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 (李珥, 1536~1584)
조선 중기의 유학자이자 정치가로 <동호문답>, <성학집요> 등의 저술을 남겼다. 현실ㆍ원리의 조화와 실공(實功)ㆍ실효(實效)를 강조하는 철학사상을 제시했으며, <동호문답>ㆍ<만언봉사>ㆍ<시무육조> 등을 통해 조선 사회의 제도 개혁을 주장했다. 우리나라의 18대 명현(名賢) 가운데 한 명으로 문묘(文廟)에 배향되어 있다.
1548년(명종 3) 진사시에 13세의 나이로 합격했으며, 조광조의 문인인 휴암(休菴) 백인걸(白仁傑)에게 학문을 배웠다. 1554년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으로 들어가 불교를 공부했으나, 이듬해 하산하여 외가인 강릉으로 돌아와 자경문(自警文)을 짓고 다시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자경문은 입지(立志)·과언(寡言) 등 11개의 조항으로 되어 있는데,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세운 것이다.
22세(1557년)에 성주목사(星州牧使)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였고, 이듬해 예안(禮安)에 낙향해 있던 이황(李滉)을 찾아가 성리학에 관한 논변을 나누었다. 1558년(명종 13) 별시(別試)에서 천문·기상의 순행과 이변 등에 대해 논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으로 급제했으며, 1564년(명종 19년)에 실시된 대과(大科)에서 문과(文科)의 초시(初試)·복시(覆試)·전시(殿試)에 모두 장원으로 합격하여 삼장장원(三場壯元)으로 불렸다. 생원시(生員試)·진사시(進士試)를 포함해 응시한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으로 합격하여 사람들에게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대과에 급제한 1564년에 정6품 호조(戶曹) 좌랑(佐郞)으로 관직에 나선 뒤에 예조(禮曹)와 이조(吏曹)의 좌랑을 거쳐 왕에 대한 간쟁과 논박을 담당하던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과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등의 대간(臺諫)의 직위에 있었다. 1568년(선조 1)에는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 나라에 다녀왔으며, 1569년 홍문관(弘文館) 부교리(副校理)로서 역사의 기록과 편찬을 담당하던 춘추관(春秋館) 기사관(記事官)을 겸하여 <명종실록(明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또한 정철(鄭澈)과 함께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사회개혁안에 대해 논한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써서 선조에게 바쳤다.
1570년(선조 3년)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학문에 전념했다. 1571년 청주목사로 다시 관직에 올랐으나 이듬해 관직에서 물러나 해주로 낙향했다가 파주 율곡촌(栗谷村)으로 거처를 옮겼다. 1573년(선조 6)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아 승정원(承政院)의 동부승지(同副承旨)·우부승지(右副承旨)를 역임했으며, 1574년(선조 7) 당시의 사회문제들에 대한 구체적인 대책을 논한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써서 선조에게 바쳤다. 그해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으로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낙향하였다. 하지만 다시 황해도 관찰사가 되어 관직에 올랐고, 그 뒤 대사헌(大司憲), 홍문관 부제학(副提學) 등을 역임했다.
율곡이이의 영정,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던 1575년(선조 8) 선조에게 제왕학(帝王學)의 지침서인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저술하여 제출하였고, 1577년(선조 10)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해주로 낙향하여 어린이 교육을 위해 <격몽요결(擊蒙要訣)>을 편찬했으며, 1580년에는 <기자실기(箕子實記)>를 저술했다. 이 무렵 해주 석담(石潭)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건립하여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향약과 사창(社倉)을 실시하기도 했다.
1581년 대사헌과 예문관(藝文館) 제학(提學)을 겸임하며 다시 관직에 올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거쳐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大提學)을 지냈다. 1582년에 이조판서, 1583년에 병조판서가 되어 선조에게 <시무육조(時務六條)>를 바치며 십만양병설 등의 개혁안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쟁을 조장한다는 동인(東人)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이후 다시 이조판서와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 등으로 임명되었다. 1584년 음력 1월 16일에 49세의 나이로 서울 대사동(大寺洞)에서 죽었다. 죽은 뒤에는 파주 자운산의 선영에 묻혔으며, 1624년(인조 2)에 문성공(文成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풍덕의 구암서원(龜巖書院), 황주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등 전국 20여 개 서원에 배향되었으며, 1682년(숙종 8)에는 성혼(成渾)과 함께 공자(孔子)를 섬기는 문묘(文廟)에 우리나라의 명현(名賢)으로 배향되었다.
저술로는 <성학집요(聖學輯要)>, <동호문답(東湖問答)>, <경연일기(經筵日記)>, <천도책(天道策)>, <역수책(易數策)>, <문식책(文式策)>, <격몽요결(擊蒙要訣)>, <만언봉사(萬言封事)>, <학교모범(學校模範)>, <육조계(六條啓)>, <시폐칠조책(時弊七條策)>, <답성호원서(答成浩原書)> 등이 있으며,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 등의 문학 작품도 전해진다. 그의 저술들은 1611년(광해군 3) 박여룡(朴汝龍)과 성혼(成渾) 등이 간행한 <율곡문집(栗谷文集)>과 1742년(영조 18)에 이재(李縡)와 이진오(李鎭五) 등이 편찬한 <율곡전서(栗谷全書)>에 실려 전해진다.
이이 연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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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536~ 사망 1584 | |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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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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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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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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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마하연에서 불교를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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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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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시에서 천도책을 지어 장원으로 급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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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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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6품 호조 좌랑으로 관식에 나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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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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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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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직에서 물러나 황해도 해주로 가 학문에 전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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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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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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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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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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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대사동에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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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는 1536년(중종 31) 강릉 외가에서 태어났다. 오늘날 강릉의 명소로 꼽히는 오죽헌의 몽룡실이 바로 그곳이라 한다. 오죽헌은 모친인 신사임당이 거주하던 집이었다. 신사임당은 이이의 부친인 이원수와 혼인하고서도 37살 되던 해 집안 살림을 맡아 하기 전까지는 서울의 시가보다는 친정에서 주로 살았다. 이런 풍습은 16세기까지 우리나라의 보편적 결혼 풍속과 관련된 것으로 당시까지는 남자가 여자 집에 가서 혼인하여 자식을 낳고 이내 계속 생활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를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이라고도 한다.
이이가 6살 때까지 강릉 오죽헌에서 생활하게 된 것은 이런 까닭이었다.강릉에서 외조모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생활하던 이이는 6살 때 서울 본가로 왔다. 본래 이이 집안은 파주에 선산과 함께 화석정(花石亭) 등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조부가 벼슬을 하지 못했고 부친 또한 낮은 관직을 전전긍긍한 이유로 넉넉한 가정형편은 아니었다. 물론 집안이 구차하였다고 하여 이이의 가문이 한미했던 것은 아니었다.
개성 밑 덕수를 본관으로 하는 이이 가문은 16세기에 크게 일어나서,훈척적 성향을 보이던 이이의 가문은 그러나 서서히 사림계열로 전환하였다. 이이 스스로 지적하듯이 “마음 속으로는 요순시대를 그리워하고 몸으로는 유학의 실행에 힘쓰며 항상 바른 말”을 하는 사림이 되었다. 그런 이이에게도 정신적 방황기가 있었다. 모친을 여읜 후 한 때 불교에 깊이 빠져 입산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정신적 갈등과 방황은 이이에게 인간적인 성숙과 함께 단지 경전을 들추거나 시 구절을 짓는 데에 머물게 하지 않고 장차 국가를 경영할 통유(通儒)로서의 자기 수련과 경륜을 쌓게 하는 토대가 되었다.
이이 증조부의 6형제 중 이의무의 아들 이행과 이기가 각기 중종 명종 때 좌의정과 영의정을 지냈으며 그 아들들이 청요직에 진출한 것이다. 물론 이들은 이 시기에 새로이 대두하던 사림들과는 정치성향을 달리하여서 이행의 경우 언로를 막는다 하여 조광조로부터 탄핵을 받았고, 특히 이기는 명종 초외척 윤원형과 결탁하여 을사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그들은 흔히 말하는 훈척계였다.
예안의 도산으로 퇴계 이황을 찾아가 도학적 분위기에 고무되고 평생의 지기 우계 성혼과 함께 성리설의 탐구에 마음껏 몰두한 것이 바로 이때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관직에 나가서 그가 펼쳤던 경세론이 이 기간에 형성될 수 있었다.
이이는 원로인 백인걸을 존경하여 자주 찾아보고 성리설 등의 학문을 논하였다. 백인걸은 정암 조광조의 으뜸가는 문인으로서 스승의 추숭과 그 주장의 계승, 실현에 앞장선 인물이었다. 따라서 이이는 이런 백인걸을 통해 소문으로만 듣던 정암의 인물 됨을 알게 되고 그 도학정치론의 핵심에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이는 선조 초반부터 자신의 경장론을 담은 [동호문답]이나 [만언봉사] 등의 시무 관련 상 소를 계속 올려 임금의 자질과 당대 정치의 폐단을 극론하고 경장을 위한 대책 을 제시하였다.
1575년(선조 8)에는 유교적 이상을 담은 제왕의 정치 교 과서인 [성학집요]를 편찬해서 임금에게 올렸다.관직 생활은 약 20여 년간 이 었다. 이 기간 동안 이이는 당시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모순과 폐단의 변통을 주장 하 였다. 이러한 주장은 이이가 자신이 살던 시대를 조선이 건국된 지 200여 년이 되었으므로 중간 쇠퇴기로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였다.
이이는 아무리 좋고 튼튼 하게 지은 건물이라도 세월이 흐르다 보면 상한 곳이 생기고 집이 기울게 마련 이듯이 나라도 시대가 달라지면 처음에 만든 제도의 결함이 하나 둘 나타 나기 시작하여 마침내 국가 전체가 무너질 위기를 맞는다고 하였다.
오래 된 집을 유지하려면 유능한 기술자를 시켜 기둥을 갈고 수리해야 하듯 같은 이 유로 국가도 달라진 시대에 맞게끔 제도를 고쳐야 하며 바로 이것 이 경장(更張)이라는 것이었다.
더욱 이이 생존 당시 조선은 국가와 백성이 마치 큰 병을 앓고 있는 사람과 같이 원기가 모두 쇠진하고 겨우 숨만 붙어 있는 정도 라며 이러한 때 외국으로부터 침략을 당하거나 혹시 백성 가운데 반란이라도 일어난다면 나라는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만다는 것이다경장은 바로 이런 환자 에게 원기를 북돋우게 하는 영약이었다.
경장에 소극적이고 옛 제도 의 묵수를 바라는 쪽인 대신들의 의견을 외면하지 못하는 임금 선조를 자기 쪽으로 돌리게 하는 회천(回天)을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었다. 이이의 경장론이 당시 에 적용 되기는 쉽지 않았다.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느니 차라리 경장이라도 하자”며 분발하여 경 장에 매진할 것을 역설하였다.서인측 심의겸은 외척이면서도 이전에 사 림을 보호한 공이 있고, 동인측 김효원은 명류(名流)을 끌어들여 조정을 청명하게 한 공이 있어 양시(兩是)라는 것이다.
심의겸은 외척 으 로서의 행동을 조심하지 못하고 정치에 관여하는 잘못을 저질렀고. 김효 원은 유생신분으로서 한때 권간(權奸, 윤원형을 지칭함)의 집에 출입 하 였던 허물이 있으니 이를 양비(兩非)라고 하였다.
이이가 양시 양비 론으로 분쟁이 종식되리라 생각 하지는 않았다. 단, 소모적인 정쟁으로 인해 국가적 현안 문제가 논의 조차 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타개책이었던 것이었다.당시와 같이 사림이 동인과 서인이 분열된 상황에서 경장은 더 욱 바랄 수 없는 상황 이었다.
이이는 당쟁을 종식시키는 것이 급선 무라고 판단, 이를 위한 방안 으로 동인과 서인의 명목을 타파하고, 이를 바탕으로 조제보합(調劑保合)하자고 호소하였다. 분열된 사림의 결속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한 현실은 이이가 기대한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 여서, 오히려 동인과 서인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이는 동·서 갈등의 당사자인심의겸과김효원에 대해서 양시양비론(兩是兩非論)을 제 기 하여 이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경장론이 이같이 점진적이지만, 그것 조차도 그의 생전에 실현되지 못하였다. 오히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진 가가 제대로 발휘되었다. 당면한 국난 극복을 위해서는 어떠한 형태 로든 대책 마련이 요구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이의 경장론과 다양한 변통 책은 비로소 진지한 검토의 대상이 되어 당국자들의 손을 거쳐 국가 재건 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어려서는 신동으로, 성장한 뒤에는 9번의 과거에 장원급제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이이는 당시 사회를 큰 병을 앓고 있는 사회로 진단하며 여러 부면에서 경장론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경장을 위해서는 국론 통일이 필요하다고 하며 조제보합론을 주장하였다. 한국 역사상 위대한 많은 인물들이 있지만 그 가운데 이이만큼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도 많지 않다. 대개 어릴 때부터 접하는 각종의 한국 위인전에서 시작해 긴 시간의 학창 생활을 보내면서 교과서와 각종 매체를 통해 그 인물과 활동, 그리고 사상 등에 관해 듣고 배우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조정에 만연되어 있는 무사안 일주의의 인습 으로 관리들은 보신에 급급하여 혹시나 남의 비난을 받을까 눈치나 보고, 혹은 변통하자는 말이라도 나오면 임금의 뜻을 돌리기가 어렵다는 구실을 내세워 운명 탓으로 돌릴 뿐 어떻게 해보려는 마음조차 먹지 않기 때문 이었다. 여기에 더해 그동안 악습에 편승해 사리사욕을 채워왔던 소 인배 들이 경장을 하게 되면 그 이익을 잃게 되므로 한사코 방해하려 하기 때문이 라는 것이다.
참조항목
출처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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