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2일 목요일

부여 , 夫餘. 1

부여 , 夫餘. 1

부여인은 농업을 영위해 오곡을 생산하였다. 
목축도 성행해 말·소·돼지·개 등이 주요한 가축이었다. 
부여의 대평원에서 생산되는 말은 유명하였다.
농경민이면서도 기마 풍습이 일반화되어 있었고 훌륭한 말을 산출했으므로 부여족은 상대적으로 우월한 전투력을 지닐 수 있었다. 

부여족의 일파가 남으로 이주해 고구려나 백제 건국의 중심세력이 되었던 것도 이러한 면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부여인들은 흰색을 숭상해 흰옷을 즐겨 입었다. 
상복도 남녀 모두 흰옷이었다. 
장례는 5월장이었다. 
여름에는 얼음을 써서 시체의 부패를 방지하고자 하였다. 

혼인을 할 때에는 남자집에서 여자집에 혼납금()으로 소와 말을 보내었다.
남녀가 간음을 하거나 부인이 질투를 하면 모두 죽였다. 
부인의 질투를 미워해 죽인 뒤 시체를 산 위에 가져다가 썩게 내버려두었다가 여인의 친정에서 딸의 시체를 거두어 가려면 남자집에 소와 말을 보내야 하는데, 이는 혼인 때의 혼납금을 되돌려주는 형식이었다.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취하였다. 

취수혼(levirate)이 선호혼()으로 널리 행해지고 있었음은 당시 부여사회에서 친족집단의 공동체적 성격이 강하게 유지되고 있었음을 반영해주는 것이다. 
고구려에서도 취수혼이 성행하였는데 부여의 상황과 비슷한 면을 지녔다.
12월에 영고()라는 축제를 거행하였다. 

12월은 본격적인 사냥철이 시작되는 시기이다. 이 때에 축제를 거행함은 공동수렵을 행하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축제 때에는 노예나 외래민을 제외한 전 부여의 읍락민들이 참여했다.
축제기간 중 밤낮으로 술 마시고 노래하며 춤을 추고 즐기면서 서로간의 결속을 도모하였다. 
이 때 죄수들에 대한 재판과 처벌을 단행했고, 일부 가벼운 죄를 범한 자들은 석방하였다.

수도에 전국의 가()들이 모여 왕을 중심으로 하늘에 제사지내고 지난 한해를 결산하며 주요 문제를 토의하여, 국가의 통합력을 강화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전국에 걸친 지배조직이 미비하고, 지방 각지에서 읍락들을 지배하고 있던 가()들의 자치력이 강하던 상황에서, 영고는 비단 민속적인 행사로서 뿐 아니라 정치적인 통합기능도 매우 컸던 것으로 여겨진다.

부여국의 국가구조에서 기본 단위를 이루었던 것이 읍락이다. 
각 읍락에는 우두머리()인 호민이 있으며 그 밑에 일반민이 있었다. 

『삼국지』 동이전에서는 읍락민이 하호()로서 모두 노복과 같은 처지에 있다고 기술하였다. 
하호는 당시 중국에서 빈한한 소작농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 기록에 의거해 부여의 읍락민을 노예나 농노로 규정하는 설들이 있어왔다.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이 시기 부여의 읍락에는 철제 농기구가 부족하고 특히 보습과 같은 대형의 농기구는 주로 호민이 소유하고 있었다.

농업생산력이 상대적으로 낮아 수확이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읍락민은 농경 등의 일상생활을 호민의 주재 하에서 영위하고 통제를 받았다.

부여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던 위나라 사람이 보았을 때, 
가난하고 열세한 읍락민의 외형상의 모습이 호민의 소작농이나 노복처럼 여겨져 그런 기술을 했던 것이다. 
부여의 하호는 노예나 농노가 아니라 읍락의 일반민이었고, 호민은 읍락의 거수()였다.

당시의 읍락에는 촌락공동체적 요소가 상당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호민은 기존의 촌락공동체적 요소를 활용함을 통해 우월적 지위를 강화해나갔고, 다른 한편에는 읍락민들도 전래의 관습과 공동체적인 상호부조에 의지해 그들의 삶을 유지해나갔던 상황으로 여겨진다.

부여의 읍락민은 모두 동일한 처지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읍락민이 호민의 통제 하에 있었지만, 그들 내에서도 자영농민층과 빈농층의 분화가 진전되고 있었다. 

전쟁 때에는 스스로 무장해 참전했던 이들과 그렇지 못해 양식을 운반하는 노무부대로 참가하는 이들로 나뉘어졌음은 그런 면을 말해준다.
이러한 읍락을 수개 내지 수십개를 지배했던 것이 가()들이다. 

가들과 그 일족은 지배계급으로서, 왕의 일정한 통제를 받았다. 
각기 지배 하에 있는 읍락들을 자치적으로 통할했으며, 이들 읍락으로부터 징수한 공납으로 생활하였다.
이들은 외국에 나갈 때 수를 놓은 비단옷에 모피·갓을 쓰고 금은으로 장식을 하며 호사로움을 과시하였다. 

전체적으로 가 계층의 부력은 상당했고, 그들에 의한 부의 집중이 진전되고 있었다.
일반민 아래 노예가 존재하였다. 

가들과 호민들은 상당수의 노예를 소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례에 때로는 백수십인을 죽여 순장()을 하기도 하였다. 
순장된 노예는 전쟁포로 노예가 많았을 것이나 가내노예도 상당했을 것이다.

노예에는 전쟁포로 출신뿐 아니라, 형벌노예와 부채노예도 있었다. 
부여의 법에 살인자는 죽이고 그 가족을 노예로 삼았다. 
절도를 할 경우 12배로 배상하게 하였으며, 변상이 여의치 않으면 노예로 삼았을 것이다. 

빈한한 읍락민 중 일부는 점차 가나 호민의 예속민으로 전락해갔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보면 2세기 후반에서 3세기 전반의 부여의 사회는 제가층(), 호민층, 스스로 무장할 수 있는 읍락민, 빈한한 읍락민, 노비 등 대략 다섯층으로 구성되어있다고 볼 수 있다.

부여사회는 공동체적 유제가 잔존해 있는 가운데 사회분화가 진전되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정치체제에서도 연맹체적 성격이 강인하게 존재하는 가운데서 왕권이 점차 강화되어가는 추세를 보였음과 서로 연관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나라 소멸 과정

3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부여국은 격심한 변화를 맞게 되었다. 
이는 근본적으로 주변정세가 급속히 변화함에 따른 것이다.
부여는 지형상으로 대평원지대에 자리잡고 있어 외침을 방어하는데 취약점이 있었다. 
삼림민·유목민·농경민이 서로 교차하는 중간지대에 있어 주변세력의 변화에 따른 영향을 민감하게 받았다.

3세기 종반 이후 중국의 통일세력이 무너지고 유목민세력이 흥기해 동아시아 전체가 격동의 시기에 접어들게 됨에 따라 더욱 그러해졌다. 
남으로부터 가해지는 고구려의 압력과 서쪽의 선비족의 세력 팽창에 의해 여러 차례 공략을 당하였다.

285년에는 선비족 모용씨()에 의해 수도가 함락되고 1만여 인이 포로로 잡혀갔다. 
이 때 국왕 의려는 자살했고, 부여왕실은 두만강 유역의 북옥저 방면으로 피난하였다.
이어 의라()가 왕위를 계승한 뒤 진()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선비족을 격퇴하고 나라를 회복하였다. 

북옥저로 피난했던 부여인들 중 일부는 본국으로 돌아갔으나, 일부는 그대로 머물어 토착하였다.
길림 방면의 부여는 그 뒤 계속 모용씨의 침공을 받게 되었다. 
많은 수의 부여인들이 포로가 되어 북중국에 노예로 전매되어 갔다.
당시 부여는 진나라가 쇠망함에 따라 외부로부터의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고구려의 공략을 받자 더 이상 길림 일대의 원 중심지를 유지할 수 없게 되어 서쪽으로 근거지를 옮기게 되었다.
346년 서로부터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전연()의 공격을 받아 대타격을 입었다. 
이 때 국왕 현() 이하 5만여 명이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다. 
그 뒤 쇠약해진 부여는 마침내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고구려는 부여에 군대를 주둔시켜 이를 통할하였다. 
부여왕실은 고구려의 지배하에서 고구려의 부여지역 지배를 위한 방편으로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북옥저 방면에 정착했던 부여인들은 본국과 분리되어 점차 자립하게 되었다. 
이를 고구려인들이 동부여라고 했고, 길림 및 장춘·농안 방면의 부여를 북부여라고 불렀다. 
동부여는 410년광개토왕에 의해 병합되었다.

북부여는 457년 북위에 조공을 하여 한 차례 국제무대에 얼굴을 내밀었다. 
이는 일시적인 시도에 불과했고, 고구려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을 회복할 수 없었다.

5세기 말 동만주 삼림지대에 거주하던 물길()이 흥기해 고구려와 상쟁을 벌이고, 동류 송화강()을 거슬러 세력을 뻗쳐나갔다.
이에 부여는 그 침략을 받게 되고, 부여왕실은 안전한 고구려 내지로 옮겨지게 되었다. 
부여지역의 통제를 위해 존속시켰던 부여왕실의 명맥은 그 지역을 상실하면서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되어, 마침내 494년(문자왕 3)에 소멸되었다.


백제부여"
‘부여’ 하면 우리는 백제를 떠올리게 된다. 

부드럽고 풍요하고 원만하고 아름다운 문화를 일구었던 나라, 
강성해지는 고구려에 밀려서 점점 남하하다가 마침내는 나당연합군의 말발굽 아래 스러져 간 나라, 
황산벌에서 5천 결사대와 함께 목숨을 바친 계백, 
낙화암에서 떨어진 삼천 궁녀, 
이런 것이 우리가 백제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다.

백제 사람들이 600년 넘는 역사 속에, 적어도 가장 찬란했던 123년을 일구어냈던 부여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알 수 있을 만한 흔적들은 너무도 적다. 



백제 멸망 이후에 이땅 사람들은 계속 홀대를 받으며 살아왔다. 
부여를 비롯한 옛 백제 지역에는 이렇다 할 통일신라 유물이나 유적조차 없으니, 
지방적인 문화마저 발현될 수 없을 만큼 억눌렸던 것. 
고려 시대에 와서야 이땅 사람들은 소박한 형태로나마 조금씩 자신들의 문화를 드러내게 되었다.

역사책에도 백제의 모습은 파편적으로 남아 있을 따름이니 백제 역사 연구는 줄기를 제대로 잡을 수 없을 만큼 그 진폭이 크다. 

시조에 대해서도 비류냐 온조냐 또는 그 어머니인 소서노냐 하는 설까지 있다. 
강역에 관해서는 한강 유역을 차지했다가 고구려에 밀려 공주로 남하하고, 
더 남녘인 부여로 내려가 마침내 멸망했다는 식으로 보는가 하면, 
한때는 중국의 북경을 아우르는 지역에서부터 양자강 남쪽까지 식민지를 건설하고, 

백제의 왕족들은 일본으로 건너가 지배층을 이루었으니 중국, 한국, 일본에 걸친 거대한 제국을 형성했다고까지 하는 사람도 있다.

부여 땅 답사는 이토록 헤아리기 어려운 백제의 모습을, 
직접 디딤으로써 하나씩 알아가는 과정이 될 터이다. 

육당 최남선이 『삼국고적순례』에서 부여를 두고 “보드랍고 훗훗하고 정답고 알뜰한 맛은 부여 아닌 다른 옛 도읍에서 도무지 얻어 맛볼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 의미를.

부여는 공주에서 천도한 해인 538년부터 나당연합군의 말발굽 아래 마침내 그 생명을 다하던 660년까지 6대 123년 동안 백제의 왕도로서 삶을 누렸던 곳이다. 

번성기에 사비의 인구는 가구 수가 13만 호에 이르렀다니 3만여 명밖에 안 되는 요즈음과 비할 바가 못된다. 

백제가 멸망한 뒤로 8세기 중엽인 경덕왕 때는 웅천주의 속군이 될 만큼 철저히 압살되기도 했는데, 
신라 말에 견훤이 후백제를 세웠을 때에는 한동안 후백제 영역으로서의 삶도 누렸다.

부여에서 가장 발길을 잡아끄는 곳은 정림사터이다. 
거기에는 백제탑의 완성이라 할 조형미를 갖추고 있는 늘씬한 오층석탑이 있다. 

정림사터 탑은 뒷날 옛 백제 지역 탑의 범본이 되었으니 백마강 건너 장하리에는 자그마한 삼층석탑이 있어 생김새 자체로 정림사터 탑의 후손임을 드러내 보인다.

정림사터 탑이 부여에서는 유일한 지상의 백제건축이라면 능산리 고분군의 무덤들은 그에 상응하는 지하건축물이다. 

사신도가 그려진 무덤도 있어 6,7세기 백제인이 불교만이 아니라 도교 사상도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부소산성은 백제왕실의 이야기를 곳곳에 보듬고 있는 곳이다. 
부여의 진산인 부소산의 남쪽 기슭에는 지금은 조각 땅으로만 보여지는 왕궁터가 있고, 
산성 안에는 해맞이하는 영일루와 달을 보내는 송월루 등의 누각 자리가 있어 백제 사람들의 풍류를 알 만하다. 

부소산성을 정점으로 해서 부여를 빙 둘러가며 수도 방위의 외곽시설인 나성이 흔적으로 남아 있고, 
더 바깥쪽으로는 성흥산성을 비롯한 외곽 산성들이 있어 사비의 규모와 당시 수도의 방위체계를 엿볼 수 있다.

시가의 남쪽이었을 군수리에는 이름을 알지 못하는 절터가 지금은 논 가운데 아담하게 자리한다. 
그 옆쪽의 동남리에는 무왕의 태생에 얽힌 전설이 서려 있으며, 
이궁()을 짓고 즐겼다는 궁남지에 지금도 버드나무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백제 역사 이전부터 지금까지 쉬임 없이 흐르고 있는 백마강이 있다. 
부여를 휘감아 싼 백마강가에는 유난히 전설이 서린 곳이 많다. 

제대로 기록되지 못한 백제의 역사를 사람들은 그처럼 전설로라도 간직해 내려온 것이다. 

유람선을 타고 백마강 물살에 흔들리면서 낙화암, 조룡대, 구드래나루, 수북정 들의 전설에 젖어보는 맛도 그런대로 괜찮다.

금성산 기슭에 자리한 국립부여박물관에 가서야 우리는 비로소 사비 시대 백제 유물의 실제와 마주한다.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을 비롯한 백제 부처들이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우리를 맞이한다. 

꽃잎이 도톰한 연꽃무늬 기와들, 품이 넉넉한 백제 그릇들도 있다. 
부여 송국리의 청동기 시대 집터에서 발굴한 유물들을 비롯하여 뜻밖에도 많은 선사 시대 유물들이 충청남도에서 살았던 옛사람들의 모습도 전해 준다.

고려 때의 몇몇 유물들은 이땅 사람들이 백제의 후손으로서의 미감을 잘 간직하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 
앞에서 말한 장하리 삼층석탑이 그러하고, 
정림사터에 있는, 비록 비바람에 씻겨 많이 닳긴 했지만 엷은 미소를 머

금은 석불상이 그러하다.
성흥산의 대조사에도 거대한 몸체로 지방적인 양식을 보이지만 미소만큼은 넉넉한 석불상이 있다.

아직도 읍으로 머물고 있는 부여지만 옛 역사에만 파묻혀 있지는 않다. 
부여의 현대를, 
현실을 역사로서 숨쉬게 하는 데에는 60년대를 대표하는 민족시인 신동엽이 큰 구실을 한다. 

시내에는 그의 생가가, 백마강가에는 시비가 있어 큰 시인의 짧지만 무거웠던 삶을 증거해 준다.



「금강」에서 “백제,/천오백년, 별로/오랜 세월이 아니다
.우리 할아버지가" 그 할아버지를 생각하듯" 몇 번 안 가서" 

백제는우리 엊그제, 그끄제에있다”고 했건만, 
오늘 우리가 백제의 수도로만 알고 있는 부여에서 정작 백제의 숨결을, 
온기를, 살결에 닿는 바람처럼 느끼기는 쉽지 않다. 

그만큼 백제는 천오백년 세월에 철저히 묻혀졌다. 

백제가 “우리 엊그제, 그끄제에 있다”는 것은 다만 눈으로 보이는 유물이나 유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삶의 의미로서 백제, 바람버섯처럼 찢어져서 씨를 뿌리는 역사로서의 백제이므로, 
피어나야 하는 역사의 고장으로서의 백제는 이 부여에서 가장 확실하게, 
역사의 땅을 밟는 사람들의 발걸음 발걸음으로 살아날 것이다.


천년 사직을 지켜온 도성터며 절터가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경주와는 달리, 
전화에 휩쓸리고 사람들은 볼모로 잡혀가고, 
남은 이들은 부흥운동을 하다가 스러지고 불탄 폐허는 더욱 황폐해져 버렸던 부여는 왕도였던 모습을 간직하기는커녕 시내 한가운데에 정림사터 오층석탑만이 홀로 덩그러니 섰을 따름이다. 

왕성의 방위시설이었던 부소산성을 걸어보아도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백제의 옛도읍지 부여는 충남의 공주·논산·청양·보령·서천, 전북의 익산과 접하고 있다. 공주에서 부여로 가는 길은 40번 국도로 가는 것이 대표적이고 서울, 대전, 공주, 논산, 보령, 청양, 서천 등지에서 수시로 고속버스나 시외버스가 다녀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부여 읍내에는 숙식시설과 주차장 등이 잘 갖추어져 있으나, 그외 지역에서는 숙식할 만한 곳이 드물다.
**본 정보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으므로, 여행 시에는 최신 정보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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