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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30일 목요일
나일강 [Nile River]
나일강
[Nile River]
적도 부근에서 발원하여 지중해로 흘러드는 강.
총길이 6,671km이다. 총길이는 남반구의 부룬디 ·탄자니아 국경 부근에서 강 어귀까지이며, 유역면적은 아프리카대륙의 약 1/10을 차지한다. 나일 강에는 몇 개의 원류가 있는데, 그 중 가장 오지에 있는 것은 부룬디 산맥에서 발원하는 것이며, 여기서부터 카게라강이 되어 빅토리아호(湖)로 흘러든다. 빅토리아호부터는 빅토리아나일이라 하는데, 키오가호를 지나 머치슨 폭포를 거쳐 앨버트호의 북단으로 들어간다. 앨버트호에서 수단 국경까지는 앨버트나일이라 하며, 여기까지의 나일 강은 산악지대를 지나면서 머치슨 폭포 같은 경관을 이룬다.
인류문명을 탄생시킨 강의 하나로 아프리카의 빅토리아호에서 발원해 북동쪽으로 이집트를 지나 지중해로 흘러들며 길이는 약 6,671km로 세계에서 가장 길다. 해마다 6월에서 10월까지 이르는 사이에 강이 범람해 홍수가 지는데, 이로써 양안에 기름진 충적토가 흘러와 쌓여 농경에 적합한 토양이 조성되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범람을 극복하기 위한 치수와 그에 따르는 천문학 및 수학의 발달, 그리고 중앙집권적 권력의 출현을 가능케 하였다. 그 결과 강안(江岸)에서 세계 4대 문명의 하나인 고대 이집트 문명이 탄생하였다.
백나일은 에티오피아에서 흘러오는 청나일(아랍어로는 바르알아즈라크)과 하르툼에서 합류하여 나일 강이 된다. 하르툼을 떠난 나일 강은 도중에 에티오피아에서 흘러오는 또 하나의 지류인 아트바라강과 합류하여, 이집트 국경 근처에서 인공 호수인 나세르호(湖)로 흘러든다. 아스완 하이댐과 아스완댐을 거쳐 이집트 영내로 들어가면 합류하는 지류도 없고, 카이로 북쪽에 거대한 삼각주지대를 만들면서 지중해로 흘러든다. 아스완과 하르툼 사이에는 6곳의 급류가 있어 유량이 적은 2∼7월에는 항행할 수 없으나, 그 밖의 계절에는 작은 선박이면 지중해에서 머치슨 폭포까지 항행할 수 있으며, 우간다에서 빅토리아호를 지나 카게라강을 약 160km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수단령으로 들어서면 서쪽에서 흘러오는 지류인 바르알가잘강과 노호(湖)에서 합류하는데, 이것을 바르알자발강이라 한다. 바르알자발강은 광대한 습지대를 지나오면서 유량의 절반은 부평초(浮萍草)에 흡수당하거나 증발로 인하여 줄어든다. 이곳에서부터 수도 하르툼까지를 백나일이라 한다. 백나일은 건조지대로 들어서 하르툼에 가까워지면 완전한 사막지대를 지난다. 여기서는 남동쪽에서 흘러오는 소바트강이 합류한다.
나일 강은 고대부터 사하라 사막을 넘어 북부아프리카와 적도 이남의 내륙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유일한 교통로였으며, 고대 이집트문명이 지금의 하르툼 북쪽 메로웨를 거쳐 에티오피아에 영향을 준 통로가 되었다. 1816년경 이집트 근대화의 아버지라고 하는 모하메드 알리가 착수할 때까지 나일 강물의 제어(制御)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으며,1861년 카이로 북쪽에 댐이 완성됨으로써 삼각주지대의 농산물 재배가 활발해졌다. 내륙 수로로서의 개발은 19세기 말부터 1900년에 걸쳐, 부평초 때문에 항행할 수 없는 수단 남쪽의 습지대를 우회하기 위해 자연적으로 생긴 바르엘제라프강(바르알자발강의 중앙부에서 동쪽을 북진하여 백나일과 소바트강의 합류점 부근에 이르는 강)에 일부 인공을 가하여 항행을 원활하게 한 것이 시초이다.
1902년 아시우트와 아스완에 개폐식 댐을 완성, 계절적인 범람에 다소의 제어를 가하여 관개용수의 이용을 유효하게 하였는데, 이러한 공사는 그후 이스나(1909), 센나르(1925), 나그함마디(1930), 제벨아울리아(1937) 등에서도 행해졌다. 1970년 아스완하이댐이 완공되어 강의 범람을 완전히 제어하게 되었고, 이 다목적댐에 의하여 나세르호가 생겼다. 그 결과 이집트의 약 2만 4,300km2, 수단의 약 4,050km2의 농경지가 관개되었다. 나일 강은 국제하천이므로 이집트 ·수단 ·에티오피아 ·우간다 사이에 수리(水利)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어 있다. 수자원의 적극적인 개발과 이용은 1954년 우간다에서 오웬폭포에 댐을 완성하고 수력발전을 개시함으로써 시작되었다. 1960년에는 구(舊)아스완 댐에서도 수력발전이 시작되었다. 나일 강 중류 이북은 옛부터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으나, 원류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이곳에 대한 탐험이 시작된 것은 17세기부터이다. 1613년 포르투갈의 파에스 신부가 청나일을 탐험하고, 1770년 영국의 J.브루스가 타나호(湖)를 탐험하여 그것이 나일 강의 원류임을 확인하였다.
백나일은 이집트 탐험대가 1821∼1842년 수단 남단에 가까운 주바의 급류까지 탐험하였는데, 1830년에 그 때까지 백나일의 상류라고 생각한 나이저강이 별개의 큰 강임을 확인하였다. 1858년 영국인 스피크는 빅토리아호가 나일 강의 수원일 것이라 추정하고 탐험을 시작하여, 1860년 버튼과 함께 그 추정의 정당함을 확인하였다. 또 영국인 S.베이커는 1861년부터 2회에 걸친 탐험으로, 수단 남쪽의 습지대에서 나일 강을 거슬러 올라가 앨버트호와 머치슨 폭포를 확인하였다. 그후 1870년대에 이르러 영국의 군인 C.G.고든과 그 부하들이 나일강의 지도를 작성하는 데 성공하고, 이어서 M.스탠리가 빅토리아호를 주항(周航)하여 백나일의 원류지대를 상세히 밝혔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런던의 왕립지리학협회가 아프리카 내륙 탐험에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1870년대에는 나일 강의 모습이 거의 알려졌다.
세계에서 가장 긴 강이라고 알려져 왔으나, 2008년 5월 리마 지리학회의 발표에 따르면 아마존강이 나일 강보다 긴 것으로 조사됐다.
하얀 돛이 달린 고풍스런 펠루카(felucca, 지중해 연안의 삼각 돛을 단 소형 범선)를 타고 파라오들이 주요 도로로 이용했던 물길을 따라가면 이집트의 최남단에서 왕들의 계곡에 이른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나일 강이 생명을 죽음과 사후 세계로 연결해 주는 통로라고 믿었다. 나일 강은 북아프리카에서 가장 중요한 교역 루트였고 이집트 문명의 생명줄이었다. 이집트에서 가장 유명한 사원들은 이 길을 따라 서 있다. 파라오와 그의 왕비들, 후궁들―그리고 가끔은 그의 악어들도―은 미라가 되어 서안(the West Bank)에 잠들어 있다. 여행길에는 고대 이집트인들의 미스터리한 영혼과 전설을 만끽하며, 보는 이를 압도하는 누비아 양식의 바위 사원 아부 심벨, 에드푸에 있는 이집트에서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콤 옴보, 아름다운 촌락, 세계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군주 30명의 업적이자 세계 최대의 종교 유적인 카르나크 신전 등을 직접 볼 수 있다.
장대한 왕들의 계곡에서 내리면 방죽길에 늘어서 있는 오만한 스핑크스들과 람세스 2세의 위엄 있는 석상이 눈에 들어온다. 사원과 마찬가지로 나일 강을 따라 아스완에서 룩소르로 가는 여행길도 시간의 시험을 견뎌낸 것이다.
아프리카 동부에 있는 하천. 전체 길이는 6,700㎞. 유역 면적은 아프리카 대륙의 약 1/10을 차지한다. 하천 상류의 백(白)나일 강은 빅토리아 호에서 발원하고, 청(靑)나일 강은 아비시니아 고원에서 발원하여 수단의 수도인 하르툼에서 합쳐진다. 나일 강은 이집트 동부를 거쳐 지중해로 들어가는데 그 어귀에 넓은 삼각주를 형성한다. '이집트는 강의 선물'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건계와 우계가 뚜렷한 지역을 흐르는 청나일 강의 범람으로 나일 강이 범람한다. 나일 강의 정기적인 범람은 이집트 인의 종교 사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으며, 태양력도 여기에서 나오게 된 것이다. 나일 강은 고대부터 사하라 사막을 넘어 북부 아프리카와 적도 이남의 내륙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유일한 교통로였다. 페니키아 인은 '골짜기'라는 뜻의 나할(Nahal)이라고 했으며, 나일은 그리스 어의 닐루스(Nilus)에서 유래하였다.
셈 어로 나일은 '하천'이라는 뜻이며, 아랍 어로는 '대단히 큰 물이 있는 바다'라는 뜻이다. 나일 강에 대한 탐험은 17세기부터 시작되어 1613년 포르투갈의 파에스 신부가 청나일 강을 탐험하고, 1770년 영국의 브루스가 타나 호(湖)를 탐험하여 그것이 나일 강의 원류임을 확인하였다. 1860년 영국인 스피크와 버튼은 빅토리아 호가 백나일 강의 수원임을 밝혔다. 1870년대에는 나일 강의 지도가 작성되는 등 나일 강의 모습이 세계에 알려졌다. 나일 강이 내륙 수로로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부터이며, 1970년 아스완하이 댐이 완공되어 강의 범람을 완전히 제어하게 되었다. 나일 강은 국제 하천이므로 이집트, 수단, 에티오피아, 우간다 사이에 수리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어 있다.
하얀 돛이 달린 고풍스런 펠루카(felucca, 지중해 연안의 삼각 돛을 단 소형 범선)를 타고 파라오들이 주요 도로로 이용했던 물길을 따라가면 이집트의 최남단에서 왕들의 계곡에 이른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나일 강이 생명을 죽음과 사후 세계로 연결해 주는 통로라고 믿었다. 나일 강은 북아프리카에서 가장 중요한 교역 루트였고 이집트 문명의 생명줄이었다. 이집트에서 가장 유명한 사원들은 이 길을 따라 서 있다. 파라오와 그의 왕비들, 후궁들―그리고 가끔은 그의 악어들도―은 미라가 되어 서안(the West Bank)에 잠들어 있다. 여행길에는 고대 이집트인들의 미스터리한 영혼과 전설을 만끽하며, 보는 이를 압도하는 누비아 양식의 바위 사원 아부 심벨, 에드푸에 있는 이집트에서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콤 옴보, 아름다운 촌락, 세계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군주 30명의 업적이자 세계 최대의 종교 유적인 카르나크 신전 등을 직접 볼 수 있다.
장대한 왕들의 계곡에서 내리면 방죽길에 늘어서 있는 오만한 스핑크스들과 람세스 2세의 위엄 있는 석상이 눈에 들어온다. 사원과 마찬가지로 나일 강을 따라 아스완에서 룩소르로 가는 여행길도 시간의 시험을 견뎌낸 것이다.
"『나일강의 죽음』을 읽을 때면 내가 다시 아스완에서 와디 할파로 향하는 증기선에 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집트 나일강의 수위 측정기로 861년 건축한 나일로 메타를 찾아 소개하는 내용이다. 나일강의 범람은 다른 나라와는 다르게 축복으로 여겨졌다. 나일강의 범람은 사막에 생명과도 같은 물줄기를 안겨주는 삶의 축복이다. 세계 여러 나라의 자연과 문화를 학습할 때 참고자료로 활용한다.
나일강이 시작되는 근원지인 우간다의 진자를 소개하는 내용이다. 이곳에서 부자갈리 폭포, 빅토리아 호수, 등이다.
영국은 18세기 산업혁명으로 상품을 팔 시장을 찾고자 아프리카 탐험에 앞섰다. 1769년 청나일 강의 수원을 찾아낸 사람은 제임스 브루스이다. 브루스는 2년 동안 에티오피아 말과 의술을 배우며 탐험 준비를 했고 나일강의 수원인 기슈 샘을 찾아냈다. 런던에 돌아와 책 〈나일 강 수원을 찾아서〉를 출판했다.
1760년부터 시작된 산업혁명으로 값싼 물건이 많이 만들어지자 유럽 강대국들은 상품을 팔 시장이 필요해졌다. 그들은 공산품의 원료를 값싸게 얻고 상품을 비싸게 팔 식민지를 마련하려고 앞을 다투어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몰려들었다.
탐험가들이 모두 식민지 정책의 앞잡이는 아니다. 그들은 거의가 순수한 탐험 정신으로 미지 세계를 밝히려고 나선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결과를 놓고 볼 때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탐험가들 때문에 오랫동안 유럽의 식민지 노릇을 하게 되었다.
유럽 사람들의 '탐험'과 '개척'이란 당하는 쪽이 보기에는 '침략'이었다. 특히 아프리카 사람들은 까닭 모르고 노예 사냥꾼들에게 붙잡혀 쇠고랑에 채워진 채 낯선 땅으로 끌려가, 짐승만도 못한 대접을 받으며 대대로 종살이하는 슬픔을 겪었다. 아프리카 탐험 역사는 곧 아프리카의 슬픈 역사이다.
아프리카 탐험은 동쪽에서는 나일 강, 서쪽에서는 나이저 강, 남쪽에서는 포트엘리자베스, 북쪽에서는 사하라 사막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8세기 아프리카 지역 탐험에서 제일 앞선 나라는 영국이었다. 1769년 청나일 강이 어디서 시작되는지를 밝힘으로써 아프리카에서 첫 개가를 올린 제임스 브루스를 비롯해, 나이저 강을 탐험한 멍고 파크와 리처드 랜더, 그 뒤를 이어 남부와 중부 아프리카를 밝힌 데이비드 리빙스턴, 백나일 강의 수원(水源)을 알아낸 존 스피크와 헨리 스탠리가 모두 영국 출신이다. 암흑 대륙은 이들의 손을 거쳐 하나하나 모습을 드러냈다.
1730년 스코틀랜드 스털링에서 태어난 브루스는 1763년 북아프리카 알제리의 총영사가 되면서 북아프리카의 고대 유물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림 솜씨가 뛰어나, 자기가 본 유적과 유물을 그림으로 기록해 두곤 했다. 그는 1765년 초 지중해 지역을 여행하면서 나일 강을 탐험하기로 마음먹었다.
역사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일찍이 '이집트는 나일 강의 선물'이라고 말했다. 이집트 사람들은 나일 강을 일컬어 '이집트의 어머니'라고 한다.
주기적으로 홍수를 일으키지만, 집이나 농경지를 떠내려 보내는 일이 없이 상류로부터 기름진 흙을 날라다 주므로 씨만 뿌리면 곡식이 풍성하게 열리는 데다, 여행을 할 때나 물자를 나를 때에도 유일한 '길'인 나일 강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강을 '어머니'요 '신'으로 섬기며, 이 어머니의 젖줄로부터 인류 사상 가장 오래되고 찬란한 이집트 문명을 일구어 냈다.
나일 강이 어디서 발원(發源)하는지는 오랜 옛날부터 큰 관심거리였다. 그러나 나일의 수원은 수천 년간 신비의 베일에 싸여 있었다. 그리스 지리학자 프톨레마이오스도 그저 '달의 산맥(Mountains of the Moon)'에서 시작된다고 했을 뿐이다.
브루스는 2년 동안 에티오피아 말과 의술을 배우며 탐험 준비를 했다. 그가 어찌나 열심이었던지 사람들은 그를 '아비시니아 사람'이라고 놀리기까지 했다. 아비시니아란 에티오피아를 가리키는 말로,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나일 강이 에티오피아에서 흘러온다고 믿었다.
1768년 7월 이집트의 카이로에 간 브루스는 나일 강에 배를 띄워 상류로 올라갔다. 그런데 아스완에 도착하니 한창 전쟁이 벌어져 있었다. 그는 물길을 따라 상류로 올라가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물길로 탐험하기 위해 에티오피아로 발길을 돌렸다.
1770년 2월 14일 브루스 탐험대가 사막과 고원을 지나 에티오피아 수도 곤다르에 가 보니 왕자들이 천연두를 앓고 있었다. 브루스가 병을 고쳐 주자 왕비는 그의 탐험을 여러 모로 뒷바라지했다.
1770년 11월 브루스 일행은 나일 강이 흘러나오는 타나 호수에 이르렀고, 호수로 흘러드는 리틀아파이 강 물줄기를 찾아냈다. 그들은 강을 따라 험한 산으로 올라갔다. 점점 가늘어지는 물줄기는 그 산기슭의 기슈마을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을에 들어서니 작은 교회가 보였다. 브루스가 사람들이 가리키는 대로 교회 앞의 작은 언덕으로 올라가 보니, 커다란 샘에서 맑은 물이 솟고 있었다.
"드디어 3,000년에 걸친 나일의 수수께끼를 풀었다!"
브루스는 뒬듯이 기뻐했다. 과연 그 샘은 나일 강의 수원이었다.
하지만 기슈 샘이 나일 강의 전부는 아니다. 이 샘은 나일 강 상류의 두 갈래 중 하나인 청나일의 수원이었다. 더구나 브루스보다 150년이나 앞서 스페인 사람 페드로 파에즈가 찾아낸 적이 있으므로 반쪽 발견의 명예마저 그의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역사는 청나일 수원 발견을 브루스의 공으로 돌리고 있다. 기슈 샘의 위치를 바르게 재고, 청나일과 백나일이 만나서 대(大) 나일을 이루는 수단의 하르툼까지 걸어감으로써 기슈 샘이 청나일의 발원지임을 확인하고 증명한 사람이 브루스이기 때문이다.
청나일(Blue Nile)이란 물이 파랗고 맑아 붙여진 이름이다. 이 강은 기슈 샘에서 시작하여 티시사트 폭포와 타나 호수를 거쳐 하르툼에서 백나일과 만난다.
브루스 한동안 에티오피아 왕실에 머무르다 1771년 12월 그곳을 떠났다. 그는 자기를 눌러앉히려는 왕의 눈을 속이고 몰래 왕궁을 빠져나와 일행 다섯 사람과 함께 누비아 사막을 가로질렀다.
모래 폭풍과 타는 듯한 더위에다 목마름으로 그들은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낙타를 죽여 위장의 물을 빨아 먹으면서 사막을 벗어났다. 아스완에 닿은 일행은 거기서부터는 배를 타고 나일 강을 따라 내려가 1773년 1월 카이로에서 귀국길에 올랐다.
1774년 런던에 돌아온 브루스는 자신의 영지에 칩거하면서 1780년부터 자기가 겪은 일을 책으로 쓰기 시작했다. 1790년 〈나일 강 수원을 찾아서〉가 출판되자 영국인들은 처음에 이 사실을 믿지 않았다. 이는 브루스가 기슈 샘을 발견한 사실을 프랑스 궁중에 먼저 알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에 다른 탐험가들이 그의 주장이 옳음을 증명함으로써 브루스는 아프리카 탐험의 선구자로 인정 받게 되었다.
나일강의 범람과 축복"
이집트 나일강의 수위 측정기로 861년 건축한 나일로 메타를 찾아 소개하는 내용이다. 나일강의 범람은 다른 나라와는 다르게 축복으로 여겨졌다. 나일강의 범람은 사막에 생명과도 같은 물줄기를 안겨주는 삶의 축복이다. 세계 여러 나라의 자연과 문화를 학습할 때 참고자료로 활용한다.
아프리카 동부에 있는 하천. 전체 길이는 6,700㎞. 유역 면적은 아프리카 대륙의 약 1/10을 차지한다. 하천 상류의 백(白)나일 강은 빅토리아 호에서 발원하고, 청(靑)나일 강은 아비시니아 고원에서 발원하여 수단의 수도인 하르툼에서 합쳐진다. 나일 강은 이집트 동부를 거쳐 지중해로 들어가는데 그 어귀에 넓은 삼각주를 형성한다. '이집트는 강의 선물'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건계와 우계가 뚜렷한 지역을 흐르는 청나일 강의 범람으로 나일 강이 범람한다. 나일 강의 정기적인 범람은 이집트 인의 종교 사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으며, 태양력도 여기에서 나오게 된 것이다. 나일 강은 고대부터 사하라 사막을 넘어 북부 아프리카와 적도 이남의 내륙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유일한 교통로였다. 페니키아 인은 '골짜기'라는 뜻의 나할(Nahal)이라고 했으며, 나일은 그리스 어의 닐루스(Nilus)에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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