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24일 일요일

산피에트로대성당 , San Pietro Basilica, ─大聖堂.

산피에트로대성당 , San Pietro Basilica, ─大聖堂.

베드로대성당
로마(바티칸)에 있는 로마 ∙ 가톨릭의 총본부. 320년경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성 베드로의 묘 위에 오랑식()의 바실리카를 건립한 후 15세기 말까지 존재했다. 이를 성 베드로 구() 성당이라 부름. 1502년 브라만테의 안()에 따라 집중식의 신성당이 기공되었으나 설계상의 미비로 인하여 중단하고, 줄리아노 ∙ 다 ∙ 상갈로가 교회의 요망에 응해 장당식()으로 변경했다. 프라 조콘도와 라파엘, 페르치, 안토니오 다 상갈로도 각기 안을 제시했으나 모두 채택되지 못하고 1546년 주임건축가가 된 미켈란젤로가 다시 집중식의 안을 설계하여 공사에 착수, 비뇨라가 소() 돔을 부가함. 미켈란젤로 설계의 대() 돔은 1587년~89년에 델라포르타와 도메니코 폰타나가 건조했다. 17세기 초두, 교황 파울루스 5세(Paulus V, 재위 1605~21)가 다시 장당화()를 명해 1607년 설계공모에 의해 마데르나의 정면안()이 당선, 1614년까지 거의 완성함. 1624년에 신랑부()도 완성되고 헌당식을 거행 그후 1656~67년에는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성당 앞면의 광장을 에워싼 장대한 콜로네이드를 건조, 일세기 반에 걸친 공사를 완성했다. 면적 약 1만 6600㎡, 정면의 폭 71m, 오더의 높이 34m, 입구에서 아프시스까지 183m, 대 돔의 내경 42m, 바닥에서 내각 정상부까지 104m, 지반면에서 돔 정점의 십자가까지 138m로서 세계 최대 최호화 성당건축이라 알려진 이탈리아 ∙ 바로크 건축의 대표적 작품의 하나임. 내부에는 미켈란젤로의 서명이 있는 유일한 조각작품 『피에타』(1498~1499/1500)와 베르니니의 발다키노(대천개)가 있음. 광장 중앙에 있는 오벨리스크는 고대 이집트 왕국 제12왕조의 것임.

황청의 산피에트로대성당 관리 성성()의 관리하에 있다. 그 역사는 깊어서 기원으로 말하면 성()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워진 4세기의 바실리카식 성당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16세기 미켈란젤로를 비롯한 당시의 대표적 건축가들에 의해 전성기를 맞은 르네상스의 건축이념에 바탕을 두고 재건되었다.
바티칸에서 가장 중요한 기구인 성 베드로 대성당은 349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베드로 성인의 묘지 위에 세워졌고 실베스트로 교황이 396년에 대성전으로 축성하였다. 그러나 이 성전은 이민족의 잦은 약탈로 인해 극심한 피해를 보았다. 그때마다 보수작업이 뒤따르긴 했으나 원래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었다. 마침내 1503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상갈로의 줄리아노에게 성전의 재건축 계획을 세우도록 하여 브라만테의 설계에 따라 재건축 사업이 시작되었다. 브라만테는 로마에서 가장 역사성이 깊은 판테온의 돔 형태와 화려하고 아름다운 기둥을 도입하고자 하였다. 도중에 몇 차례의 변형이 있었으나 브라만테의 설계는 막판에 건축 책임자였던 미켈란젤로에 의해 다시금 채택됨으로써 오늘에 이르도록 남아 있다.
브라만테가 죽자 건축역사는 라파엘로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교황 레오 10세는 이것을 라파엘로에게만 맡겨둘 수가 없어 상갈로의 줄리아노와 베로나의 조콘도 수사에게 라파엘로를 도와 콘스탄티누스의 기념 성당 구조를 되도록 살리는 선에서 공사를 진행하도록 하였다. 바로 이런 와중에 1517년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1527년 란체스키를 중심으로 한 독일 용병들의 반란으로 공사가 중단되었다. 공사는 1534년 바올로 3세가 즉위하면서 재개되었다. 상갈로의 안토니오가 주도하였고 야코포 멜레키노가 조수로 참여하였다.

1546년에 안토니오가 죽자 미켈란젤로가 이 공사를 이어받았다. 교황 바올로 3세는 미켈란젤로가 73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보내며 "신이 보내준 사람"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미켈란젤로는 전임자였던 안토니오의 설계를 면밀히 분석한 끝에 대수정 작업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미켈란젤로가 수정 보완한 설계도는 초기의 브라만테 정신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주었다. 내부를 그리스식 십자가 형태로 재조정하였고 돔을 현재의 모습대로 설계 변경하였다. 돔은 이 대성당의 꽃이다. 미켈란젤로는 이 돔을 세우기 위하여 1557년 탐부로를 세우면서 1558년에서 1561년까지 나무로 된 돔의 모형을 제작하였다.

1564년 미켈란젤로가 죽자 공사가 잠시 비판에 부딪치기도 했으나 교황 식스투스 5세가 즉위하면서 다시금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다가 1605년 교황 바올로 5세가 등극하면서 성당의 건축은 다시금 변화를 겪었는데, 신임 교황이 옛 콘스탄티누스 기념 성당이 자리잡고 있던 모든 지역을 포괄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대역사의 책임자로 등장한 예술가가 카를로 마테르노이다. 그에 의해 마무리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며 특히 정면공사도 이루어졌다. 마테르노는 모든 면에 있어서 미켈란젤로의 정신을 철저히 계승했다.

1629년에 마테르노가 죽자 신축 성당의 마무리 작업은 잔 로렌초 베르니니에게로 돌아갔다. 그는 성당의 내부가 조화롭게 어울리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창출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성당의 바닥을 대리석으로 아름답게 치장하고, 양쪽 회랑에 마련된 소성당(Capella)들의 장식을 붉은색 기조의 천연 대리석으로 하여 더욱 아름답게 하였다. 천재적인 조각가로 평가받고 있는 베르니니가 있음으로 해서 성당은 완전한 예술작품이 되어 건축사에 길이 남게 되었다. 물론 브라만테,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마테르노 등 수많은 예술가들의 혼이 융화를 이루어 만들어졌다는 점도 빠뜨릴 수 없다.

베드로 성인과 바올로 성인의 조각상이 건물 앞에 서 있는 본당으로 들어가려면 입구의 회랑을 통과해야 한다. 길이 71m 폭 13m 높이 20m의 장엄한 회랑이다. 바닥에는 교황 요한 23세의 문장이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대리석상이 오른쪽에 있다. 이 석상은 베르니니가 1670년에 완성한 작품이다. 그 반대편에는 1725년에 코르나키니가 만든 샤를마뉴의 대리석상이 있다

입구회랑에서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다섯 개 있는데, 맨 오른쪽에 있는 문이 '성스러운 문(Porta Santa)'으로 성년이 되는 해에 일 년 동안 열린다. 1950년 성년을 기념해 제작된 이 문에는 16편의 성서 이야기가 부조되어 있다. 또 같은 해에 제작된 '성사의 문' 역시 성년을 기념한 것이었다.

가운데에는 '중앙문(Grande Portale Centrale)'으로서 초기부터 있던 문이 있다. 1455년에 아베를리노가 제작한 이 문 위쪽에는 그리스도와 마리아의 모습이, 아래쪽에는 베드로와 바올로 성인이 부조되어 있다. '중앙문' 바로 왼쪽에 있는 문이 1977년 교황 바올로 6세의 80회 생일을 기념해 만든 '선과 악의 문'으로 오른쪽에는 선한 것을, 왼쪽에는 악한 것을 상징하는 형상들이 부조되어 있다. 맨 왼쪽의 문은 '죽음의 문'으로 요한 23세 교황이 조각가 만추(Manzu)에게 요청해 만든 예술작품이다. 이 문은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부활에 이르는 죽음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암시하고 있다.

성당 안으로 들어서면 우선 그 화려함과 웅장한 규모에 압도되어 정신을 잃을 정도이다. 중앙 통로의 길이가 약 186m, 폭이 140m 높이는 46m이고 중앙의 제대에서 돔까지의 높이는 137m에 이르므로 로마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셈이다. 대성당 내부에는 44개의 크고 작은 채플, 즉 제대들과 395개의 조각품이 곳곳에 배열되어 있으며, 135개에 달하는 모자이크 그림들이 벽면에 장식되어 있어 그 자체로도 완벽한 미술관인 셈이다.

성당 내부에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향하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조각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나이 겨우 25세에 완성한 피에타 상은 문자 그대로 최고의 걸작품이다.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듯한 모습의 성모님과 그리스도의 의미를 성공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고귀하고 정결한 동정녀의 영상과 인류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를 제물로 내놓은 그리스도의 모습이 교묘하게 대비를 이루면서도 서로 어우러지게 한 점은 놀라울 정도이다. 왼쪽 통로를 걸어올라가면 오른쪽에 성 베드로의 청동상이 있다. 아르놀포 디 캄피오(1245~1302)가 제작한 것으로 피에타와 함께 이 성당의 명물로 통한다. 발가락에 입을 맞추면 죄를 용서받고 복을 얻는다는 전설로 인해 오른쪽 발이 다 닳았을 정도이다.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돔과 더불어 또 하나의 명물로 평가받는 베르니니의 작품으로 교황 제단의 천개(Baldacchino)가 있다. 역시 최고의 걸작으로서 르네상스와 바로크 예술의 상징이다. 그러나 이 천개는 높은 예술성에도 불구하고 제작 당시에는 과다한 청동금속의 사용 때문에 비난의 대상이었다. 심지어 판테온 내부 천장에서 청동을 떼어와야 할 정도였다 한다.

사도 베드로의 무덤 위에 중앙 제단이 있고 여기서 집전하는 교황의 미사에 참여한다는 것은 신자들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커다란 기쁨이다. 그렇다. 대성당은 관광하기보다는 순례하는 곳이다. 깊은 명상 속에 간간이 기도를 읊조리며 한 발 한 발 옮기며 며칠은 보내야 하는 성역이다. 지하의 성인 묘역을 참배하고 두루두루 성화와 성물들을 감상한 다음, 성당 내부의 박물관을 견학하고 나서 돔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타면 천국을 향해 올라가는 느낌이 든다. 굽이굽이 계단을 돌아 쿠폴라 꼭대기에 오르면 로마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아름다움이여! 그 영원함이여! 발 아래 찬란하게 펼쳐진 바티칸 정원에서 싱그러운 바람이 불어온다.
시스티나 채플의 벽화, 위대한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그림과 조각들, 도처에서 수집해온 보석 같은 문화재들이 박품관에서 역사의 향기를 풍기고 있다. 그 중에서도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환상적인 예술성은 얼마나 대단한가! 이 모든 예술품들이 풍겨주는 향기에 취해 눈을 감고 조용히 생각에 잠긴다. 바티칸 곳곳에 숨겨진 저 은밀한 보물들을 여기 소개하지 못하여 미안한 마음이다. 지면의 부족을 아쉬워하며 그들에 대한 이야기는 차라리 다음으로 미뤄야겠다고 다짐하니 마음이 편하다.
15세기에 한 차례 시도되었다가 중단되었던 구당()의 개수계획을 재개하기 위하여 1506년 교황 율리오 2세가 저명한 건축가 도나토 브라만테(Donato Bramante)에게 명하여 본격적인 공사에 착수하게 하였다. 브라만테는 그리스 십자식 플랜의 중심에 대원개()를 얹고, 네 구석에 한 개씩의 작은 원개를 얹는 구상을 세운 듯, 대원개를 떠받칠 4개의 큰 지주와 그것들을 잇는 4쌍의 아치를 완성하였다. 브라만테가 죽은 뒤 라파엘로가 여기에 긴 회당부()를 추가한 라틴 십자식 플랜을 계획하였으나 그도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뜨고 공사는 발다사레 페루치(Baldassare Peruzzi)의 손을 거쳐 안토니오 다 상갈로(Antonio daSangallo)에게로 넘어갔다. 상갈로 역시 궁륭(窿)의 일부를 착수하였다가 1546년에 세상을 떴으나, 그동안 역대의 건축담당자들이 이 조영()사업에 기울인 정열은 건물의 계획을 놀랍도록 변경시켰다.
1546년 교황 바오로 3세는 마침내 71세의 미켈란젤로에게 공사의 전권을 맡겼다. 그는 그리스 십자식 플랜을 채용함으로써 브라만테의 안()으로 돌아가는 듯하였으나, 브라만테의 그것과는 달리 네 구석의 작은 원개를 없애고 건물 전체의 긴밀한 조형성과 다이내믹한 공간을 대원개를 중심으로 유기적으로 통일한다는 탁월한 구상을 생각해내었다. 일체의 보수를 사양하고 오직 신에 대한 사랑과 사도 베드로에 대한 존경에서 이 조영사업에 몸바친 그는 1564년 그의 생애를 마칠 때까지 대원개의 기부()에 해당하는 탕부르의 공사에 심혈을 기울였다.
직경 42.4m, 바닥에서 탑 십자가까지의 높이가 약 133m에 달하는 이 원개 공사는 그가 남긴 목제()의 모형과 함께 1588년 자코모 델라 포르타(Giacomo della Porta)에게 인계되었고, 다시 도메니코 폰타나(Domenico Fontana)의 손으로 넘어가 1590년 마침내 완성되었다. 건물 전체의 역동감을 그 아름답고 힘찬 곡선에 모았다가 허공에 해방시키는 듯한 이 훌륭한 원개는 그러나, 17세기 초기 신랑()의 전면() 연장과 정면 가득히 펼친 칸막이와 같은 파치아타(서쪽 정면)의 증축으로 인해 그 효과가 크게 손상되었다.
헌당식()은 1622년에 거행되었고, 마침내 명장 잔 로렌초 베르니니(Gian LorenzoBernini)가 나타나, 1655년에서 1667년에 걸쳐 원주회랑으로 에워싸인 훌륭한 정면 광장을 완성시켰다. 투시효과를 교묘히 이용한 이 훌륭한 광장은 가톨릭의 총본산에 어울리는 규모와 성격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카를로 마데르나(Carlo Maderna)에 의해 정면구성으로 손상된 대성당의 모습을 살리는 역할을 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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