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28일 목요일

거북선

거북선,

조선 수군의 최선봉 돌격선.
고려말 조선초에 왜적을 격퇴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여겨지며, 기록상으로는 조선초 문헌에 처음 나타난다. 
임진왜란 직전에 이순신() 장군이 창제귀선을 건조하여 왜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세계 최초의 돌격용 철갑전선()으로 평가된다.
시대 : 조선시대(1795년)
정의 : 1795년에 편찬된 <이충무공전서>의 기록에 따라 복원한 18C의 거북선.
거북선이 먼저 돌진하고 판옥선이 뒤따라 진격하여 연이어 지자·현자 총통을 쏘고, 포환과 화살과 돌을 빗발치듯 우박 퍼붓듯 하면 적의 사기가 쉽게 꺾이어 물에 빠져 죽기에 바쁘니 이것이 해전의 쉬운 점입니다.”
<이순신, 조진수륙전사장(條陳水陸戰事狀), 1593년 9월>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개전 이듬해인 1593년 조정에 보낸 보고서의 한 구절이다. 이순신 장군이 이 장계에서 자신 있게 언급했듯이 거북선()과 판옥선은 임진왜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를 뒷받침한 가장 강력한 물적 토대 중 하나였다.
고려말 조선초에 왜적을 격퇴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여겨지며, 기록상으로는 조선초 문헌에 처음 나타난다. 
임진왜란 직전에 이순신() 장군이 창제귀선을 건조하여 왜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세계 최초의 돌격용 철갑전선()으로 평가된다.
이순신 장군이 건조한 창제귀선()의 일반적인 외부의 형태와 전투력에 관해서만 기록하고 있으며, 실제 건조에 필요한 세부적인 치수에 대해서는 기록한 것이 없다. 
태종 때의 거북선과 이순신이 말한 거북선과의 관계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때 거북선은 이순신의 고안에 의해서 군관 나대용() 등이 실제로 건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거북선이 임진왜란 때 돌격전선으로서 기능을 발휘함에 따라 전란 후에는 그 모양이 조금씩 변하여 용머리[]는 거북머리[]로 바뀌고, 치수도 일반적으로 장대()해지는 등 차차 크게 건조되었는데, 1795년(정조 19)에 간행된 《이충무공전서()》에 ‘전라좌수영 거북선’ 및 ‘통제영 거북선’의 그림과 함께 건조에 필요한 부분적인 치수가 어느 정도 기록되어 있다. 
현재까지 전해오는 문헌 중에서 ‘거북선[]'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타나는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에는 1413년(태종 13) 5월 초에 “왕이 임진강 나루를 지나다가 거북선이 왜선으로 꾸민 배와 싸우는 모습을 보았다”고 하였고, 2년 후에는 다시 “거북선이 매우 견고하여 적선이 해치지를 못한다”고 되어 있으나, 어떤 형태와 규모였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적혀 있지 않아서 알 길이 없다. 
그 후 180여년 간 거북선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 않다가 이순신 장군의 임진년(1592) 일기인 《난중일기()》 2월 8일 기사에 “거북선에 사용할 돛 베() 29필을 받다”라는 기록이 있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거북선에 비치한 포()를 처음 발사한 날은 임진년(:1592) 3월 27일이며, 처음 해전에 참가한 것은 장계()에서 “5월 29일 사천해전()”이라 기록하고 있다.

거북선 – 갑판 위에 덮개를 씌운 특수한 구조의 군함.

거북선은 지붕 혹은 덮개 역할을 하는 개판()이 갑판의 윗부분을 덮고 있는 특수한 구조를 가진 군함이다. 그 덕택에 갑판에 근무하는 승조원들과 전투요원들이 적의 공격에 직접 노출되지 않고 내부에서 안전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일본군들은 해전에서도 적의 배로 뛰어들어 칼과 창으로 승부를 가리는 것을 선호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왜군들이 조선의 배로 뛰어들어 단병접전을 시도하지 못하게 막고, 조선의 장기인 활쏘기와 화약무기 사격으로 적을 제압할 수 있다면 이상적이었다. 그 같은 필요에 따라 기본 갑판 위에 갑판을 한 층 더 높인 군함이 판옥선이고, 갑판 위에 아예 덮개를 씌운 군함이 거북선이다.
거북선은 두꺼운 개판과 개판 위에 설치한 뾰족한 철침으로 적이 뛰어드는 것을 원천봉쇄할 수 있고, 적의 화살 공격은 물론이고 조총 사격도 어느 정도 막아낼 수 있었다. 
조선 수군의 주력 군함이었던 판옥선은 1층 갑판에 있는 인원들만 보호할 수 있고 2층 상장갑판의 전투요원은 노출된 공간에서 전투할 수 밖에 없었다. 거북선은 배에 탄 모든 사람을 실내에 보호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거북선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돌격함이다. 전선( ; 판옥선)의 윗갑판을 떼어내고 대신 둥근 개판을 설치한 것이 특징이다. 적군이 배 위에 올라올 수 없도록 개판 위에 과선처럼 칼과 송곳을 꽃아두었다. 
배앞과 좌우 방패판, 개판에 총포 구멍을 내고 대포를 장착하여 강력한 화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좌우에는 16개의 노와 2개의 돛이 있어 기동력(약11놋트)을 발휘할 수 있었다. 
승선 인원은 최대 150명이었으며, 내부가 2층으로 되어 있고 아래에선 노를 젓고 짐을 실었으며, 위에서는 총포를 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앞 뒤 2개의 출입문과 지붕에 4개의 비상문이 있고 앞의 용머리에서는 유황과 염초를 태워 연기를 퍼뜨려 적을 교란시켰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197년 뒤인 1795년에 편찬된 <이충무공전서>()가 있는데, 여기에는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통제영거북선과 전라좌수영 거북선의 45도 투시도 및 치수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거북선의 생김새와 만드는 방법, 전투 성능과 각 구조의 기능을 알아볼 수 있는 유익한 자료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배밑의 10쪽을 이어 붙였는데 길이는 64자 8치이고, 머리 쪽(이물) 너비는 12자, 허리(한판)의 너비는 14자 5치, 꼬리 쪽(고물) 너비는 10자 6치이다.

좌우 삼판은 각각 7폭을 이어 쌓아 올렸는데, 높이는 7자 5치이다. 맨 아래 첫째 판(부자리)의 길이는 68자이고, 차차 길어져서 맨 위 일곱째 판의 길이는 113자가 된다. 두께는 다 같이 4치이다.

이물비우는 가로다지로 4쪽을 이어 붙였는데 높이는 4자이고, 둘째 판 좌우에 현자총통 대포구멍을 각각 1개씩 뚫었다. 
고물비우는 가로다지로 7장을 이어 붙였는데 높이는 7자 5치이고, 위쪽 너비는 14자 5치, 아래쪽 너비는 10자 6치이다. 여섯째 판 한 가운데에 직경 1자 2치가 되는 구멍을 뚫어 키(치)를 꽂았다.

좌우 뱃전 밖으로 멍에 뺄목 위에 신방(도리)을 걸고 신방 머리 쪽에 멍에(가룡)를 가로로 걸쳤는데, 바로 이물(뱃머리) 앞에 닿게 되어 마치 소나 말의 가슴에 멍에를 맨 것 같다. 
신방을 따라 가면서 안쪽으로 널빤지를 깔고 신방 위에 기둥을 세우고 방패를 둘러 세웠다. 방패 위에 또한 언방(살림집의 도리와 같음)을 걸었는데 신방(현란)에서 언방(패란)까지의 높이는 4자 3치이다.

언방(패란)의 좌우 안쪽으로 각각 11장의 거북 잔등판을 겹쳐서 올려 덮었다. 그 잔등에는 1자 5치의 틈(등골)을 내서 돛대를 세웠다 뉘었다 하기 편하게 하였다.

뱃머리(이물)에 거북머리(용머리)를 달았는데 길이는 4자3치, 너비는 3자가 된다. 안에서 유황과 염초를 태워 입을 벌려서 마치 안개처럼 연기를 토함으로써 적을 혼란시켰다.

좌우에 노가 각각 10척씩 있고, 방패가 14개씩 있다. 그 방패에는 대포구멍이 뚫려 있다. 뱃머리(이물)의 거북머리(용머리) 위쪽에 2개의 대포구멍이 있고, 거북머리(용머리) 아래에 2개의 문을 냈다. 문 옆에 각각 1개씩의 대포구멍이 있다. 
거북잔등판 좌우에 각각 12개의 대포구멍을 뚫었다. 거북 ‘귀()’자 기를 꽂았다.
배의 좌우 겻집(포판) 아래에 방이 각각 12칸씩 있는데, 2칸은 철물을 쌓아두고 3칸은 대포와 활, 화살, 창, 검 등을 쌓아놓고, 나머지 19칸은 병사들이 휴식하는 곳으로 활용했다. 배 위 왼쪽 포판 위에 있는 방 1칸에서는 선장이 생활하고, 오른쪽 포판 위에 있는 방 1칸에서는 장교들이 생활했다.

거북선은 기본적으로 재질이 단단한 나무를 두껍게 사용해 배를 만드는 한선()의 DNA를 그대로 계승한 군함이었다. 1795년에 편찬된 [이충무공전서]는 거북선의 외판 두께가 4치(약 12~13cm)라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 연구자들이 구경 9mm급 조총의 관통력을 시험한 결과를 보면 30m에서 두께 4.8cm의 전나무 판자를 관통했지만, 거리 50m에서는 두께 4.8cm의 전나무 판자를 관통하지 못했다. 
조선 시대 군함은 전나무보다 더 단단한 소나무를 써서 주로 만들었다. 결국 조총으로 50m 이상 거리에서 두께 12~13cm의 거북선 외판을 관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군함에서 방패판 등 강도가 필요한 부분은 소나무보다 더 단단한 참나무를 이용했으므로 주요 부위의 방호력은 더욱 강력했을 개연성이 높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후기에 걸쳐 우리나라에서 널리 사용한 조총은 구경 13~16mm급이 많았는데, 김육(1580~1658)은 [잠곡유고]에서 “대포는 비록 3척(약 90cm) 두께의 방패라도 쉽게 뚫으나 (조총의) 철환은 1촌(약 3cm)도 뚫지 못한다”고 기록한 것도 참조가 된다.
일본에서 구경 9mm급 이상의 조총도 널리 사용했지만 위와 같은 여러 기록을 본다면 어지간한 조총으로는 50m 이상 거리에서 거북선의 외판을 관통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연희전문학교 3대 교장이기도 했던 H. H. 언더우드(Horace Horton Underwood, 1890~1951)도 1933년 영국왕립아시아학회 조선분과지에 발표한 그의 논문(Korea Boats and ships)에서 “거북선 개판의 두꺼운 나무 판자만으로도 충분히 일본군의 조총 사격은 막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돌격선.

거북선은 판옥선과 달리 갑판 윗부분까지 완전히 덮개를 씌우고 있었으므로 방호력 측면에서 훨씬 강력했다. 덮개를 씌웠을 때의 또 다른 장점은 적이 아군의 움직임을 전혀 볼 수 없다는 점이었다. 다시 말해 적이 아군에게 조준 사격을 하려 해도 그것조차 쉽지 않았다. 이순신은 조정에 승전 보고를 올리면서 이 같은 거북선의 특성에 대해 강조한다.
“신이 일찍이 왜적들의 침입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별도로 거북선을 만들었는데, 앞에는 용머리를 붙여 그 입으로 대포를 쏘게 하고, 등에는 쇠못을 꽂았으며 안에서는 능히 밖을 내다볼 수 있어도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게 하여 비록 적선 수백 척 속에라도 쉽게 돌입하여 포를 쏘게 되어 있으므로 이번 출전 때에 돌격장이 그것을 타고 나왔습니다.” 
<이순신,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 1592년 6월14일>
방호력을 바탕으로 거북선은 최선봉에서 돌격선 역할을 수행했다. 거북선이 최초로 출전한 전투로 알려져 있는 사천해전의 상황을 조정에 보고하면서 이순신 장군은 “먼저 거북선으로 하여금 적선이 있는 곳으로 돌진케 하여 먼저 천자, 지자, 현자, 황자 등 여러 종류의 총통을 쏘게 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은 1592년에 5월 벌어진 1차 당포해전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거북선으로 하여금 층루선() 밑을 치고 들어가 용의 입으로 현자철환을 치쏘게 하고 또 천자, 지자 철환과 대장군전을 쏘아 그 배를 깨뜨리자, 뒤따르고 있던 여러 전선들도 철환과 화살을 교대로 쏘았다.” 마치 인파이터 스타일을 구사하는 권투선수처럼 거북선이 적의 기함 역할을 했던 층루선에 바짝 붙어 함포를 대량 발사했다는 이야기다. 
거북선이 이처럼 초근거리로 접근해서 전투를 했다는 목격담은 일본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일본 측 기록인 [고려선전기()]는 1592년 7월10일 벌어진 안골포해전에서 거북선이 일본 배에 3~5칸(5.4~9m)까지 접근한 상태에서 총통으로 대형 화살형 발사체를 쏘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큰 배 중에 3척은 메꾸라 부네(:장님배)인데, 철로 요해하고 있었다. 석화시·봉화시·안고식 화살촉 등을 쏘며 오후 6시까지 번갈아 달려들어 공격을 걸어와 망루로부터 복도, 방패까지 모조리 격파되고 말았다. 석화시라고 하는 것은 길이가 5척6촌에 달하는 견고한 나무기둥이며, 봉화시의 끝은 철로 둥글게 든든히 붙인 것이다. 이와 같은 화살로 5칸, 혹은 3칸 이내까지 접근해서 쏘았다.”
조선 수군은 어느 정도 적선과 떨어진 거리에서 화약무기로 승부는 가르는 것을 선호했다. 하지만 파도가 치는 바다에서 대포를 쏘아 적함을 맞추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해상에서 사거리가 100미터가 넘는 경우 명중 정확도에 한계가 있었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쓰인 배가 거북선이었다고 할 수 있다. 
거북선은 판옥선보다 강한 방호력을 바탕으로 적선에 최대한 가깝게 접근해 코앞에서 명중탄을 날려 보낼 능력이 있었다. 최선봉에서 인파이터처럼 돌격하는 거북선은 그 후방의 판옥선이 적선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데도 도움이 됐고, 적의 전투대형을 직접적으로 교란하는데도 그만이었다. 거북선은 판옥선의 가장 훌륭한 전투 파트너였던 셈이다.

거북선의 발명?
거북선이 탁월한 배라면 거북선의 모든 것에 대해 명쾌한 결론이 나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문제다. 당장 거북선의 발명자를 놓고서도 다양한 견해가 있다. [태종실록]에는 1413년(태종 13년)에 한강에서 거북선()과 가상 왜선이 해전 시범을 보였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2년 뒤인 1415년에도 ‘거북선이 수많은 적에 충돌해도 적이 우리를 해칠 수 없다’는 설명도 나온다.


1979년 작성한 설계도에 따라1999년 다시 제작한 해군사관학교의 1대1크기 거북선 모형

해군사관학교 1대1 크기 거북선 복원 모형이 진해만을 항해하고 있는 모습

거북선의 발명자가 이순신 휘하의 군관이었던 나대용(1556 ~ 1612)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순신 장군이 실제 배를 만들 수 있는 조선 기술자는 아니었으므로 임진왜란 이후에도 해골선 등 여러 가지 새로운 군함을 만든 나대용이 실질적 발명자라는 주장이다. 

(태종 대) 이후 이순신 장군이 다시 거북선을 만들기까지 200여 년 동안 거북선에 대한 기록이 전혀 등장하지 않고 각종 함선의 보유량을 규정한 경국대전에도 거북선이 누락되어 있으므로 당시 거북선과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을 같은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최근에는 거북선의 발명자가 이덕홍(1541 ~ 1596)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거북선 그림과 구조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 이덕홍의 문집 [간재집]과 “이덕홍이 전쟁 직전에 류성룡에게 거북선 구상을 전달했고, 류성룡이 이를 다시 이순신에게 전달했다”는 안동 지역의 전설을 근거로 든다.

이 같은 주장은 모두 사료적 근거가 불투명한 개인 문집이나 지방지, 전설에 근거하고 있는 주장이어서 신뢰도에 한계가 있다. 

이순신의 장계나 조선후기의 모든 공식 기록에서 거북선을 이순신이 창제했다고 일관되게 기록하고 있다. 
당시 사회에서 거북선이라는 법 규정 외의 새로운 군함을 만드는 것은 지휘관의 결단이 필요한 일인데, 그 같은 결단을 내린 사람은 결국 이순신 장군이란 점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 개전 초반 이순신 장군이 보유했던 거북선은 3척이었다. 임진왜란 중 중국에 보낸 외교문서를 모아둔 [사대문궤]에는 전라좌수영 거북선이 5척으로 기록되어 있어 2척을 추가로 건조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최대 7~8척의 거북선을 보유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에는 한동안 이 숫자가 유지되다가 1746년 편찬된 [속대전]에는 거북선 보유량이 14척, 1770년의 [동국문헌비고]에는 40척으로 늘어났다. 1808년에 편찬한 [만기요람]은 30척, 1817년에 편찬된 수군의 함선 목록인 [선안]에는 18척으로 줄어들고 있다. 
 
거북선 숫자는 주력 군함인 판옥선의 보유량에 비하면 매우 적은 것이다. 1746년을 기준으로 거북선 보유량은 14척으로 판옥선 보유량은 117척에 비해 8분의 1에 불과했다. 기록상 가장 많은 거북선이 등장하는 1770년을 기준으로 따져도 판옥선 보유량은 83척으로 거북선 40척의 2배가 넘었다. 보유 척수로 보자면 판옥선이 조선 수군의 주력이고, 거북선은 돌격선이라는 특수한 역할을 맡은 군함이었던 셈이다.
현재까지 전해오는 문헌 중에서 ‘거북선[]'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타나는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에는 1413년(태종 13) 5월 초에 “왕이 임진강 나루를 지나다가 거북선이 왜선으로 꾸민 배와 싸우는 모습을 보았다”고 하였고, 2년 후에는 다시 “거북선이 매우 견고하여 적선이 해치지를 못한다”고 되어 있으나, 어떤 형태와 규모였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적혀 있지 않아서 알 길이 없다. 
그 후 180여년 간 거북선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 않다가 이순신 장군의 임진년(1592) 일기인 《난중일기()》 2월 8일 기사에 “거북선에 사용할 돛 베() 29필을 받다”라는 기록이 있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거북선에 비치한 포()를 처음 발사한 날은 임진년(:1592) 3월 27일이며, 처음 해전에 참가한 것은 장계()에서 “5월 29일 사천해전()”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이 건조한 창제귀선()의 일반적인 외부의 형태와 전투력에 관해서만 기록하고 있으며, 실제 건조에 필요한 세부적인 치수에 대해서는 기록한 것이 없다. 
태종 때의 거북선과 이순신이 말한 거북선과의 관계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때 거북선은 이순신의 고안에 의해서 군관 나대용() 등이 실제로 건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거북선이 임진왜란 때 돌격전선으로서 기능을 발휘함에 따라 전란 후에는 그 모양이 조금씩 변하여 용머리[]는 거북머리[]로 바뀌고, 치수도 일반적으로 장대()해지는 등 차차 크게 건조되었는데, 1795년(정조 19)에 간행된 《이충무공전서()》에 ‘전라좌수영 거북선’ 및 ‘통제영 거북선’의 그림과 함께 건조에 필요한 부분적인 치수가 어느 정도 기록되어 있다. 
16세기 말 건조된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의 모형. 경남 진해시 해군사관학교 앞바다 에있다.



1795년대의 통제영 거북선
출처/소장 : 이충무공전서(청주판)/ 이원식
<이충무공전서>의 권두에 거북선에 대한 구조, 성능, 설명문과 통제영 거북선 및 전라좌수영 거북선 그림이 그려져 있다. 
우리 나라의 역사 서적이나 학교의 교과서에는 전라좌수영거북선의 그림을 인용하고 이를 이순신 창제 거북선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이는 1795년식 으로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만든 것과는 구조와 형태 성능이 다르다.
1795년대의 거북선 복원 모형 측면(축적 : /)
출처/소장 : 원인고대선박연구소 복원/한국해양대학교 박물관
거북선의 복원 도면은 <이충무공전서>에 그려져 있는 전라좌수영 거북선 그림을 기본으로 하였으며 <조선왕조실록>, <비변사등록>, <각선도본>, <헌성유고>, <조선삼도수군조련전진도>, <귀선의 과학적연구>, <조선왕조군선연구> 등을 참고로 하고 김재근 교수의 고증 및 지도에 따라 전통한선의 설계 기법으로 도면을 작성했다. 
전통한선 조선 기술 기능 보유자가 전통한선의 조선 공작 기법으로 복원 건조하였다.


고증 : 김재근/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해양조선공학과 명예교수
설계 감리 및 공작 : 이원식/한국해양대학교 해양박물관 명예겸임교수, 장보고연구소 연구원, 원인고대선박연구소 소장
선장( = 배 목수) : 이동수, 안광천

1795년대의 거북배 복원 도면(축적 : /)
이원식/한국해양대학교 장보고연구소 연구원 및 명예겸임교수, 원인고대선박연구소 소장
1795년대 거북선을 만들기 위한 추정 복원 설계 도면

배밑의 길이 : 65자(20.30m)
너비 : 14자5치(4.53m)
길이 : 105자(32.8m) - 추정 치수
너비 : 34자(10.62m) - 추정 치수
깊이 : 7자5치(2.34m)
1795년대의 거북선 복원 3D Data,  그래픽 - Camera view
제공자 : 코리아비주얼스
설명 : 1795년대의 거북선을 디지털화 하기 위한 3D 디지털 복원 작업, 
1795년대의 거북선은 1592년대의 거북선과는 달리 덩치가 커지고 용두의 목도 길어졌다.

복원과정 특징: 1795년대의 거북선 복원 도면(정면, 좌측면, 우측면, 윗면, 아래면)을 토대로 3D 툴을 활용하여 모델링, 매핑, 라이팅 작업으로 디지털 복원하였다. 거북선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돌격함이다. 
전선( ; 판옥선)의 윗갑판을 떼어내고 대신 둥근 개판을 설치한 것이 특징이다. 
적군이 배 위에 올라올 수 없도록 개판 위에 과선처럼 칼과 송곳을 꽃아두었다. 

배앞과 좌우 방패판, 개판에 총포 구멍을 내고 대포를 장착하여 강력한 화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좌우에는 16개의 노와 2개의 돛이 있어 기동력(약11놋트)을 발휘할 수 있었다. 

승선 인원은 최대 150명이었으며, 내부가 2층으로 되어 있고 아래에선 노를 젓고 짐을 실었으며, 위에서는 총포를 쏠 수 있게 하였다. 
앞 뒤 2개의 출입문과 지붕에 4개의 비상문이 있고 앞의 용머리에서는 유황과 염초를 태워 연기를 퍼뜨려 적을 교란시켰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197년 뒤인 1795년에 편찬된 <이충무공전서>()가 있는데, 여기에는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통제영거북선과 전라좌수영 거북선의 45도 투시도 및 치수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거북선의 생김새와 만드는 방법, 전투 성능과 각 구조의 기능을 알아볼 수 있는 유익한 자료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뱃머리(이물)에 거북머리(용머리)를 달았는데 길이는 4자3치, 너비는 3자가 된다. 안에서 유황과 염초를 태워 입을 벌려서 마치 안개처럼 연기를 토함으로써 적을 혼란시켰다.

배의 좌우 겻집(포판) 아래에 방이 각각 12칸씩 있는데, 2칸은 철물을 쌓아두고 3칸은 대포와 활, 화살, 창, 검 등을 쌓아놓고, 나머지 19칸은 병사들이 휴식하는 곳으로 활용했다. 
배 위 왼쪽 포판 위에 있는 방 1칸에서는 선장이 생활하고, 오른쪽 포판 위에 있는 방 1칸에서는 장교들이 생활했다.

배밑의 10쪽을 이어 붙였는데 길이는 64자 8치이고, 머리 쪽(이물) 너비는 12자, 허리(한판)의 너비는 14자 5치, 꼬리 쪽(고물) 너비는 10자 6치이다.

좌우 삼판은 각각 7폭을 이어 쌓아 올렸는데, 높이는 7자 5치이다. 맨 아래 첫째 판(부자리)의 길이는 68자이고, 차차 길어져서 맨 위 일곱째 판의 길이는 113자가 된다. 두께는 다 같이 4치이다.

이물비우는 가로다지로 4쪽을 이어 붙였는데 높이는 4자이고, 둘째 판 좌우에 현자총통 대포구멍을 각각 1개씩 뚫었다. 고물비우는 가로다지로 7장을 이어 붙였는데 높이는 7자 5치이고, 위쪽 너비는 14자 5치, 아래쪽 너비는 10자 6치이다. 여섯째 판 한 가운데에 직경 1자 2치가 되는 구멍을 뚫어 키(치)를 꽂았다.

좌우 뱃전 밖으로 멍에 뺄목 위에 신방(도리)을 걸고 신방 머리 쪽에 멍에(가룡)를 가로로 걸쳤는데, 바로 이물(뱃머리) 앞에 닿게 되어 마치 소나 말의 가슴에 멍에를 맨 것 같다. 
신방을 따라 가면서 안쪽으로 널빤지를 깔고 신방 위에 기둥을 세우고 방패를 둘러 세웠다. 방패 위에 또한 언방(살림집의 도리와 같음)을 걸었는데 신방(현란)에서 언방(패란)까지의 높이는 4자 3치이다.

언방(패란)의 좌우 안쪽으로 각각 11장의 거북 잔등판을 겹쳐서 올려 덮었다. 
그 잔등에는 1자 5치의 틈(등골)을 내서 돛대를 세웠다 뉘었다 하기 편하게 하였다.
뱃머리(이물)의 거북머리(용머리) 위쪽에 2개의 대포구멍이 있고, 거북머리(용머리) 아래에 2개의 문을 냈다. 
좌우에 노가 각각 10척씩 있고, 방패가 14개씩 있다. 
그 방패에는 대포구멍이 뚫려 있다.
문 옆에 각각 1개씩의 대포구멍이 있다. 

거북잔등판 좌우에 각각 12개의 대포구멍을 뚫었다. 그리고 거북 ‘귀()’자 기를 꽂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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