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노무현, (盧武鉉),
현대 부산에서 인권 변호사이자 제13대 국회 의원으로 활동한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본관은 광산(光山). 아버지는 노판석이고, 어머니는 이순례이다.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73년 권양숙과 결혼하여 아들 노건호와 딸 노정연을 두었다.
한국의 제16대 대통령. 인권변호사 출신으로, 1988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정치에 입문한 뒤 5공비리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1990년 '3당 합당'에 반대하여 민주당 창당에 동참하였고, 해양수산부 장관을 거쳐 2002년 새천년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퇴임한 뒤 고향인 봉하마을에 귀향하였으나 재임중 친인척 비리로 조사를 받다가 2009년 5월 23일 사저 뒷산의 부엉이바위에서 투신, 서거하였다.
노무현 대통령
출생-사망/ 본관/ 국적/ 활동분야/ 출생지/ 주요수상/ 주요저서/
1946.8.6(음력) ~ 2009.5.23 |
광주 |
대한민국 |
정치 |
경남 김해 |
영국 바스 대십자훈장(2004), 무궁화대훈장(2008) |
《여보, 나 좀 도와줘》(1994), 《운명이다》(2010) |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1946년 8월 6일(양력 9월 1일)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대창초등학교와 진영중학교를 다니는 동안 학업 성적이 우수하였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부산상업고등학교에 입학, 1966년에 졸업하였다. 부산상고를 졸업한 뒤 어망 제조업체에 잠시 다니다가 그만두고 건설현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면서 사법시험을 준비하였다. 1968년 육군에 입대하여 1971년 만기제대한 뒤 그만두었던 사법시험을 다시 준비하였으며, 1973년 1월 동향인 권양숙(權良淑)여사와 결혼하였다.
1975년 네 번째 도전 끝에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으며, 1977년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되었으나 이듬해 5월 사직하고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였다. 이후 한동안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1981년 제5공화국 정권의 민주화 세력에 대한 용공조작 사건인 부림사건(釜林事件)의 변론을 맡은 것을 계기로 학생·노동자 등의 인권사건을 변호하는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1985년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장을 역임하고, 1987년에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아 6월항쟁에 앞장섰다. 같은 해 대우조선에 다니던 이석규가 거리 시위 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자 사인 규명에 나섰다가 노동법의 '제3자 개입 금지'를 위반한 혐의로 구속되어 변호사 업무 정지 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1988년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의 제안으로 정치에 입문하였고, 부산 동구에서 제13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제5공화국비리조사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정연한 논리와 날카로운 질문으로 증인들을 추궁하여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1990년 통일민주당·민주정의당·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에 대하여 '부도덕한 야합'이라 비난하며 정치적 후원자였던 김영삼과 결별하고 민주당 창당에 동참하였다. 이듬해 통합민주당 대변인으로 활동하였으며,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한 뒤 제14대 대통령선거 민주당 청년특위 위원장, 물결유세단 단장을 거쳐 1993년 통합민주당 최연소 최고위원이 되었고,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열었다.
1997년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및 수도권 특별유세단 단장을 역임하고, 이듬해 서울 종로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0년 당선 가능성이 높은 종로 지역구를 포기한 채 '지역주의 타파'를 내세우며 부산 북·강서을 지역구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후보에게 패배하였다.
낙선 후 새천년민주당 부산 북강서(을) 지구당 위원장을 거쳐 2000년 8월부터 2001년 4월까지 김대중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다. 2002년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과 최고위원을 거쳐 2002년 초 국민경선제를 통하여 새천년민주당의 제16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고, 2002년 11월 18일에는 국민통합21의 대통령 후보인 정몽준과 후보 단일화에 합의한 뒤, 국민 여론조사를 거쳐 단일 후보가 되었다.
이후 '낡은 정치 청산,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 행정수도의 충청권 이전' 등을 기치로 내걸고 선거운동을 펼쳤으며, 같은 해 12월 19일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유효투표 총수 2476만 141표 가운데 1201만 4277표(48.91%)를 얻어 1144만 3297표(46.59%)를 얻은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된 뒤 2003년 2월 25일 제16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참여정부'를 표방하며 취임한 지 1년이 지난 2004년 초, 대통령의 선거중립의무 위반과 측근 비리 등에 대한 야당의 사과 요구를 거절하자 야당인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이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같은 해 3월 12일 국회의장은 경호권을 발동하여 소수 여당인 열린우리당 의원들의 반대를 저지한 채 국회 본회의에 탄핵소추안을 기습상정하였고, 다수를 점한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이 투표하여 찬성 193, 반대 2로 탄핵소추안을 가결시킴으로써 국무총리 고건이 직무를 대행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자 이를 반대하는 국민들의 비난이 빗발치고 전국 각지에서 탄핵반대 촛불시위가 잇따랐으며, 같은 해 4월 15일 치러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과반이 넘는 152석을 차지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 같은 해 5월 14일 헌법재판소가 탄핵소추안에 대하여 기각 결정을 내림으로써 두 달 만에 대통령직에 복귀하였다.
임기중 대통령 선거에서 공약으로 내세웠던 '신행정수도 이전'에 대하여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결을 내림으로써 정치적 타격을 입었고, 이라크 파병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하여 지지자들이 등을 돌리는 결과를 낳았다. 유력 일간신문을 비롯한 언론과 대립하여 임기 내내 언론으로부터 호의적 반응을 얻지 못하는 등 보수 진영으로부터는 친북좌파라는 비난을, 진보 진영으로부터는 신자유주의자라는 비판에 시달렸다.
한편, 정치인생을 일관하여 고질적인 지역주의를 청산하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사회 전반에 만연한 권위주의를 타파하는 데도 공헌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미(對美) 외교에서는 '대등한 관계'를 추구하였으며,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하여 북한과 긴장관계를 해소하는 데 힘썼다. 대통령 임기 말인 2007년 10월 4일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는 분단 후 처음으로 걸어서 판문점을 통과하여 평양을 방문,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 정상회담을 열고 '남북관계 발전 및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10·4선언)'을 발표하였다.
2008년 2월 24일 대통령 임기를 마친 뒤 고향인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의 봉하마을로 귀향하여 오리농사, 마을청소에 참여하는 등 평범한 전원생활을 하는 한편,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개설하여 사람들과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였고, 건전한 토론문화를 조성한다는 취지로 인터넷 토론 사이트 '민주주의 2.0'을 개설하여 세상과 소통하였다.
그러나 퇴임할 때 대통령 재임시의 기록물 복사본을 가지고 귀향한 것과 관련하여 '국가기록물 무단유출'에 대한 수사를 시작으로 검찰에 의하여 측근과 친형, 부인·아들·딸 등이 비리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으로, 2009년 4월 30일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으로는 세 번째로 검찰의 소환조사를 받았다. 같은 해 5월 23일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는 내용의 유서를 컴퓨터에 남기고 사저 뒷산의 부엉이바위에서 투신하여 서거하였다.
저서에 자전적 일대기인 《여보, 나 좀 도와줘》(1994)를 비롯하여 《노무현이 만난 링컨》(2001), 《노무현의 리더십 이야기》(2002) 등이 있다. 2004년 영국 왕실로부터 최고훈장인 바스 대십자훈장(Grand Cross of the Order of the Bath;GCB)을, 2007년 카타르 정부로부터 독립대훈장을 받았다.
1975년 네 번째 도전 끝에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으며, 1977년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되었으나 이듬해 5월 사직하고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였다. 이후 한동안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1981년 제5공화국 정권의 민주화 세력에 대한 용공조작 사건인 부림사건(釜林事件)의 변론을 맡은 것을 계기로 학생·노동자 등의 인권사건을 변호하는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1985년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장을 역임하고, 1987년에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아 6월항쟁에 앞장섰다. 같은 해 대우조선에 다니던 이석규가 거리 시위 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자 사인 규명에 나섰다가 노동법의 '제3자 개입 금지'를 위반한 혐의로 구속되어 변호사 업무 정지 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1988년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의 제안으로 정치에 입문하였고, 부산 동구에서 제13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제5공화국비리조사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정연한 논리와 날카로운 질문으로 증인들을 추궁하여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1990년 통일민주당·민주정의당·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에 대하여 '부도덕한 야합'이라 비난하며 정치적 후원자였던 김영삼과 결별하고 민주당 창당에 동참하였다. 이듬해 통합민주당 대변인으로 활동하였으며,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한 뒤 제14대 대통령선거 민주당 청년특위 위원장, 물결유세단 단장을 거쳐 1993년 통합민주당 최연소 최고위원이 되었고,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열었다.
1997년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및 수도권 특별유세단 단장을 역임하고, 이듬해 서울 종로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0년 당선 가능성이 높은 종로 지역구를 포기한 채 '지역주의 타파'를 내세우며 부산 북·강서을 지역구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후보에게 패배하였다.
낙선 후 새천년민주당 부산 북강서(을) 지구당 위원장을 거쳐 2000년 8월부터 2001년 4월까지 김대중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다. 2002년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과 최고위원을 거쳐 2002년 초 국민경선제를 통하여 새천년민주당의 제16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고, 2002년 11월 18일에는 국민통합21의 대통령 후보인 정몽준과 후보 단일화에 합의한 뒤, 국민 여론조사를 거쳐 단일 후보가 되었다.
이후 '낡은 정치 청산,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 행정수도의 충청권 이전' 등을 기치로 내걸고 선거운동을 펼쳤으며, 같은 해 12월 19일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유효투표 총수 2476만 141표 가운데 1201만 4277표(48.91%)를 얻어 1144만 3297표(46.59%)를 얻은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된 뒤 2003년 2월 25일 제16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참여정부'를 표방하며 취임한 지 1년이 지난 2004년 초, 대통령의 선거중립의무 위반과 측근 비리 등에 대한 야당의 사과 요구를 거절하자 야당인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이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같은 해 3월 12일 국회의장은 경호권을 발동하여 소수 여당인 열린우리당 의원들의 반대를 저지한 채 국회 본회의에 탄핵소추안을 기습상정하였고, 다수를 점한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이 투표하여 찬성 193, 반대 2로 탄핵소추안을 가결시킴으로써 국무총리 고건이 직무를 대행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자 이를 반대하는 국민들의 비난이 빗발치고 전국 각지에서 탄핵반대 촛불시위가 잇따랐으며, 같은 해 4월 15일 치러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과반이 넘는 152석을 차지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 같은 해 5월 14일 헌법재판소가 탄핵소추안에 대하여 기각 결정을 내림으로써 두 달 만에 대통령직에 복귀하였다.
임기중 대통령 선거에서 공약으로 내세웠던 '신행정수도 이전'에 대하여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결을 내림으로써 정치적 타격을 입었고, 이라크 파병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하여 지지자들이 등을 돌리는 결과를 낳았다. 유력 일간신문을 비롯한 언론과 대립하여 임기 내내 언론으로부터 호의적 반응을 얻지 못하는 등 보수 진영으로부터는 친북좌파라는 비난을, 진보 진영으로부터는 신자유주의자라는 비판에 시달렸다.
한편, 정치인생을 일관하여 고질적인 지역주의를 청산하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사회 전반에 만연한 권위주의를 타파하는 데도 공헌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미(對美) 외교에서는 '대등한 관계'를 추구하였으며,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하여 북한과 긴장관계를 해소하는 데 힘썼다. 대통령 임기 말인 2007년 10월 4일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는 분단 후 처음으로 걸어서 판문점을 통과하여 평양을 방문,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 정상회담을 열고 '남북관계 발전 및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10·4선언)'을 발표하였다.
2008년 2월 24일 대통령 임기를 마친 뒤 고향인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의 봉하마을로 귀향하여 오리농사, 마을청소에 참여하는 등 평범한 전원생활을 하는 한편,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개설하여 사람들과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였고, 건전한 토론문화를 조성한다는 취지로 인터넷 토론 사이트 '민주주의 2.0'을 개설하여 세상과 소통하였다.
그러나 퇴임할 때 대통령 재임시의 기록물 복사본을 가지고 귀향한 것과 관련하여 '국가기록물 무단유출'에 대한 수사를 시작으로 검찰에 의하여 측근과 친형, 부인·아들·딸 등이 비리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으로, 2009년 4월 30일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으로는 세 번째로 검찰의 소환조사를 받았다. 같은 해 5월 23일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는 내용의 유서를 컴퓨터에 남기고 사저 뒷산의 부엉이바위에서 투신하여 서거하였다.
저서에 자전적 일대기인 《여보, 나 좀 도와줘》(1994)를 비롯하여 《노무현이 만난 링컨》(2001), 《노무현의 리더십 이야기》(2002) 등이 있다. 2004년 영국 왕실로부터 최고훈장인 바스 대십자훈장(Grand Cross of the Order of the Bath;GCB)을, 2007년 카타르 정부로부터 독립대훈장을 받았다.
학업과 변호사 개업,
노무현(盧武鉉)은 1946년 9월 1일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30번지 봉하 마을에서 태어났다. 1953년 3월 경상남도 김해시의 진영대창국민학교[현 진영대창초등학교]에 입학하여 1959년 2월 졸업하고, 같은 해 3월 진영중학교에 입학하여 1963년 2월 제16회로 졸업하였다. 1963년 3월 부산상업고등학교[현 개성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966년 2월 제53회로 졸업하였다.
가난 때문에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노무현은 독학으로 1975년 3월 제17회 사법 시험에 합격하였다. 대통령에 당선된 뒤 2004년 러시아 모스크바대학교에서 명예 정치학 박사 학위, 2006년 알제리 알제대학 정치학 및 국제 관계학 명예박사 학위, 2007년 원광대학교 명예 정치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1977년 8월 사법연수원을 제7기로 수료한 뒤 9월 대전지방법원에 판사로 부임한 노무현은 8개월가량 재직하였다. 노무현은 짧은 판사 생활을 마감하고, 1978년 5월 부산에서 변호사로 개업하였다. 변호사로서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노무현의 인생에서 1981년 부림 사건, 1982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은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불법 감금과 살인적 고문으로 반국가 단체 ‘부림’을 조작 날조한 ‘부림 사건’은 전두환(全斗煥)의 통치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 낸 대표적인 반국가 단체 조작 사건이었고,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은 5·18 민주화 운동을 유혈 진압한 전두환 독재 정권을 비호한 미국의 책임을 묻기 위한 사건이었다. 두 사건의 변론을 맡으면서 노무현은 참혹한 고문으로 육체와 정신의 공황 상태를 겪고 있는 민주주의의 현실을 목도하였고, 이를 계기로 점차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같은 해에 노무현은 법조계의 새내기인 문재인과 함께 ‘노무현·문재인합동법률사무소’를 꾸려 동업에 나섰다.
인권 변호사로 활약,
1980년대 중반 노무현은 본격적으로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다. 1984년 정권과 재벌에 맞서 환경과 민중의 생존권을 지키는 활동을 전개한 부산공해문제연구소의 이사로, 1985년 부산 최초의 대중 정치 조직으로 설립된 부산민주시민협의회의 상임 위원과 부산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의 인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변호사 사무실에 부산노동법률상담소를 부설하고 노동 인권 문제에 대한 변호 활동을 본격화한 것도 이해였다.
이 무렵 울산, 창원, 거제도에는 노동 문제 전문 변호사가 없던 탓에 이 지역에서도 의뢰가 들어와, 부산노동법률상담소는 경상남도 지역의 노동 인권 사건을 총괄하는 센터 같은 구실을 하였다. 무료 변론은 물론 노조 설립과 일상적인 권익을 옹호하기 위한 활동을 지원하고 노동자를 상대로 하는 강연을 하면서, 노무현은 점차 노동 문제를 중심으로 하는 인권 변호사로 변모하였다.
1987년 1월 14일 박종철의 죽음으로 시작된 6월 민주 항쟁에서 노무현은 부산 민주화 운동의 중심으로 빠져들었다. 2월 7일 박종철 추도 집회에서 추도사를 한 것을 시작으로, 5월 발족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의 상임 집행 위원장을 맡아 맹활약을 펼쳤다. 이 일로 동료 변호사인 김광일, 문재인과 함께 부산지방경찰청 대공분실에 연행되기도 하였지만, 이는 노무현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6월 민주 항쟁에 이어진 1987년 노동자 대투쟁에서 노무현은 사실상 변호사 업무에서 손을 놓고 거리로 사업장으로 뛰어다니며 현장을 누볐다. 그 결과 1987년 이석규의 사망으로 폭발한, 경찰의 폭력 진압 반대 투쟁인 대우조선 사건으로 이해 9월 2일 불구속 기소되어 변호사 업무를 정지당하기도 하였다.
국회의원 활동,
6월 민주 항쟁으로 새로운 정치 환경이 조성되자 노무현은 현실 정치 속으로 뛰어들었다. 1988년 4월 28일 제13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 통일민주당으로 부산 동구에서 당선되었고, 10월 5공 청문회에서 ‘청문회 스타’로 두각을 드러내면서 단박에 주목받는 정치인이 되었다. 그러나 1990년 2월 노무현은 삼당 합당인 노태우(盧泰愚), 김영삼(金泳三), 김종필(金鍾泌)의 민주자유당[민자당] 창당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면서 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1991년 개혁 신당과 함께 통합한 통합민주당의 대변인으로 활동하였다.
이 때문에 노무현은 원칙과 신념의 정치인이란 평가와 함께 험난한 정치 역정을 걸어야 하였다. 결국 1992년 3월 24일 제14대 국회 의원 선거[부산광역시 동구], 1995년 부산광역시장 선거, 1996년 제15대 국회 의원 선거[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연거푸 고배를 마셨다.
1997년 비슷한 처지에 있던 이들과 함께 서울 역삼동에 ‘하로동선(夏爐冬扇)’이라는 식당을 개업하여 마음을 나누기도 하고, SBS 라디오 ‘뉴스 대행진’의 진행자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11월 김대중이 창당한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여 부총재를 역임하며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을 도왔다. 이듬해인 1998년 7월 21일 제15대 국회 의원 보궐 선거[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새정치국민회의 소속으로 다시 국회 의원이 될 수 있었다.
이런 노무현에게 2000년 제16대 국회 의원 선거는 낙선의 아픔과 노사모라는 정치적 자산을 동시에 안겨 준 사건이었다. 그는 당선이 유력시되던 서울 종로를 떠나 지역주의 타파를 내걸고 부산광역시 북·강서을에 출마하여 또다시 낙선의 아픔을 겪었다. 하지만 노무현의 낙선은 당선보다 더 큰 감동을 주었고, 대의와 원칙을 위해 불이익을 무릅쓴 그에게는 ‘바보 노무현’, ‘아름다운 바보’라는 애칭이 주어졌다. 이러한 정서를 기반으로 한국 정치사상 최초의 정치인 펜클럽인 ‘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노사모]가 결성되었다. 이후 노사모는 정치인 노무현의 최대 자산이 되었다.
대통령 당선 및 그 후,
이후 노무현은 김대중 정부에서 2000년 8월 7일~2001년 3월 26일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재직한 뒤 드디어 대통령 선거에 출사표를 던졌다. 2002년 일반 국민이 참여하여 대통령 후보를 결정하는 국민 경선제에서 노무현은 예상을 뒤엎는 돌풍을 일으키며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연말의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됨으로써, 2003년 2월 25일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청문회 스타라는 명성과 지역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얻은 신뢰, 그리고 국민 경선제라는 정치 실험을 통해 노무현은 정치에 입문한 지 불과 15년 만에 대통령이 되었던 것이다.
대통령 노무현은 2004년 3월 12일 현직 대통령으로서 탄핵 소추를 당하는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를 겪기도 하였지만, 참여 정부의 임기 내내 민주주의와 복지 정책에 역점을 둔 정치를 일관되게 펼쳐 나갔다. 임기 말년인 2007년 10월에는 제2차 남북 정상 회담을 통해 10·4 공동 선언을 이끌어 냄으로써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노력을 이어 갔다.
그러나 재임 중 가족이 후원자의 경제적 지원을 받은 일로 검찰의 수사
2008년 2월 25일 퇴임한 후 노무현은 고향인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 마을로 귀향하여, 농촌 마을 가꾸기와 친환경 생태 농업을 실천하는 농부의 삶으로써 제2의 인생을 시작하였다. 이런 퇴직 대통령의 모습은 국민들에게 신선한 감동을 주었으며, 그에게 ‘노간지’라는 별명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재임 중 가족이 후원자의 경제적 지원을 받은 일로 검찰의 수사를 받게 되는 일련의 상황 속에서, 2009년 5월 23일 봉하 마을 뒷산에서 투신하여 서거하였다. 향년 64세였다. 5월 29일 국민장이 엄수되고 7월 10일 유골이 봉하 마을에 안장되기까지, 500만~600만 명에 달하는 추모 인파가 봉하 마을과 전국 각지에 마련된 분향소를 찾아 분향하고 서울 광장에서 열린 노제에 참석하여 죽음을 애도하였다.
노무현(盧武鉉)은 1946년 9월 1일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30번지 봉하 마을에서 태어났다. 1953년 3월 경상남도 김해시의 진영대창국민학교[현 진영대창초등학교]에 입학하여 1959년 2월 졸업하고, 같은 해 3월 진영중학교에 입학하여 1963년 2월 제16회로 졸업하였다. 1963년 3월 부산상업고등학교[현 개성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966년 2월 제53회로 졸업하였다.
가난 때문에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노무현은 독학으로 1975년 3월 제17회 사법 시험에 합격하였다. 대통령에 당선된 뒤 2004년 러시아 모스크바대학교에서 명예 정치학 박사 학위, 2006년 알제리 알제대학 정치학 및 국제 관계학 명예박사 학위, 2007년 원광대학교 명예 정치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1977년 8월 사법연수원을 제7기로 수료한 뒤 9월 대전지방법원에 판사로 부임한 노무현은 8개월가량 재직하였다. 노무현은 짧은 판사 생활을 마감하고, 1978년 5월 부산에서 변호사로 개업하였다. 변호사로서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노무현의 인생에서 1981년 부림 사건, 1982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은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불법 감금과 살인적 고문으로 반국가 단체 ‘부림’을 조작 날조한 ‘부림 사건’은 전두환(全斗煥)의 통치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 낸 대표적인 반국가 단체 조작 사건이었고,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은 5·18 민주화 운동을 유혈 진압한 전두환 독재 정권을 비호한 미국의 책임을 묻기 위한 사건이었다. 두 사건의 변론을 맡으면서 노무현은 참혹한 고문으로 육체와 정신의 공황 상태를 겪고 있는 민주주의의 현실을 목도하였고, 이를 계기로 점차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같은 해에 노무현은 법조계의 새내기인 문재인과 함께 ‘노무현·문재인합동법률사무소’를 꾸려 동업에 나섰다.
인권 변호사로 활약,
1980년대 중반 노무현은 본격적으로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다. 1984년 정권과 재벌에 맞서 환경과 민중의 생존권을 지키는 활동을 전개한 부산공해문제연구소의 이사로, 1985년 부산 최초의 대중 정치 조직으로 설립된 부산민주시민협의회의 상임 위원과 부산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의 인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변호사 사무실에 부산노동법률상담소를 부설하고 노동 인권 문제에 대한 변호 활동을 본격화한 것도 이해였다.
이 무렵 울산, 창원, 거제도에는 노동 문제 전문 변호사가 없던 탓에 이 지역에서도 의뢰가 들어와, 부산노동법률상담소는 경상남도 지역의 노동 인권 사건을 총괄하는 센터 같은 구실을 하였다. 무료 변론은 물론 노조 설립과 일상적인 권익을 옹호하기 위한 활동을 지원하고 노동자를 상대로 하는 강연을 하면서, 노무현은 점차 노동 문제를 중심으로 하는 인권 변호사로 변모하였다.
1987년 1월 14일 박종철의 죽음으로 시작된 6월 민주 항쟁에서 노무현은 부산 민주화 운동의 중심으로 빠져들었다. 2월 7일 박종철 추도 집회에서 추도사를 한 것을 시작으로, 5월 발족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의 상임 집행 위원장을 맡아 맹활약을 펼쳤다. 이 일로 동료 변호사인 김광일, 문재인과 함께 부산지방경찰청 대공분실에 연행되기도 하였지만, 이는 노무현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6월 민주 항쟁에 이어진 1987년 노동자 대투쟁에서 노무현은 사실상 변호사 업무에서 손을 놓고 거리로 사업장으로 뛰어다니며 현장을 누볐다. 그 결과 1987년 이석규의 사망으로 폭발한, 경찰의 폭력 진압 반대 투쟁인 대우조선 사건으로 이해 9월 2일 불구속 기소되어 변호사 업무를 정지당하기도 하였다.
국회의원 활동,
6월 민주 항쟁으로 새로운 정치 환경이 조성되자 노무현은 현실 정치 속으로 뛰어들었다. 1988년 4월 28일 제13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 통일민주당으로 부산 동구에서 당선되었고, 10월 5공 청문회에서 ‘청문회 스타’로 두각을 드러내면서 단박에 주목받는 정치인이 되었다. 그러나 1990년 2월 노무현은 삼당 합당인 노태우(盧泰愚), 김영삼(金泳三), 김종필(金鍾泌)의 민주자유당[민자당] 창당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면서 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1991년 개혁 신당과 함께 통합한 통합민주당의 대변인으로 활동하였다.
이 때문에 노무현은 원칙과 신념의 정치인이란 평가와 함께 험난한 정치 역정을 걸어야 하였다. 결국 1992년 3월 24일 제14대 국회 의원 선거[부산광역시 동구], 1995년 부산광역시장 선거, 1996년 제15대 국회 의원 선거[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연거푸 고배를 마셨다.
1997년 비슷한 처지에 있던 이들과 함께 서울 역삼동에 ‘하로동선(夏爐冬扇)’이라는 식당을 개업하여 마음을 나누기도 하고, SBS 라디오 ‘뉴스 대행진’의 진행자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11월 김대중이 창당한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여 부총재를 역임하며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을 도왔다. 이듬해인 1998년 7월 21일 제15대 국회 의원 보궐 선거[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새정치국민회의 소속으로 다시 국회 의원이 될 수 있었다.
이런 노무현에게 2000년 제16대 국회 의원 선거는 낙선의 아픔과 노사모라는 정치적 자산을 동시에 안겨 준 사건이었다. 그는 당선이 유력시되던 서울 종로를 떠나 지역주의 타파를 내걸고 부산광역시 북·강서을에 출마하여 또다시 낙선의 아픔을 겪었다. 하지만 노무현의 낙선은 당선보다 더 큰 감동을 주었고, 대의와 원칙을 위해 불이익을 무릅쓴 그에게는 ‘바보 노무현’, ‘아름다운 바보’라는 애칭이 주어졌다. 이러한 정서를 기반으로 한국 정치사상 최초의 정치인 펜클럽인 ‘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노사모]가 결성되었다. 이후 노사모는 정치인 노무현의 최대 자산이 되었다.
대통령 당선 및 그 후,
이후 노무현은 김대중 정부에서 2000년 8월 7일~2001년 3월 26일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재직한 뒤 드디어 대통령 선거에 출사표를 던졌다. 2002년 일반 국민이 참여하여 대통령 후보를 결정하는 국민 경선제에서 노무현은 예상을 뒤엎는 돌풍을 일으키며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연말의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됨으로써, 2003년 2월 25일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청문회 스타라는 명성과 지역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얻은 신뢰, 그리고 국민 경선제라는 정치 실험을 통해 노무현은 정치에 입문한 지 불과 15년 만에 대통령이 되었던 것이다.
대통령 노무현은 2004년 3월 12일 현직 대통령으로서 탄핵 소추를 당하는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를 겪기도 하였지만, 참여 정부의 임기 내내 민주주의와 복지 정책에 역점을 둔 정치를 일관되게 펼쳐 나갔다. 임기 말년인 2007년 10월에는 제2차 남북 정상 회담을 통해 10·4 공동 선언을 이끌어 냄으로써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노력을 이어 갔다.
그러나 재임 중 가족이 후원자의 경제적 지원을 받은 일로 검찰의 수사
2008년 2월 25일 퇴임한 후 노무현은 고향인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 마을로 귀향하여, 농촌 마을 가꾸기와 친환경 생태 농업을 실천하는 농부의 삶으로써 제2의 인생을 시작하였다. 이런 퇴직 대통령의 모습은 국민들에게 신선한 감동을 주었으며, 그에게 ‘노간지’라는 별명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재임 중 가족이 후원자의 경제적 지원을 받은 일로 검찰의 수사를 받게 되는 일련의 상황 속에서, 2009년 5월 23일 봉하 마을 뒷산에서 투신하여 서거하였다. 향년 64세였다. 5월 29일 국민장이 엄수되고 7월 10일 유골이 봉하 마을에 안장되기까지, 500만~600만 명에 달하는 추모 인파가 봉하 마을과 전국 각지에 마련된 분향소를 찾아 분향하고 서울 광장에서 열린 노제에 참석하여 죽음을 애도하였다.
저술 및 작품,
『여보, 나 좀 도와 줘』[새터, 1994], 노무현 외, 『의원님들, 요즘 장사 잘 돼요?』[1997], 노무현 외, 『마음먹었을 때 시작해라(사시·행시·외시 성공 Story)』[고시계사, 2000], 『노무현이 만난 링컨』[학고재, 2001], 『노무현의 리더십 이야기』[행복한책읽기, 2002], 노무현·유시민 외, 『노무현-상식 혹은 희망』[행복한책읽기, 2002], 노무현 외, 『성공하고 싶다면 군대에 가라』 1·2[랜덤하우스코리아, 2003], 이윤기 외, 『해인사를 거닐다』[옹기장이, 2003], 『로마의 논리와 감성-노무현의 논리 마광수의 감성』[우민OK논술교실, 2005] 등 노무현이 직접 쓰거나 관련 활동을 기록한 책들이 있다.
묘소,
묘소는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 마을에 있다. 2009년 8월 5일 국가 보존 묘지 제1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2004년 영국 최고 훈장 배스대십자 훈장, 2005년 코스타리카 명예로운 훈장, 2007년 스페인 시민 훈장, 2007년 카타프 독립 대훈장, 2007년 사우디 국가 최고 훈장 ‘킹압둘아지즈 훈장’, 2007년 쿠웨이트 국가 최고 훈장, 2008년 무궁화 대훈장 등을 수상하였다. 2009년 9월 23일 노무현의 사상과 정신, 가치를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사람 사는 세상 노무현 재단[약칭 노무현재단]이 설립되었다. 그리고 2009년 9월 24일 노무현의 생가가 복원되어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해마다 기일을 즈음하여 봉하 마을을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에서 노무현 추모제가 열려 고인을 기리고 있다.
노무현을 기리며 2009년 『성공과 좌절』[학고재], 『진보의 미래』[동녘], 『내 마음속 대통령-노무현, 서거와 추모의 기록』[한걸음더]과 『사람 사는 세상-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 사진집』[학고재]을 출간하였다. 그리고 자서전 『운명이다』, 노무현재단에서 『봉하 일기』[부키]를 출간하였고, 이외에 노무현을 추모하는 여러 종의 저작물이 있다. 2010년 5월 16일 대통령의 주요 유품과 사진, 기록, 영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추모 전시 공간으로 ‘추모의 집’이 봉하 마을에 건립되었다.
한국의 역대 대통령,
이 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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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임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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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대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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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07 ~ 196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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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대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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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08 ~ 196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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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대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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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12 ~ 197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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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대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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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12 ~ 198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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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12대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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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09 ~ 198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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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대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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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02 ~ 199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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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대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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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02 ~ 199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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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대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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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02 ~ 20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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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대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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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2 ~ 20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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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대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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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 ~ 20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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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대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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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 ~ 20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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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대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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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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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대통령출생-사망1946년 9월 1일, 경상남도 김해 - 2009년 5월 23일가족배우자 권양숙, 아들 노건호, 딸 노정연, 형 노건평학력부산상업고등학교수상2008년 무궁화대훈장경력2003.02~2008.02 제16대 대한민국 대통령관련정보역대 대한민국 대통령사이트공식홈페이지,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노무현사료관
참조항목,
역참조항목,
카테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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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참고문헌,
- [노무현 [盧武鉉] (두산백과)
- [노무현 [盧武鉉]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부산지역유월항쟁자료발간위원회, 『6월 항쟁』(유월자료, 1995)
- [노무현과 국민 사기극』(인물과 사상사, 2001)
- [문재인의 운명』(가교출판, 2011)
- [네이버 지식백과]노무현 [盧武鉉]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게티이미지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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