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일 토요일

'건국전쟁' 김덕영 감독, 이승만 미화 논란에 "예상했다" 중국서 폭동 일으킨 北 노동자들...김정은 정권 통제력 상실? "참 항당한 이런일" '사귀던 커플 알고보니 이복형제'…난임환자 수십명 자기정자로 임신시킨 의사,,,? 이시이와 키타노, 서로를 라이벌로 의식,,,,

'건국전쟁' 김덕영 감독, 이승만 미화 논란에 "예상했다" 중국서 폭동 일으킨 北 노동자들...김정은 정권 통제력 상실? "참 항당한 이런일" '사귀던 커플 알고보니 이복형제'…난임환자 수십명 자기정자로 임신시킨 의사,,,? 이시이와 키타노, 서로를 라이벌로 의식,,,,

'건국전쟁' 김덕영 감독, 이승만 미화 논란에 "예상했다"

"세계에서 한국이 제일 비싸" 지적에도 오픈런…7~8시간 대기도 불사,

"이강인, '손흥민에 하극상' 때문에 100억 손해"

"참 항당한 이런일" '사귀던 커플 알고보니 이복형제'…난임환자 수십명 자기정자로 임신시킨 의사,,,?

탕웨이가 아이유에게 보낸 손편지, "한글 이렇게 잘썼어?"…

연예인들 문제가 되면 끈었다로 일관, 임창정, 미용실 회원권 '먹튀' 논란에 "투자 철회 후 동업자와 결별" 

[2024 부산세계탁구선수권] ''중국엔 안돼' 고정관념 깼다" 남자 탁구 화려한 마무리, 벌써 올림픽 기대된다, 

"도쿄여행 가려는데 출국금지…이곳이 북한이냐" 전공의 성토,,,

마루타 100% 사망케한 '악마의사' "말 피 뽑아 인간에 주사했더니…"

미국의 은폐 기록과 일본의 만행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저지른 만행(1932년~1945년)과 전후 미국의 사실 은폐에 대한 고발, "말 피 뽑아 인간에 주사했더니…"

이시이와 키타노, 서로를 라이벌로 의식,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과 무슨 약속을 했나, 


'건국전쟁' 김덕영 감독, 이승만 미화 논란에 "예상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을 미화했다는 논쟁 중인 영화 '건국전쟁'의 김덕영 감독이 입장을 밝혔다.

오는 17일 오후 7시 방송되는 '뉴스A'에서는 다큐멘터리 ’건국전쟁‘의 김덕영 감독을 만난다.

지난 1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이 상업영화를 제치고 승승장구 중이다.

”4.19혁명 이후 대한민국에서 이승만은 금기어였다”라고 밝힌 김덕영 감독은 전작 ‘김일성의 아이들’ 제작 중, 평양에서 ‘이승만 괴뢰도당을 타도하자!’는 구호가 적힌 현수막의 존재를 알게 됐다고. 이후 “이 전 대통령의 생애와 정치적 행적 등을 3년여에 걸쳐 취재했다”라고 전한다.

관객 사이에선 이 전 대통령의 업적을 재조명했다는 평가와 긍정적 측면만 짜깁기했다는 비판이 엇갈리는 상황. 이에 대해 김 감독은 “논란을 예상했다”라면서 이승만을 부정의 대명사로 인식시킨 교육의 문제를 지적한다.

▲ 김덕영 감독. 제공ㅣ채널A = 캡처]

영화에서 4‧19혁명을 미화했다는 논란에 대해서는 “4‧19혁명을 촉발한 3.15부정선거는 불법 선거였지만, 이 전 대통령과는 관련이 없다”라고 주장한다.

“당시 부상자를 찾아 사과하고,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을 내려놓았다“라고 설명한다.

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한 김 감독. ”질문하는 학문인 철학 전공은 행운이었다“라고 말한다.

앞으로 상업영화에 도전할 생각 있냐는 질문에는 ”전혀 아니다“라고 답하며, 차기작은 ‘재일교포 북송’ 관련 작품이라고 전한다.

감독 개인의 역사관이 작품에 반영되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김 감독은 ”돈을 벌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에 하고 싶은 이야기하겠다“라며 다큐 감독으로서의 소신도 밝힌다.

논란이자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건국전쟁’의 숨겨진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김덕영 감독의 ‘오픈 인터뷰’는 오는 17일 오후 7시 뉴스A를 통해 방송도했다.


"세계에서 한국이 제일 비싸" 지적에도 오픈런…7~8시간 대기도 불사,

젊은층 남다른 빵사랑에 '빵지순례' 신조어도,

빵지순례 대표 코스로 대전 '성심당' 꼽혀,

최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빵지순례' 해시태그가 담긴 게시물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빵지순례'란 성지순례하듯 인기 빵집을 찾아가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대전의 '성심당' 빵집을 가기 위해 대전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또한 젊은층은 인기 있는 빵을 구매하기 위해 빵집 앞에서 몇 시간 동안 대기하거나 매장 문이 열리기도 전에 대기하는 '오픈런'도 불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빵지순례' 게시물만 83만여개…성심당 등 인기,

최근 맛있는 빵을 찾아 헤매는 이들이 늘면서 '빵지순례', '빵켓팅(빵+티켓팅)', '빵픈런(빵+오픈런)' 등의 신조어가 등장하고 있다.

이는 빵을 사기 위해 멀리 있는 지역으로 이동하거나 줄을 서는 등의 행동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은 시간과 수고를 들인 끝에 구매한 빵을 들고 매장 앞에서 인증샷을 찍어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올린다.

인스타그램에서도 '빵지순례' 해시태그가 달린 게시물은 83만개 이상 게재돼있는 등 인기를 끌고 있다.

빵지순례 필수코스로는 대전 성심당이 꼽힌다.

[이미지출처=인스타그램]

성심당은 대전 이외의 지역에는 지점을 내지 않는다는 경영 철학으로 인해 성심당 빵을 구매하려는 이들은 무조건 대전을 방문해야 한다.

특히 지난해 크리스마스 연휴 성심당 '딸기시루' 케이크를 구매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오면서 최대 7~8시간까지 줄을 섰다는 후기가 올라오기도 했다.

지난달 친구들과 함께 대전 성심당을 방문했다는 직장인 주모씨(28)는 "서울에서 당일치기로 성심당을 다녀왔다.

워낙 빵으로 유명한 곳이라 궁금한 마음이 컸다"

"오전 10시에 도착했는데도 사람이 많아 놀랐지만, 친구들과 대화하다 보니 금방 줄이 줄어든 것 같았다"고 했다.

"맛있는 빵도 빵이지만, 친구들과 추억을 쌓을 수 있어 좋았다"고 덧붙였다.

이외에 군산 이성당, 대구 삼송빵집 등도 '빵지 순례자'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맛있는 빵 먹기 위해 '오픈런'도 감수,

또 원하는 빵을 먹기 위해 몇시간씩 기다리는 이들도 적지 않다.

서울 종로구에 있는 베이글 전문점 '런던베이글뮤지엄'은 오픈런 성지로 이미 유명하다.

2021년 문을 연 이곳은 다양한 종류의 베이글을 판매하며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사진은 기사 중 특정 표현과 무관. [이미지출처=픽사베이 캡처]

특히 대기가 500여명까지 몰리고 '연예인도 줄 서는 맛집'으로 유명세를 타면서 화제를 모았다.

실제로 이곳은 외식 예약 플랫폼 '캐치테이블'이 꼽은 지난해 웨이팅 건수가 가장 많았던 매장이었다.

2030세대는 다른 연령층에 비해 비교적 오픈런에 관대한 편이다.

트렌드에 민감한 젊은층은 재미와 희소성이 있는 제품이라면 오랜 대기 시간을 감수해서라도 구매하려는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또 SNS 인증 문화까지 결합하면서 인기 빵집에는 평일에도 오픈런 행렬이 이어질 정도다.

[이미지출처=신세계백화점, 연합뉴스 캡처]

이와 관련해 시장조사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2022년 전국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 응답자의 47.4%는 "오픈런을 직접 경험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특히 2030세대, 여성, 평소 SNS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응답자에게서 오픈런 경험이 더욱 많은 것으로 나타났으며, 식당·음식점(22.7%·복수응답), 놀이공원·테마파크(21.7%), 카페·베이커리(15.7%)에서 오픈런을 해본 적이 있다는 응답이 많았다.

빵에 대한 젊은층의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유통업계도 디저트 매장 모시기에 나섰다.

신세계백화점은 지난 15일 서울 강남점 지하 1층에 국내외 디저트를 총망라한 대규모의 디저트 전문관 '스위트 파크'를 열었다.

이곳은 해외에서 주로 맛볼 수 있던 유명 디저트부터 전통 한과, 노포 빵집 등 43개 브랜드를 한곳에 모은 공간으로, 개점 첫 주말 방문객 수가 10만명에 달하기도 했다.


일각선 "韓 빵값 비싸다" 지적도,

다만 일각에서는 빵값이 비싸다는 푸념이 나오고 있다.

한국 빵값이 다른 나라에 비해 유독 비싸고, 가격 인상 폭도 크다는 이유에서다.

[이미지출처=BBC; EIU] 캡처,

실제로 영국 경제분석기관 이코노미스트 인테리전스 유닛(EIU)이 발표한 2019년 세계 생활비 보고서를 보면 서울의 빵 1kg당 평균 가격은 15.59달러(약 2만700원)로 세계에서 가장 비싼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두 번째로 비싼 뉴욕(8.33달러·약 1만1000원)과 2배 가까이 차이 난다.

이에 빵값을 인하해야 한다는 지적도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강인, '손흥민에 하극상' 때문에 100억 손해"

베트남 매체 '전찌', 이강인 손해 분석,

"이강인 무거운 경제적 처벌 받고 있다"

베트남 매체가 이강인(23, 파리 생제르맹)이 2023 카타르 아시안컵 대회 기간 중 손흥민(32, 토트넘)에게 일으킨 '하극상'으로 100억원에 달하는 손실을 보았다고 보도했다.

21일 베트남 일간지 '전찌'는 "이강인은 아직 없는 대한축구협회 공식 징계와 별도로 손흥민과의 싸움으로 이미지가 훼손되면서 무거운 경제적 처벌을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전찌는 이강인이 손흥민과의 싸움으로 통신·치킨·게임 광고를 이행할 수 없게 되며 연간 25억원의 손해를 입었다고 계산하며 "한국에서 잘 알려진 회사만 연관된 게 아니라 다른 기업 관련액을 포함하면 손흥민과의 싸움으로 100억원에 달하는 손해를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갤럭시 S24 프로모션 광고 모델로 이강인을 내세운 KT는 불매운동이 거론되는 등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프로모션을 조기 종료하는 수순에 들어가기도 했다. 사진은 18일 오전 서울 시내 한 음식점 앞에 설치된 이강인 광고물.[사진=연합뉴스] 캡처,

이어 "PSG 프랑스 1부리그 생방송을 알리는 한국 중계권자 포스터에서 이강인이 사라졌다"며 "아시안컵 준결승에서 탈락한 뒤 선수 이미지가 크게 훼손됐다는 증거"라고 전했다.

전찌는 "유럽 5대 리그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는 한국인이 국내 홍보에서 제외된 것은 비슷한 사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나쁜 상황"이라며 "한국에서 이강인의 명예는 사실상 거의 파괴돼 커리어 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편, 이강인은 아시안컵 준결승전 전날인 지난 6일 저녁 식사 시간에 설영우, 정우영 등과 탁구를 하다 이를 제지하는 주장 손흥민에게 반발하며 물리적 충돌을 빚었다.

영국 매체를 통해 대표팀 내분 사태가 알려지며, 축구계에서 당사자를 징계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강인은 사건 이후 10여일 만인 21일 "절대로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했다"며 "깊이 뉘우치고 있다"는 내용의 2차 사과문을 내고 최근 손흥민이 있는 영국 런던으로 직접 찾아가 사과했다고 밝혔다.

손흥민도 이강인의 사과를 받아주며 "강인이가 보다 좋은 사람, 좋은 선수로 성장할 수 있도록 옆에서 특별히 보살펴주겠다"며 "강인이를 한 번만 용서해주시라"는 입장문을 냈다.

당장 3월 21일과 26일 태국과의 월드컵 예선을 앞둔 정해성 신임 대한축구협회 국가대표 전력강화위원장은 두 사람의 화해 소식에 "우리 국가대표팀에는 너무 좋은 소식"이라며 "거기에 대해 전부 좋게 생각했다"고 언급했다.


"참 항당한 이런일" '사귀던 커플 알고보니 이복형제'…난임환자 수십명 자기정자로 임신시킨 의사,,,?

난임 환자에 자기 정자 사용한 사실 통보 안해,

해당 사실 몰랐던 일부 가족, 의사 고소,
유사 사례, 미국 사회서 이미 여러 차례 발생,

미국에서 한 의사가 난임 환자 20여 명을 자신의 정자로 임신시킨 사실이 발각돼 미국 사회가 충격에 빠졌다.

무엇보다 80년대에 주로 범행이 이루어져 해당 의사의 치료를 받은 어머니들로부터 태어난 한 남성과 여성은 고등학생 시절 자신들의 아버지가 같다는 사실을 모른 채 이성 교제까지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18일(현지시간) CNN은 건강 문제로 유전자 분석 전문 회사 '23andme'에 자신의 타액 샘플을 보냈다가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하게 된 한 여성의 사연을 보도했다.

그는 해당 서비스를 통해 DNA 분석 결과 자신에게 22명의 이복형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너무나 놀란 여성은 결국 이런 일이 발생한 이유를 찾기 위해 이복형제들에게 연락했다.

연락이 닿은 이들과 대화한 끝에 자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의 어머니가 모두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에 위치한 한 난임 클리닉에 다니면서 버튼 콜드웰 박사에게 진료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이들 이복형제 중 두 명은 고등학교 시절 아버지가 같다는 사실을 모른 채 이성 교제를 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콜드웰 박사가 난임 치료를 받던 환자들을 자신의 정자로 임신 시켰다는 사실을 확인한 이들 가운데 재닌 피어슨과 그의 어머니는 콜드웰 박사를 고소했다.

재닌 피어슨은 지난해 난임 클리닉에서 동의 없이 환자 22명을 자신의 정자로 임신시킨 버튼 콜드웰 박사를 직접 찾아가 마지막으로 사진을 남겼다. [사진출처=CNN] 캡처,

당시 콜드웰 박사는 인공 수정을 원하던 피어슨의 어머니에게 "정자 기증자가 될 의향이 있는 익명의 예일대 의대 인턴이 있으며 냉동되지 않은 정액을 제공할 것"이라며 인공 수정 시술을 진행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피어슨의 어머니는 인공 수정에 사용되는 정자가 콜드웰 박사의 정자란 말은 듣지 못했고 "콜드웰 박사의 아이를 갖겠다고 동의한 적도 없다"라고도 강조했다.

콜드웰 박사는 현재 80대의 고령으로 은퇴해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는 자신을 찾아온 피어슨을 만나 자신의 과거 행동을 인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미국에서 자가 DNA 키트가 발달하면서 2000년대 이전 의사들이 저지른 이런 비윤리적인 행위가 드러나고 있다.

미국의 난임 산업은 다른 국가에 비해 규제가 턱없이 부족하다고 CNN은 지적했다.

특히, 환자의 시술에 자신의 정자를 몰래 사용한 혐의로 체포되거나 기소된 의사는 미국 전역에서 30명이 넘는다고 덧붙였다.

이 중 일부 주에서는 '불임 사기'가 범죄로 규정돼있지 않아 의사들이 처벌을 피했다.

켄터키주의 의사 마빈 유스먼은 자신의 정자를 약 6명의 환자에게 사용했다고 인정했지만, 의료위원회는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의사면허 취소를 거부했다.


탕웨이가 아이유에게 보낸 손편지, "한글 이렇게 잘썼어?"…

아이유가 자신의 뮤직비디오에서 함께 호흡을 맞춘 배우 탕웨이에게 받은 손편지를 공개했다.

아이유는 23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촬영을 마치고 얼마 후 탕웨이 선배님께서 보내 주신 편지와 사진"이라며 "너무 큰 감동을 받아 선배님께 양해를 구하고 저도 선배님의 편지를 공유한다"는 글과 함께 여러 장의 사진을 게재했다.


아이유, 탕웨이. [이미지출처=아이유 인스타그램]

공개된 사진 속에는 탕웨이가 직접 한글로 쓴 손편지가 담겨 있었다.

탕웨이는 "지은, 그거 알아요?

촬영하면서 느낀 두 번의 감동적인 순간을 지은한테 말해주고 싶었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촬영 때 감독님이 저한테 디렉팅하실 때 아이유가 쓴 '그녀와 눈동자가 닮은 그녀의 엄마'라는 가사를 들은 순간 마음속에서 어떤 울림이 있었다.

그동안 스스로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이었다"며 "아이가 태어나고 엄마가 되면서부터 엄마들은 항상 내 아이의 눈이 나와 정말 닮았는지 골몰해도 내가 나의 엄마와 닮은 데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던 거 같다"고 아이유 노래 가사를 보며 느낀 점에 대해 말했다.

탕웨이가 아이유에게 보낸 한글 손편지 [사진출처=아이유 인스타그램]

이어 "그 순간 우리 엄마의 얼굴과 내 얼굴을 맞붙여 거울 앞에서 찬찬히 엄마의 얼굴을 들여다보거나 함께 사진을 찍어 오래오래 자세히 보고 싶다는 마음이 너무나도 간절히 들었다"며 "마침 설날 그믐이라 좀 있으면 엄마를 만나게 될 거라 그 일은 꼭 하고 싶다"고 했다.

탕웨이는 또 "뮤직비디오를 찍기 전에 당신이 나의 엄마를 연기할 것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촬영 스튜디오에 들어서서 당신과 만나면서도 솔직히 상상하기 어려웠다"며 "그런데 촬영이 시작되고 당신은 아주 오랫동안 그 나무 바닥 위에서 똑같이 한 가지 포즈로 조명과 연기 속에서 조영하고 침착하게 그 자리를 지켰다.

그렇게 초현실적이고 아름다운 촬영을 이어가던 순간 내게로 어떤 장면이 홀연히 떠올랐다.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젊은 시절의 엄마가 바로 내 옆에 있다는 느낌,

우리 엄마도 그렇게 호리호리한 몸매와 매끄러운 피부에 활기차고 영민한 눈매였다는 것을"이라고 했다.

탕웨이가 아이유에게 보낸 한글 손편지 [사진출처=아이유 인스타그램]

끝으로 탕웨이는 "지은. 내게 이런 아름다운 기억을 만들어줘서 고마워요.

오늘은 섣달그믐이고 난 비록 지은과 멀리 떨어져 있는 베이징에 있지만, 당신의 행복과 건강을 빌게요.

앞으로도 당신의 좋은 노래를 많이 많이 기대할, 저는 당신의 팬인 탕웨이"라고 덧붙였다.

해당 손편지를 받은 아이유는 "뮤직비디오 후반부에 선배님께서 저를 안아주신 장면은 선배님의 애드립이었다.

그 순간 눈물이 핑 돌게 좋았다"며 "온종일 긴장되고 설레는 촬영이었다.

늘 좋아하겠다"고 덧붙였다.

누리꾼들은 "글이 너무 좋다.

한국인인 나도 저렇게까지는 못 쓸 것 같다.

감동적",

"편지가 영화 같다",

"잔잔한데 울림이 있는 글",

"어떻게 글을 저렇게 예쁘게 표현할까" 등의 반응을 보였다.

한편 아이유는 지난 20일 미니 6집 '더 위닝(The Winning)'을 발매했다.

수록곡 'Shh..' 뮤직비디오에는 탕웨이가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연예인들 문제가 되면 끈었다로 일관, 임창정, 미용실 회원권 '먹튀' 논란에 "투자 철회 후 동업자와 결별" 

판교 미용실 회원권 먹튀 논란,

"초상권 도용 사실 몰랐다"

가수 임창정이 자신의 명의로 개업한 미용실에서 최근 100여명에게 회원권을 판매한 뒤 폐업했다는 이른바 '먹튀' 논란에 대해 해명에 나섰다.

임창정 소속사 예스아이엠엔터테인먼트는 23일 "기사로 보도된 분당에 위치한 미용실은 2014년도 경 임창정이 고향 친구(이하 S씨)를 돕기 위해 전액 투자하면서 오픈하게 됐다"고 밝히면서 "하지만 오픈 이후 미용실을 운영하는 데 있어 추구하는 방향이 맞지 않아 몇 개월 뒤 투자한 금액을 돌려받고 정리했다"고 해명했다.

연합뉴스 캡쳐,

자신의 초상과 이름을 배제하는 조건으로 S씨가 단독으로 미용실 운영을 이어갔다는 것이 소속사의 주장이다.

이후 S씨와 지금까지 연락이 끊긴 상태라고 주장했다.

또 "본인의 사진 등 초상권이 도용돼 영업이 이어져 온 사실 또한 알지 못했다"고 했다.

23일 지난 2014년 임창정이 지인 명의로 개업한 경기도 판교의 미용실이 최근 이용권 금액을 '먹튀'한 뒤 폐업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또한 해당 미용실 소속 디자이너들도 월급을 받지 못하고 폐업 사실을 알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피해 주민들은 고소를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014년 임창정은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판교 집 앞에 미용실을 차렸다고 알린 바 있다.

그는 "스케줄이 있을 때 빨리 머리를 하고 싶었다"며 "특별히 이유는 없고 어쩌다 보니 친구와 차리게 됐다"고 밝혔다.

당시 그는 자신의 SNS 계정에 "나 판교 집 앞에 헤어샵 내나 봐! 3월 25일 들러들 주세요"라는 글과 함께 미용실 홍보 전단 사진을 공개하며 직접 홍보에 나서기도 했다.

앞서 지난 21일에는 임창정이 운영하는 연기학원, 예스아이엠아카데미가 지난해 광고 촬영 후 배우들에게 출연료를 지급하지 않았다는 보도도 나왔다.

광고주인 업체 측이 아카데미 측에 배우들의 출연료를 모두 지급했으나 아카데미에서 이를 배우들에게 전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카데미 전 대표 A씨는 지난해 4월 임창정의 주가조작 논란 이후 학원이 망해 3000만원 이상의 출연료를 지급하지 못한 상태라면서도 임창정은 아카데미 운영에 관여하지 않았고, 모델로 사용한 것뿐이라고 선을 그었다.

해당 소식이 보도된 이후 임창정 소속사 예스아이엠 엔터테인먼트는 "예스아이엠아카데미는 예스아이엠엔터테인먼트 및 임창정과 전혀 무관한 회사"라며 "기사화된 출연료 미지급 사건 또한 임창정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라는 입장을 냈다.


[2024 부산세계탁구선수권] ''중국엔 안돼' 고정관념 깼다" 남자 탁구 화려한 마무리, 벌써 올림픽 기대된다, 

"한동안 우리나라가 중국에 쉽게 졌다.
팬들에게 이제는 '안된다'는 인식이 많았는데, 그걸 깬 것 같아 좋았다." 

'탁구 강국' 중국을 한때 벼랑 끝까지 몰아넣었다.

남자 탁구 국가대표팀이 그야말로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를 보여주며 다가올 올림픽에 대한 희망을 보여줬다.

장우진(29), 임종훈(27·한국거래소), 이상수(34·삼성생명), 박규현(19·미래에셋증권), 안재현(25·한국거래소)으로 구성된 세계랭킹 3위 남자 탁구대표팀은 24일 오후 1시 부산 해운대구 벡스코 초피홀(제1경기장)에서 열린 BNK부산은행 2024 부산세계탁구선수권대회 남자 본선 토너먼트 준결승에서 세계랭킹 1위 중국을 상대로 매치 스코어 2-3(3-1 0-3 3-2 0-3 0-3)으로 패배했다.
남자 탁구대표팀 장우진이 24일 오후 1시 부산 해운대구 벡스코 초피홀(제1경기장)에서 열린 BNK부산은행 2024 부산세계탁구선수권대회 남자 본선 토너먼트 중국과 준결승에서 포효하고 있다. /사진=2024부산탁구선수권대회조직위 제공,

한국은 첫 매치에서 에이스 장우진이 중국의 왕추친을 세트 스코어 3-1로 완파하며 예상 외의 산뜻한 출발을 보였다.

비록 임종훈이 세계 1위 판젠둥에게 0-3으로 완패하며 흔들렸지만, 이상수가 3단식에서 풀 세트 접전 끝에 3-2로 승리하며 희망을 보여줬다.
남자 탁구대표팀 임종훈, 이상수, 장우진(왼쪽부터)이 24일 오후 1시 부산 해운대구 벡스코 초피홀(제1경기장)에서 열린 BNK부산은행 2024 부산세계탁구선수권대회 남자 본선 토너먼트 중국과 준결승 종료 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2024부산탁구선수권대회조직위 제공,
하지만 4세트에서 장우진이 판젠둥에게 패하면서 승부는 원점이 됐고, 마지막 기대를 모았던 임종훈마저 힘을 쓰지 못하며 결국 아쉽게 역전패를 당했다.
탁구 최강국 중국은 남자 개인 세계랭킹 1위에서 5위까지를 모두 보유한 국가다.
이번 대회에서도 1위 판젠둥과 2위 왕추친, 3위 마룽이 주로 나와 다른 국가들을 압살했다.
이번 대회 조별예선 4경기에서 당연히 4전 전승을 거뒀고, 매치는커녕 세트를 내준 것도 단 2번에 그쳤다.
루마니아와 16강전도 퍼펙트 완승을 거둔 중국은 까다로운 상대인 일본과 8강전마저 3경기 모두 3-1로 승리하며 매치 스코어 3-0 완승을 챙겼다.
중국 남자 탁구대표팀. /사진=2024부산탁구선수권대회조직위 제공,

그런데 이런 중국을 상대로 장우진이 첫 매치를 따내면서 처음으로 중국에 패배를 안긴 곳은 한국이 됐다.
이어 이상수까지 3매치를 따내면서 심지어 이길 뻔한 상황까지 갔다.
비록 막판 중국이 다시 제 궤도에 오르며 4, 5단식을 모두 내줬지만, 누구도 뭐라할 수 없는 승부였다.

경기를 지켜본 '탁구 레전드'들도 감탄했다.
유승민(42) 대한탁구협회장 겸 대회 공동조직위원장은 "2001년 오사카 대회(김택수, 오상은, 유승민) 생각이 났다.
김택수 현 사무총장이 (결승에서 듀스 접전으로) 중국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었다.
(오늘 경기는) 이후 20년 넘게 중국이 전 세계 어느 팀을 상대로도 처음 나오는 경기였다.
소름 끼쳤다"고 말했고, 현정화(55) 대회 공동집행위원장도 "중국과의 경기에서 우리뿐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선수와의 경기에서 이런 경기를 10여 년 전을 다 떠올려 봐도 이런 팽팽한 경기를 본 적이 없다"고 이야기했다.

유승민 대한탁구협회장 겸 대회 공동위원장이 24일 오후 1시 부산 해운대구 벡스코 초피홀(제1경기장)에서 열린 BNK부산은행 2024 부산세계탁구선수권대회 남자 본선 토너먼트 중국과 준결승 경기를 보고 있다. /사진=2024부산탁구선수권대회조직위 제공,
주세혁(44) 감독과 선수들도 아쉬움 속에 희망을 봤다.
경기 후 공동기자회견에서 주 감독은 "우리 선수들의 의지력이 강해서 개인적으로 많은 기대를 했지만 이렇게까지 좋은 경기를 해줄 줄은 몰랐다"며 "기술이나 경기력을 떠나 하나의 팀으로서 강력한 팀워크를 바탕으로 똘똘 뭉쳐서 좋은 경기를 했다"고 분석했다.

첫 매치를 따냈던 장우진은 "최근에 중국에 져서 어떤 한 같은 게 있었는데, 우선은 그것을 푼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한동안 우리가 중국한테 너무 쉽게 지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래서 많은 팬들이나 국민들이 '이제는 안 된다' 하는 이미지가 강했던 것 같은데 그런 부정적 인식을 깨뜨린 것도 좋았다"고 밝혔다.
아쉬운 듯 기자회견장에서도 고개를 푹 숙였던 임종훈은 "형들이 너무 잘해주고, 응원도 많이 해주셔서 힘이 났다.
아쉽기보다는 아깝다.
다음에는 좀 더 잘해서 오늘 같이 아깝지 않고 후련하게 마치도록 준비 잘해보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선수들은 입을 모아 팬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동안 세계적인 탁구 경기에는 항상 중국 팬들이 많이 찾았는데, 이날 역시 경기가 열린 벡스코 초피홀에 오성홍기와 중국어 문구가 새겨진 응원피켓이 많이 보였고, "피셩(必勝, 필승)"이나 "짜이요(加油, 기름을 붓듯이 힘내라는 응원)" 같은 응원구호도 울려퍼졌다.
하지만 한국 팬들 역시 이에 못지 않게 경기장을 찾아 "대~한민국" 구호를 외쳤고, 선수들이 좋은 플레이를 할 때마다 이름을 연호했다.

베테랑 이상수는 "정말 응원도 많이 해주시고, 팬들 응원이 없었으면 힘들었을 경기였다"며 "앞으로 이렇게 계속 하다보면 더 좋은 결과가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주 감독은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이나 1988 서울 올림픽,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등 홈 경기에 강하다"며 "관심도 주시고 기도 살려주시고 응원해주셨다"고 고마움을 드러냈다.

남자 탁구대표팀 장우진, 임종훈, 안재현, 박규현, 이상수, 주세혁 감독(왼쪽부터)이 24일 오후 1시 부산 해운대구 벡스코 초피홀(제1경기장)에서 열린 BNK부산은행 2024 부산세계탁구선수권대회 남자 본선 토너먼트 중국과 준결승 종료 후 팬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사진=2024부산탁구선수권대회조직위 제공,
이제 대회가 종료되면 이번 단체전 대표팀은 해산할 예정이다.
이후 7월 말부터 열리는 2024 파리 올림픽을 위한 움직임에 들어간다.
이번 대회 8강 안에 들며 출전권을 얻은 대표팀은 오는 6월 18일 이후 출전 선수를 결정할 예정이다.
올림픽 단체전에서는 복식이 있어 이 조합 또한 신경써야 한다.

주 감독은 "(선수 선발) 그 전까지 후보선수 전체를 성장시키고, 누가 3명 안에 들어갈지 몰라 복식 조합 고민하며 훈련 잘 시켜야 한다"고 계획을 밝혔다.
그러면서 "올림픽 탁구 2회 연속 메달을 못 땄기 때문에 꼭 메달 획득하는 게 마지막 임무다"고 말했다.

이상수 역시 "올림픽에 대해선 아직 정해진 게 없다.
서로 전부 좋은 동료지만 경쟁자라고 생각한다.
큰 대회에서 계속 붙는다면 선의의 경쟁으로 실력을 높여 누가 나가더라도 메달 딸 수 있을 것이다"고 이야기했다.

그래도 이번 대회를 통해 자신감을 얻은 건 수확이다.
남자 탁구대표팀 장우진, 임종훈, 안재현, 박규현, 이상수, 주세혁 감독(왼쪽부터)이 24일 오후 1시 부산 해운대구 벡스코 초피홀(제1경기장)에서 열린 BNK부산은행 2024 부산세계탁구선수권대회 남자 본선 토너먼트 중국과 준결승 종료 후 팬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사진=2024부산탁구선수권대회조직위 제공,
주 감독은 "2022년 부임했을 때 우리나라 선수들이 2020 도쿄 올림픽이 끝나고 자신감 떨어진 게 느껴졌다.
자신감을 심어주는 데 집중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베테랑 선수들의 합류로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며 '누구라도 꺾을 수 있다'는 메시지가 된 것이다.

유 회장은 "우리 선수들이 이렇게 잘하는데도 흔들리지 않는 중국을 보며 소름 끼쳤다.
그럼에도 분명 빈틈은 있다.
이 빈틈을 찾아내고 우리가 더 발전하는 것이 숙제다.
코칭스태프들과 어떻게 이 빈틈을 파고 들어야 할지 깊이 논의를 해보겠다"고 향후 과제를 언급했다.


"도쿄여행 가려는데 출국금지…이곳이 북한이냐" 전공의 성토,,,

병무청, 전공의 '국외여행 허가' 지침 강화,

신청 시 일단 보류하고 본청에 명단 통보,
"강력범죄자 취급"vs"사직서 수리 안 돼" 

"동료들이 떠난 후 일이 너무 몰리고 힘들어서 사직한 전공의 후배가 쉴 겸 도쿄 여행 가려고 했더니, 병무청에서 출국 금지했다네.

혹시 나 북한 사는 거 맞냐.

출국금지 영장도 안 나왔는데 출국금지, 이거 위헌 아니냐."

전공의들,

빅5 병원의 전공의가 오전 6시를 기해 근무를 중단한 20일 서울 용산구 대한의사협회에서 열린 '대한전공의협의회 2024년도 긴급 임시대의원총회'에 참석한 전공의들이 총회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병역 미필 전공의들이 국외여행 허가를 신청한 경우 일단 보류하고 본청에 명단을 통보하라는 지시를 병무청이 지방청에 내린 가운데, 자신이 의사임을 인증한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강제로 출국금지를 당했다는 하소연이 터져 나왔다.

21일 병무청은 지방청에 보낸 공문에서 “최근 의대 정원 확대를 둘러싼 ‘전공의 집단사직서 제출’ 언론 보도와 관련해, 현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 의무사관후보생(전공의) 국외여행 허가 지침을 보다 세분화해 운영한다”고 밝힌 바 있다.

병역법에 따라 병역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대한민국 남성은 모두 국외여행 전에 병무청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남성 의사들은 보통 전공의 수련 과정을 마치고 군의관이나 공중보건의사(공보의) 등으로 병역 의무를 이행하는데, 그전까지는 의무사관후보생 신분으로 있다.

이 경우 국외여행 허가 신청 시 소속 기관장의 추천서가 필요하다.



"사직서 수리 안 돼…정상 수련하는 전공의와 동일"

빅5 병원을 비롯한 전국 전공의들의 사직서 제출 후 근무 중단이 이어지고 있는 21일 서울 한 대형병원을 찾은 내원객들이 진료를 기다리고 있다.

정부는 최근 전공의 집단행동으로 소속 병원에 사직서를 제출한 경우에도, 정상 수련 중인 전공의와 마찬가지로 소속 기관장의 추천서를 꼭 받도록 했다.

아직 사직서가 정식으로 수리되지 않았을뿐더러, 정부의 업무개시명령 대상자가 됐기 때문이다.

다만, 본인 질병 등 사유로 정상 퇴직해 업무개시명령 대상자가 아닌 경우 현행대로 소속 기관장의 추천서를 생략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추천서를 제출하지 않으면 일단 허가를 보류하고 메모 등의 방식으로 본청에 즉시 통보하도록 했다.

이런 방침에 대해 대한의사협회 비상대책위원회 측은 “병무청은 중범죄자들에게만 제한적으로 발령되는 출국 금지 명령이나 다름없는 공문을 보냈다”며 “정부가 의사들을 강력범죄자와 동일시하는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주수호 비대위 언론홍보위원장은 “사직서를 제출했는데도 소속 단체장 허가를 받아야 하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

정부의 전공의 기본권 탄압은 이성을 상실하는 수준”이라고 주장했다.

병무청 측은 “병무청이 이들의 국외여행 강제 금지를 했다는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며 “의대 증원 방침에 반발해 사직서를 제출한 채 집단행동에 돌입한 병역 미필 의무사관후보생 포함 전공의들의 사표가 아직 수리되지 않은 상태”라고 반박했다.

이어 “혼선을 방지하기 위해 병역법에 따라 이들의 국외여행 허가는 소속 기관장의 동의를 얻어야 할 사안이라는 기존 입장을 설명한 것”이라고 밝혔다.


중국서 폭동 일으킨 북 노동자들,,,김정은 정권 통제력 상실,,,?

이를 두고 북한판 노동운동의 태동이라는 해석과 함께 김정은 정권이 주민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대표적 사례가 될 거라는 분석도 나왔습니다.

중국과 러시아 등 우방국에 해외노동자를 보내 김정은 국무위원장 일가를 위한 통치자금을 벌어들이고 있는 북한.

해외노동자들은 기본적으로 노예 상태에서 일하며 임금을 착취당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이런 가운데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중국 지린성에 파견된 북한 노동자 약 2천 명이 지난달 임금 체불에 항의하며 공장을 점거하고 시위를 벌였다고 보도했습니다.

신문은 또 인질로 잡힌 관리직 대표가 노동자들에게 폭행당해 숨졌다며 노예 상태를 받아들이지 않는 북한 젊은이들의 반골 의식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고 전했습니다.

 이에 대해 북한 매체는 관련 내용을 전혀 보도하지 않고 있고 중국 역시 공식답변을 피하고 있습니다.

국가정보원은 해외 북한 노동자들의 열악한 생활 여건으로 인해 다양한 사건 사고가 발생하고 있다며 비슷한 동향이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이번 집단 파업을 북한판 노동운동의 태동이라고 본 통일연구원 보고서도 나왔습니다.

보고서는 이번 시위가 집단 차원의 반발이란 점에서 집회, 시위의 자유가 억압된 북한 사회에선 대단히 충격적인 방식이라고 해석했습니다.

특히 북한 당국의 직접적 책임을 요구했다며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국가라는 개념을 정립해 불만을 분명히 표현하고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더 나아가 김정은 정권의 주민 통제력 상실을 보여주는 사례가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탁민지 / 통일연구원 연구원 : 내부에서 통제를 강화하는 모습을 몇 년 전부터 계속 보여주고 있는데 역설적으로 통제력이 그만큼 흔들리는 데 대한 방증이라고 보거든요.

통제력이 흔들리는 모습이 이번 사태를 통해 극적인 형태로 표출된 게 아닌가….]

유엔 산하 국제노동기구, ILO는 일부 국가에서 북한 노동자에 대한 학대 실태를 파악하고 있다며 강제노동 근절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마루타 100% 사망케한 '악마의사' "말 피 뽑아 인간에 주사했더니…"

생체 실험과 세균 전쟁, 

세균무기를 개발한답시고 생체실험이란 끔찍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던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石井四郎, 1892-1959, 군의중장) 못지않은 '악마의 의사'가 2명 있다.

△이시이에 이어 731부대장에 올랐던 키타노 마사지(北野政次, 1894-1986, 군의중장),

△'군마방역'으로 위장한 관동군 100부대장 와카마쓰 유지로(若松有次郎, 1897-1977, 군의소장)이다.

이 둘은 이시이와 마찬가지로 1945년 패전 뒤 전범자로 체포될까 두려워 잠 못 이루는 밤을 지새우곤 했다.

하지만 돌아가는 분위기를 곧바로 눈치 챘다.

세균전 관련 정보에 목말라 하는 미국의 모습을 보면서, 생존의 기회를 잡았다.

살아있는 사람을 '마루타'(통나무)로 일컬었던 생체 실험의 희생양으로 삼아야만 얻을 수 있는 '피 묻은' 세균 자료들을 미국에 건네주며 '전쟁범죄자' 꼬리를 뗐다.

1947년 말 맥아더사령부의 조사관들은 일본이 731부대를 중심으로 세균전을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끔찍한 생체실험으로 숱한 사람들이 '마루타'로 희생됐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됐다.

731부대의 지휘관들이 전쟁범죄자로 기소될 충분한 양의 범죄사실이 조사관들의 문서철에 기록됐다.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 (100부대장) 와카마쓰 유지로, (731부대장) 키타노 마사지 외 여러 세균전 주역들은 조사관들이 반복해서 묻는 질문에 거짓말과 기만, 은폐, 무시 등으로 이리저리 교묘하게 피해가며, 기소되지 않으려 갖은 애를 쓰고 썼다.

하지만 무심코 혐의사실을 시인하는 경우도 있었고, 또한 이전의 동료들이 서로서로를 전범으로 몰아가기도 했다](셸던 해리스, <일본의 야망과 죽음의 공장>, 눈과마음, 2005, 420쪽)

▲ 731부대를 이끌었던 이시이 시로(왼쪽)와 키타노 마사지(오른쪽). 산 사람을 마루타로 삼아 생체실험으로 세균무기를 개발해냈던 전쟁범죄자들은 미국과의 ‘더러운 거래’로 살아남았다.

조사 초기에 731부대 간부들은 서로 입을 맞추었다.

자신들의 전쟁범죄를 감추고 부인하면서 조사관을 속였다. 특히 문제가 되는 생체실험은 없었다고 손을 내저었다.

1946년 초에 파견된 2차 조사관인 아보 톰슨 중령이 생체실험에 대해 집요하게 물었지만 돌아온 답은 한결같이 '그런 일 없었다'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전쟁범죄의 공범 집단 안에서도 균열이 일어났다.

이를테면, (이 글 밑에서 살펴보듯이) 키타노 마사지는 731부대를 번갈아 이끌었던 이시이 시로를 흉보고 깎아내렸다.

 

생체실험하며 이름만 '군마 방역'인 100부대,

먼저, 와카마쓰 100부대장. 도쿄제국대학 농학부 수의학과를 나온 수의사 출신이다.

도쿄 전염병연구소에 있다가 수의관으로 군에 들어갔고, 1942년 100부대장을 맡았다.

정식명칭이 '관동군 군마방역창'인 100부대는 말이나 동물에 대한 생물전을 연구한다며 1936년에 만들어졌다.

731부대와 마찬가지로 100부대는 관동군 직속으로, 생체실험과 세균전을 펼쳤던 전쟁범죄 집단이다.

100부대는 연구원(대부분이 수의관 장교)과 일반 병사들 합쳐 800명쯤 되었고, 보조 노동력으로 300명쯤의 중국인을 둔 소규모 부대였다(731부대는 군인, 군속 합쳐 3500명 규모).

부대 이름만 '군마방역'이고, 실제로는 가축뿐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에 대한 해부 실험도 마다하지 않았다.

적의 군마를 죽일 세균을 개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세균무기를 만들려고 대량의 페스트균, 탄저균, 비저균 등을 배양했다.

731부대와 함께 공동연구를 하기도 했다.

100부대(창춘)는 1855부대(베이징), 1644부대(난징), 8604부대(광둥) 등과 더불어 '방역급수부'로 위장한 중국 주둔 일본 세균전 부대들을 아우르는 이른바 '이시이 기관'의 하나였다.

100부대장 와카마쓰는 이시이의 영향력 아래 전쟁범죄를 저질렀던 하수인이었다(이시이 기관에 대해선 연재 55 참조).


하바롭스크 재판에서 드러난 100부대 죄상

100부대의 죄상은 1949년 소련 하바롭스크 전범재판에서 밝혀졌다.

소련군에 항복한 관동군사령관 야마다 오토조(山田乙三, 대장, 강제노동형 25년)에 따르면, 100부대는 세균무기를 만들어 목장이나 가축, 저수지를 감염시키는 방법으로 군사적 파괴활동을 했다.

이를테면, 비저균으로 감염시킨 말들을 부대 근처의 각 마을에 풀어 마비저병을 유행시켰다(진청민, <일본군 세균전>, 청문각, 2010, 9쪽 참조).

100부대가 생체실험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하바롭스크 법정에 섰던 미토모 가즈오 (三友一男, 수의중위, 강제노동형 15년)의 입에서도 나왔다.

미토모는 피실험자 몰래 수면제나 헤로인, 또는 피마자 독을 음식물에다 섞어 먹여 의식을 잃게 만든 뒤 생체 실험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희생자 다수는 중국인들이었고, 러시아인들도 있었다(진청민, 19쪽).

관동군 수의부장 다카하시 다카아쓰(高橋隆驚, 군의중장, 강제노동형 25년)도 100부대가 전쟁범죄를 벌였음을 인정했다. 다카하시에 따르면, 100부대는 농작물 파괴와 가축 살상은 물론 사람을 죽이는 페스트균, 콜레라균, 장티푸스균, 비저균, 탄저균 등 치명적인 세균을 만들고 뿌려 전염병 피해를 입혔다,

야마다 사령관과 미토모 중위는 1956년 소련·일본 수교 때 풀려나 일본으로 돌아갔으나, 다카하시 중장은 1952년 시베리아 강제노동수용소에서 뇌출혈로 죽었다,

 

"생체실험은 물론 시신 훼손도 안했다"

1945년 8월 재빨리 일본으로 도망쳐온 와카마쓰는 1년쯤 오사카 근처에 숨어 살았다.

1차 조사관 샌더스나 2차 조사관 톰슨도 그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갔다.

1946년 9월 맥아더사령부의 법무국 조사관들이 숨어있던 와카마쓰를 찾아냈다.

오사카 사무실에서 이뤄졌던 심문은 (이시이 시로에게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전쟁범죄 추궁이 아닌, 면담(인터뷰) 수준이었다.

'오로지 진실만을 증언하겠다'는 서약도 없었다. 와카마쓰의 진술을 들어보자.

[내가 아는 바에 따르면, 인간을 생체실험 도구로 사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한 비저(말, 당나귀, 노새 등에 앓는 치사율 높은 전염성 질병)에 감염된 사람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해부해본 적도 없다.

일본인 수의사 2명이 비저에 걸려 죽은 적이 있지만 그들을 해부해보는 것도 거절했다.

죽은 사람의 영혼을 존중했기 때문에 죽은 뒤 시신을 훼손한 적도 없다](셸던 해리스, 413-414쪽)

3차 조사관 펠은 이시이 시로를 세 번째 '심문'한 뒤인 1947년 5월29일, 와카마쓰와 마주했다.

이시이를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펠은 '전범 기소와는 전혀 관계없이 세균전 정보를 듣고 싶다'고 안심시키려 애썼다.

와카마쓰도 이미 분위기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긴장하는 기색이 없었다.


 

고엽제 관련 제초제 정보도 넘겨,

심문 초반에 와카마쓰는 '이시이 시로의 731부대와 관계된 일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이시이의 부대는 의무부대고, 나의 부대는 수의 부대였기에 정보를 공유한 적도 없다'고 뻔한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와카마쓰도 눈치가 없진 않았다.

전범 면책이 이뤄질 것이란 분위기가 무르익었기에, 그는 부하들과 함께 100부대의 활동을 자세하게 작성해서 제출하겠다고 했다.

펠 조사관은 활동 보고서를 1주일 뒤에 받을 것을 다짐하면서 그를 풀어주었다.

와카마쓰는 약속을 지켰다.

▲731부대 운동회 때 심사위원장을 맡은 키타노 마사지 군의중장 모습. 키타노는 2년 반 동안(1942년 8월~1945년 3월) 731부대에 머물면서 페스트 벼룩 세균무기 개발에 관심을 쏟았다. ⓒ위키미디어 캡처,

그와 연락을 주고받은 100부대의 연구원 10명도 그들의 연구결과를 보고서로 내놓았다.

한 연구원은 곡물에 세균을 옮겼을 경우 생겨날 곡물 질병에 관한 19쪽의 영문 보고서를 내놓아 미 조사관들을 기쁘게 했다.

와카마쓰의 한 부하는 화학 및 식물성 제초제에 관한 연구보고서도 내놓았다.

여기엔 훗날 베트남에서 널리 쓰여져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에이전트 오렌지' 같은 고엽제(defoliant) 관련 정보가 담겨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와카마쓰는 일본의 큰 제약회사인 니혼이야쿠(日本医薬)공장장으로 노후를 편히 지냈다(731관련자들의 전후 행태는 따로 다룰 예정임).

 

세균무기 개발하려 생체실험 되풀이,

이시이 시로에 이어 731부대장에 올랐던 키타노 마사지(北野政次, 1894-1986)도 특급 전쟁범죄자다.

키타노는 만주 선양(瀋陽, 옛이름은 봉천) 의과대학 세균학 교수로 2년 반 동안 있다가 1942년 8월 731부대 제2대 부대장이 됐다.

만주 의과대학에서 기타노가 순수하게 세균학 강의만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 만주에 있던 일본 군의관들과 의학자들은 항일 포로나 스파이를 '인간 모르모트'로 삼아 인체 실험을 하거나 생체해부를 해도 된다는 인식을 가졌다고 알려진다,

15년전쟁과 일본의 의학의료연구회,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731부대>, 건강미디어협동조합, 2020, 209쪽 참조).

2년 반 동안( 1942년 8월~1945년 3월) 731부대장으로 있으면서 키타노 마사지는 전임자 이시이 시로가 했던 세균무기 개발을 꾸준히 해나갔다.

그런 사실을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731부대 병사였던 우에다 야타로(上田彌太郞)는 패전 뒤 중국 푸순 감옥에 갇혔다.

1954년 그가 남긴 공술서에 따르면, 키타노가 731부대장으로 있던 1943년 5월 어느 날 생체실험이 벌어졌다.

나는 731부대 제4부 제3반에서 생체실험의 관찰조수로 있었다.

관찰 2일 째에 2명이 죽었다.

다음날 아침 체온 측정하러 (수감자 감옥에) 가보니 1명이 죽어 있었다.

죽은 이는 해부된 뒤에 보일러실에서 태워졌다.

그 시체의 특징은 50세 정도로 손가락이 매우 길고 노동을 별로 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같은 날 오후에 1명이 죽고 다음날 또 1명이 죽었다.

그 실험의 목적은 연구실에서 시험한 세균을 실제로 인체에 넣어 효력을 확인하고, 보다 강력한 독성을 갖는 세균을 연구 개발하는 자료를 얻기 위해서였다](한민족문화교류협의회, <일본관동군 731부대 생체실험증거자료집> 2009, 205쪽).

위 공술서를 보면, 키타노 731부대장은 전임자였던 이시이와 마찬가지로 '악마의 의사집단'의 수괴였음이 드러난다.

키타노와 이시이 둘 다 '마루타'들을 생체실험용으로 희생시켜 가면서 보다 독성이 강하고 살상력이 높은 세균무기 개발에 미쳐있었다.

키타노는 일본에서 최신 장비를 들여와 작업의 효율을 높이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키타노는 2년 반 동안 731부대에 머물면서 특히 페스트균을 가진 벼룩을 세균무기로 사용하는 방법에 관심을 쏟았다.

이 연구는 1945년 초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고, 이시이 시로가 1945년 3월 부대장으로 복귀하면서 더욱 활기를 띠게 됐다.

 

"인간이 아니라 원숭이 실험했을 뿐"

이시이가 731부대장으로 복귀하자, 키타노는 지나파견군 제13군의부장(중장)으로 옮겨갔다.

1945년 가을 맥아더사령부 정보담당(G-2)인 참모2부의 찰스 윌로비 준장은 이시이만큼이나 세균전 정보를 지니고 있을 키타노의 행방이 궁금했다.

추적 끝에 그가 상하이 일본군 포로수용소에 붙잡혀 있는 것을 알았다.

윌로비는 키타노의 세균정보가 타국, 특히 소련에 넘어가선 안 된다고 여겼다.

1946년 1월9일 키타노는 미 군용 특별기를 타고 일본 아츠기 공항에 내렸다.

그 길로 감옥에 갈 것으로 키타노는 짐작했지만, 정작 그가 머물게 된 곳은 도쿄의 한 호텔 방이었다.

이시이가 도쿄 신주쿠의 자택에 연금된 상태와 비슷했다.

분위기도 심문이 아니라 면담을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참모2부의 화이트사이드 대령이 키타노와 얼굴을 마주했다.

키타노는 100부대장 와카마쓰처럼 그럴듯한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메릴랜드주 데트릭 기지의 문서보관서에 있는 심문속기록에 따르면, 키타노는 '나는 모르쇠'로 버텼다.

세균전의 공격과 방어에 관하여 731부대에서 어떤 연구를 했는가, 상세한 데이터를 내놓으라고 했지만, 그는 애매한 말로 얼버무렸다.

중국인 죄수들을 생체실험에 쓴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인간을 실험에 쓴 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우겼다.

"원숭이나 쥐, 다람쥐 같은 돌물들을 방역 차원에서 실험했을 뿐, 인간을 생체실험하지 않았다."

심문은 아무런 성과도 없이 헛되이 시간만 보냈다.

머릿속으로 F자가 들어간 쌍욕을 참았을 화이트사이드 대령은 (1차 조사관 샌더스 중령에 이어 2차 조사관으로 파견된) 톰슨 중령에게 키타노 심문을 넘겼다.

1946년 2월6일 톰슨 중령이 키타노를 만났지만 싱겁게 끝났다.

톰슨이 그에게 '중국인 포로를 생체실험용으로 쓴 적이 있느냐고 묻자,

'인간을 실험 재료로 쓴 적 없다'는 등 거짓 답변이 돌아왔다.

 

이시이와 키타노, 서로를 라이벌로 의식,

키타노와 이시이 둘은 성격이 달랐다.

이시이 시로는 드러내놓고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편이었고, 유흥비를 대느라 공금에 손을 대 문제가 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키타노는 그런 이시이를 경멸했다.

잔인함에서는 서로 닮았다.

나이는 이시이가 2년 많았지만 의학박사 학위는 키타노가 먼저 받았다.

둘은 라이벌 의식을 지녔고 사이도 좋진 않았다(키타노는 도쿄 제국대학, 이시이는 교토 제국대학 출신).

1942년 일본의학회 총회 때 찍은 오래된 흑백사진을 보면 둘은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다.

둘의 관계가 불편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둘 다 군도(軍刀)를 허벅지 사이에 끼고 앉은 것이 인상적이다,

1959년 이시이 시로가 후두암으로 죽었을 때 키타노가 장례위원장을 맡긴 했다.

731부대장이란 경력 때문에 이름뿐인 위원장을 맡았을 것이다).

이시이를 라이벌로 여겼기 때문일까,

그에게 불리한 말도 서슴지 않았다.

'일본인이 생물무기(BW) 연구를 한 곳은 731부대 한곳 뿐'이라 주장하면서, 이시이가 도쿄 지도자들의 승인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BW 연구를 했다고 비난했다.

만약 '폐하'(히로히토 일왕)가 알았다면 분명히 연구를 중단시켰을 것이라는 주장마저 폈다.

톰슨 조사관은 끝내 키타노로부터 세균전 정보를 얻어내는 것을 포기하고 돌아섰다.

톰슨도 화이트사이드 대령처럼 '저 인간은 뻔뻔한 거짓말쟁이'라고 F자 쌍욕을 속으로 삼켰을 것이다.

세균전 정보를 캐내려는 미국은 키타노를 그냥 놔두지 않았다.

1947년 4월7일 도쿄 사령부로 불려온 키타노는 '알고 있는 세균전 정보를 종이에 적어 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분위기로 봐서 자칫 구속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낀 키타노는 그곳 사령부 규격용지로 11장에 이르는 긴 진술서를 써내려 갔다.

그는 자신에게는 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731부대의 구조와 5개 지부의 활동 상황을 털어놓았다.

▲전범 면책을 대가로 731부대 연구원들이 미국에 제공한 410쪽 분량의 인체실험 부검보고서 영문 표지. ‘A’는 탄저균을 나타낸다. 미 역사학자 셸던 해리스가 미 유타주 더그웨이 도서관에서 찾아냈다. ⓒ더그웨이 도서관 캡처,

이시이가 했던 생물무기(BW) 개발에 대해서도 조심스레 용어를 골라가며 썼다.

이시이의 연구업적을 깎아내리며, 과학적 가치가 별로 없는 것들이라 했다.

반면에 그 자신은 티푸스와 페스트를 비롯한 다양한 전염병을 막는 백신을 개발했고, 성병을 치료하는 혈청을 만들었다고 자랑했다.

그렇다고 일본군 성노예로 죽을 고생을 했던 '위안부' 여성들에게 도움이 되진 않았을 것이다.

진술서를 쓰고 얼마 지나지 않아 키타노는 3차 조사관으로 파견된 펠 조사관의 '부드러운 심문'을 받았다.

그 무렵 이시이와 마찬가지로, 미국이 자신을 전쟁범죄자로 기소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 키타노는 미국이 그토록 바라는 세균정보들을 펠 조사관에 내놓았다.

페스트, 탄저병, 출혈열, 발진티푸스, 장티푸스, 이질 등을 일으키는 세균 실험결과를 알려주었다.

콜레라, 파상열, 살모렐라와 각종 식물병에 대한 정보도 건네주었다.

그것들이 731부대에서 마루타를 희생시켜가며 얻어낸 '피 묻은' 자료였음은 말할 나위 없다.



"면책 문서 없지만, 전범 처벌도 없다"

1947년 9월8일 미국 정부는 국무부를 통해 도쿄의 맥아더사령부에 극비 전문을 보냈다.

이시이 시로를 비롯한 731부대 간부들의 처리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 요점은 '그들을 전범자로 처리하지 않기로 했으니, 가능한 한 많은 세균전 자료를 수집하라'는 것이었다.

전문 내용은 이러했다.

[△맥아더 사령관은 이시이 시로와 기타 관련자들에게 면책(免責) 약속을 하지 말고 최대한 많은 (세균전) 정보를 수집한다.

△이시이 등에 대해 전쟁범죄 관련 (사면) 약속은 하지 않았지만, 미 당국은 미국의 안전보장을 위해 이시이 및 그 일당들의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지 않을 것이다](궈청줘우·랴오잉창,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의 세균전 실록>, 베이징 연산출판사, 1997, 451쪽. 진청민 <일본군 세균전>, 청문각, 2010, 910쪽에서 재인용).

맥아더 사령부에 보낸 전문에서 미국 정부가 이시이 일당에게 전쟁범죄를 덮어준다는 약속을 문서로 분명히 못 박지 않으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만에 하나 '면책 문서'가 언론에 보도되거나 특히 소련에 알려질 경우, 미 정치권이나 언론에서 논란이 되기 마련이다.

자칫 이를 둘러싼 청문회까지 열려 책임을 따져 물을 수도 있다.

그런 후폭풍을 피하려면? 문서라는 증거를 남기지 않는 게 낫다.

이시이 일당의 전쟁범죄를 덮는 것은 물론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하지만 미 정부나 군부 입장에선 문서 파동보단 낫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런 판단 아래 미국은 세균전 정보를 '내부 정보'로 처리하고 '전쟁범죄의 증거'로는 삼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4차 조사관 힐, 편하게 정보 챙겼다,

미국 정부가 전범 면책 원칙을 세운 뒤인 1947년 10월28일, 에드윈 힐(데트릭 세균연구소 기초과학부 주임)이 4차이자 마지막 조사관으로 파견됐다.

그는 데트릭 기지의 병리학자 조셉 빅터 박사와 함께 일본에 갔다.

힐 조사관에게 주어진 임무는 앞의 펠 조사관이 들고온 세균정보 가운데 정리가 잘 안 된 자료들과 궁금한 사항들을 점검하는 것이었다.

특히 만주에서 가져온 인체 해부 표본과 해부 기록들을 확보하려 했다.

1개월 넘게 이어졌던 조사 기간 중 힐과 그의 파트너 빅터는 20명가량의 일본 세균전 관련자들을 만났다.

힐 조사관은 앞서 다녀간 3명의 조사관들에 견주어 훨씬 일이 편했다.

전임자들처럼 '전쟁범죄를 추궁하러 온 것이 아니다'라는 말조차 꺼낼 필요가 없었다.

미국에 협력한다면 전쟁범죄자로 넘기지 않을 것이 확실해진 시점에서 731부대 간부들은 저마다 감춰놓았던 '피 묻은' 실험 자료들을 내놓았다.

힐이 1947년 12월 12일에 쓴 보고서를 보자.

[조금은 순진한 어조로 조사를 받은 과학자들이 자발적으로 정보를 털어놓았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면담을 진행하는 동안 전범재판에 기소되는 걸 막아주겠다는 말을 할 필요조차 없었다](더그웨이 도서관 소장 문서번호 008, 해리슨 462쪽).

 

"말의 피를 뽑아 인간에 주사했다"

그 과정에서 이시이 시로가 일본 육군참모총장의 훈령을 어기며 폐기하지 않고 챙겨온 8000여 장의 세균전 실험 관련 슬라이드, 3권의 인체 해부 보고서(페스트, 탄저, 비저 생체실험 관련)를 확보했다.

기꺼이 세균전 자료를 내놓은 자 가운데엔 이시이 시로에 이어 731부대장을 지냈던 키타노 마사지도 있었다.

그는 생체실험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이를테면, 그가 내놓은 송고열병에 관한 문서엔 이런 끔찍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다음 환자는 질병에 감염되어 죽어가는 환자의 간이나 비장 또는 콩팥에서 뽑은 피나 직접 혈관에서 뽑은 피로 감염시켜서 얻었다.

환자들을 오래 견디게 하기 위해 모르핀을 사용했다.

열병에 갈린 사람의 피를 말에게 넣었다.

잠복기간이 끝나자 5~7일 사이에 15마리 가운데 6마리가 열병 증상을 나타냈다.

열병에 걸린 말의 피를 뽑아 다른 말에 주사했고, 마지막으로 인간에게 주입했다.

실험대상자들은 100% 사망률을 나타냈다] (더그웨이 도서관 소장 문서번호 017, 해리스 463쪽).

이시이 시로도 그동안 입을 맞춰온 부하들과 함께 '마루타'를 생체실험으로 희생시키면서 만든 '피 묻은' 세균전 자료들을 담은 네 편의 보고서를 미국에 넘겨주었다.

△731부대 연구원 18명이 쓴 '세균무기로 생체실험을 한 보고서'(60쪽 분량)

△농작물을 파괴한 세균전 연구(20쪽 분량)

△가축에 관한 세균전 연구(연구원 10명 참여)

△이시이가 직접 쓴 '20년 동안의 전반적인 세균전 연구에 대한 결론' 등이다.

여기에다 8000장 분량의 세균무기 생체실험, 생체해부의 병리학 표본과 슬라이드가 덧붙여졌다.

 

"약간의 압박만으로 숨겨둔 자료 받아냈다"

일부 악마의 의사들은 자료를 내놓으면서도 일부는 숨겨두려다 조사관의 예리한 눈에 들키기도 했다.

전 731부대 연구원이었던 이시카와 다치오(石川太刀雄)가 그랬다.

그가 일하는 가나자와대학의 연구실에서 생체실험 자료를 건네받으려 했던 힐 조사관의 보고서를 보자.

[이시카와가 갖고 있는 표본이 전혀 정리돼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약 500증례에서 채취한 인체 표본 목록을 만들었는데, 조사할만한 표본은 400증례뿐이었고, 다른 수많은 자료가 어딘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하지만 처음 제출된 것(400증례)과 함께 약간의 압박만으로도 나머지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15년전쟁과 일본의 의학의료연구회, 87쪽).

위 문장에서 '약간의 압박'이란 표현은 그 무렵 조사관들과 731부대 전범들 사이의 신경전을 떠올린다.

여기서 '500증례'라면 살아있던 '마루타' 500명을 생체실험으로 죽였다는 끔찍한 얘기가 된다.

힐 조사관은 일본에서 거둔 조사 성과에 뿌듯한 마음을 지닌 채 자신의 보고서를 이렇게 마무리했다(연재 58에 썼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줄여서 옮긴다).

[인체실험을 꺼림칙하게 여기는 우리 연구실에서는 이런 (세균)정보를 알아낼 수 없다.

이 자료를 얻기 위해 들인 총액은 25만 엔이다.

이 연구의 가치에 견주면 아주 작은 액수일 뿐이다] (靑木富貴子, <731 石井四郞と細菌戰部隊の闇を暴く>, 新潮社, 2008, 438쪽).

힐 조사관은 자신에게 세균자료를 건네준 731부대 전범자들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보고서 끝에 '이 정보를 자발적으로 제공한 개개인이 그 일로 당황하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했다.

'전범 추궁을 더 이상 하지 말아달라'는 뜻이다.

힐은 또한 '이 정보가 타인의 손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모든 노력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그가 말하는 '타인'은 곧 소련을 가리킨다.

이렇듯 미국은 20세기 최악의 전쟁범죄자들과 '더러운 거래'를 했다.

도쿄전범재판에서 이들의 죄를 물어야 한다는 생각을 지닌 검찰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도쿄재판의 수석검사 조지프 키넌은 맥아더사령부의 정보(G-2) 책임자였던 찰스 윌로비 준장(참모2부장)과 손을 잡고 정의감 넘쳤던 그 검찰관(육군 대령)을 미국으로 쫓아냈다.

도쿄전범재판 법정에서 731부대의 전쟁범죄가 입에 오르내리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미국의 은폐 기록과 일본의 만행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저지른 만행(1932년~1945년)과 전후 미국의 사실 은폐에 대한 고발, "말 피 뽑아 인간에 주사했더니…"

세균무기를 개발한답시고 생체실험이란 끔찍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던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石井四郎, 1892-1959, 군의중장) 못지않은 '악마의 의사'가 2명 있다.

△이시이에 이어 731부대장에 올랐던 키타노 마사지(北野政次, 1894-1986, 군의중장), △'군마방역'으로 위장한 관동군 100부대장 와카마쓰 유지로(若松有次郎, 1897-1977, 군의소장)이다.

이 둘은 이시이와 마찬가지로 1945년 패전 뒤 전범자로 체포될까 두려워 잠 못 이루는 밤을 지새우곤 했다.

하지만 돌아가는 분위기를 곧바로 눈치 챘다. 세균전 관련 정보에 목말라 하는 미국의 모습을 보면서, 생존의 기회를 잡았다.

살아있는 사람을 '마루타'(통나무)로 일컬었던 생체 실험의 희생양으로 삼아야만 얻을 수 있는 '피 묻은' 세균 자료들을 미국에 건네주며 '전쟁범죄자' 꼬리를 뗐다. 

1947년 말 맥아더사령부의 조사관들은 일본이 731부대를 중심으로 세균전을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끔찍한 생체실험으로 숱한 사람들이 '마루타'로 희생됐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됐다.

731부대의 지휘관들이 전쟁범죄자로 기소될 충분한 양의 범죄사실이 조사관들의 문서철에 기록됐다.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 (100부대장) 와카마쓰 유지로, (731부대장) 키타노 마사지 외 여러 세균전 주역들은 조사관들이 반복해서 묻는 질문에 거짓말과 기만, 은폐, 무시 등으로 이리저리 교묘하게 피해가며, 기소되지 않으려 갖은 애를 쓰고 썼다.

하지만 무심코 혐의사실을 시인하는 경우도 있었고, 또한 이전의 동료들이 서로서로를 전범으로 몰아가기도 했다](셸던 해리스, <일본의 야망과 죽음의 공장>, 눈과마음, 2005, 420쪽) 

조사 초기에 731부대 간부들은 서로 입을 맞추었다.

자신들의 전쟁범죄를 감추고 부인하면서 조사관을 속였다.

특히 문제가 되는 생체실험은 없었다고 손을 내저었다.

▲ 731부대를 이끌었던 이시이 시로(왼쪽)와 키타노 마사지(오른쪽). 산 사람을 마루타로 삼아 생체실험으로 세균무기를 개발해냈던 전쟁범죄자들은 미국과의 ‘더러운 거래’로 살아남았다.

1946년 초에 파견된 2차 조사관인 아보 톰슨 중령이 생체실험에 대해 집요하게 물었지만 돌아온 답은 한결같이 '그런 일 없었다'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전쟁범죄의 공범 집단 안에서도 균열이 일어났다.

이를테면, (이 글 밑에서 살펴보듯이) 키타노 마사지는 731부대를 번갈아 이끌었던 이시이 시로를 흉보고 깎아내렸다. 


생체실험하며 이름만 '군마 방역'인 100부대,

먼저, 와카마쓰 100부대장. 도쿄제국대학 농학부 수의학과를 나온 수의사 출신이다.

도쿄 전염병연구소에 있다가 수의관으로 군에 들어갔고, 1942년 100부대장을 맡았다.

정식명칭이 '관동군 군마방역창'인 100부대는 말이나 동물에 대한 생물전을 연구한다며 1936년에 만들어졌다.

731부대와 마찬가지로 100부대는 관동군 직속으로, 생체실험과 세균전을 펼쳤던 전쟁범죄 집단이다. 

100부대는 연구원(대부분이 수의관 장교)과 일반 병사들 합쳐 800명쯤 되었고, 보조 노동력으로 300명쯤의 중국인을 둔 소규모 부대였다(731부대는 군인, 군속 합쳐 3500명 규모).

부대 이름만 '군마방역'이고, 실제로는 가축뿐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에 대한 해부 실험도 마다하지 않았다.

적의 군마를 죽일 세균을 개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세균무기를 만들려고 대량의 페스트균, 탄저균, 비저균 등을 배양했다. 

731부대와 함께 공동연구를 하기도 했다.

100부대(창춘)는 1855부대(베이징), 1644부대(난징), 8604부대(광둥) 등과 더불어 '방역급수부'로 위장한 중국 주둔 일본 세균전 부대들을 아우르는 이른바 '이시이 기관'의 하나였다.

100부대장 와카마쓰는 이시이의 영향력 아래 전쟁범죄를 저질렀던 하수인이었다(이시이 기관에 대해선 연재 55 참조).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태평양 전쟁판 ‘요제프 멩겔레이’라고 할 수 있는 이시이 시로의 ‘731 BW 비밀 부대’에 관해서 가장 정확하게 서술하고 있다.

겉으로만 전해오던 731 BW 비밀 부대가 왜 만들어졌으며 이를 통해 일본은 어떤 야망을 가졌는지 파헤치고 있다.

중국과 일본 현장을 직접 발로 뛰면서 수많은 과학자들과 BW 실험의 희생자들을 만나고 기밀이 해제된 정부 문서를 뒤진 결과,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자들의 만행,

미국이 자체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BW 무기 개발 프로그램, 전후 미국과 일본의 의학 윤리와 같은 731부대의 또 다른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내는 성과를 올렸다.

 

하바롭스크 재판에서 드러난 100부대 죄상, 

100부대의 죄상은 1949년 소련 하바롭스크 전범재판에서 밝혀졌다.

소련군에 항복한 관동군사령관 야마다 오토조(山田乙三, 대장, 강제노동형 25년)에 따르면, 100부대는 세균무기를 만들어 목장이나 가축, 저수지를 감염시키는 방법으로 군사적 파괴활동을 했다.

이를테면, 비저균으로 감염시킨 말들을 부대 근처의 각 마을에 풀어 마비저병을 유행시켰다(진청민, <일본군 세균전>, 청문각, 2010, 9쪽 참조). 

100부대가 생체실험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하바롭스크 법정에 섰던 미토모 가즈오 (三友一男, 수의중위, 강제노동형 15년)의 입에서도 나왔다.

▲ 731부대 운동회 때 심사위원장을 맡은 키타노 마사지 군의중장 모습. 키타노는 2년 반 동안(1942년 8월~1945년 3월) 731부대에 머물면서 페스트 벼룩 세균무기 개발에 관심을 쏟았다. ⓒ위키미디어 캡처,

미토모는 피실험자 몰래 수면제나 헤로인, 또는 피마자 독을 음식물에다 섞어 먹여 의식을 잃게 만든 뒤 생체 실험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희생자 다수는 중국인들이었고, 러시아인들도 있었다(진청민, 19쪽).

관동군 수의부장 다카하시 다카아쓰(高橋隆驚, 군의중장, 강제노동형 25년)도 100부대가 전쟁범죄를 벌였음을 인정했다.

다카하시에 따르면, 100부대는 농작물 파괴와 가축 살상은 물론 사람을 죽이는 페스트균, 콜레라균, 장티푸스균, 비저균, 탄저균 등 치명적인 세균을 만들고 뿌려 전염병 피해를 입혔다(야마다 사령관과 미토모 중위는 1956년 소련·일본 수교 때 풀려나 일본으로 돌아갔으나, 다카하시 중장은 1952년 시베리아 강제노동수용소에서 뇌출혈로 죽었다).

 

"생체실험은 물론 시신 훼손도 안했다" 

1945년 8월 재빨리 일본으로 도망쳐온 와카마쓰는 1년쯤 오사카 근처에 숨어 살았다.

1차 조사관 샌더스나 2차 조사관 톰슨도 그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갔다.

1946년 9월 맥아더사령부의 법무국 조사관들이 숨어있던 와카마쓰를 찾아냈다.

오사카 사무실에서 이뤄졌던 심문은 (이시이 시로에게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전쟁범죄 추궁이 아닌, 면담(인터뷰) 수준이었다.

'오로지 진실만을 증언하겠다'는 서약도 없었다.

와카마쓰의 진술을 들어보자.

[내가 아는 바에 따르면, 인간을 생체실험 도구로 사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한 비저(말, 당나귀, 노새 등에 앓는 치사율 높은 전염성 질병)에 감염된 사람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해부해본 적도 없다.

일본인 수의사 2명이 비저에 걸려 죽은 적이 있지만 그들을 해부해보는 것도 거절했다.

죽은 사람의 영혼을 존중했기 때문에 죽은 뒤 시신을 훼손한 적도 없다](셸던 해리스, 413-414쪽) 

3차 조사관 펠은 이시이 시로를 세 번째 '심문'한 뒤인 1947년 5월29일, 와카마쓰와 마주했다.

이시이를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펠은 '전범 기소와는 전혀 관계없이 세균전 정보를 듣고 싶다'고 안심시키려 애썼다.

와카마쓰도 이미 분위기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긴장하는 기색이 없었다. 

 

고엽제 관련 제초제 정보도 넘겨,

심문 초반에 와카마쓰는 '이시이 시로의 731부대와 관계된 일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이시이의 부대는 의무부대고, 나의 부대는 수의 부대였기에 정보를 공유한 적도 없다'고 뻔한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와카마쓰도 눈치가 없진 않았다.

전범 면책이 이뤄질 것이란 분위기가 무르익었기에, 그는 부하들과 함께 100부대의 활동을 자세하게 작성해서 제출하겠다고 했다. 

펠 조사관은 활동 보고서를 1주일 뒤에 받을 것을 다짐하면서 그를 풀어주었다.

와카마쓰는 약속을 지켰다.

그와 연락을 주고받은 100부대의 연구원 10명도 그들의 연구결과를 보고서로 내놓았다.

한 연구원은 곡물에 세균을 옮겼을 경우 생겨날 곡물 질병에 관한 19쪽의 영문 보고서를 내놓아 미 조사관들을 기쁘게 했다. 

와카마쓰의 한 부하는 화학 및 식물성 제초제에 관한 연구보고서도 내놓았다.

여기엔 훗날 베트남에서 널리 쓰여져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에이전트 오렌지' 같은 고엽제(defoliant) 관련 정보가 담겨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와카마쓰는 일본의 큰 제약회사인 니혼이야쿠(日本医薬)공장장으로 노후를 편히 지냈다(731관련자들의 전후 행태는 따로 다룰 예정임). 

 

세균무기 개발하려 생체실험 되풀이,

이시이 시로에 이어 731부대장에 올랐던 키타노 마사지(北野政次, 1894-1986)도 특급 전쟁범죄자다.

키타노는 만주 선양(瀋陽, 옛이름은 봉천) 의과대학 세균학 교수로 2년 반 동안 있다가 1942년 8월 731부대 제2대 부대장이 됐다.

만주 의과대학에서 기타노가 순수하게 세균학 강의만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 만주에 있던 일본 군의관들과 의학자들은 항일 포로나 스파이를 '인간 모르모트'로 삼아 인체 실험을 하거나 생체해부를 해도 된다는 인식을 가졌다고 알려진다(15년전쟁과 일본의 의학의료연구회,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731부대>, 건강미디어협동조합, 2020, 209쪽 참조). 

2년 반 동안( 1942년 8월~1945년 3월) 731부대장으로 있으면서 키타노 마사지는 전임자 이시이 시로가 했던 세균무기 개발을 꾸준히 해나갔다.

그런 사실을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731부대 병사였던 우에다 야타로(上田彌太郞)는 패전 뒤 중국 푸순 감옥에 갇혔다.

1954년 그가 남긴 공술서에 따르면, 키타노가 731부대장으로 있던 1943년 5월 어느 날 생체실험이 벌어졌다. 

[나는 731부대 제4부 제3반에서 생체실험의 관찰조수로 있었다.

관찰 2일 째에 2명이 죽었다.

다음날 아침 체온 측정하러 (수감자 감옥에) 가보니 1명이 죽어 있었다.

죽은 이는 해부된 뒤에 보일러실에서 태워졌다.

그 시체의 특징은 50세 정도로 손가락이 매우 길고 노동을 별로 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같은 날 오후에 1명이 죽고 다음날 또 1명이 죽었다.

그 실험의 목적은 연구실에서 시험한 세균을 실제로 인체에 넣어 효력을 확인하고, 보다 강력한 독성을 갖는 세균을 연구 개발하는 자료를 얻기 위해서였다](한민족문화교류협의회, <일본관동군 731부대 생체실험증거자료집> 2009, 205쪽).

위 공술서를 보면, 키타노 731부대장은 전임자였던 이시이와 마찬가지로 '악마의 의사집단'의 수괴였음이 드러난다.

키타노와 이시이 둘 다 '마루타'들을 생체실험용으로 희생시켜 가면서 보다 독성이 강하고 살상력이 높은 세균무기 개발에 미쳐있었다.

키타노는 일본에서 최신 장비를 들여와 작업의 효율을 높이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키타노는 2년 반 동안 731부대에 머물면서 특히 페스트균을 가진 벼룩을 세균무기로 사용하는 방법에 관심을 쏟았다.

이 연구는 1945년 초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고, 이시이 시로가 1945년 3월 부대장으로 복귀하면서 더욱 활기를 띠게 됐다. 

 

"인간이 아니라 원숭이 실험했을 뿐" 

이시이가 731부대장으로 복귀하자, 키타노는 지나파견군 제13군의부장(중장)으로 옮겨갔다.

1945년 가을 맥아더사령부 정보담당(G-2)인 참모2부의 찰스 윌로비 준장은 이시이만큼이나 세균전 정보를 지니고 있을 키타노의 행방이 궁금했다.

추적 끝에 그가 상하이 일본군 포로수용소에 붙잡혀 있는 것을 알았다.

윌로비는 키타노의 세균정보가 타국, 특히 소련에 넘어가선 안 된다고 여겼다. 

1946년 1월9일 키타노는 미 군용 특별기를 타고 일본 아츠기 공항에 내렸다.

그 길로 감옥에 갈 것으로 키타노는 짐작했지만, 정작 그가 머물게 된 곳은 도쿄의 한 호텔 방이었다.

이시이가 도쿄 신주쿠의 자택에 연금된 상태와 비슷했다.

분위기도 심문이 아니라 면담을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참모2부의 화이트사이드 대령이 키타노와 얼굴을 마주했다.

키타노는 100부대장 와카마쓰처럼 그럴듯한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메릴랜드주 데트릭 기지의 문서보관서에 있는 심문속기록에 따르면, 키타노는 '나는 모르쇠'로 버텼다.

세균전의 공격과 방어에 관하여 731부대에서 어떤 연구를 했는가, 상세한 데이터를 내놓으라고 했지만, 그는 애매한 말로 얼버무렸다.

중국인 죄수들을 생체실험에 쓴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인간을 실험에 쓴 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우겼다. "원숭이나 쥐, 다람쥐 같은 돌물들을 방역 차원에서 실험했을 뿐, 인간을 생체실험하지 않았다."

심문은 아무런 성과도 없이 헛되이 시간만 보냈다.

머릿속으로 F자가 들어간 쌍욕을 참았을 화이트사이드 대령은 (1차 조사관 샌더스 중령에 이어 2차 조사관으로 파견된) 톰슨 중령에게 키타노 심문을 넘겼다.

1946년 2월6일 톰슨 중령이 키타노를 만났지만 싱겁게 끝났다.

톰슨이 그에게 '중국인 포로를 생체실험용으로 쓴 적이 있느냐고 묻자, '인간을 실험 재료로 쓴 적 없다'는 등 거짓 답변이 돌아왔다. 


이시이와 키타노, 서로를 라이벌로 의식,

키타노와 이시이 둘은 성격이 달랐다.

이시이 시로는 드러내놓고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편이었고, 유흥비를 대느라 공금에 손을 대 문제가 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키타노는 그런 이시이를 경멸했다.

잔인함에서는 서로 닮았다.

나이는 이시이가 2년 많았지만 의학박사 학위는 키타노가 먼저 받았다.

둘은 라이벌 의식을 지녔고 사이도 좋진 않았다(키타노는 도쿄 제국대학, 이시이는 교토 제국대학 출신). 

1942년 일본의학회 총회 때 찍은 오래된 흑백사진을 보면 둘은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다.

둘의 관계가 불편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둘 다 군도(軍刀)를 허벅지 사이에 끼고 앉은 것이 인상적이다(1959년 이시이 시로가 후두암으로 죽었을 때 키타노가 장례위원장을 맡긴 했다.

731부대장이란 경력 때문에 이름뿐인 위원장을 맡았을 것이다).

이시이를 라이벌로 여겼기 때문일까, 그에게 불리한 말도 서슴지 않았다.

'일본인이 생물무기(BW) 연구를 한 곳은 731부대 한곳 뿐'이라 주장하면서, 이시이가 도쿄 지도자들의 승인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BW 연구를 했다고 비난했다.

만약 '폐하'(히로히토 일왕)가 알았다면 분명히 연구를 중단시켰을 것이라는 주장마저 폈다.

톰슨 조사관은 끝내 키타노로부터 세균전 정보를 얻어내는 것을 포기하고 돌아섰다.

톰슨도 화이트사이드 대령처럼 '저 인간은 뻔뻔한 거짓말쟁이'라고 F자 쌍욕을 속으로 삼켰을 것이다. 

세균전 정보를 캐내려는 미국은 키타노를 그냥 놔두지 않았다.

1947년 4월7일 도쿄 사령부로 불려온 키타노는 '알고 있는 세균전 정보를 종이에 적어 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분위기로 봐서 자칫 구속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낀 키타노는 그곳 사령부 규격용지로 11장에 이르는 긴 진술서를 써내려 갔다. 

그는 자신에게는 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731부대의 구조와 5개 지부의 활동 상황을 털어놓았다.

이시이가 했던 생물무기(BW) 개발에 대해서도 조심스레 용어를 골라가며 썼다.

이시이의 연구업적을 깎아내리며, 과학적 가치가 별로 없는 것들이라 했다.

반면에 그 자신은 티푸스와 페스트를 비롯한 다양한 전염병을 막는 백신을 개발했고, 성병을 치료하는 혈청을 만들었다고 자랑했다.

▲ 전범 면책을 대가로 731부대 연구원들이 미국에 제공한 410쪽 분량의 인체실험 부검보고서 영문 표지. ‘A’는 탄저균을 나타낸다. 미 역사학자 셸던 해리스가 미 유타주 더그웨이 도서관에서 찾아냈다. ⓒ더그웨이 도서관 캡처,

그렇다고 일본군 성노예로 죽을 고생을 했던 '위안부' 여성들에게 도움이 되진 않았을 것이다. 

진술서를 쓰고 얼마 지나지 않아 키타노는 3차 조사관으로 파견된 펠 조사관의 '부드러운 심문'을 받았다.

그 무렵 이시이와 마찬가지로, 미국이 자신을 전쟁범죄자로 기소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 키타노는 미국이 그토록 바라는 세균정보들을 펠 조사관에 내놓았다.

페스트, 탄저병, 출혈열, 발진티푸스, 장티푸스, 이질 등을 일으키는 세균 실험결과를 알려주었다.

콜레라, 파상열, 살모렐라와 각종 식물병에 대한 정보도 건네주었다.

그것들이 731부대에서 마루타를 희생시켜가며 얻어낸 '피 묻은' 자료였음은 말할 나위 없다. 

 

"면책 문서 없지만, 전범 처벌도 없다" 

1947년 9월8일 미국 정부는 국무부를 통해 도쿄의 맥아더사령부에 극비 전문을 보냈다.

이시이 시로를 비롯한 731부대 간부들의 처리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 요점은 '그들을 전범자로 처리하지 않기로 했으니, 가능한 한 많은 세균전 자료를 수집하라'는 것이었다.

전문 내용은 이러했다. 

[△맥아더 사령관은 이시이 시로와 기타 관련자들에게 면책(免責) 약속을 하지 말고 최대한 많은 (세균전) 정보를 수집한다.

△이시이 등에 대해 전쟁범죄 관련 (사면) 약속은 하지 않았지만, 미 당국은 미국의 안전보장을 위해 이시이 및 그 일당들의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지 않을 것이다](궈청줘우·랴오잉창,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의 세균전 실록>, 베이징 연산출판사, 1997, 451쪽. 진청민 <일본군 세균전>, 청문각, 2010, 910쪽에서 재인용).

맥아더 사령부에 보낸 전문에서 미국 정부가 이시이 일당에게 전쟁범죄를 덮어준다는 약속을 문서로 분명히 못 박지 않으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만에 하나 '면책 문서'가 언론에 보도되거나 특히 소련에 알려질 경우, 미 정치권이나 언론에서 논란이 되기 마련이다.

자칫 이를 둘러싼 청문회까지 열려 책임을 따져 물을 수도 있다. 

그런 후폭풍을 피하려면? 문서라는 증거를 남기지 않는 게 낫다.

이시이 일당의 전쟁범죄를 덮는 것은 물론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하지만 미 정부나 군부 입장에선 문서 파동보단 낫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런 판단 아래 미국은 세균전 정보를 '내부 정보'로 처리하고 '전쟁범죄의 증거'로는 삼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4차 조사관 힐, 편하게 정보 챙겼다,

미국 정부가 전범 면책 원칙을 세운 뒤인 1947년 10월28일, 에드윈 힐(데트릭 세균연구소 기초과학부 주임)이 4차이자 마지막 조사관으로 파견됐다.

그는 데트릭 기지의 병리학자 조셉 빅터 박사와 함께 일본에 갔다.

힐 조사관에게 주어진 임무는 앞의 펠 조사관이 들고온 세균정보 가운데 정리가 잘 안 된 자료들과 궁금한 사항들을 점검하는 것이었다.

특히 만주에서 가져온 인체 해부 표본과 해부 기록들을 확보하려 했다.

1개월 넘게 이어졌던 조사 기간 중 힐과 그의 파트너 빅터는 20명가량의 일본 세균전 관련자들을 만났다. 

힐 조사관은 앞서 다녀간 3명의 조사관들에 견주어 훨씬 일이 편했다.

전임자들처럼 '전쟁범죄를 추궁하러 온 것이 아니다'라는 말조차 꺼낼 필요가 없었다.

미국에 협력한다면 전쟁범죄자로 넘기지 않을 것이 확실해진 시점에서 731부대 간부들은 저마다 감춰놓았던 '피 묻은' 실험 자료들을 내놓았다.

힐이 1947년 12월 12일에 쓴 보고서를 보자.

[조금은 순진한 어조로 조사를 받은 과학자들이 자발적으로 정보를 털어놓았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면담을 진행하는 동안 전범재판에 기소되는 걸 막아주겠다는 말을 할 필요조차 없었다](더그웨이 도서관 소장 문서번호 008, 해리슨 462쪽). 

 

"말의 피를 뽑아 인간에 주사했다" 

그 과정에서 이시이 시로가 일본 육군참모총장의 훈령을 어기며 폐기하지 않고 챙겨온 8000여 장의 세균전 실험 관련 슬라이드, 3권의 인체 해부 보고서(페스트, 탄저, 비저 생체실험 관련)를 확보했다.

기꺼이 세균전 자료를 내놓은 자 가운데엔 이시이 시로에 이어 731부대장을 지냈던 키타노 마사지도 있었다.

그는 생체실험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이를테면, 그가 내놓은 송고열병에 관한 문서엔 이런 끔찍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다음 환자는 질병에 감염되어 죽어가는 환자의 간이나 비장 또는 콩팥에서 뽑은 피나 직접 혈관에서 뽑은 피로 감염시켜서 얻었다.

환자들을 오래 견디게 하기 위해 모르핀을 사용했다.

열병에 갈린 사람의 피를 말에게 넣었다.

잠복기간이 끝나자 5~7일 사이에 15마리 가운데 6마리가 열병 증상을 나타냈다.

열병에 걸린 말의 피를 뽑아 다른 말에 주사했고, 마지막으로 인간에게 주입했다.

실험대상자들은 100% 사망률을 나타냈다] (더그웨이 도서관 소장 문서번호 017, 해리스 463쪽). 

이시이 시로도 그동안 입을 맞춰온 부하들과 함께 '마루타'를 생체실험으로 희생시키면서 만든 '피 묻은' 세균전 자료들을 담은 네 편의 보고서를 미국에 넘겨주었다.

△731부대 연구원 18명이 쓴 '세균무기로 생체실험을 한 보고서'(60쪽 분량)

△농작물을 파괴한 세균전 연구(20쪽 분량)

△가축에 관한 세균전 연구(연구원 10명 참여)

△이시이가 직접 쓴 '20년 동안의 전반적인 세균전 연구에 대한 결론' 등이다.

여기에다 8000장 분량의 세균무기 생체실험, 생체해부의 병리학 표본과 슬라이드가 덧붙여졌다. 

 

"약간의 압박만으로 숨겨둔 자료 받아냈다" 

일부 악마의 의사들은 자료를 내놓으면서도 일부는 숨겨두려다 조사관의 예리한 눈에 들키기도 했다.

전 731부대 연구원이었던 이시카와 다치오(石川太刀雄)가 그랬다.

그가 일하는 가나자와대학의 연구실에서 생체실험 자료를 건네받으려 했던 힐 조사관의 보고서를 보자. 

[이시카와가 갖고 있는 표본이 전혀 정리돼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약 500증례에서 채취한 인체 표본 목록을 만들었는데, 조사할만한 표본은 400증례뿐이었고, 다른 수많은 자료가 어딘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하지만 처음 제출된 것(400증례)과 함께 약간의 압박만으로도 나머지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15년전쟁과 일본의 의학의료연구회, 87쪽). 

위 문장에서 '약간의 압박'이란 표현은 그 무렵 조사관들과 731부대 전범들 사이의 신경전을 떠올린다.

여기서 '500증례'라면 살아있던 '마루타' 500명을 생체실험으로 죽였다는 끔찍한 얘기가 된다.

힐 조사관은 일본에서 거둔 조사 성과에 뿌듯한 마음을 지닌 채 자신의 보고서를 이렇게 마무리했다(연재 58에 썼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줄여서 옮긴다).

[인체실험을 꺼림칙하게 여기는 우리 연구실에서는 이런 (세균)정보를 알아낼 수 없다.

이 자료를 얻기 위해 들인 총액은 25만 엔이다.

이 연구의 가치에 견주면 아주 작은 액수일 뿐이다] (靑木富貴子, <731 石井四郞と細菌戰部隊の闇を暴く>, 新潮社, 2008, 438쪽). 

힐 조사관은 자신에게 세균자료를 건네준 731부대 전범자들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보고서 끝에 '이 정보를 자발적으로 제공한 개개인이 그 일로 당황하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했다.

'전범 추궁을 더 이상 하지 말아달라'는 뜻이다.

힐은 또한 '이 정보가 타인의 손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모든 노력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그가 말하는 '타인'은 곧 소련을 가리킨다. 

이렇듯 미국은 20세기 최악의 전쟁범죄자들과 '더러운 거래'를 했다.

도쿄전범재판에서 이들의 죄를 물어야 한다는 생각을 지닌 검찰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도쿄재판의 수석검사 조지프 키넌은 맥아더사령부의 정보(G-2) 책임자였던 찰스 윌로비 준장(참모2부장)과 손을 잡고 정의감 넘쳤던 그 검찰관(육군 대령)을 미국으로 쫓아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과 무슨 약속을 했나,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초단시간내 150만부 돌파.
미국의 은폐 기록을 찾아 나서다,


역사 왜곡과 독도 찬탈로 한반도를 들끌 게 하는 일본 정부, 과연 그들의 야망은 무엇인가.

그들의 패권주의적 사고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것은 바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 그들이 저질은 만행에서 시작되고 있다.

이상하게도 독일과는 달리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을 이끌었던 일본군 수뇌부의 만행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는 바가 거의 없다.

끔찍했던 1937년의 난징대학살이나 수십만 명에 달하는 한국·중국·필리핀 여성을 일본군을 위한 ‘위안부’라는 명목으로 성 노리개로 부린 점, 화학전이나 세균전에 사용할 무기를 만들기 위해 과학자들이 자행한 인간 생체실험 같은 주제를 이야기하는 일본인은 거의 없다.

지난 반세기 동안 일본의 지도부는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자신들의 국가가 과거에 저지른 만행을 언급한 수상이나 정부 대변인은 아직까지 한 명도 없었으며 최근까지도 일본의 지도자들은 과거사에 대한 사과를 거부하고 있다.

일본의 문부과학성을 이끌고 있는 막강한 보수적인 관료들은 과거의 만행을 없었던 일로 만들려고 애쓰고 있다.

일본 문부과학성의 총아들은 학생들을 가르칠 교과서를 승인하기 전에 난징대학살이나 위안부 문제 혹은 세균전에 관한 내용을 삭제해버린다.

그 결과 오늘날 평범한 일본 국민들은 자신들의 조국이 저지른 과거의 만행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고 있다.

그 뒤에는 미국의 은폐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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