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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일 금요일
유성룡柳成龍
유성룡柳成龍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은 1542년(중종 37) 10월에 의성현 사촌 마을의 외가에서 아버지 유중영(柳仲郢, 1515~1573))과 어머니 안동 김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558년 17세 때 세종대왕의 아들 광평대군의 5세손 이경의 딸과 혼인했다. 형은 유운룡(1539-1601)이다. 부친인 유중영은 1540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의주목사ㆍ황해도관찰사ㆍ예조참의를 두루 거친 강직한 관료였다.류성룡(柳成龍, 1542~1607)은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을 수행하며 왜군을 물리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재상으로 알려져 있다. 자는 이견(而見), 호가 서애(西涯)로 관찰사를 지낸 류중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풍산 류씨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로 받들어진다. 본관 풍산(豊山). 자 이현(而見). 호 서애(西厓). 시호 문충(文忠). 의성 출생. 이황(李滉)의 문인. 1542년 황해도 관찰사 유중영(柳仲郢)과 진사 김광수(金光粹)의 딸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퇴계 이황에게서 성리학을 익혔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를 거쳐, 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가 되었다. 이듬해 예문관검열과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고, 1569년(선조 2)에는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였다.
유성룡은 어린 시절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가학(家學)을 전수받았는데 4세 때 이미 글을 깨우친 천재였다. 어린시절부터 학자가 될 꿈을 갖고 성장하던 중 20세에 관악산 암자에서 홀로 [맹자]를 읽고 있었는데 그 소문을 들은 승려가 도둑으로 변장하여 유성룡의 담력을 시험하였다고 한다. 이때 그는 굳은 의지로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글을 읽었고, 승려는 그가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라 예언했다 전한다. 21세 때인 1562년, 형인 겸암 류운룡과 함께 도산으로 퇴계 이황을 찾아갔을 때 하늘이 내린 인재이니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란 예언을 받을 만큼 총명하고 명민하였다. 25세에 문과에 급제한 뒤 승정원·홍문관·사간원 등 관서를 두루 거치고 이조·병조·형조의 일도 거쳐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다.
퇴계는 이들 형제의 학문적 자질을 높이사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형 운룡은 당시의 선비들이 학문이 채 영글기도 전에 과거시험을 보고 벼슬길에 나가는 세태를 한탄하고, 과거시험보다는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형 운룡에 이어 유성룡을 본 스승 퇴계는 그가 하늘이 내린 인재이며 장차 큰 학자가 될 것임을 직감하였다고 한다. 또한 스펀지처럼 학문을 빨아들이는 그를 보고 “마치 빠른 수레가 길에 나선 듯하니 매우 가상하다”라고 찬탄하였다. 퇴계 이황의 또 다른 제자로 유성룡과 동문수학한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은 “내가 퇴계선생 밑에 오래 있었으나 한 번도 제자들을 칭찬하시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그대만이 이런 칭송을 받았다”고 놀라워했다.
20대 시절 유성룡은 스승인 퇴계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하여 배우기를 힘쓰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것을 인생 최고의 목표로 삼았다. 스승인 이황 선생을 통해 유성룡이 가장 관심을 갖고 배운 책은 [근사록(近思錄)]이었다. [근사록]은 성리학자들의 사상과 학문을 간추린 것으로, 송나라 때에 주자(朱子)와 여조겸(呂祖謙)이 편집한 것이다.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은 [근사록]은 향후 그의 학문적 방향을 결정짓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실학의 대가이자 명재상으로 이름난 유성룡의 고향은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다. 유중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유성룡은 김성일과 동문수학했으며, 21세 때 퇴계 이황에게서 “하늘이 내린 인재이니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예언과 함께 칭찬을 들었다. 선조는 유성룡을 일컬어 “바라보기만 하여도 저절로 경의가 생긴다”라고 하였고, 이항복은 “어떤 한 가지 좋은 점만을 꼬집어 말할 수 없다”라고 했으며, 이원익은 “속이려 해도 속일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출세"
과거시험에 뜻이 없었던 형과 달리 유성룡은 1564년 23세에 소과시험인 생원과 진사시에 , 1566년 25세에 대망의 문과시험에 급제하여 비교적 순조롭게 벼슬길에 나아갔다. 28세에는 성균관전적에서 행정의 중심인 공조좌랑으로 파격적인 승진을 했다. 그의 탄탄대로와 같은 벼슬생활에는 타고난 자질과 함께 가문의 배경, 그리고 퇴계의 뛰어난 제자였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었다. 아울러 인종(仁宗, 조선 12대왕. 중종의 장남)을 문소전(왕의 신주가 모셔진 곳)에 배향하는데 있어 공론을 형성했던 공로도 작용했다. 30세 때는 병조좌랑에, 그리고 이조좌랑을 거치는등 출세 가도를 달리던 그는 1573년 부친상을 당하여서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3년상을 마친 1576년 유성룡은 사간원헌납이란 직책으로 다시 벼슬길에 올랐다.
유성룡은 타고난 경세가(經世家)로 알려져 있는데, 1607년(선조 40) [선조실록]의 <유성룡 졸기>편에서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명예가 날로 드러났으나, 아침 저녁 여가에 또 학문에 힘써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서 조금도 기대거나 다리를 뻗는 일이 없었다. 사람을 응접할 때는 고요하고 단아하여 말이 적었고, 붓을 잡고 글을 쓸 때에는 일필휘지(一筆揮之)하여 뜻을 두지 않는 듯하였으나 문장이 정숙(精熟)하여 맛이 있었다. 여러 책을 박람(博覽)하여 외우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한 번 눈을 스치면 환히 알아 한 글자도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
외교관 자격으로 명나라에 갔을 때 그의 학문적 역량을 본 중국의 선비들이 ‘서애선생(西厓先生)’이라 높여 부르며 존경을 표시했고, 귀국한 뒤에 이 사실이 알려져 더욱 존경과 총애를 받는 인물로 성장했다. 그는 30여 년에 걸친 관직생활에서 승문원권지부정자라는 첫벼슬을 시작으로 1580년에 부제학에 올랐으며, 1593년에는 영의정에 오르는 등 그야말로 내외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류성룡은 정치가로, 경제·군사 전략가로 생애 대부분을 활약했지만, 학봉 김성일과 함께 퇴계 이황의 양대 제자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을 만큼 영남 사림에서의 위치도 공고하다. 그의 학문 방향은 체(體)와 용(用)을 중시한 현실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영의정 당시에도 이순신 장군에게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이라는 병서를 손수 지어주고 실전에 활용하게 하기도 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판서에 임명되고 도체찰사(都體察使)로 군무를 총괄하였다. 이순신(李舜臣) ·권율(權慄) 등 명장을 등용하여 국난을 극복하는데 기여했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하여 평양에 이르렀는데,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으나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도체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중국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을 수복하고 그 후 충청 ·경상 ·전라 3도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 이 해에 다시 영의정이 되어 4도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사를 총지휘하였다. 화기 제조, 성곽 수축 등 군비 확충에 노력하는 한편, 군대양성을 역설하여 훈련도감(訓鍊都監)이 설치되자 제조(提調)가 되어 《기효신서(紀效新書)》를 강해하였다.
1598년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은 하지 않고 은거했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바둑을 둘 줄 모르는 선조에게 대국을 요청하자 그는 우산에 구멍을 뚫어 훈수함으로써 이여송을 무릎 꿇게 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질 만큼 바둑의 애호가였다. 1995년 9월 특별대국에서 이창호(李昌鎬)와 맞대결한 류시훈(柳時熏)은 그의 14세손이라고 한다.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 ·병산서원(屛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서애집》 《징비록(懲毖錄)》 등이, 편서에 《황화집(皇華集)》 《정충록(精忠錄)》 등이 있다.
1590년 황윤길·김성일 등과 함께 통신사로 왜국의 정세를 살피고 온 뒤로 거의 말년까지 정란에 휩싸인 나라의 중심을 세우는 데에 전심전력하였다. 말년에는 북인으로부터 주화론자라는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는 정치적 고난을 겪기도 했다. 파직된 뒤에 향리에서 저술한 임진왜란의 기록 『징비록』(懲毖錄)을 비롯하여, 『신종록』·『영모록』·『지행설』 등을 지었다.
엎치락뒤치락하는 이러한 정국에서 유성룡은 50세에 이르러 좌의정이 되었고 이조판서를 겸임하였다. 그러나 당론의 소용돌이 속에서 유성룡은 더 이상 벼슬에 대한 미련이 없었다. 여러 차례 사직상소를 올렸으나 왕은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정철의 처벌 문제를 두고 동인들은 내분에 휩싸여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게 되었는데, 이때 유성룡은 온건파의 우두머리였다. 유성룡은 동인과 서인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중간 조정자 역할을 하고자 했지만, 이는 뒷날 북인들의 공격을 받아 실각하는 빌미가 되었다.
유성룡이 벼슬살이 하는 동안 조정은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갈라져 논란이 생기는 등 어지러운 정국이 계속되었다. 그의 정치 인생에서 47세는 전환의 시기였다. 그는 이때를 전후로 고위관료가 되는데, 이 무렵 동인계의 기축옥사(정여립(鄭汝立)의 반란)가 일어났다. 정여립의 반란이 실패로 돌아간 뒤 조정은 서인 천하가 되었다. 선조는 서인을 견제할 목적으로 동인에 속하는 유성룡을 우의정으로 임명했다. 그러다가 서인의 좌장격인 정철이 귀양을 가면서 동인들이 다시 세력을 회복하였다. 경연검토관 등을 지내고 수찬에 제수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이후 교리 ·응교(應敎) 등을 거쳐, 1575년 직제학, 다음해 부제학을 지내고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자원하여 향리의 노모를 봉양하였다. 이어 대사간 ·도승지 ·대사헌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다. 1584년 예조판서로 경연춘추관동지사(經筵春秋館同知事)를 겸직하였고, 1588년 양관(兩館) 대제학이 되었다.
1590년 우의정에 승진,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으로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좌의정 ·이조판서를 겸하다가, 건저(建儲)문제로 서인 정철(鄭澈)의 처벌이 논의될 때 온건파인 남인에 속하여 강경파인 북인 이산해(李山海)와 대립하였다.
임진왜란 과 낙향"
유성룡의 나이 51세가 되던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그는 왕의 특명으로 병조판서를 겸임하면서 군기를 관장하게 되었고 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패전에 대한 책임으로 파직되었다가 다시 벼슬에 올라 풍원부원군이 되었다. 이듬해 호서, 호남, 영남을 관장하는 삼도 도체찰사라는 직책을 맡아 전시 상황의 군사 업무를 관장했다. 유성룡은 전국 각처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게 하고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군대를 편성했다. 다시 신임을 얻은 유성룡은 영의정 자리를 되찾아 1598년까지 정부를 이끌었다. 그러나 이해 일본과의 화친을 주도했다는 누명을 씌운 북인 세력의 거센 탄핵으로 영의정에서 파직되었다. 억울함을 안고 이듬해 고향인 하회마을로 낙향했으나, 갑작스런 낙향으로 마땅한 거처조차 없었다.
고향인 하회에서 은거하는 동안 그의 누명은 벗겨지고 관직은 다시 회복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받은 상처는 회복되지 않아 7년간 왕의 부름에도 거절하며 고향을 지켰다. 그러는 가운데 1601년 청백리에 녹선(錄選- 벼슬을 추천하여 관리로 뽑음)되었으며, 1604년에는 임진왜란 회고록인 [징비록(懲毖錄)]의 저술을 마쳤다. 그리고 같은 해 학가산 골짜기 서미동에 농환재(弄丸齋)라는 초가집을 지어 거처를 옮겼다가 모친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다시 하회로 돌아오기도 했다. 초가집에서 거처하는 동안 유성룡은 “사람들이 이욕(利慾)에 빠져 염치를 잃어버리는 것은 모두 만족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느 곳이든지 살 수 있다”라며 자식들에게 청렴의 중요성을 가르치기도 했다.
조선 중기 최고의 경세가"
유성룡은 선견지명적인 인재등용과 자주적 국방으로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슬기롭게 헤쳐나간 명재상이었다. 그러나 20대에 출사(出仕)하여 최고 관직까지 오른 탓에 비교적 평탄했던 삶을 살았던 것으로 오해하기 쉬운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고의 자리에 오른 만큼 벼슬에 있을 때나 물러났을 때나 비난에서 벗어나기 힘들었고, 업적 또한 평가절하 당한 면이 많다. 그러한 배경에는 붕당싸움(黨爭)과 임진왜란이라는 내우외환(內憂外患)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것이 그에게 더욱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가 설치한 훈련도감은 조선후기에 이르러 5군영 가운데 가장 중추적인 군영으로 성장했으며, 지방에서 바치는 공물을 쌀로 바치게 하는 그의 선구적인 정책 또한 훗날 대동법이 만들어지는데 영향을 주었다. 그가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제하는 데 있어서 탁상공론이 아닌 실질적인 개선책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도 왜란을 통해 고통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다.
퇴계 이황의 사상을 이어받고, 아래로는 조선 후기 실학파를 연결하는 교량적 역할을 한 경세가 유성룡은 임진왜란을 겪은 조선의 재상으로서 그가 가진 경험과 식견을 통해 고통받는 백성들의 삶을 개선시키고자 노력했던 인물이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임진왜란 때의 상황을 기록한 [징비록(懲毖錄)]. ‘징비(懲毖)’란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이다. 임진왜란 이전 일본과의 관계, 명나라의 구원병 파견 및 제해권의 장악 등 전황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어 1712년 조정에서 이 책의 일본 유출을 금할 정도로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았다. 국보 제132호로 지정되었다
유성룡이 국가 개혁을 위해 생각했던 것은 실로 방대하였다. 농업 생산성 증대를 위해 새로운 시책을 추진했고, 염업, 수산물 유통 등 물자의 수급조절과 품질향상에 관련된 실용적인 측면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그에 대비하여 이순신을 정읍 현감에서 전라좌수사로 파격적으로 발탁하고, 권율을 형조정랑에서 국경지대의 요충지인 의주 목사로 보낸 것은 선견지명이었다.
25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병조 판서를 역임하였고, 정여립 모반 사건 때도 자리를 굳건히 지켰을 뿐 아니라, 동인이었음에도 광국공신(光國功臣)의 녹권을 받았고, 1592년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정치가 또는 군사 전략가로 생애의 대부분을 보냈으며, 그의 학문은 체(體)와 용(用)을 중시한 현실적인 것이었다.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에게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이라는 병서를 주어 실전에 활용하게 하였다.
말년인 1598년에 북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이 삭탈되었다가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그 후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은거하였다. 1605년 풍원부원군에 봉해졌고, 파직된 뒤에는 고향의 옥연서당에서 임진왜란을 기록한 국보 제132호인 『징비록(懲毖錄)』과 『서애집(西厓集)』, 『신종록(愼終錄)』 등을 저술하였다.
병들어 누웠다는 소식을 들은 선조는 어의를 보내 치료케 했지만 유성룡은 65세의 나이에 죽었다. 그런데 하회에서 세상을 떠난 유성룡의 집안 살림이 가난하여 장례를 치르지 못한다는 소식에 수천 명이 그의 빈집이 있는 서울의 마르냇가로 몰려들어 삼베와 돈을 한푼 두푼 모아 장례에 보탰다고 한다.
그가 죽은 뒤 실록의 사관은 그를 평하여 “천자가 총명하고 기상이 단아하였다. 학문을 열심히 익혀 종일 단정히 앉아 있으면서 몸을 비틀거나 기댄 적이 없으며, 남을 대할 적에는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듣고 말수가 적었다”라고 칭찬한 뒤, “이해가 앞에 닥치면 동요를 보였기 때문에 임금의 신임을 오래 얻었으나 곧은 말을 한 적은 별로 없고, 정사를 오래 맡았으나 잘못된 풍습은 구해내지 못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하회마을에서 강을 거슬러 올라간 병산리에 유성룡을 모신 병산서원(屛山書院)이 있다. 이 서원은 1613년에 정경세 등의 지방 유림들이 유성룡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존덕사(尊德祠)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시면서 설립되었다. 본래 이 서원의 전신은 고려 말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豐岳書堂)으로 풍산 류씨의 교육 기관이었는데, 선조 5년(1572)에 유성룡이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1629년 유성룡의 셋째 아들 유진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철종 14년(1863) ‘병산’이라는 사액을 받아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에도 잘 보존된 47개 서원 중의 하나다.
도처에서 서원을 건립했던 영남학파의 거봉 퇴계 이황은 “서원은 성균관이나 향교와 달리 산천 경계가 수려하고 한적한 곳에 있어 환경의 유독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만큼 교육 성과가 크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모든 서원은 경치가 좋거나 한적한 곳에 자리하였는데, 병산서원만큼 그 말에 합당한 서원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안동시 임하면 금소동은 나라 안에서도 이름난 안동포가 생산되는 마을이다. 삼베길쌈이 워낙 성했던 곳이라 다른 마을 처녀가 시집오기를 꺼려했을 정도라는데, 이제는 이곳마저도 안동포를 짜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어 서민들이 즐겨 입었던 안동포는 구경조차 어려운 지경이 되고 말았다.
안동시에서 영주로 가는 국도 옆에 위치한 이천동에는 거대한 자연석을 이용하여 만든 이천동 석불, 일명 제비원 석불이 있다. 신라 때 도선국사가 새겼다고 전해지는 이 석불은 11미터 높이의 화강암 암벽을 그대로 깎아 몸통을 만들고 2미터 높이의 바위를 부처의 머리로 만들었다. 보물 제115호로 지정되었으며, “성주의 근본 어디메뇨, 경상도 안동 땅 제비원”이라고 노래한 무가(巫歌) 「성주풀이」의 기원이 된 곳이기도 하다. 이 석불이 있는 이천동 영남산에 연미사가 있다.
안동부 관아는 화산(花山) 남쪽에 있다. 황강 물은 동북방에서 흘러오고 청송읍(靑松邑) 냇물은 임하(臨河)를 지나온다. 이 두 물이 동남방에서 합쳐서 고을 성을 돌며 서남쪽으로 흘러간다.
남쪽에 영호루(映湖樓)가 있는데, 고려 공민왕이 남쪽으로 피난을 왔을 때 이 누각 위에서 잔치하며 놀았다. 누각에 걸린 현판은 바로 공민왕이 쓴 것이다.
영호루 북쪽에는 신라 때 지은 옛 절이 있다. 지금은 절이 망해 스님은 없어도 그 정전은 들 복판에 따로 서 있는데 조금도 기울지 않아 사람들이 노나라의 영광전(靈光殿)에 견준다.
『택리지』에 실린 안동에 관한 기록이다.
안동의 영호루는 밀양의 영남루(嶺南樓), 진주의 촉석루(矗石樓), 남원의 광한루(廣寒樓)와 함께 한수(漢水) 이남의 대표적인 누각으로 일컬어졌다. 김종직은 『영호루중신기(映湖樓重新記)』에서 “영호루는 안동의 이름난 누각이다. 그 강산의 뛰어난 장관은 비록 촉석루나 영남루에 비해서는 더러 손색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똑같이 낙동강 언덕에 자리한 상주의 관수루(觀水樓), 선산의 월파정(月波亭)은 자못 영호루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영호루의 현판은 고려 말(1380년) 공민왕의 필적으로 전해진다. 영호루가 언제, 누가 창건하였는지에 대한 정확한 문헌은 없다. 하지만 고려 초기인 1274년 김방경 장군이 이 누각에 올라 시를 읊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천여 년은 족히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361년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피난 왔던 공민왕은 적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자주 남문 밖의 영호루를 찾아 누각 아래 강물에 배를 띄우고 유람을 하기도 했고, 호숫가에서 활을 쏘기도 하였다. 난이 평정되고 환도한 뒤 1362년 공민왕이 친필로 ‘영호루’라고 쓴 금자(金字) 현판을 내려 달게 하였다고 전해진다. 영호루는 여러 번의 물난리로 공민왕 이후 다섯 차례 유실되었고, 일곱 차례 중수되었다. 1934년 7월 23일에는 낙동강 상류 지방의 폭우로 인해 안동 시내가 물에 잠기는 대홍수가 있었다. 이 수해로 영호루는 주춧돌과 돌기둥 몇 개만이 남게 되었다. 그러다가 1970년 시민들의 성금과 국비, 시비를 모아 현재의 영호루를 지었다. 옛 영호루는 지금 자리의 강 건너편에 있었다. 이곳을 찾았던 다산 정약용은 다음과 같은 시 한 편을 남겼다.
태백산 꼭대기에 응축한 맑은 기운
이 누대 앞에까지 달려와서 펼쳐졌네
바닷물과 산맥이 삼천리를 에워싼 곳
흥성한 예악 문물 사백 년을 이어왔네
푸른 물 맑은 모래 아름답게 빛나고
드높은 성 거대한 집 빽빽하게 연이었네
하회마을 고택은 알괘라 어드메냐
딴 시대라 쓸쓸히 한번 슬퍼하노라.
안동을 두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부지런한 것과 검소한 것을 숭상하고, 농사짓고 누에치는 일에 힘쓴다”라고 하였고, 『동국여지승람』 「안동도호부」편 「형승」조에 “물은 황지로 빠져서 1만 구렁을 흡수하고 산은 태백산이 가장 뛰어나게 뭇 봉우리를 통솔한다”라고 하였다. 또한 안동 지역의 대표적 향토지 초고본(草稿本)인 『영가지(永嘉志)』를 편찬한 권기는 안동을 일컬어 “산은 태백에서부터 내려왔고 물은 황지에서부터 흘러온 것을 환하게 알 수 있다”라며, “산천의 빼어남과 인물의 걸출함과 토산의 풍부함과 풍속의 아름다움과 기이한 발자취”를 지니고 있는 고장이라고 표현하였다.
‘안동 상전(床廛) 흥정이다’라는 옛말이 있는데, 이는 옛날 안동 상전에서 여자들이 조용히 상을 사가듯 말없이 행동할 때 이르는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안동 사람들은 무뚝뚝하고 무표정한 얼굴과 끈질긴 인내심을 가졌다고들 말한다. 그 이유를 유교 문화권에서 찾기도 하지만, 이 지방의 열악했던 자연 환경과 독특한 역사에서 기인했다고 보기도 한다. 즉 안동 지방은 당쟁이 치열했던 조선 중기 이후 잠시 정권을 잡았던 남인 세력이 3백여 년 동안 묻혀 지낸 ‘야당 지역’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대추 한 알 먹고 요기한다’는 선비 기질의 권위를 가졌고, ‘열 끼를 굶어도 내색을 하지 않는다’는 체모가 이해관계에 앞섰던 가치관도 대물림되어 내려왔을 것이다. 안동문화원장을 지냈던 유한상 씨는 이런 기질을 가진 안동 사람을 ‘안동 숙맥’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1607년 병세가 점점 악화되어 향년 66세로 그곳에서 눈을 감았는데, 유성룡이 세상을 뜨자 선조는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승지를 직접 보내 조문하도록 했다. 상인들은 4일간 장사를 하지 않으며 경세가의 죽음을 슬퍼했다. 또 서울 옛집이 자리했던 묵사동에는 약 천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한다. 현재 병산서원ㆍ남계서원ㆍ도남서원ㆍ삼강서원ㆍ빙계서원 등에 배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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