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20일 수요일

만리장성.The Great Wall 1

만리장성.The Great Wall.
Die Chinesische Mauer城.

중국의 역대 왕조들이 북방 유목민족의 침공을 막기 위해 세운 성벽으로 ‘장성()’으로 줄여 부르기도 한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나라 시황제() 때에 처음 건립되었다고 전해지지만, 오늘날 남아 있는 성벽은 대부분 15세기 이후 명나라 때에 쌓은 것이다. 
길이가 서쪽의 간쑤성[자위관[]에서 동쪽의 허베이성[산하이관[]까지 2,700㎞에 이른다. 지형의 높낮이 등을 반영하면 실제 성벽의 길이는 6,352km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문화유산으로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그리고 ‘인류 최대의 토목공사’라고 불리며 2007년에는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기원전 220년 진시황(秦始皇, BC 259~BC 210)은 북방 민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통합된 방어 산성을 쌓기로 하였다. 만리장성(萬里長城)의 축조는 그 후 명나라 시대(1368~1644)까지 계속되었고, 세계에서 가장 장대한 규모의 군사 시설물이 되었다. 이는 역사적·전략적으로 중요한 성벽인 동시에 건축학적으로도 탁월한 유적이다.
1947년에 씌어진 막스 프리슈(Max Rudolf Frisch)의 소극.
{1946년에 씌어졌으며 1955년에 수정판으로 다시 출판되었다. 카발렛타형식의 패러디로 씌어진 어리석고 비인간적인 독재정치에 대한 도덕적인 극으로 이 극의 장소는 ‘이 무대’이고 시간은 ‘오늘 저녁’이다.

2000년 전의 중국의 황티 황제가 세상을 모두 정복한 후에도 ‘국민의 소리’는 황티가 악한 독재자이며 만리장성을 쌓은 것은 외부로부터 적을 막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이윤을 위한 장삿속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황티는 자기에게 불리한 소문을 퍼뜨리는 장본인을 색출하려는 노력 끝에 말 못하는 가난한 중국인 벙어리 남자를 체포하였다.

벙어리를 심문하면서 황티는 자기 스스로의 죄와 본질을 드러내는 독백만 하게 된다. 황티는 이 벙어리가 그 ‘국민의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나 최후의 적인 ‘국민의 소리’까지 정복해야 한다는 독재정치의 논리에 따라 벙어리를 ‘국민의 소리’로 이용하였다.

황티에 의해 이용당한 벙어리는 마지막에 돈과 영예에 어두운 어머니 오란과 또 하나의 영웅을 필요로 하는 반란군 대중에 의해 다시 ‘국민의 소리’로 이용당하였다.

1955년의 수정본에 이어 1965년 함부르크에서 상연된 세 번째 판본과 1972년 파리의 네 번재 판본들도 작품집에 실려 있다. 프리슈 자신은 이 작품을 ‘우리의 의식에 대한 패러디’라고 규정하였다. 초기작품과 같이 이 작품에서도 무대에 올려진 것들의 연기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소외시키고 있다.

1940년대와 1950년대의 그의 이론서에서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의 연극론에 힘입어 전통적인 모방연극을 거부하였다.} 
처음에 장성은 돌이 풍부한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흙을 다지거나 흙으로 만든 벽돌로 건축했어요. 흙으로 지은 까닭에 시간이 지나면서 방어용 기능이 점점 사라지게 되었지요. 진시황제 때 건설된 장성은 대부분 파괴되어 여러 곳에 그 흔적만 조금씩 남아 있을 뿐이에요.

진나라 때 건설된 만리장성은 한나라 때 고치고 덧붙여 짓는 작업이 이루어졌어요. 흉노족의 침략이 계속되자 한나라 황제 무제가 만리장성을 짓기 시작한 거예요. 이때 지어진 성은 진나라 때 지은 성에 비해 훨씬 견고하고 영역도 서쪽으로 더 연장되었어요. 그리고 진나라 때는 없었던 지휘소와 봉화대 같은 군사 시설이 보강되었지요.

한나라 이후에도 북위와 수, 요, 금나라 등에서도 장성을 복원하고 늘려 지었어요. 오늘날의 만리장성은 대부분 명나라 때 건설된 거예요. 명나라 최초의 황제인 홍무제(주원장)는 왕위에 오른 첫해인 1368년 대대적인 공사를 시작했어요.
훗날 명나라의 수도가 된 지금의 베이징 인근 바다링을 시작으로 허베이 성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장성을 고치고 늘려 지었습니다. 또한 3000개가 넘는 봉화대와 주요 거점지의 망루, 마차가 달릴 수 있는 넓은 도로도 명나라 때 지어졌습니다.

만리장성 공사는 이후 여러 황제에 의해 계속되었는데 정덕제 때 다시 대규모 공사가 진행되었어요. 오늘날 우리들이 볼 수 있는 만리장성은 17세기에 완성된 것입니다.
최종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만리장성은 총 길이가 6350km나 됩니다. 물론 총 길이는 2~3중으로 된 장성의 길이를 모두 합한 것이지요. 분명한 것은 만 리가 훨씬 넘는 1만 6000리나 된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중국인들이 ‘만리장성’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방어용 성벽을 유럽인은 ‘중국의 성벽(Wall ofChina)’ 혹은 ‘대성벽(Great Wall)’이라고 부른다. 탁월한 성벽 구축의 역사는 춘추시대(BC722~BC 481)와 전국시대(BC 453~AD 221)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벽 건설은 기원전 408년 위()나라가 진나라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지은 성벽처럼 봉건적인 갈등에서 시작하였다. 중국 중심부에 보존된 유적들에 따르면 기원전 300년 무렵 북방의 침략자에 대항하여 진·조()·연()나라가 축성한 성벽들보다 먼저 축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기원전 220년 통일된 진나라를 건국한 진시황은 기원전 3세기 혹은 그 이전 시대에 구축된 몇몇 성벽을 연결시켜 재건하였다. 이는 내몽골의 오르도스(Ordos)에서부터 만주까지 성벽을 증축하는 것이었다. 그는 기원전 206년 한나라가 들어서기 이전에 이미 최초의 통합 방어체계로서 성벽을 서쪽으로 확장하였다. 이 시대에 만들어진 성벽의 모습은 황허() 유역의 계곡 지대와 란저우()에 여전히 중요한 유적으로 남아 있다.

만리장성은 그 이후 더 확대되었는데, 한()나라의 무제(BC 140~BC 87)는 중국 서쪽의 둔황 지역부터 동쪽의 보하이만()까지 약 6,000㎞에 해당하는 성벽을 더 지었다. 중국 북방 경계지역에서는 몽골족·투르크족을 비롯해 초원 지대 최초의 제국인 흉노 제국의 퉁구스족 등의 침략 위험이 커짐에 따라 이전보다 더욱 견고한 방어책이 필요했던 것이다.

서기 200년 한 왕조가 몰락하자 만리장성은 중세 시대에 접어들었다. 당시 중국은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추가적인 방어책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이상 만리장성을 증축하거나 유지 관리할 필요가 없었다. 몽골족의 멸망으로 오랜 갈등 기간을 끝낸 뒤 명나라는 진시황의 성벽 구축의 전통을 부활하여 5,650㎞에 이르는 성벽을 구축하였다. 북방 민족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한 만리장성은 수비대가 아닌 군이 관할하는 9개의 진() 체제로 관리되었다.

마을, 산길, 여울을 방어할 수 있도록 전략적으로 지었다. 성벽의 맨 위쪽 길은 군대가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게 하고 연락병의 이동도 가능하게 했다. 2개의 상징적인 기념물이 오늘날까지도 성벽의 양 끝에 서 있다. 동쪽 끝 산하이관()이 첫 번째 성문이고, 1949년 이후에 완전하게 복구된 요새 자위관()이 북서쪽 끝에 있는 마지막 성문이다.

만리장성은 복합적·통시적() 문화재로서 2,000년 동안 오직 전략적 목적으로 유지된 군사 건축물의 특별한 사례이다. 그리고 성벽 건설의 역사는 방어 기술과 정치 상황의 변화에 따라 계속 발전했다. 만리장성의 목적은 외부의 공격을 막아내고, 동시에 침략자들의 관습으로부터 중국인의 문화를 보존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성벽의 축조 과정 중에 백성의 고난이 있었기 때문에 만리장성에 대한 이해는 중국 문학을 이해하는 필수 요소이기도 하다.

명나라 시기의 만리장성은 거대한 공사를 수행하기 위한 대담성뿐 아니라 건축학적으로 완벽성을 지닌 걸작이다. 광대한 대륙의 경치와 어우러진 성벽은 완벽한 건축물의 예이다. 춘추시대 중국인들은 북쪽 변방을 따라 방어벽을 구축하면서 독자적인 건설 공법과 공간 구조를 확립하였다. 또한, 만리장성 공사에 동원하기 위해 인구를 이동시킴으로써 중국 인구의 확산이 두드러졌다. 만리장성은 탁월한 고대 중국 문명에 대한 증거이다. 당시 명나라는 간쑤() 지역에 남아 있는 서한(西) 시대 진지 안에 흙을 다져 채워 넣는 방식으로 축성하였다.


만리장성의 역사
중국에서 북방 유목민족의 침공을 막기 위해 성벽을 쌓기 시작한 것은 춘추전국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춘추시대의 제()ㆍ초(), 전국시대의 연()ㆍ조()ㆍ진() 등이 유목민족과의 접경에 성벽을 쌓아 침공에 대비했다.
그러나 ‘만리장성’이라고 불리는, 동서로 길게 이어진 성벽을 쌓기 시작한 것은 진나라 시황제 때부터이다. 중국을 통일한 시황제는 흉노()의 침공을 막기 위해 춘추전국시대에 각 나라가 만든 북방의 요새와 성벽을 연결시켜 기원전 214년에 만리장성을 쌓았다. 당시의 장성은 지금 남이 있는 장성보다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서쪽으로는 지금의 간쑤성 민현[] 지역인 임조()에서 동쪽으로는 지금의 랴오닝성[랴오양시[] 지역인 요동()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당시의 장성은 성벽으로 계속 이어진 것이 아니라, 요충지에 요새와 초소 등을 만들어 구축한 국경 방어선의 의미가 강했다. 성벽을 쌓은 경우에도 흙을 다져서 쌓은 토벽이었으며, 높이도 2미터 정도로 높지 않았다.
시황제가 쌓은 장성은 한()나라 때에도 국경 방어를 위해 중시되며 확장되었다. 하지만 삼국시대와 오호십육국시대를 거치며 흉노ㆍ선비() 등이 북방민족이 화북지방으로 진출해 왕조를 세우면서 기능을 잃고 방치되었다. 그러다 탁발부() 선비족이 세운 북위()가 화북지방을 통일해 남북조시대로 접어들면서, 북방 방어를 위해 다시 장성이 축조되기 시작했다. 지금의 베이징[] 일대인 평성()을 도읍으로 삼은 북위는 북방의 유연()의 침공을 막기 위해 서쪽으로는 인산산맥[]의 남쪽 기슭에서 동쪽으로는 발해만()에 이르는 지역까지 장성을 쌓았다. 그 뒤 북제() 때에는 돌궐()의 남하를 막기 위해 산하이관 지역까지 장성을 확장했다. 이 시기의 장성은 진ㆍ한 시대보다 동쪽 지역은 훨씬 남쪽에 만들어졌으며, 서쪽 지역은 북쪽으로 만들어졌다.
장성은 당()나라 이후에 다시 오랫동안 방치되었다. 그러다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를 몰아내고 명()나라가 들어서면서 북방 방어를 위한 장성의 필요성이 다시 부각되었다. 특히 명나라가 제3대 왕인 영락제() 때에 수도를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기면서 몽골족의 재침을 막기 위한 장성의 필요성은 더욱 커졌다. 영락제 때에 시작된 명나라의 장성 축조는 제5대 왕인 선덕제() 때에 이르러 본격화되었다. 특히 1449년 제6대 왕인 정통제()가 오이라트 정벌에 나섰다가 붙잡혀 포로가 되는 일이 벌어진 뒤로는 장성의 개축과 연장이 꾸준히 추진되었다.
명나라 때 세워진 장성은 북위와 북제 시대에 만들어진 장성을 기초로 하였는데, 특히 수도인 베이징 부근은 이중으로 더욱 견고하게 성벽을 쌓았다. 그리고 요충지마다 벽돌로 성벽을 새로 쌓았는데, 명나라 때 세워진 장성의 평균 높이는 7.8m, 바닥의 두께는 6.5m에 이른다. 그래서 명나라 때에 이르러 간쑤성 서부의 자위관에서 허시후이랑[西]과 인촨평원[] 북쪽의 고원 지대를 거쳐 허베이성 북쪽의 옌산산맥[]을 가로질러 산하이관에 이르는 만리장성이 완성되었다.
만리장성의 전체 길이를 둘러싼 논쟁
2009년 중국의 국가문물국()은 만리장성의 동쪽 끝을 기존의 산하이관에서 랴오닝성[] 단둥시[]의 후산[]으로 변경하며, 만리장성의 전체 길이를 종래의 6,352km에서 8,851km로 수정해서 발표했다. 
명나라 때에 후금의 침공을 막기 위해 산하이관 동쪽으로 랴오닝성의 진저우[], 안산[], 랴오양[], 선양[], 푸순[]을 거쳐 후산[]에 이르는 지역에 장성을 연장해서 쌓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2012년에는 명나라 때의 장성만이 아니라 진ㆍ한 등 역대 왕조에서 세워진 장성들을 모두 포함하면 전체 길이가 21,196km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중국 국가문물국의 주장은 만주가 예로부터 중국의 일부였음을 강조하려는 정치적 필요에서 비롯된 것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후금과의 대립 과정에서 이 지역에 요새가 세워진 것을 장성의 연장으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중국이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랴오닝성 지역에서 복구 작업을 벌이면서 과거 연()나라와 고구려() 시대의 유적들을 파괴하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후산[]을 고구려 때의 박작성() 유적지로 보고 있는데, 중국이 만리장성의 일부임을 내세우기 위해 이곳에 후산장성[]을 새로 만들면서 고구려의 유적지를 훼손한 점을 비판하고 있다.
춘추전국 시대에 소국들이 다른 나라의 침입을 막기 위해 각기 장성을 구축한 것을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나라 때 연결하여 완성시킨 것이 만리장성의 원형이다.
이후 장성의 수리와 확장이 계속되었으며 명대의 대규모 증개축을 마지막으로 지금의 장성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장성 터로는 베이징 주변의 팔달령 장성()을 비롯해 명대 장성의 최동단인 산해관()과 명대 장성의 최서단인 가욕관(), 둔황 근처에 있는 한대의 장성인 옥문관() 등이 있다. 베이징 근교에는 보존이 잘 되어 있어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팔달령 장성과 관문인 거용관() 등 여러 장성을 견학할 수 있다.
만리장성 중 가장 잘 알려진 팔달령 장성은 베이징에서 북서쪽으로 70km 거리에 위치해 있다. 1505년에 축조되었으며 능선을 따라 연결된 장성의 모습이 장관을 이루는 곳이다. 로프웨이가 있어 장성에 올라 거닐 수 있다. 장성 기슭의 장성 박물관에서는 장성의 축조 과정이나 발굴품 등을 살펴볼 수 있다.
팔달령 장성 앞쪽 10km 지점에 있는 거용관은 베이징에서 몽골이나 서역으로 통하는 요충지에 해당하는 관문으로, 14세기에 처음 세워졌다. 현재는 관문과 성벽의 일부가 복원되어 있다. 관문에 있는 관청 내벽에 산스크리트, 위구르, 서하, 티베트, 바스파, 한자의 6개 문자로 쓰인 다라니 경문과 사천왕 등의 조각이 남아 있다.
모전욕 장성()은 베이징 북쪽 70km 지점에 있으며, 6세기 북제 시대 때 처음 지어진 장성이다. 팔달령 장성보다 관광객이 적어 여유롭게 둘러볼 수 있다.
베이징 시내에서 북동쪽으로 120km 떨어져 있는 사마대 장성()은 비교적 험준한 봉우리를 끼고 있는 장성이다. 망루가 135개나 되며, 특히 표고 986m에 있는 망경루()에서 보는 경관은 실로 절경이다. 사마대 장성보다 좀 더 북쪽에 위치해 있는 금산령 장성()은 24개의 망루가 있는데, 어느 곳에 올라도 훌륭한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나라 시황제() 때에 처음 건립되었다고 전해지지만, 오늘날 남아 있는 성벽은 대부분 15세기 이후 명나라 때에 쌓은 것이다. 길이가 서쪽의 간쑤성[자위관[]에서 동쪽의 허베이성[산하이관[]까지 2,700㎞에 이른다. 
지형의 높낮이 등을 반영하면 실제 성벽의 길이는 6,352km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문화유산으로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그리고 ‘인류 최대의 토목공사’라고 불리며 2007년에는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세계인의 호기심을?

중국을 방문하는 외국인이 가장 먼저 보고 싶어하는 것은 만리장성이라고 한다. 1972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북경방문을 준비할 때 모택동에게 '아폴로 우주비행사들이 달에서부터 식별할 수 있는 지구상의 유일한 조형물은 만리장성이라고 하더라'는 말을 할까 고려했었다고 한다. 그 말은 사실이 아니어서 그만두었으나 닉슨은 역사 깊은 유적지 만리장성에 대하여 대단한 호기심을 가졌음에 틀림없었다.
시황제가 아닌 명나라의 유산
현재의 만리장성은 17세기 초 명나라 때에 쌓은 성이며, 이는 기원전 3세기에 진()나라 시황제()가 쌓은 만리장성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축성을 하는 데 100만 명이 희생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는 진시황제 때의 만리장성은 이미 매몰된 지 오래되었으며, 그 위치도 지금의 만리장성과는 다르다. 많은 사람들은 지금의 만리장성을 진나라 시대의 것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만리장성 하면 그들 머릿속에 먼저 진시황제가 떠오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장성을 쌓다

중국에서는 자국의 영토를 지키고 적국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국경을 따라 성벽을 쌓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전국시대 연() · 제() · 조() 나라 등은 장성()을 쌓았다. 기원전 221년 천하를 통일하고 최초의 황제가 된 진시황제는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옛 장성을 보수 · 연결시키고 새 장성을 쌓아서 대장성을 만들었는데, 그 장대함으로 '만리장성'이라 불렀다.  

장성 축성, 압정의 수단이 되다

진시황제는 장군 몽염에게 북방의 흉노를 내몰고 장성을 쌓게 했는데, 완성될 때까지 10년이 넘는 공사를 벌였다. 만리장성은 그 군사적 가치보다는 오히려 축성하면서 진시황제가 보인 압정으로 더 유명해졌다.
본래 축성작업은 처음에는 흉노 침입을 막는 변방 수비병들이 맡았다. 그러나 진시황제는 죄수들을 보내서 공사에 투입하고 드디어는 정부에 불만을 품은 자까지 모두 공사장에 몰아넣었다.

지독한 독재와 폭정으로 백성을 탄압하다

진시황제는 지독한 독재자로 백성들을 탄압했다. 그는 언론을 통제하고, 승상 이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제자백가의 책들을 모두 불태우게 하고 유생들을 생매장하는 이른바 분서갱유를 저질렀다. 
분서령을 지키지 않는 자들은 만리장성을 축조하는 공사장으로 유형을 보냈다. 통상 이들은 형기가 4년인데, 살아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 자가 드물고 대개는 공사장에서 죽어 이른바 장성 귀신이 되었다고 한다. 나중에는 범죄자, 불평불만자뿐만 아니라 소상인과 일반시민 등 무고한 백성까지 적당한 죄명을 씌워 장성을 쌓게 했다.
산동여도
산동여도" 대명여지도에 그려진 명장성.


성의 실제 길이는 서쪽 감숙지방으로부터 동쪽 요동지방까지 2,400km에 달했다. 이보다 남쪽에 위치한 현재의 만리장성의 총 길이는 5,000km다. 이 장성이 현재의 규모로 된 것은 명나라 때로서,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만리장성이 백성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당시 민요 가운데 '장성가'라는 것이 전해지고 있는데, 만리장성의 한을 표현하는 대표적 타령이다. [중국의 UNESCO 세계유산]


"사내아이라면 낳지를 마라. 계집아이라면 소중히 길러라. 보지 않았는가, 장성 아래 징용되어 죽은 남자들의 해골이 겹겹이 서로 의지하고 있음을."

외적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기 시작한 만리장성은 오히려 백성들이 국경 밖으로 탈출하는 것을 막고 그들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진시황제가 죽은 다음 각처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기원전 206년 진나라는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농경민족과 유목민족의 치열한 각축을?

세계의 역사는 남쪽의 농경민족에 대한 북쪽 유목민족들의 끊임없는 침공과 방어의 전쟁으로 점철되었고, 이 양대 세력의 순차적인 흥망과 성쇠에 따라 대륙의 판도와 왕권의 교체가 이루어져왔다. 이렇게 볼 때 만리장성이야말로 농경민족과 유목민족의 양대 세력이 맞부딪치며 치열한 각축전을 벌여온 것에 대한 최대의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총각김치는 무가 마치 총각의 떠꺼머리와 같은 모양 같다하여 유래된 한자어이다.
"전제군주시대에 국가 의식을 치르고 신하들의 하례와 사신을 맞이하던 근정전.
"중국의 전통가무극을 공연하는 사랑극의 한 장면.
"차의 문화를 일찍 일으킨 중국.
"만리장성은 흉노족, 몽고, 만주족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하여 쌓은 거대장성이다.

중국 의 문화유산. (세계 문화 유산)
[중국의 UNESCO 세계유산]
No.
세계유산
분류
지정연도
1
문화유산
1987년
2
문화유산
1987년
3
문화유산
1987년
4
문화유산
1987년
5
복합유산
1987년
6
문화유산
1987년(2004년 확장 지정)
7
복합유산
1990년
8
자연유산
1992년
9
자연유산
1992년
10
자연유산
1992년
11
문화유산
1994년
12
문화유산
1994년
13
문화유산
1994년
14
문화유산
1994년(2000년, 2001년 확장 지정)
15
문화유산
1996년
16
복합유산
1996년
17
문화유산
1997년
18
문화유산
1997년
19
문화유산
1998년
20
문화유산
1998년
21
문화유산
1999년
22
복합유산
1999년
23
문화유산
2000년
24
문화유산
2000년
25
문화유산
2000년
26
문화유산
2000년
27
문화유산
2000년(2003년, 2004년 확장 지정)
28
문화유산
2001년
29
자연유산
2003년
30
문화유산
2004년
31
문화유산
2005년
32
자연유산
2006년
33
문화유산
2006년
34
문화유산
2007년
35
자연유산
2007년(2014년 확장지정)
36
자연유산
2008년
37
문화유산
2008년
38
문화유산
2009년
39
자연유산
2010년
40
하늘과 땅의 중심의 허난성 덩펑 일대 유적지 [HistoricMonuments of Dengfeng in “The Centre of Heavenand Earth”]
문화유산
2010년
41
문화유산
2011년
42
문화유산
2012년
43
자연유산
2012년
44
자연유산
2013년
45
문화유산
2013년
46
문화유산
2014년
47
문화유산
2014년

만리장성.The Great Wall

만리장성The Great Wall

기원전 220년 진시황은 북방 민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통합된 방어 산성을 쌓기로 하였다. 만리장성의 축조는 그 후 명나라 시대까지 계속되었고, 세계에서 가장 장대한 규모의 군사 시설물이 되었다. 이는 역사적·전략적으로 중요한 성벽인 동시에 건축학적으로도 탁월한 유적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건축물, 만리장성.
만리장성은 지구촌에 건설된 수많은 인공 구조물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거대한 성입니다. 험준한 산과 협곡은 물론이고 사막까지 이어진 거대한 만리장성은 황해와 가까운 동쪽 산하이관에서 서쪽으로 간쑤 성 자위관이란 곳까지 약 3000km가 보존되어 있습니다.

만리장성을 건설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동원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자료가 없습니다. 만리장성에 관한 책은 저마다 내용이 다른데, 계속해서 고치고 덧붙여 짓는 과정이 이루어졌기 때문.

만리장성은 여러 면에서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곤 합니다. 달에서도 보이는 유일한 건축물이란 이야기부터 공사 기간, 동원된 인원, 건축술, 그리고 수많은 사연까지 만리장성의 놀라운 점은 무척 많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만리장성 건설 과정에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입니다. 만리장성은 그 웅장함만큼이나 희생자를 많이 만들어 낸 문화유산이기도 합니다.

진시황제 시대 건설한 인류 최대의 건축물
중국에서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대규모 성을 장성이라고 부릅니다. 만리장성도 그냥 장성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지요. 중국에는 최초의 국가인 은나라 때 이미 성을 쌓고 도시를 지은 흔적이 여러 곳에 남아 있습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세운 최초의 장성은 춘추 시대인 기원전 657년 초나라에서 세운 장성이라고 합니다.
기원전 4세기 때는 초, 연, 진, 한, 조, 위, 제나라에서도 잇따라 장성을 건설했습니다. 오늘날 만리장성으로 불리는 곳 중에는 이때 건설한 장성도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원전 221년 한, 위, 조, 연, 제, 초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 역사상 최초로 통일 국가를 세운 진나라 시황제는 새로운 국가들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기존의 방어 시설을 파괴해 버렸어요. 그런 다음 흉노족을 방어할 목적으로 북방 지역에 거대한 장성을 짓도록 명령했어요.

기원전 215년 진시황제의 명령으로 시작된 장성 건설은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계속되었는데, 언제 공사가 끝났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어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군사와 백성을 합해 약 30만 명의 사람들이 만리장성 건설에 동원되었다.
만리장성에 대한 자료 가운데 가장 믿을 수 있는 것은 사마천의 역사책 《사기》에 남아 있는 기록이에요. 《사기》에는 동쪽 랴오둥에서 서쪽 린타오까지 건설된 장성의 길이가 ‘만여 리’라고 기록되어 있어요. 실제 이 구간은 4050km로 중국의 거리 단위로 따지면 만 리가 조금 넘는다.
2000여 년 동안 완성된 거대한 건축물
처음에 장성은 돌이 풍부한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흙을 다지거나 흙으로 만든 벽돌로 건축했어요. 흙으로 지은 까닭에 시간이 지나면서 방어용 기능이 점점 사라지게 되었지요. 진시황제 때 건설된 장성은 대부분 파괴되어 여러 곳에 그 흔적만 조금씩 남아 있을 뿐이다.

진나라 때 건설된 만리장성은 한나라 때 고치고 덧붙여 짓는 작업이 이루어졌어요. 흉노족의 침략이 계속되자 한나라 황제 무제가 만리장성을 짓기 시작한 거예요. 이때 지어진 성은 진나라 때 지은 성에 비해 훨씬 견고하고 영역도 서쪽으로 더 연장되었어요. 그리고 진나라 때는 없었던 지휘소와 봉화대 같은 군사 시설이 보강되었다.

한나라 이후에도 북위와 수, 요, 금나라 등에서도 장성을 복원하고 늘려 지었어요. 오늘날의 만리장성은 대부분 명나라 때 건설된 거예요. 명나라 최초의 황제인 홍무제(주원장)는 왕위에 오른 첫해인 1368년 대대적인 공사를 시작했다.
명나라의 수도가 된 지금의 베이징 인근 바다링을 시작으로 허베이 성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장성을 고치고 늘려 지었습니다. 또한 3000개가 넘는 봉화대와 주요 거점지의 망루, 마차가 달릴 수 있는 넓은 도로도 명나라 때 지어졌다.

만리장성 공사는 이후 여러 황제에 의해 계속되었는데 정덕제 때 다시 대규모 공사가 진행되었어요. 오늘날 우리들이 볼 수 있는 만리장성은 17세기에 완성된 것입니다.
최종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만리장성은 총 길이가 6350km나 됩니다. 물론 총 길이는 2~3중으로 된 장성의 길이를 모두 합한 것이지요. 분명한 것은 만 리가 훨씬 넘는 1만 6000리나 된다는 사실이다.
달에서도 보인다고 할 만큼 거대한 건축물, 만리장성 실제로는 달에서 만리장성을 볼 수는 없다고 한다.
만리장성 중심, 바다링



만리장성은 마차가 달릴 수 있도록 넓게 만든 길 엄청난 규모만큼이나 흥미로운 장소가 많아요. 그중 최고는 오랜 세월 대제국의 수도를 방어하기 위하여 건축한 바다링과 주변 지역을 꼽을 수 있다.
베이징 중심에서 북쪽으로 80km 지점에 있는 바다링은 단순한 장성이 아닌 종합적인 군사 시설이라고 할 수 있어요.

바다링은 주변을 훤히 파악할 수 있는 능선을 따라 벽돌로 지은 장성이에요. 바다링과 주변의 장성은 자연 지형에 따라 높이가 달르다.
접근이 어려운 낭떠러지 같은 곳은 3~4m에 불과하지만 길목과 주요 요충지는 8m가 넘는 곳도 있어요. 성벽의 높이가 이렇게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자연을 최대한 이용했기 때문이에요.

성벽의 폭도 저마다 달라요. 고비 사막이나 북방에 건설된 성벽은 폭이 1~2m에 불과하고 전투를 위한 시설도 많지 않았다.
바다링 지역은 성벽을 모두 2~3중으로 쌓았고, 폭도 3m인 곳에서 10m에 달하는 곳까지 있을 정도로 저마다 다르게 지어졌다.

바다링 주변 성벽이 이토록 견고하고 큰 규모로 지어지게 된 것은 군사적인 중요성 때문이에요. 바다링은 황제가 사는 베이징으로 통하는 주요 길목이기 때문에 어떤 곳보다 튼튼하게 방어해야 했다. 2~3중의 넓은 성벽, 성벽 위의 평탄한 길 역시 군사들을 빠르게 이동시키기 위한 것으로 군사적인 목적이 컸을것이다.
군사 시설물"
중국 자료에 의하면 바다링 부근의 성벽 위에 만들어 놓은 길은 말 5필과 마차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었으며, 간선 도로의 기능도 일부 담당했다고 기록되어 있어요. 여러 차례 바다링에 가서 직접 확인해 보니 이런 기록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말과 마차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도록 성벽 위에 넓게 만들어 놓은 길은 용도에 따라 폭이 달랐다. 특히 능선이 끝나는 지점이나 중앙에는 어김없이 적군을 감시했던 망루와 누각이 세워져 있고, 적군의 침입을 알리는 봉화대가 설치되어 있어요.

만리장성에 관한 기록에 의문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 마리의 말들이 동시에 이동하거나 군사들이 10명씩 동시에 이동할 수 있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100~200m마다 계단이 있어, 마차가 자유롭게 이동했다는 사실에는 의심을 품게 된다.

만리장성에는 망루, 봉화대, 성문이 많지만 바다링 주변에는 특별히 규모가 큰 망루, 봉화대, 성문이 많습니다. 그만큼 이곳이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바다링 지역에 지어진 망루는 대부분 사각형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다른 지역에 비해 규모도 크다.
바다링 주변에 많은 군사들이 머물면서 경계를 했다는 것을 알려졌다. 봉화대도 크고 성문도 다른 곳에 비해 크고 많습니다. 또한 바다링 근처에는 진산링과 무톈위, 쓰마타이 같은 크고 시설이 잘 갖춰진 장성이 모여 있답니다.

북방에서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하여 만든 만리장성은 인류가 건설한 가장 웅장한 인공 구조물입니다. 비록 나라를 지키기 위해 건설한 장성이지만 건설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생각하면 훌륭한 문화유산이라고 말하기에는 아쉬움을 주는 유적지다.
하드리아누스 성벽
만리장성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성벽은 영국 북부를 동서로 이어놓은 하드리아누스 성벽입니다. 만리장성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약 118km에 이르는 하드리아누스 성벽은 건축 시기로 보나 규모로 보나 세계적인 성벽임에 틀림없습니다. 영국을 점령한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픽트 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지었다고 합니다.

처음 하드리아누스 성벽 건설을 시작한 것은 122년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초기 만리장성처럼 흙으로 성을 지었습니다. 영국 중부 지역과 북부 지역의 경계이자 군사 요충지였던 하드리아누스 성벽은 200년경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로마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북쪽에 살던 스코틀랜드인들이 침공해 오자 중요한 기점마다 돌을 이용하여 성벽을 늘려 짓고, 17곳의 요새와 80곳의 성문을 세운 것입니다. 이전에 비해 군사 요충지로서의 역할이 강화된 것이지요.

성벽을 따라 만들어진 17곳의 요새에는 약 1만 명의 군사가 머물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요새를 중심으로 각종 편의 시설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주거공간은 물론이고 식량을 보관하는 창고와 물 저장소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로마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면 어김없이 있는 목욕탕도 건설되는 등 다양한 시설이 갖추어졌답니다.
이찬칼라
우즈베키스탄 서북쪽 히바라는 작은 도시에는 이찬칼라라는 독특한 분위기의 성벽이 있습니다. 이 성벽은 산이나 구릉, 들판에 세워진 만리장성이나 하드리아누스 성벽과 다르게 사막에 있는 성벽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사막에 성벽을 세우고 그 안쪽에 성곽을 지은 성곽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찬칼라 안에는 20개의 모스크(이슬람 예배당), 20개의 마드라사(이슬람교의 학교)를 비롯한 수많은 이슬람 중세 유적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찬칼라는 흙과 나무, 갈대로 만든 완벽한 토성입니다. 망루와 궁전이 있는 곳을 제외한 대부분의 성벽은 높이가 8~10m, 두께가 6m에 달하는데 오직 흙을 다지거나 흙벽돌을 이용하여 완성했습니다.

이찬칼라를 보면 흙을 이용해 지은 성벽이 얼마나 견고한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찬칼라 성벽을 보고 있으면 흙으로 지은 초기 만리장성이나 하드리아누스 성벽이 얼마나 견고했을지 알 수 있답니다. 흙으로 만든 성벽은 마무리 작업이 돌로 지은 성벽보다 깔끔하여 마치 현대적인 공법으로 지은 성벽으로 착각할 정도입니다.
바다링 망루
만리장성은 매우 큰 건축물이라서 다 둘러보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설령 모두 둘러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대부분 현대적인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없어 걸어서 둘러보아야 하니, 최소 2~3년은 걸리겠지요.
만리장성을 볼 때는 만리장성의 주요 요충지를 중심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가장 좋은 장소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바다링입니다.
바다링 망루에 올라 주변을 살펴보면 만리장성의 주요 요충지가 어떤 형태를 갖추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만리장성의 주요 길목이 어떤 곳에 지어졌는지는 기본이고 실제 성벽의 높이, 망루들의 차이점, 무기를 사용하기에 적합하게 만든 건축 기법까지 한눈에 보인답니다. 능선을 따라 동서로 이어진 수십 킬로미터 거리에 장성이 어떤 형태로 지어졌는지를 살펴보기에도 그만입니다.

이곳에서는 말과 군사들이 신속하게 이동했다는 성벽 위 도로도 볼 수 있습니다. 길이 평탄하고 넓지만 망루와 누각, 도로 사이에는 계단이 있어 마차가 과연 달릴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중국(China)
랴오닝(), 지린(), 허베이(), 베이징(), 톈진(), 산시(西), 내몽골, 산시(西), 닝샤(), 간쑤(), 신장(), 산둥(), 허난(), 후베이(), 후난(), 쓰촨(), 칭하이(), 그 밖의 자치주(LiaoningJilinHebeiBeijingTianjinShanxiInner MongoliaShanxiNingxiaGansuXinjiangShandongHenanHubeiHunanSichuanQinghai provincesmunicipalities andautonomous Regions)
N40 25 0.012, E116 4 59.988지도
1987년

(ⅰ), (ⅱ), (ⅲ), (ⅳ), (ⅵ) *참고: 세계유산 등재기준.

중국인들이 ‘만리장성’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방어용 성벽을 유럽인은 ‘중국의 성벽(Wall ofChina)’ 혹은 ‘대성벽(Great Wall)’이라고 부른다. 탁월한 성벽 구축의 역사는 춘추시대(BC722~BC 481)와 전국시대(BC 453~AD 221)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벽 건설은 기원전 408년 위()나라가 진나라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지은 성벽처럼 봉건적인 갈등에서 시작하였다. 중국 중심부에 보존된 유적들에 따르면 기원전 300년 무렵 북방의 침략자에 대항하여 진·조()·연()나라가 축성한 성벽들보다 먼저 축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기원전 220년 통일된 진나라를 건국한 진시황은 기원전 3세기 혹은 그 이전 시대에 구축된 몇몇 성벽을 연결시켜 재건하였다. 이는 내몽골의 오르도스(Ordos)에서부터 만주까지 성벽을 증축하는 것이었다. 그는 기원전 206년 한나라가 들어서기 이전에 이미 최초의 통합 방어체계로서 성벽을 서쪽으로 확장하였다. 이 시대에 만들어진 성벽의 모습은 황허() 유역의 계곡 지대와 란저우()에 여전히 중요한 유적으로 남아 있다.

만리장성은 그 이후 더 확대되었는데, 한()나라의 무제(BC 140~BC 87)는 중국 서쪽의 둔황 지역부터 동쪽의 보하이만()까지 약 6,000㎞에 해당하는 성벽을 더 지었다. 중국 북방 경계지역에서는 몽골족·투르크족을 비롯해 초원 지대 최초의 제국인 흉노 제국의 퉁구스족 등의 침략 위험이 커짐에 따라 이전보다 더욱 견고한 방어책이 필요했던 것이다.

서기 200년 한 왕조가 몰락하자 만리장성은 중세 시대에 접어들었다. 당시 중국은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추가적인 방어책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이상 만리장성을 증축하거나 유지 관리할 필요가 없었다. 몽골족의 멸망으로 오랜 갈등 기간을 끝낸 뒤 명나라는 진시황의 성벽 구축의 전통을 부활하여 5,650㎞에 이르는 성벽을 구축하였다. 북방 민족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한 만리장성은 수비대가 아닌 군이 관할하는 9개의 진() 체제로 관리되었다.

요새는 마을, 산길, 여울을 방어할 수 있도록 전략적으로 지었다. 성벽의 맨 위쪽 길은 군대가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게 하고 연락병의 이동도 가능하게 했다. 2개의 상징적인 기념물이 오늘날까지도 성벽의 양 끝에 서 있다. 동쪽 끝 산하이관()이 첫 번째 성문이고, 1949년 이후에 완전하게 복구된 요새 자위관()이 북서쪽 끝에 있는 마지막 성문이다.

만리장성은 복합적·통시적() 문화재로서 2,000년 동안 오직 전략적 목적으로 유지된 군사 건축물의 특별한 사례이다. 그리고 성벽 건설의 역사는 방어 기술과 정치 상황의 변화에 따라 계속 발전했다. 만리장성의 목적은 외부의 공격을 막아내고, 동시에 침략자들의 관습으로부터 중국인의 문화를 보존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성벽의 축조 과정 중에 백성의 고난이 있었기 때문에 만리장성에 대한 이해는 중국 문학을 이해하는 필수 요소이기도 하다.

명나라 시기의 만리장성은 거대한 공사를 수행하기 위한 대담성뿐 아니라 건축학적으로 완벽성을 지닌 걸작이다. 광대한 대륙의 경치와 어우러진 성벽은 완벽한 건축물의 예이다. 춘추시대 중국인들은 북쪽 변방을 따라 방어벽을 구축하면서 독자적인 건설 공법과 공간 구조를 확립하였다. 또한, 만리장성 공사에 동원하기 위해 인구를 이동시킴으로써 중국 인구의 확산이 두드러졌다. 만리장성은 탁월한 고대 중국 문명에 대한 증거이다. 당시 명나라는 간쑤() 지역에 남아 있는 서한(西) 시대 진지 안에 흙을 다져 채워 넣는 방식으로 축성하였다.

등재기준

기준 (ⅰ) : 명나라 시기에 건축한 만리장성은 대담한 공사 수행의 특징뿐 아니라 건축학적 완벽성을 갖춘 절대적인 걸작이다. 만리장성은 광대한 대륙의 경치와 어우러진 완벽한 건축물의 예이다.

기준 (ⅱ) : 춘추시대 중국인들은 북쪽 국경을 따라 방어벽을 구축하면서 독자적인 건설 공법과 공간 구조를 확립하였다. 중국의 확산은 만리장성 공사에 동원된 인구 이동으로 더욱 두드러졌다.

기준 (ⅲ) : 만리장성은 고대 중국 문명의 탁월한 증거이다. 간쑤 지역에 남아 있는 서한 시대 진지 안에 흙을 다져 채워 넣는 방식으로 건축한 성벽은 명나라의 놀라우면서도 보편성을 지닌 축성술이라는 찬사를 받는다.

기준 (ⅳ) : 만리장성은 복합적이고 통시적인 문화재로서 2,000년 동안 오직 전략적 목적으로 유지된 군사 건축물의 특별한 사례이다. 하지만 성벽 건설의 역사는 방어 기술과 변화하는 정치 상황 속에서 계속 발전했음을 보여 준다.

기준 (ⅵ) : 만리장성은 중국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상징이다. 성벽의 목적은 외부의 공격을 막아내는 동시에 침략자들의 관습으로부터 중국인의 문화를 보존하는 데 있었다. 성벽의 축조 과정에는 중국 백성들의 고난이 내포되어 있고, 그것은 중국 문학사상 중요한 작품인 진림(AD 200년경)의 『음마장성굴행()』이나 두보(, 712~770)의 시, 명나라의 소설 등 작품 속에 드러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