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2일 목요일

부여 , 夫餘.

부여 , 夫餘.

서기전 2세기경부터 494년까지 북만주지역에 존속했던 예맥족의 국가. '북부여'라고도 한다.

부여는 왕권이 약하고 부족장의 권한이 강한 상태로, 느슨하게 연합해 있는 ‘연맹왕국’이다. 
토테미즘에 근거해 마가, 우가, 저가, 구가라는 4부족이 있었고, 날씨가 추워 반은 농사짓고 반은 가축을 기른 ‘반농반목’의 형태로 경제를 꾸렸다.



고조선(古朝鮮) 시대와 거의 같은 시기에 지금의 북만주 일대에 웅거한 부족 국가.
BC 2세기경부터 494년까지 존속한 예맥족계()의 나라이다. 
부여는 토지가 광활하고 농업을 하기에 적합한 지금의 북만주 눙안·창춘 일대에서 농업을 주로 하면서 궁실()·성책()·창고·감옥 등 진보된 조직과 제도를 가졌던 나라이다. 

정치는 완전한 귀족정치로서 지배계급에는 왕과 그 밑에 가축의 이름을 붙인 마가·우가(저가·구가와 대사(使)·사자(使) 등 귀족들의 관직이 있었으며, 또 전국을 크게 네 구역 즉 사출도 혹은 사가도()라 칭하는 지역으로 나누어 마가·우가 등의 제가()가 각각 그 일부 지역을 맡아 다스렸다. 
사출도 중의 큰 지역은 주민 수가 수천 호(), 작은 것은 수백 호가 되었다. 

피지배계급인 민()을 하호라고 칭하였는데, 그들은 지배계급에 대하여 각종 역()이나 물자를 부담해야 하였기 때문에 모두 노복()처럼 여겨졌다. 

산업은 농경을 주로 하였고, 명마()·적옥()·미주()·돈피() 등이 산출되었고, 풍속 중에는 영고()라는 제천대회()가 있었고, 법률이 매우 엄정하여 도둑질·간음() 등에 대하여는 특히 엄벌하였다.

부여의 주위에는 서쪽으로 선비(오환, 동쪽에는 읍루, 남쪽으로는 고구려와 한()나라의 현도군()이 인접해 있었다. 
해부루왕() 때 아란불()의 권고로 가섭원으로 수도를 옮긴 후부터는 동부여라고 칭하였다. 
가섭원은 《삼국사기》를 근거로 하여 지금의 강원도 강릉이라는 설, 중국의 지린성[] 훈춘[]이라는 설 등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후에 동부여의 땅은 모두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부여는 굉장히 중요한 나라입니다. 
이 부여에서 주몽이 내려가서 세운 나라가 고구려거든요. 
<주몽>이란 드라마 기억나세요? 
그 드라마의 마지막 부분에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부여와 고구려는 정치나 사회 모습이 굉장히 비슷합니다. 
심지어 똑같은 것도 많아요. 
부여의 기록을 통해 부여의 역사를 살펴볼게요.

부족장들이 힘을 합쳐 부여를 세우다

나라에는 왕이 있으며 벼슬은 가축의 이름을 따라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대사자, 사자라 칭했다.
일단 위에서 계속 등장하는 글자가 있죠? ‘가()’라는 한자입니다. 
부족장을 뜻해요. 
이를 통해 부여는 왕과 마가, 우가, 저가, 구가라는 4부족의 부족장들이 힘을 합쳐 만든 나라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렇게 길게 “마가! 우가! 저가! 구가!”라고 항상 부르기 힘드니까 부족장들을 모두 ‘제’ 자를 써서 제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마, 우, 저, 구는 무슨 뜻일까? 
마는 말을, 우는 소를, 저는 돼지를, 구는 개를 뜻합니다(저가는 저팔계를 생각하면 될 거 같아요). 
여기서 알 수 있는 중요한 게 있죠? 
동물의 이름을 통해 토테미즘의 존재를 알 수 있습니다. 
그 예로 마가는 말을 숭배하는 부족인 거죠.

부족장들이 지방 을 다스리다'

제가들은 별도로 사출도를 나누어 맡아보는데 큰 곳은 수천 가()이며 작은 곳은 수백 가였다.
부족장들(제가)은 각기 지방 4곳을 ‘별도’로 다스렸다. 
그럼 왕은 중앙을 다스리고 다른 부족장들이 왕의 잔소리를 듣지 않고 자체적으로 각 지역을 다스렸단 얘기. 
왕이 있으면 뭐해유. 
부족장들이 각 지역에서는 왕 같은 존재였어요. 
마치 학교에 교장선생님은 있지만 각 반의 담임선생님들이 마음대로 반을 이끌어나갈 수 있었던 거요. 
교장선생님이 아무리 자기 말 안 듣는다고 부글부글해도 소용없었단 얘기다. 
자연스럽게 왕권은 매우 약했을 거라고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부족장의 권한으로 왕을 교체 또는죽이다'

옛 부여 풍속에는 가뭄이나 장마가 계속되어 오곡이 영글지 않으면 그 잘못을 왕에게 돌려 ‘왕을 바꾸어야 한다’고 하거나, ‘죽여야 한다’고 하였다.
왕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사출도도 있고, 각 부족은 각기 모시는 동물신도 다르고, 심지어 가뭄이 든 것도 왕 탓이니 왕을 죽이거나 교체할 수도 있다니요! 
왕권이 약했음을 알 수 있다. 
아직 왕권이 강한 ‘고대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고 부족장의 권한이 여전히 강한 상태로 느슨하게 연합해 있는 ‘연맹왕국’이기 때문입니다.

부족 간 동맹을 맺으며 연맹왕국이 탄생

고대국가

우리에게 익숙한 정치구조는 오른쪽 그림과 같은 모습입니다. 
강력한 왕이 있고 관리들이 왕 밑에서 일을 하는 거. 

처음부터 왕권이 이렇게 강할 수 있을까?
우리가 간과하는 게 있습니다. 
태초에 인간은 평등했어요. 
청동기가 사용되면서 평등했던 그들 사이에서 불평등이 시작되었단 말입니다. 
차츰 계급과 국가가 생기긴 했지만 아직 나라 체계가 잡히진 않았다. 
그러다 전투력이 더 강한 부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부족들 간에 동맹을 맺으면서 연맹왕국이 탄생하게 됩니다.



연합을 맺은 부족장 가운데 좀 더 큰 부족을 이끈 부족장을 왕으로 선출한 거죠. 
그러니 왕권이 강할 수가 없습니다. 

연맹왕국은 4가지 법칙이 있습니다. 
첫째, 왕권이 약하고요. 
둘째, 통일된 종교가 없고, 
셋째, 통일된 법도 없습니다. 
넷째, 나라의 규모도 크지 않아요. 
규모가 커지려면 전쟁을 통해 영토를 넓혀야 하는데 왕권이 약하니 나라 안에서 단결해서 전쟁이 이뤄질 리가 없죠.

반은 농사 반은 가축을 기르다

그럼 부여의 경제 모습은? 일단 여기는 너무 추워서 농사가 잘 안 됩니다. 
목축을 병행할 수밖에 없어. 
이걸 반은 농사짓고, 반은 가축을 기른다고 해서 ‘반농반목’이라고 해요.

부여의 제천행사, 

연맹왕국에서 중요한 게 제천행사예요. 
제천행사는 ‘땡스기빙데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추수를 감사하면서 하늘에 제사도 지내고 마을에 축제도 여는 거죠. 
추수를 언제 하는지 아시죠? 10월에 합니다. 
대부분은 10월에 제천행사를 . 
부여는 혼자만 12월에 했대요. 
부여는 농사가 워낙 잘 안 되니까 중요한 게 사냥이었던 거죠. 
12월은 눈이 많이 오는 계절입니다. 
그럼 동물들이 눈에 갇혀서 잘 못 움직여요. 
그러니까 이때 대대적인 사냥 행사를 하고 친목을 다진 거죠. 
이 행사를 ‘영고’라고 부른다.

죽은 사람 순장을 하다'

사회 모습은 아주 흥미로운 게 많습니다. 
대표적인 게 순장이 있어요. 순은 ‘따르다’라는 뜻인데요, 
높은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의 살아 있는 가족들을 함께 매장하는 거예요. 
어떻게 이런 잔망스러운 일이 있을까? 
부여인들이 특별히 잔인해서 그런 게 아니라 다른 나라도 많이 있었던 풍습입니다. 
순장을 하는 이유는 사람이 죽으면 그냥 끝난다고 생각하지 않고 계속 살 수 있다고 생각해서요. 
생전에 쓰던 물건과 죽어서도 수발을 들어줄 노비와 가장 친한 가족들을 함께 묻는 거죠.

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사회 풍습 면에서 겹치는 내용이 대부분이에요. 
부여에서는 1번 잘못하면 12배로 갚아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 다른 친구를 한 대 몰래 때리다 걸리면, 그 친구한테 12대를 맞아야 하는 거예요. 이걸 1책 12법이라고 해요. 
‘책’이 잘못을 뜻해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책잡히다’ 할 때와 같은 뜻입니다.

부여와 똑같은 법이 고구려에도 있어요. 
바로 형사취수제입니다. 
다소 충격적일 수 있는데요, 
부여와 고구려에서는 형이 죽으면 형수는 동생의 부인이 됩니다. 
부여와 고구려 사람들은 특별히 여자를 좋아했을까요? 
아닙니다. 
역사를 공부할 때 꼭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 ‘저땐 저럴 수도 있었겠구나!’라고 했잖아요. 
당시 사람들의 상황 속에 들어가서 이해를 해야 해요. 
이 시기엔 여자가 출산하다 굉장히 많이 죽었어요. 
마찬가지로 영아 사망률도 높을 때라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여성의 노동력이 너무나 중요했죠. 
노동력을 보호하기 위해 이런 제도를 실시했던 것입니다.


형성 , 변천

‘북부여’라고도 한다. 
국호인 부여는 평야를 의미하는 벌(···)에서 연유했다는 설과, 사슴을 뜻하는 만주어의 ‘puhu’라는 말에서 비롯했다는 설이 있다.
부여는 서기전 1세기의 중국측 문헌에 등장하므로 이미 그전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기원에 관해서 중국측 기록인 『논형()』과 『위략()』에서는, 시조인 동명()이 북쪽 탁리국()에서부터 이주해와 건국하였다. 

『삼국지()』 동이전에서는 당시 부여인들이 스스로를 옛적에 다른 곳에서 옮겨온 유이민의 후예라 하였다고 전한다.
이는 부여국의 중심집단이 어느 시기에 이동해왔음을 뜻하는 것으로 여겨지나, 그 구체적인 이동 시기나 과정은 분명하지 않다.
근래 북류 송화강과 눈강()이 합류하는 지역 일대인 조원()의 백금보()문화나 대안()의 한서()문화를 동명 집단의 원주지인 탁리국의 문화로 간주하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으나, 아직 구체성이 부족하다.

부여국은 서로는 오환()·선비()와 접하고, 동으로는 읍루()와 잇닿으며, 남으로는 고구려와 이웃하고, 서남으로는 요동의 중국세력과 연결되어 있었다. 
3세기 전후 무렵 영역은 사방 2천리에 달하는 광활한 평야지대였다.
부여국의 중심지역인 부여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오늘날의 장춘()·농안() 부근으로 비정하는 설이 일찍이 제기되었다.

부여성은 고구려의 북부여성이며 발해의 부여부()인데, 요()나라가 발해를 멸한 뒤 부여부 지역에 황룡부()를 설치했고, 그것이 금대()에 융안부()가 되며 오늘날의 농안부근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이와는 달리 황금의 명산지이며 금나라를 세운 완안부()의 발흥지인 아성() 부근으로 비정하는 설, 창도() 북쪽의 사면성() 지역으로 보는 설, 북류 송화강 하류의 오늘날의 부여()로 추정하는 설 등이 제기된 바 있다.

이들 지역에서 뚜렷한 유적이 확인되지 않은 점을 지적하면서, 산성이 있고 한대()의 유물이 많이 출토되며 청동기시대에는 서단산문화의 중심지였던 길림시() 일대를 부여국의 중심지로 비정하는 설이 근래 제기되었다. 
나아가 길림시 지역이 부여국의 초기 중심지였고, 농안 부근은 후기 중심지였다고 여기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초기 부여의 정치체제는 부족연맹체적인 성격을 지녔다. 
왕은 일정한 가계()에서 나왔을 것이나 선임()의 유제가 강하게 존속하였다.
족장회의는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이며, 왕은 주술적인 신이한 능력을 지닌 제사장적인 성격도 짙게 띠고 있었다. 

날씨가 고르지 못해 농사에 흉년이 들면 허물을 곧 왕에게 돌려 죽이거나 교체했던 사실은 그러한 면을 반영해준다.
그 뒤 점차 사회분화가 진전되어감에 따라 왕권이 강화되어갔다. 

3세기 전반 부여의 왕위는 간위거()·마여()·의려()로 이어지는 부자계승이 행해졌다. 
마여가 죽은 뒤 아들 의려가 6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즉위한 것은 그러한 면을 말해준다고 볼 수 있다.
부자상속의 관행이 확고히 정립되지 못했고, 친족집단의 분화도 깊히 진전되지 못해 공동체적 요소는 상당히 잔존해 있었다.

당시 중앙에는 왕 아래 마가()·우가()·저가()·구가()·대사(使)·대사자(使)·사자(使) 등의 관인이 있었다. 
가()는 수장()으로서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지니고 있었다.

중앙의 수도를 중심으로 사방에서 가들이 각기의 읍락들을 통솔하였다. 
대가()는 수천호를, 소가()는 수백호를 지배하고 있었다. 
전시에는 가들이 휘하의 부대를 이끌고 왕의 기치 아래 모여 참전하였다.

왕은 가들의 대표로서 군림했으나, 초월적인 권력자는 되지 못하였다. 
가들은 각자의 읍락들을 자치적으로 이끌어나가고 있었다. 
중앙정부의 통제력은 강하지 못하였다.
대외적으로 부여는 남으로부터의 고구려의 위협과 서쪽의 유목민의 압박을 받고 있었다. 

부여는 이들에 대항하기 위해 요동의 중국세력과 연결을 꾀하였다. 
중국 측도 선비족과 고구려의 결속을 저지하고 제압하는데, 부여의 무력을 이용하기 위해 부여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120년 위구태()는 부여왕자로서, 136년에는 부여왕으로서 직접 한()나라를 방문했고, 한은 그를 융숭히 대접하였다. 
위구태는 당시 요동의 지배자였던 공손탁() 집안의 여인과 혼인을 하였다.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244∼245) 현도태수 왕기()가 부여를 방문했고, 부여는 그들에게 군량을 제공하였다. 
양측 간에는 그 뒤에도 밀접한 관계가 지속되었다.
부여는 동으로 읍루족을 복속시켜 공납을 징수하였다. 
220년대 초 읍루가 떨어져나가자 몇 번 공격했으나 험난한 지형과 완강한 저항으로 말미암아 끝내 평정하지 못하였다.
부여는 만주 길림시 일대를 중심으로 송화(쑹화)강 유역의 평야 지대에 건국 되었다. 
경제 생활은 농경과 목축을 중심으로 하는 반농반목의 형태였고 특산물로는 말과 주옥, 모피가 유명하였다. 
고구려와 백제의 건국 세력이 부여의 한 계통이었다.

부여는 5개의 부족으로 이루어진 연맹 왕국이었으며 1세기 초에 왕호를 사용하였고 중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으며 기원 후 3세기 경 사방 2천리의 면적에 8만여 호의 인구가 있을 정도로 강성했었다. 

중앙의 통치 구조는 부족의 대표적 성격을 갖는 왕과 그 아래로 마가, 우가, 저가, 구가라 불리는 군장들로 구성이 되어 있었다. 
군장들은 대사자, 사자라는 관리를 두어 가()를 보좌하는 역할을 하게 하였다.

지방은 가()가 저마다 따로 행정 구획인 4출도를 다스렸고 왕이 직접 통치하는 중앙(왕이 나온 대표 부족 : 세력 강성)과 합쳐 5부를 이루었다. 
가()는 왕을 추대하였으며, 흉년의 책임을 왕에게 물어 심할 경우 죽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그 당시 왕권이 미약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소를 죽여 그 굽으로 점을 쳤는데 이것을 우제점복이라 하고 은력을 사용하였다. 
제천 행사로는 영고(12월)가 있었고 수렵 사회의 전통을 나타내며 제천 의식을 벌이고 음주가무를 즐겼다. 
이러한 행사는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며 사회 통합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풍속으로는 순장이 있었는데 왕이 죽으면 많은 사람들을 껴묻거리와 함께 묻는 것으로 지배세력의 권한이 막강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4조목의 법은 부여의 대표적인 법 조항으로 고조선의 8조의 법과 비슷하였다. 
이 법률은 귀족들의 사유 재산과 노비 소유, 그리고 가부장제와 일부다처제를 유지하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부여사회에 대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기록

「삼국지 위지(위서) 동이전」
[삼국지]는 중국 진나라의 진수가 편찬한 역사서로, 이 중위서 동이전은 철기문화를 기반으로한 고대 국가 형성기의 상황을 보여주는 한국 고대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부여는 장성 북에 위치했으며 현도에서 천리 떨어져 있다. 
남은 고려, 동은 읍루, 서는 선비와 접해 있으며 북에 약수가 있다. 
사방이 2,000리나 되고 호수는 8만이다. ··· 산과 언덕이 많고 들이 넓다. 
동이가 사는 지역에서 가장 넓은 평지이며 그 땅은 오곡이 잘 되나 과실이 나지 않는다.

사람들의 체격은 매우 크고 성품이 강직 용맹하며 근엄 후덕해서 다른 나라를 노략질하지 않았다. 
벼슬은 가축의 이름을 따라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대사, 대사자, 사자라 칭했으며, 부락에는 호민이 있고 하호라 불리는 백성은 다 노복이 되었다. 

가()는 사출도를 관할하는데, 대가()는 수천 호, 소가()는 수백 호를 다스렸다. 
적이 있으면 제가()가 스스로 싸움에 나섰으며 하호()는 날마다 군사들을 먹였다. 
여름에 사람이 죽으면 얼음을 넣어 장사를 지내며 사람을 죽여 순장을 하는데 많을 때는 100명이나 되었다. ···

군사의 일이 있으면 하늘에 제사지내는데 소를 잡아 발굽을 관찰하여 길흉을 점쳤다. 
발굽이 벌어지면 흉하고 발굽이 합해지면 길하다고 했다.

··· 죄인을 다스림에는 엄하고 급하여 살인자는 죽이고 그 가족을 몰수하여 노비로 삼았다. 
도둑질한 자는 12배를 배상케 했으며 남녀가 음란하고 부인이 투기하면 모두 죽였다. 
투기한 자를 더욱 미워하여 죽은 시체를 남산 위에 두어 썩게 했다. 

여자의 친가에서 그것을 가져가려 하면 소와 말을 보내야 돌려주었다. 
···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 것은 흉노의 풍속과 같았다. 
··· 가뭄이나 장마가 계속되어 오곡이 잘 익지 않으면 그 허물을 왕에게 돌려 ‘왕을 마땅이 바꾸어야 한다.’거나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부여의 역사적 의의 : 
고구려와 백제의 뿌리로서 고구려, 백제의 건국 신화도 부여와 같은 원형을 갖고 있다.


지배 계급의 강력한 사회 질서 유지를 통한 국가통제에 목적이 있었으며, 보복적인 성격을 갖고 사유 재산을 중시 여겼다.

그 내용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①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는다.
② 절도자는 12배의 배상을 물린다.(1책 12법)
③ 간음자는 사형에 처한다.
④ 부인이 질투하면 사형에 처하되, 그 시체는 산 위에 버리며, 그 시체를 가져가려면 소, 말을 바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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