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21일 토요일

대통령 노무현, (盧武鉉),

대통령 노무현, (鉉),

현대 부산에서 인권 변호사이자 제13대 국회 의원으로 활동한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본관은 광산(光山). 아버지는 노판석이고, 어머니는 이순례이다.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73년 권양숙과 결혼하여 아들 노건호와 딸 노정연을 두었다.
한국의 제16대 대통령. 인권변호사 출신으로, 1988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정치에 입문한 뒤 5공비리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1990년 '3당 합당'에 반대하여 민주당 창당에 동참하였고, 해양수산부 장관을 거쳐 2002년 새천년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퇴임한 뒤 고향인 봉하마을에 귀향하였으나 재임중 친인척 비리로 조사를 받다가 2009년 5월 23일 사저 뒷산의 부엉이바위에서 투신, 서거하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1946~2009), 
노무현 대통령
출생-사망/ 본관/ 국적/ 활동분야/ 출생지/ 주요수상/ 주요저서/
1946.8.6(음력) ~ 2009.5.23
광주
대한민국
정치
경남 김해
영국 바스 대십자훈장(2004), 무궁화대훈장(2008)
《여보, 나 좀 도와줘》(1994), 《운명이다》(2010)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1946년 8월 6일(양력 9월 1일)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대창초등학교와 진영중학교를 다니는 동안 학업 성적이 우수하였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부산상업고등학교에 입학, 1966년에 졸업하였다. 부산상고를 졸업한 뒤 어망 제조업체에 잠시 다니다가 그만두고 건설현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면서 사법시험을 준비하였다. 1968년 육군에 입대하여 1971년 만기제대한 뒤 그만두었던 사법시험을 다시 준비하였으며, 1973년 1월 동향인 권양숙(權良淑)여사와 결혼하였다.

1975년 네 번째 도전 끝에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으며, 1977년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되었으나 이듬해 5월 사직하고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였다. 이후 한동안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1981년 제5공화국 정권의 민주화 세력에 대한 용공조작 사건인 부림사건(釜林事件)의 변론을 맡은 것을 계기로 학생·노동자 등의 인권사건을 변호하는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1985년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장을 역임하고, 1987년에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아 6월항쟁에 앞장섰다. 같은 해 대우조선에 다니던 이석규가 거리 시위 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자 사인 규명에 나섰다가 노동법의 '제3자 개입 금지'를 위반한 혐의로 구속되어 변호사 업무 정지 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1988년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의 제안으로 정치에 입문하였고, 부산 동구에서 제13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제5공화국비리조사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정연한 논리와 날카로운 질문으로 증인들을 추궁하여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1990년 통일민주당·민주정의당·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에 대하여 '부도덕한 야합'이라 비난하며 정치적 후원자였던 김영삼과 결별하고 민주당 창당에 동참하였다. 이듬해 통합민주당 대변인으로 활동하였으며,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한 뒤 제14대 대통령선거 민주당 청년특위 위원장, 물결유세단 단장을 거쳐 1993년 통합민주당 최연소 최고위원이 되었고,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열었다.

1997년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및 수도권 특별유세단 단장을 역임하고, 이듬해 서울 종로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0년 당선 가능성이 높은 종로 지역구를 포기한 채 '지역주의 타파'를 내세우며 부산 북·강서을 지역구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후보에게 패배하였다.

낙선 후 새천년민주당 부산 북강서(을) 지구당 위원장을 거쳐 2000년 8월부터 2001년 4월까지 김대중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다. 2002년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과 최고위원을 거쳐 2002년 초 국민경선제를 통하여 새천년민주당의 제16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고, 2002년 11월 18일에는 국민통합21의 대통령 후보인 정몽준과 후보 단일화에 합의한 뒤, 국민 여론조사를 거쳐 단일 후보가 되었다.

이후 '낡은 정치 청산,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 행정수도의 충청권 이전' 등을 기치로 내걸고 선거운동을 펼쳤으며, 같은 해 12월 19일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유효투표 총수 2476만 141표 가운데 1201만 4277표(48.91%)를 얻어 1144만 3297표(46.59%)를 얻은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된 뒤 2003년 2월 25일 제16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참여정부'를 표방하며 취임한 지 1년이 지난 2004년 초, 대통령의 선거중립의무 위반과 측근 비리 등에 대한 야당의 사과 요구를 거절하자 야당인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이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같은 해 3월 12일 국회의장은 경호권을 발동하여 소수 여당인 열린우리당 의원들의 반대를 저지한 채 국회 본회의에 탄핵소추안을 기습상정하였고, 다수를 점한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이 투표하여 찬성 193, 반대 2로 탄핵소추안을 가결시킴으로써 국무총리 고건이 직무를 대행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자 이를 반대하는 국민들의 비난이 빗발치고 전국 각지에서 탄핵반대 촛불시위가 잇따랐으며, 같은 해 4월 15일 치러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과반이 넘는 152석을 차지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 같은 해 5월 14일 헌법재판소가 탄핵소추안에 대하여 기각 결정을 내림으로써 두 달 만에 대통령직에 복귀하였다.

임기중 대통령 선거에서 공약으로 내세웠던 '신행정수도 이전'에 대하여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결을 내림으로써 정치적 타격을 입었고, 이라크 파병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하여 지지자들이 등을 돌리는 결과를 낳았다. 유력 일간신문을 비롯한 언론과 대립하여 임기 내내 언론으로부터 호의적 반응을 얻지 못하는 등 보수 진영으로부터는 친북좌파라는 비난을, 진보 진영으로부터는 신자유주의자라는 비판에 시달렸다.

한편, 정치인생을 일관하여 고질적인 지역주의를 청산하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사회 전반에 만연한 권위주의를 타파하는 데도 공헌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미(對美) 외교에서는 '대등한 관계'를 추구하였으며,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하여 북한과 긴장관계를 해소하는 데 힘썼다. 대통령 임기 말인 2007년 10월 4일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는 분단 후 처음으로 걸어서 판문점을 통과하여 평양을 방문,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 정상회담을 열고 '남북관계 발전 및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10·4선언)'을 발표하였다.       

2008년 2월 24일 대통령 임기를 마친 뒤 고향인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의 봉하마을로 귀향하여 오리농사, 마을청소에 참여하는 등 평범한 전원생활을 하는 한편,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개설하여 사람들과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였고, 건전한 토론문화를 조성한다는 취지로 인터넷 토론 사이트 '민주주의 2.0'을 개설하여 세상과 소통하였다.

그러나 퇴임할 때 대통령 재임시의 기록물 복사본을 가지고 귀향한 것과 관련하여 '국가기록물 무단유출'에 대한 수사를 시작으로 검찰에 의하여 측근과 친형, 부인·아들·딸 등이 비리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으로, 2009년 4월 30일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으로는 세 번째로 검찰의 소환조사를 받았다. 같은 해 5월 23일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는 내용의 유서를 컴퓨터에 남기고 사저 뒷산의 부엉이바위에서 투신하여 서거하였다.

저서에 자전적 일대기인 《여보, 나 좀 도와줘》(1994)를 비롯하여 《노무현이 만난 링컨》(2001), 《노무현의 리더십 이야기》(2002) 등이 있다. 2004년 영국 왕실로부터 최고훈장인 바스 대십자훈장(Grand Cross of the Order of the Bath;GCB)을, 2007년 카타르 정부로부터 독립대훈장을 받았다.
학업과 변호사 개업,

노무현(盧武鉉)은 1946년 9월 1일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30번지 봉하 마을에서 태어났다. 1953년 3월 경상남도 김해시의 진영대창국민학교[현 진영대창초등학교]에 입학하여 1959년 2월 졸업하고, 같은 해 3월 진영중학교에 입학하여 1963년 2월 제16회로 졸업하였다. 1963년 3월 부산상업고등학교[현 개성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966년 2월 제53회로 졸업하였다.

가난 때문에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노무현은 독학으로 1975년 3월 제17회 사법 시험에 합격하였다. 대통령에 당선된 뒤 2004년 러시아 모스크바대학교에서 명예 정치학 박사 학위, 2006년 알제리 알제대학 정치학 및 국제 관계학 명예박사 학위, 2007년 원광대학교 명예 정치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1977년 8월 사법연수원을 제7기로 수료한 뒤 9월 대전지방법원에 판사로 부임한 노무현은 8개월가량 재직하였다. 노무현은 짧은 판사 생활을 마감하고, 1978년 5월 부산에서 변호사로 개업하였다. 변호사로서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노무현의 인생에서 1981년 부림 사건, 1982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은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불법 감금과 살인적 고문으로 반국가 단체 ‘부림’을 조작 날조한 ‘부림 사건’은 전두환(全斗煥)의 통치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 낸 대표적인 반국가 단체 조작 사건이었고,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은 5·18 민주화 운동을 유혈 진압한 전두환 독재 정권을 비호한 미국의 책임을 묻기 위한 사건이었다. 두 사건의 변론을 맡으면서 노무현은 참혹한 고문으로 육체와 정신의 공황 상태를 겪고 있는 민주주의의 현실을 목도하였고, 이를 계기로 점차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같은 해에 노무현은 법조계의 새내기인 문재인과 함께 ‘노무현·문재인합동법률사무소’를 꾸려 동업에 나섰다.

인권 변호사로 활약,

1980년대 중반 노무현은 본격적으로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다. 1984년 정권과 재벌에 맞서 환경과 민중의 생존권을 지키는 활동을 전개한 부산공해문제연구소의 이사로, 1985년 부산 최초의 대중 정치 조직으로 설립된 부산민주시민협의회의 상임 위원과 부산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의 인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변호사 사무실에 부산노동법률상담소를 부설하고 노동 인권 문제에 대한 변호 활동을 본격화한 것도 이해였다.

이 무렵 울산, 창원, 거제도에는 노동 문제 전문 변호사가 없던 탓에 이 지역에서도 의뢰가 들어와, 부산노동법률상담소는 경상남도 지역의 노동 인권 사건을 총괄하는 센터 같은 구실을 하였다. 무료 변론은 물론 노조 설립과 일상적인 권익을 옹호하기 위한 활동을 지원하고 노동자를 상대로 하는 강연을 하면서, 노무현은 점차 노동 문제를 중심으로 하는 인권 변호사로 변모하였다.

1987년 1월 14일 박종철의 죽음으로 시작된 6월 민주 항쟁에서 노무현은 부산 민주화 운동의 중심으로 빠져들었다. 2월 7일 박종철 추도 집회에서 추도사를 한 것을 시작으로, 5월 발족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의 상임 집행 위원장을 맡아 맹활약을 펼쳤다. 이 일로 동료 변호사인 김광일, 문재인과 함께 부산지방경찰청 대공분실에 연행되기도 하였지만, 이는 노무현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6월 민주 항쟁에 이어진 1987년 노동자 대투쟁에서 노무현은 사실상 변호사 업무에서 손을 놓고 거리로 사업장으로 뛰어다니며 현장을 누볐다. 그 결과 1987년 이석규의 사망으로 폭발한, 경찰의 폭력 진압 반대 투쟁인 대우조선 사건으로 이해 9월 2일 불구속 기소되어 변호사 업무를 정지당하기도 하였다.

국회의원 활동,

6월 민주 항쟁으로 새로운 정치 환경이 조성되자 노무현은 현실 정치 속으로 뛰어들었다. 1988년 4월 28일 제13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 통일민주당으로 부산 동구에서 당선되었고, 10월 5공 청문회에서 ‘청문회 스타’로 두각을 드러내면서 단박에 주목받는 정치인이 되었다. 그러나 1990년 2월 노무현은 삼당 합당인 노태우(盧泰愚), 김영삼(金泳三), 김종필(金鍾泌)의 민주자유당[민자당] 창당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면서 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1991년 개혁 신당과 함께 통합한 통합민주당의 대변인으로 활동하였다.

이 때문에 노무현은 원칙과 신념의 정치인이란 평가와 함께 험난한 정치 역정을 걸어야 하였다. 결국 1992년 3월 24일 제14대 국회 의원 선거[부산광역시 동구], 1995년 부산광역시장 선거, 1996년 제15대 국회 의원 선거[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연거푸 고배를 마셨다.   

1997년 비슷한 처지에 있던 이들과 함께 서울 역삼동에 ‘하로동선(夏爐冬扇)’이라는 식당을 개업하여 마음을 나누기도 하고, SBS 라디오 ‘뉴스 대행진’의 진행자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11월 김대중이 창당한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여 부총재를 역임하며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을 도왔다. 이듬해인 1998년 7월 21일 제15대 국회 의원 보궐 선거[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새정치국민회의 소속으로 다시 국회 의원이 될 수 있었다.

이런 노무현에게 2000년 제16대 국회 의원 선거는 낙선의 아픔과 노사모라는 정치적 자산을 동시에 안겨 준 사건이었다. 그는 당선이 유력시되던 서울 종로를 떠나 지역주의 타파를 내걸고 부산광역시 북·강서을에 출마하여 또다시 낙선의 아픔을 겪었다. 하지만 노무현의 낙선은 당선보다 더 큰 감동을 주었고, 대의와 원칙을 위해 불이익을 무릅쓴 그에게는 ‘바보 노무현’, ‘아름다운 바보’라는 애칭이 주어졌다. 이러한 정서를 기반으로 한국 정치사상 최초의 정치인 펜클럽인 ‘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노사모]가 결성되었다. 이후 노사모는 정치인 노무현의 최대 자산이 되었다.

대통령 당선 및 그 후,

이후 노무현은 김대중 정부에서 2000년 8월 7일~2001년 3월 26일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재직한 뒤 드디어 대통령 선거에 출사표를 던졌다. 2002년 일반 국민이 참여하여 대통령 후보를 결정하는 국민 경선제에서 노무현은 예상을 뒤엎는 돌풍을 일으키며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연말의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됨으로써, 2003년 2월 25일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청문회 스타라는 명성과 지역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얻은 신뢰, 그리고 국민 경선제라는 정치 실험을 통해 노무현은 정치에 입문한 지 불과 15년 만에 대통령이 되었던 것이다.

대통령 노무현은 2004년 3월 12일 현직 대통령으로서 탄핵 소추를 당하는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를 겪기도 하였지만, 참여 정부의 임기 내내 민주주의와 복지 정책에 역점을 둔 정치를 일관되게 펼쳐 나갔다. 임기 말년인 2007년 10월에는 제2차 남북 정상 회담을 통해 10·4 공동 선언을 이끌어 냄으로써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노력을 이어 갔다. 

그러나 재임 중 가족이 후원자의 경제적 지원을 받은 일로 검찰의 수사

2008년 2월 25일 퇴임한 후 노무현은 고향인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 마을로 귀향하여, 농촌 마을 가꾸기와 친환경 생태 농업을 실천하는 농부의 삶으로써 제2의 인생을 시작하였다. 이런 퇴직 대통령의 모습은 국민들에게 신선한 감동을 주었으며, 그에게 ‘노간지’라는 별명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재임 중 가족이 후원자의 경제적 지원을 받은 일로 검찰의 수사를 받게 되는 일련의 상황 속에서, 2009년 5월 23일 봉하 마을 뒷산에서 투신하여 서거하였다. 향년 64세였다. 5월 29일 국민장이 엄수되고 7월 10일 유골이 봉하 마을에 안장되기까지, 500만~600만 명에 달하는 추모 인파가 봉하 마을과 전국 각지에 마련된 분향소를 찾아 분향하고 서울 광장에서 열린 노제에 참석하여 죽음을 애도하였다.
저술 및 작품,
『여보, 나 좀 도와 줘』[새터, 1994], 노무현 외, 『의원님들, 요즘 장사 잘 돼요?』[1997], 노무현 외, 『마음먹었을 때 시작해라(사시·행시·외시 성공 Story)』[고시계사, 2000], 『노무현이 만난 링컨』[학고재, 2001], 『노무현의 리더십 이야기』[행복한책읽기, 2002], 노무현·유시민 외, 『노무현-상식 혹은 희망』[행복한책읽기, 2002], 노무현 외, 『성공하고 싶다면 군대에 가라』 1·2[랜덤하우스코리아, 2003], 이윤기 외, 『해인사를 거닐다』[옹기장이, 2003], 『로마의 논리와 감성-노무현의 논리 마광수의 감성』[우민OK논술교실, 2005] 등 노무현이 직접 쓰거나 관련 활동을 기록한 책들이 있다.
묘소,
묘소는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 마을에 있다. 2009년 8월 5일 국가 보존 묘지 제1호로 지정되었다.
2009년 5월 29일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 당시 모여든 추모 인파(출처: 게티이),
상훈과 추모,
2004년 영국 최고 훈장 배스대십자 훈장, 2005년 코스타리카 명예로운 훈장, 2007년 스페인 시민 훈장, 2007년 카타프 독립 대훈장, 2007년 사우디 국가 최고 훈장 ‘킹압둘아지즈 훈장’, 2007년 쿠웨이트 국가 최고 훈장, 2008년 무궁화 대훈장 등을 수상하였다. 2009년 9월 23일 노무현의 사상과 정신, 가치를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사람 사는 세상 노무현 재단[약칭 노무현재단]이 설립되었다. 그리고 2009년 9월 24일 노무현의 생가가 복원되어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해마다 기일을 즈음하여 봉하 마을을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에서 노무현 추모제가 열려 고인을 기리고 있다.
노무현을 기리며 2009년 『성공과 좌절』[학고재], 『진보의 미래』[동녘], 『내 마음속 대통령-노무현, 서거와 추모의 기록』[한걸음더]과 『사람 사는 세상-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 사진집』[학고재]을 출간하였다. 그리고 자서전 『운명이다』, 노무현재단에서 『봉하 일기』[부키]를 출간하였고, 이외에 노무현을 추모하는 여러 종의 저작물이 있다. 2010년 5월 16일 대통령의 주요 유품과 사진, 기록, 영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추모 전시 공간으로 ‘추모의 집’이 봉하 마을에 건립되었다.
한국의 역대 대통령,
 
이 름
재임기간
제1~3대 대통령
1948.07 ~ 1960.04
제 4대 대통령
1960.08 ~ 1962.03
제5~9대 대통령
1963.12 ~ 1979.10
제10대 대통령
1979.12 ~ 1980.08
제11~12대 대통령
1980.09 ~ 1988.02
제13대 대통령
1988.02 ~ 1993.02
제14대 대통령
1993.02 ~ 1998.02
제15대 대통령
1998.02 ~ 2003.02
제16대 대통령
2003.02 ~ 2008.02
제17대 대통령
2008.02 ~ 2013.02
제18대 대통령
2013.02 ~ 2017.03
제19대 대통령
2017.05 ~ .


전 대통령출생-사망1946년 9월 1일, 경상남도 김해 - 2009년 5월 23일가족배우자 권양숙, 아들 노건호, 딸 노정연, 형 노건평학력부산상업고등학교수상2008년 무궁화대훈장경력2003.02~2008.02 제16대 대한민국 대통령관련정보역대 대한민국 대통령사이트공식홈페이지블로그트위터페이스북노무현사료관
2005년 APEC 경제 지도자 회의 부산 선언 2005년 11월 18일부터 11월 19일까지 부산 벡스코 및 누리마루 APEC 하우스에서 개최된 2005년 APEC 경제 지도자 회의에서 각국정상들과 노무현 대통령이 부산 선언의 요지를 담은 정상 선언을 발표 하는 모습이다. 
참조항목,
역참조항목,
카테고리,
  • [노무현과 국민 사기극』(인물과 사상사, 2001)
  • [문재인의 운명』(가교출판, 2011)
  • [네이버 지식백과]노무현 [盧武鉉]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게티이미지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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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20일 금요일

박정희 대통령,전두환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전두환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의 일화,

논바닥에서 펑펑 울던,
박정희 전 대통령출생-사망1917년 11월 14일, 경상북도 구미 - 1979년 10월 26일가족배우자 육영수, 딸 박근혜, 딸 박근령, 아들 박지만수상1963년 무궁화대훈장경력1978.12~1979 제9대 대한민국 대통령
1972.12~1978 제8대 대한민국 대통령
1972 통일주체국민회의 의장관련정보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독재 업적
박정희 대통령 > 새마을운동/ 10.26사태
전두환 대통령 > 5.18민주화운동
5-9대 대통령 : 박정희 ( 1963년 ~ 1979년 )
5-7대는 직선/ 8-9대는 간접선거/ 강력한 리더쉽/ 경제발전의 기초를 다진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 긍정적인 평가 요소/ 경제 새마을운동/ 베트남파병/ 박정희 리더십/
*새마을운동,
1970년부터 시작된 범국민적 지역사회 개발운동.
농어촌 환경정비사업을 첫 단계로 한 농어촌의 새마을운동은 지붕개량·주택개량·농로개설·마을도로확충·하천정비·전기화사업 등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예를 들면 겨울철 농한기를 이용하여 전국의 동(洞)·이(里)에 시멘트를 무상 지급함으로써 각 마을의 환경개선사업을 추진하도록 하여, 볏짚지붕의 슬레이트 대체, 담장보수, 마을 진입로 정비 등이 효과적으로 시행되었다. 그리고 72년부터 주민지도자를 발굴, 훈련시킴으로써 낙후된 주민의 정신을 계도시켜 나갔고, 농어가의 소득증대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박정희 대통령,
도시,
도시새마을운동은 10대 구심사업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었는데, 법질서의 준수, 건전소비풍토 조성, 도시녹화, 뒷골목과 가로 정비, 시민의식의 계발, 새마을청소, 생활오물분리수거, 시장새마을운동 전개, 도시환경개선, 낙후지역개발 등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도시새마을운동 추진은 지역·부녀·공장·학교새마을운동 등으로 조직화되면서 점차 정부 주도를 탈피하였으며, 80년 새마을운동중앙본부의 설립과 함께 민간주도로 전환되었다.
성과: 새마을운동의 성과로는 앞서 언급했던 점 외에도 수리시설확충·농경지확장 등을 통한 식량자급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소득증대사업으로서는 영농의 과학화, 농가부업의 육성, 농산물가격보장, 새마을공장·새마을금고 육성, 농수산물 유통구조개선, 생산품 품질개선과 생산성 향상, 근로자 후생복지제도 및 시설확충 등에서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전통체계하의 농촌을 단기간 내에 현대적인 것으로 변환하도록 충격을 가했다는 점이 특기할 성과라 할 것이다.
부정적영향: 새마을운동의 가시적 성과는 유신체제를 지탱하는 버팀목 역할을 하였으나, 78년을 전후하여 정부의 경제정책이 바뀌자 농축산물 가격하락, 돼지파동, 쌀수매가 동결 등이 겹쳤고, 내무부가 새마을사업의 중점을 농촌주택개량에 둠으로써 농가마다 막대한 부채를 안게 되어 탈농·이농이 속출하였다. 여기에 제 5 공화국이 들어서자 이 운동을 이용한 온갖 부정사건이 일어남으로써 새마을운동은 침체되었다.
*1.21 사태,
이 사건은 북한의 특수부대인 124군부대 소속 31명이 청와대 습격과 정부요인 암살지령을 받고, 한국군의 복장과 수류탄 및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휴전선을 넘어 야간을 이용하여 수도권까지 잠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세검정고개의 자하문을 통과하려다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을 받고 그들의 정체가 드러나자 검문경찰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무차별 난사하는 한편, 그곳을 지나던 시내버스에도 수류탄을 던져 귀가하던 많은 시민들이 살상당하였다.
군 ·경은 즉시 비상경계 태세를 확립하고 현장으로 출동, 28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하였다. 이 사건으로 많은 시민들이 인명피해를 입었으며, 그날 밤 현장에서 비상근무를 지휘하던 종로경찰서장 총경 최규식(崔圭植)이 무장공비의 총탄에 맞아 순직하였다. 그날 유일하게 생포된 김신조(金新朝)는 그동안 김일성의 허위선전에 속아 살아왔음을 깨닫고 한국으로 귀순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북한의 비정규전에 대비하기 위한 향토예비군을 창설하였다.
향토예비군-향토방위를 위하여 조직된 한국의 비정규군.
*10.26사태,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0분경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安家)에서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金載圭)가 대통령 박정희를 살해한 사건.
1972년에 시작된 유신체제는 중화학공업에 대한 무리한 투자로 경제의 악화를 가져왔고, 1인 장기집권에 대한 강압통치와 대외적으로는 한국의 인권상황의 개선을 종용한 미국 카터 행정부와의 불화 등 정치·경제적 모순이 반정부 시위로 폭발하여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 해 10월 16일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18일 부산에 비상계엄령이, 20일 경남 마산·창원에 위수령이 발동되었다. 더욱이 집권층 내부의 갈등이 부마사건의 처리문제로 더욱 커지게 되었다.
10월 26일 만찬 도중에 김재규는 박정희와 차지철(車智澈)을 살해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3가지 설이 있다. 우선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의 강경노선이 채택되자 그의 견제로 김재규가 진퇴위기에 몰렸다는 것이 가장 유력하다. 미국의 음모라는 설도 있으며, 김재규의 우발적인 살인이라는 설 또한 제기되고 있다. 이 사건으로 유신체제가 무너졌으며, 전두환정권이 수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유신체제-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박정희가 장기집권을 목적으로 단행한 초헌법적 비상조치.
@부마민주항쟁-1979년 10월 부산 및 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벌어진 박정희(朴正熙)의 유신독재에 반대한 시위사건.
@위수령-육군 부대가 한 지역에 계속 주둔하면서 그 지역의 경비, 군대의 질서 및 군기(軍紀) 감시와 시설물을 보호하기 위하여 제정된 대통령령(大統領令).
10대 대통령 : 최규하 ( 1979년 ~ 1980년 )
선거로 선출되지 않은 유일한 대통령. 실권 없는 대통령, 군부에 의해 하야.
11-12대 대통령 : 전두환 ( 1980년 ~ 1988년 )
간선제. 강력한 리더쉽, 부정축재자, 경제안정에 기여한 대통령.
*5.18 민주화 운동
1980년 5월 18일에서 27일까지 전라남도 및 광주 시민들이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全斗煥) 퇴진, 김대중(金大中) 석방 등을 요구하여 벌인 민주화운동.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된 후 전두환등의 신군부가 최규하 과도 정부를 유명무실하게 하고 정승화 계엄 사령관을 대통령 시해 사건의 용의자로 체포하면서 군부의 권력을 장악한 12·12 사태가 일어나게 된다.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이 군사독재를 연장하려하자, 학생을 중심으로 한 수만 명의 시민들은 1980년 5월 15일 서울역에서 계엄 철폐 등을 주장하며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자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 해산하게 된다.
박정희, 전두환, 김정일,
이에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계엄령을 오히려 전국적으로 확대한다는 발표를 하고 학생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 휴교령 등의 민주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다.
5월 18일 전남대생 200여명은 휴교령이 내려진 학교에 들어가려다 계엄군과 투석전을 벌였고 부상당한 학생들을 보고 합세한 시민들과 시위를 벌였으나 계엄군의 폭력 진압으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면서 광주민중항쟁이 시작되었다.
5월 19일 시위대가 5,000여명으로 불어나자 계엄군은 장갑차를 앞세우고 착검한 총으로 시위대를 진압하였다. 5월 20일 20만명의 시민이 군경 저지선을 뚫고 시청건물을 장악하였으며, 계엄군에 의해 모든 시외 전화가 두절되어 광주는 고립되었고, 밤 11시경 계엄군은 시민에게 발포를 하기에 이르렀다.
5월 21일 계엄군의 발포로 수십여명이 사망하였으며, 이에 시민들은 스스로를 시민군이라 칭하며, 경찰서나 계엄군으로부터 탈취한 소총으로 무장을 시작하였다.
5월 22일 시민들은 계엄군을 몰아내고 도청을 차지 '5.18사태 수습 대책 위원회'를 결성하고 사태 수습에 들어갔으나, 계엄군의 협상 거부로 협상이 결렬되고 27일 계엄군의 총공세로 많은 희생자를 낸 광주 민주화 운동은 막을 내렸다.
5·18은 깨어있는 시민들이 민주사회 발전의 원동력임을 확인하는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나아가 불의의 독재를 거부하는 민주화운동이 합법성과 정당성을 갖고 있음을 확인시켰다. 그리고 5·18민주화운동은 유신체재를 계승한 제5공화국 정권의 부도덕성을 부각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여 끝내 그 체제를 붕괴시키고 문민정부를 탄생시켰으며 50년만의 여·야간 정권교체를 이룩하는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다.
결국 5·18은 과거의 역사적인 민중항쟁을 통해 표출되었던 자주·민주·통일의 전통을 계승하였으며 민주주의 발전사를 빛낸 민권투쟁으로 기록되고 있다.
대한민국역대 대통령,
*88올림픽유치,
79년 정부가 올림픽 유치계획을 정식 발표한 기자회견이 있은 18일 뒤 <10 .26="">가 일어났다. 서울올림픽 개최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박정희 대통령이 타계하자 정치적 상황은 급변했다. 올림픽 유치계획을 구체화하는데 앞장선 박종규 위원장이 체육계 일선에서 밀려났다. 이어 올림픽 개최 회의론이 일기 시작했다.
올림픽 유치 계획이 새로운 국면을 맞은 것은 80년 9월 1일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부터다. 새로 소집된 KOC(Korean Olympic Committee)대한올림픽위원회는 “올림픽 개최는 국가의 대외이미지 개선과 대공산권 외교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할 것이며, 설령 유치 경쟁에서 탈락하더라도 올림픽유치후보국으로서의 명예가 남는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88올림픽 개최는 사실 전두환 대통령의 3S(SCREEN, SPORTS, SEX)정책의 일환이었다. 국민들의 관심은 82년 새로 출범하게 될 프로야구를 비롯한 스포츠로 쏠렸다. 올림픽을 치르면 선진국이 될 수 있다는 언론의 목소리는 국민들을 쉽게 현혹시켰다. 올림픽개최지의 국민이 된다는 기대감은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소비심리의 확대로 이어져 경제규모를 급속히 성장시켰다. 88올림픽은 전두환 정권의 유지를 정당화시키기에 충분한 근거가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 전두환 대통령 >>>독재 업적,
새마을운동/ 10.26사태/ 5.18민주화운동,
박정희 대통령 긍정적인 평가 요소/ 경제 새마을운동/ 베트남파병 박정희 리더십,
박정희에 대한 긍정적 평가,
경 제​,
엄청난 경제발전의 바탕을 이룸
박정희 대통령 재임기간 우리나라는 역사상 처음으로 경제발전을 위한 국민적 에너지를 결집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이는 ‘한강의 기적’으로 나타났다. 61년 21억 달러에 불과했던 국내총생산(GDP)은 79년 616억 달러로 30배 가까이 늘었다. 
수-출입을 합한 교역규모는 3억6000만 달러에서 354억 달러로 100배나 증가, 수출주도형 경제성장의 성공사례를 만들어냈다.
수출을 통한 대외지향적인 경제성장 전략의 성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은 북한과의 대비에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1961~1979년 사이 남한의 1인당 국민소득이 82달러에서 1647 달러로 20배 이상 급증하는 동안 북한은 125 달러에서 720 달러로 6배 정도 늘어나데 그쳐 남-북한의 경제력은 완전히 역전됐다.
박 대통령의 18년 통치기간은 국민들에게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었다는 점에서 이 같은 경제지표의 양적 변화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또 70년대 후반의 중화학 공업화는 이후 80년대 중반의 ‘3저’ 호황으로 결실을 맺으면서 우리나라가 선진국 문턱으로 진입하는 데 밑바탕이 됐다.
정부는 국내 재정의 부족을 보충하려고 외자 도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정부는 공공 차관뿐만 아니라 민간 차관까지, 즉 모든 해외 차관을 정부가 지급 보증한다는, 외국에 그 예가 없는 이례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박정희는 외국 기업의 국내 진출은 기술과 선진 경영 기법의 습득 및 해외 시장 진출에서 득이 훨씬 많다는 신념 아래 이를 지지하였다. 특히 우방의 대기업의 직접 투자는 국가 안보상 도움이 된다고 강조하였다. 정부는 외국 차관의 도입을 효율적으로 건전하게 관리했으며 외채 관리도 매우 잘 했으므로 일부 다른 나라에서 발생한 것과 같은 국내 자본의 해외 도피는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박정희는 자기 스스로 5개년 계획상의 공공·민간을 불문하고 모든 사업의 진도를 항상 점검했다. 5개년 계획은 매년 심사 분석되고 수정되었으며, 관계 부처는 자기 소관의 연차별 목표 달성에 최선을 다하였다.
한국 경제는 자유시장경제이지만 5개년 경제발전계획의 집행에 있어서는 계획경제의 특징을 약간 띠고 있었다. 또한 한국 경제의 기본은 사유기업제도였고, 공기업들은 기간산업 및 사회간접자본의 건설과 개발에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중화학공업화 - 수출증대,
70년대에 들어서면서 기존의 경공업 중심 수출 정책이 한계에 부딪히고 경제가 불황에 처하자 박정권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중 화학공업화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경공업과 중화학공업사이의 상 호연계성을 보완하여 한국의 수출능력을 제고시킬 수 있는 방향 으로 제3차 계획을 작성했다.
정부는 1965년부터 수출특화산업중점육성책을 세웠으며 한국 상 품의 국가 경쟁력과 기업의 체질 강화를 위하여 그간 수입 대체 또는 유치산업 보호를 위하여 실시하고 있던 저금리와 과대 평가된 환율의 현실화와 수입의 자유화를 단행하여 이후의 수출신장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수출은 국력의 총화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던 박대통령은 매월 수출진흥확대회의(사진)를 주최하여 수출실적을 점검하고 문제점을 해결해나가며 정책을 제도화해 나갔다. 그 덕분에 우리나라는 수출 100억불이라는 결과를 달성할 수 있었다.
이는 “국력배양은 민족의 안정과 번영을 이룩하기 위한 오직 유일한 길” 이며, 이는 ‘수출의 획기적 증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보는 박정권의 의지 때문이었다.
왼),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
한일협정체결이 경제에 미친 영향,
한일협정(韓日協定)의 체결로 한국으로 흘러들어온 대일 청구권 자금이 한국의 제1·2차 5개년 경제계획을 추진하는 주요자금원이 되어 경제적 기적을 가져왔다고 보는 것이다. 건국 후 미국이 한국의 안전보장을 보호해주고 식량·의류 등 생필품을 대주는 데 기여하였다면 한국의 산업화의 자금과 기술은 상당부분이 일본에서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한국이 미국·일본에 종속적 발전을 가져왔다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한국이 후진적 농업국가로부터 중진적 공업국가로 탈바꿈하는데 한일회담의 성사가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는 없는 일이다.
새마을 운동 - 농촌의 발전
박정희는 군사쿠테타 성공 직후부터 농촌의 근대화를 위한 ‘중 농정책’을 내걸고 농촌의 지지를 획득하려 했다. 그러나 공업화 중 심의 경제개발정책의 결과 도시와 농촌의 격차는 더욱 심화 되었 다. 박정권은 이러한 농촌의 열악한 상황을 더 이상 방치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정치적 경제적의 이유로 하여 토양 개량, 경지 정리, 다목적 댐 건설을 비롯한 수리 시설의 확충, 영농의 기계화, 다수확 미곡 종자의 개발, 온상 재배 보급, 농산물 가격지지 정책등을 실시하였다. 특히 이중 곡가제, 단지별 농어민 소득 증대 특별 사업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는데 농촌 부흥의 결정적 요인은 박정희가 스스로 창시하여 농민들의 근면·자조·협동의 정신을 각성시킨 새마을 운동이었다.
박정희는 근면·자조·협동의 자각을 일깨우는 새마을 운동을 일으켰다. 박정희는 새마을 운동의 정치적 이용을 엄금시켰고 중점을 농민의 소득 증대에 두었다. 새마을 운동이 농민을 위한 잘 살기 운동이라는 것을 농민 스스로가 자각하고 믿게 되자 전국에 요원의 불길처럼 확산돼 나갔다.
70년대 중반부터 농민 소득은 도시 근로자의 소득을 초과하게 되었고 쌀의 자급자족이 이루어졌다. 새마을 운동 후 농민들의 저축 의식이 고조되어 드디어 1970년대 말에 가서는 농민들의 저축이 농협 대출 재원의 대종을 이루게 되었다.
사회·문화,
새마을 운동,
박정희 시대가 남긴 사회 문화적 업적 중 가장 추상적이면서도 그럼에 도 가장 주목해야 할 업적은 국민 모두에게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과 근로의지를 불어넣은 것이다. 박정희 시대 이전까지 세계의 빈국이었던 우 리는 당시 일제시대부터 이어져 오는 가난을 타파할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었다.
변변한 공업기반 조차 없이 식량의 자급자족조차 어려운 극빈 층이 국민의 다수였고 이들은 그저 어떻게 보릿고개를 넘길 수 있을 것인 가 하는 단순히 먹는 문제조차 해결 못하여 허덕이고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 시대의 경제발전은 국민들에게도 우리도 잘 살수 있다는 자신감을 부여해 주었다. 그리고 그 자신감은 극대화되어 다시 엄청난 효과를 불러일으킨 운동으로 발전했다. 그것이 바로 새마을 운동이었다.
새마을 운동은 당시 성장 거점 정책으로 인해 발달한 대도시와 달리 아직도 열악한 환경에 놓인 농촌의 생활환경 개선을 위해,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읍면단위로 벌인 생활 개선 운동이다. 정부는 경쟁심을 자극하기 위해 각 읍면의 개선의지에 따라 차등하여 집중 지원하였으며 이는 우리 마을도 발전하고 싶다는 경쟁심리를 자극시켜 단기간에 경이적인 농촌발전 효과를 내었다.
새마을 운동의 효과는 다방면에서 나타났다. 우선 가시적으로 농촌의 교육과 문화환경이 개선되었다. 도로개발, 교량건설, 농가에 수도 설치, 지붕의 슬레이트화, 전기공급 등이 그 예이다. 또한 새마을 운동은 구각에 매달리던 기존의 의식을 자립의지로 전환시켰다.
농촌주민들이 정부의 지원을 받기위해 마을공동문제에 관심을 갖고 스스로 해결하게 되고, 새마을지도자라고 하는 자신에게 성실하고 이웃에 묵묵히 봉사하는 새로운 유형의 지도자를 스스로 선출하였다. 또한 새마을회관을 주민 토론의 장으로 활용하여 그곳에서 마을 일을 토론하였다. 
이런 일련의 현상들을 보면 결국 새마을 운동이 민주주의의 생활화에 기여한 것이다. 또한 근대적이고 진취적인 의식구조의 변화로, 주민간의 협동을 통한 집단적 노력의 엄청난 성과에 대한 국민적 자각이 있었다.
이러한 새마을 운동의 업적 뒤에는 정부의 올바른 방향 제시와 적극적 지원이 있었으며 이는 농촌출신 지도자가 농촌의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여 강력한 추진력으로 밀어 부쳤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정 치,
베트남 파병
박정희가 쿠테타로 이루어진 정부이라는 이유로 미국은 그 동안 해오던 원조를 차단했다. 배고픔에 굶주렸고 일자리 또한 없었다. 경제성장, 우리는 이를 ‘한강의 기적’이라고도 부른다. 이렇게 짧은 기간에 이렇게나 성장한 나라는 오직 우리나라, 대한민국뿐이다.
다른 나라처럼 땅을 파면 석유가 나오고 다른 쇠붙이라도 나오면 좋으련만 우리나라는 땅을 파고 내다 팔 자원조차 없는 나라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는 외국에 돈을 빌리러 다녔다. 그 경제적 이유에 의해 베트남 파병도 결정하게 되었다.
전쟁터로 보내는 소수 인원을 보내면서 당신들이 가지 않으면 국민이 굶어서 죽게 됨을 그렇기에 역사가 쓸 평가를 두려워하지 않고 파병을 하고 지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왼), 김재규, 박정희대통령,
국 방,
자립경제 - 자주국방
박정희는 우리 국가에 관한 책을 애독하고 그 방면에 조예가 깊었으며 뚜렷한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역사관을 요약하면 우리민족이 세계 어느 민족에게도 뒤지지 않는 역사와 전통, 제도 문화를 가진 슬기로운 민족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북한의 무력침투를 대비하기 위해 국방역량을 꾸준히 배양해야 한다고 여겼다. 이는 민족의 실현가능한 통일방법론을 정립하게에 이른다. “통일의 길이 조국 근대화에 있고 근대화의 길이 경제자립에 있는 것이라면 자립은 통일의 첫 단계가 되는 것이다”라는 3단계 목표를 설정하여 우선 자립경제 건설을 주도하였다.
평화통일 문제
첫째, 박정희의 통일 안보정책정책은 북한의 무력적화노선에 대하 여 자주평화통일정책을 일관되게 운영하였다.
둘째, 평화통일의 실 현을 위한 방법으로 자주외교정책을 구축하였다.
셋째, 박정희의 평 화통일 기본 정책은 한국이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사회적 기반 을 마련하는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인간 박정희 - 리더십
박정희는 아침점심·저녁으로 밥을 먹을 때 꼭 30%는 보리를 섞었다. 지금처럼 건강식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쌀을 아끼려고 혼식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그렇게 그는 소박하였고 나라 경제를 염려하였다. 비록 그는 독재자였지만 그가 집권한 정권 속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그래야만 했던 이유가 있다.
지금 이 시대, 먹고사는데 큰 지장이 없다 못해 쓰레기가 넘쳐나는 지금 우린 그 시절 그 사람들에게 욕할 수 없다. 이렇게 그를 우리나라 경제 성장의 주인공에 올려놓았던 리더십을 다시 한번 높이 평가하는 바이다. 박정희는 한민족사가 혼미한 가운데 5·16군사혁명을 단행하여, 지금까지 한국의 소극적·타율적인 근대화로부터 적극적·자율적인 근대화로 기틀을 다져 나갔다.
혁명 후 18년 5개월 동안 집권하면서 북한의 남침위협에 대응하면서 우선 남북한의 평화를 정착 시키고 근대화를 효율적으로 추진함으로써 세계에서 보기 드문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하였다. 그 구심운동의 중심에 박정희의 지도성이 있었다.
그분의 나라사랑 정신에 감사를.
[박정희 대통령 담화문] 
작금에 문제인 반일을 부추켜 정치적으로 이용할려고 하다 국가적인 낭패를 당하게된 짓거리를 보면서 진정한 극일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하며 무엇보다도 이나라의 위정자들은 꼭 읽고 성찰 하는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1965년 한일회담에 즈음하여 발표한 역사적인 담화문을 지금에 와서 처음으로 읽어보며 국민의 한사람으로써 수치와 부끄러움을 느껴봅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대일국교정상화회담 결과에 대한 국민담화문]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어제 일본 동경에서 한일양국의 전권대표 사이에는 양국 국교정상화에 관한 제협정이 정식으로 조인되었습니다. 
지난 14년 동안 우리나라의 가장 어렵고도 커다란 외교 숙제였으며, 또한 내가 총선거 때에 공약으로 내건 바 있는 이 문제가 마침내 해결을 본 데 즈음하여,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평소 소신의 일단을 밝혀 국민 여러분의 이해와 협조를 얻고자 합니다. 
한 민족, 한 나라가 그의 운명을 개척하고 전진해 나가려면 무엇보다도 국제정세와 세계조류에 적응하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국제정세를 도외시하고 세계대세에 역행하는 국가판단이 우리에게 어떠한 불행을 가져 오고야 말았는가는 바로 이조 말엽에 우리 민족이 치른 뼈저린 경험이 실증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국제정세는 우리로 하여금 과거 어느 때보다도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대치하고 있는 적은 국제공산주의 세력입니다. 
우리는 이 나라를 어느 누구에게도 다시 빼앗겨서는 안되지만, 더욱이 공산주의와 싸워 이기기 위하여서는 우리와 손잡을 수 있고 벗이 될 수 있다면 누구하고라도 손을 잡아야 합니다.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수호하고 내일의 조국을 위해서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과거의 감정을 참고 씻어버리는 것이 진실로 조국을 사랑하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나의 확고부동한 신념입니다. 더구나 중공의 위협이 나날이 증대하여 가고 있고, 국제사회가 이른바 다원적 양상으로 변모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의 위치를 냉철하게 파악하고 반세기 전에 우리가 겪은 민족의 수난을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국가의 안전보장과 민족의 번영을 기약하는 현명한 판단이 절실히 요청되는 것입니다. 
지난 수십년간 아니 수백년간 우리는 일본과 깊은 원한 속에 살아 왔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독립을 말살하였고, 그들은 우리의 부모형제를 살상했고, 그들은 우리의 재산을 착취했습니다.
과거만을 따진다면 그들에 대한 우리의 사무친 감정은 어느모로 보나 불구대천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민 여러분! 그렇다고 우리는 이 각박한 국제사회의 경쟁속에서 지난 날의 감정에만 집착해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제의 원수라 하더라도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위해 필요하다면 그들과도 손을 잡아야 하는 것이 국리민복을 도모하는 현명한 대처가 아니겠습니까?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한일간의 국교를 정상화함에 있어서 나와 현정부가 크게 배려한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원통스러운 과거를 청산하고 호혜평등, 협동, 전진의 앞날을 다짐하는 기본관계의 설정이었고, 
다음으로는 대일평화조약에 규정된 청구권 문제, 한국 연안의 어족자원보호와 100만 어민의 장래를 보장하는 어업협정문제, 일본땅에 버려진 채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60만의 재일교포의 처우문제, 그리고 우리의 귀중한 문화재를 돌려받는 문제였습니다.
물론 이러한 제문제가 우리만의 희망과 주장대로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자신을 갖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처해 있는 제반여건과 선진제국의 외교관례에 비추어 볼 때 우리의 국가이익을 확보하는 데 선의를 다 했다는 사실입니다.
외교란 상대가 있는 것이고, 또 일방적 강요를 뜻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이치와 조리를 따져, 상호간에 납득을 해야 비로소 타결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한일간의 공동의 이익과 공동의 안전과 공동의 번영을 모색하는,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게 되었읍니다. 
양국은 비단 지리적으로 가깝다든가 역사적으로 깊은 관계에 있다는 것만이 아니라, 극동의 같은 자유국가로서 공동운명의 길을 걷고 있읍니다. 
이 공동의 관계는 호혜평등의 관계요, 상호협력의 관계이며 또한 상호보완의 관계입니다. 
한일 양국간에 있어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이 순간에 우리가 깊이 반성하고 깊이 다짐할 점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독립국가로서의 자주정신과 주체의식이 더욱 확고해야 하겠다는 것이며, 아시아에 있어 반공의 상징적인 국가라는 자부와 긍지를 잊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국민의 일부 중에 한일협정의 결과가 굴욕적이니 저자세니, 또는 군사적 경제적 침략을 자초한다는 등, 비난을 일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매국적이라는 극언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그들의 주장이 정부를 편달하고 정부가 하는 협상의 입장을 강화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는 점에서 이것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여 왔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의 주장이 진심으로 우리가 또다시 일본의 침략을 당할까 두려워하고 경제적으로 예속이 될까 걱정을 한다면,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들은 어찌하여 그처럼 자신이 없고 피해의식과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일본이라면 무조건 겁을 집어먹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비굴한 생각, 이 것이야말로 굴욕적인 자세라고 나는 지적하고 싶습니다. 
일본사람하고 맞서면 언제든지 우리가 먹힌다 하는, 이러한 열등의식부터 우리는 깨끗이 버려야 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제는 대등한 위치에서 오히려 우리가 앞장서서 그들을 이끌고 나가겠다는 우월감은 왜 가져보지 못하는 것입니까? 
이제부터는 이러한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하나의 민족국가가 새로이 부흥할 때는 반드시 민족 전체에 넘쳐흐르는 자신과 용기와 긍지가 있어야 하고 적극성과 진취성이 충만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근대화 작업을 좀먹는 가장 암적인 요소는 우리들 마음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패배주의와 열등의식, 그리고 퇴영적인 소극주의 바로 이것인 것입니다.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비생산적인 사이비행세, 이것들입니다. 또 있습니다. 속은 텅텅 비고도 겉치레만 번지레 꾸미려 하는 권위주의, 명분주의, 그리고 언행불일치주의입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과감하게 씻어버려야 합니다. 그리하여 자신을 가진 국민이 됩시다. 자신은 희망인 것입니다. 희망이 있는 곳에 민족의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법입니다. 응당한 노력을 지불함이 없이 공짜로 무엇이 되려니, 또는 무엇이 생기려니 하는 생각은 자신력을 완전히 상실한 비굴한 사고방식입니다. 
지금 일부 국민들 중에 한일국교정상화가 되면 우리는 또다시 일본의 침략을 당한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지만 이러한 열등의식은 버려야 하는 동시에 이와 반대로 국교정상화가 되면 당장에 우리가 큰 덕을 볼 것이라는 천박한 생각도 우리에게는 절대 금물인 것입니다. 
따라서 한마디로 한일국교정상화가 앞으로 우리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 오느냐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느냐 하는 관건은 우리의 주체의식이 어느 정도 건재하느냐 우리의 자세가 얼마나 바르고 우리의 각오가 얼마나 굳으냐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정신을 바짝 차리지 못하고 정부는 물론이거니와 정치인이나, 경제인이나 문화인이나를 할 것 없이 국리민복을 망각하고 개인의 사리사욕을 앞세우는 일이 있다면, 이번에 체결된 모든 협정은 그야말로 치욕적인 제2의 을사조약이 된다는 것을 2,700만 국민 한사람 한사람이 다같이 깊이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이 기회에 일본 국민들에게도 밝혀 둘 말이 있습니다. 우리와 그대들간에 이루어졌던 불행한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선린으로써 다시 손을 마주잡게 된 것은, 우리 양국 국민을 위해서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과거 일본이 저지른 죄과들이 오늘의 일본 국민이나 오늘의 세대, 선도들에게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무조인이 이루어진 이 순간에 침통한 표정과 착잡한 심정으로, 과거의 구원을 억지로 누르고 다시 손을 잡는 한국, 국민들의 이 심정을 그렇게 단순하게 보아 넘기거나 결코 소홀히 생각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 두 나라 국민이 참다운 선린과 우방이 될 수 있고 없는 것은 이제부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 체결된 협정문서의 조문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그대들의 한국이나 한국 국민에 대한 자세와, 성의 여하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일본은 역시 믿을 수 없는 국민이다. 하는 대일불신 감정이 우리 국민들 가슴속에 또다시 싹트기 시작한다면 이번에 체결된 제협정은, 아무런 의의를 지니지 못 할 것입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이제 남은 절차는 국회의 비준입니다. 물론 국회는 국회대로 충분한 논의를 하겠지만, 국민 여러분께서도 특별한 관심과 참여의식으로 이 문제의 마지막 매듭에 현명한 판단과 아낌없는 협조가 있을 것을, 나는 확신해 마지 않습니다. 
1965년 6월 23일, 대통령 박정희,
출처 & 참고 문헌, 
[박정희 대통령과 전두환 대통령의 독재 업적 새마을운동 10.26사태 5.18민주화운동
[박정희 대통령의 긍정적인 평가 요소 경제 새마을운동 베트남파병 박정희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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