔당들을 토벌하기 위해 산에 불을 질렀고 이 전투에서 깃발 20개, 갑옷 50벌, 투구 8벌, 창 16자루, 조총 26자루, 탄환 646개, 화약통 15개, 말 118필, 수많은 일본도 등을 노획했다.

길주 전투.
1592년 12월 4일(음력 11월 1일) 정문부는 드디어 길주성을 치기 위해 군사를 3개로 나눠 성을 포위했다. 하지만 2차례에 걸쳐 성을 공격했으나 피해만 늘어갔다. 이에 정문부는 군대를 길주성 주변에 매복시키고 정예 병력들만 데리고 영동에 주둔하던 왜군을 공격한다.
그 무렵 영동에서는 왜군이 분탕질을 하고 있었고 이를 본 길주 토병 김국신이 정문부에게 보고하자 정문부는 자신의 3개 부대를 이끌고 영동을 공격해 괴멸시키고 주검을 10여리 걸쳐 늘어놓았으며 왜군 장수에게 서신을 보내 희롱하였다.

윤탁연의 모함.
1593년 2월 1일(음력 1월 1일) 의병장 신분으로 활약한 정문부를 순찰사 윤탁연이 조정에 정문부의 공을 반대로 고했기 때문에 크게 포상받지 못했고, 영흥부사에 제수된다. 
윤탁연은 조정에서 실사를 보낸 사신에게도 뇌물을 주어 진상 조사를 무마시켰다. 1615년 부총관에 임명되고 다시 병조참판으로 임명되지만, 북인의 횡포에 관직을 고사하고 야인으로 돌아간다.

1592년(선조 25) 9월부터 1593년 2월까지 정문부의 조선군에 의해 수행된 함경도 북부인 북관() 지역 수복 전투.
1592년 9월부터 1593년 2월까지 함경도 북평사 정문부는 군사를 정비하여 경성, 장평, 임명, 백탑교 등 네 곳에서 승첩을 거두어 관북() 지역을 회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를 통칭하여 ‘북관대첩()’이라고 한다. 북관대첩을 통해 함경도에 주둔한 가토 휘하 일본군의 한성 철수를 강요하여 평양성 전투와 함께 전쟁의 국면을 조선에게 유리하게 이끌었다.
1592년(선조 25) 4월, 조선을 침공한 일본군은 5월 초 한성을 함락시킨 이후 곧바로 북상하기 시작하였다.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의 일본군은 6월 함경도로 진입하여 안변()에 본진을 두고 계속 북상하면서 7월 중순에는 성진()에서 북병사 한극성()의 조선군을 격파하였다.
한편 회령의 토관 국경인() 등은 반란을 일으켜 가토에게 투항하고 반란군이 붙잡은 조선의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가토에게 넘겨주었다. 
가토는 명천() 이북의 8고을을 국경인 등의 반란 세력에게 맡기고, 길주, 성진, 단천, 이원, 북청의 5지역을 자신의 부대에서 나누어 주둔하도록 하였다.
경성()에 있던 북평사() 정문부()가 9월 초에 이 지역 군사를 모아 반격을 준비하자, 종성부사 정현룡(), 경원부사 오응태() 등이 합세하여 병력이 1천여명에 이르렀다. 
북도의병 대장으로 추대된 정문부는 9월 16일 경성을 공격하여 이 지역을 지배하던 반역자 국세필()을 처단하고, 이어서 회령과 명천 지역의 반란 세력을 토벌하고 이 지역을 수복하였다. 
여세를 몰아 정문부는 10월 말 정현룡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길주() 주변 지역을 약탈하던 일본군을 장평()에서 공격하여 수백 명을 참수하는 큰 전공을 세웠다. 이에 놀란 길주성의 일본군은 성문을 닫고 방어에 급급하였다.
고립된 길주의 일본군을 구원하기 위해 마천령() 이남의 일본군이 지원에 나섰으나, 12월 이들을 쌍포()에서 맞아 승리하였다. 이에 길주성에서 고립된 일본군은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 1월 19일 결사대 1백여 명이 출격하여 길주성에서 탈출을 시도하였다. 
남문에서 매복한 정문부이 이끄는 군대의 공격을 받아 다시 성으로 돌아갔다. 길주 남쪽의 단천()에 주둔한 일본군을 구축하기 위해 1월 22일에는 정문부의 기병 2백여 명이 출동하여 단천 인근에서 일본군을 격멸함에 따라 길주의 일본군은 더욱 고립되었다.
길주성의 일본군이 완전 고립 상태에 빠지고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공격하여 수복하였다는 소식을 접하자, 안변에 주둔하던 가토는 길주성의 일본군을 구출하여 철수하기 위해 직접 2만여 군사를 거느리고 마천령을 넘어 전진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정문부는 단천을 공격 중이던 군사를 일단 철수시켰다. 정문부는 군사 3천명을 거느리고 길주 남쪽 임명()에 매복하여 가토 군을 기다렸다. 
1월 28일 임명 북쪽 백탑교()에서 가토 군을 요격하여 피해를 입혔으나, 조선군도 피해가 적지 않아 일단 길주 북방인 명천()으로 철수하여 전열을 정비하였다. 가토의 일본군은 간신히 길주성으로 들어가 길주에 고립된 부대와 합류하여 그날 밤중으로 서둘러 안변으로 돌아갔다.
북관 일대의 패배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고 길주의 고립된 일본군을 구출한 가토는 길주 이남의 일본군을 2월 20일까지 함흥에 집결시켰다가 안변부로 이동시키고 동시에 안변의 병력과 함께 한성으로 철수하였다. 
아울러 안전한 철수를 위해 가토는 함경도의 맹산, 양덕을 거쳐 평양성을 공격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려 가토 군의 철수 중 측후방의 위협을 받지 않고 2월 말 안전하게 한성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정문부의 북관대첩을 통해 국경인 등 반란자를 제거하고 주민을 수습하여 내전의 화를 면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군과 맞서 싸울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아울러 북관대첩을 통해 함경도에 주둔한 가토 휘하 일본군의 신속한 한성으로의 철수를 강요함으로써 조명연합군에 의한 평양성 전투와 함께 임진왜란의 국면을 조선에게 유리하게 이끌었다.
임진왜란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전승비로 1905년 러ㆍ일전쟁 당시 일제에 의해 강탈당했다.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되어 있었으나 2005년 10월 20일 한국으로 반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