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형 |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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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조선/조선후기 |
성격 | 사건, 전투 |
발생·시작 일시 | 1592년(선조 25) 9월 |
종결 일시 | 1593년(선조 26) 2월 |
관련장소 | 길주, 경성, 명천 |
관련인물·단체 | 정문부, 가토 기요마사 |
임진왜란 때 북평사 정문부가 경성의 선비 이붕수 등 수백 명의 의병과 함께 함경북도 길주군의 쌍포와 함경남도의 단천 등지에서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를 격파하여, 함경도 지역에서 왜군을 몰아낸 싸움.
함경북도 김책시 임명동에 세운 전승기념비. 임진왜란 당시 함경북도 북평사 직을 맡고 있던 정문부(鄭文孚) 장군이 의병을 모아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왜군을 무찌른 전투를 소상히 기록한 전승비이다.
1592년(선조 25) 9월부터 1593년 2월까지 정문부의 조선군에 의해 수행된 함경도 북부인 북관(北關) 지역 수복 전투.
1592년 9월부터 1593년 2월까지 함경도 북평사 정문부는 군사를 정비하여 경성, 장평, 임명, 백탑교 등 네 곳에서 승첩을 거두어 관북(關北) 지역을 회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를 통칭하여 ‘북관대첩(北關大捷)’이라고 한다. 북관대첩을 통해 함경도에 주둔한 가토 휘하 일본군의 한성 철수를 강요하여 평양성 전투와 함께 전쟁의 국면을 조선에게 유리하게 이끌었다.
1592년(선조 25) 4월, 조선을 침공한 일본군은 5월 초 한성을 함락시킨 이후 곧바로 북상하기 시작하였다.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加藤淸正)]의 일본군은 6월 함경도로 진입하여 안변(安邊)에 본진을 두고 계속 북상하면서 7월 중순에는 성진(城津)에서 북병사 한극성(韓克誠)의 조선군을 격파하였다.
한편 회령의 토관 국경인(鞠景仁) 등은 반란을 일으켜 가토에게 투항하고 반란군이 붙잡은 조선의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을 가토에게 넘겨주었다. 가토는 명천(明川) 이북의 8고을을 국경인 등의 반란 세력에게 맡기고, 길주, 성진, 단천, 이원, 북청의 5지역을 자신의 부대에서 나누어 주둔하도록 하였다.
경성(鏡城)에 있던 북평사(北評事) 정문부(鄭文孚)가 9월 초에 이 지역 군사를 모아 반격을 준비하자, 종성부사 정현룡(鄭見龍), 경원부사 오응태(吳應台) 등이 합세하여 병력이 1천여명에 이르렀다. 북도의병 대장으로 추대된 정문부는 9월 16일 경성을 공격하여 이 지역을 지배하던 반역자 국세필(鞠世弼)을 처단하고, 이어서 회령과 명천 지역의 반란 세력을 토벌하고 이 지역을 수복하였다. 여세를 몰아 정문부는 10월 말 정현룡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길주(吉州) 주변 지역을 약탈하던 일본군을 장평(長坪)에서 공격하여 수백 명을 참수하는 큰 전공을 세웠다. 이에 놀란 길주성의 일본군은 성문을 닫고 방어에 급급하였다.
고립된 길주의 일본군을 구원하기 위해 마천령(摩天嶺) 이남의 일본군이 지원에 나섰으나, 12월 이들을 쌍포(雙浦)에서 맞아 승리하였다. 이에 길주성에서 고립된 일본군은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 1월 19일 결사대 1백여 명이 출격하여 길주성에서 탈출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남문에서 매복한 정문부이 이끄는 군대의 공격을 받아 다시 성으로 돌아갔다. 한편 길주 남쪽의 단천(端川)에 주둔한 일본군을 구축하기 위해 1월 22일에는 정문부의 기병 2백여 명이 출동하여 단천 인근에서 일본군을 격멸함에 따라 길주의 일본군은 더욱 고립되었다.
길주성의 일본군이 완전 고립 상태에 빠지고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공격하여 수복하였다는 소식을 접하자, 안변에 주둔하던 가토는 길주성의 일본군을 구출하여 철수하기 위해 직접 2만여 군사를 거느리고 마천령을 넘어 전진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정문부는 단천을 공격 중이던 군사를 일단 철수시켰다. 정문부는 군사 3천명을 거느리고 길주 남쪽 임명(臨溟)에 매복하여 가토 군을 기다렸다. 1월 28일 임명 북쪽 백탑교(白塔郊)에서 가토 군을 요격하여 피해를 입혔으나, 조선군도 피해가 적지 않아 일단 길주 북방인 명천(明川)으로 철수하여 전열을 정비하였다. 가토의 일본군은 간신히 길주성으로 들어가 길주에 고립된 부대와 합류하여 그날 밤중으로 서둘러 안변으로 돌아갔다.
북관 일대의 패배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고 길주의 고립된 일본군을 구출한 가토는 길주 이남의 일본군을 2월 20일까지 함흥에 집결시켰다가 안변부로 이동시키고 동시에 안변의 병력과 함께 한성으로 철수하였다. 아울러 안전한 철수를 위해 가토는 함경도의 맹산, 양덕을 거쳐 평양성을 공격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려 가토 군의 철수 중 측후방의 위협을 받지 않고 2월 말 안전하게 한성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정문부의 북관대첩을 통해 국경인 등 반란자를 제거하고 주민을 수습하여 내전의 화를 면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군과 맞서 싸울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아울러 북관대첩을 통해 함경도에 주둔한 가토 휘하 일본군의 신속한 한성으로의 철수를 강요함으로써 조명연합군에 의한 평양성 전투와 함께 임진왜란의 국면을 조선에게 유리하게 이끌었다.
북관대첩비, 北關大捷碑.
임진왜란 때 정문부(鄭文孚)를 대장으로 한 함경도 의병의 전승을 기념한 전공비.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19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비에는 함경도 의병이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거느린 왜군을 무찌른 일, 왜란이 일어나자 반란을 일으켜 함경도로 피난한 두 왕자를 왜적에게 넘긴 국경인(鞠敬仁)을 처형한 전말등 사실이 1,500자 비문에 소상히 적혀 있다.
임진왜란 당시 함경북도 북평사 직을 맡고 있던 정문부(鄭文孚) 장군이 의병을 모아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왜군을 무찌른 전투를 소상히 기록한 전승비이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함경북도 길주지역에서 당시 의병장 정문부(鄭文孚·1565∼1624)가 이끌었던 함경도지역 의병들의 왜군 격퇴를 기념하기 위해 100여년이 지난 후인 숙종 때(1707년) 함북 길주군 임명 지역에 세웠던 승전비.
높이 187㎝, 폭 66㎝, 두께 13㎝. 함경도 의병이 가토[加藤淸正]가 거느린 왜군을 무찌른 것, 왜란이 일어나자 반란을 일으켜 함경도로 피난한 두 왕자를 왜적에게 넘긴 국경인(鞠敬仁)을 처형한 전말 등이 1,500자 비문에 소상히 적혀 있다.
임진왜란 당시 함북 길주지역의 전투는 정문부의 빼어난 전투 지휘 등에 힘입어 임진왜란 전사에 길이 남을 만한 대승으로 평가받고 있다.
1905년 러일전쟁 당시 함경도 지방에 진출한 일본군이 주민들을 협박해 이 비석을 파내어 일본으로 강탈해 간 이후 일본 야스쿠니신사 경내 구석에 방치돼 왔다. 그러다가 1978년 한국사 연구자인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이 북관대첩비를 발견한 이후 반환 운동이 일어났고, 결국 2005년 10월 한국에 반환되었다.
2006년 3월 한국 정부는 북관대첩비를 원래 위치에 복원시키기 위해 북한에 인도하였다.
높이 187㎝, 폭 66㎝, 두께 13㎝. 함경도 의병이 가토[加藤淸正]가 거느린 왜군을 무찌른 것, 왜란이 일어나자 반란을 일으켜 함경도로 피난한 두 왕자를 왜적에게 넘긴 국경인(鞠敬仁)을 처형한 전말 등이 1,500자 비문에 소상히 적혀 있다.
임진왜란 당시 함북 길주지역의 전투는 정문부의 빼어난 전투 지휘 등에 힘입어 임진왜란 전사에 길이 남을 만한 대승으로 평가받고 있다.
1905년 러일전쟁 당시 함경도 지방에 진출한 일본군이 주민들을 협박해 이 비석을 파내어 일본으로 강탈해 간 이후 일본 야스쿠니신사 경내 구석에 방치돼 왔다. 그러다가 1978년 한국사 연구자인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이 북관대첩비를 발견한 이후 반환 운동이 일어났고, 결국 2005년 10월 한국에 반환되었다.
2006년 3월 한국 정부는 북관대첩비를 원래 위치에 복원시키기 위해 북한에 인도하였다.
조선 숙종 때 함경도 북평사(北評事)로 부임한 최창대(崔昌大)가, 함경북도 길주군 임명(臨溟)에 건립하였다. 1905년 러일전쟁 때 함경지방에 진출한 일본군 제2예비사단 여단장 소장 이케다 마시스케[池田正介]는 주민들을 협박하여 비석을 파내 일본으로 옮겼다. '군국일본'의 상징인 도쿄 지요다[千代田]구의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에 방치되었다.
비문에 이름이 있는 의병의 후손들이 일본 정부에 청원서를 내는 등 반환운동을 벌인 끝에 2005년 10월 20일에 한국에 반환되었다.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에 안치되어 일반인들에게 공개되다가 2006년 3월 1일에 비석이 원래 있던 곳에 복원하기 위해 북한으로 전달 되고 국립중앙박물관, 독립기념관, 의정부 정문부장군묘역의 세곳에 복제비를 세웠다.
함경북도 북평사 직을 맡고 있던 정문부(鄭文孚)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모아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왜군을 무찌른 전투를 소상히 기록한 전승비이다. 높이 187cm, 너비 66cm 두께 13cm로 1500자가 새겨져 있다.
1707년(숙종 34) 북평사 최창대가 함경북도 길주군 임명면(현 김책시 임명동)에 세웠다. 1905년 러일 전쟁 당시 일본군 제2사단 17여단장 이케다 마시스케(池田正介) 소장이 일본으로 가져갔고, 그 후 반환될 때까지 야스쿠니 신사에서 보관되었다.
1978년 재일 한국인이자 한일 관계의 권위있는 연구자인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이 우연하게 야스쿠니 신사에서 북관대첩비를 발견하였다. 그 후 한국 정부는 일본에 반환을 요청하였으나 성사되지 못하였다.
2005년 3월 28일한일 불교복지협의회가 베이징에서 북한의 조선불교도연맹과 만나 최종적으로 북관대첩비를 북조선에 반환하기로 합의하였다. 동년 10월 20일한국으로 반환되었으며, 28일에는 서울 용산구로 신축 이전된 국립중앙박물관 이전 개관식 때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각계 인사와 일반인들이 참여한 가운데 공개되었다.
2006년 2월 13일 남북간에 북관대첩비 북조선 환송에 관한 협의를 가져, 3월 1일에 개성에서 인도하기로 하였으며, 3월 23일북관대첩비가 원래 자리에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4월 25일에는 북관대첩비의 복제비가 건립되어 경복궁에 전시되었다.
현재 북한은 2만 여m² 보호구역을 조성하여 보존하고 있으며, 받침돌도 건립 당시의 받침돌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비문 번역은 북한 사회과학원 민족고전연구소에서 진행했으며, 작업은 후보원사이자 교수, 박사인 최동언 연구사가 담당했다.
- 임진왜란 때인 1592년 정문부가 이끈 의병이 왜군을 물리치고 함경도를 탈환한 전투.
함경도를 가리키는 ‘북관(北關)’이라는 명칭을 써서 ‘북관대첩’이라고 하며, 《조선왕조실록》의 ‘선조실록(宣祖實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 등에 관련된 기록이 전해진다.
1592년(선조 25) 5월 22일 부산에 도착한 일본군은 6월 11일에는 조선의 수도인 한양을 점령했으며, 6월 26일 임진강전투에서 조선군을 물리치고 평안도와 함경도로 진격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끈 제1군과 구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가 이끈 제3군은 조선의 조정이 피신해 있는 평양성 공략에 나섰으며, 가토 기요마사가 이끈 일본군 제2군은 함경도 방면으로 향했다.
선조는 6월 9일(음력 4월 30일) 한양을 벗어나 피난을 가면서 아들인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珒)과 순화군(順和君) 이보.
선조는 6월 9일(음력 4월 30일) 한양을 벗어나 피난을 가면서 아들인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珒)과 순화군(順和君) 이보.
임진왜란 때 한양을 함락시킨 조선침공군 제2군인 가토 기요마사의 2만 2000 군대는 곧바로 함경도로 진격했다. 곳곳에서 조선군이 속수무책으로 대응했기 때문에 함경도도 곧바로 무너지고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이 붙잡혔으며 국토의 끝 온성까지 왜군이 진격해 만주의 여진족과도 전투를 벌일 지경이었다.
당시 북평사로 있던 정문부는 1592년 10월 20일(음력 9월 16일) 이붕수, 지달원, 강문우, 최배천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정문부는 먼저 강문우에게 기병을 몇을 주어 국세필 반란군이 있는 경성과 길주 간의 소식통이 끊기게 하였다.
경성 전투.
먼저 정문부는 의병 300명을 이끌고 반란군 대장 국세필이 있는 경성으로 갔다. 정문부는 국세필의 권한을 인정하고 회유하여 경성에 입성할 수 있었다. 왜군의 순찰병 40명이 성 근처로 왔으나 강문우의 20명 기병대에 의해 모두 죽임을 당했다.
회령-명천 전투.
1592년 10월 회령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국경인이 신세준과 그의 유생들에 의해 살해당하자 정문부는 남은 반란자인 정말수를 치기 위해 명천으로 군사를 몰았다. 명천에서는 정말수를 몰아내려는 농민 봉기가 일어났으나 정말수가 화포를 동원해 막아 실패하였다.
정문부는 오촌권관 구황과 강문우에게 각각 30명의 기병과 몇몇의 제장들을 주어 총 60명의 기병대로 명천을 습격하라 명했다. 갑작스런 공격에 정말수는 성을 빠져나와 산에 숨었는데 경성 토병 진덕인에 의해 붙잡혀 그의 부장으로 함께 처형당했다.
정말수의 반란을 평정한 정문부는 그 동안 경성을 지배하던 국세필과 그의 일당들을 처형하여 함경도의 반란군들을 모두 진압하였고 백성들이 경성으로 모여들어 함경북도가 왜군의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1592년 10월 20일까지 약 3,000여 명의 군사를 확보하게 되었다.
길주성 포위.
정문부는 왜군이 지키는 길주성으로 가기 위해 군사 1000명을 이끌고 명천성으로 나아갔다. 몇몇 사람들이 말렸으나 정문부는 왜군과의 전면전으로 주장하며 진격했다. 이 무렵 길주성에는 약 1000명, 성 남쪽 영동에는 300명이 주둔하며 서로 의지하고 있었다.
정문부는 군사를 3개로 나누어 경성 이북 출신 군사 1000명은 자신과 정현룡이 맡고 길주 출신 군사 1000명은 고령 첨사 유경천에게 주어 갯마을에 진을 쳐 왜군을 감시하게 하고 경원 부사 오응태에게 길주 양리와 서북보의 토병을 관리하게 하고 정병을 징병해 복병을 두었다.
정문부는 인의지방 사람 원충서에게 군사 200명을 주어 길주 북쪽 야간창에 진을 치게 하고 또한 명천에서 400명의 군사를 중요 고참 지방에 배치시켰다.
석성령 전투.
1592년 12월 3일(음력 10월 30일) 왜군 1000명은 명천 갯마을 가파리를 약탈하고 돌아오던 중 석성령에서 원충서의 200명 군대와 맞닥드렸다. 이에 왜군이 후퇴하자 원충서는 추격하기 시작했다. 왜군의 수가 많아 잠시 병사를 물리고 방어하던 중 고참에 매복하던 방원 만호 한인제의 기병 300명이 원충서와 합류했다.
한인제 외에 여러 복병들이 원충서와 합류하자 왜군 장수 5명이 400명의 정예 군사를 이끌고 돌격한다. 그러나 조선군의 기병을 중심으로 평지 돌격전을 펼쳐 왜군은 퇴각하기 시작했고 퇴각 도중 곳곳에서 등장하는 조선군 복병들을 당해내지 못하고 장덕산 위에서 괴멸당하고 말았다.
정문부는 남은 잔당들을 토벌하기 위해 산에 불을 질렀고 이 전투에서 깃발 20개, 갑옷 50벌, 투구 8벌, 창 16자루, 조총 26자루, 탄환 646개, 화약통 15개, 말 118필, 수많은 일본도 등을 노획했다.
길주 전투.
1592년 12월 4일(음력 11월 1일) 정문부는 드디어 길주성을 치기 위해 군사를 3개로 나눠 성을 포위했다. 하지만 2차례에 걸쳐 성을 공격했으나 피해만 늘어갔다. 이에 정문부는 군대를 길주성 주변에 매복시키고 정예 병력들만 데리고 영동에 주둔하던 왜군을 공격한다.
그 무렵 영동에서는 왜군이 분탕질을 하고 있었고 이를 본 길주 토병 김국신이 정문부에게 보고하자 정문부는 자신의 3개 부대를 이끌고 영동을 공격해 괴멸시키고 주검을 10여리 걸쳐 늘어놓았으며 왜군 장수에게 서신을 보내 희롱하였다.
윤탁연의 모함.
윤탁연은 조정에서 실사를 보낸 사신에게도 뇌물을 주어 진상 조사를 무마시켰다. 1615년 부총관에 임명되고 다시 병조참판으로 임명되지만, 북인의 횡포에 관직을 고사하고 야인으로 돌아간다.
1592년(선조 25) 9월부터 1593년 2월까지 정문부의 조선군에 의해 수행된 함경도 북부인 북관(北關) 지역 수복 전투.
1592년 9월부터 1593년 2월까지 함경도 북평사 정문부는 군사를 정비하여 경성, 장평, 임명, 백탑교 등 네 곳에서 승첩을 거두어 관북(關北) 지역을 회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를 통칭하여 ‘북관대첩(北關大捷)’이라고 한다. 북관대첩을 통해 함경도에 주둔한 가토 휘하 일본군의 한성 철수를 강요하여 평양성 전투와 함께 전쟁의 국면을 조선에게 유리하게 이끌었다.
1592년(선조 25) 4월, 조선을 침공한 일본군은 5월 초 한성을 함락시킨 이후 곧바로 북상하기 시작하였다.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加藤淸正)]의 일본군은 6월 함경도로 진입하여 안변(安邊)에 본진을 두고 계속 북상하면서 7월 중순에는 성진(城津)에서 북병사 한극성(韓克誠)의 조선군을 격파하였다.
한편 회령의 토관 국경인(鞠景仁) 등은 반란을 일으켜 가토에게 투항하고 반란군이 붙잡은 조선의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을 가토에게 넘겨주었다.
가토는 명천(明川) 이북의 8고을을 국경인 등의 반란 세력에게 맡기고, 길주, 성진, 단천, 이원, 북청의 5지역을 자신의 부대에서 나누어 주둔하도록 하였다.
경성(鏡城)에 있던 북평사(北評事) 정문부(鄭文孚)가 9월 초에 이 지역 군사를 모아 반격을 준비하자, 종성부사 정현룡(鄭見龍), 경원부사 오응태(吳應台) 등이 합세하여 병력이 1천여명에 이르렀다.
북도의병 대장으로 추대된 정문부는 9월 16일 경성을 공격하여 이 지역을 지배하던 반역자 국세필(鞠世弼)을 처단하고, 이어서 회령과 명천 지역의 반란 세력을 토벌하고 이 지역을 수복하였다.
여세를 몰아 정문부는 10월 말 정현룡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길주(吉州) 주변 지역을 약탈하던 일본군을 장평(長坪)에서 공격하여 수백 명을 참수하는 큰 전공을 세웠다. 이에 놀란 길주성의 일본군은 성문을 닫고 방어에 급급하였다.
고립된 길주의 일본군을 구원하기 위해 마천령(摩天嶺) 이남의 일본군이 지원에 나섰으나, 12월 이들을 쌍포(雙浦)에서 맞아 승리하였다. 이에 길주성에서 고립된 일본군은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 1월 19일 결사대 1백여 명이 출격하여 길주성에서 탈출을 시도하였다.
남문에서 매복한 정문부이 이끄는 군대의 공격을 받아 다시 성으로 돌아갔다. 길주 남쪽의 단천(端川)에 주둔한 일본군을 구축하기 위해 1월 22일에는 정문부의 기병 2백여 명이 출동하여 단천 인근에서 일본군을 격멸함에 따라 길주의 일본군은 더욱 고립되었다.
길주성의 일본군이 완전 고립 상태에 빠지고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공격하여 수복하였다는 소식을 접하자, 안변에 주둔하던 가토는 길주성의 일본군을 구출하여 철수하기 위해 직접 2만여 군사를 거느리고 마천령을 넘어 전진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정문부는 단천을 공격 중이던 군사를 일단 철수시켰다. 정문부는 군사 3천명을 거느리고 길주 남쪽 임명(臨溟)에 매복하여 가토 군을 기다렸다.
1월 28일 임명 북쪽 백탑교(白塔郊)에서 가토 군을 요격하여 피해를 입혔으나, 조선군도 피해가 적지 않아 일단 길주 북방인 명천(明川)으로 철수하여 전열을 정비하였다. 가토의 일본군은 간신히 길주성으로 들어가 길주에 고립된 부대와 합류하여 그날 밤중으로 서둘러 안변으로 돌아갔다.
북관 일대의 패배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고 길주의 고립된 일본군을 구출한 가토는 길주 이남의 일본군을 2월 20일까지 함흥에 집결시켰다가 안변부로 이동시키고 동시에 안변의 병력과 함께 한성으로 철수하였다.
아울러 안전한 철수를 위해 가토는 함경도의 맹산, 양덕을 거쳐 평양성을 공격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려 가토 군의 철수 중 측후방의 위협을 받지 않고 2월 말 안전하게 한성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정문부의 북관대첩을 통해 국경인 등 반란자를 제거하고 주민을 수습하여 내전의 화를 면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군과 맞서 싸울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아울러 북관대첩을 통해 함경도에 주둔한 가토 휘하 일본군의 신속한 한성으로의 철수를 강요함으로써 조명연합군에 의한 평양성 전투와 함께 임진왜란의 국면을 조선에게 유리하게 이끌었다.
임진왜란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전승비로 1905년 러ㆍ일전쟁 당시 일제에 의해 강탈당했다.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되어 있었으나 2005년 10월 20일 한국으로 반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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