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29일 수요일

금산 38경.

금산 38경.


망대 :
금산 정상에 자리잡은 봉수대이다. 
금산을 에워싼 만경창파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이 봉수대는 고려 때부터 사용돼온 우리나라 최고 최남단 봉수대이다.

금산(남해) 관련 이미지 1


문장암 : 
망대 오르기 직전 길목에 있는 바위로, 조선 중종 때 한림학사였던 주세붕이 쓴 글씨가 있다.

대장봉 : 
보리암 바로 뒤에 우뚝 솟은 바위로 웅장하고도 위엄이 있어 대장암이라 부른다. 
관음봉이라고도 한다.

형리암 : 
대장봉 앞에서 곧 떨어질 듯 위험스러울 정도로 허리를 굽힌 모양의 바위이다.

탑대 : 
보리암 삼층석탑을 받치고 있는 절벽으로 봄철 푸른 나뭇잎과 가을철의 단풍이 일품이다.

천구암 : 
탑대 바로 위에 자리한 바위로 비둘기처럼 생겼다.

이태조기단 : 
태조 이성계가 백일기도를 한 뒤 등극했다는 곳으로 삼불암 아래쪽에 있다.

가사굴 : 
탑대 아래 있는 암굴. 
금산 38경 중 가장 조용하여 토굴처로 삼아 수도하기에 알맞다.

삼불암 : 
이태조기단 뒤편에 직립한 큰 암벽 위에 서 있는 세 개의 바위로 마치 불좌상 같다. 
태조가 백일기도를 하기 전에는 바위 셋이 다 누워 있는 모습이었는데 백일기도를 마치자 바위 둘이 일어나 앉았다고 한다. 
나머지 바위마저 일어나 앉았다면 이성계는 중국의 천자()까지 겸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천계암 : 
이태조기단 뒤편에 있으며, 이성계가 기도를 하는데 닭의 울음이 들려 뒤를 보았더니 닭은 없고 닭을 닮은 바위가 있어 천계암이라 불렀다고 한다.

천마암 : 
망대 아래편 동쪽에 있는 두꺼비 모양의 바위이다.

만장대 : 
탑대 바로 서남편에 위치한 깎아세운 듯 웅장한 절벽 바위이다.

음성굴 : 
만장대 바로 서쪽에 있는 높이 2m 길이 5m의 굴로, 밑바닥을 돌로 두드리면 장고 같은 풍악소리가 난다.

용굴 : 
음성굴 오른쪽에 있는 굴로,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쌍홍문 : 
금강산 석홍문은 굴이 하나지만 금산 쌍홍문은 굴이 두 개로 쌍안경 같다. 
옛날 부처님이 돌배를 만들어 타고 쌍홍문의 오른쪽 굴로 나가면서 멀리 앞바다에 있는 세존도의 한복판을 뚫고 나갔다고 한다.
쌍홍문
쌍홍문금산 38경 중 하나이다. 남쪽 상주에서 금산을 오르려면 반드시 이 굴을 통해야만 한다.

사선대 : 
쌍홍문에서 천구암 쪽으로 조금 가면 나오는 선녀 모양을 한 네 개의 바위이다.

백명굴 : 
사선대의 북쪽에 있다. 
임진왜란 당시 100여 명이 피난했다고 한다. 
드나드는 문은 작으나 들어가면 놀랄 만큼 넓은 굴이 나온다.

천구봉 : 
일월봉 아래에 개의 형상을 하고 있는 바위이다.

제석봉 : 
천구봉 왼편에 있는 바위로 제석님이 내려와서 놀았다는 전설이 있다.

좌선대 : 
제석봉 왼편에 있다. 
신라 원효대사, 의상대사, 윤필거사 등 3사가 앉아 수도했다는 자리가 뚜렷이 패여 있다.

삼사기단 : 
좌선대 아래편에 원효, 의상, 윤필 등 3사가 기단을 쌓고 기도를 올린 곳이다.
저두암 : 
좌선대 왼편에 있는 바위로 돼지머리 모양이다.

촉대봉 : 
향로봉 옆에 있는 촛대처럼 생긴 작은 바위. 
3사가 기도할 때 촛대로 썼다고 한다.

금산(남해) 관련 이미지 6


향로봉 : 
삼사기단 왼편 아래쪽에 있으며, 모양이 향로와 같다. 
3사가 기도를 올릴 때 촉대봉과 함께 사용했다고 한다.

사자암 : 
좌선대에서 상사암으로 가는 길 오른쪽에 사자처럼 생긴 큰 바위이다.

팔선대 : 
상사암 조금 앞쪽에 서 있다. 
신선 여덟 명이 유희하는 듯한 모습이다.

상사암 : 
금산에서 가장 웅장하고 큰 바위로, 상사병에 걸린 한 남자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돌쇠라는 머슴이 주인집 딸을 짝사랑하여 애를 태우다 죽어 구렁이가 되었다. 
이 구렁이가 주인집 딸을 휘감고 풀어주지 않았다. 
어느날 밤 주인의 꿈에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 나타나 금산에 있는 높은 바위에서 굿을 해보라고 한 뒤 사라졌다. 
노인이 시키는 대로 하였더니 구렁이가 된 돌쇠는 마침내 딸을 풀어주고, 자신은 그만 벼랑 아래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고 한다. 
절벽이 아찔하다.

구정암 : 
상사암에 잇닿아 있는 바위에 아홉 개의 동그란 홈이 패여 있는데, 비가 고이면 그대로 샘 아홉 개가 된다.

감로수 : 
상사암에서 조금 남쪽에 있는 바위 밑에서 새어나와 고이는 물로, 조선 때 숙종이 이 물을 먹고 씻은 듯 병이 나았다고 한다.

농주암 : 
대장봉 왼편에 서 있는 세 개의 바위. 두 개의 바위 사이에 나머지 바위 하나가 구슬처럼 끼어 있다.

화엄봉 : 
대장봉과 농주암 왼편에 있는 바위로 화엄의 한자 표기인 ‘’ 글자를 닮았다.

일월봉 : 
화엄봉 왼편에 두 개의 바위가 층암절벽을 이루고 있는데, 가까이서 보면 일()이고, 멀리서 보면 월()자 모양이다.
상사암과 일월봉
상사암과 일월봉
탑대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사진의 왼쪽에 있는 웅장하고 큰 바위가 남녀간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전해오는 상사바위이며, 오른쪽 끝에 보이는 바위는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일()자로 멀리서 보면 월(자로 보인다는 일월봉이다.





부소암 : 
금산 서남쪽에 있는 큰 바위로, 진시황의 아들 부소가 이곳에 유배되어 살고 갔다는 전설이 있다.


요암 : 
거북이 모양의 바위가 흔들거린다. 
일월봉 왼편에 있다.


상주리 석각 : 
부소암으로 오르는 산중의 편편한 자연 암석 위에 새겨진 알쏭달쏭한 그림 글자이다.

세존도 : 
금산 앞바다에 멀리 떨어져 있는 돌섬. 
나무도 먹을 물도 없는 무인도로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효험을 본다고 한다.

노인성 : 
일명 남극성. 
이 별을 보면 오래 산다는 전설이 있다. 
춘분과 추분의 전후 3일 동안은 금산에서 노인성이 가장 잘 보인다고 한다.

일출경 : 
남해 금산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일출을 볼 수 있다.

금산(남해)

상세정보

입산통제 기간

[탐방로 통제기간]
(봄가을철 산불조심기간 한시적 등산로구간 통제)
봄철 3월 2일 ~ 4월 30일
가을철 11월 1일 ~ 12월 15일
-국립공원 11월 15일 ~ 12월 15일(경주,태안해안제외)
※ 통제기간은 기상여건 등을 감안하여 공원별로 일부 조정될 수 있으니 공원탐방 시 해당 공원 홈페이지 공지사항 참고

입산통제 구간

가을철 등산로 통제구간 안내 http://hiking.kworks.co.kr/sub_map/map_user01.aspx

개방 구간

금산입구~정상
늑도주차장~큰섬산
복곡제2주차장~상사암~쌍홍문
금산입구~금산입구
부소암~이태조 기당
초양휴게소~초양도
이락사입구~첨망대
노도마을~김만중유허지

관 람 료

금산 보리암(남해)

화장실

있음

주차요금

경형 2,000원
중소형 4,000~5,000원
대형 6,000~7,500
※ 정기버스 무료(정기주차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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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과 보리암

금산과 보리암

신선의 섬, 일점선도()라 불릴 만큼 아름다운 남해섬이 간직한 최고의 경승지는 누가 뭐래도 금산()이다. 
금산은 해발 701m로 아주 높지는 않지만 조물주의 조각 작품 같은 기암괴석이 산의 이곳저곳을 꾸미고 그 주변에 울창한 난대림이 어우러져 예로부터 금강산에 견주어 ‘소금강산’이라 불려왔다.
남해 금산
남해 금산금산 입구 주차장에서 바라본 금산 전경이다. 금산은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기암괴석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난대림이 울창하게 어우러져 예로부터 금강산에 견주어 소금강산이라 불렸다.
의젓하게 우뚝 서 있거나 바다 쪽을 지긋하게 내려다보는 듯한 갖가지 신비로운 이미지를 자아내는 바위들에 이름을 붙인 금산 38경도 좋지만, 산 정상께에 있는 보리암과 능선길에서 바라보는 한려수도의 경치가 그만이다. 
바다에 깔리는 안개나 산중턱에 걸리는 구름 때문에 온전한 형체를 고스란히 보기는 어렵지만, 햇살의 변화에 따라 시시각각 다양한 빛깔을 띠는 바다와 함께 그 위에 떠 있는 수많은 섬들이 그려내는 다도해 풍광의 적요로운 느낌은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다. 
금산은 남해에서는 드물게 일출과 일몰을 모두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금산과 보리암 답사는 복곡저수지 매표소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보리암에 닿은 뒤 보리암과 금산을 둘러보고 상주해수욕장 쪽으로 하산하는 코스가 가장 빠르고 쉽다.

‘비단 산’이라는 예쁜 이름의 금산은 본래 보광산이었다고 한다. 
이 보광산이 금산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데에는 조선 태조 이성계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한다.

이성계가 천운의 뜻을 품고서 백두산에 들어갔는데 산신은 이를 받아주지 않았다. 
두번째로 지리산에 들어갔으나 산신이 받아주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으로 남해섬 보광산에 들어와 백일기도를 올리고서야 비로소 왕조 창업의 뜻을 이룰 수 있었다.
 왕위에 오른 이성계는 보광산에 은혜를 갚기 위해 산 전체를 비단으로 감싸려 했지만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이에 한 신하가 “비단으로 산을 감싸기는 나라 경제가 허락하지 않고 영원한 기념이 될 수 없으니 차라리 이름을 비단 산[]으로 지어주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하자, 태조는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여 보광산의 이름을 금산으로 바꾸는 것만으로 은혜를 갚았다고 한다.

금산 정상 부근에 자리잡은 보리암()은 신라 원효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창건 당시 이름은 보광사였는데 현종 원년(1660) 절을 왕실 원당으로 삼고 보리암으로 바꿨다고 한다. 
오래된 역사와 절경을 품고 있는 보리암이지만 비좁은 경내에는 이렇다 할 문화재가 없다. 
절 아래쪽 탑대에 고려 초기에 조성된 삼층석탑과 불기 2514년(1970)에 세운 해수관음보살상이 있다.

보리암 전경남해 바다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보리암은 신라 때 원효대사가 처음 창건했다고 전한다. 양양의 낙산사, 강화의 보문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관음 기도도량으로 알려져 있다. 보리암 뒤로 우뚝 솟은 바위는 금산 38경의 하나인 대장봉이다.
삼층석탑은 가야 김수로왕의 부인인 허황옥이 인도 아유타국에서 가져온 불사리를 원효대사가 모셔와 이를 봉안하기 위해 세운 것이라 전해온다. 
전설과는 달리 삼층석탑은 고려 초기 양식을 취하고 있다. 
단층기단 위에 놓인 탑신 세 층에는 우주가 새겨져 있으며, 상륜부에는 구슬 모양의 보주가 놓여 있다. 
삼층석탑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4호이다.
보리암 삼층석탑
보리암 삼층석탑원효대사가 가야 김수로왕의 부인인 허황옥이 인도 아유타국에서 가져온 불사리를 모셔와 세웠다고 전하지만, 전하는 말과는 달리 탑의 모습은 고려 초기의 양식을 취하고 있다.
삼층석탑과 한 영역에 어우러져 있는 해수관음보살상은 보리암의 근래 명물이다.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 관음보살상, 강화도 보문사 관음보살상과 함께 치성을 드리면 효험을 보는 3대 해수관음보살상으로 손꼽혀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탑대에 앉아 바다를 등지고 보리암 주변을 둘러보면 가장 높은 대장봉에서부터 왼편으로 형리암·농주암·화엄봉·일월봉·제석봉·상사바위 등이 차례로 보인다. 
삼불암은 탑대 오른편으로 건너다보이는 바위이다. 
극락전 아래쪽 대나무 숲길을 따라 가파른 계단길을 내려가면 나오는 삼불암의 아래쪽에는 이성계가 백일기도를 한 뒤 등극했다는 전설이 깃든 이태조기단이 있다.

보리암 뒤로 난 산길을 따라가면 금산 정상이다. 
더 이상 오를 곳 없는 하늘 아래인 이곳엔, 우선 덩치 큰 돌무더기가 눈에 띈다. 
망대라고도 불리는 봉수대이다. 
봉수대는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하여 변방에 적이 침입했음을 중앙에 알리는 군사 통신시설이다. 
평상시는 연기 하나, 적이 나타나면 둘, 가까이 접근하면 셋, 침공하면 넷, 접전시에는 다섯으로 긴급히 연락하였으며, 만약 봉수대에 불이 지펴지지 않거나 구름이나 바람 때문에 연기나 점화가 여의치 않으면 봉수군이 다음 봉수대까지 직접 뛰어가서 연락해야 했다.

금산 봉수대
금산 정상에 있는 군사 통신시설로 망대라고도 부른다. 
금산 봉수대는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하여 변방에 적이 침입했음을 알리는 역할을 했는데 맑은 날에 봉수대 위에 서면 남쪽 남해 바다는 물론 북쪽 지리산까지 사방이 한눈에 보인다.


봉수는 동서양의 고대국가에서 두루 사용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대략 수십 리마다 살피기 좋은 요지의 산꼭대기에 이를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산이 많고, 신속한 교통이나 통신제도가 발달하지 못한 우리나라에서 봉수는 매우 효과적인 통신수단이었다. 
고려시대에도 봉수는 더욱 발전되고 정비된 상태로 유지되었으며, 조선 세종 때에 이르러서는 봉수에 관한 법이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마련되었다. 
봉수가 폐지된 것은 1894년 갑오경장 이후이다.

조선시대 봉수망은 전국에 다섯 개가 있었으며, 국경지방의 연대에서 경봉수대인 서울 남산(목멱산) 봉수대까지는 7시간 정도(1시간당 약 110㎞) 걸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산세가 험악하고 지형이 고르지 못한 길로 뛰어가서 전하는 치보()가 1개월 정도 걸렸을 것으로 보면 봉수는 당시 퍽 신속한 통신수단이었던 셈이다.

금산 봉수대는 고려 명종 때 남해안에 침입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축조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오장 2명과 봉졸 10명이 교대로 근무하였다고 한다. 
높이 3.5m 둘레 56m 폭 8m 되는 장방형의 돌담으로 작지 않은 규모이며,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다.

금산 봉수대에서 피워올린 연기는 동쪽으로는 창선면 대방산 봉수대를 거쳐서 제2선인 진주로 연결되었으며, 서쪽으로는 남면 홍현리의 설흘산 봉수대를 거쳐 제5선인 여수 돌산도로, 북쪽으로는 이동면 원산 봉수대로 연결되었다. 
이 금산 봉수는 제2선인 동래 노선에 속하여 사천·진주·단성·합천·금산(추풍령)·영동·옥천·회덕·청주·진천·충주·죽산·용인·광주를 거쳐 서울 남산(목멱산)에 닿았다고 한다

금산에선 어디에서나 아름다운 한려수도를 한눈에 볼 수 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맑은 날 봉수대에서 보면 멀리 북쪽으로 지리산, 동으로 사천, 남으로 상주 쪽 남해 바다, 서쪽으로 여수까지 사방을 조망할 수 있다. 
봉수대에 망대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를 알 만하다.

봉수대 바로 아래쪽 등산 길목에는 유난히 큰 바위가 눈에 띈다. 
바위 가운데에 ‘ ’(홍문이 있으므로 금산에 오르다)이라는 글씨가 힘차게 각인돼 있다. 
조선 중종 때 학자인 주세붕이 쓴 것이라 하며, 이 때문에 문장암이라 불린다.
문장암의 암각글씨
문장암의 암각글씨조선 중종 때 학자인 주세붕이 쓴 것이라 한다. 이 글씨 때문에 문장암이라 불린다.

보리암이라는 암자와 가까운 남해금산 꼭대기에 자리하고 있어, '보리암전삼층석탑'이라 불리고 있는 3층 석탑으로, 주변의 경치가 너무나 빼어나 더욱 유명해졌다.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으로 이루어진 탑신(塔身)을 놓고 머리장식을 얹은 일반적인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2개씩의 안상(眼象)을 얕게 조각하였다. 
위층 기단은 아래층에 비해 폭이 크게 줄었다. 


탑신의 몸돌 각 면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가지런히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3단씩이고, 처마는 직선을 유지하다 네 귀퉁이로 갈수록 두툼해지면서 위로 솟았다. 
꼭대기에는 보주(寶珠:구슬모양의 장식)만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허태후(김수로의 왕비)가 인도에서 가져온 사리를 원효대사가 이곳에 모셔 두었다 하나, 두꺼운 지붕돌 과 3단의 지붕돌받침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탑으로 추정된다.

금산의 정상까지 오른 뒤 다시 보리암으로 해서 한려수도를 굽어보면서 등산길을 따라 하산하면 반달 모양의 포구를 이루는 상주해수욕장이 나온다. 
상주해수욕장은 금산을 배경으로 한 절경을 갖춘 남해 제일의 경승지이다. 
모래알이 곱고 수심이 얕으며 바닷물의 온도가 높아 가족 단위 해수욕장으로 유명하다.

하산길, 보리암 바로 아래에는 마치 두 눈이 크게 뚫린 해골 또는 쌍안경같이 생긴 쌍굴이 있다. 


보리암의 관문처럼 여겨지는 쌍홍문이다. 
절묘하게 생긴 쌍굴 안에 서면 상주해수욕장과 남해군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이라는 세존도가 손끝에 닿을 듯 가깝게 보인다. 
옛날 부처님이 금산에서 돌배를 만들어 타고 바다로 나갈 때 쌍홍문의 오른쪽 굴로 나가 세존도의 한복판을 뚫고 갔다는 전설이 있는데, 세존도 한복판에는 마치 커다란 원을 그려 뚫은 듯한 해상동굴이 있다.

여행에 필요한 기초 정보

남해군 이동면 상주리(현: 상주면 상주리)에 있다. 
가천 암수바위가 있는 홍현리 가천마을에서 다시 앵강곡삼거리로 되돌아나와 오른쪽 상주·미조로 난 19번 국도를 따라 800m 가면 길 왼쪽에 보리암 표지판과 함께 금산으로 가는 길이 나 있다. 
그 길을 따라 2.6㎞ 가면 복곡 제1주차장과 매표소에 닿고, 매표소를 지나 3.3㎞ 더 산을 오르면 제2주차장에 닿는다. 
제2주차장에서 보리암까지는 약 1㎞ 정도 걸어가야 한다. 
승용차는 제2주차장까지 갈 수 있으나 대형버스는 제1주차장에 주차해야 하며 제2주차장까지는 셔틀버스를 이용하거나 걸어 올라가야 한다.

금산 보리암으로 오르는 또 다른 길은, 앵강곡삼거리에서 상주·미조로 난 19번 국도를 따라 9.8㎞ 가면 길 왼쪽에 금산 입구 주차장이 나온다. 
주차장에서 등산로를 따라 2시간 30분쯤 산을 오르면 쌍홍문을 거쳐 보리암에 닿는다. 
앵강곡삼거리에서 복곡 제1주차장까지 가는 도중에는 숙식할 곳이 간간이 있다. 금산 입구 주차장 주변에도 숙식할 곳이 몇 곳 있다. 
남해읍 공용버스터미널에서 약 1시간 간격으로 상주·미조행 버스가 다니는데 복곡저수지 입구에서 내려 복곡 제1주차장까지 걸어가거나 더 가서 금산 입구 주차장에서 내린다.

남해 보리암 목조관음보살좌상 불감(南海 菩提庵 木造觀音菩薩坐像 佛龕)
경상남도 남해군 남해읍 상주리 2065, 
보리암에 있는 불화이다. 
2015년 1월 15일 경상남도의 유형문화재 제575호로 지정되었다.


사유

남해 보리암 목조관음보살좌상 불감은 독립적인 관음보살상과 선재동자, 용왕이 협시한 불감형식의 작품이다. 현재 불감의 윗부분은 없어졌고 남아 있는 형태도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와 같은 형식은 서울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불감(1637-1644년)을 시작으로 17세기부터 19세기 까지 유행하였다.
관음보살상은 통통한 뺨, 보발이 없는 점, 대칭적인 연판, 양 측면에 늘어진 옷자락 등에서 조선전기적 특징을 계승한 조선후기 17세기의 작품으로 판단된다. 
용왕과 선재동자가 협시한 관음보살 삼존의 도상적 특징을 지닌 점과 사례가 적은 목조불감 형식, 17세기로 추정되는 제작시기 등 자료적 가치가 높은 중요한 불상으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한다.[





금산과 보리암 지도


금산과 보리암
금산과 보리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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