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만조선 , 衛滿朝鮮.
위만(衛滿)이 집권한 이후 멸망할 때까지의 고조선(古朝鮮).
위만조선은 한의 대군과 맞서 1년 가까이 버틸 수 있을 정도로 철기문화와 이를 기반으로 한 군사력이 강하였다.
이 당시의 부장품으로 압도적으로 많이 발견되는 것이 실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단검·창·도끼들이며, 또한 전차로 추측되는 거여구(車輿具)라는 점에서 이 당시에 고조선사회가 정복전쟁이 잦았고 지배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위만 집권기에는 철기문화의 보급이 한층 진전되면서 농업과 수공업이 더욱 발전하였고, 대외교역도 확대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발전을 기반으로 정치적 통합도 한 단계 진전되어 나갔다.
이 당시 고조선사회는 이미 상당한 정도의 계급분화가 진척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노비제도의 존재와 사유재산에 대한 법적 보호조처를 보여주는 팔조금법(八條禁法)에서 대표적으로 확인된다.
이를 통해 위만조선의 사회구성은 노비·촌락의 일반민·귀족으로 대별됨을 알 수 있다.
귀족은 노예와 토지·재화 등 자신의 경제적 기반을 따로 지니고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촌락공동체를 대표하는 수장으로서의 면모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노비는 이 시기에 상당수 존재하였으나 많은 수의 노비를 사역하는 대규모의 노비경영은 발달하지 않았다.
이는 노예제 경영이 발달된 사회에서 보이는 상품화폐경제의 진전이나 큰 도시의 발달 등의 면모가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촌락공동체의 일반민은 기본적인 생산활동을 담당했는데, 이들은 지역의 경제발전 상태에 따라 그 존재 양태가 균일하지 않았고, 경제적 상태와 피수탈 정도에서 차이를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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