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22일 금요일

삼일운동, 三一運動.

삼일운동, 三動.

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일어난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
시기 ▶ 1919년 3월 1일
사건 장소 ▶ 서울 종로에서 시작
참가자 ▶ 조선의 남녀노소 모두
사건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 독립을 위한 평화로운 대규모 만세 운동
해외의 반응 ▶ 정말 위대한 운동이군. 코리아 파이팅!
역사적 중요도 ▶ ★★★★☆
시험 출제 빈도 ▶ 높음
3·1운동은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지 지배에 대한 민족의 저항으로 일어났다. 
1918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났습니다. 1차 세계 대전은 유럽의 강대국들이 참여한 대규모의 전쟁이었어요.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도시가 파괴되었습니다.
이후 각 나라들은 세계 질서를 다시 세우기 위해 파리에서 회의를 열었어요. 그곳에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민족 자결주의를 주장했습니다.
민족 자결주의는 세계의 민족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지요.
일본은 조선을 강점한 뒤 군사력을 배경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각 분야에서 폭력적인 억압과 수탈을 자행하는 무단통치()를 실시했다. 헌병경찰제도를 실시해 수많은 항일운동가들을 학살·투옥하고 모든 형태의 반일 활동을 탄압했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기본적인 정치적 권리와 자유도 누리지 못하게 했으며, 조선태형령()으로 가벼운 죄에도 가혹한 신체적 처벌을 가하여 인권을 유린했다. 또한 토지조사사업과 회사령 등으로 민족 산업의 발전을 억압하고 경제적 수탈을 자행하였다. 
1910년대에 지속적으로 나타난 이러한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약탈로 농민을 비롯한 민중의 생활은 크게 악화되었으며,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분노와 저항의지가 높아졌다.
1919년 1월 18일 고종 황제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했어요.
이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고종 황제가 일본인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러한 의문이 제기된 것을 계기로 우리 민족은 3.1 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했어요.
1919년 3월 3일 고종의 장례식 이틀 전에 민족적인 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한 거예요.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 속에서 민족운동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고,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는 주체적인 여건을 준비하였다. 
1910년대 국내의 항일민족운동은 크게 세 가지 흐름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첫째는 독립전쟁론의 관점에 기초해 무장조직의 결성과 지원을 목적으로 했던 비밀결사운동이다. 
대한독립의군부, 민단조합, 광복회, 조선국민회 등의 비밀결사가 각지에서 결성되어 군자금 모금과 무기구입 등을 추진했다. 많은 조직들이 일제에 발각되어 파괴되었지만, 이들의 활동은 3·1운동 당시 각지에서 나타난 비밀결사의 모체가 되었다. 
둘째는 실력양성의 관점에 기초해 종교단체와 학교 등을 중심으로 전개된 교육·문화운동이다. 1910년대에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각지에 설립된 사립학교, 서당, 야학 등은 3·1운동 당시 각 지역에서 항일운동을 조직하는 거점이 되어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셋째는 일제의 경제수탈에 대한 농민·노동자의 생존권 수호운동이다. 농민들은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토지조사사업 반대투쟁, 삼림정책 반대투쟁, 각종 조세 반대투쟁 등을 벌였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주재소나 면사무소 등 일제의 통치기구를 공격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노동자들도 민족적 차별대우와 장시간 노동, 저임금 등 열악한 노동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이러한 농민·노동자의 투쟁양상은 3·1운동에서도 항일운동으로서의 성격을 강화하여 나타났다.
이처럼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지 지배에 대한 분노가 3·1운동이 폭발적으로 나타나게 된 기본 동인이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전후로 한 국제정세의 변화도 3·1운동이 일어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쟁탈전의 성격을 지닌 제1차 세계대전이 독일을 비롯한 동맹국의 패전으로 끝나면서 열강 간의 힘 관계가 재조정되어 국제 정치의 큰 변화가 나타났다. 
독일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오스만제국 등에서 전제국가가 무너지고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수많은 국가들이 독립하여 새로 탄생하면서 민족주의가 고조되었다. 
1917년 러시아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일어나 제정 러시아 치하의 피압박 민족들에게 민족 자결의 원칙을 선언하면서 식민지 민족운동들에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력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1918년 1월에는 미국의 윌슨 대통령도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여 세계의 식민지 약소민족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에 즈음하여 나타난 이러한 새로운 시대 분위기는 국내외에서 항일민족운동의 기운을 고조시켰으며, 특히 민족주의자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의한 베르사유 체제의 성립을 ‘세계 개조의 신시대’로 인식하면서 독립에 대한 민족의 열망을 환기시켜 열강의 도움으로 독립을 이루려고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 정세가 재편되는 상황에서 국외의 항일운동세력은 국제 사회에 일제의 조선 강점의 불법성과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널리 알리기 위한 활동을 준비하였다.

상하이[]에서는 1918년 6~7월 무렵부터 여운형(김규식(장덕수()·김철()·선우혁(서병호(한진교(조동호() 등이 신한청년당()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이들은 그 해 11월 28일 윌슨 대통령의 특사로 중국에 온 크레인(Charles R. Clane)에게 독립청원서를 전달하였다. 
1919년 1월에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평화조약을 협의하기 위해 개최된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했고, 여운형은 만주와 연해주로, 선우혁·김철·서병호, 김순애() 등은 국내로, 장덕수는 일본으로 건너가 각지의 인물들과 협의하여 대규모 독립운동의 추진을 준비하였다.

미국에서는 1918년 12월 안창호() 등이 조직한 대한인국민회()가 중앙총회를 열어 이승만()·민찬호()·정한경() 등 3인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기로 결의하였다. 
미국이 출국을 허가하지 않자 1919년 2월 25일 이승만은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을 일본의 학정에서 구할 것, 장래 조선의 완전 독립을 보증할 것, 조선은 당분간 국제연맹의 통치하에 둘 것 등의 3개조로 된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였다.

만주와 연해주에서는 1918년 12월 조소앙()이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해 여준(김좌진(황상규(박찬익()·김교헌()·안창호·김규식 등 39명의 서명을 받아 이듬해 2월 1일 이를 발표하였다. 
음력으로 무오년()에 작성되어 ‘무오독립선언()’이라고도 불리는 ‘대한독립선언서’는 무장투쟁으로 완전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며 독립군의 궐기를 촉구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1919년 1월 조선인 유학생 학우회가 도쿄[]의 YMCA회관에서 웅변대회로 꾸며 모임을 갖고 최팔용()·김도연(백관수(서춘(椿) 등 10인을 상임위원으로 선출해 독립선언을 준비하였다. 
이들은 각지의 독립운동가들과 연계를 맺기 위해 송계백()과 이광수()를 국내와 상하이로 파견하였고, 2월 8일 유학생대회를 열어 민족대회소집청원서와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2·8독립선언서’는 일제의 국권강탈을 고발하고 독립운동으로 건립될 국가는 민주주의에 입각한 신국가임을 명시하였다.

국내에서도 1918년 말부터 국내의 천도교와 기독교 계통의 민족주의자들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윌슨의 14개조 강화원칙에 포함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독립 요구를 위한 운동을 계획하였다. 
상하이, 미국, 도쿄 등지에서의 독립운동 소식이 전해지면서 국내 운동의 준비를 본격적으로 논의하였다. 
신한청년당의 선우혁은 이승훈(양전백()·길선주() 등 평안도 지역의 기독교 지도자들과 만나 국외 독립운동의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송계백도 최린()을 통해 도쿄 유학생들의 소식을 손병희(최남선(송진우() 등에게 전했다. 
천도교와 기독교, 학생들은 처음에는 각기 운동을 계획하다가 1919년 2월부터는 함께 협의하였고, 여기에 한용운() 등의 불교계 인사가 가담했다. 
학생들은 1919년 1월부터 민족대표들과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운동을 계획하였으나, 2월 하순 박희도()와 이갑성()에게 종교계의 계획에 합류할 것을 요구받고 일단 민족대표들의 계획에 합류한 뒤 3월 5일에 다시 서울에서 독자적으로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했다. 
그 결과 2월 18일까지 독립선언서와 일본 정부에 보낼 독립통고서 등이 작성되고, 2월 27일에는 독립선언서가 인쇄되어 각 종교의 교단 조직을 통해 사전에 배포되었다. 
민족 대표 33인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은 3월 1일 태화관(서울 인사동의 요릿집) 앞에서 독립 선언을 낭독했습니다.
같은 시간 서울 종로의 탑골 공원에서는 학생들과 시민들이 독립 선언식을 올리고 만세 시위를 벌였어요.
2.8 독립 선언 후, 독립운동가들은 종교계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33인의 민족 대표를 뽑았어요.

전개 과정

민족 자결주의가 발표되자,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호소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 이즈음 해외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도 속속 국내로 들어오기 시작되었다.
민족 자결주의가 발표된 후, 1919년 2월 8일 일본의 도쿄 한복판에서 한국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 선언을 외쳤어요.
국내의 독립운동가들은 일본에 있는 우리 유학생들이 벌인 2.8 독립 선언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3·1운동은 수개월 동안 지속되었으며 도시 등 교통이 발달한 곳을 중심으로 시작되어 농촌 등지로 전파되며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갈수록 참여하는 인원과 계층이 늘어나면서 운동의 양상도 비폭력 시위에서 폭력투쟁으로 발전하였다. 
국외로도 확산되어 만주, 연해주, 도쿄, 오사카, 필라델피아 등에서도 독립시위가 벌어졌다.

3·1운동의 전개 과정은 크게 3단계로 구분된다. 1단계(점화기)에서는 서울을 비롯해 평양·진남포·안주·의주·선천·원산 등의 주요 도시에서 독립선언서가 배포되어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는 비폭력 투쟁을 특징으로 했으며, 학생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3월 10일을 전후로 한 2단계(도시확산기)에 운동은 전국의 주요 도시들로 확산되었으며, 상인과 노동자들도 철시와 파업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3월 중순 이후의 3단계(농촌확산기)에는 도시뿐 아니라 농촌에서도 시위가 일상화하였다. 
농민 등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시위의 규모도 커졌으며, 시위의 양상도 몽둥이와 죽창 등으로 무장하여 면사무소와 헌병 주재소 등을 습격하는 폭력투쟁으로 발전하였다. 
3월 하순에서 4월 상순까지의 시기에 전체 시위의 60% 이상이 일어날 정도로 운동은 최고조에 이르렀는데, 그 가운데 절반 정도가 폭력투쟁으로 나타났다.

3월 1일에 미리 계획했던 대로 서울과 평양·의주·선천·안주·원산·진남포 등 6개 도시에서 동시에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식의 거행장소를 군중들이 모여 있던 탑골공원에서 서울 인사동의 태화관()으로 일방적으로 변경하였다. 
3.1 만세 운동은 도시에서 시작해 농촌으로 빠르게 퍼져 나가 5월까지 이어졌습니다.
3.1 만세 운동을 처음 시작할 때는 학생과 지식인, 종교인들이 주축이 되었어요.
하지만 이후에는 농민이나 노동자들도 참여하게 되었답니다.
3.1 운동의 열기는 해외까지 퍼져 나갔습니다. 만주, 연해주, 미국 일본 등 다양한 나라에서 만세 시위에 동참했어요.
33인의 민족 대표들은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하기로 했습니다. 학생들은 군중 동원과 시위, 독립선언서의 배포 등의 계획을 준비하였다.
민족대표 33명 가운데 29명은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 모여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서영환()을 통해 독립통고서를 조선총독부에 전달했다. 그리고 오후 3시 한용운()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에 일본 경찰에 통고하여 스스로 체포되었다. 
탑골공원에 모여 있던 학생들은 장소 변경에 당황하여 강기덕 등을 민족대표들에게 보내 항의하기도 했으나, 2시 30분 무렵에 따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두 갈래로 나뉘어 종로·서울역·정동·이화학당·서대문 등을 행진하며 시위를 벌였다.

3월 2일에는 함흥·수안·황주·중화·강서·대동·해주·개성 등 천도교와 기독교의 조직력이 강한 평안도·함경도·황해도의 주요도시들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3월 3일에는 고종의 장례식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모였고, 이들 가운데 많은 수가 시위운동에 참가했다. 
서울의 학생들은 원래의 계획대로 3월 5일 남대문역 광장에서 만세시위를 벌였고, 평양과 광주 등의 학생들도 결사대를 조직해 이에 참여했다. 이 날의 시위는 고종의 장례식을 참관하고 지방으로 돌아가는 참배객들에게 운동의 지속성을 전파하여 3월 중순 이후 각 지방으로 시위운동이 확산되는 데 큰 구실을 하였다.

3월 10일 이후에는 시위가 경상도·전라도·강원도·충청도 등 중남부 지방으로 확대되어 전국적 규모로 확산되었는데, 이 과정에는 교사와 학생 등 지방 사회의 지식인들이 중요한 구실을 했다. 이들은 선언서 등의 각종 유인물과 시위 경험을 각 지역에 전파했으며, 비밀결사와 결사대를 조직해 시위를 조직하고 주도하였다. 
청년과 학생들이 주도한 비밀결사는 전단과 격문 등을 제작·배포하여 투쟁열기를 높였는데, 일부 지역에서는 지방신문을 만들어 민족의 총궐기와 결사항쟁을 촉구하기도 했다. 
3·1운동 당시에 발간되었던 신문은 <조선독립신문>, <노동회보>, <반도의 목탁>, <충북자유보>, <혁신공보>, <각성호외보>, <광주신문>, <강화독립회보> 등 30여 종에 이르며, 이 가운데 <조선독립신문>은 27호까지 만들어지기도 했다.

운동 수감자의 계층 분포
3·1운동 본문 이미지 2

3·1운동의 전국적 확산에 큰 역할을 했던 청년과 학생들은 독립청원이라는 대외의존적인 태도를 지녔던 민족대표들과는 달리 민족의 주체역량으로 독립을 쟁취할 것을 주장했다. 이들의 노력으로 운동은 3월 중순 이후 농촌 지역으로 확산되었으며, 노동자·농민·중소상공인 등 각계각층의 민중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민중운동으로 발전되었다.

서울에서는 3월 5일에 앞장섰던 학생들이 대거 검거되면서 일시적으로 소강상태에 빠졌으나, 3월 4일에 시작된 평양과 선천의 철시투쟁에 이어 3월 9일부터 서울 시내의 주요 상점도 철시를 하면서 상인들도 항일투쟁에 나섰다. 3월 20일 무렵부터는 노동자들의 궐기를 호소하는 <노동회보>가 배포되었고, 3월 22일에는 남대문 앞에서 노동자대회가 개최되었다. 그 날부터 시내 곳곳에서 야간시위가 계속되었으며, 3월 26일에는 경성철도와 전차 노동자들도 파업을 벌였다. 이러한 노동자의 항일시위는 고양·부천·시흥·김포 등 주변 농촌 지역의 시위를 촉발시켰다.

농민 시위는 주로 장날에 일어났는데, 시위 주동자들은 각 마을로 통문을 돌리거나 전단을 살포하여 미리 시위 계획을 알렸다. 장을 돌아다니는 행상들은 각지에서 벌어지는 시위의 경험을 전하는 구실을 하기도 했다. 과거 의병투쟁이 활발했던 지역에서는 산상봉화시위나 횃불시위 등을 벌이기도 했으며, 떼를 지어 며칠씩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시위에 참가하는 ‘만세꾼’이 등장하기도 했다.

운동이 발전될수록 투쟁 목표가 구체화되고 조직화되었으며, 비폭력적인 만세시위운동에서 계획적이고 공세적인 폭력투쟁으로 진전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폭력투쟁은 일제의 탄압에 대한 방어적인 대응으로 나타난 것도 있었지만, 일제의 권력기관에 대해 계획적이고 공세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 헌병의 총격 등으로 시위가 강제로 해산되면 군중들은 몽둥이와 죽창 등으로 무장하여 헌병 주재소와 면사무소, 우편소, 금융조합, 일본인과 친일인사의 집 등을 파괴하고 각종 수탈용 장부와 무기를 빼앗아 소각하는 등 무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일제의 권력기관을 접수하려 나서는 경우도 있었는데, 강원도 통천에서는 총검으로 무장하고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특히 국외독립운동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평안도와 함경도 등 북부지방에서 이러한 경향이 강했는데, 간도·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세력은 3·1운동 당시 국내진공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일제는 3·1운동을 무력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했는데, 화성 제암리·천안 아우내·정주 곽산·남원 광한루·익산 이리 등 전국 각지에서 시위대에 총격을 가하는 등 학살을 저질렀다. 그리고 시위자들을 체포하여 가혹한 고문을 서슴지 않았다. 당시 일제의 통계에 따르면 3·1운동 이후 3개월 동안 시위진압과정에서 7,509명이 사망했으며, 15,961명이 상해를 입었다. 46,948명이 구금되었고, 교회 47개소, 학교 2개교, 민가 715채가 소각되었다.
3·1운동 본문 이미지 1

3·1운동은 지식인과 학생뿐 아니라 노동자, 농민, 상공인 등 각계각층의 민중들이 폭넓게 참여한 최대 규모의 항일운동으로 독립운동사에서 커다란 분수령을 이루었다. 
그것은 나라 안팎에 민족의 독립 의지와 저력을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독립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넓혀 독립운동을 체계화·조직화·활성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민중들은 3·1운동에 참여하면서 민족의식과 정치의식을 높일 수 있었으며, 이는 1920년대에 다양한 사회운동과 조직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3·1운동은 일제의 식민통치에도 커다란 타격을 가해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바꾸게 하였으며, 중국의 5·4운동과 인도 간디의 비폭력·불복종 운동, 이집트의 반영자주운동, 터키의 민족운동 등 아시아와 중동 지역 민족운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일제는 물리적인 폭압만으로는 3·1운동으로 분출한 민족의 저항의지를 막을 수 없었으므로 형식적이나마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일부 완화하여 문화통치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이는 가혹한 식민통치를 은폐하고 친일파를 육성하여 민족운동을 분열시키기 위한 기만책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3·1운동은 운동의 과정을 통일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조직체가 없었기에 지역과 계층에 따라 투쟁의 형태와 강도를 다르게 한 채 분산적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민족대표는 독립청원의 방식에 주력하여 타협적인 태도를 벗어나지 못했고 결국 광범위하게 일어난 민중들의 항일투쟁을 이끌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지니지 못했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전체 독립운동을 통일적으로 이끌기 위해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며, 국내에서는 1920년대 전반기에 민중의 투쟁력을 조직화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3·1운동은 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법을 체계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종교계의 민족주의자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희망을 걸고 주체역량보다 외세에 의존해 독립을 얻으려 했다. 그들은 서구 문명국들의 동정을 얻을 수 있다는 이유로 ‘비폭력’을 절대적인 전제로 내세웠고, 일본 정부에 독립의 취지를 건의하여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적절하다며 독립청원의 방식에 의존했다. 
3·1운동의 경험을 통해 민족의 주체역량에 기초해야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실력양성과 무장투쟁이 독립운동의 방법으로 체계화하였다. 
왕조의 회복을 목표로 한 복벽주의()가 청산되고 민주공화제가 독립국가의 목표로 자리를 잡았다. 지식인과 청년 학생들 사이에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이 확대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3·1운동 수감자의 계층 분포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유학생들이 도쿄에 모여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는 2 · 8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와 2 · 8 독립 선언서의 영향으로 3 · 1 운동이 전개되었다. 
1919년 3월 1일 민족 대표 33인은 태화관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였고, 탑골 공원에서는 학생과 시민들이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만세 운동은 전국과 해외로 확산되었으나 일본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실패하였다.
1919년 3월 3일 고종 장례식에 맞춰 전국에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만세를 부른 사건. 1918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미국 대통령 윌슨은 ‘각 민족은 스스로 민족의 운명을 결정해야 한다’는 민족 자결주의를 주창하였다. 

1910년대의 국제 정세 살펴보기

제1차 세계 대전(1914~1918년)

일제의 강압적 통치가 계속되던 때 서양의 여러 나라는 편을 나누어 전쟁을 벌였습니다.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

* 뜻 : 각 민족은 외부의 간섭을받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 윌슨의 주장 :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전쟁에서 패한 나라들의 식민지 국가들이 독립을 하는 데 근거가 된 민족 자결주의를 주장하였습니다.
* 영향:우리나라의 3·1 운동을 비롯하여 약소 민족의 독립운동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운동의 시작

운동의 배경

* 국외
-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주장한 민족 자결주의는 우리 민족에게 독립에 대한 희망을 주었음.
- 일본에서는 한국인 유학생들이 독립 선언식을 함.
* 국내
- 고종 황제의 독살설이 퍼져 일제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있었음.
- 민족 지도자들은 고종 황제의 국장일(3월 3일)이 결정되자 많은 사람들이 서울에 모일 것을 예측하고, 전국적인 만세 운동을 벌이기로 함.

3·1 운동의 전개

* 1919년 3월 1일, 각 종교계의 지도자들로 구성된 민족 대표들은 서울의 태화관에서 독립 선언식을 하였습니다.
* 같은 시각, 수천 명의 학생과 시민은 탑골 공원에 모여 독립 선언식을 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시위를 벌였습니다(3·1 운동, 1919년).
3·1 독립 선언서 
우리는 여기에 우리 조선이 독립된 나라인 것과 조선 사람이 주인임을 선언하노라. 이것을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평등하다는 큰 뜻을 밝히며,이것을 자손만대에 일러 우리 민족이 독자적으로 생존할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하노라. ─ 독립 선언서의 내용(일부)
3 · 1 운동이 조선과 주변국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1910년대 일본 식민 정책인 무단 정치가 문화 정치로 바뀌었다. 그리고 독립 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할 필요성을 인식하여 상하이에 대한 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고, 무장 항일 운동의 필요성으로 만주에서 1920년대 독립군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또한 중국의 5 · 4 운동, 인도의 무저항 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지도로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으로, 1919년 5월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인 독립운동으로 확산·전개되었다. 연 집회횟수 1542회, 집회 참여인원 200여 만명을 기록하며 평화적 시위를 전국적으로 전개하였으나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사망 7,500여 명, 부상 1,600명, 피검 47,000여 명의 희생을 내고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3·1운동의 목적은 국권회복과 민족자주에 있었기 때문에 3·1운동이 비록 일제의 무력탄압으로 그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하였다 하더라도 역사적, 민족사적으로 우리의 의사를 평화적으로 국내외에 개진하였다는 중요한 의의를 남기고 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된 후 일본은 독립운동가 검거, 언론 폐쇄, 종교 탄압, 신사참배 강요, 군대식 제복 착용 등 무단통치를 시행하였다. 그러나 1918년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자 우리 민족 지도자들도 민족의 독립을 대내외에 요구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때 고종이 갑자기 별세하자 일제가 독살하였다는 소문이 퍼져 온 국민은 망국의 설움과 일제에 대한 적개심으로 크게 동요하였고, 이 기회를 이용하여 1919년 3월 1일을 기해 서울의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하여 독립선언문이 낭독되고, 탑골공원에서는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민족 대표 33인 
* 독립 선언문에 서명한 사람들을 말하며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 종교계 지도자들로 구성되었습니다.(예 : 손병희, 한용운)
*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 모여 한용운이 독립 선언서의 낭독을 끝내자 만세 삼창을 한 후 경찰에 알리고 스스로 체포되었습니다.
1910년 국권상실 이래 지하에서 비밀리에 독립사상을 고취하며 독립운동의 기회를 찾고 있던 민족 지도자들이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원칙 발표, 고종의 별세 등이 한데 겹쳐 민족적 항일의식이 고조되자 이때가 우리 민족이 독립할 가장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게 되었다.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은 곧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1919년 5월까지 줄기차게 계속되었고, 진주 지역에서도 김재화()를 비롯하여 강달영()·정준교()·심두섭()·이강우() 등 열혈청년들에 의하여 의거가 준비되고 있었다. 이들은 이미 2월 말 고종황제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하였다가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이 벌어지는 모습을 직접 보고는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가지고 일제의 감시를 피해 진주로 내려와 3월 10일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유인물로 만들어 인근의 각 면과 동리에 돌리고, 거사일을 장날인 3월 18일로 정하였다. 이들은 진주를 3개 지구로 나누어 군중을 동원하고 거사 당일 정오 비봉산 위에서의 나팔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계획을 세웠다. 이리하여 18일 정오 3개 지구에 모였던 군중들이 일시에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시가행진을 하였으며, 학생들이 감추고 있던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일시에 뿌리니, 독립만세 함성이 진주 시가지에 울려 퍼지게 되었다. 이 결과 오후 4시경 군중은 1만 여명으로 늘었고, 일본 헌병과 경찰은 시위 주동자 검거에 나서서 약 300명이 체포되었다. 시위운동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19~21일까지는 진주시내에서, 22일은 수곡면 창촌리, 25일과 31일은 문산읍 소문리, 4월 3일은 일반성면 창촌리에서 각각 있었으며, 4월 18일에는 호송되는 만세운동 주동자를 구하려고 시위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밖에도 진주에서는 노동독립대·걸인독립대·기생독립단 등 각계각층의 시위가 있었다. 특히 3월 19일에는 한금화()를 비롯한 진주기생들이 태극기를 선두로 촉석루를 향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다 일본 경찰에 의하여 주동자 6인이 체포되기도 하였으며, 5월에는 유림들의 독립항쟁이 일어났다.
진주 지역에서는 5월까지 약 20회에 걸쳐 3만여 명의 인원이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 이 같은 진주의 독립만세운동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받아 실패로 돌아갔으나 진주는 항일의식이 강한 지역이어서 의거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층민부터 상류층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각 급 학교 학생은 물론이고 기생, 걸인에 이르기까지 두루 참가하였다는 특색을 지니고 있다.
진주의 삼일만세운동으로, 진주 지역은 전통적으로 불의에 대한 강한 의분과 일제 침략자에 대한 뿌리 깊은 저항의식과 독립정신이 어느 지방보다도 강렬했고 끈질기게 작용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일제의 탄압

* 우리 민족은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만세 시위를 하였지만 일제는 경찰과 군인을 동원하여 만세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3)하였습니다.
* 화성 제암리에서는 일본 군인들이 마을 사람들을 교회에 몰아넣고 총을 쏘아죽인 뒤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하였습니다.

만세 시위의 확산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만세 시위는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고, 만주, 연해주, 미국 등 해외에서도 일어났습니다.

3·1 운동의 영향

* 우리 민족에게 독립에 대한 희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세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우리나라와 같은 처지에 있는 나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습니다.
* 신분, 직업, 종교의 구별 없이 모든 계층이 참여한 전 민족적인 항일 운동이었습니다.
* 우리 민족이 자주독립의 의지를 다지고 이후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갈 수 있는 정신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 식민지 상태에 있던 아시아 각국의 민족 운동에 큰 자극을 주었습니다.

유관순이 만세 시위를 벌인 이유?

유관순의 3·1 운동 참여

이화 학당에 다니고 있던 유관순은 3·1 운동이 일어나자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습니다.

만세 시위 주도

* 휴교령이 내려진 이후, 유관순은 고향인 충청남도 천안으로 내려가 마을 사람들에게 서울에서 만세 시위가 벌어지고 있음을 알리고 함께할 것을 권유하였습니다.
*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이자 유관순은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습니다.

서대문 감옥 수감

* 일제의 헌병 경찰에게 체포된 유관순은 법정에서도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다 서대문 감옥으로 이송되었습니다.
*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도 큰 소리로 “대한 독립 만세!” 를 외쳤고, 그때마다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 유관순은 감옥에서 저항하다가 19세의 어린 나이로 순국하였습니다.

독립 선언

3·1 운동이 일어나는 데 영향을 주었던 일본 유학생들의 독립 선언은 어떻게 발표되었나요?

* 독립 선언을 주도한 일본의 한국인 유학생
- 조선 청년 독립단:일본에서 공부를 하던 한국인 유학생들이 조직한 단체로, 2·8 독립 선언을 주도하였습니다.
- 2·8 독립 선언: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 유학생들이 조선 청년 독립단의 이름으로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선언서와 결의문을 발표하였습니다.
* 2·8 독립 선언의 의의 : 2·8 독립 선언의 소식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3·1 운동이 일어나는 도화선으로 작용하였습니다.

참고 문헌

  • 삼일운동 [三一運動]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 『진주시사』(진주시사편찬위원회, 1995)
  • 신용하, 『삼일운동과 독립운동의 사회사』(서울대학교출판부, 2001)
  • 김진봉, 『삼일운동사연구』(국학자료원, 2002)
    삼일운동 [三一運動]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재직자 임금 체불도 '소액체당금'

재직자 임금 체불도 '소액체당금'

고용부, 저소득 노동자부터 단계적 확대
지원한도 1천만원으로↑ ...처리기간 단축
"노동자 실질적 생계비 보장에 중점"
앞으로 가동 중인 사업장의 재직자도 임금 체불을 당할 경우 소액체당금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지원 상한액도 400만원에서 1000만원으로 확대한다. 고용노동부는 17일 이같은 내용을 담은 임금체불청산 제도 개편 방안을 발표했다.

체당금이란 사업장 도산으로 임금을 못 받은 노동자에게 국가가 사업주 대신 지급하는 돈이다. 국가는 체당금을 지급하고 사업주를 상대로 구상권을 행사해 돈을 회수한다.

이번 개편안은 노동자 임금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데 중점을 뒀다. 노동자들의 체불임금을 더 빠르고 더 쉽게 받도록 제도를 개편하되, 악의적 체불 사업주의 형사 책임을 강화했다.

개편안은 지원 대상을 확대했다. 기존에는 도산하거나 가동 중인 사업장의 '퇴직자'에게 지원됐지만 앞으로 가동 중인 사업장의 '재직자'까지 확대 적용하기로 했다. 다만 오는 7월부터 최저임금 수준 노동자이면서 가구소득이 중위소득의 50% 미만인 저소득 노동자에 적용되고, 2021년 7월부터는 가구소득과 관계없이 최저임금 120% 수준인 노동자까지 단계적으로 확대된다. 

지원 한도도 오는 7월 400만원에서 1000만원까지 확대된다.

지급 절차는 간소화된다. 소액체당금은 체불사실 조사 및 자체청산 지도 후 체불확인서가 발급되면 법원의 확정판결 절차 없이 바로 지급, 처리기간이 7개월에서 2개월로 줄게 된다.

도산 사업장의 퇴직 체불노동자에 지급되는 일반체당금 상한액도 오는 2020년 1800만원에서 2100만원으로 인상된다. 

사업주의 도덕적 해이 및 부정수급을 막기 위한 제도적 장치도 마련한다.

변제금을 국세체납처분 절차에 따라 강제징수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여 변제금을 신속·효과적으로 회수한다. 특히 법인 사업장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실질사업주(자연인)이 위장 폐업 등의 방법으로 변제금 납부책임을 회피하지 못하도록 실질 사업주에게도 변제금 2차 납부 의무를 부과하기로 했다. 다만 헌법상 재산권 보장, 최소침해 원칙 등을 고려해 실질사업주의 책임범위는 필요 최소한으로 제한했다.

체당금 부정수급이 적발되면 체당금의 최대 5배 이하 금액(현행 부정수급액의 2배→5배)을 추가 징수하는 등 제재도 강화했다. 임금 지급 여력을 숨기기 위해 고의적인 재산을 은닉하거나 부도 처리, 위장 폐업 등 악의적으로 재산을 처분할 경우 5년 이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 벌금 등으로 법정형을 상향했다. 지급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체당금을 악용해 체불을 해결하지 못하도록 부과금 제도 도입했다.


고용부가 임금체불 노동자의 생계 보장을 위해 저소득 재직자 소액 체당금 지원 개편안을 발표했습니다.

‘체당금 제도’. 정부가 체불된 임금을 근로자에게 선지급하고 사업주에게 금액을 청구하는 제도. 
일반체당금 상한액 1800만원->2100만원까지 인상(2020년). 소액체당금 상한액 400만원->1000만원 인상(올 7월부터) 

자격대상 - 최저임금 수준, 가구소득 중위소득 50%미만인 자부터... 2021년에는 최저임금의 120%수준인 근로자로 확대. 

퇴직자 뿐 아니라 재직자에게도 적용. 확정 판결 없이 체불임금 확인원만 가지고 바로 신청가능 

국내 체불임금 규모. 2012년 1조1771억원->작년에는 1조6472억 원. 매년 1천억 원씩 늘어...다른 나라의 3배.

우리들은 임금이 체불되면 노동청을 먼저 찾습니다. 
노동청은 임금체불된 근로자들의 임금을 직접적으로 받아주는 곳이 아니고 임금체불을 범죄행위로 보고 이를 근로감독관들이 조사하여 검찰에 처벌을 요구하는 기관입니다. 
경찰서와 비슷한 존재인 것이죠. 이 과정에서 간접적으로 임금체불이 해결될 수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사업주가 형사처벌을 받고 지급을 회피하는 경우 근로자들은 다시 법원에 민사소송을 제기하여 임금을 체불한 사용자 또는 법인의 재산에 청구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임금을 지급할 재산이 한 푼도 없다면? 근로자들은 임금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요원하게 되는데요. 그
래서 이러한 경우를 위해 체당금 제도가 생겼습니다. 이에 대해 설명을 드리면 고용노동부에서는 사업주의 지급능력이 없음을 확인하고 근로자의 임금체불이 확실함을 확인한 후 근로복지공단을 통해서 최대 3개월의 임금 또는 휴업수당, 3개월 치의 퇴직금을 지급하는 제도를 마련하여 근로자들에게 사용자를 대신하여 국가가 지급을 했었는데요. 체당금 제도는 나이에 따라서 그 지급금액에 상한액이 있는데요. 현재 40대 인 경우 최대 300만원까지가 최대 금액입니다. 
40대 이면서 월급이 300만원 이상인분들이 3년 이상 근무하였고 3개월 이상의 임금체불 3년 이상의 퇴직금 체불이 되었어도 300만원씩 6개월 (퇴직금 3개월, 임금3개월)해서 1800만원까지 체당금을 통해 보상이 되는 것입니다. 
2015년 7월부터 위의 체당금 제도 외에 소액체당금이라는 제도가 생겼는데요. 소액체당금은 노동부에서 체불임금 인정받은 후 법원에서 민사상 확정판결만 받으면 국가가 3개월 치 임금 또는 휴업수당, 3년 치 퇴직금의 범위에서 최대 400만원까지 지급하는 제도입니다. 
소액체당금제도가 생기면서 먼저 말씀드린 체당금제도는 일반체당금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두 가지 제도는 먼저 정부예산으로 근로자에게 밀린 임금, 퇴직금을 지급하고 그 임금채권을 국가가 양도받아 직접 국가가 사용자에게 청구하여 지급한 금액을 받게 됩니다.

정부의 주요 체당금 개편안을 소개드리면. 소액체당금 제도가 대폭 개편되었습니다. 먼저 일반체당금 상한액은 2100만원(월350) 까지 인상 (기존 1800만원), 2020년 중에 변경을 하겠다고 한 거고요. 그리고 소액체당금은 상한액을 1000만원 까지 인상 (기존400만원), 2019년 7월부터 된다고 합니다. 단, 모든 근로자가 혜택을 받는 것은 아니고 2019년 7월부터는 최저임금 수준이면서 가구소득이 중위소득 50%미만 인자부터 점차적으로 확대하여 2021년에는 최저임금의 120%수준인 근로자로 확대한다고 합니다. 
기존에는 퇴직자에게만 소액체당금을 적용하였으나 재직자에게도 적용, 기존 소액체당금은 반드시 법원의 확정판결이 있어야 신청을 할수 있었는데 확정 판결 없이 노동청의 사업주등 체불임금 확인원만 가지고 바로 신청가능하다. 기존에는 소요기간이 3개월 늦으면 6개월 정도 걸렸거든요. 이 경우 노동청에서 오케이만 해주면 되기 때문에 2개월 안에 가능해진다고 합니다. 금액과 기간 부분에서 획기적인 차이가 생기는 것

2019년 7월부터 저임금 근로자는 재직중 임금이 체불되면 국가로부터 1000만 원까지 임금을 대신 받을 수 있다. 현재는 도산으로 어쩔 수 없이 퇴직하거나 사업장이 가동 중이라도 퇴직한 경우에 한해 체불된 임금을 체당금으로 메울 수 있다. 7월부터는 가동 중인 사업장의 저소득 근로자도 임금을 제때 못 받을 경우 사업주를 대신해 국가로부터 체불임금을 지급(체당금)받을 수 있다. 

이번 개편안은 정부가 저임금 근로자의 임금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데 중점을 뒀다. 근로자들의 체불임금을 더 빠르고 더 쉽게 받도록 제도를 개편하되, 악의적 체불 사업주의 형사 책임을 강화하려는 것이다.
 
▲체불임금은 국가에서 받을 수 있다

근로자의 임금이 체불되면 국가가 대신 임금을 준다는 것은 다소 생소한 제도이다. 체당금 제도는 도산 등으로 근로자가 임금체불을 당했을 때 정부가 대신 임금을 지급하고 추후 사업주로부터 회수하는 제도다. 근로자가 기업의 도산 등으로 임금을 받지 못하면 최저생활을 하기 어렵기에 정부가 임금의 일부를 지급하여 국민의 인간다운 생활을 지원한다. 

고용노동부는 퇴직자에게만 주었던 체당금을 앞으로 재직자도 체불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임금체불 청산제도 개편 방안’을 마련했다. 고용부는 매년 임금체불 발생액과 피해 노동자가 증가하기에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해 2015년 소액체당금 제도가 도입된 이래 가장 크게 개편했다. 개편안 중 행정조치로 가능한 과제는 바로 실행하고, 법령 개정이 필요한 과제는 입법을 추진해 7월부터 시행할 계획이다. 
 
▲한국은 미국이나 일본보다 체불이 많다

고용부에 따르면 한국 체불 근로자는 전체 근로자의 1.7%로 미국과 일본의 0.2~0.6%보다 높은 수준이다. 한국 근로자의 체불액은 2012년 28만4000명에 8132억 원이었는데, 2018년에는 35만2000명에 1조6472억 원으로 늘었다. 

체불임금 근로자가 많은 업종은 제조업(39%)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은 건설업(18%), 도소매·음식숙박업(13%) 순이다. 30인 미만 업체에서 임금체불 사건의 68%가 발생했다. 이 때문에 영세업체에 다니는 근로자는 전체적으로 임금이 낮을 뿐만 아니라, 임금 체불에 따른 생계 위협에 노출되기 쉽다. 
 
▲체당금의 대상을 재직자로 확대한다

정부는 저임금 근로자의 체불임금을 조기에 해결하기 위해 체당금 제도를 대폭 확대하기로 했다. 체당금은 임금과 휴업수당, 퇴직금 등을 받지 못하고 퇴사한 근로자에게 국가가 사업주를 대신해 임금채권보장기금에서 지급하는 최종 3개월분의 임금과 휴업수당, 3년 치 퇴직금을 말한다. 국가가 체당금을 지급한 뒤 사업주를 상대로 구상권을 행사해 회수한다. 국가가 사업주에게 구상권을 행사했지만 돈을 받지 못하면 손실을 받을 수밖에 없다. 

정부는 가동 중인 사업장에서 일하고 있는 근로자에게도 소액체당금 제도를 확대 적용하기로 했다. 현재는 사업체가 문을 닫거나 가동 중이라도 퇴직한 경우에만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정부는 7월부터 재직자에게도 확대하되, 우선 올해는 최저임금 수준 근로자이면서 가구소득이 중위소득의 50% 미만인 근로자에게 우선 적용한다. 2021년 7월부터는 가구소득과 관계없이 최저임금의 120% 수준인 근로자로 확대할 방침이다. 

가구 소득이 중위소득의 50% 미만은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선정 수준이다. 그 이상 근로자는 개선안이 적용되지 않고, 2021년 7월 이후에도 최저임금의 120% 이상 근로자의 체불임금은 소액체당금으로 받을 수 없다는 뜻이다. 정부가 소액체당금제도를 개선해도 당분간 저임금근로자에게만 적용하겠다는 뜻이다. 

소액체당금 상한액을 현재 400만 원에서 2019년 7월부터는 최대 1000만 원까지 올리기로 했다. 2020년부터 도산한 사업장에서 퇴직한 체불 근로자에게 지급되는 일반 체당금의 지원한도액이 현재 1800만 원에서 2100만 원으로 오른다. 체당금은 저임금 근로자의 3개월분 임금과 3년치 퇴직금 등이기에 한도액까지 받을 근로자는 그리 많지 않지만 바람직한 조치이다. 
 
▲소액체당금은 이렇게 신청할 수 있다

정부는 소액체당금 지급 절차도 간소화했다. 지금은 지방고용노동관서에서 체불확인서를 발급받은 뒤 법원의 확정판결을 받아야 수령할 수 있다. 앞으로는 체불사실 조사와 자체청산 지도 후 체불확인서가 지방노동관서에서 발급되면 법원의 확정판결 없이 바로 소액체당금을 지급하도록 했다. 이렇게 제도를 개선하면 지급 기간이 평균 7개월에서 2개월로 대폭 단축될 것이다. 
 
▲도덕적 해이나 부정수급도 방지한다

체당금은 사업주의 도덕적 해이를 가져오고, 일부 부정수급도 일어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이에 정부는 사업주의 도덕적 해이나 부정 수급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도 마련했다. 

정부는 체당금 지급과 동시에 변제금을 신속히 회수하기 위해 국세체납처분절차를 도입하기로 했다. 현재는 민사절차를 밟아 구상권을 행사해야 하기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비용도 많이 든다. 앞으로 변제금을 국세체납처분 절차에 따라 강제징수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여 변제금을 신속·효과적으로 회수한다. 특히 법인 사업장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실질사업주(자연인)가 위장 폐업 등의 방법으로 변제금 납부책임을 회피하지 못하도록 실질 사업주에게도 변제금 2차 납부 의무를 부과하기로 했다. 다만 헌법상 재산권 보장, 최소침해 원칙 등을 고려해 실질사업주의 책임범위는 필요 최소한으로 제한했다.

또한 체당금 지급액의 일정 비율을 사업주에게 부과금으로 징수할 수 있게 했다. 지급 능력이 있는 사업주가 체당금을 악용해 체불을 해결하는 경우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임금체불 발생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체불예보시스템’도 만든다. 사업장의 체불이력, 사회보험료 체납정보 등을 토대로 사업장 체불징후를 미리 알아내 담당 근로감독관이 집중 점검할 방침이다. 임금체불 상습위반 사업주에 대해서는 노동관계법 교육을 의무화하고 사업주 대상 노동법 교육을 활성화한다.
 
▲고의적인 체불업자에게 처벌을 강화한다

정부는 체불임금에 대한 지연이자 적용대상도 재직자까지 넓히는 등 임금체불 사업주의 부당한 이익 취득도 막는다. 현재 퇴직 노동자의 체불임금에 대해서는 연 20% 지연이자를 지급해야 한다. 

체당금 부정수급이 적발되면 체당금의 최대 5배 이하 금액(현행 부정수급액의 2배→5배)을 추가 징수하는 등 제재도 강화했다. 임금 지급 여력을 숨기기 위해 고의적으로 재산을 은닉하거나 사업장을 부도처리 또는 위장폐업하는 악덕 사업주에 대한 형사처벌도 강화한다. 현재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 벌금이 5년 이하 징역 또는 5000만 원 이하 벌금으로 처벌이 강화된다. 

이번 체당금의 개선방안은 선의의 피해자를 신속하게 구제하되, 변제금을 빨리 회수하고 체당금을 악용하는 사업주 등에 대해서는 처벌을 강화하려는 것이다. 혹 임금이 체불된 근로자는 체당금을 활용하여 국가로부터 임금을일부받게되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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