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6일 토요일

사자의 서, 死者-書.

사자의 서, 死-書.
오시리스, 아뮤트, 토트, 호루스, 아누비스, 진리의 저울 등이 그려져 있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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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의 서는 신왕조 시대 이후, 미라와 함께 묻은 지하 세계의 안내서라고 할 수 있는 두루마리이다. 

죽은 이들이 안전하게 다음 세상에 도착하길 기원하는 기도문과 여러 가지 사건에 부딪칠 때 외우는 마법의 주문, 또 신들에 대한 서약에 대하여 적혀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죽은 자의 심판이다. 죽은 자를 심판하는 재판관 오시리스는 배심원을 거느리고 검사인 호루스 신, 서기관인 토트 신, 안내자이자 저울을 다는 아누비스 신과 죽은 이가 죄를 범했다고 판명될 경우 벌을 주는 아뮤트 신(악어의 머리, 사자의 갈기와 하마의 다리를 하고 있음)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자가 내세로 들어갈 수 있는가를 재판한다.

양심을 상징하는 죽은 이의 심장 무게를 저울에 다는데, 깃털보다 심장이 무거운 사람은 죄가 많은 것으로 판단되어 아뮤트에게 심장을 먹히나, 착한 사람은 오시리스의 왕국에 들어가 영원한 삶을 살게 된다.

고대 이집트에서 사자의 부활과 영생을 얻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쓰였던 주술성이 강한 장례문서(葬禮文書)의 일종. 피라미드 텍스트, 코핀 텍스트(coffin text), 관구 문)와 같이 가장 중요한 종교 문서. 피라미드 텍스트가 국왕 장례에 국한된 것에 반해 코핀 텍스트는 제1중 간기~중왕 국시대(B.C. 2181경~B.C. 1786경)에 개인의 관에 기재됐다. 『사자의 서』도 개인에게 보급된 것인데, 신왕국시대 이후(B.C. 1567경 이후)에 파피루스에 기재하여 관구 내에 부장 했다. 

사자의 부활에 필요한 주문을 모으기는 하나 통일된 텍스트가 있을 리 없고, 각 파피루스마다 다르다. 1842년 독일의 렙시우스 (Karl Richard Lepsius, 1813~84)가 프톨레마이오스 조의 텍스트에 따라 집성한 장명(章名)이 현재에도 사용되고 있다. 

오시리스의 재판 때 사자의 부정고백을 기록한 제125장은 특히 유명하다. 장면을 설명하는 아름다운 삽화가 있어 미술품으로도 훌륭한 것이 많다. 『아니의 파피루스』( 제19왕조)는 그 시대의 대표적인 예다. 

고대 이집트에서 미라와 함께 매장한 사후세계(死後世界)의 안내서라고 할 수 있는 두루마리.고대 이집트의 묘에서 부장품으로 발견된 사후 세계에 대한 글과 죽은 자의 영생에 대한 기원문, 신에 대한 찬가 등이 쓰인 문서를 총칭하는 말로, 1842년 독일의 고고학자 칼 리처드 렙 시우스(KarlKarl Richard Lepsius)가 고안해냈다.

고왕조 초기부터 프톨레미 왕조까지 약 3천 년에 걸쳐 기록된 유물들을 취합하고 정리한 결과물인 사자의 서는 사자(死者)를 위한 사후 세계에 대한 안내서로, 그 안에는 삶과 죽음에 대한 당대 이집트인의 생각과 내세관(來世觀)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뿐만 아니라 이것에는 신화, 풍속, 사회 현상, 역사 등이 녹아있다. 

주로 파피루스나 가죽 등에 성각문자(聖刻文字:히에로글리프)·신관 문자(神官文字:히에라 틱 문자)·민중 문자(民衆文字:데모 틱 문자)聖刻文字:히에로글리프)·신관문자(神官文字:히에라틱문자)·민중문자(民衆文字:데모틱문자 등으로 적어, 죽은 자와 함께 매장되었다. 

이러한 풍습의 기원은 매우 오래되어, 고(古) 왕국시대의古 피라미드 텍스트나, 중(中) 왕국시대의中 코핀 텍스트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신앙에 의하면 사자(死者)는 사후의 세계에서 여러 가지 사건에 부딪히며, 사자의 서에는 그러한 경우에 외는 주문(呪文)이나, 신(神)들에 대한 서약 등이 적혀 있다. 그중에서도 사후세계의 왕 오시리스가 사자를 심판하는 장면을 묘사한 대목인 주문(呪文) 125가呪文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사자의 서를 구성하는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자는 해질 무렵 육체와 분리된 수많은 혼령들을 태우는 태양신 '라'의 배를 타고 공포의 계곡을 건너 서쪽으로 향한다. 서쪽에 도달한 사자들은 곳곳에 가로막인 성문을 통과해 오시리스의 심판대에 이르러야 한다. 

성문의 수는 파피루스의 기록자마다 그 수를 달리하고 있으나 적게는 7개에서부터 많게는 21개까지로 기록하고 있다.

성문마다 『사자(死者)의 서(書)(Book of the Dead)』는 고대 이집트에서 죽은 사람의 관 속에 미라와 함께 넣어두는 문서로, 사후세계의 안내서로 쓰였다고 할 수 있다. 

『사자의 서』는 수천 년 동안 편집되고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처음에 주문으로부터 시작되어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 오던 것으로 그 내용은 부활을 위한 주문, 기도, 신에 대한 경배, 마법의 말, 주술 공식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왕국시대(B.C. 27세기~B.C. 22세기)에 들어서면서 주로 왕들의 피라미드나 분묘, 관 등에 사자가 내세에서 천국에 도달할 수 있도록 구전되던 주문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기록들을 모아서 하나의 책자로 만든 것이 『사자의 서』다(서규석, 2009).

고왕국시대에 이집트인들은 최고 권력자인 파라오는 사후세계에서도 삶을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파라오의 무덤인 피라미드 안쪽 벽면에 주문을 새겨 넣었다. 이렇게 새긴 기록들을 '피라미드 문서(Pyramid Text)'라고 하는데, 연대로는 이집트의 고왕국시대에 해당한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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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뒷세대인 중왕 국시대(B.C. 21세기~B.C. 18세기)에는 파라오뿐만 아니라 귀족이나 관리 또는 부자들도 미라를 넣은 관에 주문들을 새겨 넣었다. 

이 주문들은 관 문서(Coffin Texts)라고 부른다. 마지막으로 신왕국이 시작된 B.C. 16세기부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B.C. 305~B.C. 31) 사이의 시기에는 주문들을 파피루스 두루마리에 적어 관 속에 별도로 넣어두었다. 따라서 이 파피루스 두루마리에는 피라미드 문서, 관 문서 등에 적혔던 내용은 물론 이집트인들이 숭배했던 태양신 '라'에 대한 찬양 등 다양한 기록들이 추가되었다.

『사자의 서』는 이집트 문명사회의 총체적 기록물이라고 할 수 있다. 기록자들은 파피루스에 그 내용을 적었으며, 때로는 다양한 색채로 도안해 개인의 매장에 함께 넣는 부장품으로 팔았다(원은성, 1997). 1842년 독일의 이집트학자 카를 렙 시우스(KarlKarl Richard Lepsius)는 이 기록물들을 수집 정리해 출판하고 '사자의 서'라고 이름 붙였다. 물론 1842년 이후에도 피라미드와 관 또는 파피루스에 적어 놓은 유사한 기록들은 계속 발굴되었다.

안내인, 문지기, 전령이 있으며, 그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며 경의를 표해야만 성문이 열리고 통과가 허락되므로, 그 이름들이 사자의 서에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여러 성문을 거쳐 오시리스의 법정에 도달한 사자의 심장은 저울에 올려지고, 생전에 지은 죄의 무게를 재고, 여러 신들 앞에 차례로 나아가 생전의 행위에 대한 심판을 받는다. 

이 모든 과정을 무사히 거치고 나면 비로소 부활의 자격이 주어진다. 영혼이 부활하기 위해서는 온전한 육체가 있어야 하며, 이것이 미라 제작의 이유이기도 하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죽음을 육체와 영혼의 분리 현상으로 보았으므로, 죽음이란 분리된 영혼이 잠시 저승으로 가서 심판을 받는 기간에 불과했다. 그러나 심판의 결과가 부활이 아닌 ‘영원한 지옥’으로 판정되면 영혼은 육체가 남아있는 현세로 돌아오지 못해, 부활할 수 없는 진정한 죽음을 맞게 된다. 

‘사자의 서’는 지상에 남은 미라의 온전한 보존과 심판을 받으러 사후세계로 가는 영혼을 위한 주의·주술 등으로 채워져 있다. 특히 사자의 영혼이 만나게 될 신들을 달래고, 영혼이 올바른 행로를 갈 수 있도록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사자의 서’가 쓰인 목적이었다. 

『사자의 서』는 이집트 역사에서 각 왕조의 수도였던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었는데, 지역에 따라 다음 세 종류의 텍스트로 나누어 편찬되었다(서규석, 2009).

첫째, 헬리오폴리스 텍스트(Heliopolis Text)다. 이것은 B.C. 2494년에서 2181년경인 제5왕조와 제6왕조 시대에 사용된 것으로, 사카라의 피라미드 벽과 무덤의 안쪽 면에 상형문자 형태로 기록된 것이다. 

이 기록들은 B.C. 330년경 제2차 페르시아 지배 시대 헬리오폴리스의 신관들에 의해 집성되었다. 

그 내용은 죽은 왕을 위한 옷, 집, 뱀과 벌레 등 악령으로부터 신체를 보호하는 일 등을 기록해 놓아, 죽은 자가 내세에서 행복하기를 기원하는 것이었다. 

헬리오폴리스 텍스트에는 관 문서도 들어 있는데, 파라오가 아닌 일반 서민들까지도 생전의 선행을 통해 내세의 행복을 보답받을 수 있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둘째, 테베 텍스트(Thebes Text)는 B.C. 16세기부터 B.C. 11세기에 있었던 제18왕조로부터 제20 왕조까지 관과 파피루스에 기록된 것을 모은 것이다. 

이 테베 텍스트는 상형문자로 써졌는데, 삽화가 없는 피라미드 문서와 달리 삽화가 많이 그려져 있다. 내용은 헬리오폴리스의 원본을 베낀 것에 불과하다고 알려져 있다.

셋째, 사이 테 텍스트(Seithe Text)는 B.C. 664년 제26왕조 이후 상형문자, 신성문자, 민중 문자로 파피루스나 관, 기타 상징물에 기록된 것을 집대성한 것으로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의 것이 가장 많다. 사이 테 텍스트는 이전의 『사자의 서』를 전면적으로 개정해 각 장을 순서대로 편집하고 새로운 장을 삽입했다. 본문은 상형문자와 신관들이 사용하는 신관 문자로 기록하고 삽화를 그려 넣었다.

현존하는 사자의 서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BC 1240년에 쓰인 '아니(Ani) 파피루스'로, 여기에는 영생을 기원하고 신을 칭송하는 찬가들이, 아니(Ani)와 그의 아내가 저승을 여행하고 죽음의 신 앞에 서는 장면을 묘사한 아름다운 그림과 함께 담겨있다.

『사자의 서』는 고대 이집트에서 죽은 사람의 관 속에 미라와 함께 넣어두는 문서로, 사후세계의 안내서로 쓰였다고 할 수 있다. 『사자의 서』는 지역에 따라 다음 세 종의 텍스트, 곧 헬리오폴리스 텍스트, 테베 텍스트, 사이 테 텍스트로 나누어 편찬되었다. 

고대 이집트인은 죽은 후에도 또 다른 삶이 펼쳐질 것이라는 내세관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을 잘 드러내는 것이 '오시리스'의 신화다. 『사자의 서』가 보여 주는 또 다른 특징은 내세의 구원 여부를 생전의 도덕적 행위 여부로 판단했다는 점이다.

고대 이집트인의 사후세계와 영혼에 대한 관념은 피라미드 문서에서 시작해 관 문서와 『사자의 서』에 이르기까지 긴 역사 속에서 발전하고 변천해온 것들이다(이동규, 2010). 수천 년을 이어오며 이집트인들은 사후세계를 확신했고 인간의 삶이 영원히 계속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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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영속성에 대한 사고방식은 해마다 비옥한 충적지를 남기는 나일강 범람의 규칙성을 통해서 생겨났다는 주장도 있다. 

"홍수가 지나가고 나면 새로운 생명이 싹튼다. 건기와 우기가 번갈아 찾아오듯 낮과 밤이 서로 교체된다. 이런 이유로 고대 이집트인은 삶이 하나의 거대한 순환, 곧 영원한 소멸과 생성 속에 존재한다고 믿었다"(Wolfgang Herles & Klaus-Rüdiger Mai, 2007).

순환 원리는 탄생과 죽음에도 적용되어 죽은 후에도 또 다른 삶이 펼쳐질 것이기 때문에 각종 주문과 마법이 담긴 『사자의 서』를 지참케 했던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잘 드러내는 것이 '오시리스'의 신화다. 

오시리스는 죽었다가 다시 부활했기 때문에 망자의 신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가장 널리 전파된 신화는 오시리스를 이집트 제1왕조가 시작되기 전에 이집트를 다스린 제왕이었다고 묘사하는 것이다. 이야기 전개는 다음과 같다.

"오시리스는 동생인 세트에게 살해되어 내장이 모두 제거되었으나, 그의 여동생이자 아내인 이시스의 힘을 빌려 환생했다. 이시스와 오시리스 사이에는 호루스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호루스가 세트를 무찌르고 이집트의 왕위에 올랐고 오시리스는 지하로 내려가 사후세계를 통치하게 되었다. 죽었다가 부활한 오시리스의 운명은 인간이 죽음 뒤에 걸어가야 할 운명의 모델이 되었다."(Françoise Dunand & Roger Lichtenberg, 1993)

고대 이집트인들은 사자를 신과 동일시했다. 『사자의 서』에서도 거기에 수록된 주문을 외우면, 사자는 태양신 라와 마찬가지로 숭배받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스스로를 '오시리스의 아들'이라고 선언한다. 김경근(2011)은 그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사자를 신처럼 높이는 것은 『사자의 서』의 기본 테마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대부분의 사자는 자신의 이름 앞에 오시리스를 붙여, 예컨대 '오시리스 아니' 혹은 '오시리스 누'라고 함으로써 기본적으로 오시리스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다른 신들과 동일시도 행해졌지만 오시리스와 동일시가 일반적인 이유는 오시리스가 내세를 관장하는 신인 데다 또한 죽었다가 부활했기 때문에 사자도 같은 효과, 즉 오시리스처럼 부활할 뿐 아니라 오시리스의 아들인 강력한 호루스 신이 오시리스를 보호했듯이 자신도 보호해줄 것을 기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고대 이집트에서 사자의 부활과 영생을 얻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쓰였던 주술성이 강한 장례 문서(葬禮文書)의葬禮文書 일종. 피라미드 텍스트, 코핀 텍스트(coffin text [영], 관구 문)와 같이 가장 중요한 종교 문서. 피라미드 텍스트가 국왕 장례에 국한된 것에 반해 코핀 텍스트는 제1중 간기~중왕 국시대(B.C. 2181경~B.C. 1786경)에 개인의 관에 기재됐다. 

『사자의 서』도 개인에게 보급된 것인데, 신왕국시대 이후(B.C. 1567경 이후)에 파피루스에 기재하여 관구 내에 부장 했다. 사자의 부활에 필요한 주문을 모으기는 하나 통일된 텍스트가 있을 리 없고, 각 파피루스마다 다르다. 

1842년 독일의 렙 시우스 (Karl Richard Lepsius, 1813~84)가 프톨레마이오스 조의 텍스트에 따라 집성한 장명(章名)이 현재에도 사용되고 있다. 

오시리스의 재판 때 사자의 부정 고백을 기록한 제125장은 특히 유명하다. 장면을 설명하는 아름다운 삽화가 있어 미술품으로도 훌륭한 것이 많다. 『아니의 파피루스』( 제19왕조)는 그 시대의 대표적인 예다.

『사자의 서』가 보여 주는 또 다른 특징은 내세의 구원 여부를 생전의 행위로 판단하는 점이다. 사자는 신들 앞에서 생전에 죄악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당당하게 고백하고 법정에 들어간다. 법정에서 심판은 사자의 심장을 저울에 올려놓고 그 무게를 새의 깃털과 비교하는 것이다. 

심장이 순수해서 깃털보다 가벼우면 영생의 길에 들어설 수 있지만, 죄를 지은 사람의 심장은 무거워서 괴물에게 잡아먹히기 때문에 소멸의 길로 빠지게 된다. 그 죄에는 신을 저주하거나 경멸하는 것도 있지만, 절도, 사기, 간통, 협박, 화내기 등 인간 사회의 범죄와 비도덕적 행위가 대부분이 포함된다.

이러한 도덕성의 강조가 고등 종교가 생겨나기 훨씬 이전부터 구원의 조건으로 고대 이집트에 등장했다는 점은 의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김경근(2011)의 표현처럼, "신 앞에서 무력한 인간들이 아니라 사자를 신격화하고 신을 협박하기도 하며 신과 함께 자연의 질서유지에 동참한다고 생각했던" 존재였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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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신이 관장하는 내세에서 구원의 조건과 내용까지도 인간과 세속의 논리로 규정했던" 고대 이집트인들의 세계관이 『사자의 서』에 담겨 있다.

문헌

  • 김경근(2011년) 고대 이집트의 신에 대한 관념. 《역사 학보》 209집.
  • 서규석 편저(2009년) 『이집트 사자의 서』. 파주: 문학동네.
  • 원은성(1997년) 사자의 서. 《성경과 고고학》 14호.
  • 이동규(2010년) 고대 이집트인의 사후세계와 영혼 이해. 《중앙 사론》 31호.
  • Françoise Dunand, Roger Lichtenberg(1993년) Les Momies, un voyage dans l'éternité. 이종인 옮김(2009년) 『미라 영원으로의 여행』. 서울: 시공사.
  • Wolfgang Herles, Klaus-Rüdiger Mai(2007년) Bücher die Geschichte Machten. 배진아 옮김(2010년) 『책 vs 역사』 서울: 추수밭.
    사자의 서 (출판 기획물의 세계사,)
  • 사자의 서 [死者, 書, Book of the Dead] (미술대 사전(용어 편), 1998., 한국 사전 연구사 편집부)
  • 사자의 서 [Book of the Dead, 死者─書] (두산백과)
  • 사자의 서 [死者-書] (이집트에서 보물찾기,)


출처: https://happyday-2100.tistory.com/15 [살맛 나는세상]



** 또 다른 볼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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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t8XwBMKaPK0Hr1 = 트윗트

2019년 7월 4일 목요일

밀양 얼음골.

해발 1,189m의 천황산 북쪽 중턱 해발 600m지점의 얼음골 계곡은 삼복(三伏)한더위에 얼음이 얼고 처서가 지날 무렵부터 얼음이 녹는 신비로운 이상기온 지대이다. 
약 3,000평쯤 되는 이 돌밭에는 해마다 6월중순부터 바위틈새에서 얼음이 얼기 시작하여 더위가 심해질수록 얼음이 더욱 많아지는 삼복더위가 한창일 때 그 절정에 이르고 반대로 가을철에 접어들면서부터 얼음이 녹기 시작하여 겨울철에는 바위틈에서 얼음대신 더운김이 올라오고 계곡을 흐르는 물

얼음골 


산 강계곡 얼음골 분류 : 산/강/계곡 위치 : 경상남도 밀양시 산내면 삼양리 185-1번지(얼음골 관리사무소)경상남도 밀양시 산내면 남명리 산95-1, 2번지(결빙지) 

문의처 : (055)356-5640(얼음골관리사무소),(055)359-5639(문화 

 

얼음골 결빙


 


오랜 옛날부터 시례 빙곡으로 불렸던 얼음골은 재약산(1,189m) 북쪽 중턱 해발600~750m의 노천 계곡에 자리하고 있다. 얼음골은 대지의 열기가 점점 더워오는 3월 초순경에 얼음이 얼기 시작하면 대개 7월중순까지 유지되며, 삼복더위를 지나 처서가 되면 바위틈새의 냉기가 점차 줄어든다. 
또한 이곳 주변에는 겨울철에도 계곡물이 잘 얼지 않고 오히려 바위틈에서 영상의 더운김이 올라 고사리와 이끼들이 새파


기본정보

위치

경상남도 밀양시 산내면 삼양리 185-1번지(얼음골 관리사무소)경상남도 밀양시 산내면 남명리 산95-1, 2번지(결빙지)

20110218_J7aFzBID


얼음골 소개

오랜 옛날부터 시례 빙곡으로 불렸던 얼음골은 재약산(1,189m) 북쪽 중턱 해발600~750m의 노천 계곡에 자리하고 있다. 
얼음골은 대지의 열기가 점점 더워오는 3월 초순경에 얼음이 얼기 시작하면 대개 7월중순까지 유지되며, 삼복더위를 지나 처서가 되면 바위틈새의 냉기가 점차 줄어든다. 
또한 이곳 주변에는 겨울철에도 계곡물이 잘 얼지 않고 오히려 바위틈에서 영상의 더운김이 올라 고사리와 이끼들이 새파란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신비한 이상기온 지대이다.
4월부터 시작되는 우수기에 맑은 날이 많을수록, 더위가 심할수록 바위 틈새에 얼음이 더 많이 얼고, 더 오래 유지 된다. 
근래에 들어 이상기후로 인해 비오는 날이 많아지면서 얼음이 얼어 있는 기간이 예전만큼 길지 않지만 계곡입구에 들어서면 소름이 돋을 듯한 시원한 바람은 크게 변함이 없다.
얼음이 어는 바위틈은 여름 평균기온이 섭씨 0.2℃이며, 계곡을 흐르는 물은 평균 4~8℃로 웬만큼 참을성이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2분 이상 견디기가 어렵다. 
얼음골 주변의 지형은 얼음이 어는 돌밭(安山巖)과 계곡을 중심으로 동남·서 3면으로 깎아지른 듯 한 기암절벽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장엄한 광경을 연출하고 있어 사시사철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밀양으로부터 언양에 이르는 2차선 도로(24호 도로)를 36㎞쯤 가면 오른쪽으로 밀양 남명리 얼음골이 있는 얼음골 계곡을 볼 수 있다.

이 계곡은 표고 1,189m의 천황산으로부터 동북동 방향으로 뻗은 산줄기의 북사면(北斜面)에 나타나는 여러 계곡중의 하나이다. 

계곡 입구의 표고는 320m쯤이고 그 정상부의 높이는 1,000m 정도이다. 얼음골 계곡의 동, 서, 남 사면(斜面)에는 주상절리가 잘 발달된 암석(안산암의 기반암)으로 된 높이 수십미터의 절벽이 솟아 있고 그 아래에는 talus가 발달되어 있다. 

그리하여 관목과 수목이 숲을 이루지 않는 talus 돌밭이 군데군데 나타나고 있다. 한편 계곡 바닥에는 토석류층(土石流層)이 정상부로부터 아래쪽으로 뻗어 있으며 그 표면에는 관목과 수목이 숲을 이루고 있다. 

음골은 얼음골 계곡의 동사면(東斜面) talus 돌밭 아래쪽에 있으며 그 표고는 420m쯤 된다. 토석류층(土石流層)은 대체로 이 높이에서 말단부분을 이룬다. 현재 얼음골에는 보호를 위하여 7m×7.3m의 철책이 쳐 있는데 그 위치는 대체로 북위 35°34°, 동경(東經) 128°59°이다. 

얼음곡 위쪽으로 전개되어 있는 talus 돌밭은 35°의 경사면을 이루고 있으며 식생으로 덮여 있지 않은 돌밭은 동서방향으로 약 30m, 남북방향으로 약 70m의 넓이를 가진다. 

그리고 그 뒷쪽에는 높이 수십미터의 절벽(병풍 바위)이 솟아 있다. 

이 talus 돌밭의 암석은 안산암의 각석(角石)이며 큰 것은 길이가 2m쯤 된다. 

이 일대의 안산암은 열변성작용을 받은 것으로 치밀한 조직을 하고 있다. 

밀양남명리의얼음골


얼음골의 각석(角石) 틈새에서는 여름 내내 영상 몇 도 밖에 되지 않는 냉기가 흘러나오고 그 바닥에서는 해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8월 초순에도 얼음이 생긴다. 

이에 반하여 겨울에는 각석 틈새에서 더운 김이 올라오며 그 바닥에서는 얼음이 생기지 않는다. 

여름에 결빙되고 겨울에 해빙되는 위와 같은 얼음골 현상은 talus 지형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겨울철 talus 돌더미의 내부는 한랭한 공기의 유입으로 인하여 위쪽으로부터 현저하게 냉각되며 돌더미의 바위틈새에는 눈등의 유입으로 말미암아 얼음이 형성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여름철 talus 돌밭 위쪽 바위틈새로 부터 유입된 따뜻하고 건조한 공기는 돌더미 내부에서 냉각되어 talus 돌밭 아래쪽 바위 틈새에서는 차고 습한 공기로 흘러나올 수 있다. 

이 차고 습한 공기가 따뜻하고 건조한 외부 공기와 섞이는 바위틈새 바닥 부근은 물의 갑작스러운 증발에 의해 더욱 냉각되므로 얼음이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여름철 talus 돌밭 위쪽 바위틈새로 유입(流入)하는 따뜻하고 건조한 공기에 의해서 talus 돌더미 내부는 위쪽으로부터 가열된다. 이와 같이 가열된 talus 돌더미 내부는 겨울철에 열원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겨울철 talus 돌더미 내부를 거쳐 흘러나오는 따뜻하고 습한 공기는 외부의 찬 공기와 섞이면서 냉각되므로 김이 생기는 것으로 보인다. 

위와 같은 얼음골 형상은 경기도 포천군, 충북 단양군, 경북 의성군, 강원도 정선군, 함경북도 명천군 등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경남 밀양의 얼음골은 한여름에 얼음이 어는 신비한 곳이다. 

밀양 얼음골에 고드름 주렁주렁

경남 밀양시 산내면 남명리 재약산 북쪽 중턱에 있는 밀양 얼음골(천연기념물 제224호)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렸다.



얼음골은 기온이 20도를 웃돌기 시작하는 4월부터 고드름이 열리는 '자연의 신비'를 보여준다.

더위가 심해질수록 냉기가 더 많아져 삼복 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면 오히려 고드름도 절정에 이른다.
반대로 한겨울에는 얼음이 녹아 더운 김이 오른다.

얼음골은 차가운 공기가 겨울엔 바위 밑으로 내려간 뒤 여름이 되면 따뜻한 공기가 누르는 힘으로 경사면 아래 바위틈으로 빠져나오는 원리인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신비한 현상이 일어나는 곳이 몇 곳 있는데, 대표적인 곳이 이 밀양의 얼음골과 의성의 빙혈이다.

이 밀양의 얼음골은 재약산 북쪽 기슭에 펼쳐진 약 3,000평의 경사진 돌밭으로, 6월 중순부터 돌틈에 얼음이 나타나기 시작해 여름이 끝날 때까지 얼음이 녹지 않는다. 

반대로 겨울에는 바위틈에서 더운 김이 올라온다고 한다. 


이런 기이한 현상으로 밀양 얼음골은 1970년에 천연기념물 제224호로 지정되었다. 

얼음골 옆을 흐르는 계곡은 한여름에도 얼음물처럼 차가워 잠시라도 발을 담그기가 힘들 정도라 한다.
얼음골은 얼음골 매표소를 지나 천황사 방향으로 올라가 얼음골과 가마불폭포를 보고 다시 천황사로 내려오면 된다. 


얼음골 결빙지는 산내면 남명리 천황산 동북쪽 중턱의 해발 600750m에 있는 약 1㎡ 넓이의 돌밭이다

3월 중순부터 바위 틈새에서 얼음이 얼기 시작해 더위가 심해질수록 냉기가 더해지면서 삼복(三伏)에는 절정에 이른다.
반대로 한겨울에는 얼음이 녹아 더운 김이 솟는 곳이다

얼음골 결빙지점은 바위에서 뿜어 나오는 냉기로 삼복더위에도 0를 유지하고 있다사철 관광객이 찾는 명소지만인근 호박소와 함께 한여름에 더욱 진가를 발휘하는 명승지이다.


이렇게 도는 데는 약 1시간 30분 정도가 걸린다.

가지산도립공원 관리사무소 : (055)356-1915



가는 길
얼음골이 있는 밀양으로 가려면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경부고속도로 금호분기점을 지나면 동대구나들목이 나온다. 

이 동대구나들목을 나와 바로 만나는 사거리에서 경산 방향으로 좌회전하여 달리다가 서호동삼거리에서 경산 방향으로 우회전한다. 

우회전하여 경산으로 들어가 계속 직진하면 이 길이 25번 국도와 이어지게 된다. 

이 25번 국도를 타고 계속 청도, 밀양 방향으로 내려가면 청도를 지나 24번 국도와 만나는 삼거리가 나온다. 

이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달리면 표충사 입구를 지나 얼음골 입구 삼거리가 나온다. 

이 삼거리에서 직진하여 얼음골로 들어가면 된다.




밀양의 표충사(表忠寺)
흔히 영남 알프스로 알려진 재약산과 천황산의 초입에 자리하고 있고 고찰이다. 절 이름에 충성할 충(忠) 자가 들어 있는 것이 특이한데, 이 절의 내력과 깊은 관계가 있다. 

대부분의 절에서는 부처를 모시고 더해서 산신령을 모시고 있는데 이 절에는 임진왜란 때 승병장으로 명성을 드날렸던 사명대사와 서산대사 그리고 기허대사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있다. 

승려이지만 나라가 위급할 때 나라에 충성을 바쳤던 고승들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절 이름이 표충사인 것이다. 

거기에 더해 표충사에는 아예 서원당까지 들어서 있다. 

유학을 가르키는 서원이 절에 있다는 점이 아무래도 이해가 쉽지는 않지만 적극적인 사회 참여라는 측면으로 생각해야 할 것 같다.
표충사는 고찰답게 진입로가 아름답기로도 유명하다. 

반듯한 소나무들이 도열하듯 서 있어, 소나무향을 맡으며 걷는 기분이 아주 상쾌하다. 

현재 표충사에는 청동함은향완(국보 제75호)과 표충사 삼층석탑(보물 제467호) 등의 유물이 있다.


표충사 여행 코스

가는 길

표충사가 있는 밀양으로 가려면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경부고속도로 금호분기점을 지나면 동대구나들목이 나온다. 

이 동대구나들목을 나와 바로 만나는 사거리에서 경산 방향으로 좌회전하여 달리다가 서호동삼거리에서 경산 방향으로 우회전한다. 

우회전하여 경산으로 들어가 계속 직진하면 이 길이 25번 국도와 이어지게 된다. 

이 25번 국도를 타고 계속 청도, 밀양 방향으로 내려가면 청도를 지나 24번 국도와 만나는 삼거리가 나온다. 

이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달리면 표충사 입구 삼거리가 나온다. 

이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표충사 이정표를 따라 들어가면 표충사 주차장이 나온다. 





밀양의 영남루(嶺南樓)
밀양강변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누대이다. 
규모나 형태면에서 진주의 촉석루와 함께 영남을 대표하는 누각으로, 보물 제147호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영남루는 동쪽과 서쪽에 각각 침류각과 능파각이라는 부속누각이 있다. 

이 부속누각을 통해 이층인 영남루에 오르게 되어 있는데, 이런 형태는 남원의 광한루와 청풍문화재단지의 한벽루에서도 볼 수 있다.

영남루 주변에는 영남루 외에도 천진궁과 석화 그리고 밀양시립박물관과 어랑각 등이 있다. 

천진궁은 단군 왕검과 역대 8왕조의 위패를 모신 사당 형태이다. 이곳에 단군 왕검의 사당이 있는 것이 좀 의아하기는 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사당이다. 

석화는 천진궁 문 앞에 있는 편평한 돌인데, 돌에 꽃무늬가 있다고 해서 석화라는 이름이 붙었다.
영남루 위로는 밀양시립박물관이 있다. 인근에서 발견된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다. 박물관 옆으로는 무봉사라는 절이 하나 있고 그 아래에 아랑각이 있다.
아랑각은 밀양아리랑을 만들어낸 아랑이라는 처녀의 혼을 달래기 위한 제당이다. 

아랑의 전설은 아주 많이 들어온 내용이다. 

억울하게 죽은 처녀가 신관사또에서 그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나타나면 사또들이 놀래 죽었는데, 기백있는 신관사또가 아랑의 억울함을 듣고 한을 풀어 주었다는 이야기다.


가는 길
영남루가 있는 밀양으로 가려면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경부고속도로 금호분기점을 지나면 동대구나들목이 나온다. 

이 동대구나들목을 나와 바로 만나는 사거리에서 경산 방향으로 좌회전하여 달리다가 서호동삼거리에서 경산 방향으로 우회전한다. 

우회전하여 경산으로 들어가 계속 직진하면 이 길이 25번 국도와 이어지게 된다. 

이 25번 국도를 타고 계속 청도, 밀양 방향으로 내려가면 청도를 지나 24번 국도와 만나는 삼거리가 나온다. 

이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밀양 시내로 들어가면 밀양 시내에서 영남루 이정표가 나온다. 

이 이정표를 따라 좌회전하여 들어가면 밀양강을 건너기 전에 길 오른쪽으로 영남루가 있다.



경남 밀양의 호박소" 
시원한 폭포 아래 펼쳐진 넓은 소이다. 
커다란 바위를 움푹 패놓은 듯한 모양이 신비함을 자아내며 바위 위로 넘실대는 소의 불빛도 아주 아름답다. 

그냥 보기에는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인데, 옛날에 이 호박소의 깊이를 재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실에 돌을 묶어 밑으로 넣어 보았는데, 실 한 타래가 다 들어가도 바다에 닿지 않았다는 말이 있다. 

이 호박소로 가려면 얼음골 입구에서 동쪽 계곡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얼음골 입구에서 약 2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백련사라는 작은 절 뒤에 있다.
가지산도립공원 관리사무소 : (055)356-1915


가는 길

호박소로 가려면 얼음골을 찾아가면 된다.얼음골이 있는 밀양으로 가려면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경부고속도로 금호분기점을 지나면 동대구나들목이 나온다. 이 동대구나들목을 나와 바로 만나는 사거리에서 경산 방향으로 좌회전하여 달리다가 서호동삼거리에서 경산 방향으로 우회전한다. 

우회전하여 경산으로 들어가 계속 직진하면 이 길이 25번 국도와 이어지게 된다. 

이 25번 국도를 타고 계속 청도, 밀양 방향으로 내려가면 청도를 지나 24번 국도와 만나는 삼거리가 나온다. 

이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달리면 표충사 입구를 지나 얼음골 삼거리가 나온다. 

이 삼거리에서 얼음골 쪽으로 들어가 얼음골 주차장을 지나 좁은 길을 더 들어가면 호박소 주차장이 있다. 



밀양펜션,얼음골펜션"

경남 밀양시에 있는 호박소가는길 펜션은 가지산도립공원에 위치하고 있으며 유명한 밀양얼음골과 호박소 그리고 케이블카 그외 산악인을위한 등반코스등 봄.여름.가을.겨울 사계를 만긱할수있는 천혜의 지역입니다
밀양 근교에는 밀양댐,밀양한천박물관 (체험) 밀양 연극촌
만어사,표충사,영남루,위양못등과 청도의 용암온천,
와인터널 프로방스등 가까이 위치하고 있어 다양한 여행경로를 쉽게 즐길 수 있습니다.



편의시설


에어컨

케이블 TV

건조기

필수품목
이용 불가: 일산화탄소 감지             



방갈로에 화장실 설치


방갈로

냉난방 가능한 방갈로 3동 있습니다.

밀양시 담당부서
             문화예술과(☎ 055)359-5646)최종 수정일
2017.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