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25일 월요일

서희, 徐熙.


993년(성종 12), 거란이 고려를 침입했다. 봉산군을 함락시킨 거란 장수 소손녕은 공문을 보내 알렸다. “80만의 군사가 도착했다. 만일 강변까지 나와서 항복하지 않으면 섬멸할 것이니, 국왕과 신하들은 빨리 우리 군영 앞에 와서 항복하라.” 건국 75년 만에 고려에게 국운을 위협하는 심각한 국가적 재난이 찾아온 것이다.

916년 나라를 세운 뒤 938년 ‘요()’로 이름을 바꾼 거란은 당시 최전성기를 맞고 있었다. 중원 전체를 장악할 야망을 가지고 있었던 거란은 960년 건국된 송을 압박하며 고려를 위협했다. 송과 거란의 대치상태에서 고려는 송과 국교를 맺고 거란을 멀리했다. 발해에 대해 적극적인 포용정책을 펴던 고려의 왕건은 발해를 멸망시키고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한 거란의 친선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왕건은 거란이 보내온 사신 30명을 섬에 유배 보내고 함께 보낸 낙타 50필을 굶어 죽게 하는 등 반거란 정책을 분명히 했다.
왕건이 거란의 낙타를 굶겨 죽이던 942년, 서희(942~998)는 태어났다. 아버지는 광종 대의 대쪽 재상 서필이었다. 집안도 좋았지만, 열아홉 살 되던 해 과거에 급제했고 과거 급제 후 차례를 뛰어 넘어 승진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학문적으로도 매우 뛰어난 인재였다. 송이 건국되던 해, 서희는 과거에 급제했고, 12년 뒤 내의성 시랑의 벼슬로 송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된다.
962년, 965년 두 차례의 사신 교환이 있었지만, 한 동안 사신 왕래가 두절되었던 터라 쉽지 않은 길이었다. 처음에 송 태조는 이들을 반가이 맞아주지 않았다. 그 동안 고려가 아무런 외교적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는 불만 때문이었다. 서희는 여진과 거란이 육로를 막고 있어 그간 외교 사절을 보내지 못했음을 설명했다. 서희의 예의바른 태도와 뛰어난 언변에 송 태조는 고려와 정식으로 외교 관계를 맺고, 조칙을 내려 광종에게 식읍을 더해주었으며, 서희에게는 검교병부상서라는 벼슬을 내렸다. 명예직이기는 하나 지금의 국방부 장관에 해당하는 관직이다. 젊은 시절부터 서희의 외교적 역량이 탁월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경험을 통해 서희는 송과 거란이 대치하고 있는 동아시아 국제정세에 대한 안목을 키울 수 있었다.

거란이 침입했다는 소식을 접한 고려의 성종은 박양유를 상군사, 서희를 중군사, 최량을 하군사로 임명해 막게 했다. 이들은 북계(현재의 평안북도 지방)에 군사를 주둔하고 적을 방어할 준비를 서둘렀다. 성종도 친히 군사를 지휘하기 위해 서경으로 갔다. 이 무렵 소손녕이 다시 공문을 보내왔다. “우리나라는 천하를 통일하고 있다. 아직 우리에게 귀순치 않는 나라는 기어코 소탕할 것이니 속히 투항하라. 잠시라도 머뭇거리지 말라.”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압록강 하류 지역의 빈해여진과 그 중류지역에 있던 정안국을 멸망시켜버린 요였다. 송도 거란이 차지한 화북의 연운 16주를 되찾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가 대패했듯이, 거란은 당시 동아시아 최강자였다. 그러나 소손녕의 공문을 읽은 서희는 성종에게 “그들과 화의할 수 있는 조짐이 보인다”고 말했다. 고려를 멸망시킬 목적으로 군사를 동원했다면, 일단 치고 내려올 것인데 항복하라고 공문을 보내고 기다린다는 데서 뭔가 감지했던 것일까. 송과 대치중인 상태라 고려와의 전면전이 부담스러울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을까.
성종은 이몽전을 보내 화의를 청했다. 제1차 협상이다. 이몽전이 침공의 이유를 묻자 소손녕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 나라가 백성을 돌보지 않으므로 이제 천벌을 주러 온 것이다. 만일 화의를 구하려거든 빨리 와서 항복하라.” 다시 한번 항복하라는 뜻을 전했을 뿐 성과 없는 회담이었다. 이몽전이 돌아오자 고려의 조정은 두 가지 의견으로 나뉘었다. 거란의 요구대로 항복을 하자는 투항론과 서경 이북의 땅을 거란에게 주고 화의를 청하자는 할지론()이었다. 무조건 항복하는 것보다는 땅을 나누어주는 것으로 성종의 마음이 기울었다. 서경의 창고를 열어 비축해두었던 쌀을 백성들에게 마음대로 가져가라고 했다. 그러고도 많은 쌀이 남자 적들의 군용으로 사용될 것을 염려하여 대동강에 버리라고 명령했다. 이때 서희가 나섰다. “지금 거란의 병세만을 보고 경솔하게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주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삼각산 이북 또한 모두 고구려의 옛 강토인데, 그들이 한없는 욕심으로 끝없이 강요한다면 다 내어주어야 하겠습니까? 국토를 떼어 적에게 준다는 것은 만세의 치욕입니다. 바라건대 저희들로 하여금 적과 일전을 겨루게 한 뒤 그때 가서 다시 화친을 논의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전 민관(, 호조의 수장) 이지백도 이 말에 찬성했다.
고려의 조정이 이런 논의들로 바빠 회답이 늦어지자 소손녕은 다시 남하해 청천강 이남의 안융진을 공격했다. 그런데 이때 대도수()와 유방()이 거란군을 물리쳐 이겼다. 유목민족인 거란의 부대는 고려의 산악지대에서 벌어지는 전투에 어려움을 느꼈던 듯하다. 소손녕은 더이상 진공하지 않고, 다시 항복을 독촉하기만 했다. 고려는 부랴부랴 합문사인 장영()을 사신으로 보냈으나 소손녕은 그보다 직급이 높은 대신을 보내라며 허세를 부렸다. 제2차 회담은 제대로 시도도 못해보고 실패한 꼴이었다. 성종이 중신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누가 거란 영문으로 가서 언변으로써 적병을 물리치고 만대의 공을 세우겠는가?”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장영이 살아서 돌아오긴 했지만, 대신을 불러 죽이려는 함정일지도 모르는 자리였다. 이때 서희가 자원했다. “제가 비록 불민하나 어찌 감히 왕명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성종은 개성 북쪽 예성강가까지 나아가 서희의 손을 잡고 위로하며 전송했다.

그렇게 제3차 회담이 시작되었다. 서희는 국서를 가지고 소손녕의 영문으로 갔다. 기를 꺾어 놓을 심산이었던 듯 소손녕은 “나는 대국의 귀인이니 그대가 나에게 뜰에서 절을 해야 한다”고 우겼다. 거란의 군사가 가득한 적진에서 서희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신하가 임금에게 대할 때는 절하는 것이 예법이나, 양국의 대신들이 대면하는 자리에서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소손녕이 계속 고집을 부리자 서희는 노한 기색을 보이며 숙소로 들어와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의 생명은 물론 나라의 운명이 달린 자리였으나 서희는 한 나라의 대신으로서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다. 거란이 전면전보다 화의를 원하고 있다는 판단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행동이었다. 결국 소손녕이 서로 대등하게 만나는 예식 절차를 수락하면서 첫 번째 기싸움은 서희의 승리로 돌아갔다.
서희와 소손녕은 마주서서 서로 읍한 후 당상으로 올라와 서쪽과 동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본격적인 담판이 시작되었다. 먼저 소손녕이 물었다. “당신네 나라는 옛 신라 땅에서 건국하였다. 고구려의 옛 땅은 우리나라에 소속되었는데, 어째서 당신들이 침범하였는가?” 광종이 여진의 땅을 빼앗아 성을 쌓은 일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소손녕이 제기한 이 물음은 이번 정벌의 명분에 대한 얘기로 ‘누가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매우 중요한 논점이다. 서희는 조목조목 반박했다.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는 바로 고구려의 후예이다. 그러므로 나라 이름을 고려라 부르고, 평양을 국도로 정한 것 아닌가. 오히려 귀국의 동경이 우리 영토 안에 들어와야 하는데 어찌 거꾸로 침범했다고 하는가?” 한치의 틈도 없는 서희의 논리에 소손녕의 말문이 막히면서 고구려 후계론 논쟁은 일단락 지어졌다.
소손녕이 정벌의 본래 목적을 얘기했다. “우리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면서 바다 건너에 있는 송나라를 섬기고 있는 까닭에 이번에 정벌하게 된 것이다. 만일 땅을 떼어 바치고 국교를 회복한다면 무사하리라.” ‘국교의 회복,’ 그러니까 송나라를 섬기지 말고 거란을 섬기라는 의미이다. 송과 손을 잡고 있는 고려를 자신들의 편으로 돌아 앉혀 혹시 있을 송과의 전면전에서 배후를 안정시키는 것, 그것이 거란의 본래 목적이었다.
“압록강 안팎도 우리 땅인데, 지금 여진이 그 중간을 점거하고 있어 육로로 가는 것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왕래하기가 더 곤란하다. 그러니 국교가 통하지 못하는 것은 여진 탓이다. 만일 여진을 내쫓고 우리의 옛 땅을 회복하여 거기에 성과 보를 쌓고 길을 통하게 한다면 어찌 국교가 통하지 않겠는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알았지만, 바로 그 답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 서희의 탁월함이다. 서희는 국교를 맺기 위해서는 여진을 내쫓고 그 땅을 고려가 차지해야 가능하다며 조건을 내걸었다. 소손녕이 회담의 내용을 거란의 임금에게 보내자 고려가 이미 화의를 요청했으니 그만 철군하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리고 고려가 압록강 동쪽 280여 리의 영토를 개척하는 데 동의한다는 답서도 보내왔다.
비록 그들의 요구대로 국교를 맺어 이후 일시적으로 사대의 예를 갖추지만, 싸우지 않고 거란의 대군을 돌려보내고, 오히려 이를 전화위복 삼아 영토까지 얻었으니 우리 역사상 가장 실리적으로 성공한 외교라 칭찬받을 만하다. 송과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는 거란의 국제 정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또한 안융진전투 이후 산악지대에서의 전투에 자신감을 잃은 거란군의 상황을 읽어낸 통찰력, 논리 정연한 언변, 예의 바르면서도 당당한 태도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듬해부터 서희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여진족을 몰아낸 뒤 흥화진(의주), 용주(용천), 통주(선천), 철주(철산), 귀주(귀성), 곽주(곽산) 등의 강동 6주에 성을 쌓아 이 지역을 고려의 영토에 편입시켰다. 이로써 고구려 멸망 이후 처음으로 국경이 압록강에 이르렀다.
소손녕과의 담판 이후 서희는 평장사를 거쳐 종1품 태보내사령에 임명되었으나 996년(성종 15) 병을 얻어 개국사에서 오랫동안 치료와 요양을 했다. 이때 성종이 직접 문병을 와 어의 한 벌과, 말 세 필을 사원에 나누어주고 개국사에는 곡식 1천 석을 내렸다. 개국사에서 요양하던 서희는 998년(목종 원년)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