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17일 금요일

스코틀랜드 , Scotland .

스코틀랜드 , Scotland.

영국 그레이트브리튼섬 중에서 트위드강 하류부로부터 셰비엇 구릉을 거쳐 솔웨이만(灣)에 이르는 경계선 북부 지방.

에든버러성영국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중세기 의 성으로 7세기경부터 축성이 계속되어 왔다. 성내에서는 11세기의 교회 세인트 마 거렛트차펠, 그래트홀, 박물관 등이 있다.
남으로는 잉글랜드 최북부의 노섬벌랜드주() 및 컴브리아주와 인접해 있고, 동으로는 북해, 서로는 대서양을 앞에 두고 있으며, 남서부에서는 노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북()아일랜드와 마주보고 있다. 
지리적으로 북부에서 남부를 향해 하일랜즈·롤랜즈·서던업랜즈로 갈라져 있으며, 인구의 대부분은 동부 해안지대로부터 롤랜드에 이르는 평야부에 모여 있다. 
북부와 서부의 해안선이 길며, 헤브리디스 제도·오크니 제도·셰틀랜드 제도를 비롯하여 800개 가까운 유인도·무인도가 있다. 
처음에는 픽트인()과 스코트인으로 대별되는 켈트계() 부족들의 소왕국이 몇 개 있었으나 11세기까지 스코트인의 지배하에 있는 통일왕국이 수립되어 점차 주변 부족들을 병합하였으며, 15세기에는 오크니 제도와 헤브리디스 제도도 스코틀랜드의 일부가 되었다.

그동안 잉글랜드와의 항쟁이 계속되었으나 13세기의 스코틀랜드 왕 알렉산더 2세·3세시대에 현재와 거의 같은 경계선이 확립되고 정치적·경제적 안정을 이루었다. 
스코틀랜드인은 흔히 이 시기를 자국의 황금시대로 간주한다. 
그 후에도 잉글랜드와의 항쟁은 계속되었으며, 그 사이사이에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2세에 대한 1313∼1314년의 독립전쟁의 승리, 1503년 제임스 4세와 잉글랜드 왕 헨리 7세의 딸 마거릿과의 결혼, 
1567년의 메리 여왕의 처형 등과 같은 큰 사건들이 일어났다. 
1603년에 잉글랜드 왕 엘리자베스 1세가 죽자, 메리의 아들 제임스 6세가 혈통에 따라 잉글랜드 왕을 겸하게 되어(제임스 1세), 양국의 동군연합()관계가 성립하였다. 
시민혁명 당시에는 크롬웰에 의한 스코틀랜드 정복도 있었으나, 명예혁명 후인 1707년에 양국의 의회가 통합되고, 이에 양국은 연합왕국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스코틀랜드의 귀족 16명이 런던의 상원 의석을 차지하는 원칙도 이때 만들어졌다. 
이러한 연합의 결과로 스코틀랜드는 경제적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특히 글래스고의 상공업이 급속히 증대하였으나, 잉글랜드에 대한 뿌리 깊은 내셔널리즘은 그 후에도 존속하였다.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는 별개의 자치법으로 통치되고 있으며, 독자적인 사법제도와 보건·교육제도를 가지며 국교회제도()도 독립해 있다. 
주도()는 에든버러이고, 경제적 중심은 글래스고이다. 
주요산업으로는 보리와 사탕무·감자 등의 농업, 소·양의 목축업, 임업·어업 이외에 석탄의 산출이 풍부하며, 한때 활발했던 제철·조선 등은 쇠퇴하였다. 
그 밖에 그레인지머드를 중심으로 한 화학공업과 각지에 분산해 있는 전통적인 모직물 공업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영국을 구성하는 연합왕국(잉글랜드ㆍ스코틀랜드ㆍ웨일스ㆍ북아일랜드)의 하나로, 그레이트브리튼섬의 북부 지역을 차지한다. 

면적 78,783㎢, 인구 5,062,011명으로, 수도는 에든버러이며, 경제적 중심지는 글래스고이다.
고대에는 픽트인(人)과 스코트인으로 대별되는 켈트계(系) 부족들의 소왕국이 몇 개 있었으나 10~11세기까지 스코트인의 지배하에 있는 통일왕국이 수립되어 점차 주변 부족들을 병합하였으며, 15세기에는 오크니제도와 헤브리디스제도도 스코틀랜드의 일부가 되었다. 
그동안 잉글랜드와의 항쟁이 계속되었으나, 13세기의 스코틀랜드 왕 알렉산더 2세ㆍ3세 시대에 오늘날과 거의 같은 경계선이 확립되고 정치적ㆍ경제적 안정을 이루며 스코틀랜드의 황금시대가 열렸다. 
그 후에도 잉글랜드와의 항쟁은 계속되었으며,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2세에 대한 1313∼1314년의 독립전쟁의 승리, 1503년 제임스 4세와 잉글랜드 왕 헨리 7세의 딸 마거릿과의 결혼, 1567년의 메리 여왕의 처형 등과 같은 큰 사건들이 일어났다.

이후 1603년에 잉글랜드 왕 엘리자베스 1세의 사망으로,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메리 여왕의 아들)가 혈통에 따라 잉글랜드 왕위까지 겸하게 되어(제임스 1세), 양국의 동군연합(同君聯合)관계가 성립하였다. 
시민혁명(1642년~1649년) 당시에는 크롬웰에 의한 스코틀랜드 정복도 있었으나, 명예혁명(1688년) 후인 1707년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양국의 의회가 통합되면서 연합왕국(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을 형성하였다. 
이로써 스코틀랜드의 귀족 16명이 런던의 상원 의석을 차지하는 원칙도 결정되었다. 
그 결과 스코틀랜드는 경제적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특히 글래스고의 상공업이 급속히 증대하였으나, 잉글랜드에 대한 뿌리 깊은 민족적 반감은 그 후에도 존속하였다.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는 별개의 자치법으로 통치되며, 독자적인 사법제도와 보건ㆍ교육제도를 비롯해 국교회제도(國敎會制度) 또한 독립해 있다.(스코틀랜드의 국교는 장로회(그리스도교 신교)).


이로써 스코틀랜드의 귀족 16명이 런던의 상원 의석을 차지하는 원칙도 결정되었다.



이로써 스코틀랜드의 귀족 16명이 런던의 상원 의석을 차지하는 원칙도 결정되었다.
이로써 스코틀랜드가 연합왕국으로부터 분리독립하는 방안이 추진돼 왔다. 
이후 2012년 10월 15일 영국 정부와 스코틀랜드 자치정부의 협정을 통해, 2014년에 스코틀랜드 분리독립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를 시행하기로 최종 합의했다.

이에 따라 스코틀랜드는 2014년 9월 19일(현지시간) 오전 6시부터 오후 10시까지 분리독립 찬반 주민투표를 실시하였다. 
투표는 16세 이상의 스코틀랜드 주민을 대상으로 실시됐으며, '스코틀랜드가 영국 연방에서 분리독립해야 하는가'라는 단일 문항에 찬성ㆍ반대 중에 결정하도록 했다.

유권자 428만 명이 참여한 이번 투표는 역대 최고인 84.6%의 투표율을 기록했으며, 투표 결과 반대 55%-찬성 45%가 나오면서 스코틀랜드의 독립은 무산됐다.
307년 만에 영국 연방에서 떨어져 독립국가로서 자립하려던 스코틀랜드 자치정부의 도전은 무산됐으며, 현재 잉글랜드·스코틀랜드·웨일스·북아일랜드 등 4개 지역으로 이루어진 영국연방(UK) 체제는 계속 유지된다.


투표는 16세 이상의 스코틀랜드 주민을 대상으로 실시됐으며, '스코틀랜드가 영국 연방에서 분리독립해야 하는가'라는 단일 문항에 찬성ㆍ반대 중에 결정하도록 했다.

유권자 428만 명이 참여한 이번 투표는 역대 최고인 84.6%의 투표율을 기록했으며, 투표 결과 반대 55%-찬성 45%가 나오면서 스코틀랜드의 독립은 무산됐다.



스코틀랜드 자치정부가 영국 중앙정부로부터 조세권과 예산권을 대폭 넘겨받는 자치권 확대 약속을 얻어냄에 따라 조만간 중앙정부는 스코틀랜드 지방정부에 권한을 대폭 이양하는 ‘지방정부 권한 강화(devo-max)’ 협상을 시작할 계획이다.


영국 본토인 그레이트브리튼 섬 북부의 지방. 
수도는 에든버러.
북부는 산지가 많은 고원 지방, 중부는 저지대, 남부는 구릉 지대로 나누어짐. 
중부 저지에는 도시가 많고 지하 자원이 풍부해 기계 · 화학 · 제지 · 섬유 · 의류 등 공업이 발달했다. 
고원 지방은 스카치위스키가 특산품임. 
역사적으로 여러 왕국이 교체됐고 잉글랜드와 대립을 계속하다 1707년 합병됐으나 대립 의식은 계속돼 왔음.

켈트계 부족들의 소왕국이 몇 개 있었으며, 11세기까지 스코트 인의 지배하에 통일 왕국이 수립되어 주변 부족들을 병합하였다. 
그동안 잉글랜드와의 항쟁이 계속되었으며, 13세기에 현재와 같은 경계선이 확립되었다. 
1603년에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가 죽자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왕을 겸하게 되어 양국의 연합 관계가 형성되었다. 
1707년에 양국의 의회가 통합되어 연합 왕국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스코틀랜드는 경제적으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잉글랜드와는 별개로 자치법으로 통치되고 있다.

경제적 중심지는 글래스고이다. 
화학 공업과 전통적인 모직물 공업이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지명은 '스코트 사람들의 땅'이라는 뜻인데 켈트 어로 스코트는 '도망자', '방랑자'라는 의미가 있다. 
스코트 인은 아일랜드의 선주민으로 3세기경 영국 본토(그레이트브리튼 섬)로 이주하였다. 
'유랑하는 양치기'라는 뜻도 있다. 
이 곳에서 생산되는 술을 스카치위스키라고 하며, 남자 양치기들이 입었던 치마는 스카트라고 했다.

최근 세계 곳곳에서 분리독립 갈등을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거세지고 있어요. 
2014년 9월에는 스코틀랜드에서 분리 독립 주민투표가 있었고, 스페인 카탈루냐 주에서도 11월에 주민투표가 있어요. 
벨기에, 이탈리아, 캐나다, 중국 등도 여전히 분리독립 문제로 골치를 썩이고 있답니다.
2014년 9월 19일 열린 스코틀랜드 분리독립 주민투표 결과, 반대표가 200만 2천 표(55.3%)로 찬성 161만 8천 표(44.7%)보다 높게 나왔습니다. 
이로써 1707년 영국에 합병된 후 307년 만에 시도됐던 스코틀랜드의 분리독립은 무산됐고, 스코틀랜드는 영국을 구성하는 4개의 자치정부 중 하나로 남게 됐습니다.

투표 전 스코틀랜드의 자치권을 늘리기로 약속했던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스코틀랜드가 영국에 남아 기쁘다. 
더 나은 미래를 향해 함께 가자.”고 선언했습니다. 
스코틀랜드 독립을 주장했던 알렉스 새먼드 스코틀랜드 자치정부 수반은 “모든 스코틀랜드인은 민주적 결정을 받아들이자.”며 투표 결과를 인정했습니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도 영국 국민의 이해와 단결을 강조했습니다.

이번 투표 결과를 보면 찬성과 반대 비율의 차가 크지 않습니다. 
스코틀랜드의 분리독립 찬반 세력 사이의 갈등을 풀어 가는 게 쉽지 않을 전망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중심도시 에든버러에서는 독립 반대표(61.1%)가 더 많았던 반면, 가장 큰 도시인 글래스고에서는 독립 찬성표(53.5%)가 더 많았습니다. 
이번 주민투표는 84.6%라는 스코틀랜드 사상 최고 투표율을 기록했습니다.

영국 정부는 지난 2년 동안 벌인 분리독립의 갈등을 해소하고, 스코틀랜드와의 화합과 관계 개선에 노력해야 할 숙제를 안게 됐습니다.

가장 호감이 가는 사람 중의 하나이자 위대한 철학가인 David Hume(1711~76)은 인식론자, 도덕주의자, 정치이론가, 역사가로 알려져 있다. 

흄은 인과적 추론이 이성보다는 관습에 따른다고 하여 그 타당성에 회의적이었지만, 정신생활의 다른 분야에서 관습과 관례의 역할에 조심스러웠다. 
사실 관습은 인간생활의 가장 큰 안내자이다. 
관습은 인간의 경험을 유용하게 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미래가 과거와 같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끔 한다.
자연과 사상의 과정 사이에 예정된 조화가 있으면, 그것은 곧 관습에 기인한다.

"관습은 이러한 일치에 영향을 주어 온 원칙이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생활의 발생과 모든 환경에서 인간의 생존유지와 행동규제에 필요한 것이다."

사실 여기에서 지식사회학이 막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흄은 또한 자연법의 원리를 공격하고, 옳고 선한 것에 대해 우리가 의미하는 것은 사회의 관습으로부터 유래된다고 주장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규범이라고 부르는 규칙은 개인적 이익의 만족이나 사회의 안정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사회는 정부 없이도 가능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것을 원시상태하에서만 본다. 인간의 약점은 가까운 곳의 선을 먼 곳의 선보다 선호하는 데 있으며, 정부의 제도가 이러한 경향을 치료하지는 못하더라도 완화하는 것은 가능하다. 사회학의 이해를 위한 흄의 밀접한 접근은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드러난다.

"모든 국가와 시대에 있어서 인간의 행동에는 큰 일치점이 있으며, 그 원칙과 작용에서 인간의 본성은 여전히 같다고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리고 그 뒤에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여러분은 그리스와 로마의 생활과정과 정서, 성향들을 알고 있는가? 프랑스 사람들과 영국 사람들의 기질과 행동을 잘 연구해 보라. 
여러분은 후자에 대하여 행하였던 대부분의 관찰을 전자로 옮기더라도 큰 실수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류는 모든 시간과 공간에서 많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역사는 우리에게 새롭거나 낯선 어떠한 것도 보여 주지 않는다. 
역사의 장점의 이용은 모든 다양한 상황과 환경 속에서 나타나는 인간성의 보편적이고 지속적인 원칙을 찾게 하고, 우리가 관찰을 하여 인간행동의 규칙적인 원천에 친숙해지는 자료를 제공하는 데 있다."

물론 편견, 여론, 성격의 다양성과 성별, 연령의 차이는 고려해야 한다. 
대체적으로 인간들 사이에는 일치된 성향이 있다. 
정의와 재산의 기원을 논의하는 데 있어서 흄은 사회의 기원을 탐색할 기회를 가졌다. 
자연은 인간에게 자신의 만족을 충족시킬 수단보다는 욕구를 더 많이 줌으로써 잔혹한 대상이 된다.
인간의 '불완전성이 보상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필요성이 사회의 제일의 근원적인 원칙이다.

"이러한 필요성은 성적인 자연적 욕구 바로 그것이며, 양성이 결합하여 자기들의 후손에 대한 관심 속에서 새로운 유대의 결합을 보존한다. 
이러한 새로운 관심사는 부모와 자녀간의 결합의 원칙이 되며 많은 사회를 형성하게 된다."

덧붙여서, 흄은 자연의 상태가 공허한 허구라고 믿었다. 
"Of the Original Contract"라는 논문에서 자연의 상태는 단지 정의가 인간의 관습의 결과로서 발생하는 것을 보여 주는 데만 유용하다고 하였다. 
흄은, 정부가 숲과 사막에서 출발한 초기에 몇몇 사회계약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역사에 나타난 모든 정부들은 동의보다는 강제에 기초하고 있다. 
이 논문에 대해 Peter Gay는 "흄이 도덕철학뿐만 아니라 정치 철학도 사회학으로 전환시키고자 하였다"고 말하였다.4)

"Of National Characters"라는 논문에서, 흄은 사회에서의 지리적 요인의 영향을 상당히 자세하게 논의하고 몽테스키외와는 대조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기질이나 재능을 공기, 음식, 기후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에 회의하고 있다. 
그는 한 논문에서, 흄은 왜 지리적 해석이 받아들여질 수 없는가에 관한 적어도 9가지 이상의 이유를 보여 주고 있다. 
북부지역의 인간은 술을 소비하는 성향이 있지만, 남부지역에서는 사랑과 여성을 더 선호한다.

그러나 이러한 측면에서도 도덕적 명분은 육체적인 것만큼 중요한 것이다. 
흄은 취미와 열정, 미신과 열광, 인간본성의 위엄과 비천함, 시민의 자유, 예술과 과학의 발생과 진보, 일부다처제와 이혼, 돈, 고대국가의 인구, 관습, 이혼, 그리고 오만과 겸손, 사랑과 결혼, 자살 등 사회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문제에 관한 많은 글들을 썼다. 
마지막으로, 비교자료들을 이용하고 있는 Natural History of Religion은 종교사회학에 분명한 공헌을 하고 있다.

Adam Ferguson(1723~1816)이 사회학의 실질적인 아버지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것은 뉴턴에 대한 찬양처럼 예사로운 것이 되었다. 
퍼거슨은 흄과 애덤 스미스가 소속되어 있는 유명인사들의 모임의 중요한 회원이었으며, 이 집단은 예술과 과학의 분야에서 스코틀랜드의 계몽주의를 형성하였다. 
'북쪽의 아테네'로 알려진 Edinburgh는 파리와 경쟁하였고 문화와 학문의 중심지로서 런던과 필라델피아를 능가하였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여러 측면에서 18세기의 스코틀랜드는 영국보다는 프랑스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어쨌든 퍼거슨 자신이 Edinburgh Review에서 언급한 것처럼, 가장 전형적인 스코틀랜드인인 그는 Black Watch Highland Regiment에 목사로서 봉사하였고 아직도 알 수 없는 이유에서 스코틀랜드의 교회를 떠나 법무부 도서관 관리자로서 흄을 계승하였으며, Edinburgh의 대학에서 도덕철학과 기역학(Pneumatics)의 교수가 되어 1759년부터 1785년 은퇴할 때까지 일을 하였다. 퍼거슨은 1767년 Essay on the History of Civil Society를 출간하였고, 1792년에는 강연집인 Principles of Moral and Political Science를 출간하였다. 또한 그는 1782년에 History of the Progress and Termination of the Roman Republic을 간행하였다.

퍼거슨은, 사회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상태이며, 인류에 관한 적절한 연구는 개인들보다는 집단에 대한 연구라고 믿었다. "인류는 집단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 주제와 관계 있는 모든 실험은 개인이 아닌 전체사회에 대해 행해져야 한다." 그리고 "인류는 항상 무리나 집단으로 이동하거나 정착하고, 합의를 하거나 다투기도 한다."5) 흄의 명제 중의 하나인 인간정신은 그 발전을 위해 사회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사회의 분위기는 인간정신이 지성의 첫 숨을 쉬게 되는 요소라고 볼 수 있다. 도덕적 정서의 훌륭한 생명력 있는 공기가 아니라면, 불꽃을 밝히는 강력한 효과는 없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인간의 정신은, 예를 든다면, 바로는 불이 붙을 수 없는 땔감에 비교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만약 다량으로 모아지면 쉽게 불꽃으로 점화될 것이다."6)

"사회로부터 사람의 행복한 정서만이 아니라 힘을 얻으며 합리적 성격의 그 모든 것을 얻는다. 사람을 사막으로 혼자 보내면 뿌리 없는 식물과 같아진다. 형체는 있을지언정 모든 능력은 시들고 인간됨이나 인간성은 없어진다."7)

사회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는 창안, 상상, 추측을 피하고 관찰에 의존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는(루소를 생각하고 있다), 도덕철학은 과학적 기초에 의존해야 하며 지리학, 심리학, 언어의 역사, 그리고 인구학으로부터 경험적인 증거를 이용해야만 한다. 그러나 퍼거슨은 심리학적 원리로부터 사회의 구조를 연역하려고는 시도하지 않았다.

그의 모든 동시대인들처럼 몽테스키외로부터 영향을 받은 퍼거슨은, 지리학의 중요성은 인정했지만 사회변동에 관한 일원론은 거부하였다. 그는 사회를 미개, 야만, 세련의 시대로 나누었다. 이러한 구분은 MacRae로 하여금 퍼거슨을 다윈 이전의 진화론자로 인정하도록 하였다. 그는 또한 자연의 상태에서 살고 있는 인간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거부하였다. 만약 우리가 자연의 상태를 찾고자 한다면,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영국의 섬과 희망봉에 있는 우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19세기의 그의 계승자들보다 더욱 세련된 퍼거슨은 유기체와의 유추를 거부하였다.

"인간의 구조는 일반적인 과정을 가지고 있다. 
모든 개인들에게서 그 구조는 연약한 조직과 제한된 지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경험에 의해 닳고 그 기능의 반복에 의해 피폐된다. 
사회에서는 그 구성원들은 세대마다 새로와지고 인류가 영구한 젊음과 누적된 이익들을 향유하기 때문에 우리는 햇수나 세월의 길이와 관련된 저능함을 발견하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

퍼거슨은 사회의 단일성, 다양성 모두를 강조하였다. 
사회의 진화는 목적적인 것이 아니다. 
그럭저럭 꾸려 가는 사회는 인간행동의 결과이지만, 어떤 인간의 설계의 실행은 아니다. 
각 사회는 교환의 준비가 되어 있을 때에만 다른 사회로부터 관습을 차용한다. 
사회진화는 선형적인 것이 아니라 순환적인 것이다.
퍼거슨은 왜 국가들이 종종 번성하게 되는 것을 멈추는가 하는 점을 묻고 있지만, 미덕의 쇠퇴가 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만족스런 설명도 제시하지 않았다. 
미덕은 투쟁의 시기에 활성화되며, 목표들이 달성되면 악에 굴복한다.

퍼거슨은, 약 1세기 반이 지나 짐멜이 말한 것처럼, 사회갈등이 장점을 가지고 있으며 필수적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창조물과 결코 투쟁하지 않은 자는 인류의 정서를 잘 모르는 것이다." 
인간은 적극적으로 갈등을 즐기며, 대립의 기회를 기쁘게 포용한다. 
공격은 활기를 돋구어 준다. 
전쟁은 시민사회의 응집에 이바지한다. 
이러한 응집이 없으면 사회는 형성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적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적의를 인정하지 않고 그들 사이에 일체감만 있다고 기대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리고 "강철에 불을 붙일 때 부싯돌이 필요한 것처럼, 아테네는 그 미덕의 행사에 있어서 스파르타에 필수적인 것이었다." 
우리는 내집단/외집단 원칙의 보다 명료한 표현을 찾을 수 있다. 
다른 문제에 대해서 콩도르세가 했던 것처럼 퍼거슨은, 생계유지수단은 인구성장을 제한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인간은 상황이 마음에 드는 곳에 모일 것이며, 몇 세대가 지나가면 생계유지수단의 정도에 따라 국민이 모이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퍼거슨은 분업에 관한 글을 썼고 그 후의 사회학자들처럼 그것의 장점과 단점을 이해하였다. 
그것은 진보에 필요한 것이고 예술적인 삶의 육성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것이다.
미개와 야만사회에서 인간은 너무 많은 일들을 해야만 했기 때문에 그것들을 모두 잘할 수는 없었다. 
분업과 함께 인간은 일들을 분리시킬 수 있게 되었고 점차 세련되어 갔다. 
보다 생산적이게 되었다. 
마르크스(그는 퍼거슨을 좋아했다)가 인식했듯이, 분업은 또한 소외를 동반한다.

따라서 분업은 축복과 저주의 양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분업은 공동체를 분리시키고 사회의 통합을 위협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 세기 후에 뒤르켐이 해결하려고 노력했던 사회문제를 만들어 낸다. 
우리는 "분업에 관한 퍼거슨의 글들은 18세기 사회학의 작은 승리이다"라고 말한 Peter Gay에 쉽게 동의할 수 있다.
우리가 퍼거슨이 사회학적인 주제에 관해 쓴 것에 관해 무엇인가를 말한다면, 우리는 작은 승리를 한 것이 아니라 주요한 부분의 하나를 얻은 것이라고 할 것이다. 
오늘날 퍼거슨에 관한 호의적인 평가가 있으며, 우리는 우리 시대의 적절한 표현으로 그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Donald MacRae가 주장했듯이, 퍼거슨이 경제학을 알고 있었다면 그것은 그의 사회학에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애덤 스미스에 있어서는 그 반대로 되어 있다. 
그의 사회학은 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1759)에서 윤리이론에, The Wealth of Nations(1776)에서 경제이론에 도움을 주었다. 
『국부론』은 경제학사에 있어서 위대한 저서 가운데 하나이다. 
그의 경제학은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자유방임 자본주의를 위한 기초를 설정해 주었고, 비록 즉각적이지는 않았지만 사회과학으로 쓰여진 가장 영향력 있는 책의 하나가 되었다.

심지어 독일인들이 '애덤 스미스의 문제'라고 부르는 것을 형성하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그의 윤리이론이 이타주의를 지지하고 경제학이 이기주의를 지지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저녁상은 푸줏간, 양조장, 빵집의 자선이 아니라 그것의 이익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사회학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분업에 관한 초기의 글을 제외하고는 전적으로 경제학에 속하는 것이다.

18세기의 스코틀랜드를 말할 때 John Millar를 언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충분한 것이 될 것이다. 
그는 1735년 6월 22일 Edinburgh의 Glasgow 동부에서 몇 마일 떨어진 Kirk o'Shotts에서 태어났다. 
11세에 Glasgow의 대학에 입학하여 6년 동안 공부한 후, 후에 친밀한 친구가 된 애덤 스미스의 강의에 참여하였다. 
1760년에 법관이 되었고 1761년에 Glasgow 대학의 민법교수가 되었다. 
1801년 5월 30일 사망할 때까지 40년 동안 유명한 교수로서 지냈다.

그의 생애 동안에는 광범위하게 칭송되다가 잊혀진 두권의 책이 최근에 사회학에 중요한 공헌을 한 것으로서 재발견되었다. 
첫번째 책은 "An Inquiry into the Circumstances Which Give Rise to Influence and Authority in the Different Members of Society"라는 교육적인 부제를 가진 The Origin of the Distinction of Ranks이다. 이 책은 1771년에 쓰여져서 4판을 찍었다. 
두번째 책은 An Historical View of the English Goverment from the Settlement of the Saxons in Britain to the Accession of the House of Stewart라는 것으로 1787년에 간행되어 7판을 찍었다.

퍼거슨의 사상처럼, Millar의 사상은 사회학적인 틀에 분명하게 들어 맞는다. 
그는 인간의 사회제도를 지배하게 된 관습, 제도 등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비록 밀라가 Lycurgus, Solon, Alfred 왕과 같은 입법자들의 공헌을 인정하고는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의 형성에 있어서 개인보다는 관습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 
몽테스키외에 대해서 그는 사회변동의 원인적인 요인으로서 기후를 강조한 것을 거부하고, 스파르타와 아테네, 스페인과 프랑스, 그리스와 터키와 같이 비슷한 위치에 있는 나라에서 나타나는 차이들은 기후가 거의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다른 시기에 같은 나라에서 나오는 국민들의 다양한 관습들은 설명하지 못하며, 국민성은 기후의 직접적인 작용에 거의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었다. 
밀라는, 인간들 사이의 불평등의 원인은 능력과 성취에서의 차이, 우수한 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결코 이 불평등을 제거하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사실 계급 없는 사회는 헛된 희망에 불과하다. 
상위계급은 기생적이긴 하지만 지도력의 자질을 가지고 있고, 하위계급은 우둔하나 부지런한 지능을 부여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밀라는 분업에 관하여 통찰력 있게 글을 썼고 그것의 과도함이 인간정신에 미치게 되는 효과를 인식하였다. 
그는 19세기에 앞서서 사냥, 목축, 농업, 상업의 사회진화의 4단계 과정을 예견하였다. 
사회에는 무지로부터 유식으로, 거친 것으로부터 세련으로 발전하는 자연적인 진보가 있고, 그것은 저항될 수도 없고 너무 빠르게 될 수도 없는 단일한 과정이다.

밀라는 이름은 없어도 모든 면에서 사회학자인 것이다. 
Robert M. MacIver는 그를 독창적인 사상가이자 사회학의 개척자로 불렀다.11) 
그는 계몽화된 그의 동시대인들의 反교회적인 정서를 완전하게 공유하고 있었고, 스코틀랜드의 Augustan 시대의 지도력 있는 인물 중의 하나였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