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2일 토요일

나훈아~감나무골(1973)

나훈아-꿈속의 고향

나훈아~천리길(데뷔곡)

나훈아~가고싶은 내고향

노래 잘하는 뽕짝아줌마 트로트 메들리

정전의 신위" 선왕 중에 특별한 공(功)과 덕(德)이 있는 왕과 왕비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정전의 신위" 현재 종묘에 모셔진 신위는 19실에 19대의 왕들과 왕비들이 모셔져 있다. 정전에는 선왕 중에 특별한 공(功)과 덕(德)이 있는 왕과 왕비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종묘에 봉안된 신주들은 문조(文祖)를 제외하면 전부 실제로 국왕으로 즉위하여 활동하였던 인물들이다. 다만 문조의 경우 헌종의 아버지로 추존되어 종묘에 봉안되었는데, 친진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조선왕조가 멸망하였기 때문에 그대로 종묘에 있는 것이다. 조선왕조는 대한제국이 건립되기 이전에는 중국에 대하여 제후국을 표방하였기 때문에 예제의 원칙상 5묘제, 즉 5대의 신주[태조와 현왕의 4대 조상]만이 종묘에 봉안해야만 했다. 그런데 위 표에서 보듯이 현재의 종묘에는 19대의 신주가 모셔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선왕 중에 특별한 공(功)과 덕(德)이 있다고 판단되는 대상은 ‘세실(世室)’로 정해 영원히 종묘에서 옮기지 않는 불천위(不遷位)로 삼는다는 논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왕조는 고종대에 이르러 대한제국으로 개편되었고, 이후 황제국을 자처하였다. 따라서 현재를 기준으로 하면 7묘제, 즉 창업의 군주인 태조와 순종-고종-철종-헌종-문조-순조까지의 7대가 원래대로의 종묘제사의 대상이고, 나머지 태종 이하 정조까지의 신주는 모두 불천위인 ‘세실’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15실에 봉안되어 있는 문조(익종)의 존재이다. 문조는 24대 왕인 헌종의 아버지이자 23대 왕인 순조의 큰아들인 효명세자(孝明世子)이다. 순조 30년(1830)에 그는 사망하였고, 이후 순조의 왕위는 손자인 헌종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헌종이 즉위하자 아버지인 효명세자를 익종(翼宗)으로 추증하고, 동왕 3년(1837) 정월 춘향대제를 지내면서 종묘의 17실에 봉안하였다. 그런데 조선왕조에서는 추존된 왕들이 종묘에 일단 봉안되면 그가 친진(親盡)이 될 때까지 종묘에 그대로 두다가 친진이 이루어지면 예외없이 불천위로 지정하지 않고 영녕전으로 그 신주를 옮겼다. 그런데 정조의 아버지, 흔히 사도세자로 알려진 장조(莊祖)의 신주는 영녕전에 봉안되어 있다. 이것은 장조가 이미 친진으로 영녕전으로 옮겨졌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그 시기는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기 이전인 고종 2년으로 판단된다. 만약에 이것이 대한제국 설립 이후라면 고종과 순종의 시대에는 장조가 친진의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종묘에 봉안된 역대 국왕 및 왕비의 신주> 왕호 생몰연대 재위기간 선왕 생부 생모 관계 왕비 부묘시기 태조 1335∼1408 1392~1398 이자춘 최씨 차남 신의왕후한씨 신덕왕후강씨 태종 10년 (1410) 태종 1367~1422 1400~1418 정종 태조 신의왕후한씨 오남 원경왕후민씨 세종 6년 (1424) 세종 1397~1450 1418~1450 태종 태종 원경왕후민씨 삼남 소헌왕후심씨 문종 2년 (1452) 세조 1417~1468 1455~1468 단종 세종 소헌왕후심씨 차남 정희왕후윤씨 성종 원년 (1470) 성종 1457~1494 1469~1494 예종 의경세자 소혜왕후한씨 차남 공혜왕후한씨 정현왕후윤씨 연산군 3년 (1497) 중종 1488~1544 1506~1544 연산군 성종 정현왕후윤씨 차남 단경왕후신씨 장경왕후윤싸 문정왕후윤씨 명종 2년 (1547) 선조 1552~1608 1567~1608 명종 덕흥대원군 하동부 대부인정씨 삼남 자인왕후박씨 인목왕후김씨 광해군 2년 (1610) 인조 1595~1649 1623~1649 광해군 정원군 인헌왕후구씨 장남 인열왕후한씨 장열왕후조씨 효종 2년 (1651) 효종 1619~1659 1649~1659 인조 인조 인열왕후한씨 차남 인선왕후장씨 현종 2년 (1661) 현종 1641~1674 1659~1674 효종 효종 인선왕후장씨 장남 명성왕후김씨 숙종 2년 (1676) 숙종 1661~1720 1674~1720 현종 현종 명성왕후김씨 장남 인경왕후김씨 인현왕후민씨 인원왕후김씨 경종 2년 (1722) 영조 1694~1776 1724~1776 경종 숙종 화경숙빈최씨 차남 정성왕후서씨 정순왕후김씨 정조 2년 (1778) 정조 1752~1800 1776~1800 영조 장헌세자 혜빈홍씨 장남 효의왕후김씨 순조 2년 (1802) 순조 1790~1834 1800~1834 정조 정조 수빈박씨 차남 순원왕후김씨 헌종 3년 (1837) 문조 1809∼1830 ~ - 순조 순원왕후김씨 신정왕후조씨 헌종 3년 (1837) 헌종 1827∼1849 1834~1849 순조 효명세자 신정왕후조씨 장남 효현왕후김씨 효정왕후홍씨 철종 2년 (1851) 철종 1831∼1863 1849~1863 헌종 전계대원군 용성부 대부인염씨 삼남 철인왕후김씨 고종 2년 (1865) 고종 1852∼1919 1863~1907 철종 흥선대원군 여흥부 대부인민씨 차남 명성왕후민씨 순종 14년 (1920) 순종 1874∼1926 1907~1910 고종 고종 명성왕후민씨 차남 순명왕후민씨 순정왕후윤씨 제1실 왕호 태조(太祖) 생몰연대 1335~1408 재위기간 1392~1398 선왕 생부 이자춘(李子春) 생모 최씨(崔氏) 관계 次男 왕비 신의왕후한씨(神懿王后韓氏) 신덕왕후강씨(神德王后 康氏) 부묘시기 태종 10년(1410) 7월 26일 제2실 왕호 태종(太宗) 생몰연대 1367~1422 재위기간 1400~1418 선왕 정종(定宗) 생부 태조(太祖) 생모 신의왕후한씨(神懿王后韓氏) 관계 五男 왕비 원경왕후민씨(元敬王后閔氏) 부묘시기 세종 6년(1424) 7월 12일 제3실 왕호 세종(世宗) 생몰연대 1397~1450 재위기간 1418~1450 선왕 태종(太宗) 생부 태종(太宗) 생모 원경왕후민씨(元敬王后閔氏) 관계 三男 왕비 소헌왕후심씨(昭憲王后沈氏) 부묘시기 문종 2년(1452) 4월 10일 제4실 왕호 세조(世祖) 생몰연대 1417~1468 재위기간 1455~1468 선왕 단종(端宗) 생부 세종(世宗) 생모 소헌왕후심씨(昭憲王后沈氏) 관계 次男 왕비 정희왕후윤씨(貞熹王后尹氏) 부묘시기 성종 원년(1470) 12월 16일 제5실 왕호 성종(成宗) 생몰연대 1457~1494 재위기간 1469~1494 선왕 예종(睿宗) 생부 의경세자(懿敬世子) 생모 소혜왕후한씨(昭惠王后韓氏) 관계 次男 왕비 공혜왕후한씨(恭惠王后 韓氏) 정현왕후윤씨(貞顯王后尹氏) 부묘시기 연산군 3년(1497) 2월 11일 제6실 왕호 중종(中宗) 생몰연대 1488~1544 재위기간 1506~1544 선왕 연산군(燕山君) 생부 성종(成宗) 생모 정현왕후윤씨(貞顯王后尹氏) 관계 次男 왕비 단경왕후신씨(端敬王后愼氏) 장경왕후윤싸(章敬王后尹氏) 문정왕후윤씨(文定王后尹氏) 부묘시기 명종 2년(1547) 정월 12일 제7실 왕호 선조(宣祖) 생몰연대 1552~1608 재위기간 1567~1608 선왕 명종(明宗) 생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생모 하동부대부인정씨(河東府大夫人鄭氏) 관계 三男 왕비 자인왕후박씨(懿仁王后朴氏) 인목왕후김씨(仁穆王后金氏) 부묘시기 광해군 2년(1610) 4월 11일 제8실 왕호 인조(仁祖) 생몰연대 1595~1649 재위기간 1623~1649 선왕 광해군(光海君) 생부 정원군(定遠君:원종) 생모 인헌왕후구씨(仁獻王后具氏) 관계 長男 왕비 인열왕후한씨(仁烈王后韓氏) 장열왕후조씨(莊烈王后趙氏) 부묘시기 효종 2년(1651) 7월 7일 제9실 왕호 효종(孝宗) 생몰연대 1619~1659 재위기간 1649~1659 선왕 인조(仁祖) 생부 인조(仁祖) 생모 인열왕후한씨(仁烈王后韓氏) 관계 次男 왕비 인선왕후장씨(仁宣王后張氏) 부묘시기 현종 2년(1661) 7월 7일 제10실 왕호 현종(顯宗) 생몰연대 1641~1674 재위기간 1659~1674 선왕 효종(孝宗) 생부 효종(孝宗) 생모 인선왕후장씨(仁宣王后張氏) 관계 長男 왕비 명성왕후김씨(明聖王后金氏) 부묘시기 숙종 2년(1676) 10월 15일 제11실 왕호 숙종(肅宗) 생몰연대 1661~1720 재위기간 1674~1720 선왕 현종(顯宗) 생부 현종(顯宗) 생모 명성왕후김씨(明聖王后金氏) 관계 長男 왕비 인경왕후김씨(仁敬王后金氏) 인현왕후민씨(仁顯王后閔氏) 인원왕후김씨(仁元王后金氏) 부묘시기 경종 2년(1722) 8월 10일 제12실 왕호 영조(英祖) 생몰연대 1694~1776 재위기간 1724~1776 선왕 경종(景宗) 생부 숙종(肅宗) 생모 화경숙빈최씨(和敬淑嬪崔氏) 관계 次男 왕비 정성왕후서씨(貞聖王后徐氏) 정순왕후김씨(貞純王后金氏) 부묘시기 정조 2년(1778) 5월 2일 제13실 왕호 정조(正祖) 생몰연대 1752~1800 재위기간 1776~1800 선왕 영조(英祖) 생부 장헌세자(莊獻世子:장조) 생모 혜빈홍씨(惠嬪洪氏) 관계 長男 왕비 효의왕후김씨(孝懿王后金氏) 부묘시기 순조 2년(1802) 8월 9일 제14실 왕호 순조(純祖) 생몰연대 1790~1834 재위기간 1800~1834 선왕 정조(正祖) 생부 정조(正祖) 생모 수빈박씨(綏嬪朴氏) 관계 次男 왕비 순원왕후김씨(純元王后金氏) 부묘시기 헌종 3년(1837) 정월 7일 제15실 왕호 문조(文祖) 생몰연대 1809∼1830 재위기간 ~ 선왕 - 생부 순조(純祖) 생모 순원왕후김씨(純元王后金氏) 관계 왕비 신정왕후조씨(神貞王后趙氏) 부묘시기 헌종 3년(1837) 정월 7일 제16실 왕호 헌종(憲宗) 생몰연대 1827∼1849 재위기간 1834~1849 선왕 순조(純祖) 생부 효명세자(孝明世子:문조) 생모 신정왕후조씨(神貞王后趙氏) 관계 長男 왕비 효현왕후김씨(孝顯王后金氏) 효정왕후홍씨(孝定王后洪氏) 부묘시기 철종 2년(1851) 8월 6일 제17실 왕호 철종(哲宗) 생몰연대 1831∼1863 재위기간 1849~1863 선왕 헌종(憲宗) 생부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생모 용성부대부인염씨(龍城府大夫人廉氏) 관계 三男 왕비 철인왕후김씨(哲仁王后金氏) 부묘시기 고종 2년(1865) 6월 6일 제18실 왕호 고종(高宗) 생몰연대 1852∼1919 재위기간 1863~1907 선왕 철종(哲宗) 생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생모 여흥부대부인민씨(驪興府大夫人閔氏) 관계 次男 왕비 명성왕후민씨(明成王后閔氏) 부묘시기 순종 14년(1920) 3월 31일 제19실 왕호 순종(純宗) 생몰연대 1874∼1926 재위기간 1907~1910 선왕 고종(高宗) 생부 고종(高宗) 생모 명성왕후민씨(明成王后閔氏) 관계 次男 왕비 순명왕후민씨(純明王后閔氏) 순정왕후윤씨(純貞王后尹氏) 부묘시기 종묘 봉안 신주 종묘에는 정전 19실에 49명의 왕과 왕비, 영녕전에는 16실에 34명의 왕과 왕비의 신주가 봉안되어 있다. 종묘 봉안 신주 종묘에는 정전(正殿)에 태조 및 태조비를 비롯해 총 19실에 49명의 왕과 왕비의 신주가 모셔져 있고, 영녕전에는 총 16실에 34명의 왕과 왕비의 신주가 봉안되어 있다. 여기에 정전 및 영녕전에 모셔진 역대 왕들의 배향공신(配享功臣)이 정전에 83명 영녕전에 11명 등 총 94명이 있다. 결국 종묘에 봉안된 신주는 총 합계가 177명에 이르고 있다. 선왕의 신주는 기본적으로 다음대의 왕위에 오른 사왕의 3년 상이 끝난 후에 엄속하게 시행한다. 신주의 종묘 부묘 선왕의 종묘 부묘는 기본적으로 다음대의 왕위에 오른 사왕(嗣王)의 3년상(실제로는 27개월)이 끝난 후에 엄숙하게 시행된다. 그런데 선왕의 신주를 종묘에 봉안하는 일은 왕실 뿐 아니라 국가적으로 중대사이고, 또 왕위를 계승하는 현왕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행위이기 때문에 아무 때나 할 수 없다. 사시대향(四時大享)이나 납일대향(臘日大享)과 같이 종묘에서 시행되는 가장 큰제사의 시기에 선왕의 부묘(祔廟 : 선왕의 신주를 종묘에 봉안하는 것)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예컨대 선왕의 3년상의 상기가 2월에 끝날 경우 그 달에 바로 선왕을 종묘에 봉안한 것이 아니라 다음 종묘대제의 시기인 4월에 이르러 하향대제(夏享大祭)를 시행하면서 그 신주를 봉안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조선시대에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지켜졌다. 세종의 부묘 과정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세종은 재위 32년만인 1450년 2월 17일에 사망하였다. 이에 다음날 바로 빈전도감(殯殿都監)이 설치되어 상례의 제반 절차를 시행하게 되었다. 3일 후인 20일에 소렴(小殮)을 시행하고, 다시 이틀 후인 22일에 대렴(大殮)이 시행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고 나서 6일 후인 23일에 이르러 왕세자인 문종이 정식으로 국왕으로 즉위하고, 다음날 종묘.사직에 왕의 즉위를 고하였다. 26일에는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선왕의 부고(訃告)를 전하고, 아울러 선왕의 행장(行狀)을 보내며, 시호(諡號)를 하사해 주기를 청하였다. 이러한 상례절차는 다음해 6월 24일 졸곡제(卒哭祭)를 거행하면서 사실상 끝나게 되고 이때부터 곡(哭)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13개월째인 다음해 2월 17일에 연제(練祭)를 시행하고, 27개월째인 문종 2년 4월 3일에 담제(禫祭)를 시행하면서 국상이 완전히 끝났다. 이러한 국상이 끝난 후에 세종의 신주를 종묘에 봉안하려는 절차가 구체적으로 논의되었다. 당시에는 종묘의 신주가 익조[1묘], 도조[2묘], 환조[3묘], 태조[4묘], 정종.태종[5묘]의 5묘 6실을 구성하였기 때문에 세종의 부묘로 5대가 넘어서, 익조의 신주가 이 달 9일에 영녕전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10일에 국왕의 주도하에 종묘에서 하향대제를 시행하며 세종의 신주를 종묘의 7실에 봉안하였다. 불천위 선정" 공(功)과 덕(德)이 있었던 국왕의 신위는 불천위로 지정하여 종묘에서 신주를 옮기지 않았다. 조선시대 종묘제는 ‘제후는 5묘’라는 원칙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현 국왕의 5대가 넘는 신주들은 모두 종묘에서 영녕전으로 옮겨야 했다. 이같이 종묘의 신주가 세대상으로 제사의 대상에서 벗어나는 것을 ‘친진(親盡)’이라고 한다. 원칙상 건국자로서 영원히 종묘에 봉안되어야 할 ‘태조’를 제외한 모든 신주들은 친진이 되면 종묘에서 그 신주를 옮겨야만 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하지 않고, 공(功)과 덕(德)이 있었던 국왕의 신위는 세실(世室)로 정해 종묘에서 신주를 옮기지 않았다. 조선왕조에서 불천위(不遷位) 즉 세실의 문제가 현실적인 문제로 처음 발생한 것은 연산군 2년(1496)이었다. 이때 종묘에 봉안되어 있던 신주는 태조[1대], 정종.태종[2대], 세종[3대], 문종.세조[4대], 덕종.예종[5대]으로, 전체 5묘 8실로 구성되어 있었다. 여기에 성종의 신주를 부묘할 경우 6묘가 되기 때문에 1대의 신주를 옮겨야 했다. 당연히 그 대상은 불천위인 태조를 제외하면, 2대인 정종과 태종의 신위였다. 그런데 이 때의 결정은 정종은 친진(親盡)이 되었음으로 당연히 영녕전으로 옮겨야 하지만 태종은 공덕(功德)이 있기 때문에 종묘에서 그 신주를 옮길 수 없다며, 세실로 지정해 그대로 종묘에 봉안했던 것이다. 여기서 보듯이 불천위의 선정은 원칙적으로 대상이 되는 신주가 친진으로 나갈 시기에 이르러서 정해져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친진의 시기가 되기 훨씬 전에 미리 정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세종 6년(1424) 태종을 종묘에 봉안한 직후에 태종을 불천위로 지정했고, 문종 2년(1452)에는 태종.세종을, 성종 원년(1470)에는 태종.세종.세조를 불천위로 각각 지정하는 등 친진이 되기 이전에 불천위는 정해졌다. 이같이 불천위가 미리 정해지는 것은 옛 왕의 은택(恩澤)을 생각하고 현왕이 그 효도(孝道)를 넓히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불천위의 선정은 후대인의 입장에서 볼 때 의문점을 품을 소지가 적지 않다. 현재의 종묘는 대한제국 건립 이후를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종묘의 묘실은 ‘천자의 7묘(대)’를 기준으로 한다. 이를 적용해 보면. 왕조의 창업자인 태조와 순조-문조-헌종-철종-고종-순종의 일곱 신주는 친진(親盡)의 대상이 아닌 인물들이고, 2실의 태종이하부터 정조까지는 불천위로 종묘에 봉안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불천위 중에서 선조와 인조, 현종 등은 과연 불천위의 기본 논리인 ‘공덕(功德)’이 있는 대상인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반면에 반정의 과정에서 폐위되었던 연산군과 광해군은 조선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불천위의 지정은 물론 복위 자체가 이루어지지 못하여 결국 종묘나 영녕전에 그 신주가 봉안되지 못하였다. 이중 광해군은 현재 학계에서의 재평가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데, 그의 업적은 불천위로 지정된 평범한 군주들보다 적다고는 판단되지 않는다. 이것은 조선왕조에서 불천위를 지정하는 명분으로 ‘공덕(功德)’을 내세웠지만, ‘공덕(功德)’이라는 것 자체가 상당히 추상적이고, 실제와 부합하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런데 현재 종묘와 영녕전에 모셔진 신주 중에 국왕으로 활동한 적이 없는 존재들이 있고, 또 실제로 왕 노릇을 했음에도 영녕전으로 옮겨진 신주들이 있다. 전자는 대다수가 선왕과 부자(父子) 관계가 아니었던 현왕이 자기 아버지를 추증했던 경우이고, 후자는 그(죽은 왕)의 후손이 왕위를 계승하지 못한 경우이다. 결국 불천위는 ‘공덕’이라는 명분하에 현왕이 그의 직계선왕들을 전부 포괄하는 방식으로 지정하였고, 그 나머지 신주는 친진(親盡)이라는 원칙에 따라 영녕전으로 옮긴 것이다. 종묘제 원리" 종묘의 묘제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은 역대 국왕 중 특별한 공덕이 있는 경우 '불천위'로 지정한 것이다. 종묘의 제도는 원래 고대 중국인들의 원시신앙과 조상숭배의 관념이 유교적인 보편적 제사의 형태로 나타난 것을 국가에서 왕실의 제사로 전화시킨 것이다. 이것은 중국 고대의 은(殷)나라에서 처음 정리되기 시작했고, 주(周)나라에 이르러 체계화되었다. 주대(周代)의 종묘제는 '의례(儀禮)' '예기(禮記)' 등 고대의 예서에 그 형태가 나오고 있다. 주나라의 제례에 의하면 기본적으로 제사는 대상이 되는 조상의 직계(直系)의 후손이 주관해야 하고, 그 중에서도 큰아들〔長子〕만이 시행할 수 있었다. 직계(直系)의 장자 즉 종자손(宗子孫)이 종가(宗家)를 계승하고 그 의례적 상징으로 제사를 주관한다는 종법사상(宗法思想)은 주나라 이후 중국 사회 조직의 원리로 작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제사를 시행할 때 그 대상을 어디까지로 한정할 것인가는 상당기간을 거치면서 사회적 합의가 모아졌는데, 그 기준은 자손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제사를 받을 수 있는 세대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후 유교제사의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설정되었다. '예기' 를 비롯한 고대의 예서에서는 제사의 범위를 ‘천자(天子)는 7묘, 제후(諸侯)는 5묘 경대부(卿大夫)는 3묘, 사서인(士庶人)은 1묘’로 각각 규정하였다. 이것은 제례가 갖고 있는 기본 속성인 차별성을 드러낸 것으로, 종자(宗子)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제사의 대상 및 범위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제사의 범위는 경대부 이하의 사가(私家)에서는 그 적용에 큰 문제가 없지만 천자.제후의 경우 실제의 적용에 상당한 문제점을 드러내게 된다. 주나라에서는 천자의 7묘를 7대로, 제후의 5묘를 5대로 각각 해석하였다. 예컨대 천자의 경우 건국자와 6대의 조상을 태조묘[1대]와 소묘[昭廟 : 6대조.고조.조].목묘[穆廟 : 5대조.증조.부]로 구분하여 종묘에 봉안하였다. 만약에 현재의 천자가 죽으면 태조위는 영원히 모시는 불천위(不遷位)이기 때문에 그대로 두고, 6대조의 신주를 옮기고 그 자리에 죽은 천자의 신위를 모시는 것으로 조정했던 것이다. 이것은 제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고, 경대부 이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경대부 이하에서 혈통을 기준으로 종자의 지위를 계승시키는 데 별다른 문제가 없는데 반하여, 천자.제후의 지위는 종자에게로만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천자.제후의 지위가 경대부 이하의 종자와 같이 제사권과 재산권의 상속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국가의 통치라는 현실적인 문제와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왕위 계승은 종자가 일찍 죽거나 종자의 나이가 어리다는 등의 불가피한 상황에서 바뀌었을 뿐 아니라 현실적인 힘을 바탕으로 한 찬탈(簒奪)이나 가계(家系)의 이동 등 다양한 현상이 나타났다. 더욱이 만약에 어느 국가가 건국된 이후 몇 대에 걸쳐 형제로 왕위가 계승될 경우 종묘에서 그 신주는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 이는 중국 역대의 왕조에서 계속 고민했던 문제였다. 이 문제는 한(漢)나라를 지나 남북조(南北朝) 시대를 거치면서 고대 주나라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즉 진(晉)나라에서는 '예기(禮記)' 와 '춘추(春秋)' 에서 언급한 ‘형제간에는 소목(昭穆)을 같이한다’ 라는 대목에 근거하여 혈연상 같은 세대는 종묘의 묘(廟)를 같이 하여 1대로 취급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제도를 ‘동세이실(同世異室)’ 이라고 하는데, 이에 따라 진(晉)나라의 종묘는 6대 11실, 당(唐)나라의 종묘는 9대 11실, 송(宋)나라의 종묘는 9대 12실이 될 수 있었고, 고려시대의 경우 5대 9실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동세이실’ 제도는 사실상의 왕위를 기준으로 7대를 파악했던 주나라의 제도를 변통(變通)한 것이다. 그런데 위에 보이는 당(唐)나라와 송(宋)나라의 경우 7대가 아닌 9대가 종묘에 봉안되어 있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여기서 불천위(不遷位)의 관념이 나타나게 되었다. 불천위의 설명은 '세조실록' 에 "예조가 아뢰기를, 묘제를 상세히 살펴보니, 천자는 7묘, 제후는 5묘, 대부는 3묘로 줄어들기를 둘씩 하는데, 제도를 넘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공(功)이 있으면, 조(祖)라 하고 덕(德)이 있으면 종(宗)이라 하여 7묘.5묘 이외에 또 백대가 지나도 옮기지 않는 신위[百世不遷之位]가 있으니,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세실(世室)과 노(魯)나라의 세실옥(世室屋)이 이것입니다." 라고 한데서 잘 나타나 있다. ( '世祖實錄' 卷 7 世祖 3年 3月 甲申 '禮曹啓  詳廟制 天子七 諸侯五 大夫三 降殺以兩 不可踰制 然祖功宗德 七廟五廟之外 又有百歲不遷之位 周之文世室 魯之世室屋 是已') '세조실록' 에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원칙적으로 종묘의 제도는 ‘천자는 7묘, 제후는 5묘’로 이를 변경할 수 없는 것이지만 역대의 제왕(帝王)중에 특별히 공(功)과 덕(德)이 있는 경우에는 세실(世室)로 정해 영원히 종묘에 봉안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위에서 보았던 당나라와 송나라의 종묘신주가 9대에 이른 것은 그 중 2대가 불천위인 ‘세실’로 정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상에서 보듯이 천자는 7묘, 제후는 5묘라는 기본 원칙과 이를 왕위가 아닌 혈통으로 이해한 ‘동세이실’제, 그리고 역대 국왕 중 특별한 공덕(功德)이 있는 경우 ‘세실’이라는 ‘불천위’로 지정한 것 등이 종묘의 묘제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조선시대에는 앞의 두 가지 사항을 기본 전제로 하여 종묘가 세워졌고 운영되었는데, 세 번째의 경우 이를 수용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중국보다도 적극적으로 해석하였고, 이는 종묘제례 뿐 아니라 종묘의 건축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영녕전에는 태조의 4대조와 함께 총 34분의 왕과 왕비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영녕전의 신위 영녕전은 총 16실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중앙에는 목조(穆祖), 익조(翼祖), 도조(度祖), 환조(桓祖)의 신위가 자리 잡았다. 그리고 왼쪽의 협실에는 정종(定宗), 문조(文祖), 단종(端宗), 덕종(德宗), 예종(睿宗), 인종(仁宗)이, 오른쪽의 협실에는 명종(明宗), 원종(元宗), 경종(景宗), 진종(眞宗), 장조(莊祖),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가 각각 위치하고 있다. 영녕전에 봉안된 신주들을 보면 다양한 부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같이 이성계의 4대조로 추증된 인물들이다. 이들은 조선왕조가 건국되자 바로 왕으로 추증되었고, 종묘가 태조 4년(1395)에 건설되자 바로 종묘에 봉안되었다. 이들은 조선시대에 생존해 있지도 않았고, 더욱이 왕으로 활약한 적도 없지만 이성계의 조상이라는 이유로 종묘에 봉안된 인물들이다. 원래 새로운 왕조가 개창되면 종묘와 사직이 건설되고, 종묘에 봉안되는 첫 신주는 개창자인 태조가 된다. 그리고 세대가 흘러 묘제(廟制)를 넘어 친진(親盡)된 대상이 나오면 별묘를 세워 종묘에서 신주를 옮기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리고 건국자의 선조는 따로 별전(別殿)을 세워 신주를 봉안할 뿐이었다. 이것은 중국의 역대 왕조나 고려시대의 경우 일부의 가감(加減)이 있었지만 대체로 준수하였다. 그러나 조선왕조는 이와 달리 건국 시조의 4대 조상을 종묘에 안치하였고, 태조는 죽은 뒤 5번째의 신주로 종묘에 봉안되었다. 이후 정종이 죽자 5대를 넘는 목조를 영녕전으로 옮겼고, 세종의 사후 익조를, 문종의 사후 도조를, 예종의 사후 환조를 영녕전에 각각 옮겼던 것이다. 정종, 문종, 단종, 예종, 인종, 명종, 경종 등은 정식으로 왕위에 올라 활약하던 인물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23년간 왕위에 있었던 명종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재위기간이 1∼2년에 불과하였고, 더욱이 이들이 죽은 후에 다음대의 왕위는 자식이 아닌 동생들에게 이어졌다. 이 두 가지 요인이 결합하여 후대에 그들은 불천위(不遷位)로 지정되지 못하고, 친진(親盡)이 되자 바로 영녕전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단종의 경우에는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죽임을 당했는데, 그 후의 왕들 역시 세조의 정통성을 부정할 수 없어 그대로 놔두었다. 그러다가 200여년이 지난 숙종때에 이르러서야 복위되고 단종이라는 묘호(廟號)를 받아 영녕전에 그 신주가 봉안되었다. 덕종, 원종, 진종, 장조 등은 조선왕조 기간동안에 추증되어 종묘에 부묘 되었다가 영녕전으로 옮겨진 경우이다. 이들은 현 국왕이 바로 앞의 선왕과 혈연적으로 부자(父子) 관계를 갖지 않았을 경우 친아버지 혹은 의제적(擬制的)인 아버지의 자격으로 추증되어 종묘에 모셔졌던 인물들이다. 이중 덕종은 성종의 친부인 의경세자(懿敬世子: 세조의 장자)이고, 원종은 인조의 친부인 정원군[定遠君: 선조의 3자], 장조는 정조의 친부인 사도세자[思悼世子: 영조의 2자]이다. 다만 진종의 경우 조금 다른데, 그는 영조의 장자인 효장세자(孝章世子)로, 영조가 다음대의 왕위가 세손(世孫)인 정조에게 옮겨졌을 때의 정치적 불안을 막고자 유언으로 효장세자와 정조를 부자지간으로 만든 것에 기인해 그 신주가 종묘에 봉안되었다가 영녕전으로 옮겨진 것이다. 의민황태자의 경우 조선왕조가 멸망했기 때문에 고종의 아들이었던 그를 순종의 다음대로 인정해 영녕전에 봉안한 것이다. 이 경우에는 논란의 여지가 상당히 있을 것 같다. 의민황태자의 경우 정식으로 황제(혹은 왕)로 즉위한 적이 없고, 현재 영녕전의 신위들은 추증된 왕의 경우에도 종묘를 거쳐 영녕전으로 옮겨졌으며, 그리고 종묘의 친진(親盡) 원칙에도 부합되지 않는 점들이 문제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 이러한 사항들은 조선왕조 500년간 지속되어온 일관된 원칙인데, 후손들이 임의적으로 이를 수정한다는 것은 종묘의 올바른 정신을 계승하는 데에도 문제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녕전에 봉안된 역대 왕과 왕비들> 왕호 생몰연대 재위기간 선왕 생부 생모 관계 왕비 부묘시기 천묘시기 목조 ?~1274 x x 이자춘 이씨 공효왕후이씨 태조4년 (1395) 세종3년 (1421) 익조 ?~? x x 목조 공효왕후이씨 정숙왕후최씨 태조4년 (1395) 문종2년 (1452) 도조 ?~1342 x x 익조 정숙왕후최씨 사남 경순왕후박씨 태조4년 (1395) 단종2년 (1454) 환조 1315~ 1360 x x 도조 경순왕후박씨 의혜왕후최씨 태조4년 (1395) 성종3년 (1472) 정종 1357~ 1419 1398~ 1400 태조 태조 신의왕후한씨 차남 정안왕후김씨 세종3년 (1421) 연산군2년 (1496) 문종 1414~ 1452 1450~ 1452 세종 세종 소헌왕후심씨 장남 현덕왕후권씨 단종2년 (1454) 연산군2년 (1496) 단종 1441~ 1457 1452~ 1455 문종 문종 현덕왕후권씨 장남 정순왕후송씨 x 숙종24년 (1698) 덕종 1438~ 1457 - - 세조 정희왕후윤씨 장남 소혜왕후한씨 성종7년 (1476) 광해군2년 (1610) 예종 1450~ 1469 1468~ 1469 세조 세조 정희왕후윤씨 차남 장순왕후한씨 안순왕후한씨 성종3년 (1472) 광해군2년 (1610) 인종 1515~ 1545 1544~ 1545 중종 중종 장경왕후윤씨 장남 인성왕후박씨 명종2년 (1547) 현종2년 (1661) 명종 1534~ 1567 1545~ 1567 인종 중종 문정왕후윤씨 차남 인순왕후심씨 선조2년 (1569) 현종2년 (1661) 원종 1580~ 1619 x x 선종 인빈김씨 장남? 인헌왕후구씨 인조13년 (1635) 경종2년 (1722) 경종 1688~ 1724 1720~ 1724 숙종 숙종 희빈장씨 장남 단의왕후심씨 선의왕후어씨 영조2년 (1726) 헌종 3년 (1837) 진종 1719~ 1728 x x 영조 정빈이씨 장남 효순왕후조씨 정조2년 (1778) 철종 2년 (1851) 장조 1735~ 1762 x x 영조 영빈이씨 장남 헌경왕후홍씨 순조14년 (1814) 영왕 1897~ 1970 x x 고종 귀비엄씨 칠남 의민황태자비이씨 x 1973년 5월6일 제1실 왕호 목조(穆祖) 생몰연대 ?~1274 재위기간 × 선왕 × 생부 이양무(李陽茂) 생모 이씨(李氏) 관계 ? 왕비 공효왕후이씨(恭孝王后李氏) 부묘시기 태조 4년(1395) 10월 5일 천묘시기 세종 3년(1421) 12월 16일 제2실 왕호 익조(翼祖) 생몰연대 ?~? 재위기간 × 선왕 × 생부 목조(穆祖) 생모 공효왕후이씨(恭孝王后李氏) 관계 ? 왕비 정숙왕후최씨(貞淑王后崔氏) 부묘시기 태조 4년(1395) 10월 5일 천묘시기 문종 2년(1452) 4월 9일 생몰연대 ?~1274 재위기간 × 선왕 × 생부 이양무(李陽茂) 생모 이씨(李氏) 관계 ? 왕비 공효왕후이씨(恭孝王后李氏) 부묘시기 태조 4년(1395) 10월 5일 천묘시기 세종 3년(1421) 12월 16일 제3실 왕호 도조(度祖) 생몰연대 ?~1342 재위기간 × 선왕 × 생부 익조(翼祖) 생모 정숙왕후최씨(貞淑王后崔氏) 관계 四男 왕비 경순왕후박씨(敬順王后朴氏) 부묘시기 태조 4년(1395) 10월 5일 천묘시기 단종 2년(1454) 7월 15일 제4실 왕호 환조(桓祖) 생몰연대 1315~1360 재위기간 × 선왕 × 생부 度祖(도조) 생모 경순왕후박씨(敬順王后朴氏) 관계 ? 왕비 의혜왕후최씨(懿惠王后崔氏) 부묘시기 태조 4년(1395) 10월 5일 천묘시기 성종 3년(1472) 정월 12일 제5실 왕호 정종(定宗) 생몰연대 1357~1419 재위기간 1398~1400 선왕 태조(太祖) 생부 태조(太祖) 생모 신의왕후한씨(神懿王后韓氏) 관계 次男 왕비 정안왕후김씨(定安王后金氏) 부묘시기 세종 3년(1421) 12월 18일 천묘시기 연산군 2년(1496) 정월 20일 제6실 왕호 문종(文宗) 생몰연대 1414~1452 재위기간 1450~1452 선왕 세종(世宗) 생부 세종(世宗) 생모 소헌왕후심씨(昭憲王后沈氏) 관계 長男 왕비 현덕왕후권씨(顯德王后權氏) 부묘시기 단종 2년(1454) 7월 16일 천묘시기 선조 2년(1569) 8월 16일 제7실 왕호 단종(端宗) 생몰연대 1441~1457 재위기간 1452~1455 선왕 문종(文宗) 생부 문종(文宗) 생모 현덕왕후권씨(顯德王后權氏) 관계 長男 왕비 정순왕후송씨(定順王后宋氏) 부묘시기 × 천묘시기 숙종 24년(1698) 12월 24일 제8실 왕호 덕종(德宗) 생몰연대 1438~1457 재위기간 - 선왕 - 생부 세조(世祖) 생모 정희왕후윤씨(貞熹王后尹氏) 관계 長男 왕비 소혜왕후한씨(昭惠王后韓氏) 부묘시기 성종 7년(1476) 정월9일 천묘시기 광해군 2년(1610) 4월 10일 제9실 왕호 예종(睿宗) 생몰연대 1450~1469 재위기간 1468~1469 선왕 세조(世祖) 생부 세조(世祖) 생모 정희왕후윤씨(貞熹王后尹氏) 관계 次男 왕비 장순왕후한씨(章順王后韓氏) 안순왕후한씨(安順王后韓氏) 부묘시기 성종 3년(1472) 정월 12일 천묘시기 광해군 2년(1610) 4월 10일 제10실 왕호 인종(仁宗) 생몰연대 1515~1545 재위기간 1544~1545 선왕 중종(中宗) 생부 중종(中宗) 생모 장경왕후윤씨(章敬王后尹氏) 관계 長男 왕비 인성왕후박씨(仁聖王后朴氏) 부묘시기 명종 2년(1547) 9월 17일 천묘시기 현종 2년(1661) 7월 3일 제11실 왕호 명종(明宗) 생몰연대 1534~1567 재위기간 1545~1567 선왕 인종(仁宗) 생부 중종(中宗) 생모 문정왕후윤씨(文定王后尹氏) 관계 次男 왕비 인순왕후심씨(仁順王后沈氏) 부묘시기 선조 2년(1569) 8월 16일 천묘시기 현종 2년(1661) 7월 5일 제12실 왕호 원종(元宗) 생몰연대 1580~1619 재위기간 × 선왕 × 생부 선종(宣祖) 생모 인빈김씨(仁嬪金氏) 관계 長男? 왕비 인헌왕후구씨(仁獻王后具氏) 부묘시기 인조 13년(1635) 3월 19일 천묘시기 경종 2년(1722) 8월 8일 제13실 왕호 경종(景宗) 생몰연대 1688~1724 재위기간 1720~1724 선왕 숙종(肅宗) 생부 숙종(肅宗) 생모 희빈장씨(禧嬪張氏) 관계 長男 왕비 단의왕후심씨(端懿王后沈氏) 선의왕후어씨(宣懿王后魚氏) 부묘시기 영조 2년(1726) 10월 13일 천묘시기 헌종 3년(1837) 정월 7일 제14실 왕호 진종(眞宗) 생몰연대 1719~1728 재위기간 × 선왕 × 생부 영조(英祖) 생모 정빈이씨(靖嬪李氏) 관계 長男 왕비 효순왕후조씨(孝純王后趙氏) 부묘시기 정조 2년(1778) 5월 2일 천묘시기 철종 2년(1851) 6월 9일 제15실 왕호 장조(莊祖) 생몰연대 1735~1762 재위기간 × 선왕 × 생부 영조(英祖) 생모 영빈이씨(映嬪李氏) 관계 長男 왕비 헌경왕후홍씨(獻敬王后洪氏) 부묘시기 ? 천묘시기 순조 14년(1814) 3월 1일 제16실 왕호 영왕(英王) 생몰연대 1897~1970 재위기간 × 선왕 × 생부 고종(高宗) 생모 귀비엄씨(貴妃嚴氏) 관계 七男 왕비 의민황태자비이씨(懿愍皇太子妃李氏) 부묘시기 × 천묘시기 1973년 5월 6일 현대적 의의" 제례의 내면에 깔려있는 의식세계의 올바른 계승은 바람직한 한국문화 정립에 중요한 기초를 제공할 것이다. 매년 5월이 되면 종묘에서는 대규모의 제례의식이 거행된다. 종묘의 뜰 앞에서 펼쳐지는 엄숙한 제례의식은 장엄한 종묘의 건물과 어우러져 보는 이로 하여금 벅찬 감동을 느끼게 한다. 찰칵거리는 카메라의 소음과 유치원생 꼬마들의 반짝이는 눈망울, 노란 머리털의 이방인들의 진지함 등이 함께 묻어져 나온다. 한쪽에서는 교수들이 내준 과제 때문에 마지못해 왔다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재잘거리는 여대생들의 모습도 보인다. 이들 중 과연 얼마나 종묘제례를 이해하고 혹은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보고 있을까. 종묘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신전이다. 그러나 그리스의 신전이나 기독교의 교회들처럼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진, 그리고 숭배의 대상이 되는 신들을 모셔놓고 추앙하는 그러한 장소가 아니다. 동양의 전통적인 조상숭배 사상을 바탕으로 한 추모의 장소이다. 부모가 돌아가면 자식들은 오랜 기간 동안 부모의 뜻을 잊지 않고 추모하는데, 그 추모를 시행하는 장소가 사당이며, 이 사당이 국가적인 차원으로 확대된 곳이 종묘인 것이다. 제사는 자식이 부모를 추모하는 ‘효’사상을 바탕으로 한 것이고, 이를 시행하기 위해 몰려든 일가 친척들과의 화합을 도모하는 전통적인 방식인 것이다. 조선시대의 국왕들은 종묘제례를 시행하며, 왕실의 안녕과 국가의 번영을 기원하였다. 왕실의 안녕은 국가가 평안해야만 가능했기 때문에 양자는 뗄 수 없는 관계였던 것이다. 현대사회는 왕조사회가 아니다. 따라서 종묘제례를 전주이씨(全州李氏) 가문의 제사로 한정해 생각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후자의 입장에서 종묘제례를 바라보며, 그것이 현대 사회에서 어떠한 의미가 있는 가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는 문화재들을 보면서 감탄한다. 그러나 그 웅장하고 화려한 이면에는 그것들의 제작을 위해 쏟아 부어야 했던 당대인들의 엄청난 땀과 고통이 있었음을 잊고 있다. 당시의 피지배층들은 그러한 문화재들을 보면서 감동을 느끼거나 자랑스러워하기 보다는 눈물을 흘리며 한탄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의 후손들은 그러한 문화재를 통해 자신의 조국과 민족을 자랑스러워하고, 또 실제로 외국 관광객의 유치를 통하여 이익을 챙기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예(禮)를 통한 합리적 통치, 즉 예치(禮治)를 강조하였다. 그 결과 백성들의 과도한 동원을 통한 엄청난 규모의 건축물 제작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나마 당시 제작된 건물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이 바로 이 종묘이다. 그러나 종묘는 국왕을 비롯한 일부 지배층의 유희를 목적으로 제작한 것은 아니다. 왕실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목적 아래 통치권자 및 지배층의 자기 성찰을 추구하는 장소였다. 그리고 종묘와 동격인 사직을 건립하여 여기서 백성들의 평안함을 기원하며 제사하였던 것이다. 현재 종묘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종묘 건축의 웅장함과 제례악의 엄숙성은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것이기에 그에 합당한 평가를 받은 것이다. 이것은 종묘라는 현존하는 탁월한 건축물위에다 시간적으로 수백 년을 거슬러 올라가 그 시대의 실제적인 제례의식이 그대로 재현되어 보여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 후자의 제례의식이 표현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시대 종묘의 중요성으로 인해 여타의 문화재와는 달리 상당한 문헌 자료가 있고, 이를 바탕으로 학문적 고증이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사실에 기인하였다. 요사이 기성세대는 세대가 내려갈수록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적어진다고 걱정한다. 그러나 막상 그들이 전통문화에 관심을 갖고 접근할 경우 금방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엄격한 고증을 통한 올바른 문화의 상(像)이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흔히 전통적인 것이라 알고 있는 상당수의 문화현상이 일제시대에 천박하게 왜곡.변형되었음에도 이를 전통이라 우기는 모습들을 우리는 종종 목격하게 된다. 한 사회의 문화는 과거를 분명히 이해하고 그를 반성한 바탕 위에 합리적으로 현재의 사실을 결합시켜야만 수준 높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종묘제례는 엄격한 문헌고증을 통해 조선시대 문화의 가장 큰 줄거리를 이해시킬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였다. 그리고 제례의 내면에 깔려있는 의식세계의 올바른 계승은 향후 바람직한 한국문화의 정립에 중요한 기초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방원.

이방원" 조선 제3대 왕(재위 1400∼1418). 아버지 이성계 휘하에서 구세력 제거에 큰 역할을 하였으나 세자책봉에 불만을 품고 정도전 등을 살해하는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즉위 후, 의정부(議政府),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를 설치하는 등 관제개혁을 통하여 왕권을 강화하였고 최고의 법사(法司)인 의금부(義禁府)도 설치하였다. 자 유덕(遺德). 휘 방원(芳遠). 태조의 5남. 어머니는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 비는 민제(閔霽)의 딸 원경왕후(元敬王后). 1383년(우왕 9)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사대언(密直司代言)이 되고, 후에 아버지 이성계(李成桂) 휘하에서 신진정객(新進政客)들을 포섭하여 구세력의 제거에 큰 역할을 하였다. 1388년 정조사(正朝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오고, 1392년(공양왕 4) 정몽주(鄭夢周)를 제거하여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진 세력의 기반을 굳혔으며, 같은 해 이성계가 조선의 태조로서 등극(登極)하자 정안군(靖安君)에 봉해졌다. 태조가 이모제(異母弟) 방석(芳碩)을 세자로 책봉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1398년(태조 7) 중신(重臣)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 등을 살해하고, 이어 강씨 소생의 방석 ·방번(芳蕃)을 귀양보내기로 하고, 도중에 죽여 버렸다. 이것을 제1차 왕자의난이라 하며 방원은 이때 세자로 추대되었으나 이를 동복형(同腹兄)인 방과(芳果:定宗)에게 사양하였다. 1400년(정종 2) 넷째 형인 방간(芳幹)이 박포(朴苞)와 공모하여 방원 일당을 제거하려 하자, 이를 즉시 평정하고 세자에 책봉되었다. 방간·박포의 난을 제2차 왕자의 난이라 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당시 대신들 가운데 일부가 동모제(同母弟)를 세자로 삼은 전례가 없다며 왕태제(王太弟)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정종은 동생을 아들로 삼겠다며 왕세자(王世子)로 책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해 11월 정종에게서 양위(讓位)를 받아 조선 제3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즉위하자 사병을 혁파(革罷)하고 1400년 문하부(門下府)를 폐지하였으며 의정부(議政府)를 설치하였다. 또 낭사(郞舍)는 사간원(司諫院)으로 분립시켰으며, 삼사(三司)는 사평부(司平府)로 개칭하고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를 신설하였으며, 1405년 1월에는 의정부의 서무(庶務)를 육조(六曹)에서 분장(分掌)하게 하는 등, 관제개혁을 통하여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였다. 한편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을 강화하여 전국의 많은 사찰(寺刹)을 폐쇄한 후, 그 사찰에 소속되었던 토지 ·노비를 몰수하였으며, 또 비기(秘記) ·도참(圖讖)의 사상을 엄금하여 미신타파에 힘썼다. 한편 호패법(號牌法)을 실시하여 양반 ·관리에서 농민에 이르기까지 국민 모두가 이를 소지하게 함으로써 인적 자원(人的資源)을 정확하게 파악하였으며, 개가(改嫁)한 자의 자손은 등용을 금지하여 적서(嫡庶)의 차별을 강요하였다. 국방정책으로서 10년 여진족의 일파인 모련위(毛憐衛) 파아손(把兒孫)의 무리를 죽였고, 노략질이 심한 야인(野人:여진인)들을 회유하여 변방의 안정에도 힘을 기울였다. 또 문화정책으로서 주자소(鑄字所)를 세워 1403년(태종 3) 동활자(銅活字)인 계미자(癸未字)를 만들었으며, 하륜(河崙) 등에게 《동국사략(東國史略)》 《고려사(高麗史)》 등을 편찬하게 하였다. 경제정책으로서 호포(戶布)를 폐지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 주었고, 저화(楮貨)를 발행하여 경제유통이 잘 되도록 유의하였다. 태종 이방원의 가장 큰 취약점은 정통성이었습니다. 이복동생들을 죽이고 권력을 장악한 비정한 형. 민심을 잡기 위해서라도 태종은 아버지 태조의 인정을 받는 게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이성계는 단단히 화가 나 있었죠. 아들을 곤란하게 하기 위해 일부러 자신의 고향인 함경도 함흥으로 떠납니다. 태종은 이성계를 한양으로 모셔오기 위해 여러 번 관리인 차사를 보냈어요. 그러나 태종을 용서할 수 없었던 이성계는 차사들이 올 때마다 돌려보내지 않고 모두 죽여버리죠. 이렇게 해서 함흥차사1)란 말이 생겨난 겁니다. 때마침 이성계가 나고 자란 동북 지방에서 태종에게 반대하는 난이 일어납니다. 여기에 이성계가 가담한 거죠. 아버지와 아들의 전면전이 벌어진 겁니다! 하지만 전쟁 영웅인 늙은 아버지, 이성계는 허무하게 패배하게 됩니다. 태종은 직접 아버지가 있는 함흥으로 찾아가 돌아가자고 해요. 한 마디로 봐주겠으니 돌아가자는 거죠. 이렇게 이성계의 한 달 만의 외출은 끝나게 됩니다. 떨떠름하긴 해도 아버지로부터 인정을 받았으니 이제 태종은 거리낄 것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의외의 복병이 있었어요. 바로 아내 원경왕후 민 씨입니다. 민 씨는 정말 당찬 여자입니다. 일단 남편이 왕이 되는 데 엄청난 공을 세웠어요. 자신의 두 남동생도 남편의 심복으로 삼는 등 왕자의 난 때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렇게 공이 큰 만큼 입김이 셋던 것도 당연하겠죠? 하지만 영원할 것 같던 부인 민 씨의 행복도 태종이 왕이 되면서 깨져버리게 돼요. 태종은 왕이 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젊은 여자를 만나기 시작했거든요. 남편의 배신을 참지 못한 그녀는 태종이 가까이 한 궁녀를 직접 벌하기까지 하죠. 그러자 태종은 중전을 모시는 시녀와 내시들을 모두 내칩니다. 처가에 대한 숙청, 강력한 왕권강화로 이어지다 벌은 부인의 아랫사람들이 받았지만 사실상 부인에게 내린 법이었죠. 한술 더 떠서 태종은 후궁제도를 아예 법으로 만들기까지 합니다. 자신의 새엄마, 태조의 경처에 대한 경계심 때문이었을까요? 결국 반역 혐의로 처남 2명을 처벌하면서 민 씨 일가는 몰락하게 됩니다. 이걸 지켜본 사람들의 생각은 어땠을까요? ‘왕은 자신의 친척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인정에 얽매이지 않고 죽일 수 있다!’였죠. 처가에 대한 숙청은 강력한 왕권강화로 이어지게 됩 왕권강화의 일환으로 태종은 사병을 없앱니다. 자신의 쿠데타가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도 사병이었잖아요. 그러니 민간에서 사사로이 소유하는 병사들과 무기를 금지해서 미연의 불상사를 방지하려고함. 개혁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여 세금을 걷기 위해 토지조사사업인 양전사업2)을 벌이고 주민등록제도인 호패법3)을 실시합니다. 또 신권의 상징이었던 의정부서사제에서 6조직계제로 시스템을 바꿉니다. 의정부를 빼고 왕과 정책실행기구인 6조가 직접 일을 처리하면서 의정부의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힘을 약화시킨다. 왕권이 강했던 태종도 신하 눈치를 봐야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냥이었죠. 태종은 사냥을 정말 좋아해서 가능하면 자주 나가고 싶어 했어요. 그런데 왕의 사냥 행차는 엄청난 비용을 소모하는 일이라 신하들이 반대했던 거죠. 웬 돈이 들어가느냐고요? 일단 해당 지역 백성들은 곡식이 여물지도 않았는데 서둘러 추수를 끝내야 했어요. 짐승들이 여기저기 못 숨게 하기 위해 수풀도 다 깎아놔야 했죠. 호송하는 신하들까지 합치면 사냥 지역으로 행차하는 인원은 수천 명에 달했습니다. 그들을 대접하는 것도 모두 마을 사람들의 부담이었어요. 심지어 사냥에 필요한 몰이꾼은 5천 명 정도나 필요했습니다. 이래저래 민폐죠! 대간의 언관들은 태종이 사냥의 ‘사’ 자만 꺼내도 목에 핏대를 올리고 반대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태종은 군사 훈련이라며 궁색한 변명을 하기 바빴고 하지만 대간이라도 없앨 수는 없었다. 태종은 그들이 좀 더 바른말을 할 수 있도록 독립적인 지위를 보장해줬고 만약 그들이 없다면 신하들의 비리를 감시할 사람도, 바른말을 할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귀찮지만 꼭 필요한 존재. 그들이 바로 대간이었다. 태종에게도 너무나 큰 고민이 있었습니다. 바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세자 양녕대군. 태종은 자신이 쿠데타를 통해 왕위를 이은 만큼 아들만큼은 정통성이 있길 바랐어요. 마치 쿠데타로 대통령이 된 독재자가 자기 아들만큼은 투표를 통해 다음 대통령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랄까요? 그래서 조강지처의 장남 양녕대군에게 모든 정성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양녕은 세상에 둘도 없는 망나니였습니다. 항상 공부를 빼먹고 기생과 어울리고 심지어 민가의 개를 훔치기도 하고. 실록의 기록을 보면 카리스마 초절정의 태종이 양녕대군으로 인해 목이 다 쉬도록 울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처가를 깡그리 제거한 냉혈한인 것 같으면서도 아들 앞에선 한없이 약한 아들 바보였던 거죠. 계속해서 양녕의 잘못을 넘어가주던 태종도 등을 돌리게 한 사건이 있었다. 바로 조선을 뒤흔든 ‘어리 스캔들’이었고. 양녕대군이 양반의 첩인 어리를 보고 한눈에 반해 연애를한다. 유교적 질서를 중시하는 조선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 하지만 태종은 양녕이 어리와 헤어지겠다며 용서를 빌자 처음엔 넘어가줍니다. 실은 헤어지지 않았던 거예요. 어리를 스님으로 위장해서 몰래 궁으로 데려오면서 관계를 이어나갔던 거죠. 이 일이 발각되자 결국 태종은 양녕을 폐세자하게 됩니다. 갑작스럽게 태종의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이 왕위를 잇게 되는데 그가 바로 대왕 세종입니다. 태조의 5남으로 어머니는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이고 비는 민제(閔霽)의 딸 원경왕후(元敬王后)이다. 1382년(우왕 8)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사대언(密直司代言)이 되고, 후에 아버지 이성계(李成桂) 휘하에서 신진정객(新進政客)들을 포섭하여 구세력의 제거에 큰 역할을 하였다. 1388년 정조사(正朝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오고, 1392년(공양왕 4) 정몽주(鄭夢周)를 제거하여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진 세력의 기반을 굳혔으며, 같은 해 이성계가 조선의 태조로서 등극(登極)하자 정안군(靖安君)에 봉해졌다. 태조가 이모제(異母弟) 방석(芳碩)을 세자로 책봉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1398년(태조 7) 중신(重臣)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 등을 살해하고, 이어 강씨 소생의 방석, 방번(芳蕃)을 귀양보내기로 하고, 도중에 죽여 버렸다. 이것을 제1차 왕자의 난이라 하며 방원은 이때 세자로 추대되었으나 이를 동복형(同腹兄)인 방과(芳果:定宗)에게 사양하였다. 1400년(정종 2) 넷째 형인 방간(芳幹)이 박포(朴苞)와 공모하여 방원 일당을 제거하려 하자, 이를 즉시 평정하고 세제(世弟)에 책봉되었다. 방간, 박포의 난을 제2차 왕자의 난이라 한다. 제2차 왕자의 난이 평정된 후 정종의 양위(讓位)를 받아 조선 제3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즉위하자 사병을 혁파(革罷)하고 1402년(태종 2) 문하부(門下府)를 폐지하였으며 의정부(議政府)를 설치하였다. 또 낭사(郞舍)는 사간원(司諫院)으로 분립시켰으며, 삼사(三司)는 사평부(司平府)로 개칭하고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를 신설하였으며, 1405년 1월에는 의정부의 서무(庶務)를 육조(六曹)에서 분장(分掌)하게 하는 등, 관제개혁을 통하여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였다. 상하 국민의 남소(濫訴), 월소(越訴)를 엄금하였고,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풀어주기 위하여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하였는데, 그 뜻은 매우 좋은 것이었으나 뚜렷한 실효는 거두지 못하였다. 고려 말기의 순군제도(巡軍制度)를 여러 차례 개편하여 최고의 법사(法司)인 의금부(義禁府)를 설치하였는데, 이것은 국왕 직속의 근위대(近衛隊)로서 모역(謀逆)을 방지하는 기관이었다.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을 강화하여 전국의 많은 사찰(寺刹)을 폐쇄한 후, 그 사찰에 소속되었던 토지, 노비를 몰수하였으며, 또 비기(秘記), 도참(圖讖)의 사상을 엄금하여 미신타파에 힘썼다. 한편 호패법(號牌法)을 실시하여 양반, 관리에서 농민에 이르기까지 국민 모두가 이를 소지하게 함으로써 인적 자원(人的資源)을 정확하게 파악하였으며, 개가(改嫁)한 자의 자손은 등용을 금지하여 적서(嫡庶)의 차별을 강요하였다. 국방정책으로서 10년 여진족의 일파인 모련위(毛憐衛) 파아손(把兒孫)의 무리를 죽였고, 노략질이 심한 야인(野人:여진인)들을 회유하여 변방의 안정에도 힘을 기울였다. 또 문화정책으로서 주자소(鑄字所)를 세워 1403년(태종 3) 동활자(銅活字)인 계미자(癸未字)를 만들었으며, 하륜(河崙) 등에게 《동국사략(東國史略)》《고려사(高麗史)》 등을 편찬하게 하였다. 경제정책으로서 호포(戶布)를 폐지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 주었고, 저화(楮貨)를 발행하여 경제유통이 잘 되도록 유의하였다. “천하의 모든 오명은 내가 짊어지고 갈 테니, 너는 어진 임금의 이름을 역사에 길이 남기도록 하라.” 태종 이방원이 임종할 때 셋째 아들인 세종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이다. 그리고 그의 유언대로 오늘날 세종은 어질고 현명한 임금으로, 태종은 피비린내 나는 왕권쟁탈전을 거쳐 권좌에 오른 피의 임금으로 역사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에서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워 낸 세종의 위대한 업적은 아버지 태종의 집념이 빚어낸 피와 땀의 결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종은 정당치 못한 방법으로 왕권을 획득해 후대에 부정적으로 비치고 있는 것이 역사의 현실이다.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를 세운 위대한 임금의 아들로서 그리고 어진 임금의 아버지로서 소설보다 더욱 흥미로운 삶을 살다간 태종은 퍽이나 매력적인 인물이다. 더구나 21세기를 바라보는 오늘의 정치현실이 그때와 유사함을 볼 때 자못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세 권 분량의 소설로 구상하게 된 것이다. 변방 신흥 무장의 아들로 태어나 권문세가의 후예들로부터 신분적 좌절을 맛본 이방원은 위화도 회군에 성공한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고려의 충신 정몽주를 살해하고 ‘조선’이라는 새 왕조를 세우는 데 공헌한다. 그 후 1, 2차 왕자의 난을 통해 형제를 비롯한 친인척, 조정 공신들을 살해하거나 귀양 보내는 등 차례로 정적들을 없애고 마침내 조선 3대 왕위에 오른다. 태조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왕세자 방석을 죽이고 태조가 믿고 의지하던 정도전마저 죽임으로써 아버지의 미움을 사 끝까지 화해하지 못한 채 왕권 확립에만 몰두하다 의리를 지키되 왕권에 도전하는 사람은 가차없이 처단하는 결단력 이면에 인간적인 나약함이 있었던 걸까? 태종의 여성편력은 열두 명의 부인을 거스리고 슬하에 12남 17녀를 둔 데서도 잘 알려져 있다. 아버지를 도와 조선 왕조의 기틀을 다졌으나 끝내 버림 받은 뒤 아들에게 어진 임금을 당부하며 죽어간 고독한 임금 태종 이방원! 1405년 송도(松都)에서 한성(漢城)으로 천도하였으며, 1418년 세자(世子:世宗)에게 선위(禪位)하고 상왕(上王)으로서 국정을 감독하였다. 태종의 능은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헌릉(獻陵)이며 사적 제194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도전.鄭道傳

정도전 鄭道傳"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 봉화호장 정공미(鄭公美)의 고손자로, 아버지는 형부상서 정운경(鄭云敬)이다. 선향(先鄕)은 경상북도 영주이며, 출생지는 충청도 단양 삼봉(三峰)이다.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교체되는 격동의 시기에 역사의 중심에서 새 왕조를 설계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꿈꾸던 성리학적 이상 세계의 실현을 보지 못하고 끝내는 정적의 칼에 단죄되어 조선 왕조의 끝자락에 가서야 겨우 신원 되는 극단적인 삶을 살았다. 민본사상" 정도전의 집안은 본래 봉화 지역의 향리였다. 고려 시대까지 향리는 우리가 아는 조선조의 향리와는 그 격이 달라, 지방의 토착세력을 말한다. 정도전 집안은 경상도 봉화지역의 토착세력인 셈이다. 부친 정운경의 뒤를 이어 과거에 급제한 정도전은 22살 때 충주 사록에 임명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또한 정도전은 공민왕의 유학 육성 사업에 참여해 성균관 교관에 임명되었다. 이때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정몽주∙이숭인 등도 함께 참여하였다. 그러나 공민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정도전에게 시련의 시작이었다. 공민왕의 뒤를 이어 우왕이 즉위하였는데, 우왕이 재위하던 때는 정도전과 정치적 성향이 다른 이인임 등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양측의 충돌은 불가피하였고, 결국 원나라 사신의 마중을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정도전은 오늘날의 전라도 나주에 속해 있는 회진현에서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다. 회진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정도전은 그곳에서 백성들의 삶을 직접 목격하고는 위민의식(爲民意識)을 키웠다. 정도전이 회진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어느 날, 들녘에서 한 농부를 만났다. 그 농부는 정도전을 보고 당시 관리들이 ‘국가의 안위와 민생의 안락과 근심, 시정의 득실, 풍속의 좋고 나쁨’에 뜻을 두지 않으면서 헛되이 녹봉만 축내고 있다며 질책하였다. 촌로의 이러한 발언은 정도전에게 백성을 위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다시 마음에 새기는 계기가 되기 충분하였을 것이다. 결국 그가 제시했던 민본사상은 허울 좋은 이름뿐이 아니었다. 실제 백성의 삶을 목격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진정성이 담보된 것이었다. 장자방 이 되다." 정치적 시련에 대장부의 거대한 야망이 꺾일 만도 하지만, 오히려 정도전은 더욱 강해졌다. 관직에 다시 등용된 정도전은 전의부령, 성균좨주 등의 관직을 지내다가, 이성계의 추천으로, 성균대사성에 임명되었다. 성균대사성은 성균관의 책임자를 말하는데, 당시 학계를 주도하는 위치에 오르게 된 것이었다. 사실 이성계와 정도전의 만남은 그보다 앞선 1384년(우왕 10년)에 이루어졌다.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정도전이 여진족 호발도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함경도에 있던 동북면도지휘사 이성계를 찾아가면서부터였다. 이성계의 군대를 본 정도전은, 이성계가 자신의 포부를 실현해줄 것으로 확신하였다. 그리고는 군영 앞에 서 있던 노송에 아래와 같은 시를 남겨 놓았다. "아득한 세월에 한 그루 소나무 푸른 산 몇만 겹 속에 자랐구나 잘 있다가 다른 해에 만나볼 수 있을까 인간을 굽어보며 묵은 자취를 남겼구나" 이 시에 대해 조선 초에 만들어진 [용비어천가]에서는 정도전이 이미 천명의 소재를 알고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정도전은 평소 취중에 “한나라 고조가 장자방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한고조를 이용하였다.”라고 말하고는 하였다. 한고조를 이성계에 대비한 것인데, 그렇다면 결국 자신이 이성계를 이용했다는 말이 된다. 한 대장부의 거대한 야망을 느끼게 한다. 왕조를 설계하다"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가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하면서 정도전의 야망은 급물살을 탔다.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 때 고려 조정에는 한편에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온건세력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정도전, 조준과 같이 급진적 개혁세력이 있었다. 이성계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그는 이미 급진적 개혁세력의 맹주가 되어 있었다. 정몽주가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에 의해 선지교(후일의 선죽교)에서 피살되면서 그를 추종하는 세력은 궤멸하였다. 이제는 그야말로 이성계 천하가 된 것이었다. 정몽주가 피살된 후 이성계를 추대하려는 세력의 움직임이 가속화되어 드디어 1392년, 5백 년 고려 왕조는 역사 속에서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조선 왕조가 들어섰다. 조선이 개국된 후 정도전의 활약은 눈부셨다.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는 과정을 비롯해 현재의 경복궁 및 도성 자리를 정하였고, 수도 건설 공사의 총책임자로 임무를 수행하였다. 수도 건설이 마무리되면서는 경복궁을 비롯한 성문의 이름과 한성부의 5부 52방 이름도 지었다. 서울을 구성하던 각종 상징물에 의미를 부여하였는데, 대부분 유교의 덕목이나 가치가 담긴 표현이었다. 서울이 수도로서의 의미만이 아닌 유교적 이상을 담은 곳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었다. 그는 [조선경국전]을 지어 태조에게 올렸다. 이 책은 조선의 통치 규범을 제시한 것으로 후일 조선의 최고 법전인 [경국대전]이 나오게 되는 출발이었다. 이 책에서 정도전은 자신이 꿈꾸던 요순시대를 건설하기 위한 거대한 정치 구상을 제시하였다. 요순시대처럼 임금과 신하가 서로 조화를 이루는 왕도정치를 전면적으로 표방한 것이었다. 요동 정벌, 표전문 사건" 정도전은 조선 개국 후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치며 권력의 핵심에 있었으나,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 곤경에 처하기도 하였다. 특히 그가 주창한 요동정벌 문제는 조선과 명나라의 주요한 외교 문제로 비화되기도 하였다. 당시 명나라는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표방하였다. 다만, 여진과 제휴한다든지, 요동에 진출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촉각을 곤두세웠다. 특히 요동 진출 문제와 관련해서 정도전은 명나라에서 보면 요주의 인물이었다. 정도전은 태조에게 외이(外夷 : 중화질서 속에서 중국 이외의 민족을 지칭하는 개념)로서 중원에 들어가 왕이 되었던 사례가 있음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이는 중국 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도 중원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표현이었다. 1394년(태조 3년)에 이른바 ‘표전문사건’이 일어났다. 표전문이란 표문과 전문의 합칭으로, 조선이 중국의 황제와 황태자에게 보내는 공식 문서를 말한다. 당시 명나라에서는 조선에서 파견된 유구와 정신의가 가지고 간 표문을 문제 삼았다. 유구 등은 결국 명나라에 구속되어 심문을 받게 되었는데, 이때 문제가 된 표문의 작성자로 정도전이 지목되었다. 명나라에서는 당장 정도전의 소환을 요구하였다. 명나라의 요구를 둘러싸고 조선 조정에서 설왕설래하였다. 논의 결과 표문을 작성한 사람은 정총이고, 전문을 작성한 사람은 김약항이라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사지로 정도전을 보낼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결국 정총은 병을 이유로 가지 않고 김약항만이 명나라로 가게 되었다. 명나라의 요구가 거세었지만, 정도전이 가지 않은 것은 아마도 정치적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 같다. 당시 정치를 주도하던 조정 관리들이 대부분 정도전 계열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후일의 태종 계열인 하륜만이 정도전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할 뿐이었다. 조정의 결정에 따라 김약항이 파견되었으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나 명나라에서 다시 정도전을 압송하도록 요구하였다. 이때도 역시 정도전은 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국내에 있으면서 진법(陣法) 훈련을 강화하며 요동정벌을 위한 제반 준비를 진행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사병 혁파를 둘러싸고 왕자 및 공신들과 갈등을 초래하였다. 갈등, 정도전과 이방원" 개국 후 태조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 소생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는 문제에 관여하였다. 태조에게는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 첫째는 신의왕후 한씨이고, 둘째가 신덕왕후 강씨였다. 신의왕후 소생 아들로는 방우∙방과(정종)∙방의∙방간∙방원(태종)∙방연 등이 있었다. 이들은 신덕왕후 소생의 아들보다도 아버지 태조가 왕위에 오르는 데 공도 많았다. 그런데 정도전이 이를 다 무시하고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게 하였던 것이었다. 정몽주를 선지교에서 살해함으로써 조선 건국이 가속화되는 계기를 만들었던 이방원 등 첫째 부인 한씨 소생들의 불만이 커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더구나 사병 혁파 문제로 서로 갈등을 보이던 중 1398년(태조 7년) 제1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였고, 정도전은 이방원이 이끄는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도전은 조선초 내내 신원 되지 않다가 고종 때 관직이 회복되었다. 고종 때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건국 초에 설계 등에 참여한 정도전의 공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제1차 왕자의 난 발생 원인은 개인적인 불만이 표출된 것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방원과 정도전이 가지고 있던 정치적 이상의 차이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국가체제를 어떻게 편제하고 운영할 것인가의 차이인 것이다. 정도전이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꾀하는 이상적인 왕도정치를 표방하였다면, 이방원은 그와는 달리 강력한 왕권에 바탕을 둔왕조국가를 지향했기 때문이었다. 이상과 현실의 갈등에서 현실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사림들이 집권하게 되면서 정도전이 "꿈꾸던 이상 세계가 구현되어 갔으니, 정도전의 꿈은 꿈에서 그친 것이 아니리라 “정도전은 화의 근원” -명태조 주원장. “헤어진 지 오래되니 그리운 생각이 더욱 간절하오. 최긍이 와서 안부를 듣게 되니 적잖이 위로가 되었소.” -태조 이성계. “잘 되어간다. 만일 잘 안 풀리면 군대를 이끌고 와서 한바탕 해주지” “한나라를 세운 건 유방이 아니라 장자방이다. 나는 조선의 장자방이다.” -정도전." 조선왕조의 설계자, 정도전" 행정 : 경복궁(景福宮)의 위치 및 이름 제정 / 판삼사사_국가 재정 총괄 군사 : 판의흥삼군부자_국가 병권 담당 / 병서 <사시수수도>, <진도>를 지어 병사훈련에 활용 - 강력한 조선군을 만들어 요동정벌을 계획 교육 : 세자 교육 역사 : 역사서 <고려국사>저술 음악 : 악사 <문덕곡>, <몽금척> 등을 지어 조선 궁중음악의 기틀을 마련 법 : <경국대전>의 모태인 <조선경국전>, <경제문감> 저술 요동 정벌을 강력하게 주장한 정도전 정도전과 남은이 임금을 날마다 뵙고 요동을 공격하기를 권고했다. (요동정벌을 반대하던) 조준에게 찾아가서 말했다. “요동을 공격하는 일은 이미 결정되었으니 공은 다시 말하지 마십시오.” "조선왕조실록 태조 7년(1398) 8월 9일. 세계를 제패한 몽골에 맞서 40년을 버텨낸 나라, 고려 수비에 유리한 산악지형 / 활의 명수들이 포진 흩어진 사병들을 통합해 단일 지휘체계를 확보한다면 요동 정벌은 가능하다! 명태조 주원장이 정도전을 위험인물로 여겨 제거하려고 했으나 태조 이성계가 보호 시대를 앞서간 정도전" 태종은 정도전이 구상, 추진한 정책의 대부분을 그대로 실행 요동 정벌, 재상총재제1)는 따르지 않음 정도전은 전문 정치인인 재상이 국정을 운영하는 것이 효율적 · 안정적이라 생각 "왕에게는 재상 임명권을 부여 “똑똑한 명군이 태평성대를 이룰 수도 있지만 멍청한 암군이 나라를 혼란에 빠뜨릴 수도 있다.” 만약 정도전이 더 오래 살았다면... 재상 중심의 입헌군주제 / 단일 지휘체계 확보, 요동정벌 재상이 국정을 총괄하는 제도 (=입헌군주제) “개국 초기에 시행된 큰 정책은 다 선생이 찬정한 것으로써 당시 영웅호걸이 일시에 구름이 용을 따르듯 하였으나 선생과 더불어 견줄 자가 없었다.” -신숙주 "정의" 1342(충혜왕 복위 3)∼1398(태조 7). 고려 말 조선 초의 정치가·학자. 생애" 아버지와 이곡(李穀)의 교우관계가 인연이 되어, 이곡의 아들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정몽주(鄭夢周)·박상충(朴尙衷)·박의중(朴宜中)·이숭인(李崇仁)·이존오(李存吾)·김구용(金九容)·김제안(金齊顔)·윤소종(尹紹宗) 등과 교유했으며, 문장이 왕양혼후(汪洋渾厚)해 동료 사우의 추양(推讓)을 받았다. 1360년(공민왕 9) 성균시에 합격하고, 2년 후에 동 진사시에 합격해 충주사록(忠州司錄)·전교주부(典校注簿)·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를 역임하였다. 1370년 성균관박사로 있으면서 정몽주 등 교관과 매일같이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수업, 강론했으며, 이듬 해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임명되고 5년간 전선(銓選: 인사행정)을 관장하였다. 1375년(우왕 1) 권신 이인임(李仁任)·경복흥(慶復興) 등의 친원배명정책에 반대해 북원(北元) 사신을 맞이하는 문제로 권신 세력과 맞서다가 전라도 나주목 회진현(會津縣) 관하의 거평부곡(居平部曲)에 유배되었다. 1377년에 풀려나서 4년간 고향에 있다가 삼각산(三角山) 밑에 초려(草廬: 三峰齋)를 짓고 후학을 가르쳤으나, 향인(鄕人) 재상이 서재를 철거해 부평으로 이사하였다. 그곳에서도 왕모(王某)라는 재상이 별업(別業)을 만들기 위해 재옥(齋屋)을 철거하자 다시 김포로 이사하였다. 1383년 9년간에 걸친 간고한 유배·유랑 생활을 청산하고, 당시 동북면도지휘사로 있던 이성계(李成桂)를 함주 막사로 찾아가서 그와 인연을 맺기 시작하였다. 1384년 전교부령(典校副令)으로서 성절사 정몽주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다음 해 성균좨주·지제교·남양부사를 역임하고,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대사성으로 승진하였다. 1388년 6월에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 일파가 실권을 장악하자 밀직부사로 승진해 조준(趙浚) 등과 함께 전제개혁안을 적극 건의하고, 조민수(曺敏修) 등 구세력을 제거해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았다. 1389년 이성계·심덕부(沈德符)·지용기(池湧奇)·정몽주·설장수(偰長壽)·성석린(成石璘)·조준·박위(朴葳) 등과 모의해 폐가입진(廢假立眞)의 명분을 내걸어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해 좌명공신(佐命功臣: 中典功臣)에 봉해지고, 삼사우사(三司右使)·지경연사(知經筵事)를 지냈다. 그 뒤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서 성절사 겸 변무사(聖節使兼辨誣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윤이(尹彛)·이초(李初)의 무고사건을 해결하고 돌아와 동판도평의사사 겸 성균관대사성(同判都評議使司兼成均大司成)이 되었다. 그리고 1391년 삼군도총제부 우군총제사(三軍都摠制府右軍摠制使)가 되어 병권을 장악하였다. 구세력의 탄핵으로 봉화에 유배되었다가 이듬 해 봄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중에 낙마한 사건을 계기로 고려 왕조를 옹호하던 정몽주·김진양(金震陽)·서견(徐甄) 등의 탄핵을 받아 보주(甫州: 지금의 예천)의 감옥에 투옥되었다. 이유는 “가풍이 부정(不正)하고 파계(派系)가 불명(不明)하다.”든가, "천지(賤地)에서 기신(起身)해 당사(堂司)의 자리에 몰래 앉아 무수한 죄를 지었다.”는 것으로, 특히 신분적 약점이 많이 거론되었다. 정몽주가 이방원(李芳遠) 일파에 의해 격살되자 유배에서 풀려 나와, 같은 해 7월에 조준·남은(南誾) 등 50여 명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해 조선 개창의 주역을 담당하였다. 조선 개국 후 개국1등공신으로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郎贊成事)·동판도평의사사사·판호조사(判戶曹事)·겸판상서사사(兼判尙瑞司事)·보문각대학사(寶文閣大學士)·지경연예문춘추관사(知經筵藝文春秋館事)·겸의흥친군위절제사(兼義興親軍衛節制使) 등의 요직을 겸임해 정권과 병권을 한 몸에 안았다. 같은 해 겨울에 사은 겸 정조사로서 두 번째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3년(태조 2)<문덕곡(文德曲)>·<몽금척(蒙金尺)>·<수보록(受寶籙)> 등 3편의 악사(樂詞)를 지어 바쳐 이성계의 창업을 찬송했으며, 문하시랑찬성사로서 동북면도안무사(東北面都安撫使)가 되어 동북면 개척에도 힘을 기울였다. 1394년 정월에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로서 경상·전라·양광삼도도총제사(慶尙全羅楊廣三道都摠制使)가 되어 재정 및 지방 병권을 장악하였다. 한편, 같은 해 6월『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지어 올리고 이 해 『심기리(心氣理)』 3편을 저술했으며, 한양 천도를 계획, 실천해 수도 경영에 주동적으로 참획하였다. 1395년정총(鄭摠) 등과 더불어 『고려국사(高麗國史)』 37권을 지어 올리고, 『감사요약(監司要約)』을 저술해 전라도관찰사 이무(李茂)에게 주었으며, 『경제문감(經濟文鑑)』을 저술해 재상·대간·수령·무관의 직책을 밝혔다. 1396년 이른바 표전문(表箋文) 문제로 명나라에서 이를 트집잡아 내정을 간섭하자, 전부터 추진해오던 요동(遼東) 수복운동에 박차를 가해 군량미확보, 진법훈련(陣法訓鍊), 사병혁파를 적극 추진하였다. 1397년『경제문감별집(經濟文鑑別集)』을 저술해 군도(君道)를 밝히고, 12월에 동북면도선무순찰사가 되어 군현의 지계(地界)를 획정하고 성보(城堡)를 수선하며 참호(站戶)를 설치하였다. 1398년권근(權近)과 더불어 성균관제조가 되어 4품 이하의 유사(儒士)들에게 경사(經史)를 강습시키고, 여름에 『불씨잡변(佛氏雜辨)』을 저술해 배불숭유(排佛崇儒)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하였다. 9월에 진법훈련을 강화하면서 요동 수복계획을 추진하던 중 이방원의 기습을 받아 희생되었다. 죄명은 세자 이방석(李芳碩)에 당부(黨附)해 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것이었다. 이를 공소난(恭昭難)·무인난(戊寅難) 혹은 제1차 왕자의 난이라고 한다. 활동사항" 문인이면서 동시에 무(武)를 겸비했고, 성격이 호방해 혁명가적 소질을 지녔으며, 천자(天資)가 총민해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군서(群書)를 박람해 의론(議論)이 정연했다 한다. 개국 과정에서 자신의 위치를 한(漢)나라 장량(張良)에 비유하면서, 한고조(漢高祖: 劉邦)가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고조를 이용했다고 하면서 실질적인 개국의 주역은 자신이라고 믿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노약 노비(老弱奴婢) 약간 명을 상속받았을 뿐, 오랫동안 유배·유랑 생활을 보내면서 곤궁에 시달렸다. 더욱이, 부계혈통은 향리(鄕吏)의 후예로서 아버지 때에 이르러 비로소 중앙 관료의 벼슬다운 벼슬을 했으며, 어머니와 아내가 모두 연안 차씨(延安車氏)공윤(公胤)의 외예 얼속(外裔孽屬)이었다. 특히 모계에 노비의 피가 섞여 있었다. 이러한 혈통 때문에 구가세족이나 명분을 중요시하는 성리학자들로부터 백안시 당하는 경우가 많았고, 조선시대에도 3노가(奴家)의 하나라는 세인의 평을 받았다. 그와 건국사업을 함께 한 조영규(趙英珪)·함부림(咸傅霖) 등 개국공신과 태종 때의 중신 하륜(河崙) 역시 연안 차씨의 외척 얼손(孽孫)으로서, 조선 개국에는 신분적 하자가 큰 인물들이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청·장년의 시기를 맞았던 고려 말기는 밖으로 왜구·홍건적의 침구로 국내가 어수선했고, 안으로는 구가세족의 횡포로 정치기강이 무너지고 민생이 곤핍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9년간의 시련에 찬 유배·유랑 생활은 그로 하여금 애국적이며 애민적인 의식을 깊게 만들었으며, 그의 역성혁명운동은 이러한 개혁의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된다. 개혁운동이나 그에 수반된 왕조건국사업은 단순한 정치적 실천운동으로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제도로서 정착시켜 사상·제도상으로 조선의 기초를 놓았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발견된다. 『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심문천답(心問天答)』(1375)·『심기리편』(1394)·『불씨잡변』(1398) 등의 철학서를 차례로 저술해 고려 귀족사회의 정신적 지주였던 불교의 사회적 폐단과 철학적 비합리성을 비판, 공격하고, 성리학만이 실학(實學)이요 정학(正學)임을 이론적으로 정립해 유교 입국의 사상적 기초를 다졌다. 그러나 성리학을 강력하게 옹호했다 해서 주자학의 전 체계를 다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주자가례(朱子家禮)』라든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그리고 주자학에서 중요한 사회정책으로 간주되는 사창제(社倉制)·향약(鄕約) 등에 관해서는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또 주자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이단시하는 한당(漢唐)의 공리적 사상(功利的思想)이나 부국강병에 유용한 제도·문물에 대해서는 포용적이었다. 그것은 주자학만으로는 당시의 시대적 과제인 부국강병 달성이나 천민·서얼의 인심 수람, 무인세력의 지위 안정, 무전농민(無田農民)의 구제 등 새 왕조 개창에 필요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까닭이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층신앙(基層信仰)으로 굳어진 불교·도교·참설(讖說) 등을 부분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그의 사상체계는 기본적으로 주자학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음성적으로 이단을 포용하는 절충성을 띠었음이 특색이다. 경세론(經世論)은 『조선경국전』(1394),『경제문감』(1395),『경제문감별집』 등에 제시되어 있다. 조선의 통치규범을 종합적으로 제시한 『조선경국전』은 『주례(周禮)』에서 재상 중심의 권력체계와 과거제도, 병농일치적인 군사제도의 정신을 빌려오고, 한당(漢唐)의 제도에서 부병제(府兵制)·군현제(郡縣制, 守令制)·부세제(賦稅制)·서리제(胥吏制)의 장점을 받아들였다. 또, 명나라로부터는 『대명률(大明律)』을 빌려왔다. 『경제문감』은 재상, 감사, 대간, 수령, 무관의 직책을 차례로 논하고, 『경제문감별집』에서는 군주의 도리를 밝혔다. 그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정치제도는 재상을 최고실권자로 하여 권력과 직분이 분화된 합리적인 관료지배체제이며, 그 통치권이 백성을 위해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민본사상을 강조하였다.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에는 물리적인 힘에 의해 교체될 수 있다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긍정했고, 실제로 혁명 이론에 입각해 왕조 교체를 수행하였다. 사·농·공·상의 직업분화를 긍정하고, 사를 지배층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사의 직업은 도덕가·철학자·기술학자·교육자·무인 등의 역할을 겸비해야 하고 사에서 능력위주로 관리가 충원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또한, 적서(嫡庶)나 양천(良賤)과 같이 혈통에 의한 신분차별을 주장하지 않은 것이 주목된다. 한편, 여말에 나라가 가난하고 민생이 피폐하였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농업생산력의 증대와 토지균분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해결책으로서 민구수(民口數)에 따른 토지재분배와 공전제(公田制) 및 10분의 1세의 확립, 공(工)·상(商)·염(鹽)·광(鑛)·산장(山場)·수량(水梁)의 국가 경영을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따라서 경세론은 자작농의 광범한 창출과 산업의 공영을 통해 부국강병을 달성하고, 능력에 토대를 둔 사 위주의 관료정치를 구현하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의 개혁안은 상당 부분이 법제로서 제도화되었지만 모두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저서" 1. 저서로는 위에 적은 것 이외에 경세(經世)에 관한 것으로 『경제의론(經濟議論)』·『감사요약(監司要約)』이 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고, 고려 역사를 편년체로 엮은 『고려국사』가 있다. 이 책은 뒤에 김종서(金宗瑞) 등이 찬한 『고려사절요』의 모체가 되었으나 지금 전하지 않는다. 2. 병법에 관한 것" 『팔진36변도보(八陣三十六變圖譜)』·『오행진출기도(五行陣出奇圖)』·『강무도(講武圖)』·『진법(陣法)』 등이 있다. 의서(醫書)로는 『진맥도결(胗脈圖訣)』, 역산서(曆算書)로서 『태을72국도(太乙七十二局圖)』와 『상명태을제산법(詳明太乙諸算法)』 등이 있다. 많은 악사(樂詞)를 지어 <문덕곡>,<몽금척>,<수보록>,<납씨곡 納氏曲>,<정동방곡(靖東方曲)> 등을 남겼으며, 회진현의 유배시절과 삼각산·부평·김포·영주 등지에서의 방랑시절에 쓴 수많은 시문들이 지금 『삼봉집』에 전해지고 있다. 『금남잡영(錦南雜詠)』과 『금남잡제(錦南雜題)』는 특히 유배시절의 시문을 모은 것으로 그의 시련기의 사상을 살펴보는 데 좋은 자료이다. 동시에, 당시의 부곡(部曲)의 실상을 이해하는 연구 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삼봉집』은 1397년(태조 6)에 처음 간행되고, 1487년(성종 18)에 중간되었다. 그 후 1791년(정조 15) 누락된 것을 수습해 재간했으며, 이것이 오늘날 전해지고 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정도전은 고려에서 이름 높은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었어요. 그래도 머리가 좋았고 열심히 공부를 해 벼슬자리에 올랐지요. 나랏일을 하는 관리로서의 삶이 그리 편한 것만은 아니었어요. 백성들에게 함부로 힘을 휘두르는 자들을 비판했고, 이 때문에 여러 차례 귀양 생활 정도전은 귀양살이를 하면서 백성들이 힘들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어요. 정도전은 백성들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정도전은 백성들의 더 나은 생활을 위해 이성계 장군의 도움을 얻기. 이성계는 백성들과 군사들의 믿음을 한 몸에 받고 있었어요. 정도전은 이성계 장군을 설득 둘은 나라의 개혁을 결심하게 됩니다. 정도전은 토지 제도를 바로 잡고자 ‘과전법’을 실시. 귀족들이 불합리하게 가지고 있던 땅을 다시 빼앗아 토지 대장(토지에 관한 것들을 기록해 놓은 장부)을 새로 만든 것. 권문세족이 가지고 있는 넓은 토지를 정리하여 백성들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바꾸어주고 싶어서 실시한 개혁적인 정책.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정도전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의 통치 제도를 만들었어요. 또한 새 도읍 한양의 건설에 총책임을 맡았음. 경복궁이나 다른 도성, 거리, 사직단 등 도시의 기본적인 모습은 정도전의 손으로 탄생한 것. 정도전은 각 건물마다 조선이 유교적 국가가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이름까지도 직접 붙임. 정도전은 1398년 왕위 계승권을 두고 일어난 왕자들 사이의 싸움인 ‘왕자의 난’으로 그만 죽임을 당함.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왕위를 차지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정도전을 죽임을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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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일 금요일

유성룡柳成龍

유성룡柳成龍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은 1542년(중종 37) 10월에 의성현 사촌 마을의 외가에서 아버지 유중영(柳仲郢, 1515~1573))과 어머니 안동 김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558년 17세 때 세종대왕의 아들 광평대군의 5세손 이경의 딸과 혼인했다. 형은 유운룡(1539-1601)이다. 부친인 유중영은 1540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의주목사ㆍ황해도관찰사ㆍ예조참의를 두루 거친 강직한 관료였다.류성룡(柳成龍, 1542~1607)은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을 수행하며 왜군을 물리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재상으로 알려져 있다. 자는 이견(而見), 호가 서애(西涯)로 관찰사를 지낸 류중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풍산 류씨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로 받들어진다. 본관 풍산(豊山). 자 이현(而見). 호 서애(西厓). 시호 문충(文忠). 의성 출생. 이황(李滉)의 문인. 1542년 황해도 관찰사 유중영(柳仲郢)과 진사 김광수(金光粹)의 딸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퇴계 이황에게서 성리학을 익혔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를 거쳐, 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가 되었다. 이듬해 예문관검열과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고, 1569년(선조 2)에는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였다. 유성룡은 어린 시절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가학(家學)을 전수받았는데 4세 때 이미 글을 깨우친 천재였다. 어린시절부터 학자가 될 꿈을 갖고 성장하던 중 20세에 관악산 암자에서 홀로 [맹자]를 읽고 있었는데 그 소문을 들은 승려가 도둑으로 변장하여 유성룡의 담력을 시험하였다고 한다. 이때 그는 굳은 의지로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글을 읽었고, 승려는 그가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라 예언했다 전한다. 21세 때인 1562년, 형인 겸암 류운룡과 함께 도산으로 퇴계 이황을 찾아갔을 때 하늘이 내린 인재이니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란 예언을 받을 만큼 총명하고 명민하였다. 25세에 문과에 급제한 뒤 승정원·홍문관·사간원 등 관서를 두루 거치고 이조·병조·형조의 일도 거쳐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다. 퇴계는 이들 형제의 학문적 자질을 높이사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형 운룡은 당시의 선비들이 학문이 채 영글기도 전에 과거시험을 보고 벼슬길에 나가는 세태를 한탄하고, 과거시험보다는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형 운룡에 이어 유성룡을 본 스승 퇴계는 그가 하늘이 내린 인재이며 장차 큰 학자가 될 것임을 직감하였다고 한다. 또한 스펀지처럼 학문을 빨아들이는 그를 보고 “마치 빠른 수레가 길에 나선 듯하니 매우 가상하다”라고 찬탄하였다. 퇴계 이황의 또 다른 제자로 유성룡과 동문수학한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은 “내가 퇴계선생 밑에 오래 있었으나 한 번도 제자들을 칭찬하시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그대만이 이런 칭송을 받았다”고 놀라워했다. 20대 시절 유성룡은 스승인 퇴계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하여 배우기를 힘쓰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것을 인생 최고의 목표로 삼았다. 스승인 이황 선생을 통해 유성룡이 가장 관심을 갖고 배운 책은 [근사록(近思錄)]이었다. [근사록]은 성리학자들의 사상과 학문을 간추린 것으로, 송나라 때에 주자(朱子)와 여조겸(呂祖謙)이 편집한 것이다.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은 [근사록]은 향후 그의 학문적 방향을 결정짓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실학의 대가이자 명재상으로 이름난 유성룡의 고향은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다. 유중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유성룡은 김성일과 동문수학했으며, 21세 때 퇴계 이황에게서 “하늘이 내린 인재이니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예언과 함께 칭찬을 들었다. 선조는 유성룡을 일컬어 “바라보기만 하여도 저절로 경의가 생긴다”라고 하였고, 이항복은 “어떤 한 가지 좋은 점만을 꼬집어 말할 수 없다”라고 했으며, 이원익은 “속이려 해도 속일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출세" 과거시험에 뜻이 없었던 형과 달리 유성룡은 1564년 23세에 소과시험인 생원과 진사시에 , 1566년 25세에 대망의 문과시험에 급제하여 비교적 순조롭게 벼슬길에 나아갔다. 28세에는 성균관전적에서 행정의 중심인 공조좌랑으로 파격적인 승진을 했다. 그의 탄탄대로와 같은 벼슬생활에는 타고난 자질과 함께 가문의 배경, 그리고 퇴계의 뛰어난 제자였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었다. 아울러 인종(仁宗, 조선 12대왕. 중종의 장남)을 문소전(왕의 신주가 모셔진 곳)에 배향하는데 있어 공론을 형성했던 공로도 작용했다. 30세 때는 병조좌랑에, 그리고 이조좌랑을 거치는등 출세 가도를 달리던 그는 1573년 부친상을 당하여서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3년상을 마친 1576년 유성룡은 사간원헌납이란 직책으로 다시 벼슬길에 올랐다. 유성룡은 타고난 경세가(經世家)로 알려져 있는데, 1607년(선조 40) [선조실록]의 <유성룡 졸기>편에서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명예가 날로 드러났으나, 아침 저녁 여가에 또 학문에 힘써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서 조금도 기대거나 다리를 뻗는 일이 없었다. 사람을 응접할 때는 고요하고 단아하여 말이 적었고, 붓을 잡고 글을 쓸 때에는 일필휘지(一筆揮之)하여 뜻을 두지 않는 듯하였으나 문장이 정숙(精熟)하여 맛이 있었다. 여러 책을 박람(博覽)하여 외우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한 번 눈을 스치면 환히 알아 한 글자도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 외교관 자격으로 명나라에 갔을 때 그의 학문적 역량을 본 중국의 선비들이 ‘서애선생(西厓先生)’이라 높여 부르며 존경을 표시했고, 귀국한 뒤에 이 사실이 알려져 더욱 존경과 총애를 받는 인물로 성장했다. 그는 30여 년에 걸친 관직생활에서 승문원권지부정자라는 첫벼슬을 시작으로 1580년에 부제학에 올랐으며, 1593년에는 영의정에 오르는 등 그야말로 내외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류성룡은 정치가로, 경제·군사 전략가로 생애 대부분을 활약했지만, 학봉 김성일과 함께 퇴계 이황의 양대 제자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을 만큼 영남 사림에서의 위치도 공고하다. 그의 학문 방향은 체(體)와 용(用)을 중시한 현실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영의정 당시에도 이순신 장군에게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이라는 병서를 손수 지어주고 실전에 활용하게 하기도 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판서에 임명되고 도체찰사(都體察使)로 군무를 총괄하였다. 이순신(李舜臣) ·권율(權慄) 등 명장을 등용하여 국난을 극복하는데 기여했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하여 평양에 이르렀는데,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으나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도체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중국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을 수복하고 그 후 충청 ·경상 ·전라 3도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 이 해에 다시 영의정이 되어 4도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사를 총지휘하였다. 화기 제조, 성곽 수축 등 군비 확충에 노력하는 한편, 군대양성을 역설하여 훈련도감(訓鍊都監)이 설치되자 제조(提調)가 되어 《기효신서(紀效新書)》를 강해하였다. 1598년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은 하지 않고 은거했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바둑을 둘 줄 모르는 선조에게 대국을 요청하자 그는 우산에 구멍을 뚫어 훈수함으로써 이여송을 무릎 꿇게 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질 만큼 바둑의 애호가였다. 1995년 9월 특별대국에서 이창호(李昌鎬)와 맞대결한 류시훈(柳時熏)은 그의 14세손이라고 한다.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 ·병산서원(屛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서애집》 《징비록(懲毖錄)》 등이, 편서에 《황화집(皇華集)》 《정충록(精忠錄)》 등이 있다. 1590년 황윤길·김성일 등과 함께 통신사로 왜국의 정세를 살피고 온 뒤로 거의 말년까지 정란에 휩싸인 나라의 중심을 세우는 데에 전심전력하였다. 말년에는 북인으로부터 주화론자라는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는 정치적 고난을 겪기도 했다. 파직된 뒤에 향리에서 저술한 임진왜란의 기록 『징비록』(懲毖錄)을 비롯하여, 『신종록』·『영모록』·『지행설』 등을 지었다. 엎치락뒤치락하는 이러한 정국에서 유성룡은 50세에 이르러 좌의정이 되었고 이조판서를 겸임하였다. 그러나 당론의 소용돌이 속에서 유성룡은 더 이상 벼슬에 대한 미련이 없었다. 여러 차례 사직상소를 올렸으나 왕은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정철의 처벌 문제를 두고 동인들은 내분에 휩싸여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게 되었는데, 이때 유성룡은 온건파의 우두머리였다. 유성룡은 동인과 서인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중간 조정자 역할을 하고자 했지만, 이는 뒷날 북인들의 공격을 받아 실각하는 빌미가 되었다. 유성룡이 벼슬살이 하는 동안 조정은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갈라져 논란이 생기는 등 어지러운 정국이 계속되었다. 그의 정치 인생에서 47세는 전환의 시기였다. 그는 이때를 전후로 고위관료가 되는데, 이 무렵 동인계의 기축옥사(정여립(鄭汝立)의 반란)가 일어났다. 정여립의 반란이 실패로 돌아간 뒤 조정은 서인 천하가 되었다. 선조는 서인을 견제할 목적으로 동인에 속하는 유성룡을 우의정으로 임명했다. 그러다가 서인의 좌장격인 정철이 귀양을 가면서 동인들이 다시 세력을 회복하였다. 경연검토관 등을 지내고 수찬에 제수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이후 교리 ·응교(應敎) 등을 거쳐, 1575년 직제학, 다음해 부제학을 지내고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자원하여 향리의 노모를 봉양하였다. 이어 대사간 ·도승지 ·대사헌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다. 1584년 예조판서로 경연춘추관동지사(經筵春秋館同知事)를 겸직하였고, 1588년 양관(兩館) 대제학이 되었다. 1590년 우의정에 승진,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으로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좌의정 ·이조판서를 겸하다가, 건저(建儲)문제로 서인 정철(鄭澈)의 처벌이 논의될 때 온건파인 남인에 속하여 강경파인 북인 이산해(李山海)와 대립하였다. 임진왜란 과 낙향" 유성룡의 나이 51세가 되던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그는 왕의 특명으로 병조판서를 겸임하면서 군기를 관장하게 되었고 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패전에 대한 책임으로 파직되었다가 다시 벼슬에 올라 풍원부원군이 되었다. 이듬해 호서, 호남, 영남을 관장하는 삼도 도체찰사라는 직책을 맡아 전시 상황의 군사 업무를 관장했다. 유성룡은 전국 각처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게 하고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군대를 편성했다. 다시 신임을 얻은 유성룡은 영의정 자리를 되찾아 1598년까지 정부를 이끌었다. 그러나 이해 일본과의 화친을 주도했다는 누명을 씌운 북인 세력의 거센 탄핵으로 영의정에서 파직되었다. 억울함을 안고 이듬해 고향인 하회마을로 낙향했으나, 갑작스런 낙향으로 마땅한 거처조차 없었다. 고향인 하회에서 은거하는 동안 그의 누명은 벗겨지고 관직은 다시 회복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받은 상처는 회복되지 않아 7년간 왕의 부름에도 거절하며 고향을 지켰다. 그러는 가운데 1601년 청백리에 녹선(錄選- 벼슬을 추천하여 관리로 뽑음)되었으며, 1604년에는 임진왜란 회고록인 [징비록(懲毖錄)]의 저술을 마쳤다. 그리고 같은 해 학가산 골짜기 서미동에 농환재(弄丸齋)라는 초가집을 지어 거처를 옮겼다가 모친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다시 하회로 돌아오기도 했다. 초가집에서 거처하는 동안 유성룡은 “사람들이 이욕(利慾)에 빠져 염치를 잃어버리는 것은 모두 만족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느 곳이든지 살 수 있다”라며 자식들에게 청렴의 중요성을 가르치기도 했다. 조선 중기 최고의 경세가" 유성룡은 선견지명적인 인재등용과 자주적 국방으로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슬기롭게 헤쳐나간 명재상이었다. 그러나 20대에 출사(出仕)하여 최고 관직까지 오른 탓에 비교적 평탄했던 삶을 살았던 것으로 오해하기 쉬운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고의 자리에 오른 만큼 벼슬에 있을 때나 물러났을 때나 비난에서 벗어나기 힘들었고, 업적 또한 평가절하 당한 면이 많다. 그러한 배경에는 붕당싸움(黨爭)과 임진왜란이라는 내우외환(內憂外患)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것이 그에게 더욱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가 설치한 훈련도감은 조선후기에 이르러 5군영 가운데 가장 중추적인 군영으로 성장했으며, 지방에서 바치는 공물을 쌀로 바치게 하는 그의 선구적인 정책 또한 훗날 대동법이 만들어지는데 영향을 주었다. 그가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제하는 데 있어서 탁상공론이 아닌 실질적인 개선책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도 왜란을 통해 고통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다. 퇴계 이황의 사상을 이어받고, 아래로는 조선 후기 실학파를 연결하는 교량적 역할을 한 경세가 유성룡은 임진왜란을 겪은 조선의 재상으로서 그가 가진 경험과 식견을 통해 고통받는 백성들의 삶을 개선시키고자 노력했던 인물이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임진왜란 때의 상황을 기록한 [징비록(懲毖錄)]. ‘징비(懲毖)’란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이다. 임진왜란 이전 일본과의 관계, 명나라의 구원병 파견 및 제해권의 장악 등 전황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어 1712년 조정에서 이 책의 일본 유출을 금할 정도로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았다. 국보 제132호로 지정되었다 유성룡이 국가 개혁을 위해 생각했던 것은 실로 방대하였다. 농업 생산성 증대를 위해 새로운 시책을 추진했고, 염업, 수산물 유통 등 물자의 수급조절과 품질향상에 관련된 실용적인 측면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그에 대비하여 이순신을 정읍 현감에서 전라좌수사로 파격적으로 발탁하고, 권율을 형조정랑에서 국경지대의 요충지인 의주 목사로 보낸 것은 선견지명이었다. 25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병조 판서를 역임하였고, 정여립 모반 사건 때도 자리를 굳건히 지켰을 뿐 아니라, 동인이었음에도 광국공신(光國功臣)의 녹권을 받았고, 1592년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정치가 또는 군사 전략가로 생애의 대부분을 보냈으며, 그의 학문은 체(體)와 용(用)을 중시한 현실적인 것이었다.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에게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이라는 병서를 주어 실전에 활용하게 하였다. 말년인 1598년에 북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이 삭탈되었다가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그 후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은거하였다. 1605년 풍원부원군에 봉해졌고, 파직된 뒤에는 고향의 옥연서당에서 임진왜란을 기록한 국보 제132호인 『징비록(懲毖錄)』과 『서애집(西厓集)』, 『신종록(愼終錄)』 등을 저술하였다. 병들어 누웠다는 소식을 들은 선조는 어의를 보내 치료케 했지만 유성룡은 65세의 나이에 죽었다. 그런데 하회에서 세상을 떠난 유성룡의 집안 살림이 가난하여 장례를 치르지 못한다는 소식에 수천 명이 그의 빈집이 있는 서울의 마르냇가로 몰려들어 삼베와 돈을 한푼 두푼 모아 장례에 보탰다고 한다. 그가 죽은 뒤 실록의 사관은 그를 평하여 “천자가 총명하고 기상이 단아하였다. 학문을 열심히 익혀 종일 단정히 앉아 있으면서 몸을 비틀거나 기댄 적이 없으며, 남을 대할 적에는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듣고 말수가 적었다”라고 칭찬한 뒤, “이해가 앞에 닥치면 동요를 보였기 때문에 임금의 신임을 오래 얻었으나 곧은 말을 한 적은 별로 없고, 정사를 오래 맡았으나 잘못된 풍습은 구해내지 못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하회마을에서 강을 거슬러 올라간 병산리에 유성룡을 모신 병산서원(屛山書院)이 있다. 이 서원은 1613년에 정경세 등의 지방 유림들이 유성룡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존덕사(尊德祠)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시면서 설립되었다. 본래 이 서원의 전신은 고려 말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豐岳書堂)으로 풍산 류씨의 교육 기관이었는데, 선조 5년(1572)에 유성룡이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1629년 유성룡의 셋째 아들 유진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철종 14년(1863) ‘병산’이라는 사액을 받아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에도 잘 보존된 47개 서원 중의 하나다. 도처에서 서원을 건립했던 영남학파의 거봉 퇴계 이황은 “서원은 성균관이나 향교와 달리 산천 경계가 수려하고 한적한 곳에 있어 환경의 유독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만큼 교육 성과가 크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모든 서원은 경치가 좋거나 한적한 곳에 자리하였는데, 병산서원만큼 그 말에 합당한 서원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안동시 임하면 금소동은 나라 안에서도 이름난 안동포가 생산되는 마을이다. 삼베길쌈이 워낙 성했던 곳이라 다른 마을 처녀가 시집오기를 꺼려했을 정도라는데, 이제는 이곳마저도 안동포를 짜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어 서민들이 즐겨 입었던 안동포는 구경조차 어려운 지경이 되고 말았다. 안동시에서 영주로 가는 국도 옆에 위치한 이천동에는 거대한 자연석을 이용하여 만든 이천동 석불, 일명 제비원 석불이 있다. 신라 때 도선국사가 새겼다고 전해지는 이 석불은 11미터 높이의 화강암 암벽을 그대로 깎아 몸통을 만들고 2미터 높이의 바위를 부처의 머리로 만들었다. 보물 제115호로 지정되었으며, “성주의 근본 어디메뇨, 경상도 안동 땅 제비원”이라고 노래한 무가(巫歌) 「성주풀이」의 기원이 된 곳이기도 하다. 이 석불이 있는 이천동 영남산에 연미사가 있다. 안동부 관아는 화산(花山) 남쪽에 있다. 황강 물은 동북방에서 흘러오고 청송읍(靑松邑) 냇물은 임하(臨河)를 지나온다. 이 두 물이 동남방에서 합쳐서 고을 성을 돌며 서남쪽으로 흘러간다. 남쪽에 영호루(映湖樓)가 있는데, 고려 공민왕이 남쪽으로 피난을 왔을 때 이 누각 위에서 잔치하며 놀았다. 누각에 걸린 현판은 바로 공민왕이 쓴 것이다. 영호루 북쪽에는 신라 때 지은 옛 절이 있다. 지금은 절이 망해 스님은 없어도 그 정전은 들 복판에 따로 서 있는데 조금도 기울지 않아 사람들이 노나라의 영광전(靈光殿)에 견준다. 『택리지』에 실린 안동에 관한 기록이다. 안동의 영호루는 밀양의 영남루(嶺南樓), 진주의 촉석루(矗石樓), 남원의 광한루(廣寒樓)와 함께 한수(漢水) 이남의 대표적인 누각으로 일컬어졌다. 김종직은 『영호루중신기(映湖樓重新記)』에서 “영호루는 안동의 이름난 누각이다. 그 강산의 뛰어난 장관은 비록 촉석루나 영남루에 비해서는 더러 손색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똑같이 낙동강 언덕에 자리한 상주의 관수루(觀水樓), 선산의 월파정(月波亭)은 자못 영호루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영호루의 현판은 고려 말(1380년) 공민왕의 필적으로 전해진다. 영호루가 언제, 누가 창건하였는지에 대한 정확한 문헌은 없다. 하지만 고려 초기인 1274년 김방경 장군이 이 누각에 올라 시를 읊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천여 년은 족히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361년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피난 왔던 공민왕은 적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자주 남문 밖의 영호루를 찾아 누각 아래 강물에 배를 띄우고 유람을 하기도 했고, 호숫가에서 활을 쏘기도 하였다. 난이 평정되고 환도한 뒤 1362년 공민왕이 친필로 ‘영호루’라고 쓴 금자(金字) 현판을 내려 달게 하였다고 전해진다. 영호루는 여러 번의 물난리로 공민왕 이후 다섯 차례 유실되었고, 일곱 차례 중수되었다. 1934년 7월 23일에는 낙동강 상류 지방의 폭우로 인해 안동 시내가 물에 잠기는 대홍수가 있었다. 이 수해로 영호루는 주춧돌과 돌기둥 몇 개만이 남게 되었다. 그러다가 1970년 시민들의 성금과 국비, 시비를 모아 현재의 영호루를 지었다. 옛 영호루는 지금 자리의 강 건너편에 있었다. 이곳을 찾았던 다산 정약용은 다음과 같은 시 한 편을 남겼다. 태백산 꼭대기에 응축한 맑은 기운 이 누대 앞에까지 달려와서 펼쳐졌네 바닷물과 산맥이 삼천리를 에워싼 곳 흥성한 예악 문물 사백 년을 이어왔네 푸른 물 맑은 모래 아름답게 빛나고 드높은 성 거대한 집 빽빽하게 연이었네 하회마을 고택은 알괘라 어드메냐 딴 시대라 쓸쓸히 한번 슬퍼하노라. 안동을 두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부지런한 것과 검소한 것을 숭상하고, 농사짓고 누에치는 일에 힘쓴다”라고 하였고, 『동국여지승람』 「안동도호부」편 「형승」조에 “물은 황지로 빠져서 1만 구렁을 흡수하고 산은 태백산이 가장 뛰어나게 뭇 봉우리를 통솔한다”라고 하였다. 또한 안동 지역의 대표적 향토지 초고본(草稿本)인 『영가지(永嘉志)』를 편찬한 권기는 안동을 일컬어 “산은 태백에서부터 내려왔고 물은 황지에서부터 흘러온 것을 환하게 알 수 있다”라며, “산천의 빼어남과 인물의 걸출함과 토산의 풍부함과 풍속의 아름다움과 기이한 발자취”를 지니고 있는 고장이라고 표현하였다. ‘안동 상전(床廛) 흥정이다’라는 옛말이 있는데, 이는 옛날 안동 상전에서 여자들이 조용히 상을 사가듯 말없이 행동할 때 이르는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안동 사람들은 무뚝뚝하고 무표정한 얼굴과 끈질긴 인내심을 가졌다고들 말한다. 그 이유를 유교 문화권에서 찾기도 하지만, 이 지방의 열악했던 자연 환경과 독특한 역사에서 기인했다고 보기도 한다. 즉 안동 지방은 당쟁이 치열했던 조선 중기 이후 잠시 정권을 잡았던 남인 세력이 3백여 년 동안 묻혀 지낸 ‘야당 지역’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대추 한 알 먹고 요기한다’는 선비 기질의 권위를 가졌고, ‘열 끼를 굶어도 내색을 하지 않는다’는 체모가 이해관계에 앞섰던 가치관도 대물림되어 내려왔을 것이다. 안동문화원장을 지냈던 유한상 씨는 이런 기질을 가진 안동 사람을 ‘안동 숙맥’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1607년 병세가 점점 악화되어 향년 66세로 그곳에서 눈을 감았는데, 유성룡이 세상을 뜨자 선조는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승지를 직접 보내 조문하도록 했다. 상인들은 4일간 장사를 하지 않으며 경세가의 죽음을 슬퍼했다. 또 서울 옛집이 자리했던 묵사동에는 약 천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한다. 현재 병산서원ㆍ남계서원ㆍ도남서원ㆍ삼강서원ㆍ빙계서원 등에 배향되어 있다.

2017년 11월 30일 목요일

Sahara Des., ─沙漠

Sahara Des., ─沙漠 면적은 약 860만㎢이다. 나일강에서 대서양안에 이르는 동서길이 약 5,600km, 지중해와 아틀라스산맥에서 나이저강(江)·차드호(湖)에 이르는 남북길이 약 1,700km이다. 이 사막 남부의 경계는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고, 사막과 사바나 지대 사이에 넓고 건조한 스텝 지대가 동서로 펼쳐져 있다. 이 사막지역은 홍해에 접하는 나일강 동쪽의 누비아 사막과 나일강 서쪽의 아하가르산맥 부근까지의 리비아 사막을 합친 동(東)사하라와 아하가르산맥 서쪽의 서(西)사하라로 크게 구별하여 부르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막 지역은 열풍으로 기온이 올라간다. 게다가 사막에는 강우가 적기 때문에 잡초를 제외하고는 수목이 자랄 수 없어 일반적인 땅보다 더 더울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생물이 살아갈 수 없다. 사막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사막은 아프리카 대륙 북부에 있는 사하라 사막이다. 사하라 사막의 ‘사하라’라는 말은 아랍어 ‘사흐라(Sahra: 불모지)’에서 유래되었으며, 이것은 식생이 없는 적색 평원을 뜻하는 ‘아샤르’와도 연관이 있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광대하고 가장 건조한 이곳은 나일 강 동쪽의 누비아 사막과 나일 강 서쪽의 아하가르 산맥 부근까지의 리비아 사막을 합친 동사하라와 아하가르 산맥 서쪽의 서사하라로 크게 구별하여 부른다. 또 동서 사하라는 다시 여러 개의 사막으로 나누어지는데 이기다 사막, 세시 사막, 엘주프 사막, 테네레 사막, 리비아 사막, 누비아 사막, 동부 대사구, 서부 대사구 등으로 구분된다. 사하라 사막도 한때는 아프리카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하던 곳이었다. 이는 사하라에서 발견된 동굴 벽화에 그려져 있는 코끼리와 기린 같은 동물의 모습과 사람들이 들판에서 가축을 기르는 모습으로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지금은 이들 지역 대부분이 사구나 암석으로 변해 있다. 보통 사막이라고 하면 모래로 이루어진 평지이거나 얕은 모래 언덕을 생각한다. 그러나 사하라에는 타하트 산, 티베스티 산과 같이 해발 3,000m에 이르는 산도 있다. 또 북회귀선1) 북쪽에 있는 1,000m 이상의 산에서는 겨울철에 영하로 내려가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사막이라고 해서 다 평평하고 날씨가 더운 것만은 아니다. 사하라의 연평균 기온은 27℃이지만 별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사막이 워낙 넓기 때문에 어느 한 지역의 온도 분포로 설명하기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리비아의 알아지지야 지역에서 기온이 최고 58℃까지 올라간 기록이 있으며 낮에는 보통 40~50℃까지 올라가고, 야간에는 10~20℃ 이하로 내려간다고 한다. 이와 같이 기온이 급변하는 기후의 특징 때문에 암석이 빠르게 붕괴되어 모래가 만들어지고 사막이 점점 확대되고 있다. 사하라 사막을 국가별로 나누면 서사하라,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이집트 등의 북부 사하라와 모리타니, 니제르, 차드, 수단 등의 남부 사하라로 나뉜다. 역내의 국가 중 건조 지역이 차지하는 비율을 기준으로 할 때 리비아 (99%)와 이집트(98%)가 사하라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사하라 전역에 걸친 주민의 총수는 약 250만 명으로 추정되며, 이 중 약 200만 명은 사하라 북단의 아틀라스 산맥, 지중해 인접 지역, 나일 강 유역 등에 거주한다. 내륙 지대에는 티베스티ㆍ아하가르 산의 기슭과 페잔, 그 밖의 큰 오아시스에 인구가 집중되어 있는 편이다. 사하라 내의 도시 중 리비아의 사바(Sabhah)는 11세기부터 오아시스에 발달한 도시인데, 1943~1963년에는 페잔(Fezzan) 주의 주도로 성장하였다. 순백색 빌딩과 넓은 거리로 정돈된 지금의 시가지와 토담집과 비좁은 골목길이 들어찬 구시가지로 나뉘는데, 한때 이탈리아의 기지였던 엘레나 요새는 현재 사무실ㆍ상점ㆍ병원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지금도 이 도시는 사하라 사막에서 무역과 교통의 중심지로서, 튀니지와 차드로부터 자동차 편으로 오는 무역상들이 모이는 곳이다. 지중해 연안 지방과는 도로나 항공 편으로 연결되는데 리비아 정부에서는 농업 진흥 계획에 따라 이 도시 인근에 관개 시설을 조성 중이다. 아프리카 전 대륙을 식민지로 삼기 위한 제국주의의 경쟁이 19세기 말부터 20세기까지 치열하게 전개되었는데 사하라 사막도 예외는 아니었다. 프랑스는 사하라의 서반부를, 영국은 동반부를, 이탈리아는 리비아 지역을 각각 식민지화하였다. 이는 주로 지하자원을 캐내 가기 위함인데 사막이라는 지형상의 특수성(수송 문제) 때문에 대부분의 강국들은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이 틈을 이용하여 전 사하라를 통째로 삼키려던 프랑스의 야심 찬 계획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비록 이집트의 혁명(1952)과 리비아의 독립(1951)을 계기로 잠시 주춤 하였지만 알제리의 석유, 모리타니의 철광석, 리비아의 유전, 니제르의 우라늄 광산이 개발되자 프랑스는 영유권을 강화하고 식민지 제국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그 결과 사하라 사막의 대부분은 프랑스에 귀속되었다. 사하라 지역의 국가들이 독립하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부터이며, 1964년까지 사하라 지역의 모든 국가들이 독립하였다. 지구상에서 가장 무덥고 건조한 곳으로 메마른 고원과 자갈로 뒤덮인 평원, 그리고 광활한 모래가 끝없이 펼쳐져 있는 땅, 바로 세계 최대의 사막인 사하라 사막이다. 사하라는 ‘황야’라는 뜻을 지닌 아랍어 ‘사흐라Sahra’에서 유래한 말이다. 사하라 사막의 연평균 강수량은 250mm 이하로 매우 건조하다. 연평균 기온이 27℃ 이상인 곳이 대부분이고, 낮과 밤의 기온차는 30℃를 넘는다. 이러한 기후 조건은 암석의 기계적 풍화 작용을 촉진시켜 사막에 모래를 공급하는 주요인이 된다. 사하라 사막에서 모래사막은 약 20%에 불과하며 나머지는 대부분 암석과 자갈로 된 대지이다. 사막의 기반암은 약 6억 년 이전의 선캄브리아대에 형성된 것이며 이 기반암 위를 사암과 석회암이 덮고 있었다. 이 사암과 석회암은 약 1억 년 전 사하라 사막 대부분이 바다에 잠겼을 때 퇴적되어 형성된 것으로 사막의 모래는 이 암석들이 풍화된 알갱이들이다. 사막의 모래는 바다에서 생성된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약 7,000만 년 전 이후 신생대로 접어들면서 사하라 사막 일대가 육지화되고 표토층인 사암과 석회암이 풍화되어 모래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신생대 제4기 약 200만 년 전 이후 여러 차례의 빙하기를 거치며 암석의 풍화에 의한 모래들이 쌓여 지금의 사막이 형성되었다. 풍요의 땅이 불모의 땅으로 변한 이유는? 지금은 황량하고 메마른 사막이지만 지금으로부터 약 6,000년 전만 해도 사하라 사막은 강이 흐르고 나무와 풀로 덮인 비옥한 땅이었다. 주민들은 사냥과 낚시를 하며 살았다. 알제리의 타실리나제르의 암벽에 그려진 기린, 코뿔소, 영양, 사자 등의 동물과 이를 사냥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를 보여 준다. 이런 풍요의 땅에서 불모의 땅으로 변한 것은 기온의 변화 때문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4,000~7,000년 전에는 지구의 기온이 현재보다 약 1~2℃가량 높았다. 따라서 적도 부근의 기단이 세력을 확장하여 적도 수렴대가 북상했고 이 적도 수렴대에 사하라 사막 일대가 있었기 때문에 비가 많이 내려 울창한 초원과 삼림을 이루었다. 반면 지중해 부근은 고압대에 위치하여 지금의 사하라 사막과 같은 매우 건조한 기후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기온이 점차 내려가면서 적도 수렴대가 남하하자 사하라 사막에 비가 내리지 않게 되어 점차 건조한 사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약 4,300년 전부터 사하라의 건조화가 진행되면서 이곳에서 살던 사람들 또한 점차 비와 풀을 찾아 남하했다. 지금의 보츠와나와 나미비아 일대에 사는 부시먼이 바로 그들이다. 사하라 사막은 아프리카 북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홍해 연안에서 대서양 해안까지 이르는 세계 최대의 사막이에요.이집트, 리비아, 알제리, 니제르, 차드, 수단 등 여러 나라에 걸쳐 있어요. 사하라 사막의 크기는 860만 제곱킬로미터로, 남한의 86배가 넘는 크기예요. 지구가 점점 더워지면서 사하라 사막은 매년 남쪽으로 약 15km씩 더 커지고 있다고 해요. 사하라 사막은 밤낮의 기온 차가 매우 커요. 사하라 사막의 북쪽은 유럽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남쪽에는 아프리카의 전통 문화가 많이 남아 있답니다. 면적은 약 860만㎢이다. 나일강에서 대서양안에 이르는 동서길이 약 5,600km, 지중해와 아틀라스산맥에서 나이저강(江)·차드호(湖)에 이르는 남북길이 약 1,700km이다. 이 사막 남부의 경계는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고, 사막과 사바나 지대 사이에 넓고 건조한 스텝 지대가 동서로 펼쳐져 있다. 이 사막지역은 홍해에 접하는 나일강 동쪽의 누비아 사막과 나일강 서쪽의 아하가르산맥 부근까지의 리비아 사막을 합친 동(東)사하라와 아하가르산맥 서쪽의 서(西)사하라로 크게 구별하여 부르기도 한다. 지구상에서 가장 무덥고 건조한 곳으로 메마른 고원과 자갈로 뒤덮인 평원, 그리고 광활한 모래가 끝없이 펼쳐져 있는 땅, 바로 세계 최대의 사막인 사하라 사막이다. 사하라는 ‘황야’라는 뜻을 지닌 아랍어 ‘사흐라Sahra’에서 유래한 말이다. 사하라 사막의 연평균 강수량은 250mm 이하로 매우 건조하다. 연평균 기온이 27℃ 이상인 곳이 대부분이고, 낮과 밤의 기온차는 30℃를 넘는다. 이러한 기후 조건은 암석의 기계적 풍화 작용을 촉진시켜 사막에 모래를 공급하는 주요인이 된다. 사하라 사막에서 모래사막은 약 20%에 불과하며 나머지는 대부분 암석과 자갈로 된 대지이다. 사막의 기반암은 약 6억 년 이전의 선캄브리아대에 형성된 것이며 이 기반암 위를 사암과 석회암이 덮고 있었다. 이 사암과 석회암은 약 1억 년 전 사하라 사막 대부분이 바다에 잠겼을 때 퇴적되어 형성된 것으로 사막의 모래는 이 암석들이 풍화된 알갱이들이다. 사막의 모래는 바다에서 생성된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약 7,000만 년 전 이후 신생대로 접어들면서 사하라 사막 일대가 육지화되고 표토층인 사암과 석회암이 풍화되어 모래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신생대 제4기 약 200만 년 전 이후 여러 차례의 빙하기를 거치며 암석의 풍화에 의한 모래들이 쌓여 지금의 사막이 형성되었다. 지금은 황량하고 메마른 사막이지만 지금으로부터 약 6,000년 전만 해도 사하라 사막은 강이 흐르고 나무와 풀로 덮인 비옥한 땅이었다. 주민들은 사냥과 낚시를 하며 살았다. 알제리의 타실리나제르의 암벽에 그려진 기린, 코뿔소, 영양, 사자 등의 동물과 이를 사냥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를 보여 준다. 이런 풍요의 땅에서 불모의 땅으로 변한 것은 기온의 변화 때문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4,000~7,000년 전에는 지구의 기온이 현재보다 약 1~2℃가량 높았다. 따라서 적도 부근의 기단이 세력을 확장하여 적도 수렴대가 북상했고 이 적도 수렴대에 사하라 사막 일대가 있었기 때문에 비가 많이 내려 울창한 초원과 삼림을 이루었다. 반면 지중해 부근은 고압대에 위치하여 지금의 사하라 사막과 같은 매우 건조한 기후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기온이 점차 내려가면서 적도 수렴대가 남하하자 사하라 사막에 비가 내리지 않게 되어 점차 건조한 사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약 4,300년 전부터 사하라의 건조화가 진행되면서 이곳에서 살던 사람들 또한 점차 비와 풀을 찾아 남하했다. 지금의 보츠와나와 나미비아 일대에 사는 부시먼이 바로 그들이다.

나일강 [Nile River]

나일강 [Nile River] 적도 부근에서 발원하여 지중해로 흘러드는 강. 총길이 6,671km이다. 총길이는 남반구의 부룬디 ·탄자니아 국경 부근에서 강 어귀까지이며, 유역면적은 아프리카대륙의 약 1/10을 차지한다. 나일 강에는 몇 개의 원류가 있는데, 그 중 가장 오지에 있는 것은 부룬디 산맥에서 발원하는 것이며, 여기서부터 카게라강이 되어 빅토리아호(湖)로 흘러든다. 빅토리아호부터는 빅토리아나일이라 하는데, 키오가호를 지나 머치슨 폭포를 거쳐 앨버트호의 북단으로 들어간다. 앨버트호에서 수단 국경까지는 앨버트나일이라 하며, 여기까지의 나일 강은 산악지대를 지나면서 머치슨 폭포 같은 경관을 이룬다. 인류문명을 탄생시킨 강의 하나로 아프리카의 빅토리아호에서 발원해 북동쪽으로 이집트를 지나 지중해로 흘러들며 길이는 약 6,671km로 세계에서 가장 길다. 해마다 6월에서 10월까지 이르는 사이에 강이 범람해 홍수가 지는데, 이로써 양안에 기름진 충적토가 흘러와 쌓여 농경에 적합한 토양이 조성되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범람을 극복하기 위한 치수와 그에 따르는 천문학 및 수학의 발달, 그리고 중앙집권적 권력의 출현을 가능케 하였다. 그 결과 강안(江岸)에서 세계 4대 문명의 하나인 고대 이집트 문명이 탄생하였다. 백나일은 에티오피아에서 흘러오는 청나일(아랍어로는 바르알아즈라크)과 하르툼에서 합류하여 나일 강이 된다. 하르툼을 떠난 나일 강은 도중에 에티오피아에서 흘러오는 또 하나의 지류인 아트바라강과 합류하여, 이집트 국경 근처에서 인공 호수인 나세르호(湖)로 흘러든다. 아스완 하이댐과 아스완댐을 거쳐 이집트 영내로 들어가면 합류하는 지류도 없고, 카이로 북쪽에 거대한 삼각주지대를 만들면서 지중해로 흘러든다. 아스완과 하르툼 사이에는 6곳의 급류가 있어 유량이 적은 2∼7월에는 항행할 수 없으나, 그 밖의 계절에는 작은 선박이면 지중해에서 머치슨 폭포까지 항행할 수 있으며, 우간다에서 빅토리아호를 지나 카게라강을 약 160km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수단령으로 들어서면 서쪽에서 흘러오는 지류인 바르알가잘강과 노호(湖)에서 합류하는데, 이것을 바르알자발강이라 한다. 바르알자발강은 광대한 습지대를 지나오면서 유량의 절반은 부평초(浮萍草)에 흡수당하거나 증발로 인하여 줄어든다. 이곳에서부터 수도 하르툼까지를 백나일이라 한다. 백나일은 건조지대로 들어서 하르툼에 가까워지면 완전한 사막지대를 지난다. 여기서는 남동쪽에서 흘러오는 소바트강이 합류한다. 나일 강은 고대부터 사하라 사막을 넘어 북부아프리카와 적도 이남의 내륙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유일한 교통로였으며, 고대 이집트문명이 지금의 하르툼 북쪽 메로웨를 거쳐 에티오피아에 영향을 준 통로가 되었다. 1816년경 이집트 근대화의 아버지라고 하는 모하메드 알리가 착수할 때까지 나일 강물의 제어(制御)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으며,1861년 카이로 북쪽에 댐이 완성됨으로써 삼각주지대의 농산물 재배가 활발해졌다. 내륙 수로로서의 개발은 19세기 말부터 1900년에 걸쳐, 부평초 때문에 항행할 수 없는 수단 남쪽의 습지대를 우회하기 위해 자연적으로 생긴 바르엘제라프강(바르알자발강의 중앙부에서 동쪽을 북진하여 백나일과 소바트강의 합류점 부근에 이르는 강)에 일부 인공을 가하여 항행을 원활하게 한 것이 시초이다. 1902년 아시우트와 아스완에 개폐식 댐을 완성, 계절적인 범람에 다소의 제어를 가하여 관개용수의 이용을 유효하게 하였는데, 이러한 공사는 그후 이스나(1909), 센나르(1925), 나그함마디(1930), 제벨아울리아(1937) 등에서도 행해졌다. 1970년 아스완하이댐이 완공되어 강의 범람을 완전히 제어하게 되었고, 이 다목적댐에 의하여 나세르호가 생겼다. 그 결과 이집트의 약 2만 4,300km2, 수단의 약 4,050km2의 농경지가 관개되었다. 나일 강은 국제하천이므로 이집트 ·수단 ·에티오피아 ·우간다 사이에 수리(水利)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어 있다. 수자원의 적극적인 개발과 이용은 1954년 우간다에서 오웬폭포에 댐을 완성하고 수력발전을 개시함으로써 시작되었다. 1960년에는 구(舊)아스완 댐에서도 수력발전이 시작되었다. 나일 강 중류 이북은 옛부터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으나, 원류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이곳에 대한 탐험이 시작된 것은 17세기부터이다. 1613년 포르투갈의 파에스 신부가 청나일을 탐험하고, 1770년 영국의 J.브루스가 타나호(湖)를 탐험하여 그것이 나일 강의 원류임을 확인하였다. 백나일은 이집트 탐험대가 1821∼1842년 수단 남단에 가까운 주바의 급류까지 탐험하였는데, 1830년에 그 때까지 백나일의 상류라고 생각한 나이저강이 별개의 큰 강임을 확인하였다. 1858년 영국인 스피크는 빅토리아호가 나일 강의 수원일 것이라 추정하고 탐험을 시작하여, 1860년 버튼과 함께 그 추정의 정당함을 확인하였다. 또 영국인 S.베이커는 1861년부터 2회에 걸친 탐험으로, 수단 남쪽의 습지대에서 나일 강을 거슬러 올라가 앨버트호와 머치슨 폭포를 확인하였다. 그후 1870년대에 이르러 영국의 군인 C.G.고든과 그 부하들이 나일강의 지도를 작성하는 데 성공하고, 이어서 M.스탠리가 빅토리아호를 주항(周航)하여 백나일의 원류지대를 상세히 밝혔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런던의 왕립지리학협회가 아프리카 내륙 탐험에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1870년대에는 나일 강의 모습이 거의 알려졌다. 세계에서 가장 긴 강이라고 알려져 왔으나, 2008년 5월 리마 지리학회의 발표에 따르면 아마존강이 나일 강보다 긴 것으로 조사됐다. 하얀 돛이 달린 고풍스런 펠루카(felucca, 지중해 연안의 삼각 돛을 단 소형 범선)를 타고 파라오들이 주요 도로로 이용했던 물길을 따라가면 이집트의 최남단에서 왕들의 계곡에 이른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나일 강이 생명을 죽음과 사후 세계로 연결해 주는 통로라고 믿었다. 나일 강은 북아프리카에서 가장 중요한 교역 루트였고 이집트 문명의 생명줄이었다. 이집트에서 가장 유명한 사원들은 이 길을 따라 서 있다. 파라오와 그의 왕비들, 후궁들―그리고 가끔은 그의 악어들도―은 미라가 되어 서안(the West Bank)에 잠들어 있다. 여행길에는 고대 이집트인들의 미스터리한 영혼과 전설을 만끽하며, 보는 이를 압도하는 누비아 양식의 바위 사원 아부 심벨, 에드푸에 있는 이집트에서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콤 옴보, 아름다운 촌락, 세계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군주 30명의 업적이자 세계 최대의 종교 유적인 카르나크 신전 등을 직접 볼 수 있다. 장대한 왕들의 계곡에서 내리면 방죽길에 늘어서 있는 오만한 스핑크스들과 람세스 2세의 위엄 있는 석상이 눈에 들어온다. 사원과 마찬가지로 나일 강을 따라 아스완에서 룩소르로 가는 여행길도 시간의 시험을 견뎌낸 것이다. 아프리카 동부에 있는 하천. 전체 길이는 6,700㎞. 유역 면적은 아프리카 대륙의 약 1/10을 차지한다. 하천 상류의 백(白)나일 강은 빅토리아 호에서 발원하고, 청(靑)나일 강은 아비시니아 고원에서 발원하여 수단의 수도인 하르툼에서 합쳐진다. 나일 강은 이집트 동부를 거쳐 지중해로 들어가는데 그 어귀에 넓은 삼각주를 형성한다. '이집트는 강의 선물'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건계와 우계가 뚜렷한 지역을 흐르는 청나일 강의 범람으로 나일 강이 범람한다. 나일 강의 정기적인 범람은 이집트 인의 종교 사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으며, 태양력도 여기에서 나오게 된 것이다. 나일 강은 고대부터 사하라 사막을 넘어 북부 아프리카와 적도 이남의 내륙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유일한 교통로였다. 페니키아 인은 '골짜기'라는 뜻의 나할(Nahal)이라고 했으며, 나일은 그리스 어의 닐루스(Nilus)에서 유래하였다. 셈 어로 나일은 '하천'이라는 뜻이며, 아랍 어로는 '대단히 큰 물이 있는 바다'라는 뜻이다. 나일 강에 대한 탐험은 17세기부터 시작되어 1613년 포르투갈의 파에스 신부가 청나일 강을 탐험하고, 1770년 영국의 브루스가 타나 호(湖)를 탐험하여 그것이 나일 강의 원류임을 확인하였다. 1860년 영국인 스피크와 버튼은 빅토리아 호가 백나일 강의 수원임을 밝혔다. 1870년대에는 나일 강의 지도가 작성되는 등 나일 강의 모습이 세계에 알려졌다. 나일 강이 내륙 수로로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부터이며, 1970년 아스완하이 댐이 완공되어 강의 범람을 완전히 제어하게 되었다. 나일 강은 국제 하천이므로 이집트, 수단, 에티오피아, 우간다 사이에 수리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어 있다. 하얀 돛이 달린 고풍스런 펠루카(felucca, 지중해 연안의 삼각 돛을 단 소형 범선)를 타고 파라오들이 주요 도로로 이용했던 물길을 따라가면 이집트의 최남단에서 왕들의 계곡에 이른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나일 강이 생명을 죽음과 사후 세계로 연결해 주는 통로라고 믿었다. 나일 강은 북아프리카에서 가장 중요한 교역 루트였고 이집트 문명의 생명줄이었다. 이집트에서 가장 유명한 사원들은 이 길을 따라 서 있다. 파라오와 그의 왕비들, 후궁들―그리고 가끔은 그의 악어들도―은 미라가 되어 서안(the West Bank)에 잠들어 있다. 여행길에는 고대 이집트인들의 미스터리한 영혼과 전설을 만끽하며, 보는 이를 압도하는 누비아 양식의 바위 사원 아부 심벨, 에드푸에 있는 이집트에서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콤 옴보, 아름다운 촌락, 세계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군주 30명의 업적이자 세계 최대의 종교 유적인 카르나크 신전 등을 직접 볼 수 있다. 장대한 왕들의 계곡에서 내리면 방죽길에 늘어서 있는 오만한 스핑크스들과 람세스 2세의 위엄 있는 석상이 눈에 들어온다. 사원과 마찬가지로 나일 강을 따라 아스완에서 룩소르로 가는 여행길도 시간의 시험을 견뎌낸 것이다. "『나일강의 죽음』을 읽을 때면 내가 다시 아스완에서 와디 할파로 향하는 증기선에 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집트 나일강의 수위 측정기로 861년 건축한 나일로 메타를 찾아 소개하는 내용이다. 나일강의 범람은 다른 나라와는 다르게 축복으로 여겨졌다. 나일강의 범람은 사막에 생명과도 같은 물줄기를 안겨주는 삶의 축복이다. 세계 여러 나라의 자연과 문화를 학습할 때 참고자료로 활용한다. 나일강이 시작되는 근원지인 우간다의 진자를 소개하는 내용이다. 이곳에서 부자갈리 폭포, 빅토리아 호수, 등이다. 영국은 18세기 산업혁명으로 상품을 팔 시장을 찾고자 아프리카 탐험에 앞섰다. 1769년 청나일 강의 수원을 찾아낸 사람은 제임스 브루스이다. 브루스는 2년 동안 에티오피아 말과 의술을 배우며 탐험 준비를 했고 나일강의 수원인 기슈 샘을 찾아냈다. 런던에 돌아와 책 〈나일 강 수원을 찾아서〉를 출판했다. 1760년부터 시작된 산업혁명으로 값싼 물건이 많이 만들어지자 유럽 강대국들은 상품을 팔 시장이 필요해졌다. 그들은 공산품의 원료를 값싸게 얻고 상품을 비싸게 팔 식민지를 마련하려고 앞을 다투어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몰려들었다. 탐험가들이 모두 식민지 정책의 앞잡이는 아니다. 그들은 거의가 순수한 탐험 정신으로 미지 세계를 밝히려고 나선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결과를 놓고 볼 때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탐험가들 때문에 오랫동안 유럽의 식민지 노릇을 하게 되었다. 유럽 사람들의 '탐험'과 '개척'이란 당하는 쪽이 보기에는 '침략'이었다. 특히 아프리카 사람들은 까닭 모르고 노예 사냥꾼들에게 붙잡혀 쇠고랑에 채워진 채 낯선 땅으로 끌려가, 짐승만도 못한 대접을 받으며 대대로 종살이하는 슬픔을 겪었다. 아프리카 탐험 역사는 곧 아프리카의 슬픈 역사이다. 아프리카 탐험은 동쪽에서는 나일 강, 서쪽에서는 나이저 강, 남쪽에서는 포트엘리자베스, 북쪽에서는 사하라 사막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8세기 아프리카 지역 탐험에서 제일 앞선 나라는 영국이었다. 1769년 청나일 강이 어디서 시작되는지를 밝힘으로써 아프리카에서 첫 개가를 올린 제임스 브루스를 비롯해, 나이저 강을 탐험한 멍고 파크와 리처드 랜더, 그 뒤를 이어 남부와 중부 아프리카를 밝힌 데이비드 리빙스턴, 백나일 강의 수원(水源)을 알아낸 존 스피크와 헨리 스탠리가 모두 영국 출신이다. 암흑 대륙은 이들의 손을 거쳐 하나하나 모습을 드러냈다. 1730년 스코틀랜드 스털링에서 태어난 브루스는 1763년 북아프리카 알제리의 총영사가 되면서 북아프리카의 고대 유물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림 솜씨가 뛰어나, 자기가 본 유적과 유물을 그림으로 기록해 두곤 했다. 그는 1765년 초 지중해 지역을 여행하면서 나일 강을 탐험하기로 마음먹었다. 역사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일찍이 '이집트는 나일 강의 선물'이라고 말했다. 이집트 사람들은 나일 강을 일컬어 '이집트의 어머니'라고 한다. 주기적으로 홍수를 일으키지만, 집이나 농경지를 떠내려 보내는 일이 없이 상류로부터 기름진 흙을 날라다 주므로 씨만 뿌리면 곡식이 풍성하게 열리는 데다, 여행을 할 때나 물자를 나를 때에도 유일한 '길'인 나일 강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강을 '어머니'요 '신'으로 섬기며, 이 어머니의 젖줄로부터 인류 사상 가장 오래되고 찬란한 이집트 문명을 일구어 냈다. 나일 강이 어디서 발원(發源)하는지는 오랜 옛날부터 큰 관심거리였다. 그러나 나일의 수원은 수천 년간 신비의 베일에 싸여 있었다. 그리스 지리학자 프톨레마이오스도 그저 '달의 산맥(Mountains of the Moon)'에서 시작된다고 했을 뿐이다. 브루스는 2년 동안 에티오피아 말과 의술을 배우며 탐험 준비를 했다. 그가 어찌나 열심이었던지 사람들은 그를 '아비시니아 사람'이라고 놀리기까지 했다. 아비시니아란 에티오피아를 가리키는 말로,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나일 강이 에티오피아에서 흘러온다고 믿었다. 1768년 7월 이집트의 카이로에 간 브루스는 나일 강에 배를 띄워 상류로 올라갔다. 그런데 아스완에 도착하니 한창 전쟁이 벌어져 있었다. 그는 물길을 따라 상류로 올라가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물길로 탐험하기 위해 에티오피아로 발길을 돌렸다. 1770년 2월 14일 브루스 탐험대가 사막과 고원을 지나 에티오피아 수도 곤다르에 가 보니 왕자들이 천연두를 앓고 있었다. 브루스가 병을 고쳐 주자 왕비는 그의 탐험을 여러 모로 뒷바라지했다. 1770년 11월 브루스 일행은 나일 강이 흘러나오는 타나 호수에 이르렀고, 호수로 흘러드는 리틀아파이 강 물줄기를 찾아냈다. 그들은 강을 따라 험한 산으로 올라갔다. 점점 가늘어지는 물줄기는 그 산기슭의 기슈마을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을에 들어서니 작은 교회가 보였다. 브루스가 사람들이 가리키는 대로 교회 앞의 작은 언덕으로 올라가 보니, 커다란 샘에서 맑은 물이 솟고 있었다. "드디어 3,000년에 걸친 나일의 수수께끼를 풀었다!" 브루스는 뒬듯이 기뻐했다. 과연 그 샘은 나일 강의 수원이었다. 하지만 기슈 샘이 나일 강의 전부는 아니다. 이 샘은 나일 강 상류의 두 갈래 중 하나인 청나일의 수원이었다. 더구나 브루스보다 150년이나 앞서 스페인 사람 페드로 파에즈가 찾아낸 적이 있으므로 반쪽 발견의 명예마저 그의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역사는 청나일 수원 발견을 브루스의 공으로 돌리고 있다. 기슈 샘의 위치를 바르게 재고, 청나일과 백나일이 만나서 대(大) 나일을 이루는 수단의 하르툼까지 걸어감으로써 기슈 샘이 청나일의 발원지임을 확인하고 증명한 사람이 브루스이기 때문이다. 청나일(Blue Nile)이란 물이 파랗고 맑아 붙여진 이름이다. 이 강은 기슈 샘에서 시작하여 티시사트 폭포와 타나 호수를 거쳐 하르툼에서 백나일과 만난다. 브루스 한동안 에티오피아 왕실에 머무르다 1771년 12월 그곳을 떠났다. 그는 자기를 눌러앉히려는 왕의 눈을 속이고 몰래 왕궁을 빠져나와 일행 다섯 사람과 함께 누비아 사막을 가로질렀다. 모래 폭풍과 타는 듯한 더위에다 목마름으로 그들은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낙타를 죽여 위장의 물을 빨아 먹으면서 사막을 벗어났다. 아스완에 닿은 일행은 거기서부터는 배를 타고 나일 강을 따라 내려가 1773년 1월 카이로에서 귀국길에 올랐다. 1774년 런던에 돌아온 브루스는 자신의 영지에 칩거하면서 1780년부터 자기가 겪은 일을 책으로 쓰기 시작했다. 1790년 〈나일 강 수원을 찾아서〉가 출판되자 영국인들은 처음에 이 사실을 믿지 않았다. 이는 브루스가 기슈 샘을 발견한 사실을 프랑스 궁중에 먼저 알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에 다른 탐험가들이 그의 주장이 옳음을 증명함으로써 브루스는 아프리카 탐험의 선구자로 인정 받게 되었다. 나일강의 범람과 축복" 이집트 나일강의 수위 측정기로 861년 건축한 나일로 메타를 찾아 소개하는 내용이다. 나일강의 범람은 다른 나라와는 다르게 축복으로 여겨졌다. 나일강의 범람은 사막에 생명과도 같은 물줄기를 안겨주는 삶의 축복이다. 세계 여러 나라의 자연과 문화를 학습할 때 참고자료로 활용한다. 아프리카 동부에 있는 하천. 전체 길이는 6,700㎞. 유역 면적은 아프리카 대륙의 약 1/10을 차지한다. 하천 상류의 백(白)나일 강은 빅토리아 호에서 발원하고, 청(靑)나일 강은 아비시니아 고원에서 발원하여 수단의 수도인 하르툼에서 합쳐진다. 나일 강은 이집트 동부를 거쳐 지중해로 들어가는데 그 어귀에 넓은 삼각주를 형성한다. '이집트는 강의 선물'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건계와 우계가 뚜렷한 지역을 흐르는 청나일 강의 범람으로 나일 강이 범람한다. 나일 강의 정기적인 범람은 이집트 인의 종교 사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으며, 태양력도 여기에서 나오게 된 것이다. 나일 강은 고대부터 사하라 사막을 넘어 북부 아프리카와 적도 이남의 내륙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유일한 교통로였다. 페니키아 인은 '골짜기'라는 뜻의 나할(Nahal)이라고 했으며, 나일은 그리스 어의 닐루스(Nilus)에서 유래하였다.

아마존 강 [Amazon River]

아마존 강 [Amazon River] 지구 상의 강 중에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 넓고 긴 강이 있는가 하면 송사리를 잡던 동네 어귀의 조그마한 강도 있다. 그 중에서 가장 긴 강은 나일강(6,671㎞)이고 두 번째는 아마존 강(6,400㎞, 마라포 강의 원류부터)이다. 그러나 강의 길이는 측정 방법이나 시기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는데, 브라질의 과학자들은 아마존 강 길이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였다.남아메리카의 서쪽 안데스 산맥에서 발원하여 적도를 따라 동쪽으로 흘러 대서양으로 들어가는 강으로, 유수량과 유역 면적이 세계에서 가장 크다. 아마존 강의 유역 면적은 6,915,000㎢로 2위인 콩고 강(3,820,000㎢)보다 2배나 넓으며, 남북으로는 북위 5°~남위 20°, 동서로는 서경 50°~78°에 걸쳐 있다. 그 대부분은 브라질 영토이며 주변의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파라과이 등에 떨어지는 빗물도 아마존 강으로 흘러든다. 결국 남미 대륙 면적(1780만 ㎢)의 1/3이 아마존 강 유역인 것이다. 그러나 기아나, 수리남, 가이아나에 내린 빗물은 분수령인 기아나 고지에 막혀 아마존 강으로 들어오지 않고 바로 대서양으로 흘러들며 칠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등 세 나라는 아마존 강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2001년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재측정을 실시하였는데, 나일 강보다 더 길다고 하였고 세계 유수의 지리학회에서 동의를 얻었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 아마존 강의 길이는 7천 ㎞를 조금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강의 유량은 아마존 강이 174,900㎥/s로 가장 많으며, 두 번째인 콩고 강(39,000㎥/s)보다 무려 5배나 많다. 아마존 강에서 1초당 흘려보내는 물의 양은 콩고 강이 4.5초, 미시시피 강이 10초, 나일 강이 56초 동안 흘려보내는 물의 양과 맞먹는데, 이 물은 지구 상의 민물 중 약 15%를 차지한다. 아마존 강의 유역 면적은 6,915,000㎢로 2위인 콩고 강(3,820,000㎢)보다 2배나 넓으며, 남북으로는 북위 5°~남위 20°, 동서로는 서경 50°~78°에 걸쳐 있다. 그 대부분은 브라질 영토이며 주변의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파라과이 등에 떨어지는 빗물도 아마존 강으로 흘러든다. 결국 남미 대륙 면적(1780만 ㎢)의 1/3이 아마존 강 유역인 것이다. 그러나 기아나, 수리남, 가이아나에 내린 빗물은 분수령인 기아나 고지에 막혀 아마존 강으로 들어오지 않고 바로 대서양으로 흘러들며 칠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등 세 나라는 아마존 강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아마존 강 하구의 평균 깊이는 약 45m이지만 가장 깊은 곳은 90m 정도 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또 강 하구의 폭은 240㎞ 정도 되며, 태평양으로부터 160㎞ 떨어진 안데스 산맥 정상에서 시작하여 대서양까지 약 7,000㎞를 동진하여 도달한다. 강의 대부분은 브라질을 통과하며 큰 지류만 해도 200개가 넘는다. 그중에서 17개는 길이가 2,000㎞ 이상이며 본류와 지류를 모두 합하면 5만㎞ 이상이 된다. 1868년에는 페루와 에콰도르도 자국 영내의 하천을 이용하는 외국 선박의 항행을 자유화하였으며, 그 후부터 아마존은 완전한 국제 하천이 되었다. 하구와 가까운 벨렘(Belem)은 아마존 강 유역의 물자 집산지이고, 아마존과 네그로 강의 합류점 부근에 있는 마나우스는 아마존 제일의 항구이며, 이키토스는 페루의 항구 도시로 발전하였다. 아마존 강은 내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600㎞ 떨어진 내륙의 중심(아마존 분지) 도시인 마나우스에서 큰 배를 타고 대서양으로 나갈 수 있으며, 하구에서 3,700㎞나 떨어진 페루의 이키토스(Iquitos)까지 대형 선박의 항행이 가능하다. 1851년에 브라질과 페루 사이에 체결된 조약으로 양국의 아마존 항행이 자유로워졌으며, 1867년에는 브라질 정부가 미국ㆍ영국ㆍ프랑스 3개국의 요청으로 아마존 본류와 지류인 토칸칭스(Tocantins) 강을 개방하였다. 1868년에는 페루와 에콰도르도 자국 영내의 하천을 이용하는 외국 선박의 항행을 자유화하였으며, 그 후부터 아마존은 완전한 국제 하천이 되었다. 하구와 가까운 벨렘(Belem)은 아마존 강 유역의 물자 집산지이고, 아마존과 네그로 강의 합류점 부근에 있는 마나우스는 아마존 제일의 항구이며, 이키토스는 페루의 항구 도시로 발전하였다. 아마존 강은 페루 안데스 산맥에서 발원하여 처음에는 북쪽으로 흐르다가 나중에 동쪽으로 흘러 브라질 북부를 관통한 다음 대서양으로 흘러든다. 그러나 그 원천은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정확한 원천을 찾기 위하여 국제지리학회에서 연합 팀(미국, 폴란드, 페루, 캐나다, 에스파냐)을 구성하여 탐사를 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수백 년간 베일에 싸여 있던 안데스의 고지 빙하에서 솟아나는 아마존의 원천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탐사 팀은 GPS 장비를 이용해서 이 강의 원천이 페루 남부의 네바도미스미(Nevado Mismi, 5,597m) 산꼭대기의 바위틈에서 흐르는 물이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탐사 팀을 이끈 뉴욕의 수학 교사인 앤드류 피토스키는 이 탐사를 통해 아마존의 원천뿐만 아니라 아마존의 상류에 대해 매우 정확한 지도를 얻을 수 있었다고 했다. 국내의 작은 강도 그 원류를 찾아내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약 7백만 ㎢의 유역을 가진 세계 최대의 강에 대한 원천을 찾아낸 것은 지도학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페루 안데스산맥에서 발원하여 처음에는 북류하다가 나중에 동류하여 브라질 북부를 관류한 다음 적도상(赤道上)의 대서양으로 흘러든다. 유역은 북위 5°에서 남위 20° 사이, 경도는 서경 50° 78° 사이에 해당한다. 아마존은 2개의 큰 강, 즉 마라뇬강과 우카얄리강이 합류하여 형성된다. 마라뇬강은 아마존의 본류로 간주되는데 그 원류는 페루의 중서부, 태평양에서 약 200㎞ 떨어진 페루의 안데스산에서 발원하여 700m의 깊이를 가진 협곡을 만들면서 약 1000㎞를 북류한다. 그 후 에콰도르 국경 부근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고 나우타(페루)에서 우카얄리강과 합류한다. 우카얄리강의 원류는 아푸리막강이라고도 하는데, 페루 남부의 안데스에서 발원하여 마라뇬강과 나란히 흐르며, 합류한 후에는 페루의 이키토스 부근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이 두 하천의 합류지점으로부터 그 하류를 아마존강이라 부른다. 본류 마라뇬강의 원류부터 아마존 하구까지는 6400㎞, 우카얄리강의 원류부터 하구까지는 7025㎞이며, 아마존 하구의 너비는 약 335㎞로 추정된다. 하구 근처에는 크고 긴 삼각주가 자리잡고 있으며, 천수백 개의 섬과 사주가 산재해 있다. 그 중에서도 마라조섬을 사이에 두고 크게 두 갈래로 갈려서 대서양으로 흘러든다. 브라질 영내의 강폭은 2∼10㎞이며 거대한 유량이 유입하기 때문에 하구에서 약 400km 떨어진 앞바다까지 해수의 염분이 희석되고, 수십km에 이르는 바다가 토사로 흐려져 있다. 1∼6월의 우기에는 중류의 마나우스처럼 수위 차가 20m나 되는 곳도 있다. 봄에는 조수의 간만 때문에 하구 부근에 해소(海嘯:밀물 때 얕은 해안이나 세모꼴로 떨어진 하구에서 일어나는 거센 파도나 그 소리)가 일어나 높이 5m 내외의 파도가 밀어닥치기도 한다. Amazon Basin, ─盆地" 하류의 산타렝에서 상류에 이르는 유역이다. 해발고도 300 m 이하로 서쪽은 안데스산맥, 북쪽은 기아나고지, 남쪽은 브라질고원에 둘러싸여 있다. 고생층이 기반암을 이루고 있으나, 대부분은 제3기층의 사암, 점토 또는 사층(砂層)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형적으로는 ① 바르제아(범람원), ② 테조(수 m 높이의 하안단구), ③ 제3기층의 100 m 이하의 낮은 고지, ④ 세라스(200~300 m 높이의 卓狀地)로 되어 있다. 바르제아는 증수기(增水期)에는 침수하지만, 그 밖에는 침수되지 않는 테라피르메라고 불리는 지형을 이룬다. 아마존강 유역의 저지와 그 주변은 거의 적도 직하에 있으므로, 연평균기온 25~27 ℃로 고온을 이룬다. 또 연강수량이 2,000 mm 이상이나 되는 다우지대이며, 조밀한 열대밀림으로 뒤덮여 있기 때문에 ‘녹색의 지옥’이라고도 불린다. 이 밀림은 한결같지는 않으며, 하(下)아마존의 델타지대가 높이 20 m에 이르는 교목이나 덩굴로 뒤덮여 있는 데 비하여 바르제아의 삼림은 고무나무와 카카오가 혼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테라피르메의 삼림은 높이 30~40 m의 교목과 바닐라 ·과라나가 혼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바제르아는 비옥하여 황마(주트)가 재배되며, 감수기(減水期)에는 일반 농경이나 방목(放牧)에 이용된다. 아마존강 유역의 기후는 1년 내내 고온다우한 열대우림 기후, 상류지역에 있는 안데스산지의 건조 기후, 건기와 우기가 교차하는 사바나 기후 등 세 기후지역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지형은 증수기(增水期)에 수면 아래로 잠기는 바르제아(varzea) 및 테조(teso)라 불리는 단구면(段丘面)과 그보다 높은 단구를 포함한 테라피르메(terra firme)로 대별된다. 바르제아는 주트나 쌀의 재배에 적합하며, 테라피르메에서는 열대우림 셀바스의 밀림을 벌채하여 고무나무와 후추나무를 재배하고 있다. 셀바스에서는 아닝가 ·임바우바 ·아리아 등 특색 있는 식물을 볼 수 있으며, 고무 ·브라질너트 등 유용한 수종(樹種)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값진 침엽수가 없기 때문에 임업개발이 부진하다. 동물로는 조류와 곤충류가 많고 큰 동물은 적다. 악어 ·맥(獏) ·나무늘보 ·아메리카표범 등이 특색 있는 것들이며 어류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담수어인 피라루쿠(硬骨魚의 일종으로 큰 것은 5 m나 된다), 사나운 고기인 피라니아, 식육 미꾸라지인 칸제로 등이 유명하다. 밀림의 감소" 아마존강의 본류와 지류 유역에 펼쳐진 광대한 열대우림은 지구 전체의 대기에 영향을 준다. 다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채광산업, 대규모 방목, 간선도로의 건설 등 개발계획은 열대우림의 심각한 감소를 초래하고 있다. 특히 현대에 들어와서는 매년 상당한 규모의 열대림이 사라지고, 동 ·식물이 멸종되어가고 있다. ‘지구의 폐’ 역할을 하는 세계 최대의 열대우림 보존을 위한 아마존강 유역 각국과 선진국들의 공동 노력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아마존강은 강이라기보다 오히려 내해(內海)라고 볼 수 있으며, 하구에서 3,700km나 거슬러 올라간 페루의 이키토스까지 대형 선박의 항행이 가능하다. 1851년에 브라질과 페루 사이에 체결된 조약으로 양국의 아마존 항행이 자유로워졌으며, 1867년에는 브라질 정부가 미국 ·영국 ·프랑스 3개국의 요청으로 아마존 본류와 지류인 토칸칭스강(江)을 개방하였다. 또 1868년에는 페루와 에콰도르도 자국 영내의 하천을 이용하는 외국 선박의 항행을 자유화하였으며, 그 후부터 아마존은 완전한 국제하천이 되었다. 하구에 가까운 벨렝은 아마존강 유역의 물자 집산지로서 최대의 항구이고, 아마존과 네그루강(江)의 합류점 부근에 있는 마나우스는 아마존 제일의 항구이며, 이키토스는 페루의 대서양쪽 문호(門戶)이다. 브라질 영내에서는 오비두스 ·산타렝 등이 중요한 항구이다. 아마존강은 큰 지류만 해도 200개가 넘는다. 그 중에서 17개는 길이가 2,000km 이상이며 본류와 지류를 모두 합하면 5만km 이상이나 된다. 주요 지류로는 북쪽에서 흘러드는 나포 ·이카 ·자푸라 ·네그루 강, 남쪽에서 합류하는 우알라가 ·자바리 ·주타이 ·주루아 ·푸루스 ·마데이라 ·타파조스 ·싱구 ·토칸칭스 강 등이 있다. 페루 국경부터 네그루강과의 합류점(마나우스 부근)까지의 아마존을 브라질 사람들은 술리몽스강이라고 부른다. 브라질의 아마존 유역에는 약 200만의 인구가 있는데 그 중에서 원주민인 인디오는 5%, 백인과 혼혈인(카보클로)이 각각 40% 가량, 흑인이 10%이다. 산업수준은 매우 낮다. 주민의 대부분이 산림을 벌채하여 화전을 만들고 고무 ·만조우카(벼) ·밭벼 ·옥수수 ·주트 ·후추 ·콩류를 재배하는 한편, 천연고무 ·유지식물 ·약용식물을 채집하며 생활하고 있는데, 그러한 수확으로 흑인이나 혼혈인이 현금을 얻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아비아도(Aviado) 제도라고 하는 고리대(高利貸) 자본을 앞당겨 쓰기 때문에 수확은 빚을 갚는 데 다 들어가고, 이러한 고리대금망을 형성한 백인층 밑에서 언제나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 한때 호경기를 누렸던 고무 경기(19세기 말~20세기 초)가 말레이시아의 재배 고무에 밀려서 쇠퇴하였다가 다시 활기를 찾았다. 브라질의 미개발 지역으로 정부는 물론 미국 등의 원조로 개발계획이 진행되고 있으며 국가예산의 3%가 이 지역 개발에 투자되고 있다. 아마존 횡단도로가 건설되어, 그 연변에 농업 개척지를 조성하고 부근에서 발견된 철광 ·알루미늄 ·망간 등의 광산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원시생활을 하고 있는 샤반테스 ·라피치 등의 인디오 종족과 아마존의 수상생활자 등 원주민의 생활상이 많이 소개되고 있다. 아마존이 모험을 좋아하는 모든 여행가의 위시리스트의 우선순위에 올라있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세계 최대의 야생 자연은 아직 지구가 둥글다는 것이 밝혀지기 전으로 우리를 데려다 준다. 기술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웅장한 열대우림을 아직 샅샅이 훑어보지는 못했으며, 아직도 많은 부분이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9개 국가, 4,650㎞에 걸쳐 흐르는 아마존 강은 우리의 질문에 대답을 주기보다는 더 많은 물음표를 던진다. 어디를 출발점으로 할 것인가가 그중 하나인데, 대부분의 경우에는 페루의 이퀴토스 항에서 시작해서 10일간 크루즈를 타고 강을 거슬러올라가 리마에 닿는 루트를 택한다. 또는 작은 보트를 타고, 잘 알려지지 않은 지류(支流)를 탐험할 수도 있다. 강둑을 따라 직경이 무려 1.8m나 되는 거대한 수련(睡蓮)이 자라고 있다. 숲으로 트랙이 나 있어서, 탐험을 하거나 원주민 부족을 찾아볼 수 있다. 어둠이 내리면 박쥐, 검은 카이만, 그리고 독이 있는 청개구리를 만날 기회가 찾아올 수도 있다. 진정 일생에 한번은 꼭 해 볼 만한 모험이지만, 책임감 있는 여행사를 통해 예약을 하는 것이 좋다. 아마존 열대우림은 위험한 속도로 파괴되고 있으며, 보존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만 한다. '보토’라고 불리는 강돌고래과 중에서 가장 큰 돌고래이다. 몸 색깔은 푸른빛이 도는 회색이며, 배 부위는 분홍빛이다. 개체 중에는 온몸이 분홍빛을 띠는 경우도 있다. 굵고 긴 부리와 약간 융기한 분기공을 가지고 있다. 이빨은 아래위 턱에 각각 46~70개가 나 있다. 머리에는 멜론 기관이 있어 마음대로 부풀릴 수 있다. 등지느러미가 없는 것이 특징이며, 부리에 딱딱한 털을 가지고 있다. 아마존강돌고래 본문 이미지 1 해양 돌고래류보다 유영 속도가 느려서 시속 1.5~3km로 헤엄친다. 한번에 2분 이상 물속에 있지 않으며 수면 위를 튀어 오르기도 하고 종종 뒤집어서 헤엄치기도 한다. 보통 단독으로 행동하는데, 3~10마리가 무리를 짓는 경우도 있다. 주로 물고기와 게를 잡아먹는데, 강 바닥의 진흙과 함께 섭취하여 진흙은 걸러내고 먹이만 먹는다. 임신 기간은 10~11개월이며, 5~7월 사이의 우기에 몸길이 80cm 정도의 새끼를 낳는다. 주요 분포지는 남아메리카의 아마존강과 오리노코강 유역이며, 생태계의 파괴로 개체 수가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 서식 지역에 따라 체색, 이빨수, 크기 등에 차이가 있으며 최근에 이들은 세 개의 아종으로 나뉘었다. 보호구역에서는 개체수가 풍부한 듯 보이나 모든 분포지역을 포함한 이 종의 전체적인 자료가 부족한 상황이다. 아마존강돌고래에게는 댐건설, 산림벌채, 중금속 오염 등이 위협 요인이 되고 있다. 댐건설과 막대한 산림벌채로 인해 먹이가 되는 어류가 감소하고, 댐이 건설되면서 이루어지는 서식지 파편화에 의해 유전적 다양성이 감소해 장기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 중금속 오염과 어망에 의한 혼획 등도 문제가 되고 있다. 아마존강돌고래는 담수에 제한적으로 서식하는데, 강과 그 지류 그리고 호수 등에서 생활하며 바닷물과 강물이 섞인 기수가 흐르는 지역에서는 서식하지 않는다. 다양한 어류를 먹이로 하며 갑각류와 같은 어패류나 거북이를 먹기도 한다. 소리를 내어 반향정위를 하며, 유영속도는 느리나 얕은 수심과 나무뿌리와 같은 장애물이 많은 곳에서도 기동성이 좋고 수면 위로 뛰어오르는 행동은 드물다. 호기심이 많고 놀이를 즐기며 배에 다가오기도 한다. 대부분 단독으로 관찰되나 두 마리 또는 20마리의 무리가 관찰되기도 한다. 성성숙은 약 5세에 이루어지며 대체적으로 5~8월에 한 마리의 새끼를 출산한다. 임신기간은 약 10~11개월이며 수유기간은 1년 이상이고 암컷은 2~3년에 한번 출산한다. 분홍돌고래-보토(Boto) 민물에 사는 돌고래인 보토(분홍돌고래)를 만나볼 수 있다. 생태계 변화로 인해 지금은 아마존 지역에서만 볼 수 있지만 최근 아마존 지역 개발로 인해 그 수가 점점 줄고 있다고 한다. 두 하천의 만남을 구경하고 돌아가는 뱃길. 뜨거운 태양 아래 바람도 없는 배 위에서 아마존 강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여기저기서 “돌고래다. 고래 떼다!” 하는 함성이 들려왔다. ‘설마 진짜 고래가 하천에 살까?’ 하는 마음도 잠시 진짜 고래를 보았다. 아마존 강에는 오래 전부터 돌고래가 살아왔다는 사실을 책을 통해 알고 있었지만, 직접 눈으로 보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아주 먼 옛날 지구는 지금처럼 여러 조각으로 흩어져 있지 않고 판게아라 불리는 하나의 대륙으로 서로 붙어 있었다. 이 판게아는 지구 내부에서 작용하는 힘에 의해 오랜 지질 시대를 거치면서 오늘날과 같이 여러 대륙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실제로 남아메리카의 동해안과 아프리카의 서해안을 보면 그 해안선의 모양이 퍼즐 조각처럼 잘 들어맞는다. 아프리카와 헤어진 남아메리카의 동쪽은 대서양이 되고 서쪽은 태평양이 되었다. 아마존 강은 남아메리카의 서해안을 따라 길쭉이 뻗은 안데스 산지가 신생대에 융기하기 전에는 태평양으로 흘러갔다. 그래서 현재의 아마존 강에 살고 있는 많은 물고기들도 대서양보다는 태평양 출신이 더 많다고 한다. 안데스 산지가 솟으면서 대륙의 동쪽이 서쪽에 비해 높이가 낮아졌기 때문에 안데스 산맥에서 대서양으로 이어지는 긴 물줄기가 생겨났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아마존 강이다. 신생대 4기에는 전 세계적으로 몇 차례의 빙하기와 간빙기가 교대로 나타났다. 빙하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따뜻했던 시기인 간빙기 때에는 해수면 상승에 따라 아마존 강 상류에 거대한 호수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짠물에 살던 돌고래들도 서서히 환경에 적응해 가면서 ‘하천 돌고래’로 변신하게 되었다. 이 돌고래들은 신체 구조가 바다 돌고래와 다르다고 한다. 모래나 자갈 혹은 바위가 많고 굴곡이 심한 강에서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유전자에 변이가 생긴 것이다. 돌고래의 역사는 아마존 강 역사의 중요한 일부분이다. 아마존 강이 힘차게 굽이치면서 살아 숨쉴 때, 돌고래들도 바다에 대한 향수를 잊고 번성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존 강을 떠나면서 다시 한 번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모습은 여전히 짙은 녹색뿐이었다. 지금은 삼림의 벌채와 같은 작은 녹색의 사라짐도 아마존 강이 훌륭히 보완해 주고 있다. 하지만 농경지의 확대로, 목재의 생산으로, 목장의 개발로, 도로의 건설로 인해 녹색이 더 많이 사라진다면 아마존 강도 그 자태를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녹색의 천국, 아마존 강이 언제나 그 모습을 잃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아마존 강이 이렇게 커지게 된 데는 위치와 지형에 원인이 있다. 아마존 강은 적도 바로 아래에 위치해 있는데, 이곳은 매우 덥고 습한 곳으로 연 강수량이 10,000mm를 넘는 곳도 있다. 우리나라 연 강수량의 약 9배나 되는 많은 양이다. 매일 한두 차례의 소나기가 쏟아지는데, 열대 지역에서 내리는 이런 비를 스콜이라고 한다. 한낮의 뜨거운 열기로 증발한 수증기는 하늘로 올라가 구름을 형성하게 되고, 이 구름이 오후 두세 시쯤 비를 뿌린다. 우리가 여행하는 동안에도 한두 차례의 스콜을 맞은 적이 있다. 늘상 내리는 비라서 그런지, 그곳 사람들은 스콜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우리는 우산을 꺼내고 비를 피하려고 애를 쓰는데, 그곳 주민들은 그저 나무 아래나 처마 밑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많은 양의 비가 흘러 하천으로 모인다. 지도에는 수십여 개의 지류밖에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는 천여 개의 지류가 흐르고 있다. 그 지류들이 나뭇잎 모양으로 연결되어 거대한 아마존 강을 이룬다. 곳곳에 떨어진 수많은 빗방울들이 하천으로 모여들고 그 하천들이 또 모여 거대한 아마존 강 수계가 형성된 것이다. 아마존 강 유역 분지는 남미 대륙의 북쪽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그 모양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납작한 접시 모양이다. 쏟아지는 빗방울들이 경사가 완만한 접시의 가장 낮은 곳으로 모이고 모여 다갈색의 아마존 강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야말로 티끌 모아 태산을 이룬 것이다. 아마존 강은 여러 나라를 거치는 국제 하천이다. 유역의 3분의 2는 브라질에 속하지만 상류의 지류들은 페루, 에콰도르, 볼리비아, 콜롬비아, 베네수엘라에 걸쳐 있다. 사람으로 치면 머리는 페루와 에콰도르에, 두 팔은 콜롬비아와 볼리비아에, 몸통은 브라질에 속해 있는 셈이다. 국적이 다양한 만큼 강의 모습도 지역마다 차이가 많다. 부르는 이름도, 물의 색깔도, 물의 흐름도, 주변의 경관도, 사는 사람들도 다르다. 안데스 산지의 당당함도 아마존 강의 위력 앞에서는 힘을 못 쓰는 것 같다. 페루에 있는 아마존 강의 최상류인 마라뇬 강과 우카얄리 강은 안데스 산맥을 뚫고 동쪽으로 흘러가니 말이다. 만약 조각배를 페루의 우카얄리 강에 띄운다면 그것이 안데스 산맥을 넘어 아마존 강을 따라 수천km를 흘러 대서양까지 갈 수 있다는 얘기다. 페루의 이키토스는 여객선과 화물선이 도달할 수 있는 최상류 지점이다. 현지 사람들은 이키토스부터 네그루 강이 합류하는 마나우스까지를 솔리몽에스 강이라 부르고, 마나우스에서 바다에 이르는 강만을 아마존 강이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마나우스는 아마존 강을 대표하는 도시로 볼 수 있다. 마나우스에서 바라본 아마존 강은 하천이 아니라 바다였다. 멀리 보이는 수평선이 그랬고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이 그랬다. 주변에 산이라고는 없었다. ‘이곳에서는 해발 고도가 가장 높은 곳이 200m 정도 되며, 60m만 되어도 아주 높은 것’이라는 가이드의 설명이 없어도, 강 주위에는 강과 평행하게 달리는 낮은 평지들뿐이었다. 어디가 강의 끝이고 육지의 시작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선착장으로 내려가니 강변에 하천의 최고 수위를 표시해 놓은 벽이 있었다. 연도별로 수위가 오르락내리락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늘상 비가 많이 오는 곳이지만 해마다 차이는 있었다. 평상시 이곳의 강폭은 4~5km 정도인데, 물이 심하게 불어날 때는 10km 정도나 된다고 한다. 워낙 고도가 낮아서 주변의 물이 조금만 불어나도 강의 멀리까지 잠기게 되는 것이다. 유람선에서 바라보니 강물의 색깔이 온통 검은빛이었다. 마나우스는 아마존 강의 지류인 네그루 강변에 위치해 있다. ‘네그루’는 포르투갈 말로 검은색이라는 뜻이다. 일행 중의 누군가가 “브라질은 커피가 유명하니까, 커피 강이라고 부르는 게 좋겠군.” 하자, 또 누군가가 “검은 강이 있으면 흰 강도 있겠네요?” 하며 농담처럼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가이드는 “정말 흰 강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몇 km를 내려가면 ‘흰 강’인 솔리몽에스 강과 네그루 강이 만나는 합류점이 나옵니다. 그곳에서는 검은 강과 흰 강이 만나는 장관이 연출됩니다.”라고 대답했다. 배가 두 하천이 만나는 곳에 이르렀을 때, 모두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흙탕물의 흰 강과 커피색의 검은 강이 서로 섞이지 않고 나란히 하류로 흘러가고 있었다. 수km를 그렇게 분리된 채 흘러가서야 서로 뒤섞인다고 하니 자연의 오묘함에 감탄할 뿐이다. 흘러가는 강물을 찬찬히 바라보니 두 하천의 물이 흘러가는 속도가 달랐다. 흙탕물의 흰 강은 속도가 매우 빠른 반면, 커피색의 검은 강은 유속이 매우 느렸다. 흰 강은 가는 모래나 진흙이 많은 반면에 검은 강은 이런 물질들이 거의 없다. 대신 검은 강은 수많은 낙엽을 우려낸 것 같았다. 이런 두 하천의 차이가 따로, 또 같이 강물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남아메리카 북부에 분포하는 아마존(Amazon) 강은 안데스 산맥에서 시작하여 적도를 따라 동쪽으로 흘러 대서양으로 들어간다. 수량과 유역의 면적이 세계 최대이며 강 부근에는 브라질, 페루, 볼리비아,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기아나 등 여러 나라들이 접해 있다. 아마존 강을 처음 발견한 유럽인은 에스파냐의 핀손(Finzon)으로 그는 1500년에 아마존 강 어귀에 다다랐다고 한다. 1540년 잉카 제국을 무너뜨린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잉카인들이 황금을 숨겨 놓았다는 파이치치(Paichichi)를 찾으려고 동생 곤잘로 피사로와 병사 200명을 아마존으로 보냈다. 당시 아마존에는 파이치치 말고도 엘도라도(El Dorado), 마노아(Manoa)같은 황금 도시가 더 있었다고 알려졌다. 곤잘로 피사로 일행은 8개월이 걸려 험준한 안데스 산맥을 넘어서자 모두가 지쳤다. 그곳에서 곤잘로 피사로는 길을 알아보고 먹을 것을 구해 오라고 오레야나(Francisco Orellana, 1490~1546)와 병사 70명을 밀림으로 보냈다. 밀림을 헤매던 오레야나와 병사들은 얼마 가지 않아 강을 만났고 강을 따라 계속 하류로 내려갔다. 하지만 물살이 워낙 세서 다시 강을 거슬러 올라 갈 수가 없었다. 그들은 하염없이 내려가던 중 용맹한 여자 전사들을 만난다. 여자 전사 부족과 격전을 벌인 오레야나는 이곳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전설적인 여자 무사족인 ‘아마조네스(아마존의 나라)’라고 생각했다. 오레야나는 뜻하지 않게 아마존 강 하구까지 내려갔는데, 그때까지 살아남은 병사들을 데리고 본국(에스파냐)으로 돌아갔다. 한편 오레야나와 헤어졌던 곳에서 기다리던 피사로는 8개월 만에 잉카로 되돌아갔다고 한다. 오레야나는 1541년에 안데스에서부터 아마존 강을 따라 대서양으로 나간 최초의 유럽인이 되었다. 오레야나로부터 아마존 이야기를 들은 에스파냐 왕은 두 번째 탐험을 지시했는데 이번에는 하구에서 상류로 올라가는 길을 선택하라고 했다. 하지만 탐험대는 강어귀의 거센 물살을 견디지 못하고 실패하고 만다. 1559년 세 번째 탐험대가 떠났다. 이번에는 오레야나가 처음에 내려 간 길을 따라 가기로 했지만 대원들끼리 죽고 죽이는 싸움이 일어나서 또 실패하고 만다. 세 번째 탐험이 실패 했을 즈음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포르투갈 등의 해양 강국들이 아마존 강 어귀에 전진 기지를 세우게 된다. 1646년에 아마존 일대와 브라질 전체가 포르투갈에 넘어가고 만다. 영국 육군 대령 포세트(Fawcett)도 아마존 탐험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브라질로 건너가서 오래되고 케케묵은 책에서 아마존 탐험에 대한 자료들을 찾아냈다. 그 책에는 포르투갈의 알바레스(Alvarez)가 1516년 산살바도르에서 폭풍에 휘말렸다가 기적같이 살아났고, 알바레스의 아들 무리베카가 금광을 발견하였으며, 알바레스의 손자인 디아스 때에 이르러서 금광을 발견한 소문이 포르투갈까지 퍼졌다는 기록이 있었다. 포르투갈 왕은 온갖 수단을 써서 금광의 위치를 알려고 노력하였으나 디아스는 끝내 금광 있는 곳을 대지 않고 죽었다고 한다. 이에 굴하지 않은 포르투갈 왕은 두 번에 걸쳐 3천 명을 보냈으나 돌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포세트는 또 다른 책에서 아마존에 대한 기록을 찾았다. 1743년에 포르투갈의 프란시스코(Francisco)가 18명을 이끌고 금광을 찾으려고 5년 동안 헤맸지만 허탕을 치고 포르투갈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프란시스코는 그곳에서 큰 성을 발견했는데, 거기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다고 한다. 프란시스코는 탐험 팀을 재정비하고 또 그 곳에 갔으나 돌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흥미로운 이 기록을 확인해보기 위하여 직접 탐험하기로 한 포세트는 첫 번째 도전에서 죽을 고비만 넘기고 구사일생으로 돌아왔다. 1925년 두 번째 탐험에 도전한 포세트는 대원 30명과 말 20마리를 끌고 출발하지만 또 문제가 부딪친다. 앞으로 나아가던 탐험 팀 중에 인디오들이 더 이상 가지 못한다고 우긴 것이다. 그들은 그곳을 탐험하면 저주를 받아 모두 죽는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반대하는 인디오들을 돌려보내고 포세트와 그의 탐험대는 계속 나아갔다. 그 후 포세트 탐험대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영국 정부와 브라질 정부에서 포세트를 찾으려고 수색했지만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세계의 허파 아마존 강" 1. 아마존의 검은강은 강바닥의 침엽수림때문에 검은색, 물의 온도, 속도, 산도가 달라 황토색의 아마존의 본류와 섞이지 않고 17km를 흐름, 세계 최대의 담수 열도인 아나빌라냐 군도 2. 생태계의 보고 아마존 강은 벌목과 산불로 원시림의 파괴 브라질과 아마존 위치를 알고 '지구의 허파'로 불리우는 아마존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아마존 유역에 위치하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넓고 긴 강인 아마존강, 여러 섬과 호수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아마존 유역의 수상 농업 농가를 방문하여 그곳 사람들의 생활을 보여 준다. 1500년 에스파냐의 탐험가 V.Y.핀손이 아마존강의 하구를 발견하였으나, 본격적인 탐험은 1510∼1541년에 시작되었다. 이 때 페루로부터 피사로가 파견한 에스파냐 군인 오레야나가 안데스산맥을 넘어 아마존 상류에 다다랐으며, 나포강과 아마존의 합류지점에서부터 대서양까지 내려갔다. 도중에 여자 전사(사실은 머리를 길게 기른 남자 전사였을 가능성이 크다)가 참가한 토인의 습격을 받았기 때문에 이 곳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자 무사족(武士族) 아마존의 나라로 생각하였으며, 이 때부터 이 지방을 아마조니아라고 부르게 되었다. 처음으로 아마존강 상류까지 거슬러 올라간 사람은 포르투갈의 군인 테셰이라였으며, 1637∼1639년에 나포강을 거슬러 올라가 에콰도르의 키토에 도달하였다. 20세기에는 많은 과학적 탐사가 시도되었다. 콜럼버스는 그가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많은 인디오들에게 불행한 역사를 안겨 준 장본인이었다. 왜냐하면 콜럼버스는 인디오들을 노예로 판 첫 번째 인물이며, 그의 신대륙 발견으로 인해 평화롭던 인디오들의 삶이 초토화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에스파냐의 코르테스와 피사로를 비롯한 정복자들은 아스테카, 잉카, 마야의 문명과 인디오들을 짓밟았다. 독감에 걸린 선교사 때문에 마을의 전 인디오가 죽어간 일도 있었다. 전염병의 대항 능력이 없는 인디오들에게 결핵, 천연두, 홍역, 콜레라 등을 퍼뜨려 인디오들은 씨가 마를 정도로 죽어갔다. 독벌레가 들끓는 곳에 인디오를 묶어 두고 즐긴다든지, 파티를 하면서 사격 표적으로 인디오에게 총을 쏘고, 인디오의 몸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웃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인디오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사람 사냥꾼”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마존에서 고무를 생산하기 위하여 많은 인디오들이 동원되고 죽어갔다. 그 결과 지금은 인디오 부족들이 많이 사라져서 토박이는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한다. 1555년에 독일에서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이루어져요. 이로써 루터파 신교가 인정받게 돼요. 프란시스코 데 오레야나는 남아메리카 대륙 깊은 곳으로 탐험을 떠났어요. 잉카 제국을 정복한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황금의 도시를 찾으라고 했기 때문이에요. 에스파냐인들은 이미 엄청난 양의 황금을 손에 넣었지만, 어딘가에 더 숨겨져 있을지도 모를 잉카 제국의 황금을 탐냈지요. 황금의 도시, 엘도라도를 찾아서" 당시 잉카 제국에는 황금 도시에 관한 전설들이 떠돌았어요. 그중 하나는 ‘파이티티’ 이야기였지요. 잉카인들은 나라가 망한 뒤 깊은 숲으로 숨었어요. 그런데 그들이 황금을 가지고 파이티티라는 산속의 도시로 갔다는 거예요. 에스파냐를 물리칠 때를 기다리기 위해서 말이에요. 엘도라도’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어요. 엘도라도는 전설적인 원주민 추장의 이름을 딴 도시예요. 그 추장은 1년에 한 번씩 축제를 열어 신비한 의식을 치렀다고 해요. 온몸에 황금 가루를 바르고 춤을 추고 나서 그대로 강물에 뛰어드는 의식이었지요. 그러면 신하들이 황금으로 만든 물건들을 강물에 던졌대요. 이게 정말이라면 강물은 말 그대로 황금물이 되었겠지요. 피사로는 이 황금들이 욕심났어요. 그래서 1541년 2월에 동생인 곤살로 피사로를 대장으로 하는 탐험대를 출발시켰지요. 신화 속 부족의 이름을 강에 붙이다 곤살로 피사로는 안데스 산맥을 넘어 몇 달 동안 밀림을 헤매다가 강에 이르렀어요. 아마존 강 상류의 한 갈래인 지금의 나포 강이었지요. 그사이 식량은 바닥이 났고 대원들은 몹시 지쳤어요. 그래서 피사로는 믿을 만한 부하를 시켜 숲 속을 살피고 식량도 구해 오라고 했지요. 이렇게 해서 1541년 12월, 오레야나는 대원 오십 명을 데리고 탐험에 나섰어요. 하지만 곧 식량도 못 찾고 되돌아가기도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지요. 그러자 기왕 이렇게 된 거 아예 강 끝까지 가 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강을 따라가던 어느 날, 그는 원주민들의 공격을 받게 되었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활을 쏘는 사람들이 모두 여자였어요. 오레야나는 간신히 원주민들의 화살을 피해 달아났어요. 그런데 위험에서 벗어나자 그의 머릿속에는 그리스 신화 속의 아마존 부족이 떠올랐지요. 아마존 부족은 용감하고 활을 잘 쏘는 여전사들이에요. 그는 어쩌면 자기가 그 부족을 만난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자기가 탐험했던 강을 아마존 강이라고 부르기로 했답니다. 세계에서 가장 긴 강의 탐험을 마치다 오레야나는 1542년 8월에 마침내 대서양으로 빠져나왔어요. 갖은 고생 끝에 역사상 최초로 아마존 강을 탐험한 거예요. 그가 탐험한 거리는 무려 5,860킬로미터나 되었답니다. 그동안 곤살로 피사로와 남은 대원들은 가죽신의 밑창까지 뜯어 먹으며 겨우 집으로 돌아갔지요. 오레야나의 이야기는 에스파냐의 왕 카를로스 1세의 귀에까지 들어갔어요. 오레야나는 카를로스 1세를 만나 아마존 강 근처를 탐사하고 개발할 수 있는 권한을 달라고 청했지요. 하지만 왕은 곧바로 답을 주지 못했어요. 그곳은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따라 포르투갈과 나눠 가져야 하는 땅이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오랜 기다림 끝에 오레야나는 드디어 허락을 받아 냈어요. 1545년 5월, 오레야나는 다시 탐험에 나섰어요. 지난번 탐험은 안데스 산맥에서 강줄기를 따라 대서양으로 나오며 이루어졌지요. 하지만 그는 이번엔 대서양에서 아마존 강으로 들어가 상류로 오르기로 했어요. 하지만 이것은 큰 실수였어요. 도저히 전에 왔던 길을 찾을 수가 없었던 거예요. 그 와중에 원주민들까지 공격을 해 댔어요. 결국 그는 아마존 강어귀에서 큰 파도에 휩쓸려 죽었다고 해요. 오레야나의 탐험은 미지의 땅이던 아마존 강 유역을 유럽에 알렸어요. 그 결과, 당시 브라질 지역에서 번성하던 원주민들의 마을은 유럽인들이 몰고 온 감염병으로 사라지고 말았답니다.

Hanson - MMMBop

2017년 11월 29일 수요일

골프,

골프" 코스 위에 정지하여 있는 볼을 클럽으로 쳐서 정해진 홀에 넣어 그때까지 소요된 타수로 우열을 겨루는 경기. 개요" 다수의 홀이 갖춰진 경기장에서 정지된 공을 골프채로 쳐서 홀에 넣는 경기로, 홀에 들어가기까지 걸린 타수가 적은 사람이 경기에 이긴다. 경기는 1번 홀부터 18번 홀까지 차례로 규칙에 따라 클럽으로 공을 치면서 행해지는데, 공을 친 횟수가 적은 사람이 승자가 되며, 18홀의 경기를 1회전 경기라고 한다. 걷는 거리는 약 6km, 소요시간은 3시간 30분에서 4시간이 표준이다. 역사" 골프의 기원은 네덜란드의 아이스하키와 비슷한 놀이가 스코틀랜드로 건너가서 골프로 변화되었다는 설과 스코틀랜드의 양치는 목동들이 지팡이로 돌을 쳐서 구멍에 넣던 것이 골프로 발전되었다는 설, 그리고 로마제국이 스코틀랜드를 정복하였을 때 군사들이 골프와 비슷한 놀이를 하던 것이 스코틀랜드에 남아 골프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현재와 같은 골프 경기가 시작된 것은 15세기 중엽 스코틀랜드에서 비롯되었다. 1575년 스코틀랜드의회는 골프에 너무 열중하여 국방을 위한 활쏘기훈련을 소홀히 한다 하여 골프 금지령까지 내렸으나, 점점 번성하여 왕후나 귀족들도 흥미를 가지고 골프를 즐기게 되었다. 그 뒤 1754년 22명의 귀족들이 모여서 세인트앤드류스 골프클럽(Saint Andrews Golf Club)을 형성하였고, 1834년 윌리엄 4세가 세인트앤드류스 골프클럽에 로열앤드에인션트 골프클럽(Royal and Ancient Golf Club)이라는 명칭을 붙여 줌으로써 이 기관은 영국 전역의 골프 클럽을 통합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13개 항목의 골프 규칙이 성문화되었다. 1860년 처음으로 전 영국 오픈 선수권대회가 프레스트 위크 코스에서 개최되었고,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골프는 영국에서만 성행했다. 그 뒤 미국을 비롯한 유럽 각국과 일본, 한국 등지에도 보급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미국의 경우 1888년 스코틀랜드 출신인 레이드가 뉴욕의 욘커스(Yonkers)에 처음으로 세인트앤드류스 골프클럽을 만든 뒤, 1894년 미국 골프협회가 설립되면서 1930년대에는 영국을 압도하는 우수한 선수들을 배출하게 되었다. 한국의 골프역사" 우리나라 골프는 1900년 정부 세관관리로 고용된 영국인들이 원산 바닷가에 있는 세관 구내에 6홀의 코스를 만들어 경기를 한 것이 시초이다. 그 뒤 1919년 5월 효창공원에 미국인 댄트(Dant,H.E.)가 설계한 9홀의 코스가 생겼고, 1924년 청량리에 새로운 코스가 생겼으나 주로 외국인들의 경기로 이루어졌다. 우리나라 골프가 본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영친왕(李垠)이 골프장 대지로 군자리(성동구 능동, 현 어린이대공원) 땅을 무상으로 대여해 주고, 경기장 건설비로 2만 원을 하사하여 만든 전장 6,500야드의 18홀 서울컨트리클럽이 1929년 개장되면서부터이다. 일반인에게 골프가 보급된 것은 1924년 경성골프구락부가 결성되면서부터인데, 이 때 골프를 가르칠 지도자가 없어 1933년 일본에서 진청수(陳淸水)·나카무라(中村兼吉) 등을 서울에 초청하여 경기지도도 받고 시범경기도 하였다. 그 때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박용균(朴容均)·장병량(張秉良) 등 약 50여 명의 골퍼가 있었다. 1937년 조선골프연맹이 결성되었고 1941년 우리 나라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연덕춘(延德春)이 일본 오픈대회에서 26세의 나이로 우승하였다. 그 뒤 광복 및 6·25전쟁으로 침체되었던 골프는 1953년 서울컨트리클럽이 재건되면서 본격적으로 보급되어,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에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시설 코스의 구조와 명칭 골프장은 대개 18개의 호로 이루어져 있으며, 18홀의 골프장이 차지하는 면적은 약 25만 평에서 35만 평의 광활한 지역인데, 주위는 수목이 우거지고 경기하는 장소는 잔디가 고르게 깔려있다. 코스의 구조 일반적으로 골프코스는 파 5홀 4개, 파 4홀 10개, 그리고 파 3홀 4개의 총 18개 홀과 72타로 구성되어 있다. 전반(out course) 9개 홀과 후반(in course) 9개 홀로 나누어진다. 코스의 형태 코스의 형태별로는 스트레이트형, Dog-leg-right형(오른쪽으로 굽은형), Dog-leg-left형(왼쪽으로 굽은 형) 등으로 구분된다. 홀의 구조 티잉 그라운드 : 매홀 첫 샷을 날리는 지역. 흰색마크는 대회시합용(back tee), 노란색은 일반 남자골퍼용(regular tee), 붉은색은 여성골퍼용(ladies tee)이다. 워터 해저드 : 코스내의 호수, 연못, 습지, 냇물 등 의도적으로 설계된 장애물. 페어웨이 : 티잉 그라운드에서 그린까지 이어지는 잔디가 잘 깎여있는 지역, 모든 골퍼들은 티샷을 이 지역에 떨어뜨리고자 노력한다. 러프 : 잔디가 덜 다듬어진 풀이 긴 지역, 샷을 하기가 까다롭다. 크로스벙커 : 페어웨이 옆으로 길게 늘어져 있는 벙커, 아무래도 이곳에 떨어지면 비거리가 많이 나오는 샷을 하기는 어렵다. 가드벙커 : 그린 주변의 여러 곳에 배치되어 있는 움푹 패인 모래 웅덩이, 대부분의 골퍼들은 많은 부담을 가지는 곳이며 긴장하게 되어 미스 샷도 속출한다. 홀 : 홀의 직경은 108mm이고 깊이는 100mm 이상이다. 한 뼘도 채 안 되는 작은 원통에 무게 45.93g, 직경 42.67mm 크기의 볼을 넣어야지 한 홀이 끝난다. 클럽 골프 클럽은 기본적으로 우드 1, 3, 4, 5번, 아이언 3, 4, 5, 6, 7, 8, 9번, 피칭 웨지, 샌드웨지, 그리고 퍼터를 포함한 14개의 클럽이 풀 세트로 이용된다. 클럽의 하프 세트는 우드 1, 3번, 아이언 3, 5, 7, 9번, 샌드웨지, 그리고 퍼터가 주로 이용된다. 볼 골프 규칙에는 공의 중량도 45.93g 보다 무겁지 않고, 직경은 42.67mm 보다 작지 않도록 규정하고 있다. 골프공의 선택 기준은 공의 크기, 공의 구조, 경도 등이다. 공의 구분은 공의 크기에 따라 직경이 41.15mm인 작은 공과 42.67mm인 큰 공으로 구분된다. 골프공의 표면에는 많은 홈이 패어져 있는데, 이것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딤플(Dimple)이라고 해서 공기 저항을 없애고 볼을 올리는 힘을 높게 하는 작용력이 있다. 골프복 골프복은 무엇보다도 스윙하기 편한 활동적인 옷이어야 한다. 그리고 잔디 위에서 자연과 더불어 경기가 이루어지므로, 안전을 위해 주위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원색적인 옷도 선호된다. 또한 비옷이나 겨울철의 찬바람을 막기 위한 옷도 필요하다. 골프화 골프장에서는 반드시 골프화를 착용해야 하는데, 골프화는 잔디를 보호하고 스윙을 할 때 몸의 균형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스파이크가 달린 신발이다. 골프장갑 골프장갑은 손바닥에 물집이 생기거나 공을 칠 때 그립이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하며 일반적으로 오른손잡이의 경우 왼손에만 장갑을 착용한다. 골프화 골프장에서는 반드시 골프화를 착용해야 하는데, 골프화는 잔디를 보호하고 스윙을 할 때 몸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스파이크가 달린 신발이다. 골프장갑 골프장갑은 손바닥에 물집이 생기거나 공을 칠 때 그립이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하며 일반적으로 오른손잡이의 경우 왼손에만 장갑을 착용한다. 경기 방법 골프 게임은 규칙에 따라 연속적인 스트로크로 볼을 쳐서 홀(hole)에 넣을 때까지 플레이 함으로써 이루어지는데, 크게 나누어서 스트로크 플레이(stroke play)와 매치 플레이(match play)의 2가지가 있다. 스트로크 플레이(Stroke Play) 스트로크 플레이(stroke play)는 정해진 수의 홀에서 총타수의 다과로 승부를 정하는 방법으로서 많은 인원이 참가해도 단시일에 승부를 결정할 수 있으므로, 대부분 공식경기에서는 이 방법을 채택하고 있다. 예를 들어, 18홀(27홀, 36홀)의 스트로크 점수에서 A가 81, B가 85점이라면 A의 승리가 된다. 이것은 핸디캡이 없는 스크래치(scratch)의 경우이고, 일반적으로는 총 스트로크에서 핸디캡(under handicap)경기라 부른다. 위의 경우 A의 핸디캡이 5이고 B가 7이라면 A의 네트 스코어(net score)는 76이고 B는 78이 되어 A의 승리이다. 1위의 점수가 같을 경우는 그 경기대회의 규칙에 따라 한 홀씩 승부가 날때까지 연장전을 하는 것과 백 카운트(back count)로 이미 경기를 끝낸 전 홀의 스코어, 또는 연상의 경기자나 핸디캡이 적은 사람, 최초 9홀의 스코어가 좋은 사람을 우승자로 하는 경우가 많다. 매치 플레이(Match Play) 매치 플레이(match play)는 매홀 마다 승자를 결정하고, 18홀을 끝낸 다음 이긴 홀수가 많은 사람을 승자로 결정하는 방법이다. 현재는 대개 스트로크 플레이의 추세이지만, 근대골프가 발생할 당시는 매치 플레이로 경기를 했다. 원칙적으로 플레이어 두 사람이 1대1의 경기인데, 1홀 이겼을 때 1 up, 1홀 졌을 때 1 down, 그리고 무승부는 하프(half)라고 부르며, 승부가 같은 수일 경우 올 스퀘어(all square)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A와 B가 경기를 할 때 16번 홀을 끝낸 상태에서 A가 3 up(B보다 이긴 홀수가 3개 많다)이면 나머지 2홀을 B가 모두 이겨도 1홀차 때문에 A가 B 어느 쪽이든 이긴 홀수와 나머지 홀수가 같을 경우 다음 플레이하는 홀을 도미 볼(dormy ball)이라고 부르고, 이긴 홀수와 진 홀수가 동수일 때는 도미 업(dormy up)이라 하며, 1홀만 취하면 승부가 결정될 때를 업 도미(up dormy)라고 한다. 기본 기술 (1) 오버래핑 그립 가장 많이 사용하는 그립방법이다. 오른손의 새끼손가락을 왼손의 집게손가락 위에 겹쳐서 잡는 형으로, 먼저 클럽의 손잡이를 왼쪽 손바닥에 비스듬히 놓고 세손가락을 골프채 자루에 감는다. 다음 집게손가락을 오무려서 방아쇠를 당기는 모양을 하고 클럽을 단단히 쥔다. 이어서 클럽의 손잡이를 오른손 중지와 약지의 중앙에 놓고 왼손 집게손가락의 마디위에 오른손 새끼손가락이 겹치도록 하여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으로 손잡이를 가볍게 잡는다. (2) 인터로킹 그립 왼손 집게손가락과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깍지 끼워 잡는 형으로 손이 작거나 손의 힘이 약한 사람에게 적당한 방법이다. (3) 베이스볼 그립 내추럴 그립이라고도 하며, 야구배트를 쥘 때와 같이 열 손가락이 다 손잡이에 걸려 있으면서 손바닥이 서로 마주보는 형으로, 손이 아주 작은 성인이나 어린이에게 적당한 방법이다. 정의 특정의 경기장에서 정지된 공을 골프채(club)로 쳐서 정해진 구멍(hole)에 넣고, 그 타수가 많고 적음으로 승부를 겨루는 운동경기. 내용 경기는 1번 홀부터 18번 홀까지 차례로 규칙에 따라 클럽으로 공을 치면서 행해지는데, 공을 친 횟수가 적은 사람이 승자가 되며, 18홀의 경기를 1회전 경기라고 한다. 걷는 거리는 약 6㎞, 소요시간은 3시간 30분에서 4시간이 표준이다. 골프의 기원은 네덜란드의 아이스하키와 비슷한 놀이가 스코틀랜드로 건너가서 골프로 변화되었다는 설과 스코틀랜드의 양치는 목동들이 지팡이로 돌을 쳐서 구멍에 넣던 것이 골프로 발전되었다는 설, 그리고 로마제국이 스코틀랜드를 정복하였을 때 군사들이 골프와 비슷한 놀이를 하던 것이 스코틀랜드에 남아 골프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현재와 같은 골프경기가 시작된 것은 15세기 중엽 스코틀랜드에서 비롯되었다. 1575년 스코틀랜드의회는 골프에 너무 열중하여 국방을 위한 활쏘기훈련을 소홀히 한다 하여 골프금지령까지 내렸으나, 점점 번성하여 왕후나 귀족들도 흥미를 가지고 골프를 즐기게 되었다. 그 뒤 1754년 22명의 귀족들이 모여서 세인트앤드류스 골프클럽(Saint Andrews Golf Club)을 형성하였고, 1834년 윌리엄 4세가 세인트앤드류스 골프클럽에 로열앤드에인션트 골프클럽(Royal and Ancient Golf Club)이라는 명칭을 붙여 줌으로써 이 기관은 영국 전역의 골프클럽을 통할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13개 항목의 골프규칙이 성문화되었다. 1860년 처음으로 전 영국오픈선수권대회가 프레스트위크 코스에서 개최되었고,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골프는 영국에서만 성행했다. 그 뒤 미국을 비롯한 유럽 각국과 일본·한국 등지에도 보급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히, 미국의 경우 1888년 스코틀랜드 출신인 레이드가 뉴욕의 욘커스(Yonkers)에 처음으로 세인트앤드류스 골프클럽을 만든 뒤, 1894년 미국 골프협회가 설립되면서 1930년대에는 영국을 압도하는 우수한 선수들을 배출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골프는 1900년 정부 세관관리로 고용된 영국인들이 원산 바닷가에 있는 세관 구내에 6홀의 코스를 만들어 경기를 한 것이 시초이다. 그 뒤 1919년 5월 효창공원에 미국인 댄트(Dant,H.E.)가 설계한 9홀의 코스가 생겼고, 1924년 청량리에 새로운 코스가 생겼으나 주로 외국인들의 경기로 이루어졌다. 우리나라 골프가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영친왕(李垠)이 골프장 대지로 군자리(성동구 능동, 현 어린이대공원) 땅을 무상으로 대여해 주고, 경기장 건설비로 2만 원을 하사하여 만든 전장 6,500야드의 18홀 서울컨트리클럽이 1929년 개장되면서부터이다. 일반인에게 골프가 보급된 것은 1924년 경성골프구락부가 결성되면서부터인데, 이 때 골프를 가르칠 지도자가 없어 1933년 일본에서 진청수(陳淸水)·나카무라(中村兼吉) 등을 서울에 초청하여 경기지도도 받고 시범경기도 하였다. 그 때 우리 나라 사람으로는 박용균(朴容均)·장병량(張秉良) 등 약 50여 명의 골퍼가 있었다. 그 뒤 1937년 조선골프연맹이 결성되었고 1941년 우리 나라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연덕춘(延德春)이 일본 오픈대회에서 26세의 나이로 우승하였다. 그 뒤 광복 및 6·25전쟁으로 침체되었던 골프는 1953년 서울컨트리클럽이 재건되면서 본격적으로 보급되어, 1986년 서울아시아경기대회에서 정식 종목으로 선택되었다. 코스(경기장)는 18홀을 기준으로 하여 전체 길이 5,500∼6,300m(6,000∼7,000야드), 너비 100∼180m, 전체 넓이 66만㎡(20만 평)를 필요로 한다. 1번에서 9번 홀까지를 아웃 코스(out course:going out 준말), 10번에서 18번 홀까지를 인 코스(in course:come in 준말)라고 부른다. 홀의 구성은 길이 229m 이하인 파(par) 3의 쇼트 홀(short hole) 4개, 230∼430m까지의 파 4인 미들 홀(middle hole) 10개, 430m 이상인 파 5의 롱 홀(long hole) 4개로 되어 있다. 파라는 것은 표준 타수로 파 4이면 4번에 홀인(hole in)하는 것을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18홀×4=72파가 되는 것이다. ① 팅 그라운드(teeing ground):생략해서 티(tee)라고도 하며, 플레이 하는 홀의 출발점으로 주위의 지면보다 툭 튀어 올라온 평평한 장소이다. 이 팅 그라운드 위에는 두 개의 마크가 놓여 있어 이를 연결하는 선을 가로로 하고, 마크 뒤쪽 2 클럽 길이의 선을 세로로 한 직사각형의 구역 안에서 티 펙(tee peg) 위에 볼을 올려 놓고 제1타를 친다. 팅 그라운드는 홀에서부터 먼 순서로 챔피언 티(champian tee:back tee), 레귤러 티(regular tee:frout tee), 레디스 티(ledies tee:여자 및 초등학생)라는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② 페어 웨이(fair way):팅 그라운드와 그린(green)을 연결하는 홀의 중앙 부분으로 잔디를 잘 가꾸어 놓은 곳이다. 페어 웨이는 올바르게 친 공의 정상적인 통로라는 뜻이다. ③ 러프(rough):페어 웨이 이외의 정지(整地:정리한 땅)되지 않은 지대로, 잡초나 수림으로 형성되어 타구하기 힘든 곳이다. ④ 해저드(hazard):부정확한 타구를 억제하기 위하여 특별히 설치된 장해물 또는 함정을 말한다. 샌드 벙커(sand bunker)는 트랩(trap)이라고도 하며, 움푹 팬 곳에 모래를 깔았는데, 공을 치기가 어렵고 볼의 상태를 바꿀 수도 없다. 또 볼을 칠 때 클럽을 지면에 댈 수도 없어 타구하기가 힘든 곳이다. 벙커는 위치에 따라서 페어 웨이 좌우에 배치되어 있는 사이드 벙커(side bunker), 페어 웨이 중앙까지 걸쳐 있는 크로스 벙커(cross bunker), 그린 주위의 가드 벙커(guard bunker)로 나누어진다. 워터 해저드(water hazard)는 코스 안에 있는 물에 의한 장해지역으로, 바다·강·연못·냇물·배수로, 뚜껑이 안 덮인 수로 및 이와 비슷한 수역(水域)을 말한다. 황색 말뚝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볼이 빠졌을 경우 1타를 부가하여 다시 친다. ⑤ 그린(green):평균 660∼990㎡(200∼300평)의 넓이에 잔디를 깔아 융단처럼 손질한 지역으로, 지름 10.79㎝의 구멍(hole)을 파고 그 위치를 멀리에서도 식별할 수 있도록 중앙에 기(旗)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 볼을 올린 다음 퍼터(putter)로 쳐서 홀 인하면 그 홀의 경기는 끝나는 것이다. ⑥ 아웃 오브 바운드(out of bounds):플레이가 허용되지 않는 지역, 즉 장외(場外)를 말하며 줄여서 오비(OB)라 한다. 볼이 이곳에 들어가면 페널티 1타가 부가된다. (1) 클럽(club) 볼을 치는 타구봉으로 일반적으로 ‘골프채’라고 한다. 타구면(打球面)이 있는 헤드(head) 부분이 나무로 된 우드(wood)와 특수 스테인레스로 된 아이언 (iron)이 있다. 경기에 참가하여 사용할 수 있는 클럽은 14개 이내로 제한되어 있다. 볼을 멀리 보내기 위해서는 각도가 적고 긴, 즉 숫자가 적은 클럽을 사용하고, 가까운 거리일 때는 숫자가 많고 각도가 수평에 가까운 클럽을 사용한다. 일반적으로 팅 그라운드에서 제1타를 칠 때는 드라이버(driver)라고 불리는 우드 1번을 사용하고, 제2타는 거리에 따라서 우드나 숫자가 적은 아이언 클럽을 사용하고, 그린 가까이에서는 피칭 웨지(pitching wedge)를 사용하며, 그린 주위의 벙커에서는 샌드 웨지(sand wedge)를 사용한다. 클럽의 종류와 날아가는 거리는 앞의 그림과 같다. (2) 볼(ball) 볼의 크기는 골프 규칙에 따라서 지름이 41.148㎜보다 크고 무게는 45.92g보다 가벼워야 한다. 지름에 따라 스몰 사이즈와 라지 사이즈로 구분한다. 3) 기타 용구 클럽을 넣어 가지고 다니는 캐디 백(cadde bag)과 밑창에 스파이크가 박혀 있는 골프화와 보통 왼손에 착용하는 가죽장갑이 필요하다. 복장은 활동하기에 간편하고 원색인 옷을 많이 착용하며 모자도 필수품의 하나가 된다. (1) 스트로크 플레이(stroke play) 미리 정해진 홀 수의 점수를 종합하여 숫자가 적은 사람이 이기는 경기방식으로, 경기중 잘못 친 것이나 반칙 등의 타수와 벌점도 포함된다. 보통 국제경기나 선수권을 제외하고는 핸디캡(handicap)이 인정되나 이를 인정하지 않고 총타수가 그대로 점수가 되는 경우로 스크래치 플레이(scratch play)라고 한다. 2) 매치 플레이(match play) 매 홀마다 그 홀의 타수로 승부를 정하는 방법으로 이긴 홀의 수가 같을 때는 재경기를 한다. 1홀의 타수차가 아무리 많아도 1홀을 이긴 사람은 1업(up), 진 사람은 1다운(down)으로 계산한다. 3) 핸디캡(handicap) 누구나 평등한 조건으로 경기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든 제도로서, 골프를 오래 하여 잘 치는 사람과 초보자도 함께 할 수 있도록 초보자에게 핸디캡을 주고 있다. 핸디캡의 원칙은 우선 코스에서 산출된 기준 타수(par)를 정해서 그것을 어느 정도 웃도는 타수로 라운드(round)할 수 있는지, 평균 타수를 산출한 뒤 파와의 차이가 그 사람의 핸디캡이 된다. 예를 들어, 핸디 16이라고 하면 18홀 기준 파가 72이므로 72+16=88 정도의 점수로 플레이할 수 있는 실력을 말한다. 즉, 88타로서 72타와 같은 수로 인정된다. 핸디 16인 갑과 핸디 18인 을이 경기를 하여 갑은 85타, 을은 92타의 점수가 나왔다고 하면, 갑은 85-16=69타, 을은 92-18=74타로서 갑이 승자가 된다. 이 경우 85·92타를 그로스 스코어(gross score)라고 하고, 69·74타를 네트 스코어(net Score)라고 한다. 클럽이라고 부르는 골프채로 작은 공을 쳐서 홀에 넣을 때까지 타수가 적은 사람이 승리하는 경기. 그 유래에 대해서는 몇 가지 주장이 있는데, 네덜란드의 헤드 콜벤이라는 하키 비슷한 놀이가 14세기 무렵 스코틀랜드로 전해져 골프로 발전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1552년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루스대학 도서관에서 양피(羊皮)에 적힌 골프에 관한 기록이 발견됐는데, 이것이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문헌이다. 그 밖에도 골프에 관련된 역사적 기술은 거의 모두 스코틀랜드 의회와 궁정의 기록에서 발견되었다. 1744년 골프 협회가 처음 조직된 곳 역시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였다. 이어서 1754년 스코틀랜드에서 13조의 골프 규칙이 성문화된 뒤에는 그 인기가 잉글랜드에도 전해져 골프 클럽이 결성되었다. 그 후 영국에서는 국왕 월리엄 4세가 적극적으로 골프를 후원해 경기 규칙이 정비되고 선수권 대회 등을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당시에는 가죽 재질의 작은 주머니에 새의 깃털을 집어넣어 골프공을 만들었다. 그리고 샤프트와 헤드를 모두 나무로 만든 클럽으로 그 공을 쳤는데, 1846년이 되어서야 고무로 만든 골프공이 고안되었다. 그 덕분에 비거리가 크게 늘어나고 잇달아 금속제 클럽이 생산되면서 골프 기술이 빠르게 발전했다. 상금을 내건 골프 경기가 등장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1860년 제1회 전영(全英)오픈, 1885년 전영아마추어선수권대회가 열리면서 영국 골프계는 바야흐로 황금시대를 맞이했다. 한편 스코틀랜드 이민자들에 의해 골프가 도입된 미국에서는 1888년에 이르러 처음 골프 클럽이 결성되었다. 하지만 유럽에 비해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과 같은 골프공의 원형을 개발하는 등 현대 골프는 미국에서 급속히 발달했다. 미국은 일찍이 1916년 PGA(미국프로골프협회)를 창설하면서 세계 최고의 골프 무대로 성장할 기반을 탄탄히 다졌다. 그 결과 전영오픈과 전영아마추어선수권대회에서 미국 선수들이 우승하는 성과를 낳았다. 특히 1930년 미국의 보비 존스는 전영오픈과 전미(全美)오픈, 전영아마추어선수권대회와 전미아마추어선수권대회를 석권하는 기염을 토했다. 또한 1932년에는 USGA(미국골프협회)에서 지정한 골프공이 영국과 벌인 10년간의 논쟁에 종지부를 찍고 공식 용구로 채택되기도 했다. 게다가 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 골프계가 침체되면서 골프의 주도권은 완전히 미국으로 넘어갔다. 그 후 골프는 제2차 세계대전 후 텔레비전이 널리 보급되면서 또다시 전환점을 맞이했다. 프로페셔널 경기에 막대한 상금이 제공되어 프로 경기를 중심으로 한 골프 붐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런 분위기에서 자연스레 스타도 탄생해 바이런 넬슨, 샘 스니드, 벤 호건 등이 대중들로부터 큰 박수를 받았다. 그리고 1970년대 들어 빅(big)3로 불리는 아놀드 파머, 잭 니클라우스, 개리 플레이어가 등장했으며 그 인기는 그레그 노먼, 닉 팔도, 닉 프라이스 등으로 이어졌다. 2000년대 들어서는 혜성처럼 나타난 타이거 우즈가 세계 골프계를 천하 통일했다. 1900년 무렵 골프가 전해진 한국에서도 여성 골프의 스타 박세리 등을 배출했다. [경기 방식]골프 경기는 크게 ‘스트로크플레이’와 ‘매치플레이’로 구분된다. 스트로크플레이는 정해진 홀에서 기록한 모든 타수를 더해 그 수가 적은 쪽이 승자가 되는 경기다. 그와 달리 매치플레이는 각 홀마다 승부를 가려 승리한 홀이 많은 선수가 최종 승자가 되는 방식이다. 요즘은 우승자를 가리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매치플레이보다 스트로크플레이 형식으로 치러지는 경기가 대부분이다. 선수들끼리 타이틀을 놓고 벌이는 대회가 아닌 경우 골프에는 ‘핸디캡’이라는 독특한 규칙이 적용된다. 이것은 실력과 상관없이 누구나 즐겁게 골프를 즐기도록 만들어진 룰이다. 핸디캡은 0에서 30까지 있는데, 실력이 좋을수록 그 수치가 낮아진다. 예를 들어 전체 파72인 홀에서 평균 100타를 치는 사람의 핸디캡은 28이 된다. 그 사람은 경기 결과 자신이 기록한 총 타수에서 28을 빼므로, 만약 컨디션이 좋아 95타를 쳤다면 순위를 판가름할 때는 67타로 인정받는다. 골프 경기가 이루어지는 정규 코스는 18홀이 기본이다. 전반의 1~9번을 아웃코스, 후반의 10~18번을 인코스라고 하는데 그 거리와 난이도에 따라 ‘파(par)’를 정한다. 파란, 기준 타수라는 의미로 파4홀에서는 공을 4번 쳐서 홀에 넣는 것이 기준이다. 한 홀에서 파보다 하나 적은 타수로 홀에 넣는 것은 버디, 2타 적게 넣는 것은 이글, 3타 적게 넣는 것은 알바트로스라고 한다. 그와 달리 한 홀에서 파보다 하나 많은 타수로 홀에 넣으면 보기, 2타 많게 넣으면 더블보기, 3타 많게 넣으면 트리플보기가 된다. 또 아주 드물지만, 한 홀에서 1타로 공을 넣는 것은 ‘홀인원’이라고 한다. [경기장]18홀 골프장의 경우 흔히 전체 파72 정도로 설계되는데, 파70~파74인 것도 적지 않다. 골프장은 드넓은 코스에 숲이나 벙커, 언덕, 연못 같은 장애물을 배치해 게임의 재미를 높인다. 공식 선수권 대회를 열 수 있는 코스는 18홀 전 거리가 5,940미터 이상 되어야 한다. 또한 코스 면적도 최소한 100ha 이상 필요하다.

우리고유의 식품 재래된장.醬 1 (발효)

재래된장.醬 우리 민족의 식생활에서 간장, 된장은 없어서는 안될 기본부식물의 하나이다. 그것은 간장과 된장이 직접 부식으로 이용될 뿐 아니라 부식의 맛을 돋우어주는 주원료이기 때문이다. 장 특히 간장은 음식물의 간을 맞추는 데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식품으로서 장맛이 어떠한가에 따라 부식의 맛이 좌우되었다. 한국은 농업국가로서 곡물로 조미료를 만드는 일이 발달하였다. 이 곡물 조미료가 곧 장이다. 장은 간장 ·된장 ·고추장이 주가 되고, 장을 만드는 주재료는 콩이다. 이 밖에 보리쌀 ·밀쌀 ·밀가루 ·멥쌀 ·찹쌀도 배합하여 쓴다. 짠맛을 내는 주재료는 소금이고, 좋은 물이 있어야 한다. 한국음식의 간은 소금 ·햇간장 ·중간장 ·진간장 ·된장 ·고추장 등을 음식재료와 조리법에 맞추어 쓴다. 가정에서 담그는 장은 주택이 서구화됨에 따라 차차 담그기 어려워지는 형편이므로 식품산업체의 공장에서 제조하여 판매하는 여러 종류의 장이 유통된다. 콩메주장이 아닌 멸장은 도서지방 ·해안지대에서 만들어 쓰고 있는데, 멸치젓을 담가 생젓국을 떠 내고 나머지에 물과 소금을 넣고 달여서 깨끗하게 밭쳐 콩간장처럼 쓰는 방법이다. 식물성 간장에 비해 동물성 간장이 맛은 더 좋으나 해를 묵히면 맛이 없어진다. 콩간장은 햇간장일 때 빛이 연하여 국에 간을 맞추기에 좋으나 해를 묵히면 점점 농축되어 빛이 진하여지므로 찌개 ·조림 등에 쓰는 편이 좋으며, 이를 진장(陳醬:묵은간장)이라 한다. 된장 ·고추장은 여러 해 묵으면 되어지고 맛이 없어진다. 동양에서 전통적으로 만들어온 단백질 분해 염장 발효식품을 총칭하는 말. 좁은 의미로는 한국음식의 기본 조미료인 간장․된장․고추장을 총칭하는 말이다. 『제민요술(齊民要術)』에 수록된 장을 주재료 별로 분류하면 밀과 콩으로 담근 곡장(穀醬), 육류로 님L근 육장(肉醬), 어류와 갑각류로 만든 어장(魚醬)으로 나눌 수 있다. → 육장 → 어장 메주쑤기" 정의 간장, 된장, 고추장 같은 장(醬)을 담그는 기본 재료인 메주를 만드는 일. 메주는 콩[大豆]을 삶아 찧어서 일정 크기의 덩어리 형태로 만든다. 이칭 메주는 말장(末醬), 밀조(密祖), 훈조(燻造), 장국(醬麴), 며조, 메조, 며주 등으로 일컬어졌으며, 메주의 종류는 용도, 장소, 형태, 재료에 따라 다르게 불린다. 장(醬)을 담그니까 장메주라 하며, 간장용메주와 고추장메주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궁중용 진장을 만들 때 절에서 만든 절메주로 담갔다. 절메주는 집메주보다 4배 가량 크고 넓적하게 만든다. 삶은 콩을 찧어 덩이로 만든 메주를 떡메주라 하며, 검정콩으로 만들면 검정콩메주라 한다. 내용 메주쑤기는 보통 10~12월에 이루어지며, 특히 입동(立冬) 무렵인 음력 10월 또는 동짓달에 쑨다. 메주 쑤는 시기는 장의 종류나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다.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에서는 메주쑤기를 11월에 하고 있으며, 궁중 진장(眞醬)용 메주인 절메주는 음력 4월 무렵, 집메주는 음력 10월이나 동짓달에 쑤었다. 순창에서는 고추장메주를 여름철인 8~9월, 처서 무렵에 쑨다. 서울, 경기, 경상, 제주에서는 음력 10월 무렵, 충청도에서는 음력 8~10월 무렵, 전라도 구례에서는 음력 10월이나 동지에 쑨다. 무주는 동짓달, 부안은 가을쯤 메주를 쑤기도 하며, 남원, 평안도에서 정월에 메주를 쑤기도 한다.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 11월령에서는 “부녀야 네 할 일이 메주 쑬 일 남았구나 익게 삶고 매우 찧어 띄워서 재워 두소”라고 하였으며, 『증보산림경제』에는 “콩을 정선하여 한 밤을 수침(水浸)한 뒤에 건져서 란자(爛煮)하고 절구에 찧어서 손으로 중(中)수박 크기의 덩어리를 만들고, 칼로 반을 잘라서 그 반쪽을 칼로 제며 반월형의 1촌(寸) 두께의 메주편을 만든다.”라고 하였다.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는 “처음에 콩을 삶을 때에 물을 넉넉히 부어 솥바닥에 눌러 붙지 않게 하고 콩을 작은 그릇에 불리면 그릇이 터지오, 조리로 일어 가마나 솥에 붓고 끓어 넘치거든 뚜껑을 열지 말고 그냥 물만 넘기고 삶으라, 뚜껑을 자주 열면 콩도 넘어 나올 뿐 아니라 콩이 덜 무르나니라. 뜸들여 잘 무르게 한 후에 퍼내어 물이 빠지거든 깍지가 없도록 잘 찧어서 메주를 보사기만하게 조금 납작하게 만들어 하나씩 펴놓고 하루 동안 안팎을 말린 후에 겉이 꾸덕꾸덕해지거든 멱서리나 섬이나 둥구미에 띄우되 솔잎을 깔고 한 켜씩 메주를 늘어놓아 ……(중략)…… 잘 살펴 띄우라.”라고 하였다. 보통 한 가정에서 4~5말의 콩으로 메주를 쑤는데, 이것을 콩 한 되 또는 두 되로 메주 한 개 정도가 되도록 빚어 단단하게 만든다. 요즘은 1~2말 정도 메주를 쑤기도 한다. 메주쑤기 과정은 콩 선별하기(선별), 씻기(수세), 물에 담가 콩 불리기(수침), 콩 익히기(삶기, 찌기), 삶은 콩 찧기, 성형, 겉말림, 띄우기 순으로 이루어진다. 일반적인 메주쑤기 과정은 아래와 같다. 대두(大豆) 또는 메주콩이라고도 하는 콩을 준비한다. 주로 황금콩, 장엽, 태광 같은 백립종 품종의 콩이다. 벌레가 먹은 것이나 썩은 것을 골라내고 좋은 콩을 선별한 후, 깨끗한 물에 잘 씻어서 하루 정도 물에 담가 충분히 불려 놓았다가 콩을 익힌다. 콩을 익히는 방법은 물에 삶거나 시루에 안쳐 찌기도 하지만 주로 가마솥에 넣고 삶아 익힌다. 콩을 삶고 나서 처음의 2~3배 부피로 늘어나므로 양을 잘 조절한다. 물기를 뺀 콩을 가마솥에 넣고 콩의 2~3배 정도의 물을 넉넉히 붓고 콩이 완전히 무르도록 푹 삶는다. 100도에서 김이 오른 후 3~4시간 이상 삶는데, 민간에서는 5~8시간 동안 삶는다. 콩을 삶을 때 메주콩의 비린내가 나지 않도록 한번 불에 올린 솥은 끓어 넘치더라도 뚜껑을 열지 않으며, 한소끔 끓으면 불을 줄여서 뭉근하게 뜸을 들이는데, 대개 큰 장작 하나 남겨두어 은근하게 불을 뗀다. 콩을 삶는 정도는 손으로 비벼보아 반쪽으로 갈라지지 않고 쉽게 뭉그러질 때까지 또는 콩의 노란색이 불그을음(또는 꺼멓도록)하게 될 때까지 삶는다. 잘 삶은 콩으로 메주를 만들면 끈기도 있고 잘 뭉쳐져서 찧은 후 메주 만들 때도 좋고 메주도 잘 뜨고 장맛이 좋아진다. 덜 익은 콩으로 메주를 만들면 끈기가 없어 서로 섞이지도 않고 차지지도 않으며, 장맛이 떨어지고 담근 간장색이 탁해져 장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 콩을 지나치게 익혀도 단백질 분해에 지장을 주기 때문에 좋지 않다. 푹 삶은 콩을 소쿠리에 건져 물기를 뺀 후 식기 전에 절구에 담아 완전히 으깨지도록 빠르게 찧어 메주틀이나 그릇에 담아 모양을 만들거나 손으로 뭉쳐서 일정한 형태로 만든다. 절구 대신 함지박 같은 큰 그릇에 놓고 찧거나, 포대에 담고 발로 밟아 으깨기도 한다. 메주틀에 베보자기를 깔고 찧은 메주콩을 넣은 뒤 베주머니로 덮고 꼭꼭 밟아서 만든다. 식은 것을 찧거나, 너무 거칠게 찧어도 알맹이가 겉돌아 잘 뭉쳐지지 않아서 좋지 않다. 또한 메주의 크기가 너무 크거나 두꺼우면 메주가 마르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쓸데없는 곰팡이가 생기기 쉬워 좋지 않다. 메주 모양은 목침이나 납작한 전석처럼 각형(角形)으로 만들거나 둥글게 원형으로 만들어 서로 달라붙지 않도록 간격을 주고 펼쳐놓아 꾸덕꾸덕해질 때까지 말려 겉말림을 한다. 겉면이 완전히 굳으면 새끼줄로 엮어 통풍이 잘 되는 곳에 매달아 띄운다. 간장이나 된장을 만들 메주는 콩으로만 만들지만, 고추장 메주는 콩에 쌀이나 밀, 보리 같은 전분질을 섞어 만든다. 콩과 밀을 6 : 4 정도의 비율로 섞고, 콩과 찹쌀을 5 : 2 정도의 비율로 섞는데, 고추장용 떡메주는 콩과 찹쌀을 하룻밤 불렸다가 함께 찐 다음 절구에 넣어 찧어서, 주먹만한 크기로 동글납작하게 빚어 가운데를 손가락으로 구멍을 내고 겉말림하여 띄운다. 순창 고추장메주는 가운데 구멍을 볏짚줄로 꿰어 매달아 띄운다. 메주를 만들기까지 장맛을 결정하는, 메주. 보통 입동 전후로 메주를 쑤는데, 반드시 국산 햇콩으로 만들어야 장맛이 좋다. 먼저 햇메주콩을 구했다면 잘 씻어 콩의 3배 정도의 물을 붓고 12시간 이상 불린다. 솥에 불린 콩과 물을 넣고 삶는데, 처음에는 센 불로 끓이다 끓으면 불을 줄여 콩이 약간 붉은빛이 돌 때까지 약 2시간 정도 삶는다. 삶은 콩을 소쿠리에 건져 물기를 빼고 뜨거울 때 절구에 넣고 곱게 찧어서 베 보자기를 깐 메주틀에 넣어서 네모지게 만들거나 또는 원추형으로 단단하게 만든다. 햇볕이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볏짚을 깔고 그 위에 메주덩이를 놓고 7~10일 정도 꾸덕꾸덕하게 말린다. 메주의 겉면이 완전히 말랐으면 가마니나 상자에 짚을 깔고 서로 붙지 않게 켜켜이 메주와 짚을 깔고 덮어서 따뜻한 온돌방이나 보일러실에서 띄운다. 25~28℃의 따뜻한 방에서 약 2주 정도 두면 곰팡이가 두루 덮인다. 이때 하얀곰팡이나 노란곰팡이가 피는 것이 좋다. 메주가 알맞게 뜨면 볏짚을 이용해 십자로 묶고 짚으로 새끼를 꼬아 끈을 만들어 겨우내 선반에 매달아두었다가 이른봄이 되어 장 담그는 시기가 오면 다시 햇볕에 쬐어 말린다. 〈가정에서 손쉽게 메주 만들기〉 1) 노란콩을 물에 불린다. 2) 불린 콩을 삶는다. 3) 삶은 콩을 절구에 넣고 으깬다. 4) 으깬 콩으로 메주 모양을 만든다. 5) 메주틀 대신 손으로 토닥거려 네모난 메주를 만들었다. 된장 정의 콩을 주원료로 발효시켜 만든 조미료. 내용 장이라는 글자가 동양의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주례 周禮≫ 선부(膳夫)로 장 120동이란 표현이 나온다. 또 ≪사물기원 事物紀原≫에서는 주공(周公)이 장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장의 정체에 대하여 ≪주례≫의 주(註)에서 말하기는 “장에는 해(醢)나 혜(醯)가 있다. 해는 새고기·짐승고기·물고기 할 것 없이 어떤 고기라도 이것을 햇볕에 말려서 고운 가루로 하여 술에 담그고, 여기에 조로 만든 누룩과 소금을 넣어 잘 섞어 항아리에 넣고 밀폐하여 100일간 어두운 곳에서 숙성시켜 얻은 것이다. 혜는 재료가 해와 같으나 청매(靑梅)의 즙을 넣어서 신맛이 나게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주례≫ 속의 장인 해와 혜는 분명히 육장(肉醬)이다. 해는 소금으로 고기의 부패를 막으면서 발효에 의하여 단백질을 아미노산이나 펩타이드로 분해시킨다. 또 누룩에서 당분이 생성된다. 그리고 술을 넣었기 때문에 알코올과 생성된 산에 의하여 좋은 맛과 향기를 가지게 되는 것으로 중국 본래의 조미료이다. 우리 동이권(東夷圈)에서는 장을 콩으로 만들었다. 오늘날 농학계에서는 콩의 원산지를 만주라 본다. 만주는 고구려의 옛 땅이므로 콩재배의 개발은 우리들의 조상에 의하여 이루어진 셈이다. 최근 한반도 내에서도 콩의 야생종과 재배종의 중간 종이 발견되었다. 중국의 앙소·용산의 농경문화의 유물에는 콩이 보이지 않는다. ≪관자 管子≫에 의하면 서기전 7세기 초엽에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지금의 만주 남부인 산융(山戎)을 제압하고, 여기서 콩을 가져와서 융숙(戎菽)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와같이, 우리들의 조상은 스스로 개발한 콩을 교묘하게 가공하여 장을 만들어낸 것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고구려조에서는 고구려 사람들이 발효식품을 잘 만든다고 하였다. 이것이 어떤 종류의 발효식품인지 분명하지는 않다. 서기전 4세기경의 황해도 안악3호고분(安岳三號古墳)의 벽화에 우물가에 발효식품을 갈무리한 듯한 독이 보인다. ≪해동역사 海東繹史≫에서 ≪신당서 新唐書≫를 인용하여 발해의 명산물로서 책성(柵城)의 시(豉; 메주)를 들고 있다. 발해는 고구려의 유민이 세운 나라이다. 여기서 말하는 시에 대하여 ≪설문해자 說文解字≫에서는 배염유숙(配鹽幽菽)이라 하였다. 숙(菽)이란 콩이고 유(幽)는 ‘어둡다’ 뜻이니 어두운 곳에서 발효시킨다는 것이다. 여기에 소금을 섞으면 곧 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의 청국장에 해당하는 산국(散麴)이다. 콩을 개발하였고 일찍이 온돌의 원형인 갱(坑)을 가지고 있었던 고구려 사람들이 이러한 발효식품을 만들게 된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에서는 시가 다음과 같은 문헌에 보이기 시작하였다. ≪춘추좌씨전≫의 소(疏)에서는 “≪상서 尙書≫에서 국 끓이는 데 매실과 소금만을 쓴다고 하였다. 옛날의 조미료는 매실과 소금이고 시는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예기≫의 내칙(內則)이나 ≪초사 楚辭≫의 소혼(招魂)에는 음식에 관한 이야기가 그렇듯 많이 나오는데도 시에 관한 글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한대(漢代)의 ≪급취편 急就篇≫이라는 책에 비로소 염시(鹽豉)라는 말이 나온다. 이로 미루어 시는 진한대(秦漢代)부터 중국에 나타나게 된 것이라 하겠다. 시는 중국 자체에서 개발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진대(晋代)의 ≪박물지 博物誌≫에서는 시를 외국원산이라 하였다. 송대(宋代)의 ≪학재점필 學齋佔畢≫에서도 구경(九經) 속에 시라는 글자가 없고, 방언(方言)에 시가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중국으로 보아서는 시란 외래품이라 하겠다. ≪사기≫의 화식전(貨植傳)에 의하면 일반 제조업자의 이윤이 10분의 2 정도인 데 비하여 시 제조업자의 이윤은 10분의 5에서 10분의 3 정도나 된다고 하였다. 시의 재료가 본디부터 알려진 것이라면 그렇게 많은 이윤이 있을 리 없다. 따라서, 시 제조업자는 외래의 시 제조의 비결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윤이 커서 부자가 된 것으로 추측된다. 고구려사람이 발효식품을 잘 만들고, 발해의 명산물로서 시를 들고 있으며, 콩의 원산지가 동이권이고 중국사람 스스로 시를 외래품이라고 한 것을 생각하면 오늘날의 청국장에 해당하는 것이 매우 오랜 역사를 가지고 이 땅의 북부에서 싹터 중국에 가서 시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중국의 장은 해란 이름의 육장이고, 우리의 장은 시란 이름의 두장(豆醬)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중국인들이 두장을 시라 표현한 까닭은 ≪석명 釋名≫의 석음식(釋飮食)에 보면 “시(豉)는 시(嗜 : 즐긴다는 뜻)와 같은 음이다. 오미(五味)를 조화하는 데 시를 쓰면 그 맛을 즐길 수 있다. 따라서 제나라 사람들은 시(嗜)와 같은 음인 시(豉)를 쓴다.”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500년 초엽의 ≪제민요술 齊民要術≫에 보면 구체적인 시 제조법이 기록되어 있다. 즉, 콩을 삶아 익혀서 어두운 방에 놓아두면 곰팡이가 번식하여 황의(黃衣)가 덮이게 되고 단백질이 분해된다. 이것을 씻어서 균사(菌絲)를 제거하고 짚이 깔려 있는 움 속에 놓아두면 짚에 붙어 있는 낫도균 등에 의하여 콩성분이 더욱 분해되고 점질물(粘質物)도 생성된다. 이것을 햇볕에 말린 다음에 물에 우려내어 조미료로 쓰기도 하고 건조시키지 않고 그대로 쓰기도 한다. 오늘날의 청국장과 매우 비슷함을 알 수 있다. 우리 나라 삼국시대의 장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 본기 신문왕 3년(683)에, 왕이 김흠운(金欽運)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는데 납채(納采)로서 미(米)·주(酒)·유(油)·밀(蜜)·장(醬)·시(豉)·포(脯) 등 135수를 보냈다는 내용에 보인다. 여기에서는 시와 장을 구별하고 있다. 장은 무엇일까? 일본의 ≪다이호율령 大寶律令≫(701)의 대선직(大膳職) 주장(主醬)에 보면 장은 장(醬)·시(豉)·말장(末醬)의 셋으로 정리되어 있고, ≪쇼소원문서 正倉院文書≫ 덴페이 11년(739) 정세장(正稅帳)에도 말장이라는 말이 나오면서 ‘미소’라 읽고 있다. 이 미소라는 말의 어원에 대하여 아라이(新井白石)는 그의 ≪도우가 東雅≫라는 책에서 고려의 장인 말장이 일본에 들어와서 그 나라 방언 그대로 ‘미소’라고 불렸다고 하였다. 일본에서 말장을 우리 나라의 방언 그대로 미소라고 하였다면 미소의 어원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만주어로 장을 ‘미순(misun)’이라 하고, 또 ≪계림유사≫ 고려방언에서는 장왈밀조(醬曰密祖)라 하였으며, ≪이두고 吏頭考≫에서는 말장며조, 즉 훈조(燻造)라 하였으며, ≪증보산림경제≫에도 말장이라 적고 며조라 부르고 있다. 이것으로 미순→밀조→미소의 계열이 성립된다. 만주 남부에서 개발한 배염유숙은 오늘날의 청국장의 무리로서 중국에 가서 시라 불리게 되었다. 한편 만주 남부에서는 시 아닌 또 하나의 장이 개발되었으니 이것이 미소(末醬)이다. 일본으로 건너간 우리의 말장은 어떤 것인지 당시의 일본 문헌을 통해서 정체를 잡기가 매우 애매하다. 무가이(向井之升)가 1671년에 지은 ≪호쥬비요우와매이혼소 庖厨備用倭名本草≫에서는 일본 미소의 본래 모습을 잘 설명하고 있다. 곧 “요즘의 미소는 콩과 쌀누룩으로 만들지만 본래의 미소는 콩만을 써서 삶아 짓찧어 둥글거나 모난 떡같은 모양을 만들어 곰팡이가 핀 뒤에 건조한 장메주 이른바 병국(餠麴)을 만들고, 이것을 부셔서 소금과 함께 통에 채워서 숙성시킨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산촌에서는 콩으로 만든 메주덩이로 된장을 만들고 있다.”고 하였다. 메주덩이나 된장처럼 고체상태의 것을 말장이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일본의 간무왕(桓武王) 호키(寶龜) 2년(771)의 ≪호샤잇사이교쇼코쿠사쿠카이 奉寫一切經所告朔解≫에서 “장 4말 2되는 콩 5말로 즙을 얻는다.”고 하였으니 당시의 장은 액체상태의 간장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일본에는 쌀이 풍부하므로 콩에다 쌀누룩을 섞은 된장을 만들어 미소라 하였고, 밀이 풍부한 중국에서 콩에다 밀을 섞어 간장을 만드니 감칠맛에 단맛이 더해진 것이다. 옛 고구려 땅에서 발상한 두 장은 중국과 일본에 전파되어 마침내 중국·한국·일본의 세 나라로 하여금 세계의 조미료 분포상으로 한계열의 두장권을 형성하게 한 것이다. ≪고려사≫ 식화지(食貨志)에는 1018년(현종 9)에 거란의 침입으로 추위와 굶주림에 떠는 백성들에게 소금과 장을 나누어 주었다는 기록과 1052년(문종 6)에 개경의 굶주린 백성 3만여 명에게 쌀·조·시(豉)를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고려시대의 장과 시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을까? 중국의 시에는 담시(淡豉)와 함시(醎豉)가 있다. 담시는 콩을 삶아 청국장을 만들 듯이 하여 건조한 것이고, 함시는 이에 소금·생강·천초·귤·차조기·회향·행인 등을 섞은 것이다. 우리 나라의 ≪임원경제지≫에서는 “담시는 그것이 무엇인지 정체를 잊어버리고 함시만이 간혹 약으로 쓰일 정도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시를 흔히 메주라고 풀이하게 되었다. 구황식품으로 시를 나누어주었다. 이것은 굶주린 사람들이 당장에 먹어야 하는 것이므로 시를 메주로 보기에는 조금 무리인 듯하다.”고 하였다. 이 때의 시는 된장이고 장은 간장인 것 같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메주에 의한 장이 주류를 이루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조선시대의 구체적인 장담그기를 ≪증보산림경제≫ 동국장법(東國醬法)을 통하여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장독을 엎어놓고 작은 구멍이 있는지 없는지를 연기를 내어서 조사한다. 장독은 여러 해 쓰던 것이 좋다. 둘째, 소금을 몇 달 저장하여 간수를 흘러 내리게 한 것을 쓴다. 셋째, 물은 감천(甘泉)이나 강심(江心)의 물을 큰솥에 받아 끓이고 여기에 소금을 녹여서 식으면 밭쳐서 장담그기에 쓴다. 넷째, 메주만들기는 높고 마른 땅에 말밥통같이 긴 구덩이를 파놓는다. 콩을 무르도록 삶다 절구에 넣고 잘 찧어서 손으로 중간 크기의 수박만한 덩이를 만들고 큰칼로 쪼개어 두께가 한치 정도인 반달모양으로 한다. 이것을 구덩이 속에 매단다. 구덩이는 가마니나 풀 따위로 덮어주고, 다시 비·바람을 막도록 해놓는다. 메주덩이가 스스로 열을 내고 옷을 입게 되기를 기다려 뚜껑을 열어서 한 차례 이것을 뒤집어 준다. 8∼9차례 이와 같이 하면 수십 일에 이르러 거의 다 마르니 꺼내어 다시 바짝 말린 뒤에 장을 법대로 담그면 맛이 좋다는 것이다. 다섯째, 장담을 담글 때는 메주 1말, 소금 6∼7되, 물 1통으로 한다. 겨울과 가을에는 소금이 적어도 좋으나 봄과 여름에는 많은 편이 좋다. 여섯째, 숙성한 뒤에 장독 속을 우물처럼 파서 그 안에 괸 청장을 날마다 떠내어 따로 작은 항아리에 받아 낸다. 이와 같이 콩만으로 만든 메주를 써서 된장·간장을 얻는 방법이 조선시대 장의 주류를 이루었다. 1800년경의 ≪북학의 北學議≫에서는 당시의 메주만들기의 실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장메주 만드는 자는 메주 만드는 시기가 되면 원근 여러 지방의 콩을 모아 삶게 되는데 양이 너무 많아서 모두를 정하게 하지 못한다. 주는 사람도 가려서 주지 아니하고 받는 사람도 씻지 않아서 모래나 좀벌레가 섞여 있다. 그들은 예사로 알고 괴이쩍게 여기지 않는다. 그 장을 먹으려고 하면서 그 메주를 더럽게 취급하니 이것은 먹는 우물물에 똥을 넣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콩을 삶아서 파선(破船)의 밑바닥에 쏟고는 옷을 걷어붙이고 맨발로 밟는다. 여러 사람이 오르내려서 더럽혀진 배의 바닥에서 밟는다. 그러나 그 뿐인가! 온몸에서 흐르는 땀이 다리를 타고 발 밑의 콩에까지 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흔히 된장 속에서 발톱이나 머리카락이 발견된다. 강계(江界)사람은 장메주 만들 때에 반드시 물에 걸러 일고 삶아서 익으면 망치로 쳐서 한 장씩 아주 반듯하게 만들어 낸다. 무릇 장메주는 이와 같이 만들어야 할 것이다.”고 하여 우리의 장이 매우 불결하다는 것이 지적되고 있다. 우리의 장맛은 집·지방마다 다르다. 이것은 삶은 콩덩이에 어떤 미생물의 포자가 떨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바람직한 곰팡이의 포자가 많이 떨어져야만 좋은 메주가 될 수 있으나 ‘봉사 돌 던지기’로는 품질이 균일해질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가 오히려 집집마다 독특한 장맛을 빚어내어 향수(鄕愁)의 맛을 낳게 해주기도 한다. 요즘은 삶은 콩에다 종국(種麴)을 섞어서 발효시키고 있다. 그러면 고린 냄새도 없고 며칠 만에 메주를 얻을 수 있다. 이것을 개량메주라 한다. 개량메주로 만든 장은 콩의 단백질이 잘 분해되어 감칠맛이 한결 높아진다. 그러나 여러 가지 미생물에 의하여 만들어진 본래의 메주로 만든 것보다 맛이 단순하다. 메주는 단백질이 완전 분해되지 않고 펩타이드의 형태로 많이 남아 있다. 따라서 이것을 뚝배기에 넣고 끓이는 된장찌개는 끓이면 끓일수록 펩타이드가 아미노산까지 분해되어 맛이 좋아진다. 개량메주로 끓인 된장찌개는 오랫동안 끓이면 아미노산이 채소·고기·두부 등에 스며들고 국물은 담백해진다. 본래의 메주에다 개량메주를 섞어서 된장찌개를 끓이는 일도 많아지고 있다. 그리고 요즘은 도시의 주택환경이 바뀌어 집에서 메주만들기가 어려워져 시골의 친척에 부탁하거나 공장제품의 메주를 사들이고 있다. 메주를 소금물에 담그는 일을 침장(沈醬)이라 한다. ≪동국세시기≫에서는 침장(沈醬)과 침장(沈藏 : 김장)의 두 가지 일을 인가일년(人家一年)의 2대행사라 하였다. 침장을 하고 40∼50일간 숙성시켜 액체를 퍼내어 달인 것이 간장이고 그 찌꺼기가 된장이 된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도 된장 전용과 간장 전용의 메주가 있었다. 각각의 메주가 다른 것이 아니고 소금물의 양이 다를 뿐이다. 메주에 겨우 잠길 정도의 소금물만을 넣어서 숙성시키면 맛 좋은 된장이 되고, 소금물을 많이 넣으면 간장을 많이 떠낼 수 있는 것이다. 간장을 해마다 달이면서 몇 년간이나 저장시키면 빛깔과 맛이 진한 간장을 얻을 수 있으니 이것을 진장(陳醬)이라 한다. 퍼낸 간장에 해마다 새로운 메주를 넣어 약주 만들 때의 덧술하듯이 숙성시켜 나가면 덧장이라 하여 매우 진하고 맛 좋은 간장을 얻을 수가 있다. 그런데 요즘의 이른바 왜간장이라는 것은 콩에다 밀을 섞어서 만든 간장메주를 소금물에 넣어 숙성시킨 것으로, 우리 나라에서도 공장생산물에 널리 쓰이고 있다. 1660년의 ≪구황보유방 救荒補遺方≫에 의하면 콩 한 말을 무르게 삶아내고 밀 5되를 볶아 가루 내어 콩과 잘 섞어 온돌에 펴서 띄운다. 황의(黃衣)가 전체적으로 피면 볕에 내어 말린다. 이와 같이 하여 얻은 메주는 소금 6되를 푼 따뜻한 물에 넣고 양지바른 곳에 두어 자주 휘저어 주면서 숙성시킨다. 이것은 왜간장과 비슷하다. 왜된장은 콩 삶은 것에 쌀메주·소금을 섞어서 숙성시킨 것이다. ≪구황보유방≫에서는 콩 1말을 충분히 삶고 누룩 3되, 소금 4되를 섞어서 찧고 항아리에 넣어 단단히 봉하여 양지바른 곳에 두면 맛이 좋다고 한다. 이것 역시 왜된장과 비슷하다. 이와 같은 간장이나 된장 만들기는 일본의 독자적인 개발이 아니고, 원대(元代) 초엽의 가정백과전서인 ≪거가필용 居家必用≫에도 나와 있고, 조선시대 중엽에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언제부터인지 이러한 종류의 장은 모습을 감추게 되었고, 고추장·즙장(汁醬)·청국장 등 여러 가지 특수한 장을 개발하여 나름대로 즐겨왔다. ≪사시찬요 四時纂要≫나 ≪산림경제≫에서는 즙장 만들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콩 1말을 물에 충분히 불려서 밀기울 2말과 같이 곱게 찧어가지고, 삶아서 꼭꼭 뭉친 뒤 단자를 만들고 닥나무 잎으로 덮어서 옷을 입기를 기다려 햇볕에 말린다. 즙장을 담글 때는 메주가루 1말, 물 2되, 소금 3홉을 섞어서 항아리에 넣어 봉하여 말똥 속에 묻었다가 다시 7일 만에 겻불 속에 묻으면 14일 만에 먹을 수 있다.”고 하였다. 청국장은 일본에서는 발효된 것에 간장을 쳐서 그대로 먹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청국장에 소금·파·마늘·고추 등을 섞어 절구에 찧어서 된장찌개를 만든다. 우리 나라 특수장으로서 가장 이색적인 것은 역시 고추장이다. 잘 건조된 장메주를 가루내어 여기에 고춧가루와 소금물을 일정한 비율로 섞어서 3∼6주간 발효시켜서 만든다. 짠맛·매운맛·감칠맛이 조화되어 있다. 기호성의 변천에 따라 단맛마저 요구하게 되어 찹쌀가루를 떡으로 하여 장메줏가루와 함께 담그게 되었다. 고추장은 식욕을 돋우는 우리 나라의 가장 중요한 조미료의 하나이다. ≪증보산림경제≫에서는 장에 대하여, “장(醬)은 장(將)이다. 모든 맛의 으뜸이요 인가의 장맛이 좋지 않으면 비록 좋은 채소나 맛있는 고기가 있어도 좋은 요리가 될 수 없다. 촌야의 사람이 고기를 쉽게 얻지 못하여도 여러 가지 좋은 장이 있으면 반찬에 아무 걱정이 없다. 가장(家長)은 모름지기 장 담기에 뜻을 두어 오래 묵혀 좋은 장을 얻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실제로 장맛이 좋아야 음식 맛이 좋음은 당연한 일이다. 장독대는 어느 집이고 극진히 위하였다. 해가 뜨면 뚜껑을 열어놓고 해가 지기 전에 덮었다. 장을 담그려면 우선 택일(擇日)을 하고 고사(告祀)를 지내기도 하였다. 만일 장맛이 나빠지면 무언가 불길한 징조일 것이라고 보았으니 각 가정의 주부들은 장독대 관리에 정성을 다하였던 것이다. 장맛이 나빠지는 것은 귀신이 장을 먼저 먹기 때문이라 보고 이것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장독에 금줄을 치고 또 담근 장 위에 숯이나 고추를 띄웠다. 귀신이 숯의 구멍 속에 끼어 들어가 버린다고 보았던 것이며, 고추는 귀신이 싫어하는 붉은 빛깔이고 또 고추가 너무나 맵기 때문에 달아나버린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규합총서 閨閤叢書≫에서는 장담그기의 택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장 담그는 데에 좋은 날은 병인(丙寅)·정묘(丁卯)·제길신일(諸吉神日)·정일(正日)·우수일(雨水日)·입동일(立冬日)·황도일(黃道日)이고, 삼복(三伏日)에 장을 담그면 벌레가 안 꾀고 해돋기 전에 담그면 벌레가 없다는 것이다. 또 장담그기를 꺼리는 날인 수흔일(水痕日 : 대월의 초일·초칠·십 일, 소월의 초삼·초칠·십이·이십육 일을 말한다.)에 담그면 가시가 꾀고 육신일(六辛日)에 담그면 맛이 사납다는 것이다. 선조대 정유재란 때의 일이다. 어전회의에서 왕이 영변(寧邊)으로 피난갈 것으로 정하고, 백관(百官)이 몰려가려면 장을 미리 준비해야겠다고 했다. 남자안(南子安)이 “신공(申公)을 합장사(合醬使)로 삼아 영변 땅에 먼저 파견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한유천(韓柳川)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신공만은 안됩니다.

신이라는 성은 장담그기를 꺼리는 달인 신일(辛日)과 음이 같으니 신불합장(申不合醬)이라 좋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한다.

장의 중요성은 마침내 이러한 금기까지 낳게 한 것이다. 장의 재료는 콩이다. 콩에는 단백질이 38%나 있어서 곡물 가운데서 으뜸이다.

콩속에 들어 있는 단백질의 질은 생물가(生物價) 78로서 동물성 단백질에 크게 손색이 없다. 콩에는 지방도 18%나 함유되어 있다. 

콩속의 지방은 불포화지방산인 리놀산과 리놀렌산이 풍부하다.

불포화지방산은 혈액 속의 콜레스테롤의 양이 늘어나는 것을 막는 동시에 동맥혈관의 벽에 달라붙은 콜레스테롤을 녹여내는 작용을 한다고 한다. 

실제로 쇠고기만으로 사육한 개와 콩 단백질로 사육한 개에 대하여 서로 수영을 시켜본 결과, 콩 단백질로 사육된 개가 장거리 수영에서 이겼다고 한다. 대체로, 콩을 먹는 우리 나라 사람은 서양 사람에 비하여 단시간 동안에 힘을 내는 순발력은 모자라지만 내구력은 그들보다 크다. 이와 같이, 콩의 영양가로 미루어 장의 영양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장의본색【간장, 장즙(醬), 장유(醬油), 청장(淸醬), 감장(甘醬), 법장(法醬)】 장은 여러음식에 너어간을치고 맛을내는것인고로 음식중에 제일이요 정성을드려 만들기로 집안살림에도 제일치고 때를일치안코 당가야 하는고로 소중이자별하고 큰일이니이아래보라장이라하는것은 장숫장(將)이니 백가시맛에장수라 하는것이요 사람의집에 장맛이 조치못하면 아모리 조흔고기와 아름다운채소가 잇서도 찬수가 되지못할것이요 또 시골사람이 고기는엇기가 쉽지안코 아름다운 장으로 채소든지 만들면 걱정이 업나니 집안어른된재 먼저생각하야 장을잘당거서 저축하엿다가 묵고묵켜서 쓰는것이 조흐니라말만흔집에 장마시 쓰다하는것이 리치가잇나니라경성에장은 땅에서 띄인고로 장은마시조코 된장은 못먹나니라 대체 며주를 속이썩지안케 띄우는것이 첫재니 누구든지 생각하야 볼지어다 시골서 말뫼주라 하는것이 덩이를크게하야서 더운방에 다라매여 속이검고 썩어야 한다고 가시는왼겨울 떠러지며 그러케띄우고 소곰을 만히처서 당그니 나종에 그장맛이짜고 고리고 쓰고 가진냄새가 나는것을 또볏헤노면 장이준다하고 그늘에 노흐니 줄지는 아니하나 그장을 음식에치면 그음식까지 못먹게되나니 그런고로 서울서입놉흔사람이 시골갈때 장을가지고가니 그러한일이 어디잇스며 대체무슨음식이든지 썩고맛나는 법이어디잇스리요 아모음식이라도 맛부터 조흔뒤에야 빗이라든지 모양이라든지 보는법인데 맛은어디갓든지 빗치검어야 조타하니 무삼생각인지요 요사이 일본장이라는것이 나무통에 느어두는고로 솔냄새는난다해도장맛이야 여기에서만드는장보담대단히 맛이조흔것은 다름아니라 제일며주를 썩히지안는고로 맛이달고 소곰을만히너치아니로 슴슴하야 온갓음식에 느으면 다맛이조흐니 그러면 알겟고 일본장중에도 제일등 조흔장은 비파과실일홈빗과 갓치누르며 붉은빗이나고하등장 이라야 빗치검으니 여기서 만드는 검은장은 이삼십년 묵켜야 빗치검고 맛이조타하나 그런장을 이로만히 쓸수도업고 맛이도리혀오랜고로 댓진내음새가 나는것도 잇스니 그러하나 그런장을 이로이사서 쓸수나 잇스리요 개량을하여야 할지니라 처음에콩을 살물때에 물을넉넉히부어 솟바닥에 눌러붓지 안케하고 제일 콩을불녀서 저근그릇에 불리면 그릇이터지오 조리로이러 가마나솟에붓고 끄러넘거든 뚜께를열지말고 그냥물만 넘기고살무라 뚜께를열면 콩도넘어 나을뿐외라 뚜께를 자조열면 콩이덜부르나니라 뜸드려 잘무르게한후에 퍼내여 물삐거든 깍지가업도록잘찌여 며주를보사기만큼하되 조곰납작하게 만드러 하나식 퍼노코 하로동안팟글말린후에 것치구둑구둑하거든 멱서리나 섬이나 둥구미에띄우되 다른솔립을깔고 한케식메주를 느러노와 아구리를동이여불때는방웃묵에 겹처언지말고 한섬식느러노와(띄우기는 동지섯달정월이월이라)한열흘되거든 여러보와 메주에내음새가 나고 흰옷을 다입언거든 얼리지말고 볏흘베고흔옷이덜입거든 다시동이여 수일만에 또여러보와 김이나고 흔옷이 죄다입어야조흐되 옷이너무입어 거문진이나면 썩은것이니 매우살펴띄우라 여러날 정성스럽게 안팟을 밧삭말린후에 방에다달든지 치룽에다 너튼지 자조뒤처주면 제절로 속이뜨나니라 쥐가먹기쉬우니 잘간수하라장당글때에 며주를먼저 솔로씨서 물에다너코 또솔로정하게씨서(온갓독한몬지를 죄다씨스라) 하로볏흘 뒤처가며 말려서 당그나니라소곰물은 멧달전에 소곰을(우리나라에 간빠진 소곰이일본소곰보다나으니라)만이푸러 여러날휘저면 그동안 소곰이 풀릴뿐더러 억센간이 삭은 후에 고흔체에밧타 쓰나니라혹집안에 화재가 잇드래도 소곰물한박이면 맹물열박을더당하야 불끄기에 대단히 속하는고로 성세잇든사람은 다이러케 일년을 두엇다가 장당글때쓰고 직시 또 소곰물을 짜게만이푸러두느니라장당글때 짜고승거운것을 알려면 짜게푸럿든 소곰물은 응당짤터이니 맹물을 타가며 흔밥한덩이상수리만큼를 너허한뼘쯤내려가 떠잇스면 함담이마진게요 한뼘이못되게 떠오르면 너무짜고 한뼘이 더내려가면 승거운것이니 이걸보아 짐작하나니라(물을조흔물로 소곰을타야 장맛이 조흐니라)장당글때에 먼저불가불 넷풍속을조차 장당그는날을 택하야 당그되 이아래보라 독을정이우리고 씨슨후에 며주를 한수십개넛코 날양지머리나우둔을 물끼업시 행자처서넛퇴 양지머리는 한허리를뼈재둘에 내이고 우둔도반에 베혀넛코 그우헤다가 며주를얼마든지너코 소곰물을부어 뚜께를모시나 베든지 얄분걸로 독아구리를 덥허동이되 자조여러보와 곰팡이 아니나도록 여러보고 파리나 여러버레를 못오도록하고 낫이면 뚝게를 열고 제일 남향판에 노코 음디는장맛이그르니 아못조록 볏흘잘쏘이라 저녁에뚜께를 이저버렷다가 비가오면 물이드러가서가시가 나나니 두어달정성을 드리라 숫이나대초를넛는것은 소용업나니라버선번을남붓그럽게 웨붓치는지 모르노라장뜰때에 용수박고 장을떠내여 가마에붓고 매우끌이되 검은콩이나대초나 찹쌀이나다스마나 너어다리면 조흐니라 너무끌어넘게되거든 찬장을엽헤노왓다가 조곰식치면 넘지안나니라다끌인후에 좀식거든 퍼내여독이나 중두리에담고 다식은후에 맛을보라 장다릴때 느엇든것은 체에밧처건지는 먹든지 버리든지하라고기느흔장은맛도조코된장은국을끌이든지찌개를하든지 다른된장보다 맛이조코 고기를 끄내여 써러먹으면 장조림고기보다낫고 뼈가다먹을만하니라 처음당글때에 고기를 것만살작살마 느어도조흐니라 기름붓튼 고기를 넛트래도 장에기름이뜨지안코 장이오래가도 맛이변치안나니라 장이검고 맛을조케하려면 경제는아니되나 불가불 삼년가야 하나니 처음에 장이한독이면 그장물에다가 또며주를분량대로느허 장이다되거든 떳다가 그이듬해에 또며주를느허삼년에 세번만띄우면 장은처음한독이되든것이 서번띄는동안에 한동의쯤되나 장맛은 천하에 제일맛이조코 빗이검어지나니라일본장이 맛이그러케 조흐나 삼등장이라도 보리라밀을 넌는것이 콩보담 경제로 넌는것이요 맛에는 조곰도상관이업는고로 하등장일수록 보리와 밀을 만히넌나니 순전한콩으로만 며주를 만드러서 장당그는것이 제일이니라며주콩을잔것이 좃타하는것은 경제에서 나왓고 결단코잔콩이 조흔게아니요 굴근콩이 맛이더조흔것은 정한리치가 아니리요 생각할지어다검은장은 국이나 죽이나 나물에는 아니쓰나 기외에는 다검은진장이 쓰이고 또 흔죽에는 단지검은장이 아니면못되나니 또검은장이업거든 생선국에나 족조림 갓튼것은 아니하는것이 도리여 나으니라 흔장으로 만들면 생선은부스러지고 족은흔빗치 보기에 조치못하야 맛까지 업는것가트니라 장마시변한거곳치는법【의장실미(醫醬失味)】 장맛이변하엿거든 우박을 한두되를 너커나 아못조록 뚜께를여러 볏흘베고 밤이면서리를 맛친지오래면 맛이조아지나니라 빗물이드러가는것을 대단이기히하나니라토장이 맛이변하엿거든 생소나무 껍질을 벳겨서 장통에넌지 칠팔일이면 장맛이 조와지나니라장이쓰거든 큰그릇에 베보자를깔고 장을두어치오도록붓고 그우에 빌가루를 체에대고 처서 도로부어두면 다시바루스나나니 널빤지에 장을펴고 하야도 조흐니라또 다시마 한오리에 엿한쪼각을 싸서두면 연하야질것이니 엿은내여버리고 다시마만 익은물반잔과 강집조곰치고 짓두다려 진흙갓치 되거든 익은물 서너사발을타고 휘저어 찍기는버리고 장에타면 맛이조아지나니라물난장독밧글 자조씨스면 마시다라지나니라또 장독에맹물을 갓득붓고 사흘만에 웃물을다따라버리고 또물을부어갓치하기를 세번만하면 쓴마시 다업서질터이니 그런후에 끌는물에 소곰을타서 식거든 드러부어 익힐지니 이장이다른장보담 맛이업슬득하나 써서 아주버리는것보담나으니라 며주만드는법【말장(末醬), 훈조(熏造)】 며주를만들제 먼저 놉고말은땅에 긴재천을파되 말메기귀융통과 갓치만들되 한자기리(布帛尺)쯤되게허고 개천사면에 난호아 수도를내고 그우에다가 공석이나 삿재리를 펴논후에 콩을얼마든지 까불러 물에당가 이러모래를 업시하고당가둔지 하로만에 건저 큰마에붓고 물을부어 무르도록 살문후 하로밤지낸후에 퍼건저 물삐거든 절구에붓고 깍지가 업도록찌어 손으로 주물러 둥글게하되 중서과(中西果)만치 만드러 큰칼노 둘에 쪼개여 또 가로버히면 반달갓치 하기도하고 또 네모지고 납짝하게하야 귑삔갓치 둘에내되 모도한치둑게쯤만드러 이왕파노앗든데다가 비놀재듯 하야노코 또 공석이나 삿자리로 둑겁게 덥흔후에 다시 용마름으로 언저서 비가오면 흘러수도로 나가게하며 바람두로지 안케하면 며주쪼각이 제절롯더서 읏을입으리니 뚝게를열고 한번번디처노코 뚝게를도로덥허 이러케하기를 팔구차하면 자연이 수십일이되야 거의다마르리니 끄내여 밧삭말린후 장을법대로당그면 오래묵히고 맛이조흐니 이것이 서울서 만드는며주법이라 매년삼월에 시작하야 오월이면 나라에 진상(進上)을 하는고로 서울서 장당그는것이 매양오월금음전에되나니 이것을 절며주라 하는데 옛적에는 아마절에서 만히만들고 잘하든것이 만앗드니 요사이 절며주라하는것은 무게동이나 작작골이나 그등디에서 만드는것은 원악만흔연고인지 살문콩을 절구에치를안코 베버선을 하야신고 발로발바 할뿐더러 밤는사람의 땀이 비오듯하야 떠러지나니 그런고로 이며주를 장빗치진하다하야 당그긴하나 산사람은 부득이먹고 조상이나 신령에게는 집에서 만드러쓰나니라지금시골서 만드는 며주는 크게덩이를짓되 한말에 한덩이까지 만드나니 인경갓치 만드러 집흐로 열십자를띄여 매달고 겨울지내나니 그며주가 속이골코 온갓내음새를 방속에서 모다빠라드리고 띄워낼제 가시는 방에떠러지다가 나종에가시가변하야 좀찌가되여 사람의게으르면 가렵고괴로우나니 그런며주는 고초장은 당그기컨냥 장을당가도 그장맛을 엇지조키를바라리오 이러케 변통업는것을 애달나하노라 요사이 저자에서 파는며주는 적은벽장갓치 네모지고 납작하게만드러 오는것은 콩이그대로 만이잇고검은진이 소사나온것은 며주띄인것이 아니라 참말로 썩은것이니 며주만들기를 때를일코 부득이하야 사서당그나 장맛조키를 발수가잇스리오 장당글때조심할일 장당그는때에 며주를 물에정이씨서 먼저 독에넛코 소곰물을붓되 며주한말에 소곰 륙칠되와물한통이법이니 가을과 겨울에는 소곰이 적은것이 무방하고 봄과여름에는 소곰이 만하야조흐니라 소곰물을 며주보담조곰놉히붓고 볏흘베히다가 물이줄거든 다시 소곰물을더붓느니라뚝께를항상열고 볏흘뵈되 만일비가 올듯하거든 급히뚝게를 닷치라 또 밧삭말은며주를 독에갓득차게 너엇다가 소곰물을부으면 차차불어서 독이터지기 쉬우나니 먼저독바닥에 댓가지로 너스레를노코 며주를 독에골게 너흔후에 독우에도너스레를노면 터질염녀가 업나니라 다시 소곰물을 적은독에 부워서 장당근독 엽헤다가 노앗다가 장이주는대로 차차더붓나니라 장당글때넛는물건 장을당글때에 넛는물건은 더덕과도랏을 껍질벗기고 밧삭말려서 가로만드러 체에처서 전대나무저니에넛코 물에당가 쓴맛을빼서 꼭짜고물끼를업시하야 주머니째 장속에너으면 맛이두부장보담 나으니라 이위두가지를 생으로 두다려물에당가 쓴맛이 빠진후에 꼭짜서 대강마르거든 느어도조흐니라 또 생게를 딱지를따고 누른것은따로내여노코 그남아 전체를 절구에넛코짓찌여체에걸은집과 이왕끄냇든 누른것과합하야 쩌서주머니에너서 장에당가두면 맛이매우 조흐니라 또 새오가 큰게나 적은것을 짓찌여 가루를만드러 주머니에너서 장에두면 맛이절품이니라또 쇠고기 한덩어리를 독밑술헤느어두면 장맛도조코 고기맛도 조흐니라 또 두부를 주머니에넛코 단단히눌러 물끼를뺀후에 그대로 장에너흐면 조코 또 무와 더덕과길경둥물을 잠간데처말렷다가 느어도조코 생굴을 물끼업시하야 느어도조코 닭이나 오리나 거위알을 까서 놋그릇에 담고 중탕하야 조곰엉기거든 주머니에 담아서 느어도 조흐니라 또는 생선이나 고기들은 장에 느으면 장맛을돕고 여러가지가 조흐나 만일 장이 익기전에 어육이상하면 장맛이 변키가쉽고 여름에 당그는장에 어육등물을 느으면 어육이상하기쉬우니 조심하야 당글지니라첫번붉은 고초를따서 한쪽을짜키고 씨를다빼인후에 기름업는고기를 난도하야 표고와함께익켜 짜갠고초속에다가 처녀코다시 합하야실로여진장속에 느엇다가먹나니라 장당그는데기타는일 며주를띌때에 냄새나고 더러운것을 기하고 더욱이 송장을 대기하나니라 대체며주는 무상냄새든지 빠라드리기를 잘하는고로 며주를버리나니라장당글때에 맛갓사람을 기할것이요 더욱이 송장겻헤 왕래하는사람을 뵈이지말지니 그런고로 장독간을 집뒤에 편벽된곳에만들고 목책을하야 장그고 사람을 엄검하나니라 장독에 근처에 과실나무가잇스면 아희들이돌을던저 독이상하기쉽고 또 담을갓가이 하엿다가 담이문어지면 독과질그릇이 깨여저 장을일나니라 또 장독근처에 무삼나무든지 잇스면 그늘이저서 못쓰나니 또나무에온갓버러지가 떠러질것이니 가지를 처버리고 또 장독대에 잡풀이 잇스면 배암과 버레가숨어잇스면 못쓰나니 물을다업시하고 장독때는 반듯이 남향하야 볏흘항상쬐는것이 주장이니라장을뜨는법은 둥두리를 장똑가에 두엇다가 장이다 익기를기다려 손으로 장똑한가운데를 헷처우물갓치파고 궁자로 날마다 퍼내여 중두리에 밧처넛코 장이 다 진하거든 따로백비탕에 소곰을타서 장똑에부어두면 얼마아니되여 다시장을뜰것이요 맛도조흐니라 또 장에넛는주머니 물건은큰독장에느으면 장맛이 변키쉬우니 적은그릇에넛는것이 조흐니라 장당그는날 병인 정묘 무자 을미 병신일이조코 신(辛)일을대기 하나니라 또 립동(立冬)날과 정월우수(正月雨水) 드는날이 조흐니라 수(水)일에 당그면 가시가 나나니라제신길일(諸神吉)과 삼북안에황도일에(三伏內黃道日) 콩을불려찌되 황도일이 아모때 들든지그날에 콩을찌고 삼복날 장을당그면 가시가 아니나고 햇뜨기전이나 해진뒤에 장을당그면 파리가 아니오고 그뭄날 담싼아래서 북향하고 함무꼿고 말하지말고 장을당가도 가시가 아니나나니라수흔(水痕)을 기하는날은 큰달(大月)에는 초하로 초니레열하로 열니레 스무하로 스무사흘설흔날이요 저근달(小月)에는 초사흘 초니레 열이틀 스무하로 스무엿셋날이니라황도일에 장을당그되 부인을기하면 가시가업고 태세(太歲)를 향하야당가도 가시가 업나니라섯달안에 극히치운날을 갈희여 물을끄려 한데노와 얼려두엇다가 여름에 장당그면 가시가 아니나나니라장을다당근후에 시라(蒔羅)를 그우에뿌리고 발객깃세 참기름을뭇처 독전에다가 바르면 파리동물이 아니오나니라 콩장【대두장(大豆醬)】 콩장을복가 가라서 가루를만드러 한말가량에 밀가루서말을 한테버무려 며주뛰여 벼헤말린후에 며주열근에 소곰닷근을 넛코 물을치면하게부어익히나니라 팟장【소두장(小豆醬)】 팟을 얼마든지 까불러 모래를 업시하고 매에가라 까불러 껍질을버리고 다시곱게가라 물에당근지 반일만에 건저말려 다시뷔벼서 나문껍질을업시하고 그이튼날 일즉이 물을붓고 정하게 일어서 건저말린후에 밀가루와 합하야 주물러 덩이를만드러 덥허띈지 한달만에 열고끄내여 굴게겨튼 광주리에넛코 바람통하는곳에 다라매여 두엇다가 그이듬해 이월보름게 끄내여 수건으로흰것을 말갓케 씨서서 부스터려 다시갈아 곱게만드러 스무근가량에 소곰 열근넉량중을 섯달(臘水)에합하야화일(火日)되는날 새벽에당가 두엇다가 두달후에 가이먹나니라본초에는 누룩가루열근가량에 소곰닷근을넛코 당근다하엿나니라 대맥장【大麥醬, 대맥면장(大麥醬)】 검은 콩닷말을 모래업시하고 복가서 물에그물재 솟테붓고 살마무르거든 건저내여식켜서 보리가루 백근가량을 가늘게가루내어 콩살문집과한데반죽하야 크게조각을 써러시루에쩌서 쏘다식거든 닥나무입흐로 덥헛다가 누른옷닙거든 내여볏테말려 가루내어 정일(丁日)이나 화일(火日)에당그나니 이황자(黃子)한말에 소곰두근과 정화수 여덜근을 모다합하야 항아리에눗코 볏헤놋나니라 집장【汁醬】 밀기울(小麥)두말과 콩한말을 물에불려 밀기울과갓치 두다려쩌내여 손으로 주물러 덩어리를만드러 가랑닙흘 덥허 옷을입거든 끄내여벗헤말리고 집장을당그거든 누룩가루 한말과 물석되와 소곰세흡을 한데합하야 항아리에너코 아구리를 봉하야말똥속에 무들지니 니레만에되고 만일겟불에무드면 열나흘만에 되나니라또법은 콩한말에 밀기울 대여섯되를 할지니 콩이만흐면 맛이달고 밀기울이만흐면 마시시고조치못하니 시속법을 따르라 집장누룩을 찔때에 대로만든체에 칠것이니 매양한말이면 소곰을 중종자로 하나만너코 깨소곰 닷흡을 타서합할지니 장찻당글 집장물을 더부면 색이붉고 맛이조흐니 간장을한종자 남짓하게너코 집장의 여러가지를 고로 석되집이너무저지면 빗치들지안코 의와가지들은 반드시 집속에서 끄내라 집이손구락새이로 조차나와야 도수에 합하는것이다 집을탈때에 자조자조맛을보아 입에맛게하야 가지[물가지는못쓰오]를너코 누른외를 왼통으로 꼭지따고 씨서서 집사이와 항아리안에 펴 너은후에유지로 항아리를 봉하고 소라기로덥고 진흙으로 봉한지사흘만에 항아리를 말똥속에뭇되 말똥이 만아서 잘찌지못하면 랭수를 자조끼언지면 잘쩌지나니라 집 라하는것은 국물이라 하는말이다또법은 칠월보름후에 콩한말을쩌서 밀기울을 체에처서 대엿되를합하야 다시시루에너코 쩌서짓찌여 둥글게하야 칼자루처럼 만드러 섬시아치룽에늣퇴 가랑닙흘 경지노아 서로붓지 안케하고 띄워옷닙거든 말린후에 가루만드러 한말에소곰석되를 합하야 반죽을질게하고 가지와중의를 꼭지따고씨서 물끼업시하고 항아리도 정이씨서 물끼업시한후에 먼저집을붓고 한겹식 간걸러너서항아리가 거위찰만하거든 꼭지딴걸로 우거지를 치되 손으로 고로눌러 비게하지 말게하고 유지로봉하고 뚝게를덥고 밧겻사면에는 진흙으로싸고 새말똥을 만히너코 앙아리를 그가운데다뭇고 생물닙흐로 그위를덥고 그위에 또말똥으로 둑겁게덥고 단단히할지니 적은항아리는 열나흘이면 끄내고 큰독이면 스무날후면 끄내나니 말똥이 적으면 잘찌지 안을이니 물을뿌려주면 잘쩌지나니라또법은 콩기울글 전법과 둥글게하고 뽕닙흐로 격지노아 독안에너코 축축한곳에 둘지니 독을땅에업허 기운이 새지안케하고 일헤가지나거든 조곰쬐엿다가 다시너코 또 륙칠일이면 밧게싸인것이 다퍼질것이니 그제야 끄내여 말려씨처서가루만드러 대체에처서 한말에 소곰오흡을물에타질게하고 가지나 외는 이위와갓치하고 말똥을만히코 뜨기를기다려 똥을헤치고 마른풀을둑겁게깔고 불을질너 불이한창타거든 물을부어끄고 그속이식기전에 항아리를 그가운데 무들지니만일너무찌면 한니레에 집어내고 조곰찌면 두니레만에 집어내나니라또법은가지가 한접이면 간장한말과 길기울석되를모도버무려 항아리에너코 꼭덥허동여서 말똥속에 무더익히되 삼칠일이면 먹나니라또법은 칠월에 누른콩을 물에당근지 한니레만에 건저서 가령한말이면보리두말과 밀기울 서말을찐연후에 떡을만들되 어린애주먹만치만들고 먼저공석을 시렁우에펴고 쑥이나 북나무닙히나닥나무닙흘깔고 떡을 그우에펴고그우에 쑥을둑겁게덥고 니레만이면 누른곰팡이낫거든 내여말리고 아니낫거든 다시덥허 누른읏 입기를위한하나니 밀린후에 가루내어 굴근체에 취노코 가지와동아를 정하게씨서 항아리에널제 가루만든것을 한케식 격지노와뿌리고 아구리를 단단히봉하고 쇠뚜께를덥고 새말똥에무든지 두니레면 끄내나니 흑항아리를아니쓰고 공석에띄우거든 뽕닙흐러 아래우와좌우를 들러싸고 색기로얼거매서 솟아구리에언고 불을때여 징을하게 띄여 이삼일만에 집어내여먹으면 매우아름다와 말똥에 뭇는이보담 나으니라전주서 당그는법은 가을에모밀을 정하게댁겨한말을복고 콩닷되를복가 거피하고 함께가루내어 속뜨물에 반죽하야 호도알보담 크게다뭉치시루에쩌내여 콩입히나 뽕닙흐로 경지노아서 띄여 누르고 흔옷을입어 절로말으기를기다려 다시말려 정이씨서 가루내어 조흔간장에 반죽하고 어린의와가지를 꼭지따 정이씨서말리고 항아리에 물끼업시한후에 가루반죽을 먼저깔고 의와가지를느어서 케케이 석반대에깔되 항아리를 거의 채거든 의와가지꼭지 잇는것으로덥고 유지로 봉하고 다른걸로 또싸고 진흙으로 항아리를 왼통발나 말똥속에뭇고 삼일에한번식 더운물을 그우에 주다가 이러케한지 아흐레만에 끄내여 꿀을조곰타 말을아울려 먹나니라 하절집장【夏節汁醬】 간장에 맛조흔것 한사발에 찍기버린밀기울 네흡을합하고별로이 푸른외를 정이씨서 헌겁흐로흠처말려 이왕합한것과 모도 항아리에너코 새똥말속에무든지 열나흘이면 쓰나니라 말똥대신에 푸른풀을비여다가 그속에 항아리를 너도 조흐니라또는 조흔며주가루에 조흔간장 한사발과 엿기름가루 반흡쯤넛퇴 엿기름이 만흐면 맛이다라조치못하니라 세가지를합하야 석거노코 의외가지를 물만치 안은것과 동아를 손벽만큼 조각을하야 껍질과 씨는빼고 모도정이씨서 흠처말리고 모다케케로 합한것과 격지하야너코 뚝게덥기는 전법과 갓치하고 풀을만히 비여다가싸코 풀가운데를 헷치고 항아리를너코 또풀로 덥허두면 자연히 떠서익으리니 만일 너무뜨면 맛이변키쉬우니 매일오시에 랭수를 풀에뿌리고 거적들로더덥흐면 열나흘안에 내여먹으리니 여름이더워다시변키쉬우니 항아리를 랭수에 당가두고 먹으라 집장속에 넌는것이 비단의와가지뿐아니라 동아나 풋고초나 무나 여러가지 채소나 과실이나 여러가지고기나 생선등물을 모다너어도 조흐니라 가집장【假汁醬】 의와가지가 연한걸로 각기배를 열십자로째고 잠간살마내여 물끼업시 말갓케흠치고 차와 생강과 마눌 과천초등물을 잘게써러열십자속에 느은후에 의와가지가 한말이면 맑은장한사발에 참기름닷흡을 함께대려서 드러부엇다가 먹으면 그맛이 참집장보다 나으니라 이것은 여름에맛당하되 오래둘수눈 업나니라 무장【물장, 담수장(淡水醬)】 조흔콩으로 속을썩지안케 잘띄고 잘게만든며주를 아못조록 섯달안에 띄워서 밧삭마르거든 너덧에 쪼개여물에당가솔로 것츨정이씨고 정한물이 나도록씻되 오래당그지는 말지니 다 씨슨후에 채반에건저 볏헤밧삭말려 돌덩이와 가티 되거든 다시물에 한번씨서 조흔랭수에 당그되 가량물이 한사발이면 며주는 적은주먹만 한것을 삼분이쯤되게 늣퇴쪼갠덩이를 그냥너코 물이너무 만흐면 물거저맛이업나니 다느은후에 왼고초를물한사발에 두개쯤 꼭지따고 짜커여 씨를정실히터러빼고 느은후에 어디든지 얼지안을 데에노코 아구리를 꼭봉하고 차게익혀야 맛이더욱 싱싱하니 겨울은 한니레요 봄은 삼사일이면 의나니 뚝게를 열고보아서 며주덩이가 떠올나야 다익은것이라 그제야 간빠진 소곰을 처가며 휘저어 슴슴하게 간을맛출지니 떠먹을제 고초가루를 쳐서먹나니 다시 두부를 멧채든지 것츨흠처두세덩이에내여 집어너엇다가 수일후에 며주덩이와 함께떠서머그면 고소한맛을 칙량치못하나니라 파다가리를 조곰채처놓고 조흔초도 조곰처서 먹나니라처음당글때에 물을끄려 먼저차게 식혀가지고 당가도조흐니 만이당그려면 분정하야 당글지니라이런쉬운 무장한가지라도 시골은 말도말고 서울서 음식좀한다는 집에가서 먹어본즉 벌서빗이검붉으니 며주를속이검께 띄인것이요 맛이짜니 저센소곰을 만히친것이요 또 고초씨가 둥둥뜨니 만드는니가 음식에 개결치못하야 고초씨하나를 정실히 빼니 그집음식은 가히알지니라이무장은 적응항아리에 자조당가먹을것이요 한꺼번에는 만히당그지 말지니라 또 맛에취하야 너무먹으면 근본이 도시두부(豆)라랭하기쉬우니라대체 이무장맛과 동침이맛은 무엇이라 할수업시 오미박게버서나는 이상스럽고 희한한맛은 음식중에 멧백길 뛰엿든것으로 알것이니라또속히 먹으려면 더운물에 소곰을타고 당가서 더운방이나 벳헤노으면 속히익나니 먹을제 풋나물등을 느어먹으면 맛이조흐니라 아마속히만드는데는 먼저더운물에 당근후에 소곰치는것도 무방할듯하노라대관절이음식이 그릇에 떠논것이 빗이놀으고 고초가루를 씌운것이 보기에 조흐나 아니먹는사람은 보기도드럽게보니 이런맛을 모른이안테는 음식말을말지니라 어장【魚醬】 무삼생선이든지 성한것으로 토막처 정이씨슨후 한근가량에 복근소곰석량증과 천처와 희향과 건강과 한돈중과 식곤두돈중과 흑국닷돈중에 술을분정하야치고 생선과한테버무려 질그릇에너코 잘봉하야 둔지열흘이면먹나니 먹을때 파꼿(花)을 조곰더하야 먹는것이 조흐니라 육장【肉醬】 정육을 심줄과 뼈를빼고 너근과 간장 한근반과 곱게만든 소곰넉량중과 파흰거 잘게써러 한사발과 천초와 희향과 진피각 오륙전중을 슬처버무려 짓닉여 고기와함께된죽과 갓치하야 질그릇에너코 단단히봉하야 뜨거운볏흘 쬔지십여일에 여러보아 말낫거든 다시솔을치고 숭겁거든 다시 소곰을치고휘저어 벗헤또쬐이면 자연맛이나나니라우리나라에서 고기로 장을당그려면 장에살마익히거나 흑잠가서제리거나 할따름이니 그법이한갈갓지는 안으나 다 젓당그는것과 갓트니 지나사람이 육장이나 어장만드는것은 소곰이나 장이나 각색향기로운 재료를너어 당그나니라 청태장【靑太醬】 새로나는 청대콩을 껍질벗기고 콩알을끄내여 시루에쩌서 짓찌여 둥글게하기를 저근칼자루갓치하야 섬이나 둥구미에너코 콩입흐로 격지노아덥고 며주띄여 내여말려 장당그는법과 갓치하면 맛이이상히조흐니라또는 며주띌때에 가랑닙흐로 하나식싸고 집흐로얼거서 섬에너허 다뜨거든 집어내여더운데 한사날을 뒤집어가며 말리거나 볏헤내여 말려도 더욱좃코 장을당글제 소곰을 조곰넛코 익거든 곳먹을것이요 그러치안으면 버레가 나기쉬우니라 만일 며주를 여러날말리면 오래두어도 장이 관게업나니라 콩을살물제 물을조곰 부어야하고 다른며주 만을듯이 물을만이 붓지말것이니라청대콩을 며주만드는 법은 이우와 갓고 콩을 살물때 햇고초를 짜커여 요량하야 느엇다가 콩이다익거든 고초는 내여버리고 쓰면 맛이이상하니라 장당가속히되는법【순일장(旬日醬)】 며주를 더운물에 당근지 두어날되야 물이다드러가거든 독을땅에뭇고 독전이땅과 평평이하고 독에사면으로 둥게나 부리집을 잔뜩처넛코 장당그기는 전법대로하고 뚝게를꼭덥허서 연기가드러가지안케하고 게에다가 불을질으면 겟불이삥돌나 붓틀터이니 돌라가며 물을조곰식때때로 뿌려주면 불이다꺼지지안코 겟불이 속속히드러가 연하야 타기를 긋치지안을지니 한열흘이면 장이되나니라또는 콩한말을삼고 밀닷되를 까불러 모래를업시하야 복가작말하고 콩과한테반죽하야 땃뜻한방에펴노아 누른빗나도록 띄여서 두세번을 볏흘쬐야 밧삭말린후에 소곰엿되를 더운물에타서 장을당근후에 볏바른데노코 자조휘저면 니렛만에 장이잘되나니라또는 콩한말을삼고 누륵석되와 소곰네흡으로 한데짓찌어 항아리에넛코 단단이봉하야서 볏헤노아두면 맛이조흐니라 급히청장만드는법【청장(淸醬), 준순장(浚巡醬)】 소곰칠흡을 매우복다가 밀가루 팔흡을 소곰치고다시또복가서 빗치누른후에 따로 맛조흔 무근간장세흡에 복근것을넛코 물여섯사발타고 한데대려서 네사발쯤되면 마시조흐니라또여러해된 굴젓(石花)집을 한되짐다려 반되찜되면 조흔청장이 되나니 다른청장과 조곰도다름이업스나 메역국에치면 비려서못먹나니 그러하나 장이되는것이 이상하니라 남양등지에서는 모도이굴장을 만드러서먹나니라 고초장당그는법【고초장(苦草醬), 만산장(蠻醬), 날장(辣醬)】 고초장이라 하는것은 어느때낫는지 모르거니와 필시간장이 난뒤에 낫슬것이요 가진반찬중에 대단이 요긴한것이라 딸고 짜고 매우며 조곰새곰한것은 숭거와 익은것이니라 요만큼 반찬되고 비위에맛고 여러군대 쓰기는 잔장다음은 되나니라 또 이것을돈주고 살수업는것이 일왈며주를정성드려썩지안케 잘띄워야하는것인데 간장에며주보담 더정성을드려야하는것이요 둘재는 그초를가루만드는것이니 산밧헤 거름을덜하고 심문고초는 빗도누르고 단맛이업고 맵지안하야 못쓰고밧헤서 거름을만이하고 길러서 맛물에 딴고초는굴고살이둑겁고 빗치붉고 맛이단것이라 이것을 꼭지도 정실이따고 씨는하나도 업시떨고 밧삭말려 짓여서 깁체에처야하나니 이두가로만 법대로당그는것이니 엇지돈주고 진품을 어들수가 잇스리요 쉽고도어려워 대강기록하나니 며주한말을 쑤거든 묵은쌀 두되를 흔무리떡을맨드러며주에느어가티찌여 잘게덩어지여 띄인후에 극히 가늘게말을하야 가루한말에 소곰석되와 고초가루 한되를석고 찰밥두되지여 밥알이풀리게 저어 닉히나니라고초장은 풀리게저어 익히기도하려니와 또 되게하야 반죽을만들되 국수반죽 하듯하야 놋그릇에여러번쳐가며 된떡처럼만드러 항아리에 넛코 익히면 맛도조코 가시가 아니나나니라 여러번칠사록조흐니라 또 비단 그릇에 여러번 칠분더러 절구에 넛코 흠벅찌여서 하는것이 더욱조흐니 아모조록 되게반죽을 하여야 매우조으니라 엿기름가루를 느으면 맛이달고 밀가루를너으면 모양이하륵하륵하야 더욱조흐니라순창서 고초장 당그는 법은 넓은자바기에 당가서자주 저어익힌후에 고은체에 걸르고 엿기름을 만이넌느니라행용 고초창은 찹쌀이아니라도 멥쌀밥도조코 메주쌀을 가루내어 죽을쑤워며죽가루와 소곰에반죽하야 되게당그면 맛이달고조흐나 좁쌀죽을 쓸적에 눌기가쉬우니 자조저어야 하나니라 만일 차좁쌀을 죽쑤워느으면 더욱이 맛이조흐니라 댁긴보리나 밀을느어도 조흐니라 이윗것을다죽을 쑤워도 조커니와 죽을쑤어쓰는것이 페릅거든 떡찌듯 시루에쩌서하는것이 더욱이편하고남기덜드나니라고초장이 익은후에 각색것을 넛나니 과이느으면 조치안으나 한두가지식 대강느으려면 날무를수득수득하게하야 느커나 무말랭이나 생웨나 참외나 등아나 더덕이나 우무나 송이나 가지나 풋고초나 풋감이나 마늘볏긴거나 마늘풋것적에 종나오는것과 줄기나 외를잠간저려 맷돌에 누른재나 실백잣이나 여러가지를 는나니 쇠고기를 널게접여 날로넛다가 먹으나 고초장은 해묵히기가어려우며 전복이나 도미나대구나 숭어등물을 물끼업시하야 넛키도하고 비웃을 대가리와비눌을업새고 반수득되거든 넛키도하고 말은대구나 북여나 왕새우나 멧치를 그냥넛키도하려니와 가루내어 눈는것이 더욱조흐니라 이외에 또 무엇이든지 가이널만한것을 생각하야 너흘지니라 북감저(北甘藷)를씨서쩌내여 껍질벗기고 윽개여 고초장당글제 한데넛코 버무려당가도 조흐니라시골서는 고초장이나 된장에다가 어린콩입흘느엇다가 먹기도하고 전주서는 생강줄기를 기럭지째 만이재여띄엇다가 물에맑앗케빠라 한모슴식비트러짜서 역거말려서 고초장에 느을적에 잠깐씨서 흠치여 느엇다가먹나니 이것이 생각줄리라 강엽(薑葉)이라하는것을 개양이라고 그릇불으나니라법대로만든 며주가하루한말에 고초가루세흡과찹쌀가루한말을 모다합하야 맑은간장을 처가며 주물러 되게하야절구에 찐후에 적은독에 늣코 볏흘쬐야잇히나니라또콩한말을 두부만드러물끼를 짜버리고 여러가지널만한물건을늣코 주물러반죽하야 고초장에넛다가먹으면 맛이조흐니라 반죽할때에 소곰이조흘듯하나 달고맛잇는간장에 하는것이 더욱조흐니라또 마른생선을 비늘과 대가리잘나 조각을만들어 익히면 맛이매우 조흐니라 또법은 멥쌀을 정이쓰으러 가루내어 흔떡만드러노코 콩을정이씨서 떡과등분하야 시루에쩌서 물으게찌여 며주멍이를 어린동애죽먹만콤만드러 솔닙흘 격지노와넌지 삼칠일이면 읏이입을게니 볏헤맛삭말려 작말한뒤에 고초가루와기름과 꿀과 모다약렴을석거항아리에늣코 볏헤노와익히나니라 법은 콩을 모래업시 이러버리고 법대로며주만드러 가루내어 한근가량에 고초가루세흡과 찹쌀가루한되와 이세가지를 조은장에 반죽하야 되게하야 항아리에넛코 볏헤놋나니 흑 깨소곰다섯흡을 너키도하나 나증에기름지고 말나서오래견디지 못하나니 찹쌀가루 를만이느면 맛이시여조치안코 고초가루가 넘우만으면 패와서 맛이조치못하니라 온갓고초장을 강소곰에 반죽하는것이을으나 조흔간장에 버무려하니만 맛이못하니라 소곰물은 질게하는 고초장에나 쓰거니와 오래두는고초장은 되게하나니 강소곰을쓰나니라 급히고초장만드는법 콩한말을 눌으게복가 매에가라 껍질을까불러 버리고 물붓고살마건저내여 집은버리고 집재리에꼭싸서 더운방에 둔지사흘이면 줄이날것이니 콩가루서말과 한데절구에넛코 흠벅찌여 한말가량에 고초가루 세흡이면쓰나니 소곰물을 짜고승거운것을 맛추워가며 석거 단단한떡처럼만드러 항아리에넛코 볏을쬐이면 니렛만에먹게되고 보름이 지나면더욱조흐니라 팟고초장【소두고초장(小豆苦草醬)】 가량 콩한말을 쑤다가 조곰무를만하거든 조흔적두 일곱되를 씨서느어 한데쑤어 팟물이 콩에드도록쑤는데 팟과콩과 처음한데 쑤으면 팟이 넘우 물거저못쓰니 반쯤콩이 붓거든 팟을 너어다무르거든 절구에찌을때 흔무리닷되만만드러한데찌어 메주덩이를 조곰조곰식 만드러 다뜨거든 말린후에 가루를만드러 고흔체에 쳐 서노코 조흔찹쌀 한말닷되를 쩌서식흔후에 며주가루와한데버무려 여러날저으면 다삭을테니 그때에소곰과 고초가루를 느어버무려당그면 멧칠안되야먹나니 빗은검고 맛은달고 모양이 한단젓과 가트니라 물론 휘절만치느어버무리나니라또법은 동지후에 붉은팟을 떡팟처럼 물으게 살마내여 읏개여 볏헤말려 가루내어 체에치고 며주와 참쌀가루가 가량두되면 팟가루가 한되쩜석고 물을질게붓고 되거든 또물을붓나니 고초가루는 식성대로 늣코방망이로 저으면 몃칠아니되야익나니 날이치우면 방에드려놋나니 다익을제산포를밧삭말러 가루를하거나 큰새우가루를느으면 맛이 대딘이 조흐니라 벼락장 며주코 나문무거리를 물붓고 굵은고초가루를늣코 한참 저엇다가 방에하로밤만 지내여 소곰치고 쩌먹으면 맛이이상하고 조흐니라쳐음며주에 물을부면 며주찍기가 뭇기를잘하니 연하야 물을쳐가며 붉도록하여야조흐니라 엇지급히맨드러 먹든지 벼락장이라하나니라 찔때에 고기와과와기름치고 찌개뚝백이에 찌는대 두부를느어도 조흐니라 두부장【豆腐醬】 두부를 열아문체가량을 헌겁주머니를 짓고쳐느어여서 맷돌에눌러 물끼를 뺀후에 고초장속에 너흘제 아구리를 동여매여 느엇다가 이삼삭만에 주머니를열고 끄내면서 먹으면 맛이이상이고소하니라 비지장【粃之醬】 비지와 밀기울을 등분하야 함께쩌서 며주쳐럼 반죽지여 항아리에담아 누른옷입거든 내여말려가루내어 서말쯤되거든 소곰한되를늣코 당그나니라 잡장【雜醬】 노루고기와 양의고기와 특기고기나 아무고기든지 내장과 심줄빼고 너근가량에 며주가루한근반과 소곰한근찜흑은 넉량중과 팟대가리 썬거한사발과 량강 천초 무이(無荑)진피 각이삼량중에 술을부어 버무리되 된죽쳐럼 만드러 항아리에늣코 봉한지 십여일만에 여러보아 되거든술을더치고 승겁거든 소곰을더처서 볏헤쬐이되 기운이아니나게 단단이 봉하여야 하나니 아무리 잡장이다도 이상한장으로 아노라 된장만드는법【시】 시라하는것은 기(嗜)라 하는말이니 오매를 조화하야 만들면 가이달고맛이잇게 먹는고로 질길기짜를 일으니라 지나사람은 찬수만드는데 이된장을 가이절치 못할것으로아나니 우리나라에서느 담언약에만 널줄알고 먹는다 하는것은 장뜬된장이나 청국장이나 먹엇나니라 청국장도 만드러 국이나 끄려먹기로 국만드는데 적엇고 맨청국장만 소곰타고 약념하야 먹는것은 몰으니 일본사람먹는것도 랍두(納豆)라 하는것이 이게니라된장에도 숭겁고 짠것이잇스니 짠것은 설문(說文)이란책에 배염유숙(配鹽幽菽)이라하엿스니 소곰을짝지여 콩을띈다 하는말이니라우리나라에서도 된장을 조흔것으로 먹으려면 며주를이우와가티 정성스럽게 만든것을 장당그듯하되 소곰물을 우와가티 정이타되 조곰슴슴토록할것이요 소곰물을붓되 며주가 겨우플릴만치불지니 나종에 아못조록 되직하게 당거서 익거든 자연장은 뜰수업고 지직할지니 그냥두고 무엇에늣튼지 그냥약념하야 먹든지하면 일본된장보담 백배나은것은 여기서하는며주는 순저한 콩으로만 하는것이요 일본된장은 보리나밀을 늣나니 여기된장은 천하에 제일되는 맛이여늘 아모리구차하고 맛을분변치 못하기로 비료에나 쓰게되는 장은다뜨고 나문찍기를몃백년 몃천년을 먹어왓스니 붓그럽고 가여운일을 말할수업노라된장을만든후에 무를 수득수득하게말려서 넛다가 집어내여 써러먹어도조코 굴근풋고초를 꼭지째 느엇다가 찌개할제 그냥늣튼지 써러늣튼지 하야먹으면 매우조코 기외에 무엇이든지 느엇다가 먹어도조흐니라 승거운된장【담시(淡醬)】 굵은검정콩을 두세말가량을 륙월안에 정이이러하로밤물에 당갓다가 건저물비거든 쩌익혀서 돗재리에 펴너러 다식기전에 쑥으러덥허 사흘만에 한번식 보아 누른옷이 왼통오르되 넘우띄지말고 몃헤말려 까불러 정이하고 물로반죽을하되 반쯤질게하고 집어손구락사이로 나오게하는것이 도수가되나니 다주물은후에 독에단단이늣코 뽕나무입흐로 세치둑게나 되게덥고 꼭 봉하야 볏헤쬐인지 일엣만에 끄내여 한식경을 말렷다가 또 물로반죽하야 독에늣나니 이가티하기를일곱번을하야가지고 다시쩌서 펴너러 더운기운을다빼고 독에느어 봉하야두면 된장이 되나니라또 굵은 검은콩을 얼마든지 시루에찌되 비린것만 익히는것이 도수가되나니 쏘다헤첫다가 더운김에 용수가튼데늣틔 가지(茄)를한층식 것드려넛코 바람업는곳에두고 아래우와 사면을 푸른볏집흐로 휩싸서둔지수일만에 여러보면 누른옷이 왼통씨거든 끄내여 하로볏흘뵈고 그이튼날 더운물에 씨서건진후에 붉은차지기입(紫蘇葉)흘써러 함께반죽하야 더운볏헤쬐여 밧삭마른후에 질항아리에넛코 꼭봉하야두나니라 짠된장【함시(鹹)】 굵은콩한말을 물에당근지 사흘만에 건저쩌서 삿자리에 쏘다펴넛코 덥허서 누른옷입거든 끄내여 물에넛코휘저어정이하고 다시건저 말릴것이니 너근가량에 소곰한말과 생강썬거 반근과 호소와 귤치와 소엽과 화향씨와 모도석거독에넛코 물을한치나 더오르게붓고 입사귀로덥고 뚝게를꼭덥고 볏헤논지한달이면 되나니라또 법은 검정콩한말을 약간쩌서 하로볏흘 쬘지니 먼저 외 스무개와 가지마흔개를 각각잘게썰고 화향너돈중과 복근소곰넉량중과 모도버무려넛코 덥흔지사흘만에 조흔술을 두루뿌리고 다시쩌서 퍼내여 소곰넉량중을 치고버무릴제 또조흔술을 조곰뿌리고 볏헤 퍼너러 하로만쬔후에 질항아리에 꼭꼭다저넛코 조희로 두어번봉하거나 진흙으로 봉하거나하야 삼복중에 볏헤놋는것이조흐니라 또 법은 큰콩을 누르게쩌서 한말가량에 소곰너근과 천초넉량중과 함께쩌리되 붐과가을은 사흘이요 여름은 이를이요 겨울은 닷새면곳반쯤익나니 다시생강을잘게써러 닷량중을석거 그릇에넛코 아구리를 꼭 봉하야 땅에붓고 쑥이나 무삼풀이든지 말똥이든지 둑겁게덥고 한니레나 흑두니레만에 먹나니라 메주는 ≪동의보감≫에 의하면 “두통한열(頭痛寒熱)을 다스리고 땀을 내게 한다. 따라서, 메주와 파를 섞어 먹거나 메주·형개(荊芥)·방풍(防風)·상엽(桑葉)을 함께 달여서 한 사발 마시고 이불을 덮고 있으면 온몸에서 땀이 흐르고 이열치열의 원리에 의하여 열이 내리게 된다.”고 하였다. 이 밖에 “메주는 식체를 지우고 천식에도 효과가 있다.”고 하였다. 장은 “모든 어육·채소·버섯의 독을 지우고 열상과 화독(火毒)을 다스린다. 또, 장은 흔히 콩과 밀로써도 만들지만, 그 약효가 두장에 미치지 못하며, 해(醢)라고 하는 육장과 어장은 약에 넣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우리 선조들 속에서는 장을 정성들여 담그는 풍습이 일찍부터 생겨났다. 장맛이 음식맛을 좌우하였기 때문에 민간에서 장을 맛있게 담그지 못하는 며느리는 시어머니로부터 미움을 받는다는 말까지 생기게 되었으며 심지어 노인들은 장을 담글 때에 집식구들이 나들이를 가면 장맛이 나들이가는 집으로 따라간다고 하면서 나들이가는 것을 막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한민족의 식생활에서 장 담그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고 장을 맛있게 담그는 일에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가졌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우리 민족이 장을 만들어온 역사는 장의 기본 원료인 콩이 원시시대부터 재배되었던 만큼 매우 오래다. 덕흥리 고구려벽화무덤의 묘지명에 집단노동으로 큰 공사를 벌일 때 흰쌀밥, 고기, 술과 함께 장도 한 창고분이나 먹었다고 하였으며 『삼국지』에서는 고구려의 장 담그는 솜씨가 훌륭하다고 하였다. 장은 사람들의 창조적인 지혜와 음식가공 기술의 발전, 풍부한 경험에 의하여 날로 그 질이 개선되고 종류도 늘어났으며 맛도 더 좋아졌다.1) 장은 대체로 정월 우수 또는 10월 입동 때에 담갔는데 그것은 이 시기에 장을 담그면 변질되지 않고 잘 익었기 때문이다. 장은 콩을 삶아서 메주를 만들어 가지고 담갔다. 『규합총서』, 『증보산림경제』를 비롯하여 여러 기록들에 의하면 장 담그는 법은 다음과 같다. 콩을 하루쯤 불린 다음 큰 가마에서 충분히 익혀 방아나 절구에 찧는다. 이것을 둥글게 빚어 단단하게 만든다. 이렇게 만든 메주를 볏짚에 싸서 두세 달 잘 말려서 굳어지면 물에 깨끗이 씻어 독에 넣는다. 이때 독 밑에 숯불을 피워 놓고 꿀을 조금 넣어 타는 냄새가 날 때 메주를 넣는다. 소금과 물을 1대 3 비율로 타서 독에 가득히 붓는다. 매일 이른 새벽이면 반드시 장독 뚜껑을 열고 맑은 공기를 쏘이고 아침 햇빛을 쪼이며 맑은 물로 장독 곁을 깨끗이 닦아낸다. 이와 같이 한 목적은 장이 익는 과정에 변질되지 않게 하며 나쁜 균이 침습하지 못하게 하려는 데 있다. 10월 입동에 담근 메주에서는 두 달쯤 지나면 맛이 우러나면서 까만빛의 물이 생기는데 이 물을 가마에 붓고 졸이면 간장이 된다. 간장 만들고 남은 것에 메주 부스러뜨린 것을 소금물에 담가 삭히면 된장이 된다. 메주는 소금물과 배합되면서 익는 동안에 효모성분이 생겨나고 발효되는 과정에 구수하고 단맛을 내는 장이 된다. 우리 선조들은 장맛을 더 돋우기에 힘썼으며 언제 어느 집에 가도 그 집 음식맛은 장맛이라고 일러왔다. 그리고 여성들의 일솜씨와 재주도 바느질, 부엌일과 함께 장 담그는 솜씨를 가지고 평가하였다. 장은 오래 묵혀 둘수록 더 맛있다고 하여 우리 선조들은 한두 해 또는 그 이상 저장해 두고 일상적으로 먹었다. 과거 우리 민족의 식생활에서 간장은 주로 조미료로, 된장과 고추장은 중요 부식으로 많이 이용되었다. 된장은 그대로 먹기도 하고 기름을 두고 끓여서 풋고추나 풋마늘을 찍어 먹기도 하였으며 파 또는 풋고추를 썰어 넣고 부글부글 끓여 먹기도 하였다. 된장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대표적으로 담북장, 고기장을 들 수 있다. 담북장은 콩을 급하게 띄워서 만든 장이다. 콩을 잘 불렸다가 삶아 익혀서 볏짚바구니나 볏짚 속에 넣어 따뜻한 곳에 놓아둔다. 며칠 지나면 콩에서 진이 생겨나고 향기로운 냄새가 난다. 이것을 절구에 넣고 소금간을 하면서 찧는데 성글게 찧은 굵은 고춧가루, 마늘, 생강을 넣고 잘 버무려서 단지에 넣은 다음 찬곳에서 익힌다. 고기장은 쇠고기, 꿩고기, 닭고기, 숭어, 도미, 생복, 홍합 등의 재료를 넣어 만든 것이다. 된장에는 이밖에도 뗏장, 집장, 청대장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고추장은 고추가 재배되던 조선시대부터 만들기 시작하였다. 고추장은 쓰이는 재료와 만든 솜씨에 따라 그 맛이 다르다. 『규합총서』에 쓰여 있는 고추장 만드는 법은 다음과 같다. 흰쌀과 삶은 콩을 갈아서 만든 메주를 띄워서 잘 말린 다음 부스러뜨려 가루를 낸다. 메줏가루에 소금물을 타고 고춧가루, 찹쌀, 쇠고깃가루, 대추 다진 것, 꿀을 두고 버무려서 익힌다. 이때 찰밥에 엿기름을 두어 삭힌 것을 얹으면 단맛이 많아지고 변질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고추장 만드는 다른 방법도 전해지고 있다. 흰쌀가루를 반죽하여 쪄서 띄운다. 찹쌀가루를 익반죽하여 둥글게 빚어 익힌다. 거기에 빛깔 고운 고추에서 씨를 털어버리고 낸 고춧가루에 흰쌀가루 띄운 것을 섞어 넣고 간을 맞추어 잘 삭힌다. 고추장은 사람들의 입맛을 돋우는 부식으로 많이 쓰인다. 조선시대 기록에 고추장 맛이 좋아 그것을 보기만 해도 입맛이 늙지 않는다고 한 것은 고추장이 입맛을 돋우는 부식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고추장에는 재료와 만드는 방법에 따라 멥쌀고추장, 찹쌀고추장, 보리고추장, 팥고추장, 고기고추장, 약고추장, 떡고추장, 우거지고추장 등이 있다. 고추장은 매우면서도 감칠맛이 있어 매운 줄을 모르며 짜면서도 맛이 좋아 한번 더 먹고 싶게 당기는 맛이 있으며 달면서도 뒷맛을 감싸주어 다른 음식과 잘 어울린다. 특히 여름철에 풋고추나 풋마늘을 고추장에 찍어 먹는 것은 계절적인 풍미와 신선한 채소의 맛을 함께 맛볼 수 있게 한다. 어느 지방에서나 다 고추장을 담갔지만 우리나라 고추의 명산지인 전라도 순창의 고추장이 특별히 맛좋고 질이 높아 전국적으로 이름났으며 개성과 충청도 청양의 고추장도 유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장의 역사 장맛을 결정하는, 메주" 한국, 중국, 일본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같은 콩장 문화권에 속해 있다. 장(醬)이란 글자는 중국의 〈주례〉에 처음 등장하지만 이 당시의 장은 콩으로 만든 장이 아니라 고기를 재료로 한 육장이었다. 콩으로 만든 장은 우리나라의 삼국시대부터 만들기 시작한 장을 원조로 보는 것이 옳다. 처음의 장은 발해의 ‘시’로 콩을 낟알로 발효시켜 만든 지금의 메주장에 해당하며, 고려시대에 들어서는 콩을 찧어 덩어리로 발효시킨 ‘말장(末醬)’이 등장한다. 바로 이러한 ‘시’나 ‘말장’이 오늘날 우리 장의 원조로, 이것이 중국으로 건너가 콩으로 만든 장문화를 싹틔우고 일본으로 전해져서 ‘미소’라는 일본 장의 유래가 되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신문왕의 결혼 예물에 장과 시가 포함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시대에는 백성들의 구휼식품으로 쌀, 조와 함께 장과 시를 배급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장 자체를 메주라 불렀으나 조선시대에는 장을 만드는 누룩을 메주라 하고, 장은 간장이나 된장으로 세분화되어 발달했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메줏가루에다 고추를 이용한 만초장(고추장) 제조법이 개발되면서 이때부터 독특한 장문화가 뿌리내렸다. 장 우리 음식문화" 민족마다 선호하는 맛이 있고 그 맛을 내는 조미음식이 있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장을 이용하여 간과 맛을 맞추었고, 시대가 바뀌고 생활양식이 변해도 아직까지 우리네 살림살이에서 가장 중요한 두 행사는 ‘장 담그기’와 ‘김장 담그기’다. 장은 밥을 주식으로 하고, 부식으로 여러 가지 반찬을 곁들이는 우리 식생활에서 음식에 반드시 들어가는 필수 조미료다. 예전 우리의 채식 위주 식생활에서는 단백질 섭취가 부족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현명한 우리 선조들은 단백질과 지방이 함유된 콩을 이용한 콩 발효식품을 주요 단백질 공급원으로 이용해 왔다. 옛 문헌 〈증보산림경제〉 ‘장제품조’에 보면 “장은 모든 음식맛의 으뜸이 된다. 집안의 장맛이 좋지 않으면 좋은 채소와 맛있는 고기가 있은들 좋은 음식이라고 할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장은 한국 음식의 필수 조미료였다. 한마디로 장은 우리 민족에게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이자 한국 음식의 맛을 내는 근원이다. 메주는 짚" 좋은 장맛을 내기 위해서는 메주를 만들 때부터 콩을 잘 골라 잘 띄워야 한다. 메주를 쑬 콩은 가을에 수확되는 햇콩으로 알이 굵고 잘 여물고 벌레 먹지 않은 것을 선택해야 콩이 잘 무르고 발효가 잘된다. 메주를 빚어서는 짚으로 묶어 매달아서 말리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 메주는 자연 상태에서 미생물을 만나 발효되고 미생물이 잘 번식하게 된다. 이때 생긴 미생물은 단백질 분해효소(protease)와 전분 분해효소(amylase)를 분비하여 콩의 성분을 분해한다. 메주의 숙성 및 발효에 관여하는 주 미생물은 바실러스 서브틸리스(bacillus subtilis)로 물 맑고 햇빛 좋고 공기 깨끗한 우리나라의 기후조건에서 활발한 작용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바실러스 서브틸리스는 짚을 좋아하는 성질을 지녀 짚에서 잘 자란다고 한다. 특별히 이러한 과학적 원리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우리 조상들이 경험으로 짚을 사용한 지혜가 더욱 돋보인다. 또한 장독대에 짚으로 왼새끼를 꼬아 금줄을 치는 이유도 잡귀가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의미와 함께 과학적으로 볼 때 바실러스 서브틸리스균의 배양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발효되는 메주" 콩을 삶아 종균을 묻혀서 7일 정도 발효시키는 간편한 방법으로 만든 메주가 요즘의 개량 메주다. 재래 메주와는 달리 콩 모양이 한알 한알 그대로 살아있는 것이 특징이다. 단맛이 많아 개량 메주로 간장을 담그면 간장은 달지만 된장은 재래 된장의 맛을 따라가지 못한다. 개량 메주는 제조할 때 종균이 잘 묻도록 하기 위해 밀가루를 약간 넣는다. 그런데 일부 개량 메주는 밀가루 범벅에 콩알을 굵게 만들어, 장을 담그면 곰팡이가 나거나 끓어 넘치는 경우가 있으므로 고를 때 주의해야 한다. 개량 메주를 고를 때는 콩알을 깨뜨려봤을 때 표피가 얇은 것을 택하는 것이 좋다. 색깔이 너무 희거나 검은 것은 온도 조절이 잘 안 된 것이다. 장독 뚜껑 열고, 닫기." 장을 담그고 난 뒤에도 아낙들은 장독 관리에 온 정성을 쏟았다. 우선 장을 담근 후 3일간은 장독 뚜껑을 덮어두었다가 햇볕이 좋은 날 아침에 뚜껑을 열어 하루 종일 볕을 쬐고 저녁에 덮는다. 항아리 입구는 망사를 씌워 이물질이 들어가지 않게 주의하며 특히 비를 맞으면 장맛이 변하므로 흐린 날에는 장독 뚜껑을 열지 않았다. 볕을 쬐는 이유는 햇볕이 유해 미생물을 제거하고 유익한 미생물의 증식을 향상시켜 발효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또한 장독은 기울어지면 물이 괸 쪽으로 백태가 끼게 되므로 장독이 기울어지지 않게 주의하고, 여름철에 자칫하면 곰팡이가 피기 쉬우므로 장 관리를 철저히 했다. 장독 속에는 붉은 고추, 대추 등을 넣거나 달군 숯을 넣어 띄우고 짚으로 왼새끼를 꼬아 독 어깨에 매어놓았는데, 이는 모두 잡귀를 쫓기 위한 수단이었다. 때로는 버선본을 종이로 오려 독에 거꾸로 붙여놓는데 장맛이 변치 않고 제 맛으로 돌아올 것과 장을 더럽히는 귀신이 버선 속으로 들어가 나오지 못하게 하려는 뜻이다. 장독에 벌레의 접근을 막으려면 항아리의 망사 덮개 한가운데에 굵은 소금을 한줌 올려놓으면 된다. 깊은 맛, 된장"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식품으로 자리를 지켜온 된장. 집집마다 한해 양식거리를 장만하는 첫 순서가 좋은 메주를 골라 장을 담그고 된장을 만드는 것이었고, 된장의 맛이 한 집안의 음식 맛을 평가하는 척도가 되기도 했다. 그러한 된장이 이제는 맛을 내는 기본식품일 뿐만 아니라 항암 성분을 비롯한 갖가지 유익한 성분을 함유한 건강식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최고의 항암식품" 된장은 영양이 풍부하여 100g당 열량은 128kcal이고, 단백질 12g, 지방 4.1g, 탄수화물 14.5g 외에 회분, 철분, 인, 칼슘, 비타민까지 함유하고 있다.

우리 콩으로 만든 재래 된장의 항암효과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된장에 함유되어 있는 키토올리고당은 항암·항균 작용에 폐암 억제, 콜레스테롤 저하에 효과가 있어 마늘과 함께 최고의 건강식으로 각광받고 있다. 특히 우리 전통 된장 1g에는 키토올리고당이 91ul이나 포함되어 있어 일본 된장 1.8ul의 50배 이상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된장으로 만든 된장국이나 된장찌개에도 마찬가지로 들어 있다. 콩의 항암성은 삶은 콩보다는 생콩이, 생콩보다는 된장이 더 크며, 재래식 된장, 시판 된장, 청국장, 일본 된장의 순으로 항암효과가 있는 것으로 연구되었다.

된장은 단백질 함량이 높고 아미노산 구성도 좋아 소화율이 85% 이상이며, 특히 쌀에는 부족한 필수아미노산인 라이신의 함량이 높아 쌀밥을 주식으로 하는 우리들의 식생활에 질적 향상을 도모할 수 있다. 그중 된장 속의 필수지방산은 피부병 예방 및 혈관질환 예방, 정상 성장 등에 중요한 역할도 한다. 된장의 비밀" 된장의 색이 검게 변하면 된장이 상했다고 여기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된장의 색이 변하는 것은 자연에서 일어나는 노화현상과 비슷하다. 장류의 갈변은 주성분인 단백질의 아미노산과 탄수화물의 당류가 서로 반응하여 형성된 갈색의 멜라노이딘 색소로 인해 생기는 것이다. 발효 숙성이 진행됨에 따라 덜 익은 황금색에서부터 가장 식욕을 자극하는 약간 어두운 노란색을 거쳐 갈색으로 점차 변화하게 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된장의 갈색 색소인 멜라노이딘 색소는 인체에 유익한 작용을 하는데, 인체 내 내당성을 개선하고 트립신 저해작용 등으로 당뇨병의 예방이나 개선에 효과가 있으며, 위암을 발생시키는 니트로소아민의 생성 감소 및 유산균 증식 효과, 과잉 섭취된 철 성분과 체내 결합 방지, 유리기 발생에 의한 세포막 확산 방지 등의 다양한 작용을 한다. 재래식과 개량식 된장의 차이" 사먹는 된장과 집에서 만들어 먹는 재래 된장의 맛은 분명한 차이가 난다. 왜 그럴까? 재래 된장에서 된장 특유의 맛을 좌우하는 것은 메주를 자연발효시키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바실러스균이다. 전통적인 방법으로는 알맞게 띄운 메주를 소금물에 담가 40~60일 정도 두어 콩의 수용성 성분이 우러나오면 간장을 떠내고, 남은 건더기로 된장을 만드는 것이 기본이다. 오늘날 공장에서 급히 만드는 개량 된장이나 일본 된장은 메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삶은 콩에 밀을 섞어서 곰팡이균의 일종인 코지균으로 발효시켜 만들기 때문에 숙성기간이 짧고 재래식 된장보다 훨씬 단맛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된장을 만들 때 메주의 맛성분이 간장으로 많이 빠져서 맛이 덜해질 수 있다. 따라서 된장을 맛있게 담그려면 소금물의 비율을 간장 담글 때보다 적게 잡고 메주를 많이 넣는다. 그러면 간장은 물론 된장도 맛있어진다. 된장 보관법" 된장은 담그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관을 잘해야 맛있는 된장을 먹을 수 있다. 흔히 간장은 오래 묵을수록 맛이 좋아지지만 된장은 햇된장일수록 맛이 좋다. 만약 된장이 여러 해 묵어 맛이 나빠졌을 때는 멸치머리나 고추씨를 바싹 말린 다음 곱게 빻아 가루로 만들어서 된장 속에 군데군데 넣는다. 일주일쯤 지나면 빛깔도 좋아지고 맛도 몰라보게 달라져 새 된장을 먹는 것 같아진다. 햇된장의 색깔은 노랗고 윤기가 도는 것이 좋으며 특유의 냄새가 나야 한다. 된장은 습기가 있으면 장맛이 변하고 상하게 되므로 된장을 뜰 때는 반드시 마른 주걱이나 숟가락을 사용하고 뜬 후에는 반드시 꾹꾹 눌러 위를 평평하게 다진다. 만약 된장에 물이 고이고 곰팡이가 핀 경우에는 이것을 제거한 뒤 항아리에서 된장을 쏟아내 곱게 빻은 메줏가루를 더운물에 버무려 된장에 섞어 다시 항아리에 꾹꾹 눌러 담고 그 위에 소금을 수북이 뿌려 보관하면 된다. 된장은 먹을 만큼 떠서 냉장고의 낮은 온도에서 보관하는 것이 좋다. 이는 색의 변화를 억제할 뿐 아니라, 된장에 함유된 유익한 물질들이 낮은 온도에서 오랫동안 유지되기 때문이다. 된장'의 우수성" 된장은 청국장, 쌈장, 고추장 등과 더불어 콩을 발효시켜 만든 한국의 전통 발효 식품이다. 특히 곡류 단백질에서 부족하기 쉬운 필수아미노산, 지방산, 유기산, 미네랄, 비타민 등을 보충해 주는 영양학적 우수성과 많은 생리 활성이 알려져 있다. 된장은 영양학적 가치 이외에도 항비만, 고혈압 예방, 항암, 항산화 및 항혈전, 간기능 강화, 치매 예방 효과, 골다공증 등의 생리 활성이 알려져 있다. 콩에 포함된 생리활성 물질들은 된장에서 발효 과정을 거치면서 생체 내 흡수율이 증가되는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전통 된장은 우리 국민이 수 천 년 간 섭취해 온 콩이 자연 발효된 전통 식품으로 일본, 중국, 인도네시아 등의 콩 발효 식품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가장 큰 차이는 다른 나라에서는 주로 진균류를 이용하여 대부분 한 달 이내의 비교적 짧은 숙성 기간을 가지는 반면, 우리나라는 세균과 곰팡이, 효모의 공동 발효로 최소한 6개월 이상의 발효 기간을 가지며, 오래 숙성할수록 더욱 깊어지는 맛과 생리 활성이 다양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은 높은 온도와 습도로 인해 우리나라와 같은 제법으로 제조하면 원하지 않는 발효, 즉 부패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미리 코지균을 증자(蒸煮)된 쌀에서 키운 후 콩과 섞어 일본식 된장인 미소를 만든다. 다양한 종류가 있지만 발효 숙성 기간이 대부분 한 달 이내이다. 인도네시아의 템페도 대표적인 콩 발효 식품으로, 곰팡이균인 라이조프스균을 이용하여 제조하는 것으로 발효 기간은 2~3일이다. 우리나라의 전통 된장은 메주를 만들어 1차 발효를 하고, 메주를 소금물에 '염지-혼합-숙성'의 과정을 거쳐 된장으로 만들어 다시 발효 숙성을 한다. 따라서 메주 제조부터 시작하면 최소한 1년 이상이 경과되어야 식품으로서의 가치를 가진 된장으로 탄생한다. 현재 우리나라에 시판되는 장은 일본식 된장 제법 공정이 많이 도입되어 숙성 기간이 60일 정도로 짧고, 맛과 향도 전통 된장과 차이를 보임에 따라 시장의 수요가 제한적이다. 주부들이 우리의 전통 된장보다 일본 된장 또는 일본식 된장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것은 우리의 전통 된장은 자연 발효가 되어 발효균의 유·무해성을 모를 뿐 아니라 비위생적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업체에서도 전통 된장의 우수성을 인식하고, 전통 메주를 이용한 된장의 생산을 시작하여 점차 생산량을 확대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의 전통 방식 그대로 만든 된장이 전 세계의 영양학자들에게 호평을 받고 있음에 비추어 볼 때 당연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된장은 숙성이 진행되면서 맛과 풍미가 향상되고, 콩의 주요 성분들의 생체 이용도가 증가한다고 알려져 있다. 된장의 생리 활성과 관련된 유용 물질로는 콩에서 유래한 사포닌(saponin), 피드산(phytic acid), 렉틴(lectin), 올리고당(oligosaccharide), 이소플라본(isoflavone) 외에도 발효를 통해 생성된 펩타이드 등이 있다. 콩의 유용 성분 중 하나인 이소플라본은 된장 발효 과정 동안 미생물에 의해 아글리콘/글리코시드(aglycone/glycoside)로 전환되어 생체 흡수율이 증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된장에 의한 발암 억제와 암세포 전이 억제 활성도 된장의 숙성 기간이 증가할수록 증가한다는 보고가 있는 것으로 보아, 전통 된장의 발효 숙성 기간이 된장의 생리 활성에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외에도 된장의 기능성으로 항비만, 고혈압 예방, 항암, 항산화 및 항혈전, 간기능 강화, 치매 예방 효과, 골다공증 등이 있다. 최근 된장에서 아플라톡신, 오크라톡신 등 곰팡이 독소와 바이오제닉 아민류 등 화학적 위해(危害) 인자와 장독소를 생산하는 바실러스 세레우스(Bacillus cereus)가 다량 검출되면서, 전통 장류의 안정성이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 된장을 보급하기 위해서는 안전성에 대한 연구도 같이 이루어져야 한다. 다행히도 2008년 구민선 박사(한국 식품 연구원)가 연구한 생리 활성 결과에 의하면, 된장에서 항산화 활성과 생리 활성을 평가한 결과 총 폴리페놀, 플라보노이드, DPPH 래디칼 소거능, ABTS 래디칼 소거능 모두에서 우수한 항산화 활성을 보여 주었으며, 숙성 기간의 증가에 따라 항산화 활성과 생리 활성이 증가하는 것이 확인되었다.

암세포는 정상 세포가 여러 원인에 의해 비정상적으로 분열해 나가면서 그 형태, 모양 및 성질이 다르게 나타나는 세포이다. 대장암 세포에 된장물 분획 처리 시 암세포의 증식이 억제되는 것이 연구 결과 밝혀졌다. 뼈는 오래된 뼈를 갉아먹는 파골세포와 새로운 뼈를 만드는 조골세포의 균형을 통해 항상 일정하게 유지되게 된다. 뼈를 형성하는 조골세포에 된장물 분획을 처리하게 되면 조골세포의 활성이 증가되는 반면, 뼈를 없애는 파골세포에 된장을 처리하게 되면 파골세포의 활성은 감소되었다. 된장 미생물 프로필(profile) 분석 및 분리의 연구에서도 된장의 위해(危害) 미생물을 숙성 기간별로 모니터링한 결과, 대장균, 대장균군, 황색포도상구균, 살모넬라균, 리스테리아 모노사이토제네스, 비브리오균, 바실러스 세레우스와 아플라톡신 생산균주도 모두 검출되지 않았다. 된장 내의 미생물은 분리 배지에 다양한 소금 농도(0.85, 5, 10%)를 첨가하여 분리하였다. 일반 세균 수는 숙성 기간별로 큰 차이를 보이지는 않았으나, 약간 감소하는 경향을 보여 주었다. 동일한 된장 시료에서 소금 농도를 달리하여 일반 세균 수를 분리한 결과, 소금 농도가 증가할수록 일반 세균 수는 약간 감소하였다. 곰팡이 중 진균류는 숙성 5년차까지 검출이 되었으나, 그 이후에는 검출되지 않았고, 효모는 숙성 2년차 된장부터 검출되었으며, 소금이 5% 이상 분리 배지에 포함된 플레이트에서 더 많은 수가 검출되었다.

숙성 기간별 된장을 정량적 묘사 분석으로 한 관능 검사에서는, 숙성 기간이 증가함에 따라 콩비린내, 메주향, 이취, 이미는 감소하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전통 된장은 우리의 맛을 상징하는 저장성 조미 식품으로, 음식의 간을 맞추고 맛을 내는데 기본으로 사용하는 영양학적으로도 우수한 발효 과학 식품이다. 된장을 영양학적으로 분석하면 사용되는 쌀이나 보리, 밀가루 등에 의하여 차이가 나지만, 단백질 12%, 수분 50%, 지질 4%, 당질 10% 정도로 나타난다.

된장의 주요 성분에서 보듯이 전통 된장은 우리의 주식인 쌀과 보리 등에서 부족한 단백질을 보충하였다.

특히 된장 속에는 필수 아미노산인 리신이 풍부하게 들어있는데, 리신 또한 쌀을 비롯한 다른 곡류에는 거의 없기 때문에 우리의 균형 있는 식생활을 위해 전통 된장은 아주 중요한 식품인 것이다. 

된장은 고추장 등 다른 장류에 비해 산업체 된장의 가정 내 사용 비율이 2004년 기준으로 28%에 불과해 고추장의 53%, 간장의 80%에 비해 크게 떨어지며, 쌈장의 36%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산업체 된장의 품질이 소비자들의 요구에 부합하지 못하고, 제품에 대한 신뢰도가 낮은 것이 원인이다.

전통 된장에 대한 적극적인 기술 개발과 이를 통한 산업화 및 홍보가 뒷받침된다면 시장 잠재력은 다른 장류보다 오히려 크다고 할 수 있다.

일본 된장에 대한 수입 대체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장기 숙성 전통 된장의 우수한 기능성의 규명과 함께 안전성이 보장됨으로 인해, 식생활의 웰빙(well-being) 및 로하스(LOHAS : 건강과 환경이 결합된 생활 패턴) 추세에 따라 관심이 증가되고 있는 자연 친화적 식품인 우리나라 전통 장류의 소비량 증대는 물론 세계인의 식품으로도 재탄생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세계의 으뜸 '발효 식품" 우리가 항상 먹는 김치, 장, 젓갈, 고유 술, 그리고 자연의 빛깔이 살아 있는 천연염색에 발효 과학을 활용하는 조상들의 슬기가 배어 있다.

세계 어디에도 우리나라처럼 발효 과학을 생활 곳곳에서 잘 활용하고 있는 나라는 흔치 않다.
일상적인 우리의 밥상을 떠올려 보아도 밥 한 공기에 따라붙는 밑반찬으로 김치, 된장, 간장, 젓갈, 장아찌 등 발효 식품이 많다.

흔히 '발효'하면 발효 식품만을 떠올리기 쉬운데, 발효법은 먹는 것뿐만 아니라 천연 염색 과정에도 사용된다.

우리는 대대로 천연 재료를 발효하여 염색하는 기법을 통해 자연의 빛깔이 살아 있는 옷을 지어 입었다. 

천연 염색의 발효에는 푸른색의 쪽 발효와 홍색의 홍화 발효가 있다.

먼저 쪽을 발효하기 위해서는 천연 잿물과 햇살에 의한 발효가 충족되어야 한다. 햇살 발효란 한여름에 햇살을 이용해 1차로 발효를 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과정은 우리나라의 푸르고 맑은 가을 하늘 색을 표현해 내는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방법이다. 먼저 쪽물에 70℃ 정도의 잿물을 넣어 준 후 막걸리로 만든 식초나 곡물의 촉진제(엿기름 등)를 넣어 준다.

쪽죽(조개가루가 푸른색 안료인 인디고(Indigo)를 머금고 있는 상태)에 엉켜 있던 인디고는 뜨거운 잿물을 만나 맑은 산소를 채우며 횟가루에서 분리되어 쪽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한여름에는 밤에도 20~25℃의 온도를 유지하고, 한낮에는 30℃를 오르내리기 때문에 3일에서 1주일 정도면 발효가 시작된다.

 햇살 발효가 끝났다고 하여 염색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실내에서 발효의 숙성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실내에서 적정한 온도(보온 상태가 좋은 환경에서 쪽물의 온도가 25℃ 이상)를 유지해야 하고, 서서히 발효를 도와주며 숙성 과정을 거치는데 이 과정이 쪽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이다.

이 과정을 거친 쪽물을 보면 계란 노른자처럼 발효한 상태를 보게 되는데 이것이 완전한 쪽 발효 상태가 된 것이다. 우유가 상하는 것을 부패라 하고, 요구르트로 변하는 것을 발효라고 한다.

발효와 부패는 둘 다 균의 증식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비슷해 보이지만, 정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낮에는 뚜껑을 열어 볕을 흠뻑 쪼이고 저녁에는 뚜껑을 덮는다. 메주에서 간장을 너무 많이 뽑으면 된장이 맛이 없다고 하여 메줏가루를 일부 남겨두었다가 된장용 메주에 다시 넣어주는 방법을 쓰기도 한다. 

우리의 장은 항아리와 함께 관리를 해야 하는데, 오래 보관하려면 잘 달여 잡균을 제거하고 햇볕을 자주 쏘여주며 항아리 위의 곰팡이를 깨끗하게 걷어주어야 한다. 

순수한 자연발효식으로 만든 간장은 오래 발효시킬수록 맛이 좋아진다. 

음식의 간을 맞춰주면서 우리 몸의 면역력을 높여주는 역할도 한다.

된장이 우리 몸에 좋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된장에 대한 각종 연구 자료에 의하면, 콩 속의 사포닌과 토코페롤 성분이 항산화 작용을 해 우리 몸의 노화를 더디게 한다(노화는 산화 과정을 통해 이뤄진다). 

특히 자연발효시킨 재래된장의 항산화 작용은 더욱 뛰어나다. 

된장이 짙은 갈색으로 발효, 숙성되는 과정에서 생성된 물질이 된장 성분 자체의 산화를 막아 안정된 식품이 되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때문에 노인성 치매를 예방하는 효과로도 이어진다고 전문가들은 밝히고 있다. 

이 밖에도 전문가들이 밝혀낸 된장의 효능은 무궁무진하다.

혈압을 낮춰 고혈압에 효과가 있으며, 콜레스테롤을 제거해줌으로써 혈관을 탄력 있게 한다. 

우리 몸, 특히 간 속의 독소를 몸 밖으로 배출시키며 각종 음식물의 독을 푸는 데도 효과가 있다고 한다. 

민간에서는 체했을 때 된장을 묽게 끓인 국을 먹여 체기를 풀었으며, 아침 공복 때 생수 한 컵에 된장을 2분의 1큰술 정도 풀어 마시면 숙변을 보게 된다고 하니 참고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