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16일 토요일

북아일랜드,Northern Ireland.

북아일랜드,Northern Ireland.

영국 아일랜드 섬 북동쪽 지방. 중심 도시는 벨파스트. 넓이 1만 4160km2. 인구 157만 8000명. 아일랜드 섬에 가톨릭이 많은데 비해 이곳은 그레이트브리튼 섬에서 이주해온 프로테스탄트가 많아 아일랜드 독립 후에도 영국에 소속됨.주 도()는 벨파스트이다. 앤트림·아마·런던데리·다운·퍼매너·티론의 6개주()로 이루어져 있다. 일찍이 아일랜드섬의 4대 지역의 하나인 얼스터(Ulster)로 일컬어진 지방으로 9개주가 있었으나, 3개주는 아일랜드 공화국에 속하게 되었고, 나머지 6개주는 분리, 1920년 북아일랜드라고 부르게 되었다. 북쪽은 대서양에 면하고, 북동부는 영국해의 노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스코틀랜드와 마주보고 있다. 지형적으로는 북동부에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앤트림 고원이 있고 일반적으로 저지이며, 영국 최대의 호수 네이호()에서 발원한 밴강이 북류하고 있다. 편서풍과 난류의 영향으로 기후가 온난하여, 겨울에도 4℃ 이하로는 내려가지 않으며, 강수량은 연간 1,500mm 정도이다. 북부의 3개주는 스코틀랜드계 주민이 많고 남부의 3개주는 약 절반을 켈트계 주민이 차지하여, 아일랜드와의 분쟁지역이다. 언어는 영어 외에 일부 켈트계의 게일어를 사용하고, 종교는 주민의 약 2/3가 프로테스탄트이다.북 아일랜드 는 아일랜드 공화국과 함께 남쪽과 서쪽으로 국경 을 공유 한다 2011 , 인구는 1,810,863했다, 섬 전체 인구의 약 30 %, 영국 인구의 약 3 %를 차지한다 . 에 의해 설립 된 북 아일랜드 법 1998 의 일부로서 성 금요일 협정 은 북 아일랜드 의회는 다른 지역이 예약하는 동안, 약해진다 정책 문제의 범위에 대한 책임을 보유하고 영국 정부북 아일랜드는 일부 지역에서 아일랜드 공화국과 협력하고 있으며이 협정은 공화국에게 "양국 정부 간의 의견 불일치를 해결하기위한 확고한 노력"으로 "전망과 제안"을 할 수있는 능력을 부여했다. 북 아일랜드는 1921 년 아일랜드 정부 (Ireland Act 1920)에 의해 북 아일랜드와 남 아일랜드 사이 에 분할 된 1921 년에 설립되었습니다 1922 년에 아일랜드 자유 국가 가 될 남부 아일랜드 와 달리 북 아일랜드 인구의 대다수는 영국에 남아 있기를 원하는 조합원들이었습니다 . 이들 대부분은 영국 출신의 개신교 자손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소수,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 였다 민족 수배 연합 아일랜드영국 통치와 무관하다. 고유 북 아일랜드어 또는 동시에 오늘날, 전자는 일반적으로, 영국 아일랜드로 스스로를 일반적으로 후자로 스스로를 얼 스터 신원의 큰 소수가 모두 주장 천주교 및 개신교 및 비 정렬 된 많은 사람들,북 아일랜드의 첫 번째 장관 인 데이비드 트리 울블 ( David Trimble) 이 가톨릭 신자에게 "차가운 집 (cold house)"이라고 불렀던 20 세기의 대부분에 대해 북 아일랜드는 양측 간의 차별과 적개심으로 표시되었습니다 1960 년대 후반, 국가 세력과 주로 프로테스탄트 노조 주의자들과 주로 카톨릭 민족 주의자들 사이의 충돌 이 3,500 년의 생명을 앗아 갔으며 5 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초래 한 Troubles 로 알려진 30 년간의 폭력 사태에 분출했다1998 년 성 금요일 협정은 무기 폐지를 포함하여 평화 과정 의 주요 단계 였지만 종파주의종교적 분리는 여전히 주요 사회 문제로 남아 있으며, 산발적 인 폭력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북 아일랜드는 역사적으로 산업화 된 아일랜드 지역이었습니다. Troubles의 정치적 및 사회적 혼란의 결과로 쇠퇴 한 후에, 경제 는 1990 년대 후반부터 상당히 성장했다. 초기 성장은 " 평화 배당 "과 아일랜드 공화국과의 무역을 늘린 링크에서 비롯되었으며 전세계의 관광, 투자 및 비즈니스가 크게 늘어났습니다. 북 아일랜드의 실업률은 6-8 월 2014 년 6.1 %로 하락, 1986 년 17.2 %를 정점으로 , 한 해 동안 1.2 % 포인트와 아래로  6.2 %의 영국 그림과 유사한합니다. 실업자의 58.2 %는 1 년 이상 실업 상태였다.북 아일랜드 출신의 유명한 예술가들과 운동가 들로는 Van Morrison , Rory McIlroy , Joey Dunlop , Wayne McCullough , George Best가 있습니다. 북 아일랜드 출신의 일부 사람들은 아일랜드 인 (예 : 시인 시머스 헤네이 (Seamus Heaney) 와 배우 리암 니슨 (Liam Neeson ))을 선호하는 반면 영국인 (예 : 배우 케네스 브래너 )을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북 아일랜드, 아일랜드의 나머지 부분과 영국의 나머지 부분 사이의 문화 링크는 북 아일랜드가 모두 공유와, 복잡 아일랜드의 문화 와 영국의 문화를많은 스포츠에서 아일랜드 섬은 단일 팀을두고 있으며, 주목할만한 예외는 축구 협회입니다. 북 아일랜드 는 커먼 웰스 게임 에서 별도로 경쟁하며 , 북 아일랜드 사람들 은 올림픽 경기 에서 영국 또는 아일랜드 와 경쟁 할 수 있습니다 .주도(主都)는 벨파스트. 이 지역은 일찍이 켈트족이 살고 있었으나, 12세기 이후 영국의 귀족 및 영주들에 의해 정복되었다. 1801년 영국에 합병되었으나 자치권을 요구하는 민족운동이 계속되자 영국은 1차대전 후 영국계 신교도가 많은 얼스터 지방 (현재의 북아일랜드)을 분리하고 아일랜드를 자치령으로 하는 타협안을 승인, 1922년 아일랜드 자유국이 수립됐다. 아일랜드는 1948년 헌법개정에 이어 다음해에 영연방에서 이탈, 완전 독립을 이뤘다. 북아일랜드는 영국의 일부로 남아 신교와 구교가 대립하는 북아일랜드 분쟁의 불씨를 남겼다. 영국령으로 남은 북아일랜드가 소수 가톨릭계 주민에게 취업차별·불평등선거 등으로 심한 차별정책을 취하여 신·구교파간에 분쟁이 일어났다. 1969년 7월에는 런던데리에서 신·구교파 양측간에 일대 충돌이 발생한 것을 계기로 양측의 항쟁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10월까지 계속되었다. 북아일랜드의 분쟁은 남·북 아일랜드의 통일을 주장하는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의 활동으로 격화되어 계속되었다. [북아일랜드의 위치]북아일랜드는 아일랜드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고 섬 전체의 16%에 해당하는 크기다. 북아일랜드는 현재 영연방의 한 지역에 속한다. 2004년 기준 인구는 약 170만 명이다.
[역사적 배경]아일랜드(에이레)는 70.273km2의 면적에 489만 명(2015년 기준)의 인구가 거주하는 섬으로, 아일랜드 고유어인 게일어와 영어가 공용어로 쓰인다. 주민의 88%가 가톨릭 교도로, 이와 같은 종교적 배경은 아일랜드 분쟁의 핵심요소로 작용해왔다.
현재 아일랜드인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민족은 기원전 5세기경 이주한 켈트계로, 기원전 58년 시작된 카이사르의 침공을 통해 로마인의 압박을 받은 이후로 9세기 노르만족, 12세기 앵글로-색슨족의 침입을 꾸준히 받아왔다. 대륙의 켈트인들은 로마 압제에 굴복하여 상당히 동화되었으나, 섬에 있던 탓에 아일랜드의 켈트인들은 고유의 켈트문화를 간직할 수 있었다.
그 후 1171년 영국의 헨리 2세가 아일랜드를 침공하면서 13세기 중반까지 아일랜드의 3/4가 영국령에 놓였으며, 16세기 초 헨리 8세 시기에 영국 내에서 종교개혁이 단행되면서 아일랜드에 대한 영국의 지배는 매우 강화되었다. 아일랜드의 구교도들은 영국의 압제에 반란을 일으켰으며, 영국은 아일랜드 북부(얼스터 지방)에 개신교도들을 대거 이주시킴으로써 아일랜드 구교도들을 지배하고자 했다. 이때부터 북아일랜드 신교도 주민과 나머지 아일랜드 구교도들 간에는 갈등의 불씨가 생기기 시작했으며, 이 문제는 여전히 아일랜드 분쟁의 핵심으로 작용하고 있다.

17세기 중반 영국 내 청교도(신교) 혁명이 일어나면서 아일랜드 내에서도 영국의 지배에 반대하는 소요가 발생했으나, 영국 크롬웰 군대가 이를 제압, 1653년까지 아일랜드 전체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아일랜드의 토지 소유가 영국인에게 돌아감은 물론 가톨릭 교도들의 선거권·피선거권 박탈, 공직진출 배제, 재산소유 제한 등 영국의 아일랜드 탄압은 상당히 극심해졌다. 그리고 1801년 아일랜드는 결국 영국에 합병되어 1921년까지 영국령으로 유지되었다.19세기 영국의 탄압적 통치에 대한 아일랜드의 저항으로 가톨릭 교도들에 대한 제약의 일부는 완화되었지만, 아일랜드 내 독립운동은 지속적으로 발생하였고, 19세기 중반 아일랜드에 대기근이 발생하면서 이러한 반영() 민족운동은 더욱 확산되었다. 반영운동의 핵심은 아일랜드국민당(Irish Nationalist PartyINP)과 신 페인(Sinn FeinOurselves Only)당, 아일랜드공화국군(Ireland Republic ArmyIRA)으로서 특히 IRA와 영국의 분쟁은 최근까지도 심각한 문제가 되어왔다.1919년 신 페인당은 아일랜드 수도인 더블린에서 제1회 아일랜드 국민의회를 개최하여 독립을 선언했는데, 영국이 독립은 인정하지 않자 이는 전쟁으로 비화하였다. 아일랜드 무장투쟁조직 IRA와 영국군은 치열하게 전투를 치렀으며, 드디어 1922년 아일랜드 국민의회와 영국은 조약을 맺게 되었다. 이 ‘영국-아일랜드 조약’으로 북부 얼스터 지방 6주는 영연방령으로 하되, 나머지 26개 주는 영국 자치령으로 하는 아일랜드 자유국이 성립하였으나, 조약의 내용을 두고 아일랜드 내부에는 완전한 독립파 vs. 현실 타협파 간의 충돌이 빚어졌다. 찬성파와 반대파 간의 분열로 신 페인당과 IRA의 조직은 분할되었으며, 심지어 IRA는 잠시 와해되기도 하였다. 1937년 아일랜드 자유국 정부는 헌법제정을 통해 ‘에이레’라는 국명으로 독립을 선포했고, 이어 1949년에는 국가이름을 ‘아일랜드’로 개칭, 영연방을 탈퇴함으로써 현재의 아일랜드공화국이 되었다.그러나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했음에도 아일랜드 내에는 영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신교도 지역 북아일랜드와 나머지 구교도들의 아일랜드의 마찰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들의 대립은 영국 vs. 아일랜드이자 신교도 vs. 구교도, 연방주의자 vs. 민족주의자의 갈등이기도 했는데, 특히 오랫동안 신교측 연방주의자들에 의한 구교측 민족주의자 차별·억압이 갈등의 결정적인 원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북아일랜드의 얼스터 연방주의 정당(Ulster Unionist PartyUUP)은 유일한 집권당으로서 총리 배출을 독점했으며, 그 외에도 정부구성은 늘 신교 연방주의자들이 차지해왔던 것이다.이에 1967년에는 북아일랜드 인권운동단체 북아일랜드시민권리연합체(Northen IrelandCivil Rights AssociationNICRA)가 결성되었고, 1968년에는 학생단체(People's DemocracyPD)가 결성되어 북아일랜드 내 가톨릭 교도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운동이 시작되었다. 인권운동 초기 북아일랜드 테렌스 오닐(Terence O'Neill) 총리는 북아일랜드의 개혁을 약속했으나, 강경한 신교도 연방주의자들의 반대에 부딪혀 그의 약속은 이행되지 못했다. 오히려 구교도들을 보호하기 위한 인권운동은 극심한 탄압을 받게 되어 1968년 10월 5일 런던-데리(London-Derry)에서의 폭력사태로까지 이어졌으며, 이 사태는 북아일랜드 분쟁의 본격적인 시작으로 인식된다.[북아일랜드 분쟁 개요]런던-데리 폭력사태로 시작된 북아일랜드 분쟁은 1972년 영국 정부의 북아일랜드 의회 해산, 대북아일랜드 군대 파견 및 직접 통치로의 전환 등으로 더욱 심화되었는데, 내재되어 있던 북아일랜드 구교도들의 불만과 반영감정은 1972년 1월 30일 ‘피의 일요일(BloodySunday)'이라는 유혈 폭력사태로 터져 나왔다. 북아일랜드 신교계 얼스터 의용군(UlsterVolunteer ForceUVF)과 IRA의 무장투쟁은 격렬했으며, 1972년 1년 동안의 테러로 인해 발생한 사망자는 468명에 이른다.1980년대 들어서면서 영국은 아일랜드 정부와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협상에 적극성을 보이게 되었다. 이는 1981년 투옥된 IRA 죄수들이 정치범 처우 개선3)을 위한 단식투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10여 명의 죄수들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 원인이 되었다. 즉, 이 사건으로 IRA는 국제적인 약자 이미지를, 또 영국은 탄압자의 이미지를 갖게 됨에 따라 아일랜드 신 페인당이 북아일랜드 구교도 내 제1정당으로까지 급부상하게 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영국 측이 협상을 서두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때 협상은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종결되었다.1990년대는 북아일랜드 내 테러가 정점을 치닫게 되는 시기이자 양측의 평화를 위한 협의도 활발해지는 시기였다. 이 시기 IRA의 테러는 물론 신교도들의 테러도 정점을 치닫게 되는데, 신교도들의 테러로 희생된 사상자가 더 많아짐에 따라 영국 정부는 신교도 군대인 얼스터 방위연합(Ulster Defense AssociationUDA)도 IRA처럼 불법단체로 규정하기에 이른다.그러던 중 1993년 12월 북아일랜드의 아일랜드 귀속여부를 주민들의 뜻에 맡기는 한편 IRA의 무장투쟁 포기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다우닝가 선언’이 발표되면서 북아일랜드 분쟁은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듯 했고, 1994년 9월에는 IRA가 휴전을 선언함으로써 분쟁해결의 가능성이 보이기도 했다. 또한 1995년 2월 영국-아일랜드 양국 정부는 ‘북아일랜드 평화안’을 도출, 분쟁해결의 기본틀을 만들어냈다.그러나 영국 측의 ‘ 무장해제  협상개시’ 조건과 북아일랜드 내 신교도들의 평화회담에 대한 불신으로 평화협상은 무산되었고, 1996년 2월 IRA는 테러를 재개했다. 이에 영국의 토니 블레어(Tony Blair) 수상은 신 페인당에 평화회담 동참을 제의, 1997년 7월 IRA는 다시 휴전을 선언하게 되었다.이 평화협상은 동년 12월 북아일랜드 유혈사태로 결렬될 위기를 맞이했으나, 1998년 4월 10일 다자회담을 통한 북아일랜드 평화협정인 ‘굿프라이데이 협정(Good Friday Agreement금요일협정)’이 최종 타결됨으로써 북아일랜드 분쟁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1999년 자치정부 구성을 통해 평화협정 합의안이 수용·이행됨에 따라 북아일랜드는 영국 정부로부터 기본 자치권을 이양 받았으나, 경찰·사법 분야는 영국 정부의 관할로 남겨져 있어 분쟁은 완전히 해결되지 못하였다.[현재 상황]주지하는 바와 같이 북아일랜드 분쟁의 주요행위자는 ① 북아일랜드 신교도 연합주의자들과 ② 북아일랜드 구교도 민족주의자들, ③ 영국 정부, ④ 아일랜드 정부이다. 연합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연합은 북아일랜드와 영국 정부의 연합이고, 민족주의자들이 원하는 것은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정부가 하나의 국가가 되는 것이다. 즉, 북아일랜드 분쟁은 영국·아일랜드 간의 분쟁과 북아일랜드 내부 연합주의자(영국 편향)·민족주의자(아일랜드 편향) 간의 분쟁이 복합적으로 얽혀있는 분쟁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지난 30여 년에 걸친 IRA 무장투쟁의 과정에서 발생한 사망자는 3,700여 명에 이르며, 그 외에도 이들의 충돌로 희생된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언급한 바와 같이 1999년 12월 북아일랜드 자치정부가 출범했지만, IRA는 무기반납을 거부했고, 이듬해 2월 얼스터연합당은 자치정부에서 탈퇴했다. 이에 영국 정부는 북아일랜드 자치권을 박탈했다 다시 돌려주는 등 북아일랜드 상황은 여전히 불안했다.
2001년 10월~2002년 4월까지 IRA가 무기폐기 및 무장해제를 발표하기도 했으나, 그 과정에 대한 신교측과의 마찰·추가적 무장해제에 대한 명확성 결여 등의 이유로 북아일랜드 평화협정 이행은 다시 난항을 겪게 되었다. 이어 2004년 12월 20일에 발생한 아일랜드 벨파스트의 노던 은행 강도사건에 IRA가 연루된 정황이 드러나자 양측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이후 2005년까지 관계의 진전이 없는 교착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상황은 2005년 7월 28일 IRA가 무장 투쟁을 완전히 포기하겠다고 선언함으로써 해빙기를 맞이하였으며, 이는 2007년 5월 구교·신교 연합의 북아일랜드 공동 자치 정부 출범과 2009년 6월 신교측의 얼스터의용군·얼스터방위군의 완전한 무장해제로 이어졌다.그렇다고 해서 북아일랜드 분쟁이 종결된 것은 아니다. 양측이 화해를 모색하고 있던 2009년에도 케빈 맥데이드(Kevin DcDaid) 사망사건이 발생했었고, 이후로도 폭력적 충돌사건은 끊이지 않고 있다. 아직 잔존하는 IRA 분파들도 영국을 대상으로 테러를 감행하고 있는데, 실례로 2010년과 2011년에는 IRA 분파조직들이 영국을 대상으로 폭발사건을 일으킨 바 있다.4) 뿐만 아니라 2011년 6월 21일에는 신교도 청년과 구교도 청년들 700여 명이 거리에서 충돌한 사건도 일어났다. 물론 2012년 5월 영국 여왕의 북아일랜드 방문, 2013년 2월 영국 정부의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희생된 시위대 유가족 보상금 지급 결정, 동년 6월 벨파스트 평화담장 철거 발표 등 영국측이 북아일랜드에 유화적 제스쳐를 보내고 있으나, 북아일랜드 분쟁의 해결은 아직 요원한 것으로 보인다.
2013년 6월에는 흩어져있던 IRA 분파(4개중 3개)가 연합하여 ‘새 IRA'를 조직했을 뿐 아니라 동년 8월에는 북아일랜드 독립에 반대하는 폭력시위(9일) 및 IRA 추모행사 관련 폭력시위(11일)가 발생하는 등 북아일랜드 분쟁은 여전히 진행 중임을 시사하는 사건들이 속속 발생하고 있다.
[추후 전망]2009년 5월 24일에 구교측 사회복지분야 종사자인 케빈 맥데이드(Kevin McDaid)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스코틀랜드 제1부 리그 축구경기 마지막 날에 경쟁관계에 있는 조직패들이 충돌했고, 맥데이드가 신교측 폭도에 의해서 살해되었는데, 이렇게 되기 전에 신교측과 구교측이 석여 사는 지역 헤이츠(Heights)에서 아일랜드 국기를 게양한 사건이 충돌과 사망사건의 계기가 되었다.
맥데이드의 사망 사건은 영국정부의 많은 노력과 유럽연합의 '평화 III-프로그램(Peace III-Program)'을 통한 막대한 재정지원에도 불구하고 북아일랜드 평화프로세스가 아직 사회의 밑바닥까지 파급되지 못하여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상부구조인 정치권 협력 및 해외로부터의 지원과 하부구조인 서민들의 의식 사이에 아직 괴리가 존재하는데, 이러한 괴리가 해소되고 평화프로세스가 완전히 정착되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2012년의 상황을 2011년과 비교할 때 신교도와 구교도가 충돌하는 사건은 9월 5일 현재까지 발생하지 않고 있으며, 전 IRA 사령관이자 현 북아일랜드 자치정부의 2인자(총리 대행)인 마틴 맥기네스와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만나서 화해의 악수를 하는 등 상층부의 정치권에서는 협력의 분위기가 지속되고 있다.
언급한 바와 같이 2005년 북아일랜드 구교도 무력투쟁단 IRA가 무장해제를 선언하고, 2009년에는 신교도 군대인 얼스터 의용군·얼스터 방위군이 무장을 해제했다. 이로써 북아일랜드의 분쟁이 종결되는 듯 했으나, 뿌리 깊은 신·구교도 간 갈등과 영국·아일랜드 간의 갈등은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다. 분쟁 주요행위자들의 뿌리 깊은 반목과 오랜 분쟁으로 인해 심화된 상부 정치권력 구조 vs. 하부 서민들 간의 양극화·괴리가 해소되기 전에는 평화 프로세스의 정착은 쉽지 않을 전망이다. 아울러 수차례 평화협정과 과격단체의 무장해제 선언이 있었음에도 이러한 평화적 언행이 번복되고 있는 상황도 북아일랜드 분쟁의 종결 실현성을 희박하게 하고 있다.
2013년 IRA 분파들이 모여 새 IRA를 결성한 것이나 북아일랜드에서 폭발·폭력 등의 테러시위가 발생하고 있는 것도 이 지역의 분쟁이 여전히 유효함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유효할 뿐 아니라, 사실상 평화가 퇴보하고 과거의 충돌이 더욱 강화될 가능성이 우려되는 상황이며, 2013년 8월에도 북아일랜드의 구교도와 신교도들은 폭력시위로 부딪힌 바 있다.
2014년에도 이러한 분위기는 계속 이어지는 추세다. 4월에 북아일랜드 자치정부 피터 로빈슨 수반 및 IRA 사령관 출신 마틴 맥기니스 부수반이 영국 정부에 국빈으로 초대되어 유화 분위기가 도래하기를 기대했으나, 여전히 과거사에 대한 단죄 문제가 북아일랜드 분쟁 해결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1972년과 1982년에 있었던 납치·살해, 폭탄테러 사건을 주도했던 IRA 요원에 대한 처벌 문제는 여전히 해소되지 못하고 있으며, 아직도 남아있는 IRA 분파 무장세력들은 탈레반으로부터 최신 무기기술을 도입해 테러의 강도를 높이는 실정이다. 한편 영국 지방선거에서는 극우성향의 영국독립당(UKIP)이 약진함으로써 영국과 북아일랜드, 북아일랜드 내 신·구교도의 갈등이 고조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때문에 추후 북아일랜드 무력 충돌 상황 발생을 배제할 수 없으며, 지속적인 모니터링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94년 9월 IRA가 휴전을 선언할때까지 북아일랜드에선 25년동안 유혈 내전사태가 계속됐고 영국, 아일랜드, 북아일랜드 등에서 테러로 모두 3천2백여명이 사망했다.96년부터 아일랜드 및 영국과 평화협상을 시작해 98년 4월 북아일랜드 자치정부 구성 등을 내용으로 한 '성(聖) 금요일 평화협정'을 체결했고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은 평화협정을 안정시키기 위해 2001년 10월 첫 무장 해제에 이어 2002년 4월 2차 무장 해제를 실시하면서 북아일랜드의 구교파 준 군사조직으로 남게 되었다. 아일랜드는 영국의 서쪽에 있는 섬이에요. 350년경에 아일랜드에 가톨릭교가 들어온 이래 대부분의 아일랜드 사람들은 가톨릭교를 믿었어요. 지금도 해마다 3월 17일이 되면 아일랜드 국민과 전 세계의 아일랜드 후손들은 초록색 옷을 입고 아일랜드의 수호 성자인 성 패트릭을 기립니다. 이처럼 아일랜드는 가톨릭의 나라였다.1534년에 영국의 헨리 8세가 아일랜드에 쳐들어왔어요. 그 뒤로 아일랜드는 약 400년 동안 영국의 통치를 받게 됩니다. 헨리 8세는 가톨릭을 믿는 아일랜드 사람들을 성공회(영국 사람들이 믿는 기독교의 한 분파)로 개종시키려고 했어요. 그래서 영국의 성공회 신자들을 북아일랜드로 이주시켰지요. 이때부터 영국과 아일랜드의 대립이 아일랜드의 남북 분쟁으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아일랜드 땅에서 신교도(성공회 신자)와 구교도(가톨릭 신자) 사이의 기나긴 싸움이 시작됨.
1845년 아일랜드에 대기근이 일어났어요. 아일랜드에 병충해가 발생해 감자의 수확이 크게 줄어들었거든요. 아일랜드 대기근은 몇 년간 계속됐어요. 이때 100만 명이 넘는 아일랜드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고 해요. 그런데도 영국 정부는 아일랜드 사람들을 도와주지 않았어요. 북아일랜드의 신교도와 구교도 사이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지요. 1910년대에 구교도들은 군사 조직인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을 만들어 신교도들을 테러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아일랜드지배와 독립.아일랜드는 1169년 잉글랜드(England) 왕 헨리 2세(Henry Ⅱ, 1133년~1189년, 재위 1154년~1189년)가 정복하였다. 그러나 지리적, 종교적 이유로 잉글랜드(England)의 직접 통치가 효과적으로 미치지 못하였고 반란 또한 잦았다. 1607년 아일랜드 북부의 얼스터 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난 반란이 종결된 후 스코틀랜드(Scotland)와 잉글랜드(England)로부터 대규모 이민이 시작되었다. 1801년에 그레이트브리튼(Great Britain)과 아일랜드의 두 의회가 통합하고 ‘그레이트브리튼과 아일랜드 연합 왕국(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Ireland)’이 탄생했다.
1916년 아일랜드 독립운동이 진압된 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아일랜드공화국군(IRAIrish Republican Army)으로 알려진 게릴라군이 결성되어 독립전쟁을 개시하였다. 1921년에는 북부 얼스터 지방의 6개 주만 영국 의회의 최고 권위를 인정하되 독자적 의회를 구성하는 조건으로 영국의 구성원으로 남고, 나머지 3개 주와 남부 아일랜드가 독립해 아일랜드자유국(Irish Free State)을 구성하였으며, 1939년에는 아일랜드 공화국을 선포하였다.
1928년 이후 영국 국호는 그레이트브리튼과 북아일래드 연합 왕국(The United Kingdom of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으로 변경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윌슨에게 다가온 치명적인 사태는 북아일랜드 분쟁이었다. 1921년 영국 정부와 아일랜드 민족주의자 대표들은 아일랜드가 자신의 정부 조직을 갖는 캐나다 체제와 유사한 영국의 자치령으로 되는 조약에 서명하여 아일랜드 공화국의 체제가 갖추어졌다. 1933년 아일랜드는 영국 왕에 대한 충성을 파기하고, 영국 추밀원에 상소하던 사법 제도를 폐지했으며, 1936년에는 영국이 파견한 총독의 지위도 폐기했다.
1937년 국민 투표로 새 헌법을 제정하여 국명을 '에이레'라 고쳤으며 대통령을 선출했다. 물론 이러한 행동이 비록 영국측의 허락이 없는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직전의 험악한 국제 정세하에 있었기 때문에 영국은 1938년 영국 - 아일랜드 협정을 맺어 사실상 에이레의 성립을 승인했다.
아일랜드가 자치령화하는 가운데 북쪽의 6개 주는 영국의 주권하에 1963년 오닐(O'NeillTerence Marne)을 수상으로 뽑아 자치령이 되었는데, 이것은 이 지역 주민의 2/3가 신교인들로 구성되어 있어 아일랜드 국교인 가톨릭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가톨릭계가 이언 페이즐리 신부를 중심으로 불만을 표현했는데, 이것이 북아일랜드 문제의 발단이었다.
1968년 이래 무력 투쟁을 동반한 북아일랜드 분쟁이 가톨릭의 시민권 운동이라는 비폭력적 대중 운동에 의해 촉발되었다. 이 시민권 운동은 '2등 시민'이라는 사회적 열등감을 타파하고 지위 향상을 꾀하자는 대중 운동으로서 1967년에 '북아일랜드 공민권 협회'를 설립했는데, 그 협회의 요구는 '1인 1표'의 원칙을 지방 선거에 적용할 것, 부적절한 선거구를 고칠 것, 공영 주택을 할당할 때나 취직할 경우 종교적 차별(가톨릭측)을 철폐할 것 등이었다. 그러나 북아일랜드 경찰의 90%가 신교도여서 공민권 운동을 처음부터 철저히 탄압했다.
런던데리에서 공민권을 요구하는 데모가 벌어지자 벨파스트에서는 학생들의 항의 집회가 잇달았다. 이와 같은 상황에 놀란 영국 정부는 북아일랜드의 오닐 수상과 협의하여 조사 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점진적인 개혁안을 발표했다.
이에 반발하는 오닐 각료들이 반오닐적 태도를 취하자, 오닐은 의회를 해산하고 이듬해 2월 22일 북아일랜드 총선거를 실시했다. 이 선거를 통해 여당은 약해진 반면 신과격파는 강화되고 공민권 운동도 확대되었다.
1969년 4월 17일 아이리시 공화단원이자 좌파 계열인 21살의 버르너데트 데블린이라는 여학생이 얼스터 지구 하원 의원 보궐 선거에서 당선되었는데, 그녀의 첫 번째 하원 연설은 무척 감동적이었다. 이 연설은 얼스터 자치제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영국민에게 새로운 눈을 뜨게 해 주었다.
그녀는 북아일랜드의 실업률이 영국보다 항상 높고 가톨릭계 실업률이 신교인들의 것보다 3배 이상 된다는 통계 자료를 제시하면서, 자신의 동료였던 게리 피트가 직업을 찾기 위해 벨파스트를 떠나게 된 예를 들었는데, 이는 신교측 대부분의 고용주가 교육받은 가톨릭계를 내몰아 내는 일면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이 연설은 북아일랜드에서 신교측에 항의하는 가톨릭계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되어 4월 19일 공민권 협회 런던데리 지부가 평화적인 시위를 벌이는 과정에서 강력한 경찰의 저지로 인해 최초의 민간인 희생자가 나왔다. 그러자 평화적인 시위는 곧 폭동으로 변했고 윌슨 정부는 4월 25일에는 이곳에 500명의 군대를 증파했다.
이보다 앞선 4월 23일 정부는 '1인 1표'라는 주장을 받아들여 선거법 개정을 추진했으나 신교 과격파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선거법 개정이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결국 오닐 수상은 사임해야만 했다.
5월 11일 치치스터 - 클라크 내각이 성립되면서 개혁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 주자 정세는 잠시 소강 상태에 들어갔으나, 7월 12일 아일랜드 내 신교 정착을 기념하는 오렌지 오더(Orange Order) 행사를 계기로 런던데리, 벨파스트에서 가톨릭 폭동이 발생했고, 이어 계속된 시위 군중과 경찰의 충돌 속에서 북아일랜드 전역은 폭동의 도가니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가톨릭에 대한 피해가 점차 늘어가자, 에이레 정부는 영국군 증파에 항의하면서 유엔 평화 유지군의 파견을 요구했다. 그러나 윌슨 정부는 북아일랜드의 문제는 영국의 내정 문제라고 주장하면서 다시 300명의 군대를 증파했다.
영국군의 증강으로 8월 17일 폭동은 겨우 진압되었지만, 출동한 영국군 8500명과 시위 군중 양쪽 합해서 8명이 사망하고 700명이 부상했으며, 방화로 소실된 가구는 벨파스트에서만 1500호나 되었다. 실로 1969년의 폭동은 가톨릭 시민권 시위와 이에 대항하여 조직된 프로테스탄트의 시위가 동시에 일어난 경우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폭동의 주역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아일랜드 공화국군(IRA : Irish Republican Army)이 무엇인지 잠깐 살펴보면, 이들은 의용군으로 아일랜드 독립 운동의 핵심이었던 아일랜드 독립군의 후예들로 구성되어 아일랜드 독립을 위해 게릴라전을 폈다. IRA의 정치 조직인 신페인당(Sinn Fein)의 내부 분열로 인해 좌파와 우파로 갈라진 후, 우파는 에이레 공화국 성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신페인당의 좌파는 아일랜드 자유국(에이레)을 거부하고 자신들만이 아일랜드 자결의 정당한 수행자라는 신념을 지켜 나가기 위해 지하로 숨어들어 게릴라전을 전개하면서 저항 활동을 펴나갔다. 그런 저항의 기회가 북아일랜드의 혼돈 속에 1969년에 찾아온 것이다.
북아일랜드(Northern Ireland)의 갈등과 평화 협상.북아일랜드(Northern Ireland)에 1921년 독자적인 의회가 구성된 이후 다수파인 신교 연합론자(북아일랜드와 영국의 통합론주의자)들이 북아일랜드 의회와 정부를 장악하였다. 소수파인 가톨릭교도들은 정치·사회 등 각 분야에서의 차별에 불만을 표명하고 1960년대 후반 이후 적극적인 대항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두 종파의 분쟁이 유혈 사태까지 빚음에 따라 1969년에는 군부가 평화 유지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1970년 가톨릭 극렬 세력이 이에 대항해 아일랜드공화국군(Official IRAOfficial Irish Republican Army)에서 분리하고 북아일랜드 공화국군(Provisional IRA)이라는 테러 단체를 조직하여 무력을 통한 북아일랜드 독립을 추진하였다.
1972년에 영국 정부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영국 의회와 정부가 법질서 유지 책임을 직접 맡기로 결정하고 북아일랜드(Northern Ireland) 의회와 정부를 해산하였으며 북아일랜드를 직접 통치하였다.
1998년 4월 10일 벨파스트에서 영국의 토니 블레어(Tony Blair, 1953년~) 총리와 아일랜드의 어헌(Bertie Ahern, 1951년~) 총리의 중재로 신교계와 구교계의 모든 정파 대표 간의 북아일랜드(Northern Ireland) 평화협상이 타결되었다. 이로써 아일랜드와의 통합을 주장해 온 구교계와 영국 잔류를 고수해 온 신교계 간에 1969년 이래 계속된 유혈 분쟁이 종결되는 역사적 계기가 마련되었다. 
2005년 9월에 아일랜드공화국군이 무장을 해제했고 2007년 5월에는 강경 신교도 정당인 민주연합당(Democratic Unionist Party)과 신페인(Sinn Fein)당의 공동 정권이 출범함으로써 30년 갈등의 역사를 경험한 북아일랜드는 새로운 평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문제의 역사적 배경.= 북아일랜드 분쟁은 종교 간의 분쟁이라기 보다 민족 간의 분쟁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다. 실제적으로 민족(켈트족, 앵글로 색슨족)과 종교(구교, 신교)가 다른 두 집단이 영토와 정치 문제에서 상호 배타적인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데서 분쟁의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영국 신교도의 아일랜드 이주= 북아일랜드 분쟁의 발달은, 1541년 영국이 아일랜드(켈트족, 게일어)를 지배하면서 영국 국교를 신장시키려는 노력으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약 400년에 걸쳐 100여 만 명의 많은 신교도인(앵글로 색슨족, 영어)들을 북아일랜드로 이주시키는 데 있다.
북아일랜드의 영국 잔류= 1921년 아일랜드 전체 32개 주 중에서 남부 26개 주만 아일랜드로 독립하고 북부 6개 주는 북아일랜드로서 영국에 잔류하게 되면서, 아일랜드 원주민들은 북아일랜드 내에서 소수 민족으로 전락하였다.
신·구교도간 반목= 북아일랜드 전체 인구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다수파인 영국계 신교의 연방주의자(Unionist)들은 의회와 정부를 지배하면서 정치·경제·사회 모든 영역에서 기득권을 누렸다. 그에 비해 전체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소수파 구교의 민족주의자(Nationalist)들은 모든 영역에서 차별당하면서 불만이 커졌으며, 영국연방으로부터의 분리독립과 아일랜드의 통일을 바라게 되었다.
개요 분석 아일랜드 역사"



아일랜드.Ireland, Republic of Ireland

아일랜드.Ireland, Republic of Ireland. 정식 국가 명칭은 아일랜드공화국(Republic of Ireland)이며, 북대서양 북동부에 위치한 아일랜드섬은 외부로부터의 잦은 침입을 막아내고 1921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그러나 32개 군 중에서 26개 군만이 아일랜드의 영토가 되었으며, 1937년 7월 1일 제정되고 1949년 개정된 헌법에 의하여 아일랜드공화국으로 개칭되었다.

유럽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인 아일랜드섬은 대서양과 아이리시해() 사이에 있으며, 영국 본토 그레이트브리튼섬과는 얕은 대륙붕으로 연결되어 있다. 8세기말 침입한 노르웨이족을 1014년에 격퇴한 후, 12세기부터 700년간 이어져온 영국민의 지배에 저항한 결과 1921년 12월 6일 독립하였다. 

영국-아일랜드 전쟁에서 당시 아일랜드섬의 32개 중에서 6개 군은 영국령 북아일랜드로, 26개 군은 아일랜드자유국으로 분할되었다. 북아일랜드는 카톨릭교도가 많아 한동안 종교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아일랜드'는 아일랜드 전설 속 여신인 'Ériu(현대어로 에이레 Éire)'에 'land'가 합친 것이다. 행정구역은 26개 카운티(county)로 되어 있다.

게일어로는 에이레(Éire)라고 한다. 수도는 더블린(Dublin)이다. 아일랜드 인구는 458만 명(2011년 기준)이며, 수도 더블린 인구는 127만 명(2011년 기준)이다. 위치는 영국 서부(북위 51° 30'∼55° 30', 서경 5° 30'∼10° 30')에 있으며, 면적은 7만 282㎢로 한반도의 약 1/3, 남한의 약 82%이며, 기후는 온대성 해양기후이다. 주요민족은 켈트족(Celts)이며, 공용어는 게일어와 영어이지만 영국 식민 통치의 영향으로 대부분이 영어를 사용하며, 종교는 가톨릭교 93%, 개신교 3.4%, 아일랜드교 2.8%, 유대교 0.06%이다.

아일랜드의 정치체제는 1937년에 채택한 공화제이며, 정부형태는 의원내각제이다. 대통령은 임기가 7년이며 연임이 가능하다. 2011년 현재 아일랜드의 대통령은 1997년 11월에 선출되어 2004년 11월 재선에 성공한 메리 매컬리스(Mary McAleese)이며, 행정수반인 총리는 엔다 케니(Enda Kenny)이고, 부총리는 이몬 길모어(Eamon Gilmore)이다.

의회는 양원제로 하원과 상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임기는 각각 5년이다. 하원은 166석으로 중선거구제를 통해서 선출되며, 공화당(Finna Fáil), 통일당(Fine Gael), 노동당(Labour Party), 진보민주당(Progressive Democrats), 민주좌익당(Democratic Left), 녹색당(Green Party), 무소속으로 구성된다. 상원은 60석으로 총리가 지명한 11명, 직능대표에서 선출된 43명, 대학교수 중에서 선출된 6명으로 구성된다.

2009년을 기준으로 국내총생산(GDPGross Domestic Product, 이하 약어)은 2천 213억 달러이며, 1인당 GDP는 4만 1, 416달러, GDP성장률은 -7.1%,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4.5%를 기록했다. 수출은 1천 141억 달러에 수입은 622억 달러로, 총 교역액은 1천 763억 달러이다.

한국과 아일랜드는 1983년 10월 4일 외교관계를 수립했으며, 주아일랜드대사관은 1987년 7월 10일에, 주한 아일랜드 공관은 1989년 9월에 개설되었다. 두 나라의 교역액은 2009년을 기준으로 수출이 4억 2,400만 달러에, 수입이 6억 4,500만 달러로 총 10억 6,900만 달러이다. 아일랜드의 대통령 메리 매컬리스는 2005년에 노무현 대통령의 초청으로 방한하였다.

한국인은 ‘아시아의 아일랜드인’으로 묘사되곤 한다. 식민지의 한(), 강렬한 민족정신, 음주가무를 즐기는 민족성, 노인을 공경하는 대가족 전통과 자녀교육열 등이 유사하다는 이유 때문이다. 시끄러울 정도로 크게 떠드는 것이나 말싸움을 즐기는 것도 비슷하다. 아일랜드인들은 “자기 목소리를 듣기 위해 말을 한다”는 비난까지 들을 정도다. 서울대 교수 박지향은 『슬픈 아일랜드: 역사와 문학 속의 아일랜드』에서 두 나라의 공통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기 민족이야말로 가장 순수하고 순결하며 뛰어나다고 믿는 맹목적 애국심, 자신들의 역사가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비극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 그리고 실제로 강대국 곁에서 겪은 수난의 역사 등 두 나라 간에는 역사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닮은 구석이 많다. ······ 무엇보다도 두 민족에게는 한()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정서가 공통적으로 흐르고 있다. 그래서 2차 세계대전 후 동경대학 총장을 지낸 야나이하라 타다오가 ‘한국은 우리의 아일랜드’라고 말했던가 보다.”

일제는 효율적인 식민 통치를 위해 의도적으로 조선인들에게 열등의식을 심어 주기 위해 발버둥쳤다. 백인들은 ‘인종주의’로 그런 효과를 얻었지만, 일본의 경우엔 그 방법을 쓸 수 없었다. 조선인과 일본인은 얼핏 보면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외양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도 한국과 아일랜드는 비슷한 역사를 가졌다. 박지향은 『제국주의: 신화와 현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외양상의 유사함을 넘어서는 차이를 발견해야 했다. 영국인들이 ‘하얀 검둥이’, ‘하얀 침팬지’의 이미지로서의 아일랜드인을 만들어 내었듯이 일본인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멍청해 보이고, 입은 열려 있고 눈에는 총기가 없으며 무언가 모자라는 것처럼 보이는’ 조선인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었다.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옷을 잘 입은 아이누’, ‘두 발로 서서 걷는 원숭이’라고 비하해서 불렀으며, ‘더럽고, 게으르고, 무지하고 비위생적이고, 냄새나고, 심한 육체노동에는 적합하지만 복잡한 과제를 행할 능력은 없으며, 복종적이고, 따라서 어린애로 다루어져야 하는’ 열등 인간으로 간주하였다. 역사적으로 조선인은 ‘글러먹은 민족’이고 ‘놀기 좋아하고, 게으름이 습속이 되어 있고, 혐오스런 풍속 습관을 가진 민족’으로 진단되었다.”

최근 아일랜드와 관련하여 세계적으로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건 이 나라가 세계적인 정보화 강국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점이다. 『문화일보』 2000년 12월 20일자는 다음과 같이 보도한 바 있다.

“지난 1970년대 경제위기를 맞았던 아일랜드는 1980년대 인플레이션이 16~17%까지 치솟고 매년 수만 명의 젊은이들이 고향을 등지게 만들었던 불모의 땅. 하지만 10년 전 17.5%에 달했던 실업률은 최근 완전고용 수준인 3.8%까지 떨어졌다. 정부 주도의 강력한 개혁으로 세계 e비즈니스의 중심으로 떠오르면서 지난해 총생산(GDP) 대비 해외자본 유입비가 20.2%로 스웨덴에 이어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았다. 해외 기업 직접투자를 늘리기 위해 추진한 완벽한 자본자유화, 경쟁력 있는 금융 및 물류, 통신인프라 구축 등이 결실을 거둔 셈이다. 하지만 세계 10대 주요 소프트웨어업체 5개 사가 아일랜드에서 주력사업을 벌이고 1,200개의 세계적 다국적 기업이 몰려들면서 발생한 문제는 ‘구인난’. 연간 10만 개의 일자리가 새로 발생하는 가운데 전체 인구가 350만 명에 불과한 아일랜드로서는 즐거운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다.”

오마에 겐이치는 2000년에 출간한 『보이지 않는 대륙』이라는 책에서 “앞으로 있을 국가 경제의 변화 속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할 국가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아일랜드를 선택하겠다”며 아일랜드가 통신 네트워크와 원거리 통신 인프라에 집중 투자하고 있는 것에 주목했다. 미국 보험회사들이 미국과 더블린 간의 ‘시차’를 이용하여 보험금 지급 청구 처리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아일랜드에 전담 지사를 세우기 시작했다는 게 흥미롭다.

“미국 보험회사들은 하루 일과가 끝나갈 무렵 당일 접수한 보험금 지급 청구를 아일랜드 지사로 보냈다. 그러면 아일랜드에서는 미국이 잠든 사이에 처리 작업에 착수했다. 시차를 이용하여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발상이 성공을 거두자 2,500여 개의 미국 기업들이 더블린에 지사를 세워 회사 업무의 일부를 그곳에서 처리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더블린에는 25만 개의 일자리가 창출되었다. 더블린 거주민의 14분의 1이 일할 수 있는 일자리가 생긴 것이다.”

1988년 1만 달러를 돌파한 아일랜드의 1인당 국민소득은 97년 2만 달러에 이어 2002년 3만 달러를 넘어섰으며, 15년 후 4만 달러를 내다보고 있다.

2004년 11월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111개 나라를 대상으로 실시한 “2005년에 가장 살기 좋은 곳은 어디인가” 조사에서 아일랜드는 1위를 차지했다. 2위에서 5위는 스위스, 노르웨이, 룩셈부르크, 호주 등이었다. 이 주간지는 “아일랜드는 안정된 가정과 공동체 생활과 같은 옛 세대의 가치관과 낮은 실업률, 정치적 자유와 같은 새로운 세대들이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요인들을 결합하는 데 성공해 1위에 올랐다”고 평가했다.

아일랜드의 국토 면적은 7만 282㎢로 한국(남한)의 5분의 4인데, 계속 인구가 늘어 2004년 4월 현재 404만 명으로, 1871년(405만 명) 이후 133년 만에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19세기 중반에 아일랜드 인구는 700만 명이었지만, 1840년대 감자 기근으로 100만 명이 죽었고 100만 명은 살길을 찾아 아일랜드를 떠났다. 그 후에도 인구는 계속 줄어 한때 300만 명을 밑돌기도 했다.

아마티아 센은 1840년대의 기근은 결정적인 방향으로 아일랜드의 속성을 바꾸어 놓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대규모 이민을 야기시켰으며, 이러한 이민 행렬은 심지어 최악의 항해 조건 속에서도 끊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1840년대의 기근과 관련하여 놀라운 사실은 당시 아일랜드가 식량을 수입하기는커녕 부유한 영국에 식량을 수출하는 현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아일랜드에선 돈이 없으니까 식량이 있어도 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마티아 센은 기근이 심한 시기에 아일랜드에서 영국으로의 식량 수출은 아일랜드에게는 상당히 큰 고통을 주었고, 오늘날까지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의 복잡한 불신을 지속시키는 데 영향을 주었다고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일랜드 기근 동안에 영국 재무성의 장관이었던 찰스 에드워드 트리벨리언은 아일랜드에 대한 영국의 경제 정책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생각했으며, 기근 확대의 부분적 원인으로 아일랜드인의 습관을 지적했다. 그런 원인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감자만 먹는 아일랜드인들의 습관이었는데, 이런 습관은 한 가지 작물에만 의존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아일랜드 기근의 원인에 대한 트리벨리언의 견해는 아일랜드인의 요리에 대한 분석도 결부되었다. ‘아일랜드 서부의 농민 계급 여성들 중에서 감자를 삶는 것 외의 요리 기술을 지닌 여성은 거의 없다.’ ······ 가난한 아일랜드인들의 단조로운 식단에 대해 비난한 것은 피해자들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는 좋은 예를 보여 준다.”

아일랜드 인구의 95% 이상이 가톨릭이고 국민의 87%가 일요 미사에 정기적으로 참석할 정도로 아일랜드인들은 신앙심이 강하다. 종교 때문에 빚어진 영국과 아일랜드의 악연은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은 16세기부터 아일랜드를 강력하게 통치하면서 신교도의 나라로 만들려고 하였는데, 이 때문에 여러 차례의 폭동이 발생했다. 1641년에 시작된 10년간의 폭동에선 60만 명이 죽었는데, 이때 무자비한 폭동 진압을 주도한 인물이 바로 올리버 크롬웰이었다. 크롬웰은 일기에서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아일랜드인들에게 고통을 가하는 즐거움을 표현했다. 지금까지도 아일랜드인들이 크롬웰을 미워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800년간 영국의 지배를 받은 아일랜드는 19세기에 영국으로부터의 분리를 시도했는데, 문제는 영국과의 끈을 버리려 하지 않는 북아일랜드의 신교도들이었다. 그래서 영국에 대항해 함께 투쟁했던 사람들 사이에서 비극적인 내전이 벌어졌고, 결국 1921년 남과 북의 분단으로 종결되었다. 남쪽은 자치령이 되었다가 제2차 세계대전 뒤인 1948년 독립적인 공화국으로 변모한 반면, 북쪽은 아직도 영국의 일부로 남아 있다. (참고: 제4장 중 ‘영국 정체성’)

2004년 10월 14~15일에 열린 한국정치학회는 사회협약을 통한 ‘작지만 강한 나라’의 미래를 모색하는 학술회의에서 아일랜드에 주목했다. 아일랜드는 외세의 침략과 피식민지 경험 등 역사적 배경은 물론 강대국 경제에 대한 종속구조, 분권화·파편화된 노조운동, 계급정당이 아닌 포괄정당 중심의 정당 체제 등 한국과 닮은 점이 많다는 것이다.

아일랜드는 1987년 노사정이 타결한 ‘국가재건협약’ 이래로 4개의 노사정 협약을 추가로 체결하는 동시에, ‘국가경제사회협의회’를 구성해 국가발전전략의 기본을 세워 큰 성과를 거두었다. 내부 분열에 찌든 한국으로서는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강명세는 ‘대외적 취약성’ 개념을 제시했다. 그는 “유럽의 작은 나라들이 번영을 누리는 비결은 자신들의 국가 체제가 외적 환경 변화에 취약하다는 것을 알고, 국내적 합의를 통해 대처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불투명하다는 것을 역사적 경험으로 터득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런 국민적 합의의 대표격은 노사협력”이고, 이제 “노동 부문의 동의·참여를 통한 노동 시장의 개혁 없이는 경제의 질적 전환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강명세는 “아일랜드의 기적은 집권세력의 인식의 전환이 만들어 낸 결과이며, 아일랜드 엘리트들이 시도한 발상의 전환을 한국이 주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아일랜드는 80년대 중반까지 ‘노조 공화국’으로 불릴 정도로 파업이 많았지만, 노사정 협약 덕분에 이젠 파업을 거의 찾아보기 어려우며 여객선사인 아이리시 페리사 노조가 최근 파업을 했다고 해서 큰 화제가 됐을 정도라고 한다. 2005년 3월 21일 아일랜드 대통령 메리 매컬리스가 한국을 방문함에 따라 아일랜드식 사회협약에 대한 관심이 국내에서도 고조되었다.

한국에 체류하는 아일랜드인은 360여 명이다(아일랜드 거주 한국인은 500여 명). 이들은 “잉글랜드와 아일랜드를 아직 정확히 구별하지 못하는 한국인들이 더러 있어 서글프다”고 말한다.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조나단 스위프트, 에드먼드 버크, 오스카 와일드, 조지 버나드 쇼,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등은 모두 아일랜드 출신이다. 그러나 이들은 영국계 아일랜드인이라 아일랜드와 영국 사이에서 이중적 정체성 문제로 고심하였으며, 아일랜드 민족주의 성향을 강하게 드러낸 예이츠는 이를 가리켜 ‘영국계 아일랜드인의 고독’이라고 불렀다.

아일랜드는 유럽 국가들 중 민족적 자부심이 가장 강한 나라이며, 민족적 정체성 만들기에도 열성이다. 2005년 3월 29일 아일랜드 정부는 서부해안 지역을 시작으로 도로 표지와 공공 지도 등에서 영어를 쓸 수 없도록 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아일랜드의 고유 언어인 겔릭어를 쓰라는 것이지만, 정부와 국회 내에서 이뤄지는 토론 중 불과 1%만 겔릭어로 진행되고 있는 실정이라 ‘겔릭어 살리기 운동’의 길은 험난할 것으로 전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