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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일 토요일
정도전.鄭道傳
정도전 鄭道傳"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 봉화호장 정공미(鄭公美)의 고손자로, 아버지는 형부상서 정운경(鄭云敬)이다. 선향(先鄕)은 경상북도 영주이며, 출생지는 충청도 단양 삼봉(三峰)이다.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교체되는 격동의 시기에 역사의 중심에서 새 왕조를 설계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꿈꾸던 성리학적 이상 세계의 실현을 보지 못하고 끝내는 정적의 칼에 단죄되어 조선 왕조의 끝자락에 가서야 겨우 신원 되는 극단적인 삶을 살았다.
민본사상"
정도전의 집안은 본래 봉화 지역의 향리였다. 고려 시대까지 향리는 우리가 아는 조선조의 향리와는 그 격이 달라, 지방의 토착세력을 말한다. 정도전 집안은 경상도 봉화지역의 토착세력인 셈이다. 부친 정운경의 뒤를 이어 과거에 급제한 정도전은 22살 때 충주 사록에 임명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또한 정도전은 공민왕의 유학 육성 사업에 참여해 성균관 교관에 임명되었다. 이때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정몽주∙이숭인 등도 함께 참여하였다. 그러나 공민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정도전에게 시련의 시작이었다.
공민왕의 뒤를 이어 우왕이 즉위하였는데, 우왕이 재위하던 때는 정도전과 정치적 성향이 다른 이인임 등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양측의 충돌은 불가피하였고, 결국 원나라 사신의 마중을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정도전은 오늘날의 전라도 나주에 속해 있는 회진현에서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다. 회진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정도전은 그곳에서 백성들의 삶을 직접 목격하고는 위민의식(爲民意識)을 키웠다.
정도전이 회진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어느 날, 들녘에서 한 농부를 만났다. 그 농부는 정도전을 보고 당시 관리들이 ‘국가의 안위와 민생의 안락과 근심, 시정의 득실, 풍속의 좋고 나쁨’에 뜻을 두지 않으면서 헛되이 녹봉만 축내고 있다며 질책하였다. 촌로의 이러한 발언은 정도전에게 백성을 위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다시 마음에 새기는 계기가 되기 충분하였을 것이다. 결국 그가 제시했던 민본사상은 허울 좋은 이름뿐이 아니었다. 실제 백성의 삶을 목격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진정성이 담보된 것이었다.
장자방 이 되다."
정치적 시련에 대장부의 거대한 야망이 꺾일 만도 하지만, 오히려 정도전은 더욱 강해졌다. 관직에 다시 등용된 정도전은 전의부령, 성균좨주 등의 관직을 지내다가, 이성계의 추천으로, 성균대사성에 임명되었다. 성균대사성은 성균관의 책임자를 말하는데, 당시 학계를 주도하는 위치에 오르게 된 것이었다.
사실 이성계와 정도전의 만남은 그보다 앞선 1384년(우왕 10년)에 이루어졌다.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정도전이 여진족 호발도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함경도에 있던 동북면도지휘사 이성계를 찾아가면서부터였다. 이성계의 군대를 본 정도전은, 이성계가 자신의 포부를 실현해줄 것으로 확신하였다. 그리고는 군영 앞에 서 있던 노송에 아래와 같은 시를 남겨 놓았다.
"아득한 세월에 한 그루 소나무
푸른 산 몇만 겹 속에 자랐구나
잘 있다가 다른 해에 만나볼 수 있을까
인간을 굽어보며 묵은 자취를 남겼구나"
이 시에 대해 조선 초에 만들어진 [용비어천가]에서는 정도전이 이미 천명의 소재를 알고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정도전은 평소 취중에 “한나라 고조가 장자방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한고조를 이용하였다.”라고 말하고는 하였다. 한고조를 이성계에 대비한 것인데, 그렇다면 결국 자신이 이성계를 이용했다는 말이 된다. 한 대장부의 거대한 야망을 느끼게 한다.
왕조를 설계하다"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가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하면서 정도전의 야망은 급물살을 탔다.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 때 고려 조정에는 한편에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온건세력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정도전, 조준과 같이 급진적 개혁세력이 있었다. 이성계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그는 이미 급진적 개혁세력의 맹주가 되어 있었다. 정몽주가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에 의해 선지교(후일의 선죽교)에서 피살되면서 그를 추종하는 세력은 궤멸하였다. 이제는 그야말로 이성계 천하가 된 것이었다.
정몽주가 피살된 후 이성계를 추대하려는 세력의 움직임이 가속화되어 드디어 1392년, 5백 년 고려 왕조는 역사 속에서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조선 왕조가 들어섰다. 조선이 개국된 후 정도전의 활약은 눈부셨다.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는 과정을 비롯해 현재의 경복궁 및 도성 자리를 정하였고, 수도 건설 공사의 총책임자로 임무를 수행하였다. 수도 건설이 마무리되면서는 경복궁을 비롯한 성문의 이름과 한성부의 5부 52방 이름도 지었다. 서울을 구성하던 각종 상징물에 의미를 부여하였는데, 대부분 유교의 덕목이나 가치가 담긴 표현이었다. 서울이 수도로서의 의미만이 아닌 유교적 이상을 담은 곳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었다.
그는 [조선경국전]을 지어 태조에게 올렸다. 이 책은 조선의 통치 규범을 제시한 것으로 후일 조선의 최고 법전인 [경국대전]이 나오게 되는 출발이었다. 이 책에서 정도전은 자신이 꿈꾸던 요순시대를 건설하기 위한 거대한 정치 구상을 제시하였다. 요순시대처럼 임금과 신하가 서로 조화를 이루는 왕도정치를 전면적으로 표방한 것이었다.
요동 정벌, 표전문 사건"
정도전은 조선 개국 후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치며 권력의 핵심에 있었으나,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 곤경에 처하기도 하였다. 특히 그가 주창한 요동정벌 문제는 조선과 명나라의 주요한 외교 문제로 비화되기도 하였다. 당시 명나라는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표방하였다. 다만, 여진과 제휴한다든지, 요동에 진출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촉각을 곤두세웠다. 특히 요동 진출 문제와 관련해서 정도전은 명나라에서 보면 요주의 인물이었다. 정도전은 태조에게 외이(外夷 : 중화질서 속에서 중국 이외의 민족을 지칭하는 개념)로서 중원에 들어가 왕이 되었던 사례가 있음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이는 중국 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도 중원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표현이었다.
1394년(태조 3년)에 이른바 ‘표전문사건’이 일어났다. 표전문이란 표문과 전문의 합칭으로, 조선이 중국의 황제와 황태자에게 보내는 공식 문서를 말한다. 당시 명나라에서는 조선에서 파견된 유구와 정신의가 가지고 간 표문을 문제 삼았다. 유구 등은 결국 명나라에 구속되어 심문을 받게 되었는데, 이때 문제가 된 표문의 작성자로 정도전이 지목되었다. 명나라에서는 당장 정도전의 소환을 요구하였다. 명나라의 요구를 둘러싸고 조선 조정에서 설왕설래하였다. 논의 결과 표문을 작성한 사람은 정총이고, 전문을 작성한 사람은 김약항이라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사지로 정도전을 보낼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결국 정총은 병을 이유로 가지 않고 김약항만이 명나라로 가게 되었다.
명나라의 요구가 거세었지만, 정도전이 가지 않은 것은 아마도 정치적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 같다. 당시 정치를 주도하던 조정 관리들이 대부분 정도전 계열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후일의 태종 계열인 하륜만이 정도전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할 뿐이었다. 조정의 결정에 따라 김약항이 파견되었으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나 명나라에서 다시 정도전을 압송하도록 요구하였다. 이때도 역시 정도전은 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국내에 있으면서 진법(陣法) 훈련을 강화하며 요동정벌을 위한 제반 준비를 진행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사병 혁파를 둘러싸고 왕자 및 공신들과 갈등을 초래하였다.
갈등, 정도전과 이방원"
개국 후 태조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 소생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는 문제에 관여하였다. 태조에게는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 첫째는 신의왕후 한씨이고, 둘째가 신덕왕후 강씨였다. 신의왕후 소생 아들로는 방우∙방과(정종)∙방의∙방간∙방원(태종)∙방연 등이 있었다. 이들은 신덕왕후 소생의 아들보다도 아버지 태조가 왕위에 오르는 데 공도 많았다. 그런데 정도전이 이를 다 무시하고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게 하였던 것이었다.
정몽주를 선지교에서 살해함으로써 조선 건국이 가속화되는 계기를 만들었던 이방원 등 첫째 부인 한씨 소생들의 불만이 커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더구나 사병 혁파 문제로 서로 갈등을 보이던 중 1398년(태조 7년) 제1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였고, 정도전은 이방원이 이끄는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도전은 조선초 내내 신원 되지 않다가 고종 때 관직이 회복되었다. 고종 때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건국 초에 설계 등에 참여한 정도전의 공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제1차 왕자의 난 발생 원인은 개인적인 불만이 표출된 것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방원과 정도전이 가지고 있던 정치적 이상의 차이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국가체제를 어떻게 편제하고 운영할 것인가의 차이인 것이다. 정도전이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꾀하는 이상적인 왕도정치를 표방하였다면, 이방원은 그와는 달리 강력한 왕권에 바탕을 둔왕조국가를 지향했기 때문이었다. 이상과 현실의 갈등에서 현실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사림들이 집권하게 되면서 정도전이
"꿈꾸던 이상 세계가 구현되어 갔으니, 정도전의 꿈은 꿈에서 그친 것이 아니리라 “정도전은 화의 근원”
-명태조 주원장.
“헤어진 지 오래되니 그리운 생각이 더욱 간절하오. 최긍이 와서 안부를 듣게 되니 적잖이 위로가 되었소.”
-태조 이성계.
“잘 되어간다. 만일 잘 안 풀리면 군대를 이끌고 와서 한바탕 해주지”
“한나라를 세운 건 유방이 아니라 장자방이다. 나는 조선의 장자방이다.”
-정도전."
조선왕조의 설계자, 정도전"
행정 : 경복궁(景福宮)의 위치 및 이름 제정 / 판삼사사_국가 재정 총괄
군사 : 판의흥삼군부자_국가 병권 담당 / 병서 <사시수수도>, <진도>를 지어 병사훈련에 활용
- 강력한 조선군을 만들어 요동정벌을 계획
교육 : 세자 교육
역사 : 역사서 <고려국사>저술
음악 : 악사 <문덕곡>, <몽금척> 등을 지어 조선 궁중음악의 기틀을 마련
법 : <경국대전>의 모태인 <조선경국전>, <경제문감> 저술
요동 정벌을 강력하게 주장한 정도전
정도전과 남은이 임금을 날마다 뵙고 요동을 공격하기를 권고했다.
(요동정벌을 반대하던) 조준에게 찾아가서 말했다.
“요동을 공격하는 일은 이미 결정되었으니 공은 다시 말하지 마십시오.”
"조선왕조실록 태조 7년(1398) 8월 9일.
세계를 제패한 몽골에 맞서 40년을 버텨낸 나라, 고려 수비에 유리한 산악지형 / 활의 명수들이 포진
흩어진 사병들을 통합해 단일 지휘체계를 확보한다면 요동 정벌은 가능하다!
명태조 주원장이 정도전을 위험인물로 여겨 제거하려고 했으나 태조 이성계가 보호
시대를 앞서간 정도전"
태종은 정도전이 구상, 추진한 정책의 대부분을 그대로 실행 요동 정벌, 재상총재제1)는 따르지 않음
정도전은 전문 정치인인 재상이 국정을 운영하는 것이 효율적 · 안정적이라 생각
"왕에게는 재상 임명권을 부여
“똑똑한 명군이 태평성대를 이룰 수도 있지만 멍청한 암군이 나라를 혼란에 빠뜨릴 수도 있다.”
만약 정도전이 더 오래 살았다면...
재상 중심의 입헌군주제 / 단일 지휘체계 확보, 요동정벌 재상이 국정을 총괄하는 제도 (=입헌군주제)
“개국 초기에 시행된 큰 정책은 다 선생이 찬정한 것으로써 당시 영웅호걸이 일시에 구름이 용을 따르듯 하였으나 선생과 더불어 견줄 자가 없었다.”
-신숙주
"정의"
1342(충혜왕 복위 3)∼1398(태조 7). 고려 말 조선 초의 정치가·학자.
생애"
아버지와 이곡(李穀)의 교우관계가 인연이 되어, 이곡의 아들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정몽주(鄭夢周)·박상충(朴尙衷)·박의중(朴宜中)·이숭인(李崇仁)·이존오(李存吾)·김구용(金九容)·김제안(金齊顔)·윤소종(尹紹宗) 등과 교유했으며, 문장이 왕양혼후(汪洋渾厚)해 동료 사우의 추양(推讓)을 받았다. 1360년(공민왕 9) 성균시에 합격하고, 2년 후에 동 진사시에 합격해 충주사록(忠州司錄)·전교주부(典校注簿)·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를 역임하였다.
1370년 성균관박사로 있으면서 정몽주 등 교관과 매일같이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수업, 강론했으며, 이듬 해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임명되고 5년간 전선(銓選: 인사행정)을 관장하였다. 1375년(우왕 1) 권신 이인임(李仁任)·경복흥(慶復興) 등의 친원배명정책에 반대해 북원(北元) 사신을 맞이하는 문제로 권신 세력과 맞서다가 전라도 나주목 회진현(會津縣) 관하의 거평부곡(居平部曲)에 유배되었다.
1377년에 풀려나서 4년간 고향에 있다가 삼각산(三角山) 밑에 초려(草廬: 三峰齋)를 짓고 후학을 가르쳤으나, 향인(鄕人) 재상이 서재를 철거해 부평으로 이사하였다. 그곳에서도 왕모(王某)라는 재상이 별업(別業)을 만들기 위해 재옥(齋屋)을 철거하자 다시 김포로 이사하였다. 1383년 9년간에 걸친 간고한 유배·유랑 생활을 청산하고, 당시 동북면도지휘사로 있던 이성계(李成桂)를 함주 막사로 찾아가서 그와 인연을 맺기 시작하였다.
1384년 전교부령(典校副令)으로서 성절사 정몽주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다음 해 성균좨주·지제교·남양부사를 역임하고,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대사성으로 승진하였다. 1388년 6월에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 일파가 실권을 장악하자 밀직부사로 승진해 조준(趙浚) 등과 함께 전제개혁안을 적극 건의하고, 조민수(曺敏修) 등 구세력을 제거해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았다.
1389년 이성계·심덕부(沈德符)·지용기(池湧奇)·정몽주·설장수(偰長壽)·성석린(成石璘)·조준·박위(朴葳) 등과 모의해 폐가입진(廢假立眞)의 명분을 내걸어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해 좌명공신(佐命功臣: 中典功臣)에 봉해지고, 삼사우사(三司右使)·지경연사(知經筵事)를 지냈다. 그 뒤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서 성절사 겸 변무사(聖節使兼辨誣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윤이(尹彛)·이초(李初)의 무고사건을 해결하고 돌아와 동판도평의사사 겸 성균관대사성(同判都評議使司兼成均大司成)이 되었다. 그리고 1391년 삼군도총제부 우군총제사(三軍都摠制府右軍摠制使)가 되어 병권을 장악하였다.
구세력의 탄핵으로 봉화에 유배되었다가 이듬 해 봄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중에 낙마한 사건을 계기로 고려 왕조를 옹호하던 정몽주·김진양(金震陽)·서견(徐甄) 등의 탄핵을 받아 보주(甫州: 지금의 예천)의 감옥에 투옥되었다. 이유는 “가풍이 부정(不正)하고 파계(派系)가 불명(不明)하다.”든가, "천지(賤地)에서 기신(起身)해 당사(堂司)의 자리에 몰래 앉아 무수한 죄를 지었다.”는 것으로, 특히 신분적 약점이 많이 거론되었다.
정몽주가 이방원(李芳遠) 일파에 의해 격살되자 유배에서 풀려 나와, 같은 해 7월에 조준·남은(南誾) 등 50여 명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해 조선 개창의 주역을 담당하였다. 조선 개국 후 개국1등공신으로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郎贊成事)·동판도평의사사사·판호조사(判戶曹事)·겸판상서사사(兼判尙瑞司事)·보문각대학사(寶文閣大學士)·지경연예문춘추관사(知經筵藝文春秋館事)·겸의흥친군위절제사(兼義興親軍衛節制使) 등의 요직을 겸임해 정권과 병권을 한 몸에 안았다.
같은 해 겨울에 사은 겸 정조사로서 두 번째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3년(태조 2)<문덕곡(文德曲)>·<몽금척(蒙金尺)>·<수보록(受寶籙)> 등 3편의 악사(樂詞)를 지어 바쳐 이성계의 창업을 찬송했으며, 문하시랑찬성사로서 동북면도안무사(東北面都安撫使)가 되어 동북면 개척에도 힘을 기울였다.
1394년 정월에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로서 경상·전라·양광삼도도총제사(慶尙全羅楊廣三道都摠制使)가 되어 재정 및 지방 병권을 장악하였다. 한편, 같은 해 6월『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지어 올리고 이 해 『심기리(心氣理)』 3편을 저술했으며, 한양 천도를 계획, 실천해 수도 경영에 주동적으로 참획하였다.
1395년정총(鄭摠) 등과 더불어 『고려국사(高麗國史)』 37권을 지어 올리고, 『감사요약(監司要約)』을 저술해 전라도관찰사 이무(李茂)에게 주었으며, 『경제문감(經濟文鑑)』을 저술해 재상·대간·수령·무관의 직책을 밝혔다. 1396년 이른바 표전문(表箋文) 문제로 명나라에서 이를 트집잡아 내정을 간섭하자, 전부터 추진해오던 요동(遼東) 수복운동에 박차를 가해 군량미확보, 진법훈련(陣法訓鍊), 사병혁파를 적극 추진하였다.
1397년『경제문감별집(經濟文鑑別集)』을 저술해 군도(君道)를 밝히고, 12월에 동북면도선무순찰사가 되어 군현의 지계(地界)를 획정하고 성보(城堡)를 수선하며 참호(站戶)를 설치하였다. 1398년권근(權近)과 더불어 성균관제조가 되어 4품 이하의 유사(儒士)들에게 경사(經史)를 강습시키고, 여름에 『불씨잡변(佛氏雜辨)』을 저술해 배불숭유(排佛崇儒)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하였다.
9월에 진법훈련을 강화하면서 요동 수복계획을 추진하던 중 이방원의 기습을 받아 희생되었다. 죄명은 세자 이방석(李芳碩)에 당부(黨附)해 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것이었다. 이를 공소난(恭昭難)·무인난(戊寅難) 혹은 제1차 왕자의 난이라고 한다.
활동사항"
문인이면서 동시에 무(武)를 겸비했고, 성격이 호방해 혁명가적 소질을 지녔으며, 천자(天資)가 총민해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군서(群書)를 박람해 의론(議論)이 정연했다 한다.
개국 과정에서 자신의 위치를 한(漢)나라 장량(張良)에 비유하면서, 한고조(漢高祖: 劉邦)가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고조를 이용했다고 하면서 실질적인 개국의 주역은 자신이라고 믿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노약 노비(老弱奴婢) 약간 명을 상속받았을 뿐, 오랫동안 유배·유랑 생활을 보내면서 곤궁에 시달렸다. 더욱이, 부계혈통은 향리(鄕吏)의 후예로서 아버지 때에 이르러 비로소 중앙 관료의 벼슬다운 벼슬을 했으며, 어머니와 아내가 모두 연안 차씨(延安車氏)공윤(公胤)의 외예 얼속(外裔孽屬)이었다. 특히 모계에 노비의 피가 섞여 있었다.
이러한 혈통 때문에 구가세족이나 명분을 중요시하는 성리학자들로부터 백안시 당하는 경우가 많았고, 조선시대에도 3노가(奴家)의 하나라는 세인의 평을 받았다. 그와 건국사업을 함께 한 조영규(趙英珪)·함부림(咸傅霖) 등 개국공신과 태종 때의 중신 하륜(河崙) 역시 연안 차씨의 외척 얼손(孽孫)으로서, 조선 개국에는 신분적 하자가 큰 인물들이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청·장년의 시기를 맞았던 고려 말기는 밖으로 왜구·홍건적의 침구로 국내가 어수선했고, 안으로는 구가세족의 횡포로 정치기강이 무너지고 민생이 곤핍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9년간의 시련에 찬 유배·유랑 생활은 그로 하여금 애국적이며 애민적인 의식을 깊게 만들었으며, 그의 역성혁명운동은 이러한 개혁의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된다.
개혁운동이나 그에 수반된 왕조건국사업은 단순한 정치적 실천운동으로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제도로서 정착시켜 사상·제도상으로 조선의 기초를 놓았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발견된다.
『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심문천답(心問天答)』(1375)·『심기리편』(1394)·『불씨잡변』(1398) 등의 철학서를 차례로 저술해 고려 귀족사회의 정신적 지주였던 불교의 사회적 폐단과 철학적 비합리성을 비판, 공격하고, 성리학만이 실학(實學)이요 정학(正學)임을 이론적으로 정립해 유교 입국의 사상적 기초를 다졌다. 그러나 성리학을 강력하게 옹호했다 해서 주자학의 전 체계를 다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주자가례(朱子家禮)』라든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그리고 주자학에서 중요한 사회정책으로 간주되는 사창제(社倉制)·향약(鄕約) 등에 관해서는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또 주자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이단시하는 한당(漢唐)의 공리적 사상(功利的思想)이나 부국강병에 유용한 제도·문물에 대해서는 포용적이었다.
그것은 주자학만으로는 당시의 시대적 과제인 부국강병 달성이나 천민·서얼의 인심 수람, 무인세력의 지위 안정, 무전농민(無田農民)의 구제 등 새 왕조 개창에 필요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까닭이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층신앙(基層信仰)으로 굳어진 불교·도교·참설(讖說) 등을 부분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그의 사상체계는 기본적으로 주자학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음성적으로 이단을 포용하는 절충성을 띠었음이 특색이다.
경세론(經世論)은 『조선경국전』(1394),『경제문감』(1395),『경제문감별집』 등에 제시되어 있다. 조선의 통치규범을 종합적으로 제시한 『조선경국전』은 『주례(周禮)』에서 재상 중심의 권력체계와 과거제도, 병농일치적인 군사제도의 정신을 빌려오고, 한당(漢唐)의 제도에서 부병제(府兵制)·군현제(郡縣制, 守令制)·부세제(賦稅制)·서리제(胥吏制)의 장점을 받아들였다. 또, 명나라로부터는 『대명률(大明律)』을 빌려왔다.
『경제문감』은 재상, 감사, 대간, 수령, 무관의 직책을 차례로 논하고, 『경제문감별집』에서는 군주의 도리를 밝혔다. 그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정치제도는 재상을 최고실권자로 하여 권력과 직분이 분화된 합리적인 관료지배체제이며, 그 통치권이 백성을 위해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민본사상을 강조하였다.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에는 물리적인 힘에 의해 교체될 수 있다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긍정했고, 실제로 혁명 이론에 입각해 왕조 교체를 수행하였다.
사·농·공·상의 직업분화를 긍정하고, 사를 지배층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사의 직업은 도덕가·철학자·기술학자·교육자·무인 등의 역할을 겸비해야 하고 사에서 능력위주로 관리가 충원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또한, 적서(嫡庶)나 양천(良賤)과 같이 혈통에 의한 신분차별을 주장하지 않은 것이 주목된다.
한편, 여말에 나라가 가난하고 민생이 피폐하였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농업생산력의 증대와 토지균분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해결책으로서 민구수(民口數)에 따른 토지재분배와 공전제(公田制) 및 10분의 1세의 확립, 공(工)·상(商)·염(鹽)·광(鑛)·산장(山場)·수량(水梁)의 국가 경영을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따라서 경세론은 자작농의 광범한 창출과 산업의 공영을 통해 부국강병을 달성하고, 능력에 토대를 둔 사 위주의 관료정치를 구현하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의 개혁안은 상당 부분이 법제로서 제도화되었지만 모두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저서"
1. 저서로는 위에 적은 것 이외에 경세(經世)에 관한 것으로 『경제의론(經濟議論)』·『감사요약(監司要約)』이 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고, 고려 역사를 편년체로 엮은 『고려국사』가 있다. 이 책은 뒤에 김종서(金宗瑞) 등이 찬한 『고려사절요』의 모체가 되었으나 지금 전하지 않는다.
2. 병법에 관한 것"
『팔진36변도보(八陣三十六變圖譜)』·『오행진출기도(五行陣出奇圖)』·『강무도(講武圖)』·『진법(陣法)』 등이 있다. 의서(醫書)로는 『진맥도결(胗脈圖訣)』, 역산서(曆算書)로서 『태을72국도(太乙七十二局圖)』와 『상명태을제산법(詳明太乙諸算法)』 등이 있다.
많은 악사(樂詞)를 지어 <문덕곡>,<몽금척>,<수보록>,<납씨곡 納氏曲>,<정동방곡(靖東方曲)> 등을 남겼으며, 회진현의 유배시절과 삼각산·부평·김포·영주 등지에서의 방랑시절에 쓴 수많은 시문들이 지금 『삼봉집』에 전해지고 있다.
『금남잡영(錦南雜詠)』과 『금남잡제(錦南雜題)』는 특히 유배시절의 시문을 모은 것으로 그의 시련기의 사상을 살펴보는 데 좋은 자료이다. 동시에, 당시의 부곡(部曲)의 실상을 이해하는 연구 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삼봉집』은 1397년(태조 6)에 처음 간행되고, 1487년(성종 18)에 중간되었다. 그 후 1791년(정조 15) 누락된 것을 수습해 재간했으며, 이것이 오늘날 전해지고 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정도전은 고려에서 이름 높은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었어요. 그래도 머리가 좋았고 열심히 공부를 해 벼슬자리에 올랐지요.
나랏일을 하는 관리로서의 삶이 그리 편한 것만은 아니었어요. 백성들에게 함부로 힘을 휘두르는 자들을 비판했고, 이 때문에 여러 차례 귀양 생활
정도전은 귀양살이를 하면서 백성들이 힘들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어요.
정도전은 백성들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정도전은 백성들의 더 나은 생활을 위해 이성계 장군의 도움을 얻기.
이성계는 백성들과 군사들의 믿음을 한 몸에 받고 있었어요.
정도전은 이성계 장군을 설득 둘은 나라의 개혁을 결심하게 됩니다.
정도전은 토지 제도를 바로 잡고자 ‘과전법’을 실시.
귀족들이 불합리하게 가지고 있던 땅을 다시 빼앗아 토지 대장(토지에 관한 것들을 기록해 놓은 장부)을 새로 만든 것.
권문세족이 가지고 있는 넓은 토지를 정리하여 백성들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바꾸어주고 싶어서 실시한 개혁적인 정책.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정도전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의 통치 제도를 만들었어요. 또한 새 도읍 한양의 건설에 총책임을 맡았음.
경복궁이나 다른 도성, 거리, 사직단 등 도시의 기본적인 모습은 정도전의 손으로 탄생한 것.
정도전은 각 건물마다 조선이 유교적 국가가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이름까지도 직접 붙임.
정도전은 1398년 왕위 계승권을 두고 일어난 왕자들 사이의 싸움인 ‘왕자의 난’으로 그만 죽임을 당함.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왕위를 차지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정도전을 죽임을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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