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과 보리암
신선의 섬, 일점선도(一點仙島)라 불릴 만큼 아름다운 남해섬이 간직한 최고의 경승지는 누가 뭐래도 금산(錦山)이다.
금산은 해발 701m로 아주 높지는 않지만 조물주의 조각 작품 같은 기암괴석이 산의 이곳저곳을 꾸미고 그 주변에 울창한 난대림이 어우러져 예로부터 금강산에 견주어 ‘소금강산’이라 불려왔다.
남해 금산금산 입구 주차장에서 바라본 금산 전경이다. 금산은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기암괴석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난대림이 울창하게 어우러져 예로부터 금강산에 견주어 소금강산이라 불렸다.
의젓하게 우뚝 서 있거나 바다 쪽을 지긋하게 내려다보는 듯한 갖가지 신비로운 이미지를 자아내는 바위들에 이름을 붙인 금산 38경도 좋지만, 산 정상께에 있는 보리암과 능선길에서 바라보는 한려수도의 경치가 그만이다.
바다에 깔리는 안개나 산중턱에 걸리는 구름 때문에 온전한 형체를 고스란히 보기는 어렵지만, 햇살의 변화에 따라 시시각각 다양한 빛깔을 띠는 바다와 함께 그 위에 떠 있는 수많은 섬들이 그려내는 다도해 풍광의 적요로운 느낌은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다.
금산은 남해에서는 드물게 일출과 일몰을 모두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금산과 보리암 답사는 복곡저수지 매표소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보리암에 닿은 뒤 보리암과 금산을 둘러보고 상주해수욕장 쪽으로 하산하는 코스가 가장 빠르고 쉽다.
‘비단 산’이라는 예쁜 이름의 금산은 본래 보광산이었다고 한다.
금산과 보리암 답사는 복곡저수지 매표소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보리암에 닿은 뒤 보리암과 금산을 둘러보고 상주해수욕장 쪽으로 하산하는 코스가 가장 빠르고 쉽다.
‘비단 산’이라는 예쁜 이름의 금산은 본래 보광산이었다고 한다.
이 보광산이 금산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데에는 조선 태조 이성계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한다.
이성계가 천운의 뜻을 품고서 백두산에 들어갔는데 산신은 이를 받아주지 않았다.
이성계가 천운의 뜻을 품고서 백두산에 들어갔는데 산신은 이를 받아주지 않았다.
두번째로 지리산에 들어갔으나 산신이 받아주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으로 남해섬 보광산에 들어와 백일기도를 올리고서야 비로소 왕조 창업의 뜻을 이룰 수 있었다.
왕위에 오른 이성계는 보광산에 은혜를 갚기 위해 산 전체를 비단으로 감싸려 했지만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이에 한 신하가 “비단으로 산을 감싸기는 나라 경제가 허락하지 않고 영원한 기념이 될 수 없으니 차라리 이름을 비단 산[錦山]으로 지어주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하자, 태조는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여 보광산의 이름을 금산으로 바꾸는 것만으로 은혜를 갚았다고 한다.
금산 정상 부근에 자리잡은 보리암(菩提庵)은 신라 원효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금산 정상 부근에 자리잡은 보리암(菩提庵)은 신라 원효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창건 당시 이름은 보광사였는데 현종 원년(1660) 절을 왕실 원당으로 삼고 보리암으로 바꿨다고 한다.
오래된 역사와 절경을 품고 있는 보리암이지만 비좁은 경내에는 이렇다 할 문화재가 없다.
절 아래쪽 탑대에 고려 초기에 조성된 삼층석탑과 불기 2514년(1970)에 세운 해수관음보살상이 있다.
보리암 전경남해 바다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보리암은 신라 때 원효대사가 처음 창건했다고 전한다. 양양의 낙산사, 강화의 보문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관음 기도도량으로 알려져 있다. 보리암 뒤로 우뚝 솟은 바위는 금산 38경의 하나인 대장봉이다.
삼층석탑은 가야 김수로왕의 부인인 허황옥이 인도 아유타국에서 가져온 불사리를 원효대사가 모셔와 이를 봉안하기 위해 세운 것이라 전해온다.
전설과는 달리 삼층석탑은 고려 초기 양식을 취하고 있다.
단층기단 위에 놓인 탑신 세 층에는 우주가 새겨져 있으며, 상륜부에는 구슬 모양의 보주가 놓여 있다.
삼층석탑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4호이다.
보리암 삼층석탑원효대사가 가야 김수로왕의 부인인 허황옥이 인도 아유타국에서 가져온 불사리를 모셔와 세웠다고 전하지만, 전하는 말과는 달리 탑의 모습은 고려 초기의 양식을 취하고 있다.
삼층석탑과 한 영역에 어우러져 있는 해수관음보살상은 보리암의 근래 명물이다.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 관음보살상, 강화도 보문사 관음보살상과 함께 치성을 드리면 효험을 보는 3대 해수관음보살상으로 손꼽혀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탑대에 앉아 바다를 등지고 보리암 주변을 둘러보면 가장 높은 대장봉에서부터 왼편으로 형리암·농주암·화엄봉·일월봉·제석봉·상사바위 등이 차례로 보인다.
탑대에 앉아 바다를 등지고 보리암 주변을 둘러보면 가장 높은 대장봉에서부터 왼편으로 형리암·농주암·화엄봉·일월봉·제석봉·상사바위 등이 차례로 보인다.
삼불암은 탑대 오른편으로 건너다보이는 바위이다.
극락전 아래쪽 대나무 숲길을 따라 가파른 계단길을 내려가면 나오는 삼불암의 아래쪽에는 이성계가 백일기도를 한 뒤 등극했다는 전설이 깃든 이태조기단이 있다.
보리암 뒤로 난 산길을 따라가면 금산 정상이다.
보리암 뒤로 난 산길을 따라가면 금산 정상이다.
더 이상 오를 곳 없는 하늘 아래인 이곳엔, 우선 덩치 큰 돌무더기가 눈에 띈다.
망대라고도 불리는 봉수대이다.
봉수대는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하여 변방에 적이 침입했음을 중앙에 알리는 군사 통신시설이다.
평상시는 연기 하나, 적이 나타나면 둘, 가까이 접근하면 셋, 침공하면 넷, 접전시에는 다섯으로 긴급히 연락하였으며, 만약 봉수대에 불이 지펴지지 않거나 구름이나 바람 때문에 연기나 점화가 여의치 않으면 봉수군이 다음 봉수대까지 직접 뛰어가서 연락해야 했다.
금산 봉수대
금산 정상에 있는 군사 통신시설로 망대라고도 부른다.
금산 봉수대는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하여 변방에 적이 침입했음을 알리는 역할을 했는데 맑은 날에 봉수대 위에 서면 남쪽 남해 바다는 물론 북쪽 지리산까지 사방이 한눈에 보인다.
봉수는 동서양의 고대국가에서 두루 사용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대략 수십 리마다 살피기 좋은 요지의 산꼭대기에 이를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산이 많고, 신속한 교통이나 통신제도가 발달하지 못한 우리나라에서 봉수는 매우 효과적인 통신수단이었다.
고려시대에도 봉수는 더욱 발전되고 정비된 상태로 유지되었으며, 조선 세종 때에 이르러서는 봉수에 관한 법이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마련되었다.
봉수가 폐지된 것은 1894년 갑오경장 이후이다.
조선시대 봉수망은 전국에 다섯 개가 있었으며, 국경지방의 연대에서 경봉수대인 서울 남산(목멱산) 봉수대까지는 7시간 정도(1시간당 약 110㎞) 걸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산세가 험악하고 지형이 고르지 못한 길로 뛰어가서 전하는 치보(馳報)가 1개월 정도 걸렸을 것으로 보면 봉수는 당시 퍽 신속한 통신수단이었던 셈이다.
금산 봉수대는 고려 명종 때 남해안에 침입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축조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오장 2명과 봉졸 10명이 교대로 근무하였다고 한다.
금산 봉수대는 고려 명종 때 남해안에 침입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축조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오장 2명과 봉졸 10명이 교대로 근무하였다고 한다.
높이 3.5m 둘레 56m 폭 8m 되는 장방형의 돌담으로 작지 않은 규모이며,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다.
금산 봉수대에서 피워올린 연기는 동쪽으로는 창선면 대방산 봉수대를 거쳐서 제2선인 진주로 연결되었으며, 서쪽으로는 남면 홍현리의 설흘산 봉수대를 거쳐 제5선인 여수 돌산도로, 북쪽으로는 이동면 원산 봉수대로 연결되었다.
이 금산 봉수는 제2선인 동래 노선에 속하여 사천·진주·단성·합천·금산(추풍령)·영동·옥천·회덕·청주·진천·충주·죽산·용인·광주를 거쳐 서울 남산(목멱산)에 닿았다고 한다
금산에선 어디에서나 아름다운 한려수도를 한눈에 볼 수 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맑은 날 봉수대에서 보면 멀리 북쪽으로 지리산, 동으로 사천, 남으로 상주 쪽 남해 바다, 서쪽으로 여수까지 사방을 조망할 수 있다.
봉수대에 망대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를 알 만하다.
봉수대 바로 아래쪽 등산 길목에는 유난히 큰 바위가 눈에 띈다.
봉수대 바로 아래쪽 등산 길목에는 유난히 큰 바위가 눈에 띈다.
바위 가운데에 ‘由虹門 上錦山’(홍문이 있으므로 금산에 오르다)이라는 글씨가 힘차게 각인돼 있다.
조선 중종 때 학자인 주세붕이 쓴 것이라 하며, 이 때문에 문장암이라 불린다.
보리암이라는 암자와 가까운 남해금산 꼭대기에 자리하고 있어, '보리암전삼층석탑'이라 불리고 있는 3층 석탑으로, 주변의 경치가 너무나 빼어나 더욱 유명해졌다.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으로 이루어진 탑신(塔身)을 놓고 머리장식을 얹은 일반적인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2개씩의 안상(眼象)을 얕게 조각하였다.
위층 기단은 아래층에 비해 폭이 크게 줄었다.
탑신의 몸돌 각 면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가지런히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3단씩이고, 처마는 직선을 유지하다 네 귀퉁이로 갈수록 두툼해지면서 위로 솟았다.
꼭대기에는 보주(寶珠:구슬모양의 장식)만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허태후(김수로의 왕비)가 인도에서 가져온 사리를 원효대사가 이곳에 모셔 두었다 하나, 두꺼운 지붕돌 과 3단의 지붕돌받침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탑으로 추정된다.
금산의 정상까지 오른 뒤 다시 보리암으로 해서 한려수도를 굽어보면서 등산길을 따라 하산하면 반달 모양의 포구를 이루는 상주해수욕장이 나온다.
상주해수욕장은 금산을 배경으로 한 절경을 갖춘 남해 제일의 경승지이다.
모래알이 곱고 수심이 얕으며 바닷물의 온도가 높아 가족 단위 해수욕장으로 유명하다.
하산길, 보리암 바로 아래에는 마치 두 눈이 크게 뚫린 해골 또는 쌍안경같이 생긴 쌍굴이 있다.
하산길, 보리암 바로 아래에는 마치 두 눈이 크게 뚫린 해골 또는 쌍안경같이 생긴 쌍굴이 있다.
보리암의 관문처럼 여겨지는 쌍홍문이다.
절묘하게 생긴 쌍굴 안에 서면 상주해수욕장과 남해군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이라는 세존도가 손끝에 닿을 듯 가깝게 보인다.
옛날 부처님이 금산에서 돌배를 만들어 타고 바다로 나갈 때 쌍홍문의 오른쪽 굴로 나가 세존도의 한복판을 뚫고 갔다는 전설이 있는데, 세존도 한복판에는 마치 커다란 원을 그려 뚫은 듯한 해상동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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