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3일 금요일

해방 과 건국 운동

해방  과 건국 운동

그날이 
흙 다시 만져 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리,
이날이 사십 년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
길이길이 지키세 길이길이 지키세,
- 정인보 작사, 윤용하 작곡, <광복절 노래>



1945년 8월 15일 오전, 서울 시내 곳곳에 일본 천황의 중대 발표를 예고하는 벽보가 나붙었다. 
이날 정오, 라디오에서 "짐은 제국 정부에게 미·영·중·소 4국에 대하여 그 공동 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게 하였다."
천황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일본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한다는 선언이었다. 
그것은 온 민족이 꿈에도 그리던 한국의 해방을 뜻하였다. 
그날 아침 조선 총독부의 정무 총감 엔도는 미리 여운형에게 일본의 패전 사실을 알리고, 일본인이 안전하게 제 나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협력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여운형은 정치범과 경제범의 즉각 석방, 서울의 3개월 치 식량 확보, 치안 유지와 건국 사업에 대한 일본의 간섭 금지 등을 약속받고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8월 16일 아침, 감옥에 갇혀 있던 정치범들이 모두 석방되었다. 
거리는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이들을 환영하고, 해방을 기념하는 인파로 넘쳐 났다.

해방과 건국 준비해방의 기쁨은 건국 준비를 위한 활동으로 이어졌다. 8월 16일 건준은 대규모 집회를 개최하였다. 여운형은 엔도와 벌인 협상 과정을 보고하면서 "지난날의 아프고 쓰라린 것들을 이 자리에서 잊어버리고, 이제부터 이 땅에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낙원을 건설하자."고 외쳤다.

건국 운동을 전개하다

해방을 맞이한 날 저녁, 신간회 활동을 같이하였던 여운형과 안재홍 등은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건준)를 구성하고 활동에 나섰다. 
건준 지역 지부도 잇달아 결성되어 8월 말까지 145개 지부가 생겨났다.
1. 우리는 완전한 독립 국가 건설을 기함.
2. 우리는 전 민족의 정치적·사회적 기본 욕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주주의 정권의 수립을 기함.
3. 우리는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국내 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대중 생활의 확보를 기함.
-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 선언문

건준에는 민족주의, 사회주의 등 다양한 정치적 성향을 띤 인사들이 참여하여, 민족의 뜻을 대변할 민주적인 정부 수립을 준비하였다. 
해방 직후에는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이 더 활발하였다. 
이들은 건준에 참여 1928년에 강제로 해체된 조선 공산당을 재건하였다.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조선 공산당은 전면적인 토지 개혁은 물론 노동자와 농민을 중심으로 진보적 인사들이 두루 참가하는 인민 정권을 세우자고 나섰다.

건준과 조선 공산당은 미군이 한반도에 들어오기 전에 우리 민족끼리 정부를 만들어 놓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였다. 

1945년 9월 6일, 건준은 인민 대표자 회의를 개최하여 조선 인민 공화국이 건국되었음을 선포하고, 각 지부를 인민 위원회로 전환하여 지방 정부의 역할을 하겠다고 나섰다.

송진우와 김성수 등은 건준에 참여하지 않고, 별도로 한국 민주당(한민당)을 결성하였다. 

한민당에는 일제하의 지주와 기업인 들이 많았으며, 친일파도 상당수 있었다. 

한민당은 사회주의를 반대하고, 일제와 민족 반역자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분배하자는 등의 방침을 내건 조선 인민 공화국의 타도를 주장하였다.



38도선해방 당시 분단을 상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38도선으로 1,300년 동안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던 공간이 인위적으로 분할되고 말았다.
사진 속의 군인이 38도선을 표시한 이 마을 길은 그로부터 얼마 뒤 아예 오갈 수 없는 길이 되고 말았다.

미국과 소련 38도선

건국 운동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무엇보다도 미국과 소련이 38도선을 경계로 한국을 나누어 점령하였기 때문이다.

소련은 해방 직전인 1945년 8월 8일에 미국의 요청으로 일본에 전쟁을 선포하고, 만주를 거쳐 한반도의 나진, 청진 등에서 일본군과 격렬한 전투를 치르며 남하를 계속하였다. 

아직 한반도에 들어오지 않은 미국은 예상보다 빠른 소련군의 남하에 놀라, 소련에 38도선을 경계로 한국을 분할 점령하자고 제안하였다. 
이에 따라 38도선을 기준으로 이북은 소련군이, 이남은 미군이 점령하였다.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점령 정책은 많이 달랐다. 

미국은 조선 인민 공화국이나 대한 민국 임시 정부를 부정하거나 무시한 채, 오직 미 군정만이 합법적인 통치 기관이라며 38도선 이남에 미 군정에 의한 직접 통치를 실시하였다.

38도선 이북의 소련은 건준의 하부 기관 인민 위원회의 활동을 대체로 인정하였으며, 한국인 대표자와 협의하여 정책을 추진하는 간접 통치 방식을 취하였다. 

군정이든 간접 통치든, 미국과 소련 모두 한국인의 의사보다 자국의 이익을 우선한 점은 동일하였다. 

미·소의 분할 점령은 국가 건설 방향을 둘러싼 한국인 사이의 분열을 확대시켰고, 분단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성조기가 걸린 조선 총독부

성조기가 걸린 조선 총독부8월 25일 평양에 들어온 소련은 일본으로 하여금 건준을 개편한 인민 정치 위원회에 행정권을 넘겨주도록 하였다. 
미군은 9월9일 서울에 도착하였는데, 이날 일본 국기를 대신하여 미국 국기가 조선 총독부 건물에 게양되었다. 
소련과 미국 모두 한국에서 좌파가 우세하다고 판단하였는데, 그런 판단은 한국에 대한 두 나라의 점령 정책에 영향을 주었다.


민족 운동 지도자
해외에서 활동하였던 민족 운동 지도자들이 하나 둘 귀국함에 따라 완전 독립을 향한 희망이 불타올랐다. 

사회주의자들은 대부분 소련이 점령한 이북으로 귀국해 평양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중국 화북 지방에서 조선 의용군을 이끌었던 김두봉과 무정이 대표적이다. 

소련에서 귀국한 김일성은 이북 사회주의 진영의 최고 지도자로 떠올랐다.

이승만과 김구는 미군이 점령한 38도선 이남으로 귀국하였으며,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미 군정은 여운형, 박헌영을 견제해 주길 바라며 이들의 활동을 도왔다. 

이승만은 한민당과의 협력을 모색하였고, 김구는 임시 정부 조직과 한국 독립당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45년 12월까지 해외 독립 운동 세력들이 대부분 귀국함에 따라, 어떤 나라를 세울 것인지에 대한 토론이 더욱 활발해졌다.


국가 건설 방향 논쟁

해방 직후 사회(공산)주의 활동을 한 이들을 좌파라 하고, 반공을 내세우며 자본주의 질서를 강조한 이들을 우파라 한다. 
좌·우 어느 쪽에 속해 있더라도 좌·우파 간의 협력을 중시한 여운형 등을 중도파라 한다. 

사진의 왼쪽에 가까운 인물일수록 전면적인 토지 개혁과 주요 산업의 국유화를 강조하고, 친일 청산에 적극적이었다. 
한민당과 이승만은 친일 청산과 토지 개혁에는 소극적이었고, 김구는 친일 청산에는 적극적이었으나 토지 개혁 문제에 대해서는 좌파와 생각이 많이 달랐다.


북쪽 
소련에서 활동하던 김일성이 좌파의 중심이었다면, 물산 장려 운동을 이끌었던 조만식이 우파, 국어 학자이자 조선 독립 동맹 활동을 한 김두봉이 좌파와 우파의 가운데쯤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좌파가 많았으며 중도파는 약했다.

김일성

김두봉

조만식
해방과 건국 운동 본문 이미지 1

남쪽 
조선 공산당을 이끈 박헌영이 좌파의 중심이었다면, 송진우 등 한민당 계열이 가장 심한 우파였다. 
이승만도 분명한 반공주의자였다. 
여운형은 좌파이면서도 민족적 단결을 강조한 점에서 중도파였으며, 김구는 민족의 단결을 강조하였으나 사회주의를 반대한 우파였다.

박헌영
박헌영
여운형
여운형
김구
김구
이승만
이승만
송진우
송진우
선구회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구성해 본 내각
선구회라는 단체가 1945년 10월 10일에서 11월 9일까지 150여 단체 회원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를 나타낸 표이다. 
왼쪽이 1위, 오른쪽이 2위 득표자이다.
해방과 건국 운동 본문 이미지 2


해방, 새 세상에 대한 꿈이 부풀다

해방은 일제의 억압적 질서를 무너뜨리고 민주적인 새 질서를 만들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국내외 여러 정치 세력들은 정당을 결성하여 민주적인 국가 건설을 도모하였으며, 사회의 각계각층에서 저마다 단체를 결성하여 사회 변화를 이끌었다.

농민들은 군 단위 농민회를 조직하고, 전국 농민 조합 총연맹(전농)을 중심으로 단결하였다. 

전농은 일본인과 친일파, 민족 반역자의 토지를 몰수하여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소작료를 수확의 30%로 줄일 것(3·7제)을 주장하였다. 

노동자들은 공장 위원회를 조직하여 일본인이 떠난 공장이나 기업을 관리하면서 노동 조합 전국 평의회(전평)를 중심으로 단결하였다. 

전평은 8시간 노동제와 노동자의 단체 협약권 확립 등을 주장하였다.

여성들은 다양한 여성 단체를 조직하여 공·사창제 폐지, 남녀 임금 차별 폐지 등을 주장하였다. 

학자들은 조선 학술원을 조직하고, 문화 예술인들은 조선 문화 건설 중앙 협의회 같은 연합 조직을 결성하여 식민의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 문화를 건설하기 위한 활동을 벌였다.

교육자들은 한글로 된 새로운 교과서를 만들어 민족 교육을 실천하였으며, 조선 교육자 협회 같은 자주적 교육자 단체를 조직하였다. 

수많은 사회 단체가 등장하면서 좌파와 우파 간 갈등도 생겨났으나, 여전히 사회는 새로운 미래를 향한 설렘과 새 사회를 건설하려는 활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일제가 물러났으니 우리 독립."

회사는 일본 놈들의 전파 탐지기 성능을 높여 주는 화학 약품을 만드는 공장이었다. 
와 보니 사람들은 그대로 있는데 퇴직금을 지불하더라고유. …….

일본 사람들은 아직 한국에서 계속 머무를 수 있는지 없는지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 때였어요. 

'평화 산업'으로 전환하자고 우리와 얘기가 됐다. 
우리는 일본에서 제올라이트라는 치약 원료를 들여와 치약을 만들어 팔았다.

그때 공장 노동자들이 '자주 관리 운동'이라는 걸 조직해 일본인이 시설물을 못 가져가게 하고, 한국인들에 의한 도난 사태도 막았어요. 
그러다가 8월 20일, 일본인들이 철수 결정을 내리면서 치약 제조도 실패로 끝났어요. 
가져온 원료량도 적은 데다 그 뒤로 더 좋은 치약이 나왔기 때문이에요

어쨌든 하루 아침에 세상이 뒤집혔는데도, 공장이 노동자들에 의해 신속히 관리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별다른 준비가 있어서라기보다 저절로 생겨난 주인 의식 때문이었어요. 

영등포 일대의 조선 피혁이라든가 인천의 동일 방직, 부산의 조선 방직과 같은 일본계 큰 회사들을 모두 한국인 노동자들이 접수해 자주적으로 관리했습니다. 

이유야 뭐, 노동자들이 자기가 다니는 공장밖에 갈 데가 더 있었겠는가? 
이런 흐름이 이어지면서 8월 말 9월 초순쯤 '전국 노동 조합 평의회(전평)' 결성과 관련한 논의가 이루어졌습니다.
- 이일재의 증언, 《8·15의 기억》


1945년 12월에 모스크바에서는 미국, 영국, 소련의 외무장관들이 모여 한국에 임시 민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논의를 했고. 

그 결과 정부 수립을 논의하기 위한 미·소 공동 위원회를 설치하고, 최고 5년간 미국, 영국, 중국, 소련 네 나라가 한국을 신탁 통치하기로 결정했다.

신탁 통치란? ‘독립할 능력이 없는 나라를 강대국이 일정 기간 대신 통치해 주는 것’을 말한다. 

광복이 되었기 때문에 자주적 독립 정부 수립을 당연한 일로 생각했던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결정을 민족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였구.

민족 지도자들은 ‘신탁 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 위원회’를 결성하여 반탁 운동을 전개했다. 

반탁 운동 초기에는 공산주의자들도 반탁에 참여하여 전 국민이 거족적으로 반탁 운동을 전개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의 지시에 따라 신탁 통치안을 지지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버렸어.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당연히 서로 대립이 발생했겠지. 

반탁 운동을 추진하는 민족주의자들과 찬탁운동을 전개하는 공산주의자들 간의 좌우 대립이 치열해지면서 국내 정치 상황은 한층 더 혼란해졌다.


8·15 광복의 과정

우리 민족의 독립과 건국을 위한 노력

* 우리 민족은 나라 안팎에서 독립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습니다.

* 대한민국 임시 정부 : 
한국 광복 군을 훈련시켜 국내로 진입하려 는 계획을 진행하였습니다.

* 건국 동맹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국내의 일부 민족 지도자들 이 건국을 준비하기 위해 조직하였습니다.
* 제2차 세계 대전중 연합국은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와 노력을 인정하여 전쟁이 끝나면 독립을 돕기로 약속하였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의 승리

* 1945년 8월 초, 미국은 일본 땅에 두 발의 원자 폭탄을 떨어뜨렸습니다.
* 일본은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수 없었고, 무조건 항복하였습니다.
나카사키 원폭 투하
나카사키 원폭 투하

8·15 광복

일본이 항복하자 우리나라는 1945년 8월 15일에 광복을 맞이하였습니다.

8·15 광복 이후 민족 지도자들이 한 일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 조직

1945년 8월 15일,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의 결성
일제의 항복이 가까워지자, 조선 총독부는 조선에 남아 있던 일본인을 안전하게 일본으로 철수시키고자 하였어요. 
조선 총독부는 당시 민중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던 여운형과 협상하고자 했어요. 
우리나라에선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 지도자들이 건국 동맹을 조직하여 건국 준비를 하고 있었답니다. 
여운형은 조선 총독부가 협상을 요청하자, 

일본이 “독립 투사들을 전원 석방하고, 조선의 건국 활동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협상을 받아들이겠다”고 했어요. 
여운형은 곧바로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를 만들었답니다.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에서는 사회 질서를 바로잡고 새로운 국가의 건설을 논의하였습니다.


1945년 8월 16일, 건국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다.
"조선 민족 해방의 날은 왔다. 
우리 민족 해방의 첫걸음을 내디디게 되었으니 우리가 지난 날에 아프고 쓰렸던 것은 이 자리에서 모두 잊어버리자. 
그리하여 이 땅을 참으로 합리적이고 살기 좋은 나라로 건설하여야 한다. 
이때 개인의 영웅주의는 단연코 없애고 끝까지 모두 단결로 나아가자."
여운형
여운형
1945년 9월 2일,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의 강령을 발표하다!

1. 우리는 완전한 독립 국가를 건설하려 함.
2. 우리는 전 민족의 정치·사회적 기본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려 함.
3. 우리는 일시적 과도기에 국내 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대중 생활을 확보하려 함.
- 매일신보, 1945년 9월 -


민족 지도자들의 귀국

김구를 중심으로 하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 지도자들과 이승만을 비롯한 민족 지도자들이 귀국하여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일에 참여하였습니다.

카이로, 얄타 회담

카이로 회담

* 1943년, 미국·영국·중국의 대표자가 모여 열린 회담
* 일본에 대한 공격과 한국의 독립을 약속하였음.
카이로 회담에 모인 중국, 미국, 영국의 대표자들
카이로 회담에 모인 중국, 미국, 영국의 대표자들(왼쪽부터)장제스, 루스벨트, 처칠


얄타 회담

* 1945년 2월, 미국·영국·소련의 대표자가 모여 열린 회담
* 일본과의 전쟁에 소련이 참여할 것을 약속하였고, 한국에 대한 신탁 통치가 처음 이야기되었음.
얄타회담에 모인 영국, 미국, 소련 지도자들
얄타회담에 모인 영국, 미국, 소련 지도자들(왼쪽부터)처칠, 루스벨트, 스탈린

분단의 과정

* 미군과 소련군의 한반도 주둔 : 
북위 38도를 기준으로 북쪽에는 소련군이, 남 쪽에는 미군이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 미군과 소련군의 한반도 주둔이 우리 민족에게 미친 영향 : 
분단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미군과 소련군의 한반도 주둔 과정

* 미국과 소련은 일본이 전쟁에 져서 항복하기 전부터 한반도를 자기 세력권으로 끌어들이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 소련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일본에 전쟁을 선포하고 한반도 북쪽에서부터 일본군과 전쟁을 벌이면서 아래로 내려왔고, 미국은 한반도로 사회주의가 확산되는 것을 경계하여 한반도 남쪽에 들어왔습니다.
38도선
38도선북위 38도를 기준으로 북쪽에는 소련군이, 남쪽에는 미군이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담당하였으나 이는 분단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미국과 소련의 군정이 실시?
광복이 되자 우리나라에 있는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한다는 이유로 북위 38도선의 남쪽에는 미군이, 북쪽에는 소련군이 주둔하였습니다. 
실제로는 당시 가장 강한 나라였던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에서 먼저 주도권을 잡으려는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38선은 처음부터 분단선이었나?
처음에는 철조망으로 가로막혀 있지 않았습니다. 
처음 미국과 소련이 군대를 주둔하였을 때는 한반도에 두 개의 정부를 세울 계획이 없었습니다. 
먼저 신탁통치를 한 후에 독립 국가를 수립 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였습니다.  

정부 수립에 대해 다양한 의견들이 분분하였으며, 소련과 미국의 의견 차이가 커지면서 처음의 계획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길을 중심으로 초소를 세워 사람들의 이동을 제한하기 시작하다가 이후 철조망을 세워 통제 하였습니다. 
단순한 경계선이었던 38도선은 점차 남북간의 교류를 막는 장벽으로 변한 것입니다.


8·15 광복 후 달라진 생활 

광복 이후 사람들의 모습

* 일제의 탄압을 피해 다른 나라에 가서 살거나 일제에 강제로 끌려갔던 사람들 중 일부가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 더 이상 일본인들의 횡포를 겪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 학교에서는 우리말과 한글, 우리의 역사를 배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라는 이름이 쓰인 시기

등학교라는 이름이 쓰이기까지의 과정 : 소학교(갑오개혁) → 보통학교 → 소학교 → 국민학교(일제 강점기, 1941년) → 초등학교(1996년)


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로 이름이 바뀐 이유
- 국민학교라는 말은 일본에 충성하는 국민을 만든다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 8·15 광복 이후 국민학교라는 이름을 바꾸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그대로 사용하다가 많은 논의 끝에 1996년에 초등학교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전평의 행동 강령전농의 행동 강령부녀 총동맹 행동 강령
· 최저 임금제 확립
· 8시간 노동제 실시
· 7일 1휴가, 연 1개월간의 유급 휴가제 실시
· 여성 노동자의 산전 산후 2개월 유급 휴가제 실시
· 노동자의 이익을 위한 단체 협약권 확립
· 해고와 실업 절대 반대
· 일제와 민족 반역자 기업을 공장 위원회가 관리
· 일제와 민족 반역자 토지를 몰수하여 빈농에게 분배
· 소작료는 수확의 30%로 하는 3·7제 실시
· 각종 세금과 공과금은 지주가 부담
· 마름이나 관리인의 중간 착취 금지
· 금융 조합 등을 개편하여 농민이 공동 관리
· 고리대를 없애고 이자를 연 5% 이하로 인하
· 반농노 같은 머슴의 대우를 개선
· 남녀 평등의 선거권과 피선거권 확보
· 8시간 노동제, 남녀 차별 임금 폐지
· 산전 산후 1개월의 유급 휴가제 실시
· 산원, 탁아소, 공동 식당과 아동 공원 완비
· 공·사창제 철폐, 인신 매매 금지 모자 보호법 제정
· 여성의 경제적 평등권과 자주성 확립

건국 준비 위원회 선전물(1945. 8. 16.)우리들 장래에 광명이 있을 것이니 지도층의 뜻을 잘 따라 달라는 내용이다.

다시 간행된 잡지해방 속간 제1호라 쓰여 있는 잡지 《별나라》표지 사진이다. 
1940년 무렵, 대다수 한글 잡지와 신문이 페간되었다.



해방 이후 첫 등교해방 이후 첫 등교를 보도한 신문이다. 
"씩씩하게 글 배우자"라는 제목이 눈길을 끈다.



국어와 국사 교육일본어와 일본 역사 교육 대신 한국어와 한국 역사를 공부하게 되었다. 
교과서로 쓰기 위해 급히 만들어진 교과서이다.

연관목차

광복절 , 光復節 .

광복절 , 光復節 .


광복절8월 15일달력보기

1945년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광복된 것을 기념하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경축하는 국경일 더보기
관련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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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한민족이 35년간의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에서 광복을 되찾은 것을 기념하는 국경일. 
광복절은 민족의 해방과 조국의 광복 또는 독립을 기념하는 법정공휴일이다.


국경일은 근대 국민국가의 보편적인 제도의 하나이다. 
미군정은 1945년 10월 일제강점기의 경축일을 폐지하고 새롭게 축제일과 공휴일을 제정했다. 
한국은 1948년 8월 15일 해방 3주년에 정부 수립을 선포하였다. 

1949년 5월 국무회의에서 국경일을 제정했는데, 이때 8·15가 독립기념일로 제정되었으며, 1949년 10월 1일 법률 53호로 공포된 ‘국경일에관한법률’에 의해 광복절로 명칭이 수정되었다. 


이후 지금까지 매년 8월 15일은 광복절로서 기념되고 있다. 
한국 정부는 국경일과 함께 ‘각종기념일등에관한규정’을 1973년에 제정하여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1941년에는 미국을 공격하여 태평양전쟁을 일으켰지만,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한국은 이를 통해 광복을 되찾았고 일제에 의해 강제 동원된 한국인은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8·15의 의미는 해방, 독립, 광복의 세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1946년 8월 15일은 해방 1주년으로 비록 좌익과 우익으로 갈려 기념식이 치러졌으나, 전민족적 기념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하였다. 
1948년 8월 15일에 한국은 정부수립을 선포함으로써 이날의 역사적 의의를 드높였다. 
1949년 이후 8·15는 광복과 정부 수립의 중첩적 의미를 지닌 날이 되었다.

광복의 개념은 국권 상실 직후에 결성된 대한광복회()나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협의를 거쳐 성립한 서간도의 광복군사령부(), 철혈광복단(), 
1936년의 조국광복회, 
1940년 임시정부가 재조직한 광복군 등을 통해 지속되었다. 

해방 이전 광복이라는 개념과 가장 친숙한 존재는 임시정부 산하에 설치된 한국광복군과 이들이 발간한 『광복』이라는 기관지였다. 
광복군은 1940년에 창설되었고, 『광복』은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정훈처가 1941년에 창간한 광복군의 기관지였다.
 1974년 기념식장에서 영부인 암살 사건이 발생하여 우여곡절을 겪었다. 
기념식 장소는 중앙국립극장, 세종문화회관, 독립기념관 등으로 바뀌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어 한국이 독립하였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일제의 강점으로부터 벗어난 날과 독립국으로서 정부가 수립된 날을 기념하기 위해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매년 8월 15일을 광복절이라 하고 국경일로 지정하였다. 

'광복'이란 '빛을 되찾다'는 뜻으로서 잃었던 국권의 회복을 의미한다.
이 날은 대통령이 참석하는 독립기념관의 경축식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기념 행사를 거행한다. 

전국의 모든 가정에서 태극기를 게양하도록 권장하고, 정부는 저녁에 외교사절 등을 초청하여 경축연회를 베푼다. 

기념식에서는 정인보가 작사하고, 윤용하가 작곡한 〈광복절의 노래〉가 연주된다. 

광복회원 및 그 가족에 대한 우대조치로 8월 14~16일까지 전국의 철도·시내버스 및 수도권 지하철을 무임승차하게 하고, 고궁 및 공원도 무료입장하도록 한다.




광복절이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기념하는 시간적 의례 장치라면, 이에 상응하는 공간적 기억 장치는 독립기념관으로 1987년 8월 15일 개관하였다. 

이와는 달리 일제 지배를 상징하는 구 조선총독부 건물은 1995년 8월 15일 철거되었다.

광복절은 민족의 분단된 상태를 의식하여 끊임없이 남북간에 민족 통일을 향한 회담이나 선언이 이루어지는 날이기도 하다. 

북한은 8·15를 조국해방기념일로 지정하여 기념해왔는데, 최근에 광복이라는 용어를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1945년 8·15는 동아시아 현대사의 기점이다. 
일본인에게 이날은 패전일 또는 종전일이다. 

식민지 지배나 침략에 시달린 여러 민족들에게는 해방과 독립을 가져다준 경축일이다. 

동아시아는 제국, 식민지 체제에서 새로운 독립국가의 형성과 함께 냉전 체제로 이행하기 시작하였다.


광복절은 조국의 광복을 위해 투쟁한 순국선열들을 추념하고 민족의 해방을 경축하는 국경일이다. 


동아시아에서 일본제국주의 지배와 침략전쟁의 유산이 완전히 청산되지 않았고, 광복 60주년이 지나도록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는 상황은 광복절을 단지 과거의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는 날로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점차 한반도의 통일과 동아시아의 평화를 기원하는 기념일로서 의미가 커지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은 1943년에 접어들면서부터 점차 연합군 측에 유리하게 되어, 그해 11월 말에 미국·영국·중화민국 3국은 소위 카이로 선언을 발표했다. 


이어 1945년 5월에 나치 독일이 항복하였고, 8월 8일에는 미국과 영국소비에트 연방이 모여 포츠담 선언을 발표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드디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하였는데 북한의 청진시에서는 아직까지도 소련과 일본이 서로 치열한 전투를 계속 하고 있었다. 


한민족은 카이로 선언과 그것이 다시 확인된 포츠담 선언으로, 그리고 한민족의 오랜 투쟁을 통한 민족의 극복으로 일제의 학정으로부터 해방을 맞이하였으나, 경술국치를 재확인하여 결국 일본과 단절되었다.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 대한 법률〉에 따라 국경일로 지정되어 대한민국에서는 전국적으로 각종 경축 행사가 거행되며, 공공기관, 가정에서는 태극기를 달아야 한다.


광복회원 및 동반 가족에게는 광복절을 전후하여 전국의 철도·시내버스와 수도권 전철 무임승차, 고궁 및 공원 무료입장 혜택을 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민족해방 기념일'로 부르고 있는데, 그 내용은 "김일성 동지께서 항일의 혈전만리를 헤치시며 찾아주신 조국해방의 날"로 선전한다.



그날 정오에 히로히토 천황의 항복 방송이 라디오로 중계되었다.
8월 16일 오전 9시 마포형무소 앞[3]

그날 중대 발표가 있으니 조선인들은 경청하라는 벽보가 나붙었으나 당시 라디오를 가진 조선인들은 많지 않았고, 

히로히토 천황의 항복 발표 방송은 잡음이 심했고 어려운 한자가 섞여 있던 데다가, 

결정적으로 이게 그 당시 쓰던 일본어도 아니고 일본 황족어로 나왔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였다. 

라디오로 방송된 문장과 개요가 당일의 신문에 기재되고 있었으므로, 일본 국민의 대부분이 패전을 이해했다.
그 사이에 소련은 일본과 청진시에서 전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8월 16일

다음날이 되자 비로소 조항 내용대로 형무소에 있었던 정치범과 경제범이 석방되기 시작했다. 

경성(서울) 시민들은 어제 방송이 히로히토 천황의 항복 방송인 줄 알게 되었고, 해방을 환호하기 시작했다. 

그대로 시민들은 계동에 있는 여운형의 집에 몰려가 연설을 해달라고 요청하였고, 여운형은 집 바로 뒤에 있는 휘문중학교 운동장으로 가서 해방을 맞이하는 연설을 한다


조선 민족의 해방의 날은 왔다.

어제 15일에 원등(엔도 류사쿠)이가 나를 불러가지고 '과거 두 민족이 합하였던 것이 조선에게 잘못됐던가는 다시 말하고 싶지 않다.
오늘날 나누는 때에 서로 좋게 나누는 것이 좋겠다.


오해로 피를 흘리고 불상사를 일으키지 않도록 민중을 지도하여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나는 다섯 가지 조건을 요구하였다.

우리 민족해방의 제일보를 내딛게 되었으니 우리가 지난날의 아프고 쓰리던 것을 이 자리에서 다 잊어버리고 이 땅에다 합리적· 이상적 낙원을 건설하여야 한다. 

이때는 개인적 영웅주의는 단연 없애고 끝까지 집단적으로 일사불란의 단결로 나아가자! 머지않아 연합군 군대가 입성할 터이며, 그들이 오면 민족의 모양을 그대로 보게 될 터이니 우리들의 태도는 조금도 부끄럼이 없이 하자. 

세계 각국은 우리들을 주시할 것이다. 
백기를 든 일본의 심흉을 잘 살피자. 물론 우리는 통쾌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그들에 대하여 우리들의 아량을 보이자.

세계문화 건설에 백두산 밑에서 자라난 우리 민족의 힘을 바치자. 이미 전문·대학·중학생의 경비대원이 배치되었다. 

이제 곧 여러 곳으로부터 훌륭한 지도자가 들어오게 될 터이니 그들이 올 때까지 우리들의 힘은 적으나마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1945년 8월 16일, 경성 계동 휘문고보의 군중 속 여운형. 여운형은 이곳에서 연설하였다.

연설 도중에 '소련군이 서울역에 온다'는 소문이 나돌자 수많은 시민이 연설 도중 청중들 사이에서 고함을 외쳤다. 

청중의 일각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여운형은 연설을 이어나갔으나 소련군의 경성 입성 소문은 순식간에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았다. 

이에 흥분한 군중의 일부가 아우성치면서 교문 밖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여운형의 이날 연설은 중단되고 말았다. 
기록으로 전하는 연설문도 반 토막뿐이다. 

연설이 중단된 원인은 흔히 소련군의 경성 입성 소문 때문이었던 것으로만 알려졌으나 실상은 조선사람들의 습격을 두려워한 조선총독부 관료들이 전향자들을 동원해서 벌였던 공작이었다. 

여운형은 기존에 자신이 1944년 8월에 결성하여 운영했던 비밀결사 조직인 조선건국동맹을 기본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조직하였고 YMCA 건물에서 건준 강령을 발표하였다.
  1. 우리는 완전한 독립국의 건설을 기함.
  2. 우리는 전 민족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기본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 정권의 수립을 기함,
  3. 우리는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국내 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대중생활의 확보를 기함.


당시 상황

해방소식을 듣자 반일인사들을 옥에 가두고 고문했던 친일경찰들은 도망가기 바빴으며,일본군들은 미군에 의해 무장해제되는 9월 9일까지 시내를 돌아다니며 해방을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을 염려해 비행기로 경거망동을 삼가라는 건준 명의의 전단을 뿌렸다.


건준은 8월 말까지 전국에 145개 지부를 두고 일본인 자본가와 지주로부터 재산과 토지를 접수하여 조선인들에게 배분하는 것을 도와주었으며, 경찰들이 도망간 빈자리를 대신하여 전국의 뜻있는 청년들을 모집해 치안대를 결성해 치안을 유지하였다. 


지방의 경우는 사회주의, 민족주의 등 이념을 떠나서 지방의 유력한 유지들과 지주들 역시 적극적으로 나서서 건준에 활동하기도 했다.

경성 같은 경우 조선군사령부의 방해로 2중 정부와 같은 혼란이 야기되기도 함



광복 이후

가혹한 압제로부터의 돌연한 광복은 과격한 흥분상태를 가져왔고 수많은 정당과 사회단체가 통일적 핵심체 없이 난립하게 되었다. 

임시 정부가 곧 귀국하여 정권을 담당할 것을 기대하는 송진우 계통과 연합군이 진주할 때까지 민족대표기관을 설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여운형 계통과의 행동이 분열된 것이다. 

여운형 계통에서는 안재홍을 비롯한 일부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로서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했으며, 이때 잔류한 좌익세력은 소위 인민공화국이라는 정권조직을 급조하여 한민당과 민족주의자들의 지지를 받던 충칭의 임시정부와 대립할 기세를 취했다.

해외에서 독립운동 활동한 한국광복군은 미군첩보부대 OSS와 함께 국내 진입작전을 추진하던 이범석장준하김준엽노능서 등 4명의 광복군 요원이 1945년 8월 18일 낮 여의도비행장에 착륙하면서 해방된 조국 땅을 밟았다. 

무장한 채 여의도에 착륙한 이들은 미군이 "휴전조약이 체결된 다음에 다시 오라."는 일본군의 협박에 굴복하는 바람에 다음날 오후 다시 중국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한국광복군을 비롯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5년 11월이 되어서야 귀국할 수 있었다.

국내에서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의 대립이 첨예해갈 때에 미·소 양군이 각기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삼아 남북으로 갈라서 1945년 9월 한반도에 진출했다. 
남북한을 분할한 미·소 양군은 점령 지역에 군정을 실시하였다. 

소련은 처음 조만식을 내세워 인민위원회를 조직게 하고 군정 하의 행정을 담당케 하였으나, 이어 김일성(金日成)을 위원장으로 하는 소위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 공산주의 정치 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남한에 진주한 미군도 군정청을 설치하고 남한의 모든 행정을 담당하였다. 

미 군정은 정치활동의 자유를 허용하여 모든 한국인 정당에 대한 절대 중립 태도를 언명했다. 

하여 송진우 등우 '한국민주당', 안재홍 등의 '국민당', 여운형 등의 '조선인민당', 박헌영(朴憲永) 등의 '조선공산당'을 위시한 50여 개의 정당이 난립하였다. 

미국 본토와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초대 임시정부 대통령인 이승만(李承晩)이 귀국하고, 중국과 만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김구를 비롯한 임정 요인들도 귀국하였으나 혼란은 여전하였다.


광복이란 대한제국이 붕괴되면서부터 1910년 국권을 빼앗긴 이후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패하여 우리나라가 해방되던 날까지의 시기에 대해서만 적용되는 반일민족독립운동의 사상과 운동을 포괄하는 관념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일본의 패전이 8·15광복의 직접적인 계기이지만 1910년 8월 22 일 일본의 강제합병 이후 35년간 민족해방을 위한 독립운동은 계속 전개되었다. 

1910년 이전에는 애국계몽운동·독립협회운동·반침략호국운동이, 이후에는 대한제국의 부활을 위한 복벽운동이 전개되었으며,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민 족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운동이 일어났다.


1919년 3·1운동에는 산발적인 독립운동이 집결되어 200만 명의 인원이 참가하였으며, 독립이 현대적 국민국가수립을 의미하게 되었다. 

3·1운동 직전 2월에는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국민의회가, 3·1운동 직후 4월 13일에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국내에서는 4월 23일 임시정부선포문을 발표하는 등 곳곳에 정부가 세워졌으며, 1920년대는 민족유일당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1910년경 만주지방에서는 독립군의 무장항쟁이 활기를 띠었다. 

간도 삼원보()의 신흥무관학교()는 독립군 3,500명을 수료시키고, 김좌진()은 간도에서 1,600여명의 독립군을 양성하였으며, 연길현()에서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활동하였다.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 이후에는 독립군부대가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설립하였다. 

국내의 광복운동은 사회운동의 형태를 취하였으며, 1917년 민족주의노선과 사회주의혁명노선으로 양분되었다. 

1927년 2월 재통합을 위해 신간회가 조직되었으나 1931년 붕괴되었다.


해외에서는 정치단체가 1935년 7월 민족혁명당으로 통합되었으나, 1938년 좌익계 독립운동단체가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함으로써 민족진영과 좌익사회주의진영으로 양립되었다. 

1939년 김구()와 김원봉()이 민족적 통일기구로 전국연합전선협회를 성립시켰으며, 1940년 한국독립당()으로 발전하였다. 

1940년 9월 충칭[]에서는 광복군이 창설되어 대일무력항전을 전개하였다.


1941년 12월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이 1943년 들어 연합국의 우세가 확실해짐에 따라 연합국측은 전후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1943년 카이로회담을 열었으며, 한국에 대해서는 적당한 시기에 독립시킬 것을 결의하였다.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는 신탁통치가 거론되었으며, 1945년 7월 포츠담선언에서는 카이로선언이 재확인되었다. 

1945년 8월 6일 일본의 나가사키[]·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8월 9일 얄타협정에 따라 러시아가 대일선전포고를 한데 이어 38선 전역을 점령하였다. 

러시아의 남하를 우려한 미국이 38선분할안을 제기하였으며, 8월 15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하였다. 

9월 8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 하였으며, 한반도는 자유주의 미국과 사회주의 러시아가 점령하였다.


광복이 되었으나 국제적인 인정을 받지 못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부요인은 개인자격으로 귀국하였으며, 정계는 박헌영의 조선인민공화국, 여운형의 조선인민 당, 김성수()의 한국민주당, 김구의 한국독립당으로 분열되었다.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삼상회의는 한국에 대해 미·영·러·중 4개국의 5년간 신탁 통치를 결정하였으며, 이에 대해 모든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반탁()을 주장 하였으나, 1946년 1월 2일 공산당은 친탁으로 돌아섰다.


1946년 1월 16일 과 1947년 5월 21일 2차례의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으나 합의를 보지 못하고 10월 18일 무기휴회에 들어갔다. 

미국은 한국문제를 UN(UnitedNations:국제연합)으로 이관하였으며, UN은 1948년 1월 23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파견하였다.  

북한이 입국을 거부함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총 선거를 실시하고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를 수립하였다.


북한에서는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급진적인 사회개혁을 추진하였으며, 1947년 2월 사실상의 정부인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수립하였다. 

1948년 2월 임시헌법을 공포하고 9월 9일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 였다. 

남북한에서 각기 단독 정부가 수립되려는 움직임이 계속되자, 1947년말부터 중도파 정당들을 중심으로 미·러양군의 철수와 남북정당들의 직 접적인 협상을 통한 자주적 남북통일정부수립운동이 추진되어 1948년 4월말 남 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와 남북요인회담이 평양에서 개최되었으나 남북한 단독정부수립을 저지시키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8·15광복을 맞은 한국 민족의 역사적 과제는 일제식민통치의 잔재를 청산하고 자주독립국가의 토대를 세우는 것이었으나 미국과 러시아는 한국의 자주독립국 가수립을 원조하기 보다는 각기 자국의 영향력을 반영하는 국가를 건설하는 데 1차적인 목표를 두었으며, 국토분단으로 38선을 기준으로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진행되었다. 

이 민족분열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6·25전쟁이 일어났으나 이것은 해결책이 되지 못하였으며, 평화적 민족통일이 8·15광복 이후 우리민족의 과제로 남아 있다.



8·15광복 본문 이미지 1




1945년 8월 15일, 라디오에서는 일본 천황의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한다는 내용이었다.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던 한반도에도 광복의 기쁨이 찾아왔다. 여기서 ‘광복’이란 빼앗긴 주권을 다시 찾는다는 뜻이다. 

비록 일본의 항복과 동시에 완전한 독립 국가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우리 민족은 일제의 식민 지배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었다.
8 · 15 광복은 직접적으로는 연합군이 일본에 승리하면서 얻어진 결과이지만, 우리 민족의 끈질긴 독립운동도 큰 역할을 했다. 

1919년의 3 · 1 운동은 우리 민족의 강한 독립 의지를 드러냈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외교와 한국광복군의 결성, 만주에서의 무장 독립 전쟁, 연해주와 미국에서 있었던 독립운동 등은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국제 사회에 널리 알렸다.

민족 독립 활동은 연합군 진영의 나라들에게도 큰 감동을 주었다. 
그 결과,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열린 카이로 회담에서 한반도의 독립 문제가 의논되었다. 

미국의 루스벨트, 중국의 장제스, 영국의 처칠 등의 대표들은 “한국 민중의 노예 상태에 유의해 적당한 절차를 밟아 한국을 자유 독립시키기로 한다.”는 결의 내용을 발표했다.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한 뒤 열린 포츠담 회담에서 우리나라의 독립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우리나라는 마침내 독립을 이룰 수 있었다.





일본의 항복으로 식민 지배에서 벗어났지만 우리나라는 곧바로 독립 국가가 되지는 못했다. 

한반도에서 일본이 물러남과 동시에 외국 군대의 군정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쪽에는 미군, 북쪽에는 소련군이 각각 들어왔다. 

공식적인 독립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임시로 우리나라를 다스렸는데, 우리 민족은 끝내 통일 정부를 세우지 못하고 남쪽과 북쪽에 각각의 정부를 세운 뒤 분단 국가가 되었다.


8 · 15 광복은 우리 민족이 오랫동안 바라온 독립 국가를 세울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 주었다. 
이 때문에 우리 민족은 매우 기뻐했는데, 안타깝게도 통일 정부를 이루지는 못했다. 
미군이 다스리는 남쪽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소련군이 다스리는 북쪽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들어서면서 분단 국가가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은 끝이 나고, 우리나라는 독립하게 되었다. 

‘광복’이란 ‘빛을 되찾다.’라는 뜻으로,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 잃었던 국권을 회복한 것을 의미한다.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8월 15일을 광복절이라 하고 국경일로 지정하였다.




태극기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