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촉한(蜀漢)의 무장(武將)으로 본래 유표(劉表; 142~208)의 부하로 중랑장(中郎將)을 지냈는데, 후에 유비(劉備)에게 투항했다. 더불어 유비를 도와 익주(益州)의 유장(劉璋; ?~219)을 공격하기도 했다. 219년 황충은 정군산(定軍山)에서 조조(曹操)의 부하인 하후연(夏侯淵)을 참수하여 정서장군(征西將軍)이 되었고, 그 후에 후장군(後將軍), 관내후(關內侯)로 봉해졌다. 관우(關羽), 장비(張飛), 마초(馬超), 조운(趙雲)과 더불어 촉한의 ‘오호장군(五虎將軍)’으로 일컬어진다.<script async src="//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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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비의 군대로 편입되다
그러면 나관중은 어째서 황충의 죽음에 대해 이토록 대수술을 가했을까? 사서에 기재된 내용에 근거한다면 황충은 자연스레 천수를 다하고 죽은 것에 해당하며 자신의 안방에서 너무나 평범하게 세상을 하직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 나관중은 그런 평범한 사실만으로는 황충의 강직함을 표출하기가 부족하고 자극적인 내용이 되지 못한다고 여겼을 것이다. 따라서 황충으로 하여금 사장(沙場)에서 장렬한 죽음을 맞도록 함으로써 영웅본색을 최대한 부각시키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나관중이 황충의 죽음을 동오 정벌전쟁으로 처리한 장면은 깊은 의의와 함께 강렬한 비극적 색채를 발하고 있다.<script async src="//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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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주(荊州, 지금의 후베이성 징저우) 자사 유표(劉表, 142~208)의 휘하에서 중랑장(中郎將)을 맡아, 유표의 조카인 유반(劉磐)과 더불어 장사(長沙, 지금의 후난성 창사시) 유현(攸縣)을 지켰다. 뒤에 조조(위 무제)가 형주를 침입했을 때에는 장사태수 한현(韓玄)의 수하에 있었다.
적벽대전 후에 유비가 형남사군(荊南四郡)을 정벌하였는데, 무릉(武陵, 지금의 후난성 창더(常德)시 우링구) 태수 김선(金旋), 장사태수 한현, 계양(桂陽, 지금의 후난성 천저우(郴州)시 구이양현) 태수 조범(趙範) 및 영릉(零陵, 지금의 허난성 상추(商丘)시 닝링현) 태수 유도(劉度)가 투항했다. 황충 역시 한현을 따라 투항하여 유비의 군대로 편입되어 촉(蜀)나라로 들어갔다.
뒤에 유비와 유장(劉璋, ?~219)의 화의가 깨지자 황충은 가맹관(葭萌關)에서 성도(成都, 지금의 쓰촨(四川)성 청두)로 진격하였는데, 작전 시에 솔선수범을 보였다. 익주(益州, 지금의 쓰촨성과 한중(漢中) 분지 일대)가 평정된 후에 토로장군(討虜將軍)에 봉해졌다.
2. 촉한의 오호장군 중 일인이 되다
219년 유비가 한중(漢中, 지금의 산시(陝西)성 한중시)을 공격할 때 황충은 정군산 전투에서 조조의 대장인 하후연, 조앙(趙昂, ?~219)을 참수하고 정서장군(征西將軍)으로 승진했다. 같은 해에 유비가 한중왕(漢中王)이 되었을 때 황충을 후장군(後將軍), 관내후(關內侯)로 봉했다. 이때 제갈량이 이렇게 말했다.
“황충의 명성은 여태까지 관우, 마초에 미치지 못했는데, 지금은 그들과 같은 등급이 되었다. 마초와 장비는 부근에 있으면서 친히 그의 공로를 목격했으니 승복할 수 있는데, 관우는 먼 곳에 이 소식을 듣고서 반드시 승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유비는 황충의 등급을 높여줄 것을 결심하고 관우에게 양해를 구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관우는 전장군(前將軍), 마초는 좌장군(左將軍), 장비는 우장군(右將軍), 황충은 후장군(後將軍)으로 봉해져 동급이 되었다. 조운과 함께 이들을 촉한의 ‘오호장군(五虎將軍)’이라 부른다.
220년에 황충이 병사하자, 그해 9월에 강후(剛侯)로 추증되었다. 아들로 황서(黄叙)가 있었는데 일찍이 죽어 후손이 끊어졌다.
형주목사(荊州牧使) 유표(劉表) 부하였으며, 장사태수(長沙太守)로 임명된 한현(韓玄) 휘하의 장수로 장사를 지켰다. 관우(關羽)가 장사성(長沙城)을 공격해와 그와 싸움을 벌였으나 서로 1번씩 목숨을 구해주게 된다. 이후 위연과 함께 유비를 찾아가 부하 장수가 되었는데 유비 휘하의 관우, 장비(張飛), 마초(馬超), 조운(趙雲)과 함께 오호대장군으로 불렸다. 유비가 익주를 얻을 때 공적을 세웠으며 한중 쟁탈전에서는 적장 하후연(夏侯淵)을 죽이며 맹활약하였고 후장군에 올랐다. 사망 후 강후(剛侯)라는 시호를 받았다. 중국에서 '노익장(老益壯)'의 대명사로 일컫는다.
『삼국지연의』 제83회에선 황충의 죽음에 얽힌 줄거리가 전개된다. 장무 2년(서기222년) 봄, 노장 황충은 동오 정벌의 기치를 든 유비를 따라 나선다. 이릉(彝陵) 전투에 출전한 그는 용기백배하여 동오의 장군 사적(史迹)을 베어 죽이고 선봉장 반장을 물리친다. 하지만 다음날 전투에서 매복하고 있던 오군의 복병에 의해 위기를 맞이한다. 혈로를 뚫으려 동분서주하던 황충은 오장 마충의 화살에 어깨 죽지를 관통 당한다. 겨우 함정을 벗어났지만 연로하고 혈기가 쇠약한데다 화살 맞은 상처의 통증이 지나쳐서 마침내 진영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향년 75세였다. 유비는 그의 관을 성도로 옮겨서 고이 안장한다.
그러나 사서의 기록에 근거하면 그 시기와 장소가 다르니 결코 오나라 정벌전에서 죽은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삼국지ㆍ황충전』에 기록된 내용을 살펴보면 황충은 건안 24년(서기219년) 정군산에서 하후연의 목을 벴는데, 이 해에 선주가 한중왕이 되었다. 그리고는 다음 해인 서기 220년에 세상을 떴는데, 강후(剛侯)로 추시되었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기재되어 있다.
『삼국지ㆍ선주전』에 근거하면 유비는 건안 26년(서기221년)에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며, 개국 연호를 장무로 고쳐 그 해를 장무 원년으로 하였다. 그리고는 그 해 가을인 7월에 대군을 거느리고 동오를 치러갔다고 되어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황충이 장무 2년(서기222년)에 죽었다고 서술하고 있지만 사실상 사서에 기재되어 있는 황충이 죽은 연대와는 2년이란 시차가 있다. 당시 유비는 아직 동오 정벌전에 나서지도 않은 상황이었으니, 황충도 당연히 동오를 정벌하는 과정 중 이릉 땅에서 죽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청나라 때의 『성도현지(成都縣志)』 등의 내용에, ‘청나라 도광(道光)1) 연간에 어느 농부가 성도 서쪽 근교에서 구덩이를 파다가 불에 탄 흔적이 있는 황강후(黃剛侯)란 글자가 새겨진 벽돌과 ‘황강후공 휘충 자한승지묘(黃剛侯公諱忠字漢升之基)’란 묘비를 발굴했다. 후세 사람들은 이곳에다 황충의 묘를 중수(重修)하고 황충의 소상(塑像)을 모신 사당을 세웠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발견을 근거로 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유비는 한중왕에 즉위한 후, 위연을 남겨 한중을 진수하도록 하였다. 그때 기타 장령들은 모두 유비를 따라 성도로 돌아갔는데, 노장 황충이 성도에서 죽어 성도에다 장사를 지냈다. 그래서 동오 정벌전에서 죽은 게 아니라는 말이다.’ 상당히 신빙성 있는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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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연의』의 내용을 가만히 살펴보면, 오호장 중 삼호장, 즉 관우, 장비, 황충의 죽음이 모두가 동오와의 불화나 전쟁과 관계가 있는데, 이로써 제갈량이 주창한 연오항조(聯吳抗曹)의 책략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촉한의 사업도 크게 손상을 입게 된다. 그래서 이릉 대전에서 참패하고 돌아온 유비마저 우울병에 빠져 세상을 하직하게 된 것이다.
사서의 기록에 근거하면 마초는 장무 2년에 세상을 떠났다. 결국 촉한의 장수라곤 연로한 조운만이 남게 된다. 후기에는 점점 더 촉 중의 대장들이 사라지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요화를 선봉장으로 삼는 등 더 이상 방도를 찾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이때부터 촉한의 원기는 크게 손상을 입게 되니, 비록 제갈량이 있는 힘을 다하여 동분서주하지만 소멸해가는 국가의 명운을 회복시키기에는 역부족이 된다. 그래서 나관중은 황충의 죽음을 통하여 깊은 사색을 필요로 하는 숨은 이치를 알리려고 했을 것이다.
『삼국지연의』 제73회에선 유비가 한중왕에 오른 후 문무백관들에게 그 공훈에 따라 벼슬을 내리고 작위를 봉하는 장면이 나온다. 관우, 장비, 조운, 마초, 황충을 오호대장에 봉한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는 촉한(蜀漢)의 오호장이다.
그러나 사서에는 결코 유비가 오호장을 봉했다는 기록이 없다. 그러하다면 오호장은 누가 봉했단 말인가? 그것은 삼국 이야기를 부연한 민간예인들이 봉한 것이다. 진수의 『삼국지ㆍ촉서(蜀書)』에는 ‘관우, 장비, 마초, 황충, 조운’을 합하여 하나의 전기로 만들었는데, 그 제목을 「관장마황조전(關張馬黃趙傳)」이라 명명했다. 이 제명이 바로 삼국 이야기를 부연하던 예인들이 오호장이라고 부르게 된 출발점으로 보인다.
『삼국지』 기록을 근거로 하면, 건안24년(서기219년)에 유비가 한중왕이 된 후, 관우에게는 전장군(前將軍)을 배수하고, 장비에게는 우장군(右將軍)을, 마초에게는 좌장군(左將軍)을, 황충에게는 후장군(後將軍)을 배수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조운은 그들과 동등한 서열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에 결코 오호장이라는 말을 언급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오호장이란 명칭이 생겨날 수 있었던가? 『삼국지ㆍ조운전』에서 이르기를, ‘성도가 이미 평정되자 조운을 익군장군(翊軍將軍)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진수는 조운을 오호장군의 제일 끝에 두었으나,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조운은 나관중의 손에 의해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가장 이상적인 장령이 되었고 그의 위치도 마초와 황충의 앞에 서게 되었다.
오호장이란 명칭이 제일 먼저 등장하는 곳은 『삼국지평화』 하권이다. 유비가 익주를 얻은 부분에서 계속되는 내용으로 ‘유황숙이 오호장을 봉했다. 관우는 수정후(壽亭侯)에 봉하고, 장비는 서장후(西長侯)에, 마초는 정원후(定遠侯)에, 황충은 정란후(定亂侯)에, 조운은 입국후(立國侯)에 봉했다.’고 하였다. 이 내용에서도 조운은 아직 그 서열이 오호장의 맨 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삼국지평화』에서 장군을 봉한 시기는 유비가 한중왕이 되기 전이니 역사적 사실과는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부분을 바로잡았다.
또 『삼국지평화』에서는 다섯 장군이 후(侯)가 되었다지만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하나는 다섯 사람이 제후에 봉해진 시기가 실제 역사상의 시기와 틀리다는 점이며, 또 하나는 봉해진 제후의 명칭도 역사적 기록과 부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수정후는 한수정후의 잘못된 기록으로 관우는 한 번도 수정후가 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장비는 마땅히 서향후(西鄉侯)라야 하는데 서장후라 하였고, 마초는 시향후(漦鄉侯)라야 하는데 정원후로, 황충은 관내후(關內侯)라야 옳은데 정란후라 하였으며, 조운은 영창정후(永昌亭侯)가 되었는데 여기서는 입국후라 하였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역사적 사실을 아무렇게나 짜 맞추어 놓은 『삼국지평화』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그러나 유비가 다섯 장수를 오호장에 봉했다는 내용만큼은 그대로 받아들였다. 오호장의 중심어인 호(虎)라는 글자는 다섯 장군의 위엄과 용맹을 높이 드러내 주는 말이다. 오호장이란 명칭은 촉한에만 있을 뿐, 조위나 손오에는 찾아볼 수도 없으니 나관중의 촉한 존중 사상을 여실히 나타낸 경우이다. 삼국 이야기를 즐기는 청중이나 독자들은 오호장이란 합칭(合稱)을 기꺼이 받이들였다.
『수호전』 제71회에서는 『삼국지연의』를 본받아 송강(宋江)이 ‘마군오호장(馬軍五虎將)’ 다섯 명을 봉한다. 즉 ‘대도 관승, 표자두 임충(林沖), 벽력화 진명(秦明), 쌍편 호연작(呼延灼), 쌍창장 동평(董平)’이다. 흥미로운 점은 수호전에 등장하는 오호장의 우두머리인 관승도 청룡언월도를 사용하고 있고, 적마(赤馬)를 타며, 붉은 얼굴에 아름다운 수염까지 흩날리니, 이는 분명 관우가 다시 세상에 나타난 게 아닐 수 없다. 나관중이 연출한 오호장은 오늘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니, 오호장이란 말만 들었다 하면 누구나 관장조마황(關張趙馬黃)의 용맹무쌍한 형상을 저절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문학적 형상의 오호장은 이미 광대한 민중들의 우상이 되었으니, 비록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을지라도 문학적 수법으로는 크게 성공한 셈이다.
그러나 사서에는 결코 유비가 오호장을 봉했다는 기록이 없다. 그러하다면 오호장은 누가 봉했단 말인가? 그것은 삼국 이야기를 부연한 민간예인들이 봉한 것이다. 진수의 『삼국지ㆍ촉서(蜀書)』에는 ‘관우, 장비, 마초, 황충, 조운’을 합하여 하나의 전기로 만들었는데, 그 제목을 「관장마황조전(關張馬黃趙傳)」이라 명명했다. 이 제명이 바로 삼국 이야기를 부연하던 예인들이 오호장이라고 부르게 된 출발점으로 보인다.
『삼국지』 기록을 근거로 하면, 건안24년(서기219년)에 유비가 한중왕이 된 후, 관우에게는 전장군(前將軍)을 배수하고, 장비에게는 우장군(右將軍)을, 마초에게는 좌장군(左將軍)을, 황충에게는 후장군(後將軍)을 배수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조운은 그들과 동등한 서열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에 결코 오호장이라는 말을 언급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오호장이란 명칭이 생겨날 수 있었던가? 『삼국지ㆍ조운전』에서 이르기를, ‘성도가 이미 평정되자 조운을 익군장군(翊軍將軍)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진수는 조운을 오호장군의 제일 끝에 두었으나,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조운은 나관중의 손에 의해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가장 이상적인 장령이 되었고 그의 위치도 마초와 황충의 앞에 서게 되었다.
오호장이란 명칭이 제일 먼저 등장하는 곳은 『삼국지평화』 하권이다. 유비가 익주를 얻은 부분에서 계속되는 내용으로 ‘유황숙이 오호장을 봉했다. 관우는 수정후(壽亭侯)에 봉하고, 장비는 서장후(西長侯)에, 마초는 정원후(定遠侯)에, 황충은 정란후(定亂侯)에, 조운은 입국후(立國侯)에 봉했다.’고 하였다. 이 내용에서도 조운은 아직 그 서열이 오호장의 맨 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삼국지평화』에서 장군을 봉한 시기는 유비가 한중왕이 되기 전이니 역사적 사실과는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부분을 바로잡았다.
또 『삼국지평화』에서는 다섯 장군이 후(侯)가 되었다지만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하나는 다섯 사람이 제후에 봉해진 시기가 실제 역사상의 시기와 틀리다는 점이며, 또 하나는 봉해진 제후의 명칭도 역사적 기록과 부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수정후는 한수정후의 잘못된 기록으로 관우는 한 번도 수정후가 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장비는 마땅히 서향후(西鄉侯)라야 하는데 서장후라 하였고, 마초는 시향후(漦鄉侯)라야 하는데 정원후로, 황충은 관내후(關內侯)라야 옳은데 정란후라 하였으며, 조운은 영창정후(永昌亭侯)가 되었는데 여기서는 입국후라 하였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역사적 사실을 아무렇게나 짜 맞추어 놓은 『삼국지평화』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그러나 유비가 다섯 장수를 오호장에 봉했다는 내용만큼은 그대로 받아들였다. 오호장의 중심어인 호(虎)라는 글자는 다섯 장군의 위엄과 용맹을 높이 드러내 주는 말이다. 오호장이란 명칭은 촉한에만 있을 뿐, 조위나 손오에는 찾아볼 수도 없으니 나관중의 촉한 존중 사상을 여실히 나타낸 경우이다. 삼국 이야기를 즐기는 청중이나 독자들은 오호장이란 합칭(合稱)을 기꺼이 받이들였다.
『수호전』 제71회에서는 『삼국지연의』를 본받아 송강(宋江)이 ‘마군오호장(馬軍五虎將)’ 다섯 명을 봉한다. 즉 ‘대도 관승, 표자두 임충(林沖), 벽력화 진명(秦明), 쌍편 호연작(呼延灼), 쌍창장 동평(董平)’이다. 흥미로운 점은 수호전에 등장하는 오호장의 우두머리인 관승도 청룡언월도를 사용하고 있고, 적마(赤馬)를 타며, 붉은 얼굴에 아름다운 수염까지 흩날리니, 이는 분명 관우가 다시 세상에 나타난 게 아닐 수 없다. 나관중이 연출한 오호장은 오늘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니, 오호장이란 말만 들었다 하면 누구나 관장조마황(關張趙馬黃)의 용맹무쌍한 형상을 저절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문학적 형상의 오호장은 이미 광대한 민중들의 우상이 되었으니, 비록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을지라도 문학적 수법으로는 크게 성공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