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20일 수요일

한산도대첩 , 閑山島大捷.

한산도대첩 , 閑山島大捷.
유형사건
시대조선
성격전투, 해전
발생·시작 일시1592년 7월
관련장소한산섬 앞바다
관련인물·단체이순신, 원균, 이억기

경남 통영시 한산면. 임진왜란 때 한산도대첩이 있었던 곳.임진왜란 중인 1592년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물리친 싸움이다. 진주 대첩, 행주 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로 꼽힌다.
경상남도 통영시 한산면 두억리에 있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李舜臣)의 최대 전승유적지. 사적 제113호. 경상도 수군통제영(水軍統制營)이 있던 곳이다.

임진왜란 때인 1592년 7월 한산섬 앞바다에서 전라좌수사 이순신(), 전라우수사 이억기() 및 경상우수사 원균()이 거느린 조선 수군이 왜 수군의 주력대를 무찌른 해전.


1592년(선조 25) 5월 29일부터 제2차로 출동한 이순신의 수군은 6월 10일까지 사천 선창()·당포()·당항포()·율포해전() 등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육지에서는 계속 패전의 소식만이 들려왔다. 그렇게 되자 적은 해상에서도 다시 머리를 쳐들기 시작하여 가덕도()와 거제도() 부근에서 적선이 10여 척에서 30여 척까지 떼를 지어 출몰하면서 육군과 호응하고 있었다.
1592년 4월에 조선을 침략해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은 부산진과 동래성을 장악한 뒤 순식간에 한양까지 진격했다. 전쟁에 대비하지 못했던 조선의 군사들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무너졌다. 신립이 이끄는 결사대가 탄금대에서 신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 패한 뒤엔 한양마저 왜군의 손에 들어갔다. 불과 20여 일 만의 일이었다. 이로 인해 조선의 제14대 임금인 선조는 평양성을 거쳐 의주까지 피난을 가야 했다.
전쟁 초기에 일본군이 기세를 올리며 한반도를 점령해 가자 조선은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워졌다. 하지만 이때 한반도 남쪽 바다에서 승리의 소식이 전해졌다.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옥포, 당포, 당항포, 율포 등지에서 일본 수군을 물리쳤던 것이다. 일본은 육지와 달리 바다에서 거듭 패하자 병력과 함선을 한데 모아 조선 수군을 공격하기로 했다.
이런 보고를 접한 전라좌수사(使) 이순신은 우수사(使이억기()와 연락하여 재차 출동을 결정하였다. 이때 일본은 해상에서의 패전을 만회하기 위하여 병력을 증강하였다. 와키사카 야스하루[]의 제1진은 70여 척을 거느리고 웅천() 방면에서 출동하였고, 구키 요시타카[]의 제2진은 40여 척을, 제3진의 가토 요시아키[]도 많은 병선을 이끌고 합세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7월 6일 이억기와 더불어 49척을 거느리고 좌수영을 출발, 노량()에 이르러 경상우수사(使) 원균()의 함선 7척과 합세하였다. 7일 저녁 조선 함대가 고성() 땅 당포에 이르렀을 때 적함 대·중·소 70여 척이 견내량()에 들어갔다는 정보에 접하고 이튿날 전략상 유리한 한산도 앞바다로 적을 유인할 작전을 세웠다.
한산도는 거제도와 고성 사이에 있어 사방으로 헤엄쳐나갈 길도 없고, 적이 궁지에 몰려 상륙한다 해도 굶어죽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이리하여 먼저 판옥선() 5, 6척으로 하여금 적의 선봉을 쫓아가서 급습, 이에 적선이 일시에 쫓아나오자 아군 함선은 거짓 후퇴를 하며 적을 유인하였다.
아군은 예정대로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자 미리 약속한 신호에 따라 모든 배가 일시에 북을 울리며 뱃길을 돌리고, 호각을 불면서 학익진()을 펴고 일제히 왜군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거북선의 지자총통(현자총통(승자총통() 등 모든 화력을 한꺼번에 쏘아 적선을 격파하고 불사른 것만도 66척이나 되었다.
적의 목을 잘라 온 것이 86급(), 기타 물에 빠지거나 찔려죽은 수가 수백 명에 이르렀으며, 한산도로 도망친 400여 명은 군량이 없이 13일간을 굶주리다가 겨우 탈출하였다. 이 싸움은 임진왜란 때의 3대첩()의 하나로, 그 결과 일본 수군은 전멸하였고, 이순신은 그 공으로 정헌대부(), 이억기와 원균은 가의대부()로 승서()되었다.
이순신은 많은 수의 적군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그는 한산도 앞바다가 싸움에서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일본 수군을 그곳으로 유인했다. 그러고는 일본 수군이 한산도 앞바다에 나타나자, 조선 수군은 함선을 학의 날개 모양으로 펼친 뒤 함포 공격을 퍼부었다. 돌격선인 거북선은 혼란에 빠진 일본 수군의 진영을 휘저었다.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의 거센 공격에 우왕좌왕하다가 47척의 배가 바다에 침몰되고 12척을 빼앗긴 채 물러나고 말았다.
일본은 육지를 통해 북쪽으로 빠르게 치고 올라가되, 식량이나 무기와 같은 군수품은 바닷길을 통해 공급받을 계획이었다. 그러려면 일본군의 함선이 남해안을 거쳐 서해로 올라가야 했는데, 한산도 대첩에서 조선 수군에게 크게 패하면서 바닷길이 막히게 되었다. 게다가 일본 수군은 한산도 대첩에서 많은 함선과 병사들을 잃었기 때문에 전력과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전라도 지역에 있는 조선의 육군과 남해를 지배하고 있는 조선 수군이 언제든 뒤를 공격할 수 있어 불안한 상황에 빠지기도 했다. 이에 일본은 조선 점령은 물론 북쪽으로 진격해 명을 정벌하려는 작전에 커다란 차질을 빚게 되었다.
 한산도 대첩은 전쟁 상황을 바꾸어 놓은 매우 중요한 전투였다. 육지에서 연이어 승리를 거두던 일본의 기세가 크게 꺾였고 조선은 다시금 대열을 정비해 일본과 맞설 수 있었다.
임진왜란 때인 1592년 7월 한산섬 앞바다에서 전라좌수사 이순신(), 전라우수사 이억기() 및 경상우수사 원균()이 거느린 조선 수군이 왜 수군의 주력대를 무찌른 해전.
1592년(선조 25) 4월 왜군은 수륙병진계획으로 조선을 침범하였다. 그러나 그들 수군이 남해·서해로 침범하던 중 옥포()·당포()·당항포()·율포() 등지에서 연전연패하였다. 그러자 수군의 유능한 장수였던 와키자카[]는 정예 병력을 늘려 73척을 이끌고 거제도 등지를 침범하였다. 수군장수였던 구키[]도 42척을 거느리고 뒤를 따랐다.
왜 수군들의 동향을 탐지한 이순신은 7월 5일이억기와 함께 전라좌우도의 전선 48척을 본영(여수) 앞바다에 집결시켜 합동훈련을 실시하였다. 다음 날인 7월 6일 본영을 출발해 노량(: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에 이르러 원균이 이끌고 온 7척과 합세하니 3도의 전선은 모두 55척이었다.
7일 저녁당포 앞바다에 이르러 목동 김천손()에게 왜선 70여 척이 견내량(: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에 머무르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8일한산섬 앞바다에 이르러 이를 확인하였다. 그 때 왜수군의 세력은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 등 모두 73척으로서 지휘관은 수군장수 와키자카였다.
이순신은 견내량 주변이 좁고 암초가 많아서 판옥전선()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것을 확인하고, 한산섬 앞바다로 유인해 격멸할 계획을 세웠다. 먼저 판옥전선 5, 6척이 왜수군을 공격하여 반격해 오면 한산섬으로 물러나면서 유인하였다. 왜수군들은 그 때까지 패전한 것에 대해 보복하려는 듯 의기양양하게 공격해 왔다.
싸울 기회를 포착한 이순신은 모든 전선이 학익진()을 짜서 공격하게 하였다. 여러 장수와 군사들은 지·현자총통() 등 각종 총통을 쏘면서 돌진하였다. 싸움의 결과 중위장 권준()이 층각대선() 1척을 나포하는 것을 비롯해 47척을 분파()하고 12척을 나포하였다.
왜 수군장 와키자카는 뒤에서 독전하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패잔선 14척을 이끌고 김해 쪽으로 도주해 이 해전은 조선수군의 큰 승리로 막을 내렸다. 격전 중 조선 수군의 사상자는 있었으나 전선의 손실은 전혀 없었다. 왜병 400여 명은 당황하여 한산섬으로 도주했다가 뒷날 겨우 탈출하였다.
이 해전을 진주성대첩(, 1592.10.5.∼10.)·행주대첩(, 1593.2.12.)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부른다. 이 대첩은 왜 수군의 주력을 거의 격파해 그들의 수륙병진계획을 좌절시켰다. 그리고 육지에서 잇단 패전으로 사기가 떨어진 조선군에게 승리의 용기를 주었다.
나아가 조선 수군이 남해안 일대의 제해권을 확보함으로써 이미 상륙한 적군에게도 위협을 주어, 그 때까지 매우 불리했던 임진왜란의 전세를 유리하게 전환할 수 있었다. 외국의 역사가 헐버트(Hulbert, H. G.)도 “이 해전은 조선의 살라미스(Salamis) 해전이라 할 수 있다. 이 해전이야말로 도요토미[]의 조선 침략에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다…….”라고 감탄하였다.
이 해전과 하루 뒤에 벌어진 안골포(: 창원시 진해구 안골동)해전을 승리로 이끈 전공으로 이순신은 정헌대부(, 정2품), 이억기·원균은 가의대부(, 종2품)의 관계를 받았다.


임진왜란 때인 1592년 7월 한산섬 앞바다에서 전라좌수사 이순신(), 전라우수사 이억기() 및 경상우수사 원균()이 거느린 조선 수군이 왜 수군의 주력대를 무찌른 해전.
1592년(선조 25) 4월 왜군은 수륙병진계획으로 조선을 침범하였다. 그러나 그들 수군이 남해·서해로 침범하던 중 옥포()·당포()·당항포()·율포() 등지에서 연전연패하였다. 그러자 수군의 유능한 장수였던 와키자카[]는 정예 병력을 늘려 73척을 이끌고 거제도 등지를 침범하였다. 수군장수였던 구키[]도 42척을 거느리고 뒤를 따랐다.
왜 수군들의 동향을 탐지한 이순신은 7월 5일이억기와 함께 전라좌우도의 전선 48척을 본영(여수) 앞바다에 집결시켜 합동훈련을 실시하였다. 다음 날인 7월 6일 본영을 출발해 노량(: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에 이르러 원균이 이끌고 온 7척과 합세하니 3도의 전선은 모두 55척이었다.
7일 저녁당포 앞바다에 이르러 목동 김천손()에게 왜선 70여 척이 견내량(: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에 머무르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8일한산섬 앞바다에 이르러 이를 확인하였다. 그 때 왜수군의 세력은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 등 모두 73척으로서 지휘관은 수군장수 와키자카였다.
이순신은 견내량 주변이 좁고 암초가 많아서 판옥전선()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것을 확인하고, 한산섬 앞바다로 유인해 격멸할 계획을 세웠다. 먼저 판옥전선 5, 6척이 왜수군을 공격하여 반격해 오면 한산섬으로 물러나면서 유인하였다. 왜수군들은 그 때까지 패전한 것에 대해 보복하려는 듯 의기양양하게 공격해 왔다.
싸울 기회를 포착한 이순신은 모든 전선이 학익진()을 짜서 공격하게 하였다. 여러 장수와 군사들은 지·현자총통() 등 각종 총통을 쏘면서 돌진하였다. 싸움의 결과 중위장 권준()이 층각대선() 1척을 나포하는 것을 비롯해 47척을 분파()하고 12척을 나포하였다.
왜 수군장 와키자카는 뒤에서 독전하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패잔선 14척을 이끌고 김해 쪽으로 도주해 이 해전은 조선수군의 큰 승리로 막을 내렸다. 격전 중 조선 수군의 사상자는 있었으나 전선의 손실은 전혀 없었다. 왜병 400여 명은 당황하여 한산섬으로 도주했다가 뒷날 겨우 탈출하였다.
이 해전을 진주성대첩(, 1592.10.5.∼10.)·행주대첩(, 1593.2.12.)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부른다. 이 대첩은 왜 수군의 주력을 거의 격파해 그들의 수륙병진계획을 좌절시켰다. 그리고 육지에서 잇단 패전으로 사기가 떨어진 조선군에게 승리의 용기를 주었다.
나아가 조선 수군이 남해안 일대의 제해권을 확보함으로써 이미 상륙한 적군에게도 위협을 주어, 그 때까지 매우 불리했던 임진왜란의 전세를 유리하게 전환할 수 있었다. 외국의 역사가 헐버트(Hulbert, H. G.)도 “이 해전은 조선의 살라미스(Salamis) 해전이라 할 수 있다. 이 해전이야말로 도요토미[]의 조선 침략에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다…….”라고 감탄하였다.
이 해전과 하루 뒤에 벌어진 안골포(: 창원시 진해구 안골동)해전을 승리로 이끈 전공으로 이순신은 정헌대부(, 정2품), 이억기·원균은 가의대부(, 종2품)의 관계를 받았다.




 학익진

조선 수군이 즐겨 쓰던 정(丁)자 타법을 개량한 것으로 학이 날개를 펴듯 적을 둘러싸서 공격하는 진형이다.

학익진도
한산도 대첩에서는 ‘학익진’ 전술이 쓰였다. 학익진이란 함선을 학의 날개 모양으로 펼친 뒤 적을 공격하는 전술로, 좁은 물길을 막 빠져나온 적선들을 한꺼번에 공격하는 데 알맞았다.

일본은 육지를 통해 북쪽으로 빠르게 치고 올라가되, 식량이나 무기와 같은 군수품은 바닷길을 통해 공급받을 계획이었다. 그러려면 일본군의 함선이 남해안을 거쳐 서해로 올라가야 했는데, 한산도 대첩에서 조선 수군에게 크게 패하면서 바닷길이 막히게 되었다. 게다가 일본 수군은 한산도 대첩에서 많은 함선과 병사들을 잃었기 때문에 전력과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전라도 지역에 있는 조선의 육군과 남해를 지배하고 있는 조선 수군이 언제든 뒤를 공격할 수 있어 불안한 상황에 빠지기도 했다. 이에 일본은 조선 점령은 물론 북쪽으로 진격해 명을 정벌하려는 작전에 커다란 차질을 빚게 되었다.
한산도 대첩은 전쟁 상황을 바꾸어 놓은 매우 중요한 전투였다. 육지에서 연이어 승리를 거두던 일본의 기세가 크게 꺾였고 조선은 다시금 대열을 정비해 일본과 맞설 수 있었다.

정유재란 때인 1597년(선조 30) 7월 15일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이 칠천량에서 왜수군과 벌인 해전. 임진왜란·정유재란 가운데 조선수군이 유일하게 패배한 해전이다. 임진왜란 중 명나라와의 화의가 결렬되자, 일본은 1597년 1월 다시 조선을 침범했다. 일본은 지난번 조선 침범이 실패한 것은 바다를 제패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해 먼저 수군통제사 이순신()을 제거하려는 이간책을 꾸몄다. 당시 조정에서는 중신들이 당쟁에 휘말려 이순신을 하옥하고 원균을 수군통제사로 임명한 상태였다. 일본군은 조선수군을 부산 근해로 유인해 섬멸하려고 요시라()를 시켜 유혹했다.

이에 도원수 권율()은 도체찰사 이원익()과 상의해 원균에게 출전명령을 내렸다. 원균은 무모하게 출전해 보성군수 안홍국() 등을 잃고 되돌아왔다. 그리고 한산도의 본영()에 앉아서 경상우수사 배설()이 웅천()을 급습하도록 하였다. 배설이 전선() 수십 척을 잃고 패하자, 권율은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원균을 태형()에 처한 뒤 다시 출전하라고 명하였다. 원균은 부산의 적 본진()을 급습하려고 삼도 수군 160여 척을 이끌고 한산도를 출발하였다. 7월 14일 원균은 부산 근해에 이르러, 이 사실을 미리 탐지한 적들의 교란작전에 말려들어 고전하였다.

더욱이 되돌아오던 중 가덕도에서 복병한 적의 기습을 받아 400여 명을 잃었다. 원균이 칠천량(지금의 거제시 하청면)으로 이동하여 무방비 휴식 상태에 있을 때 적은 조선수군을 기습할 계획을 세웠다. 도도()·와키사카()·가토() 등 수군 장수들이 7월 14일 거제도 북쪽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15일 달밤을 이용해 일제히 수륙양면 기습작전을 개시하였다. 이에 당황한 원균과 여러 장수들은 응전했으나 적을 당해낼 수 없어 대부분의 전선들이 불타고 부서졌다.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충청수사 최호(), 조방장() 배흥립() 등 수군장수들이 전사하였다. 원균도 선전관 김식()과 함께 육지로 탈출하였다.

원균은 일본군의 추격을 받아 전사하였다. 경상좌수사 배설만이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남해 쪽으로 후퇴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삼도 수군은 일시에 무너지고 적은 남해 일원의 제해권을 장악해 서해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우키타()·고니시(西)·모리() 등은 쉽게 남원 및 진주 등지로 침범하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7월 21일 원균과 함께 탈출하다가 원균은 죽고 겨우 살아 나온 김식에게서 패전 보고를 듣고 크게 놀라 백의종군()하고 있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해 수군을 수습하게 하였다.


한산도대첩 본문 이미지 2

칠천량해전.
정유재란 때인 1597년(선조 30) 7월 15일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일본 수군과 벌인 해전.
임진왜란·정유재란 가운데 조선 수군이 유일하게 패배한 해전이다.
임진왜란 중 명나라와의 화의가 결렬되자, 일본은 1597년 1월 다시 조선을 침범했다. 일본은 지난번 조선 침범이 실패한 것은 바다를 제패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해 먼저 수군통제사 이순신()을 제거하려는 이간책을 꾸몄다.
당시 조정에서는 중신들이 당쟁에 휘말려 이순신을 하옥하고 원균을 수군통제사로 임명한 상태였다. 일본군은 조선 수군을 부산 근해로 유인해 섬멸하려고 일본의 이중첩자인 요시라()를 시켜 유혹했다.
이에 도원수 권율()은 도체찰사 이원익()과 상의해 원균에게 출전명령을 내렸다. 원균은 무모하게 출전해 보성군수 안홍국() 등을 잃고 되돌아왔다. 그리고 한산도의 본영()에 앉아서 경상우수사 배설()이 웅천()을 급습하도록 하였다.
배설이 전선() 수십 척을 잃고 패하자, 권율은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원균을 태형()에 처한 뒤 다시 출전하라고 명하였다.
원균은 부산의 적 본진()을 급습하려고 삼도 수군 160여 척을 이끌고 한산도를 출발하였다. 7월 14일 원균은 부산 근해에 이르러, 이 사실을 미리 탐지한 적들의 교란작전에 말려들어 고전하였다.
더욱이 되돌아오던 중 가덕도에서 복병한 적의 기습을 받아 400여 명을 잃었다. 원균이 칠천량(지금의 거제시 하청면)으로 이동하여 무방비 휴식 상태에 있을 때 적은 조선 수군을 기습할 계획을 세웠다.
도도()·와키사카()·가토() 등 수군 장수들이 7월 14일 거제도 북쪽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15일 달밤을 이용해 일제히 수륙양면 기습작전을 개시하였다.
이에 당황한 원균과 여러 장수들은 응전했으나 적을 당해낼 수 없어 대부분의 전선들이 불타고 부서졌다.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충청수사 최호() 등 수군 장수들이 전사하였다. 원균도 선전관 김식()과 함께 육지로 탈출하였다.
그러나 원균은 일본군의 추격을 받아 전사하였다. 경상우수사 배설만이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남해 쪽으로 후퇴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삼도 수군은 일시에 무너지고 적군은 남해 일원의 제해권을 장악해 서해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우키타()·고니시(西)·모리() 등은 쉽게 남원 및 진주 등지로 침범하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7월 21일 원균과 함께 탈출하다가 원균은 죽고 겨우 살아 나온 김식에게서 패전 보고를 듣고 크게 놀라 백의종군()하고 있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해 수군을 수습하게 하였다.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하고 육전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당했으나 해전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연전연승을 했다. 그는 서양보다 250년이나 앞선 철갑선인 거북선을 이용해 적선들을 한산도 앞바다로 끌어내 함대로 학익진을 갖춰 포격을 실시해 승리했다.
16세기 유럽 해전에서 우리는 갤리 선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새로이 갈레온과 범선의 시대가 개막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동시대의 동양 해전을 살펴보면 서양에서의 발전보다 훨씬 더 혁신적인 사건이 일어났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1592년 조선의 이순신 장군은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을 제작하여 한반도 남쪽 바다에서 일본해군을 대파했던 것이다.

임진왜란을 일으킨,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본을 장악함.

일본 정권을 장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조선을 침략했다. 조선을 거쳐 명나라까지 점령한다는 원대한 팽창정책의 첫 단계였다. 그 후 한반도는 7년 동안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빠지게 되는데, 임진()년에 일으킨 이 전쟁을 우리는 '임진왜란'이라고 부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시  1592 조선을 침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전쟁 준비에 실패한 조선, 전 국토를 유린당함.

역대로 일본을 야만시해온 한민족은 일본의 전쟁준비를 사전에 충분히 간파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쟁을 일삼고 있다가 기습적 침략을 당해 처음부터 속수무책이었다. 그 결과 조선의 정규군이라 할 수 있는 관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20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당하고 2개월 만에 평양까지 잃고 말았다. 그러자 조선 각 지방에서는 향토를 지키고자 의병들이 들고일어나 비정규전으로 일본군에 대항했다. 이후 전쟁은 의병들에 의한 지구전 형태를 띠게 되나 일본군은 무자비하게 전 국토를 유린하고 말았다.

일본조총을 앞세운 , 조선군을 압도하다.

육전에서 조선군이 참패하고 만 것은 기본적으로 무기에서 도저히 일본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군은 활을 사용한 데 비해 일본군은 명중률 · 발사속도 · 살상효과 등에 있어 월등한 위력을 가진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일본은 포르투갈로부터 화승총 제조기술을 받아들여 조총을 제작하고 그 성능과 전술적 효율성을 높이는 데 꾸준히 노력해왔다. 물론 당시 화승총이 절대적 무기가 될 수 없었다는 점은 서양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것을 절반 정도가 보유한 군대와 그것을 전혀 구경하지도 못한 군대 간에는 사기 면에서 엄청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조선 해군연전연승 전쟁이 장기화되고 마침 승리를 거두다.
육전에서 일본군이 승승장구하는 것과 달리 해전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남해안에서 일본해군에 대해 연전연승했다. 그 결과 일본해군은 서해로 진입할 길이 막혔고 육군 또한 전략적 후방이 불안하여 평양에서부터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조선정부로부터 지원요청을 받은 명나라는 서해로부터의 위협을 받지 않는 가운데 쉽게 원병을 보낼 수 있었다.
조선 · 명 연합군의 형성으로 일본군은 수세적 입장으로 바뀌었으며, 결국 그 후 전쟁은 장기화하고 쌍방 사이에 공방 및 소강상태를 거듭하다가 1598년 도요토미의 사망으로 일본군이 철군함으로써 임진왜란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순신

조선의 군함, 대포를 이용하여 전술적 우위...

당시 해전술은 주로 래밍(Ramming)과 보딩(Boarding배끼리 부딪치고 갑판 위에 올라 싸우는) 전술에 의존했다. 그러나 조선군 군함은 일본군에 비해 방향전환이 용이한 특징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전술적으로도 대포를 보유하고 포격을 실시함으로써 해전에서 절대적 우세를 나타냈다. 조선군의 대포는 다양했으며, 최대형의 경우 구경 17cm, 무게 8kg의 포탄을 4km까지 날릴 수 있었다. 일본군이 고작 조총이나 도검()으로 함상 백병전을 벌이는 데만 관심을 두고 대포를 보유하지 않은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거북선과 학익진으로 일본군을 대파하다.

해전에서 조선군은 남해상의 합포 · 적진포 · 당포 · 한산도 · 부산포 등에서 일본군을 대파했다. 그 가운데도 가장 결정적 승리를 거둔 곳은 한산도 해전이었다.
이순신은 마치 후퇴하는 듯한 행동을 취해 적선들을 한산도 앞바다로 끌어냈다. 그리고는 그의 함대를 학이 날개를 펼친 듯이 학익진을 갖춘 다음 일제히 포격을 실시한 후에 적을 포위 · 섬멸했다. 이 해전에서 조선군은 극히 짧은 순간에 적선 66척을 격침시키는 대승을 기록했다. 수십 척의 적선을 파괴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역할을 한 무기는 물론 거북선이었다.
수조병풍도
수조병풍도이순신의 학익진에 대해 묘사한 수조병풍도.

이순신이 설계한 거북선, 

이순신 장군이 직접 설계하여 감독 제작한 거북선은 임진왜란 초기에 모두 3척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거북선은 조선함대의 주력선인 판옥선의 평탄한 갑판 위에 아치형의 철판 덮개를 씌우고 그 위에 송곳칼들을 설치함으로써 적에 의한 보딩을 막고, 또한 사방에 난 대포구멍을 통해 포격을 실시하고 궁수들도 불붙은 화살을 날려 공격할 수 있게끔 만들어졌다. 길이 약 30m, 폭 9m, 높이 7m의 이 전함은 서양 갤리 선처럼 노를 이용하는 선박으로서 좌우에 각각 10개씩의 노를 갖추었다. 뱃머리는 거북 머리를 하고, 유황을 태워 벌어진 입으로 안개를 토하도록 하여 적을 혼란케 했다.
거북선
거북선전라좌수영귀선.

거북선, 갤리선과 같은 원리로 항해하고 막강한 대포..

거북선은 여러 가지 점에서 이순신 장군의 천재성을 나타냈다. 우선 갤리 선을 보기 어려운 당시 동양에서 그는 갤리 선과 같은 원리로 항해했다. 그리고 10문의 대포로 막강한 파괴력을 발휘하고, 나아가 철갑에 의해 과감한 적진 돌파를 가능케 한 것은 그야말로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작품이었다.

이순신의 철갑선, 서양보다 250년 앞서다.

해전사에서 이순신의 철갑선은 서양보다 무려 250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그가 죽은 뒤 그의 기발한 아이디어는 일단 과거 속으로 묻히고 말았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각국의 해군들은 철갑선을 제작하게 되고 그것을 주력선으로 하여 해전을 수행해왔다.
이순신 장군은 상상력이 대단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제 전쟁 수단으로 활용하여 세계 해전사에서도 빛나는 한 페이지를 장식한 위대한 제독이었다.

정유재란 때인 1598년(선조 31) 11월 18일부터 19일 이틀 사이에 이순신()과 진린()이 이끄는 조·명 연합함대가 노량(경상남도 남해도와 하동 사이의 해협) 앞바다에서 왜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
임진왜란 중 바다에서의 마지막 싸움이며, 이순신이 승리와 함께 전사한 해전이다.
1597년 재침한 왜군은 그 해 9월 명량해전()에서 패배한 데 뒤이어 육전에서도 계속 고전하였다. 다음 해 8월 도요토미()가 병사하자, 왜군은 순천 등지로 집결하면서 철수작전을 서둘렀다.
이 소식을 접한 이순신은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과 함께 1598년 9월 고금도() 수군 진영을 떠나 노량 근해에 이르렀다. 명나라 육군장 유정()과 수륙합동작전을 펴 왜교()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 고니시(西)의 부대를 섬멸하기 위함이었다.
그 때 고니시는 수륙 양면으로 위협을 받게 되자 진린에게 뇌물을 바치고, 퇴로를 열어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진린은 고니시가 마지막으로 요청한 통신선 1척을 빠져 나가게 하고, 이순신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고니시는 통신선으로 사천() 등지의 시마쓰()와 연락해 남해·부산 등지에 있는 왜군 수군의 구원을 받아 조·명 연합수군을 협공하면서 퇴각하려는 생각이었다. 그러한 고니시의 전략을 잘 알고 있는 이순신은 진린을 꾸짖고 함께 진형을 재정비해 왜군을 맞아 격멸하기로 하였다.
11월 18일 밤 이순신의 예견대로 노량 수로와 왜교 등지에는 500여척의 왜선이 집결해 협공할 위세를 보였다. 200여척의 조·명 연합수군을 거느린 이순신은 “이 원수만 무찌른다면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고 하늘에 빌고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19일 새벽, 싸움은 막바지에 이르고 이순신과 진린은 서로 위급함을 구하면서 전투를 독려하자 왜의 수군 선박 200여척이 불에 타 침몰하거나 파손되고 100여 척이 이순신함대에 나포되었으며 나머지 패잔선들이 관음포 쪽으로 겨우 달아났다.
이순신은 같은 날 오전 관음포()로 도주하는 마지막 왜군을 추격하던 중 총환을 맞고 쓰러지면서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세계사상 길이 빛나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이 해전에서 명나라 장수 등자룡()과 가리포첨사(使) 이영남(), 낙안군수() 방덕룡() 등이 전사하였다. 한편, 순천 왜교에서 봉쇄당하고 있던 고니시의 군사들은 남해도 남쪽을 지나 퇴각해 시마쓰의 군과 함께 부산에 집결, 철수했다. 노량해전을 끝으로 정유재란은 막을 내렸다.


한산도 대첩 - 이순신의 조선 수군이 한산도에서 일본 수군을 크게 물리친 일 (한국사 사전 2 - 역사 사건·문화와 사상,
거제 칠천량해전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한반도 해양문화), 2009., 한국콘텐츠진흥원)
『선조실록(宣祖實錄)』
『징비록(懲毖錄)』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선묘중흥지(宣廟中興志)』
『日本戰史朝鮮役』(香月鍈一, 財團法人偕行社, 1924)
『선조실록(宣祖實錄)』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日本戰史朝鮮役』(參謀本部, 1924)
『임진장초(壬辰狀草)』(조성도역, 동원사, 1973)
『임진전란사』(이경석, 임진전란사간행위원회, 1967) The Passing of Korea(Hulbert, H. G., Doubleday Page and Co., New York, 1906)
한산도대첩 [閑山島大捷]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해전 - 거북선의 조선기술은 서양보다 250년 앞섰다(1592년)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2010. 7. 16.,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해전 - 거북선의 조선기술은 서양보다 250년 앞섰다(1592년)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2010.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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