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기원전 200∼154년)는 자가 맹덕(孟德)이며, 패국(沛國) 초(初 = 현 안휘성(安徽省) 호현(毫縣)) 사람이다. 잉촨[潁川:河南省]에서 태어났다. 주로 형명(刑名:법가)의 학(學)을 익혀 관에 나아가 태상장고(太常掌故)에 임용되었고, 진(秦)나라의 박사 복생(伏生)에게 사사하여 《상서(尙書)》를 배웠다. 그 무렵 한제국(漢帝國)은 밖으로는 흉노의 압박, 안으로는 제후의 세력증대가 큰 문제였다.
그는 흉노에 대한 정책으로서 북변방비를 위한 둔전책(王)에 대한 회유책으로서 그는 장안에서 참형되었다.
영천(潁川, 지금의 하남성 우현) 출신으로 한나라 경제의 중요한 모사(謀士)였다. 그는 일찍이 지현(軹縣, 지금의 하남성 제원현 남쪽)에서 장회(張恢)를 스승으로 모시고 신불해와 상앙의 형명(刑名) 이론을 배웠다. 조조는 사람이 엄격하고 각박했다.
황건(黃巾)의 난, 동탁(董卓)의 난 등의 토벌전에 참가하였고, 건안 13년에 스스로 승상이 되어 형주(荊州)를 공략하였다. 그러나 유비(劉備), 손권(孫權)의 연합군에게 적벽(赤壁) 대전에서 크게 패하였다.
나중에 위왕(魏王)이 되어 재임하다가, 66세로 낙양에서 타계하였다. 그의 문학 애호는 역대 정치가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것으로,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시로 표현했고, 자신의 작품을 연회에서 연주하도록 하였다. 그는 청년 시기부터 실의와 격정의 세월을 살아 왔고, 전쟁을 통해 현실의 냉혹함을 누구보다 절실하게 경험했다.
그의 정치 이상은 바로 이러한 현실 체험에서 비롯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시 작품들 역시 현실과 이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의 「호리행(蒿里行)」은 당시 사회 현실을 적나라하게 반영하고 있으며, 「고한행(苦寒行)」 등은 전장의 병사들의 고통을 노래하고 있다.
나중에 위왕(魏王)이 되어 재임하다가, 66세로 낙양에서 타계하였다. 그의 문학 애호는 역대 정치가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것으로,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시로 표현했고, 자신의 작품을 연회에서 연주하도록 하였다. 그는 청년 시기부터 실의와 격정의 세월을 살아 왔고, 전쟁을 통해 현실의 냉혹함을 누구보다 절실하게 경험했다.
그의 정치 이상은 바로 이러한 현실 체험에서 비롯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시 작품들 역시 현실과 이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의 「호리행(蒿里行)」은 당시 사회 현실을 적나라하게 반영하고 있으며, 「고한행(苦寒行)」 등은 전장의 병사들의 고통을 노래하고 있다.
중국 전한(前漢)의 정치가. 흉노에 대한 정책으로 북변방비를 위한 둔전책(屯田策), 그 재정적 뒷받침으로 곡물납입자에게 벼슬을 주는 매작령(賣爵令)을 주장하여 채용되었다. 제후에 대한 정책으로는 영지의 삭감이 경제(景帝)에 의하여 채용되었으나 그로 인해 오초7국(吳楚七國)의 난을 유발하였다.
한 문제 때 조정에 『상서(尙書)』를 연구하고 강론할 마땅한 사람이 없던 차에 제남(濟南)의 복생(伏生)이란 사람이 진 왕조 때 박사(博士, 고금의 역사적 사실과 서적을 관리하던 직책)를 지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복생은 서한 시대 금문 『상서』를 처음으로 전수한 사람으로 『상서』에 정통했으나 당시 나이가 벌써 90세가 넘어 조정에서 강론을 할 수 없었다. 이에 한 문제는 태상(太常)에게 사람을 복생 쪽으로 보내 문하생이 되게 하여 『상서』를 배워오게 명령했다. 태상은 조조를 복생에게로 보냈다.
조조가 학업을 마치고 돌아오자 문제는 그를 태자에게 보내 가령(家令)이 되어 태자를 보좌하게 했다.
조조는 태자 유계(劉啓)의 총애를 얻으면서 '지혜 보따리'란 뜻의 '지낭(智囊)'으로 불렸다. 그는 말재주도 좋았다. 그가 올린 많은 치국책이 태자의 칭찬을 받았다. 그뒤 문제는 그를 조정의 논의와 자문에 응하는 중대부(中大夫)에 임명했다.
신하을 이끌려면 '술수'에 능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른바 '술수(術數)'란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말한다. 한 무제 때 박사와 재상 등을 지낸 공손홍(公孫弘)은 "생사를 좌우하는 힘, 막힌 것을 뚫는 방법, 가볍고 무거운 것을 다는 셈, 득실을 논하는 길 이런 것들을 통해 멀고 가깝고 진실과 거짓을 반드시 드러나게 하는 것을 술이라 한다"고 했다.
조조는 태자 유계의 선생을 맡는 동안 태자에게 크고 위대한 공업을 세울 수 있는 책략을 제시하면서 '태자가 알아야 할 술수에 관한 논의'라는 글을 썼다. 여기서 그는 군주는 '술수'에 정통하지 않으면 안 되고 어떻게 신하를 통제할 것인가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조는 태자 유계의 선생을 맡는 동안 태자에게 크고 위대한 공업을 세울 수 있는 책략을 제시하면서 '태자가 알아야 할 술수에 관한 논의'라는 글을 썼다. 여기서 그는 군주는 '술수'에 정통하지 않으면 안 되고 어떻게 신하를 통제할 것인가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군주가 만세에 존귀한 공명을 널리 떨칠 수 있는 것은 술수를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주가 신하를 통제하고 그 무리를 다스릴 줄 알면 신하들은 두려워 굴복하며, 말을 듣고 일을 처리할 줄 알면 감히 속이거나 감추지 못한다. 또 만민에게 이익이 돌아가도록 안정시킬 줄 알면 천하가 복종하며, 충효로 위를 섬길 줄 알면 신하의 행동이 제대로 갖추어진다." 신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이 네 가지가 태자께서 하루 빨리 아셔야 할 것들입니다.
일부 조정의 신하들은 황태자가 국가를 다스리는 방법을 반드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냐고 했지만 조조는 강력하게 반박하며, 이전의 군주들이 정권을 유지 못하고 살해된 원인이 '술수'를 몰랐던 데 있고, 지금 태자가 책은 아주 많이 읽었지만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몰라 그저 책만 외운다면 헛수고라고 했다. 그러면서 문제에게 지금 가장 절실하고 활용할 수 있는 성인의 술수를 태자가 배우도록 하고 태자가 군주 앞에서 자신의 견해를 밝힐 수 있도록 해달라고 건의했다.
문제는 조조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태자의 스승으로서 조조가 미친 영향은 경제가 즉위한 다음 더욱 크게 작용했다. 즉 역사상 유명한 '문제와 경제의 전성기'라는 '문경지치'는 조조가 제기한 나라를 다스리는 방략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문제는 조조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태자의 스승으로서 조조가 미친 영향은 경제가 즉위한 다음 더욱 크게 작용했다. 즉 역사상 유명한 '문제와 경제의 전성기'라는 '문경지치'는 조조가 제기한 나라를 다스리는 방략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황제의 신임으로 9경을 압도하고, 묘책으로 날아드는 화살을 피하다
기원전 157년 한 경제 유계가 황제 자리에 올랐다. 경제는 바로 조조를 내사(內史, 수도 장안의 행정장관)에 임명했다. 경제는 늘 조조와 함께 국사를 의논했고, 조조의 건의는 대부분 받아들여졌다. 조조에 대한 경제의 신임과 총애는 9경(진·한 시대 중앙 9개 행정관직에 대한 총칭)에 대한 신임을 다 합쳐도 따르지 못할 정도였다. 승상 신도가(申屠嘉)는 자신의 의견이 늘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또 조조가 밉기도 했지만 그를 박해할 마땅한 구실을 찾지 못했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당시, 내사관부 내에 있던 태상묘(太上廟, 고조 유방의 아버지 태상황의 사당)의 담 사이의 빈 터에 문이 동쪽으로 나 있어서 출입하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이에 조조는 자기 마음대로 남쪽으로 두 개의 문을 내서 출입했는데, 문이 공교롭게도 태상묘의 바깥 담 쪽으로 나게 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승상 신도가는 옳다 싶었다. 이것이야말로 조조를 제거할 구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제의 조상 사당을 두르고 있는 담을 뚫어 문을 낸 죄상을 적어 황상에게 조조를 죽이라고 청할 생각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조의 문객이 조조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조조는 큰일이다 싶어 그날 밤 황제에게 단독 면담을 요청하여 이 사실을 자수하면서 황상에게 자초지종을 낱낱이 다 이야기했다.
예상대로 신도가는 이 일을 황제에게 보고하면서 조조를 정위(廷尉, 진이 설치한 9경의 하나로 중앙의 최고법관)에게 넘겨 처형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지난 밤, 조조에게 자초지종을 들어 상황을 다 파악하고 있던 경제는 승상 신도가에게 "조조는 종묘의 담을 뚫고 문을 낸 것이 아니라 종묘 빈터 바깥을 두른 낮은 담에 문을 냈을 뿐이고 그나마도 내가 허락한 것이니 법에 저촉되는 바가 없다"고 말했다. 난처해진 신도가는 사죄하며 자리를 물러났다.
그는 화가 나서 장사(長史, 관직명으로 서한 시대의 승상·태위·어사대부가 모두 소속관의 하나로 장사를 두었다. 직위가 아주 중요하여 지금의 행정부 비서실장에 해당한다)에게 "먼저 그 놈을 죽인 다음 보고를 했어야 하는데, 보고를 먼저 하는 바람에 그 놈이 한 발 앞서 선수를 쳐서 나까지 팔아먹고 말았다"라며 씩씩거렸다. 그러고는 피를 토하며 병석에 눕더니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조조의 위세는 더욱 높아졌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당시, 내사관부 내에 있던 태상묘(太上廟, 고조 유방의 아버지 태상황의 사당)의 담 사이의 빈 터에 문이 동쪽으로 나 있어서 출입하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이에 조조는 자기 마음대로 남쪽으로 두 개의 문을 내서 출입했는데, 문이 공교롭게도 태상묘의 바깥 담 쪽으로 나게 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승상 신도가는 옳다 싶었다. 이것이야말로 조조를 제거할 구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제의 조상 사당을 두르고 있는 담을 뚫어 문을 낸 죄상을 적어 황상에게 조조를 죽이라고 청할 생각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조의 문객이 조조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조조는 큰일이다 싶어 그날 밤 황제에게 단독 면담을 요청하여 이 사실을 자수하면서 황상에게 자초지종을 낱낱이 다 이야기했다.
예상대로 신도가는 이 일을 황제에게 보고하면서 조조를 정위(廷尉, 진이 설치한 9경의 하나로 중앙의 최고법관)에게 넘겨 처형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지난 밤, 조조에게 자초지종을 들어 상황을 다 파악하고 있던 경제는 승상 신도가에게 "조조는 종묘의 담을 뚫고 문을 낸 것이 아니라 종묘 빈터 바깥을 두른 낮은 담에 문을 냈을 뿐이고 그나마도 내가 허락한 것이니 법에 저촉되는 바가 없다"고 말했다. 난처해진 신도가는 사죄하며 자리를 물러났다.
그는 화가 나서 장사(長史, 관직명으로 서한 시대의 승상·태위·어사대부가 모두 소속관의 하나로 장사를 두었다. 직위가 아주 중요하여 지금의 행정부 비서실장에 해당한다)에게 "먼저 그 놈을 죽인 다음 보고를 했어야 하는데, 보고를 먼저 하는 바람에 그 놈이 한 발 앞서 선수를 쳐서 나까지 팔아먹고 말았다"라며 씩씩거렸다. 그러고는 피를 토하며 병석에 눕더니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조조의 위세는 더욱 높아졌다.
자기의 장점으로 적의 단점을 공격하다
일찍이 흉노가 한의 변경을 습격한 사건이 기원전 169년(문제 11년)에 있었다. 이에 조조는 「군사와 관련한 상소」를 문제에게 올려 흉노에 대항하는 전략과 책략을 제의했다. 그는 이 글에서 전쟁에서 병사의 사기를 격려하고 좋은 장수를 선발하는 일의 중요성을 제기한 다음, 전쟁에서의 지형조건, 병사의 소질, 무기를 비롯한 장비 등의 관계를 분석했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백성들의 사기는 백 배 높아지지만, 패배하면 돌이킬 수 없다. 흉노는 오랫동안 여러 차례 변경을 침략했고, 롱서(隴西) 일대 백성들은 많은 상처를 입고 싸워 이겨야겠다는 마음이 없어졌다.
이는 롱서 백성들이 겁이 많고 나약해서가 아니라 장수들이 군대를 통솔하는 방법이 졸렬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병법에는 "필승 장수는 있어도, 필승 백성은 없다"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변방을 안정시키고 공명을 세우는 것은 좋은 장수에 있으니 좋은 장수를 고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조조의 판단이었다.
그는 용병과 작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조건은 다음 세 가지라고 보았다. 첫째는 (유리한) 지형을 확보하는 것이고, 둘째는 병사들의 소질을 훈련시키는 것이며, 셋째는 좋은 무기를 갖추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조조는 이렇게 지적한다. 무기와 장비가 좋지 않으면 병사들을 사지로 내모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병사들을 엄격하게 훈련시키지 않으면 작전이 불가능하며 장수도 죽으러 가는 것이다. 장수가 병법의 원리와 방법을 모르면 군주를 적의 손에 넘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군주가 장수를 제대로 고르지 못하면 국가를 멸망의 길로 이끌게 된다. 이 네 가지는 국방건설에 지극히 중요한 문제다.
조조는 또 한나라 군대와 흉노 군대의 장점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흉노의 장점은 세 가지가 있고 한나라의 장점은 다섯 가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자신의 장점으로 적의 단점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병사는 흉기요, 전쟁은 위험스러운 일이다"라고 말했다. 병법을 모르면 크더라도 작아질 수밖에 없고, 강하더라도 약할 수밖에 없다. 전쟁이란 병사들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것이므로 만에 하나 패하면 후회해도 소용없다. 따라서 제왕의 용병술은 만전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조조는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그는 우선 소수민족과 공동전선을 구축하여 흉노를 공격하자고 했다. 좋은 무기와 장비를 소수민족에게 나누어주고, 그들의 습관에 익숙하고 그들과 잘 화합할 수 있는 좋은 장수를 보내 그들을 통솔하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험준한 요지를 지키게 한다. 평원의 요충지는 한나라 군대가 지킨다. 이 두 가지를 잘 배합하여 각자의 장점을 발휘하게 한다. 이것이야말로 승리를 얻는 만반의 대책이다. 문제는 조조의 제안을 칭찬하면서 그에게 상을 내리라고 명령했다.
이는 롱서 백성들이 겁이 많고 나약해서가 아니라 장수들이 군대를 통솔하는 방법이 졸렬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병법에는 "필승 장수는 있어도, 필승 백성은 없다"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변방을 안정시키고 공명을 세우는 것은 좋은 장수에 있으니 좋은 장수를 고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조조의 판단이었다.
그는 용병과 작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조건은 다음 세 가지라고 보았다. 첫째는 (유리한) 지형을 확보하는 것이고, 둘째는 병사들의 소질을 훈련시키는 것이며, 셋째는 좋은 무기를 갖추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조조는 이렇게 지적한다. 무기와 장비가 좋지 않으면 병사들을 사지로 내모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병사들을 엄격하게 훈련시키지 않으면 작전이 불가능하며 장수도 죽으러 가는 것이다. 장수가 병법의 원리와 방법을 모르면 군주를 적의 손에 넘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군주가 장수를 제대로 고르지 못하면 국가를 멸망의 길로 이끌게 된다. 이 네 가지는 국방건설에 지극히 중요한 문제다.
조조는 또 한나라 군대와 흉노 군대의 장점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흉노의 장점은 세 가지가 있고 한나라의 장점은 다섯 가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자신의 장점으로 적의 단점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병사는 흉기요, 전쟁은 위험스러운 일이다"라고 말했다. 병법을 모르면 크더라도 작아질 수밖에 없고, 강하더라도 약할 수밖에 없다. 전쟁이란 병사들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것이므로 만에 하나 패하면 후회해도 소용없다. 따라서 제왕의 용병술은 만전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조조는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그는 우선 소수민족과 공동전선을 구축하여 흉노를 공격하자고 했다. 좋은 무기와 장비를 소수민족에게 나누어주고, 그들의 습관에 익숙하고 그들과 잘 화합할 수 있는 좋은 장수를 보내 그들을 통솔하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험준한 요지를 지키게 한다. 평원의 요충지는 한나라 군대가 지킨다. 이 두 가지를 잘 배합하여 각자의 장점을 발휘하게 한다. 이것이야말로 승리를 얻는 만반의 대책이다. 문제는 조조의 제안을 칭찬하면서 그에게 상을 내리라고 명령했다.
중앙통치를 다지다
기원전 155년(경제 2년) 조조는 어사대부가 되어 조정의 중추인 승상·태위와 함께 이른바 삼공(三公)의 반열에 올라섰다. 자리는 높고 권력은 무거워졌다. 그는 경제에게 지방 제후들의 권력을 축소시키는 '삭번(削藩)'을 건의했다. 이것이 바로 '삭번책'이다. 서한 왕조에 대한 지방세력, 즉 번왕(藩王)들의 위협을 제거하자는 목적이었다. 그는 문제 때도 제후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법 개정을 여러 차례 건의한 바 있다.
조조는 동성, 즉 유씨 성을 가진 제후들이 전국 토지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에게 죄가 있으면 군(郡) 하나 정도만 봉지로 남겨놓고 나머지는 모두 조정이 회수하여 봉국을 취소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경제는 조조의 건의를 받아들여 주요 제후들의 봉지를 삭탈하는 한편 30여 조항의 법령을 개정했다.
한편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조조의 아버지는 영천에서 아들에게 와서 "황상께서 막 즉위하셨고 너는 어사대부가 되어 조정을 위해 일해야 하거늘 제후들의 이익을 침범하고 그들의 직권을 삭탈하여 종친들끼리 골육상잔을 벌이게 만들었으니 이제 저들은 모두 너를 원망하고 욕할 것이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했느냐?"라고 물었다. 이에 조조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천자의 지엄한 권위는 드러나지 못하고 나라도 안정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아버지는 깊게 한숨을 쉬면서 "유씨 집안(한 왕조)이 편안해지니 우리 조씨 집안이 위태로워지는구나!"라고 말한 다음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조조의 아버지는 죽기에 앞서 "내가 두 눈을 뜬 채 네가 화를 당하는 꼴을 차마 볼 수 없구나!"라고 말했다.
아버지의 예상대로 삭번은 제후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쳤다. 그들은 오왕과 초왕을 중심으로 세력을 모아 '오·초 7국의 난'을 일으켰다. 정적의 하나였던 원앙(袁盎) 등은 경제 앞에서 이 사태의 책임이 모두 조조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조조를 죽이고 제후의 땅을 되돌려주어야만 피 흘리지 않고 제후의 난을 다스릴 수 있다고 했다. 이어 개혁에 반대하는 대신들까지 들고일어나 조조를 탄핵했다. 결국 조조는 조례복을 입고 입궁하여 동시(東市)에서 참수되었다.
조조는 동성, 즉 유씨 성을 가진 제후들이 전국 토지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에게 죄가 있으면 군(郡) 하나 정도만 봉지로 남겨놓고 나머지는 모두 조정이 회수하여 봉국을 취소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경제는 조조의 건의를 받아들여 주요 제후들의 봉지를 삭탈하는 한편 30여 조항의 법령을 개정했다.
한편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조조의 아버지는 영천에서 아들에게 와서 "황상께서 막 즉위하셨고 너는 어사대부가 되어 조정을 위해 일해야 하거늘 제후들의 이익을 침범하고 그들의 직권을 삭탈하여 종친들끼리 골육상잔을 벌이게 만들었으니 이제 저들은 모두 너를 원망하고 욕할 것이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했느냐?"라고 물었다. 이에 조조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천자의 지엄한 권위는 드러나지 못하고 나라도 안정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아버지는 깊게 한숨을 쉬면서 "유씨 집안(한 왕조)이 편안해지니 우리 조씨 집안이 위태로워지는구나!"라고 말한 다음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조조의 아버지는 죽기에 앞서 "내가 두 눈을 뜬 채 네가 화를 당하는 꼴을 차마 볼 수 없구나!"라고 말했다.
아버지의 예상대로 삭번은 제후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쳤다. 그들은 오왕과 초왕을 중심으로 세력을 모아 '오·초 7국의 난'을 일으켰다. 정적의 하나였던 원앙(袁盎) 등은 경제 앞에서 이 사태의 책임이 모두 조조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조조를 죽이고 제후의 땅을 되돌려주어야만 피 흘리지 않고 제후의 난을 다스릴 수 있다고 했다. 이어 개혁에 반대하는 대신들까지 들고일어나 조조를 탄핵했다. 결국 조조는 조례복을 입고 입궁하여 동시(東市)에서 참수되었다.
"조조는 제후들의 세력이 갈수록 강해져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다는 상황을 바로 보고 황상께 삭번을 통해 중앙통치를 강화하라고 건의한 것입니다. 이는 만대에 이익이 되는 큰 모략이었습니다. 계획이 막 실행되려는데 죽음을 당함으로써 안으로는 조정 충신들의 입을 막고 밖으로는 제후들이 보복에 나섰으니, 신은 폐하께서 잘못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경제는 조조를 무고하게 죽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나 때는 벌써 늦었다. 경제는 제후들의 난을 평정한 뒤 제후들이 더 이상 국가를 다스리지 못하게 했다. 이로써 제후들은 정치적 권력을 잃고 세력이 크게 약화되고 말았다. 상대적으로 중앙정권은 크게 강화되었다. 조조의 '삭번 모략'은 역사발전의 방향에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조조"
그에 대한 황제의 총애는 9경을 능가했고, 그의 손을 거쳐 개정되지 않은 법령이 없을 정도였다.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그는 공신들과 제후들의 온갖 저항과 압력을 무릅쓰고 이들의 세력을 삭감하는 '삭번(削藩)'을 건의했다. 제후들과 공신들은 모두 그를 증오했다. 그의 아버지는 이런 아들을 걱정하며 "(아들 때문에) 유씨 황실은 편해지겠지만 우리 조씨 집안은 위태로워졌다. 화가 우리에게 생길 끔직한 일을 차마 볼 수 없다"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아버지가 죽자 오초 7국이 그를 죽인다는 명분을 앞장세워 반란을 일으켰다. 황제는 그에게 조복(朝服)을 입혀 동시(東市)에서 목을 베었다. 난은 진압되었고 제국은 안정을 되찾았다.
서한 초기 중앙정부와 지방세력 사이에 끊이지 않는 알력과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이른바 삭번을 건의한 그는 조조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역사경험을 종합하여 중앙집권의 논리적 타당성을 제기하고, 이를 실천에 옮긴 논객이었다. 대세를 파악하고 자신의 희생을 감수한 정치가였다. 시대가 자신에게 맡긴 역할이 무엇인지를 누구보다 잘 알았던 지사(志士)이기도 했다. 또 새로운 시대에 참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간파했던 모략가였다.
조조는 자신에게 닥칠 엄청난 반동의 물결과 그 결말까지 예감했던 인물이다. 그의 방법은 과격하고 비타협적이었다는 약점을 갖고 있었지만 당시 대세를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의 '삭번' 건의는 역사발전의 방향과 일치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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