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18일 토요일

부여 부소산성.

부여 부소산성.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부소산에 있는 백제시대의 산성.

이 산성은 백제 성왕 16년(538) 공주에서 이곳으로 옮겨 123년간 사용한 사비도성의 중심산성으로 이중의 성벽을 두른 백제식 산성이다. 
성내에는 당시의 군창터로 전해오는 곳에서 탄화된 곡식이 나오고 있으며, 사비루, 반월루, 고란사, 궁녀사가 성내에 있고 유명한 낙화암이 있어 관광지로 이름나 있는 곳이다.

부여 부소산성, 백제, 둘레 2,200m, 사적 제5호(ⓒ 한국학중앙연구원/유남해, 2013). 부여 부소산 정상을 중심으로 테뫼식 산성을 쌓고 그 주위에 포곡식 산성을 쌓은 복합식 산성이다.

부소산성은 538년 백제 성왕이 웅진에서 사비로 도읍을 옮긴 후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123년 동안 백제의 도읍지였으며, 당시에는 사비성이라 불렀다. 
둘레는 2,200m이고, 지정 면적은 98만3900㎡이다.

사적 제5호이다.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 사비, 지금의 부여 낙화암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부소산성이 있다. 
산이라고 하지만 해발 100m 정도밖에 되지 않는 언덕으로 그 주변을 두르고 있는 산성은 백제의 마지막 보루가 되었던 곳이다. 
천천히 걸으면서 백제의 마지막을 기억해보자. 



입구에서 올라 오른편으로 돌아가면 먼저 삼충사라는 사당이 나오는데 백제 말의 충신인 성충·흥수·계백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곳이다. 
임금에게 직언을 하다 감옥에 갇혀서도 나라 걱정을 했던 성충, 성충과 함께 임금께 고하다 유배를 당한 흥수, 황산벌전투로 잘 알려진 계백 등 역사 속 인물들을 만나보자. 


삼충사를 지나 조금 더 오르면 동쪽을 향하고 있어 해맞이를 할 수 있는 영일루가 나오며, 그 뒤편으로는 곡식창고 자리였던 군창 터가 있다. 
낮은 울타리로 둘러놓아 들어가지는 못하지만 이곳에서 불탄 쌀이나 콩들이 발견되는데 바로 군량을 적에게 내어주지 않기 위해 불을 낸 흔적이다.


백제탑의 저녁노을, 수북정에서 바라보는 봄날 백마강가 아지랑이, 고란사의 은은한 풍경소리, 노을 진 부소산에 간간이 내리는 부슬비, 낙화암에서 애달프게 우는 소쩍새, 백마강에 고요히 잠긴 달빛, 구룡평야에 내려앉은 기러기떼, 규암나루에 들어오는 돛단배. 부여의 팔경이다. 

이중 수북정, 고란사, 낙화암이 부소산에 있고 다른 네 가지도 부소산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풍경들이니 부소산은 부여팔경을 다 누릴 수 있는 곳이라고도 하겠다.

 

부소산성 가장 꼭대기의 사자루는 달을 바라보는 서편을 향하여 자리하고 있다. 
여기까지 왔으면 이제 내려가는 길만 남았는데 내려가는 길에는 더욱 특별한 장소들이 기다리고 있다. 
낙화암이 그곳으로, 삼 천 궁녀가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이곳의 원래 이름은 사람이 떨어져 죽은 바위라는 뜻의 타사암이라고 하니 백마강이 내려다보이는 시원한 풍경을 마냥 즐기기에는 슬픈 이야기이다. 
낙화암 아래에는 한 번 먹을 때마다 3년이 젊어진다는 약수로 유명한 고란사가 있으니 내려가서 고란사도 둘러보고 약수도 마셔보자.




고란사에서 백마강 구드래나루까지 운행하는 유람선을 탈 수 있다.

가파르게 내려가는 계단 길 왼쪽에 약수가 유명한 고란사가 있다. 
바위 절벽 좁은 터에 법당 한 채를 돌아가면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약수물을 한번 맛보려는 사람들로 늘 북적북적하다. 
왕에게 이 약수물을 올릴 때 반드시 띄웠다는 고란초는 바위 틈새 어디엔가 숨어서라도 있을 법한데, 너무 많은 사람들의 손을 타서인지 찾아보기가 어렵다.

강 아래에서 바라보는 낙화암이 또 다른 풍경을 보여주며 백마강의 용을 백마 머리를 미끼로 꾀어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조룡대를 지난다. 
운행 내내 울리는 ‘백마강~ 달밤에~’로 시작하는 노래가 내려서도 귓전에 맴돈다.
"문의 041-835-4690(고란사선착장)


이 산성은 백제의 수도인 사비()를 수호하기 위하여 538년(성왕 16) 수도 천도를 전후한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이보다 먼저 500년(동성왕 22)경 이미 산봉우리에 테뫼형 산성이 축조되었다가 천도할 시기를 전후하여 개축되었고, 605년(무왕 6)경에 현재의 규모로 확장,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부소산성은 금강의 남안에 있는 부소산의 산정을 중심으로 테뫼식 산성이 동서로 나뉘어 붙어 있고, 다시 그 주위에 포곡식() 산성을 축조한 복합식 산성이다. 
성내에는 사비루()·영일루()·반월루()·고란사()·낙화암()과 사방의 문지(), 그리고 군창지() 등이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사비성()’·‘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산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으로 불리고 있다.
1978년 금강상수도사업 공사로 인하여 성벽의 단면이 드러났는데, 성벽 내부는 잡석으로 적심석()을 넣었음이 확인되었고, 최근의 발굴조사에서 목책지()와 수혈식() 주거지가 발견되었다. 
1981년의 사비성 복원을 위한 기초조사에서 4층의 토층단면이 확인되었다. 

1982년부터 부소산성 일대를 충남대학교 박물관에서 5차에 걸쳐 발굴조사하여 1983년도에는 방형석축연지()가 발견되었고, 1988년 발굴조사에서는 토기 구연부에 북사()라는 명문이 출토되었다. 
1992년 조사에서는 현재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남쪽 50m 지점에서 백제시대의 도로유적과 배수시설이 드러났다.





부소산성 축성의 구체적 방법을 보면, 성벽 안쪽의 흙을 파서 호()를 만든 한편, 그 파낸 흙을 내벽에 보축()하였다. 
성의 바깥 벽면은 기반토()를 마치 판축()하듯이 황색사질토와 적색점질토를 겹겹이 다져놓았고, 그 위에 돌을 3∼5단으로 쌓고 흙을 덮었다. 
이런 방식으로 축조된 산성의 입지는 경사면이어서 원래의 경사도보다도 더욱 가파른 경사를 이룰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이 산성의 아래 너비는 7m 가량이며 높이는 대략 4∼5m에 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군창지와 영일루가 있는 부근의 표고는 전면 70m, 후면 90m의 등고선을 따라 둘레 1,500m의 성벽을 거의 토축()으로 축조하였다.
1981년의 사비성 복원 때 토성의 단면을 자른 결과 대개 아래로부터 A·B·C·D의 4층을 확인하였다. 


맨 아래층인 A층은 붉은색의 진흙으로 판축하여 하부를 축조하였는데, 토층의 높이는 1.9m이며, 토루 바깥면에는 토루를 보호하기 위하여 쌓은 4단의 석축이 남아 있다.
B층은 황갈색토층으로 북반부는 A층 위에 퇴적되었고, 남반부는 A층과 같이 아래서부터 쌓아올렸는데, 이는 A층을 고쳐쌓기 위해 B층이 축조되었음을 알려주며, 생토층으로부터 B층까지의 높이는 3.2m이다. 이곳에서는 연질의 백제시대 기와조각이 출토되었다.
C층은 황갈색사질토로 판축기법을 사용하여 두께 3∼6㎝로 축조되었는데, B층의 바깥쪽 경사면을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수축된 것으로 보인다. 

석재는 6합식() 5단으로 쌓여 있는데 높이는 103㎝로 이 층에서도 B층과 같이 백제시대의 기와조각이 출토되었다.
맨 위층인 D층은 조선시대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어 부소산성이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수축·개축을 거치며 사용된 이용편년을 증명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전체성벽의 높이는 내면의 높이가 7.6m, 외면 높이가 3.4m, 너비는 8.6m이다.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표고 106m의 사비루 부근의 산봉우리 중심으로 약 700m의 테뫼형 산성이 있는데, 크기가 50×50㎝, 70×60㎝ 되는 백제시대 초석이 많이 흩어져 있다.

이 산성은 위의 두 산성이 연결되어 백제시대의 독특한 복합식 산성양식을 하고 있다. 성안에는 동·서·남문지가 있으며, 북쪽의 금강으로 향하는 낮은 곳에 북문과 수구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동문지로 추정되는 곳에서는 대형철제 자물쇠가 발견되어 문지였음을 입증해주고 있으며, 남문지에는 아직도 문주()를 받쳤던 초석 2개가 동서로 나란히 있다.


부소산은 부여의 진산으로 부여의 북쪽인 쌍북리(현: 관북리)에 있는 해발 100m쯤밖에 되지 않는 나지막한 구릉이다. 

북으로 강을 두르고 바로 산이 막아선 형상이 북으로부터 내려오는 고구려 군사를 방비하기에 알맞게 되어 있는 점이 공주의 공산성과 흡사하다. 

백제의 초기 도읍지로 추정되는 경기도 하남 위례성터와 함께 백제식 도성 방식을 보여 준다.




부소산에는 왕궁과 시가를 방비하는 최후의 보루였던 백제의 부소산성이 있다. 

산성이 완성된 것은 성왕이 538년에 수도를 사비로 옮기던 무렵으로 보이나 그보다 앞서 500년쯤에 이미 그 선왕인 동성왕이 산봉우리에 산성을 쌓았고, 후대에 무왕이 605년에 고쳐 다시 쌓았다.





성곽은 산정에 테뫼식(머리띠식)으로 산성을 쌓고, 그 주위에 다시 포곡식(성의 내부에 낮은 분지가 있는 형식)으로 둘렀으며 축조 방식은 흙과 돌을 섞어 다진 토석혼축식이다. 

경사면에 흙을 다진 축대를 쌓아 더욱 가파른 효과를 낸 성곽이 2,200m에 걸쳐 부소산을 감싸고 있다.

부소산성에 들어서서 바로 오른쪽 길로 접어들면 삼충사()가 있다. 

백제 말의 3충신인 성충·흥수·계백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인데 1957년에 처음 세워졌고 1981년에 지금처럼 대대적으로 만들었다.

5분 남짓 더 걸어가면 있는 영일루는 사비성의 동대()가 되는 영일대가 있던 자리이다. 지금 건물은 1964년에 홍산에 있던 홍산문루를 옮겨 지은 것이다. 






부소산의 동쪽 산봉우리이니만큼 아침 해뜨기를 보기에 안성맞춤이어서 ‘해 맞는 곳’으로 이름이 붙었겠다.

그 아래쪽으로는 군창터가 있어 너른 터에 철책을 둘러 놓았다. 백제 때에 군대 곡식창고였다고 한다. 

지금은 잔디를 심어 놓았지만, 땅속을 파면 불에 검게 탄 쌀이나 보리, 콩이 나온다고 하는데 나당 연합군이 쳐들어오자 저항하던 백제군이 군량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불을 질렀다고 한다. 

1915년에 한 초등학생이 칡뿌리를 캐다가 처음으로 발견했다니 땅속에 묻힌 지 1,250년 만의 일이다.








군창터 옆에 움집 두 채가 있어 이채로운데, 이것은 백제 때 군인들의 움막을 발굴 복원해 놓은 것이다. 

1m가 채 못 되게 움을 파고 사방에 벽을 두른 뒤 지붕을 얹은 모습인데, 가운데 화덕에서 나는 연기를 빼려고 환기창을 달아 놓은 것이 재미있다. 

바로 옆에 본래 움집터를 발굴한 곳은 현대식 건물을 지어 놓고 볼 수 있게 했다.







부소산 가장 높은 곳에는 사자루()가 있다. 

한자가 ‘사비’()와 비슷하나 왜 사자루가 되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백제 때에는 송월루()가 있었으니 해맞이 영일루와는 반대로 달을 보내는 곳이다. 

지금 건물은 1919년에 당시 군수가 임천의 문루였던 개산루를 뜯어다 짓고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고 한다. 

‘백마장강’()의 시원하고 힘찬 글씨는 근대 서예의 한 봉우리인 해강 김규진(1868~1933)이 쓴 것이다.





바로 아래쪽으로 백마강을 시원하게 내려다볼 수 있는 육모지붕의 백화정이 절벽 위에 자리잡고 있다. 
힘들지 않은 걸음이라도 땀이 났을 만한데 백마강 강바람에 땀을 식히기에 안성맞춤이다. 
부소산성에 오르는 이들은 대개 여기에서 사진을 찍는다. 

실은 그 바로 아래 나무 모양의 난간을 두른 자리가 백마강이 휘돌아 가는 모습이 배경으로 더 근사하게 잡히는 곳이다.






백제의 왕궁으로서 사비시대 백제의 마지막 도읍이었던 사비도성의 일부로서 부소산성의 성격이 밝혀진 것은 매우 중요한 학술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부소산성의 성안에 군창지와 건물지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유사시에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사용하였으나 평상시에는 백마강과 부소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이용하여 왕과 귀족들이 즐기는 비원으로서의 구실을 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부소산성은 사비천도 이후 백제 멸망시까지 국도의 중심산성으로, 인근의 청산성()·청마산성() 등의 보조산성 등과 함께 왕도 방어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아래쪽에 낙화암이 있다. 
사비가 나당 연합군의 발 아래 유린될 때에 삼천 궁녀가 꽃잎처럼 백마강에 몸을 던졌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아래에서 배를 타고 돌아갈 때에 더 잘 보인다. 



삼천 궁녀 전설로 해서 낙화암()이라는 꽃답고 애절한 이름을 얻었지만, 『삼국유사』에는 원래 이름이 ‘타사암’()이니 곧 (사람이) 떨어져 죽은 바위이다. 
사실과 전설의 차이는 이런 이름에서 너무나 극명하게 드러난다. 
끔찍한 역사도 세월의 더께는 그런 대로 옷을 입혀 준다.

조선 숙종때의 사람 석벽 홍춘경은 이곳에 와서 낙화암에 비추어 백제의 스러짐을 안타까워하며 이렇게 읊조렸으니 오늘에 와서도 쓸쓸한 부소산성과 잘 어울린다.
나라가 망하니 산하도 옛 모습을 잃었고나
홀로 강에 멈추듯 비치는 저 달은 몇 번이나 차고 또 이즈러졌을꼬
낙화암 언덕엔 꽃이 피어 있거니
비바람도 그 해에 불어 다하지 못했구나.
절벽 아래쪽에 유람선 선착장이 있다. 
백제대교가 놓인 규암나루까지 갈 수 있는데 배를 타면 반드시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하는 유명한 노래를 들을 수 있으니, 
한번쯤 유행가 가락에 실려 보는 것도 좋겠다.

사비 도성의 후원이기도 했던 부소산성은 한갓진 산책로로는 그만이다. 
시내에서 올라 사자루를 거쳐 낙화암과 고란사까지 이르는 길은 천천히 걸어 2시간 남짓 걸린다.

여행에 필요한 기초 정보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에 있다. 
40번 국도와 4번 국도가 만나는 백제주유소 앞 삼거리에서 부여 읍내로 들어가면 부여 보건소가 있는 로터리에 이른다. 
로터리 바로 못미처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부소산성이 나온다.

산성 내에는 주차할 곳이 없다. 
구 국립부여박물관 옆 국민관광 주차장이나 구드래 나루 근처 백마강 주차장에 주차하면 된다.

즐거운 여행을 도와주는 유익한 정보

① 백제 여인의 절개와 충절로 대표되는 역사적 명소 부소산성은 산이 그리 높지 않고 경관도 좋아 부여를 찾았을 때 한가로이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부소산성 입구→삼충사→영일루→군창터→궁녀사당→송월대→사자루→백화정→낙화암→고란사→사자루→부소산 입구로 돌아오는 코스는 2시간 정도 걸린다.

② 고란사 아래 유람선 선착장에서 보면 백마강 상류 쪽으로 작은 바위섬이 하나 강 위에 떠 있는데 이 바위가 조룡대이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이 바위에서 백마를 미끼로 사용하여 백제를 지키는 용을 낚았다 하여 조룡대라 부르고, 금강이 부여를 지나는 부분을 가리켜 백마강이라 불렀다고 한다.

왕궁터

부소산성 남쪽 기슭 옛 국립부여박물관 근방의 관북리 일대는 사비 시대의 왕궁터로 추정되어 충청남도 기념물 제43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금은 주택가가 되어 있으나 그 부근에서 백제 시대의 건축용 석재들과 주춧돌이 많이 나왔으며 부여여자고등학교 안에 있는 밑변이 팔각형인 우물은 임금이 마셨다는 전설도 있다. 
민가 자리인 탓에 어쩔 수 없어 남은 좁은 공터에 철책만을 둘러 놓아 왕궁터라고 하기에는 쓸쓸하기 그지없다.

사비 시대 백제 왕궁에 관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소략하기만 하다. 
추리면 다음과 같다.
성왕 16년(538)에 사비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고 부름.
무왕 13년(612) 4월 궁성의 남문에 벼락이 쳤다. 5월에 큰물이 져서 많은 민가가 잠겼다.
31년(630) 2월에 사비의 궁성을 수리했다.
37년(636) 8월에 왕은 군신을 망해루에 모아 잔치를 베풀었다.
의자왕 15년(655) 태자궁을 극히 화려하게 수리하였고, 망해정을 궁전 남쪽에 세웠다.


1982~83년에 이루어진 발굴조사에서 당시 박물관 앞 공터에서 연못을 찾아 내었고 그 안에서 연화문 와당과 화살촉, 토기들도 나왔다. 
사람 얼굴무늬 토기 조각도 나왔는데 22㎝ 길이의 조각에 모자를 쓰고 수염을 기른 남자 얼굴 무늬가 반복되어 찍혀 있다. 
우는 듯하기도 하고 볼이 멘 듯하기도 한 얼굴에서 공장()이었을지도 모르는 한 백제 사람을 만나게 되는 일은 매우 재미있다. 
이 기와 조각은 국립부여박물관 역사실에 진열되어 있다.



왕궁터 발굴 조사 때 모자를 쓰고 수염을 기른 남자얼굴 무늬가 찍혀 있는 토기조각이 나왔다. 
우는 듯하며, 볼이 멘 듯한 표정이 재미있다.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유네스코 세계유산]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유네스코 세계유산]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유네스코 세계유산]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유네스코 세계유산]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대동지지(大東地志)』

  •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 『여지도서(輿地圖書)』

  • 「백제성지연구」(홍사준, 『백제연구』2, 충남대학교백제연구소, 1971)

  • 『문화재대관』사적편(문화재관리국, 1976)


  • 「백제사비도성연구」(성주탁, 『백제연구』13, 충남대학교백제연구소, 1982)

  • 「백제사비성연구」(홍재선, 동국대학교석사학위논문, 1982)

  • 『문화재대관』(충청남도, 1985)

  • 「부소산성의 성벽축조기법 및 변천에 대한 고찰」(김용민, 『한국상고사학보』26, 1997)

  • 「부여부소산성의 고고학적 조사현황과 분석」(여홍기, 『박물관지』7, 1998)






* 백제 문화의 보고, 부소산과 부소산성 *
부여에 들어서면 시가지 북쪽에 검푸른 숲을 이룬 해발 106m 의 나지막한 부소산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 온다. 부여의 진산인 부소산에는 수많은 백제 여인들이 꽃잎처럼 떨어져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낙화암, 백화정, 사자루, 반월루, 궁녀사, 고란사, 부소산성(사적 제5호), 해맞이하는 영일루, 성충ㆍ흥수ㆍ계백의 백제 충신을 모신 삼충사, 곡식 창고터였던 군창지, 백제 군인의 움집 수혈병영지 발길 닿는 곳마다 발걸음을 붙잡는 토성들, 백제의 역사와 백제왕실의 이야기가 곳곳에 배어 있다.
금강의 남안에 있는 부소산의 산정을 중심으로 테뫼식 산성이 동서로 나뉘어 붙어 있고, 다시 그 주위에 북동쪽의 계곡을 둘러쌓은 포곡식()산성을 동반한 복합식 산성으로, 성내에는 사자루, 영일루(), 반월루(), 고란사(),낙화암(),사방의 문지(), 군창지() 등이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사비성, 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산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으로 불리고 있다. 이 산성은 백제의 수도인 사비 도성의 일환이며, 왕궁을 수호하기 위하여 538년(성왕 16)수도의 천도를 전후한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나, 이 보다 먼저 500년(동성왕22)경 이미 산성이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천도할 시기를 전후하여 개축되었고, 605년(무왕 6)경에 대대적인 개수축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편 일부의 성벽은 통일신라시기에 수축되고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고을의 규모에 맞도록 축소되어 이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 백제 문화를 만난다, 부소산의 유적지 *
* 삼충사
부소산성 정문인 사비문을 지나 조금 걸어올라가면 삼충사가 있다. 외삼문과 내삼문을 지나 사당에 들어서면 백제말 삼충신인 성충, 흥수,계백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져 있다. 해마다 10월 백제문화제때 제향을 올리고 세분의 숭고한 구국충절을 기린다.
* 영일루
영일루는 부소산성의 맨 동쪽 산봉우리에 세워져 백제왕과 귀족들이 멀리 계룡산의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며 국정을 계획하고,나라의 태평과 백성들의 평안을 기원했던 영일대에 세운 누각이다.
* 군창지
일명 만리창()이라 불렀던 이곳은 1915년 불에 탄 쌀이 발견된 군대 곡식을 보관했던 창고이다.
* 수혈병영지
군창지를 조금 지나면 움집이 보인다. 움집은 백제 때 군인들의 움막을 발굴,복원한 것으로 1m 가량 움을 파고, 사방을 나무나 짚으로 벽을 두른 뒤 초가지붕을 얹은 모습이다. 원래 움집터와 저장고를 발굴한 곳에 전시실을 지어 구조를 자세히 살필수 있게 하였다.
* 사자루
부소산 가장 높은 곳(해발 106m)에 위치한 사자루는 동쪽 영일루와 더불어 일월 음양을 뜻하며 달이 밝은 밤 누각에 오르면 아름다운 경치가 눈앞에 펼져지고 시흥이 절로 일어난다. 사자루 건립 당시 터를 파다가 광배 뒷면에 명문이 새겨진(정지원명) 금동석가여래입상(보물 제196호)이 발견되었다. 사자루 현판 글씨는 의친왕 이강의 친필이고,뒤쪽에 붙은 은 서예가 해강 김규진의 작품이다.
* 백화정
낙화암 절벽위에 세워진 육각지붕의 정자가 백화정이다. 백마강을 시원하게 내려다 볼 수 있는 백화정은 백제멸망 당시 꽃잎처럼 떨어져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숭고한 백제 여인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1929년에 부풍시사()라는 시모임에서 세웠다.
* 궁녀사
반월루 광장에서 동북쪽 태자골로 조금 내려가면 궁녀사가 나온다. 이 궁녀사는 백제 의자왕 20년(660)에 나당 연합군에 의해 사비성이 함락되던 날,낙화암에서 꽃잎처럼 떨어져 죽은 백제 여인들의 충절을 추모하고 그 뜻을 후세에 널리 기리고자,1965년에 세웠다. 10월 백제문화제 때 제향을 올리고 있다.
* 부여관북리백제유적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725번지에 위치한 이 유적은 현재 왕궁지로 알려져 있으며, 국립부여 문화재연구소 남쪽일대 184필지 95,048㎡(28,780평) 중 33필지 2,102㎡는 1983년 9월 충청남도 기념물 제43호 전백제왕궁지()로 지정되어 있다. 1982년부터 이 일대를 중심으로 충남대학교 박물관에서 5차에 걸쳐 발굴조사하여 1983년도에는 방형석축연지()가 발견되었고, 1988년 발굴조사에서는 토기 구연부에 북사()라는 명문이 발견되었으며, 1992년 조사에서는 현재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남쪽 50m 지점에서 백제시대의 도로유적과 배수시설이 드러났다. 삼국시대의 궁궐 중 고구려의 안학궁을 제외하면 아직까지 신라와 백제의 왕궁은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지만, 백제시대 마지막 도읍이었던 사비도성의 일부 유적이 밝혀진 것은 매우 중요한 학술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용안내

이용시간

하절기(3~10월) 09:00~18:00
동절기(11~2월) 09:00~17:00

주차시설

있음

신용카드가능여부

가능

애완동물가능여부

불가

문의및안내

관광안내소 041-830-2880

관련 홈페이지

부여 문화관광 http://tour.buyeo.go.kr/
문화재청 http://www.cha.go.kr

상세정보

관광코스안내

* 부소산 탑사길 (약 2시간 소요)
1) 사비문(매표소) - 삼충사 - 영일루 - 군창지(또는 태자골 숲속 길) - 반월루 - 궁녀사 - 사자루 - 낙화암(백화정) - 고란사 - (유람선) - 구드래공원
2) 구드래공원(배타고) - 고란사 - 낙화암(백화정) - 사자루 - 반월루 - 군창지 - 영일루 - 삼충사 - 사비문

* 1시간 답사길
부소산구문 - 서복사지 - 반월루 - 고란사 - (유람선) - 구드래공원

관 람 료

개인 - 어른 2,000원 / 청소년 1,100원 / 어린이 1,000원
단체(30인 이상) - 어른 1,800원 / 청소년 1,000원 / 어린이 900원
※ 만 6세 이하, 65세 이상, 장애인, 부여군민 무료
※ 낙화암, 고란사 포함

화장실

있음

주차요금

무료

외국어 안내서비스

가능(영, 중, 일) 사전예약 필요
- 문의 : 관광안내소 041-830-2330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유네스코 세계유산]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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