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화공주, 善花公主.
《삼국유사》 서동설화의 주인공으로 신라 제26대 진평왕(眞平王)의 공주이며, 백제 제30대 무왕(武王)의 비(妃).
진평왕의 셋째 딸로서 용모가 매우 아름다웠는데, 이를 연모(戀慕)한 서동(薯童), 즉 후일의 백제 무왕(武王:재위 600~641)이 《서동요(薯童謠)》를 지어 선화공주가 밤마다 남몰래 서동을 만난다는 소문을 신라의 서울인 금성(金城)에 퍼뜨렸다.
그가 미모의 공주라는 소문을 들은 백제의 서동은 신라의 수도로 몰래 와서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 주어 환심을 사는 한편 선화공주가 자신과 더불어 은밀히 접촉하고 있다는 내용의 모략적인 동요를 지어서 아이들에게 부르게 한 결과 선화공주는 부왕의 노여움을 사서 왕궁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백제의 서동(薯童 ; 뒤의 무왕(武王))이 연정(戀情)을 품고 가까이 하려고, 두 사람이 남몰래 밤에 만나곤 한다는 《서동요(薯童謠)》를 지어 금성(金城, 경주(慶州))에 퍼뜨렸다.
이에 공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유배(流配)되어 가다가 도중에서 서동에게 구출되어 결혼, 백제에 가서 왕비가 되었다 한다.
공주는 귀양가는 길목에 대기하고 있던 서동을 알게 되어 그를 따라가 서동이 평소에 묻어 놓은 막대한 황금을 꺼내어 보이자 이를 신라 왕궁에 보내어 부왕의 노여움을 풀고 또한 자신들의 결합을 정식으로 승인받으려고 하였다.
이에 공주 부부가 용화산(龍華山) 사자사(獅子寺)의 지명법사(知命法師)를 찾아가서 금의 수송을 의논하였던 바, 법사가 신력을 써서 하룻밤 사이에 금을 신라 왕궁으로 운반하였다.
이로써 서동은 진평왕의 환심을 사게 되었을 뿐만아니라, 본국 사람들의 인심을 또한 얻게 되어 마침내 백제왕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그가 무왕이라 한다.
백제 30대 무왕의 원래 이름은 장이다.
그는 아버지 없이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는데,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가 연못가에 있는 용과 관계를 맺어 장이를 낳았다고 한다.
어릴 때 부터 그는 마를 캐다 팔아서 살림을 도왔는데, 그래서 모두들 그를 서동(마 캐는 아이)이라고 불렀다.
서동은 홀어머니와 함께 사는 어려운 생활을 겪었지만, 지혜로웠고 마음씨가 착해 다른 사람들을 늘 도왔다.
그러던 어느 날, 서동은 신라의 진평왕 셋째 딸인 선화공주가 아주 미인이라는 말을 듣고 무작정 서라벌로 떠났다.
신라궁으로 들어가 먼발치에서 선화공주를 바라보니, 첫눈에 반할만큼 아름다웠다.
그녀에게 푹 빠진 서동은 선화공주를 아내로 삼겠다고 결심하고 궁리를 했다.
하지만 국적도 다르고, 신분도 다른데다 수중에 가진 것도 없으니 그야말로 첩첩산중이었다.
하지만 국적도 다르고, 신분도 다른데다 수중에 가진 것도 없으니 그야말로 첩첩산중이었다.
서동은 포기하지 않고, 한 가지 꾀를 냈다.
서동은 서라벌의 마을 아이들에게 자신이 가져온 마를 나눠주며, 자기가 지은 동요를 가르쳐주고 따라 부르게했다.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시집가서 서동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이 동요는 순식간에 서라벌 곳곳으로 퍼졌고, 마침내 궁의 진평왕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몹시 노한 진평왕은 선화공주를 멀리 귀양 보내고 말았다.
이렇게 억울한 누명을 쓰고 귀양길에 나선 선화공주가 유배지로 향하고 있었을 때였다.
갑자기 한 사내가 나타나 공주님을 모시고 가겠다면서 말고삐를 잡았다.
선화공주는 그가 노래의 주인공인 서동일 것이란 생각은 꿈에도 모른 채 동행하기로 했다.
선화공주는 서동과 함께 먼 길을 떠나면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 새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선화공주는 서동과 함께 먼 길을 떠나면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 새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둘은 마침내 사랑을 이루고 장래를 약속했다.
서동은 자신이 한 행동을 밝혔고, 선화공주는 정말로 노래의 내용이 맞았다면서 기뻐했다.
서동은 선화공주를 데리고 백제로 돌아왔다.
공주는 가난한 서동의 살림을 보고는 어머니가 몰래 싸준 황금을 서동 앞에 내놓았다.
선화공주는 “어머니가 주신 황금입니다.
이것만 있으면 평생 아무 걱정 없이 살 수 있답니다.” 라고 말했다.
그제서야 이것이 황금인 줄 알게 된 서동은, 자기가 마를 캐는 산에 황금이 널렸다고 하면서, 황금을 캐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은 황금은 어느새 산처럼 쌓이게 됐고, 두 사람은 이것을 선화공주의 아버지인 진평왕에게 보내기로 했다.
그렇게 모은 황금은 어느새 산처럼 쌓이게 됐고, 두 사람은 이것을 선화공주의 아버지인 진평왕에게 보내기로 했다.
너무나 무겁고 많은 황금을 몰래 보내기는 어려운 일인지라 두 사람은 신통력 있다고 소문난 지명법사를 찾아갔다.
공주는 황금과 함께 부모님에게 쓴 편지를 법사에게 맡겼고, 법사는 이것을 신통력을 이용해 신라 궁궐로 보냈다.
이것을 받은 진평왕은 몹시 놀랐으며, 서동의 지혜와 도량에 매우 감탄했다.
두 사람의 혼인을 인정함을 물론이고, 항상 안부를 물으면서 가까이 지냈다.
이 일은 순식간에 나라 안팎으로 전해졌고, 서동은 사람들의 인심을 얻어 백제의 왕위에까지 올랐으니, 바로 백제 30대왕 무왕이었다.
무왕부부는 뒤에 사자사로 가던 중 용화산 밑 큰 못가에 나타난 미륵삼존(彌勒三尊)의 영험에 따라서 이곳에 미륵사(彌勒寺)를 지으니, 진평왕이 백공(百工)을 보내어 이를 도와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이 설화는 전라북도 익산 미륵사의 창건 연기(緣起)가 되어 있는데, 한편 이에 대하여는 비판적인 견해도 있다.
이처럼 이 설화는 전라북도 익산 미륵사의 창건 연기(緣起)가 되어 있는데, 한편 이에 대하여는 비판적인 견해도 있다.
이병도(李丙燾)는 진평왕과 무왕 때의 신라 · 백제 두 나라의 관계는 원수 사이이므로, 이 같은 혼인이 성립될 수 없으며, 이는 어쩌면 493년에 있었던 백제 동성왕과 신라 왕족 비지(比智)의 딸과의 통혼사실을 가지고 만들어진 설화가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선화공주는 이벌찬(伊伐飡) 비지의 딸이 되는 셈이다.
일본 학자 세키노(關野貞)는 미륵사의 창건을 7세기 후반으로 내려보는 처지에서, 삼국통일 직후에 신라가 고구려 부흥운동군의 중심인물이었던 고구려의 왕족 안승(安勝)을 회유하여 신라 쪽으로 끌어들이는 한편, 이곳에 보덕국(報德國)을 만들어 그를 국왕으로 삼고 문무왕의 여동생을 그의 아내로 삼았던 사실을 주목한 바 있다.
최근 미륵사의 창건을 7세기 초, 즉 무왕 때일 것으로 보려는 견해가 유력해지고 있어서 이 설화가 가지는 역사성이 뜻밖에 높은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마을의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며 돌아다니자 진평왕은 선화공주의 행실이 부정하다 하여 귀양을 보냈다.
귀양가는 도중에 서동이 나타나 그녀를 구출해주고 두사람은 백제로 건너가 결혼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서동은 법왕의 아들로서 후에 무왕이 되었고, 따라서 선화공주는 그의 왕비가 되었다.
선화공주는 무왕에게 청하여 전라북도 익산에 미륵사(彌勒寺:왕흥사라고도 함.)를 창건하였고 무왕과 사이에서 아들 의자(義慈)를 낳아 태자로 삼았다.
여기까지의 이야기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선화공주에 대한 것이지만 서동은 무왕이 아니라 백제 제24대 동성왕(東城王)이었다는 설과 선화공주는 신라 진평왕의 딸이 아니라 신라의 왕족인 이찬(伊湌) 비지(比智)의 딸이라는 설이있다.
익산미륵사에 근거하여 선화공주는 익산지역을 지배하였던 지방 토호의 딸이라는 설도 있다.
당시 백제는 지방호족이 강력하여 무왕이 강력한 왕권을 세우기가 어려웠다.
이에 부여를 떠나 익산으로 천도하고 왕권강화를 목적으로 미륵사를 창건한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전라북도 익산시 석왕동에 있는 무덤이 선화공주의 묘라고 추측하기도 하지만 여러차례 도굴되어 확인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