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20일 수요일

만리장성.The Great Wall

만리장성The Great Wall

기원전 220년 진시황은 북방 민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통합된 방어 산성을 쌓기로 하였다. 만리장성의 축조는 그 후 명나라 시대까지 계속되었고, 세계에서 가장 장대한 규모의 군사 시설물이 되었다. 이는 역사적·전략적으로 중요한 성벽인 동시에 건축학적으로도 탁월한 유적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건축물, 만리장성.
만리장성은 지구촌에 건설된 수많은 인공 구조물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거대한 성입니다. 험준한 산과 협곡은 물론이고 사막까지 이어진 거대한 만리장성은 황해와 가까운 동쪽 산하이관에서 서쪽으로 간쑤 성 자위관이란 곳까지 약 3000km가 보존되어 있습니다.

만리장성을 건설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동원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자료가 없습니다. 만리장성에 관한 책은 저마다 내용이 다른데, 계속해서 고치고 덧붙여 짓는 과정이 이루어졌기 때문.

만리장성은 여러 면에서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곤 합니다. 달에서도 보이는 유일한 건축물이란 이야기부터 공사 기간, 동원된 인원, 건축술, 그리고 수많은 사연까지 만리장성의 놀라운 점은 무척 많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만리장성 건설 과정에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입니다. 만리장성은 그 웅장함만큼이나 희생자를 많이 만들어 낸 문화유산이기도 합니다.

진시황제 시대 건설한 인류 최대의 건축물
중국에서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대규모 성을 장성이라고 부릅니다. 만리장성도 그냥 장성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지요. 중국에는 최초의 국가인 은나라 때 이미 성을 쌓고 도시를 지은 흔적이 여러 곳에 남아 있습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세운 최초의 장성은 춘추 시대인 기원전 657년 초나라에서 세운 장성이라고 합니다.
기원전 4세기 때는 초, 연, 진, 한, 조, 위, 제나라에서도 잇따라 장성을 건설했습니다. 오늘날 만리장성으로 불리는 곳 중에는 이때 건설한 장성도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원전 221년 한, 위, 조, 연, 제, 초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 역사상 최초로 통일 국가를 세운 진나라 시황제는 새로운 국가들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기존의 방어 시설을 파괴해 버렸어요. 그런 다음 흉노족을 방어할 목적으로 북방 지역에 거대한 장성을 짓도록 명령했어요.

기원전 215년 진시황제의 명령으로 시작된 장성 건설은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계속되었는데, 언제 공사가 끝났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어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군사와 백성을 합해 약 30만 명의 사람들이 만리장성 건설에 동원되었다.
만리장성에 대한 자료 가운데 가장 믿을 수 있는 것은 사마천의 역사책 《사기》에 남아 있는 기록이에요. 《사기》에는 동쪽 랴오둥에서 서쪽 린타오까지 건설된 장성의 길이가 ‘만여 리’라고 기록되어 있어요. 실제 이 구간은 4050km로 중국의 거리 단위로 따지면 만 리가 조금 넘는다.
2000여 년 동안 완성된 거대한 건축물
처음에 장성은 돌이 풍부한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흙을 다지거나 흙으로 만든 벽돌로 건축했어요. 흙으로 지은 까닭에 시간이 지나면서 방어용 기능이 점점 사라지게 되었지요. 진시황제 때 건설된 장성은 대부분 파괴되어 여러 곳에 그 흔적만 조금씩 남아 있을 뿐이다.

진나라 때 건설된 만리장성은 한나라 때 고치고 덧붙여 짓는 작업이 이루어졌어요. 흉노족의 침략이 계속되자 한나라 황제 무제가 만리장성을 짓기 시작한 거예요. 이때 지어진 성은 진나라 때 지은 성에 비해 훨씬 견고하고 영역도 서쪽으로 더 연장되었어요. 그리고 진나라 때는 없었던 지휘소와 봉화대 같은 군사 시설이 보강되었다.

한나라 이후에도 북위와 수, 요, 금나라 등에서도 장성을 복원하고 늘려 지었어요. 오늘날의 만리장성은 대부분 명나라 때 건설된 거예요. 명나라 최초의 황제인 홍무제(주원장)는 왕위에 오른 첫해인 1368년 대대적인 공사를 시작했다.
명나라의 수도가 된 지금의 베이징 인근 바다링을 시작으로 허베이 성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장성을 고치고 늘려 지었습니다. 또한 3000개가 넘는 봉화대와 주요 거점지의 망루, 마차가 달릴 수 있는 넓은 도로도 명나라 때 지어졌다.

만리장성 공사는 이후 여러 황제에 의해 계속되었는데 정덕제 때 다시 대규모 공사가 진행되었어요. 오늘날 우리들이 볼 수 있는 만리장성은 17세기에 완성된 것입니다.
최종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만리장성은 총 길이가 6350km나 됩니다. 물론 총 길이는 2~3중으로 된 장성의 길이를 모두 합한 것이지요. 분명한 것은 만 리가 훨씬 넘는 1만 6000리나 된다는 사실이다.
달에서도 보인다고 할 만큼 거대한 건축물, 만리장성 실제로는 달에서 만리장성을 볼 수는 없다고 한다.
만리장성 중심, 바다링



만리장성은 마차가 달릴 수 있도록 넓게 만든 길 엄청난 규모만큼이나 흥미로운 장소가 많아요. 그중 최고는 오랜 세월 대제국의 수도를 방어하기 위하여 건축한 바다링과 주변 지역을 꼽을 수 있다.
베이징 중심에서 북쪽으로 80km 지점에 있는 바다링은 단순한 장성이 아닌 종합적인 군사 시설이라고 할 수 있어요.

바다링은 주변을 훤히 파악할 수 있는 능선을 따라 벽돌로 지은 장성이에요. 바다링과 주변의 장성은 자연 지형에 따라 높이가 달르다.
접근이 어려운 낭떠러지 같은 곳은 3~4m에 불과하지만 길목과 주요 요충지는 8m가 넘는 곳도 있어요. 성벽의 높이가 이렇게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자연을 최대한 이용했기 때문이에요.

성벽의 폭도 저마다 달라요. 고비 사막이나 북방에 건설된 성벽은 폭이 1~2m에 불과하고 전투를 위한 시설도 많지 않았다.
바다링 지역은 성벽을 모두 2~3중으로 쌓았고, 폭도 3m인 곳에서 10m에 달하는 곳까지 있을 정도로 저마다 다르게 지어졌다.

바다링 주변 성벽이 이토록 견고하고 큰 규모로 지어지게 된 것은 군사적인 중요성 때문이에요. 바다링은 황제가 사는 베이징으로 통하는 주요 길목이기 때문에 어떤 곳보다 튼튼하게 방어해야 했다. 2~3중의 넓은 성벽, 성벽 위의 평탄한 길 역시 군사들을 빠르게 이동시키기 위한 것으로 군사적인 목적이 컸을것이다.
군사 시설물"
중국 자료에 의하면 바다링 부근의 성벽 위에 만들어 놓은 길은 말 5필과 마차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었으며, 간선 도로의 기능도 일부 담당했다고 기록되어 있어요. 여러 차례 바다링에 가서 직접 확인해 보니 이런 기록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말과 마차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도록 성벽 위에 넓게 만들어 놓은 길은 용도에 따라 폭이 달랐다. 특히 능선이 끝나는 지점이나 중앙에는 어김없이 적군을 감시했던 망루와 누각이 세워져 있고, 적군의 침입을 알리는 봉화대가 설치되어 있어요.

만리장성에 관한 기록에 의문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 마리의 말들이 동시에 이동하거나 군사들이 10명씩 동시에 이동할 수 있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100~200m마다 계단이 있어, 마차가 자유롭게 이동했다는 사실에는 의심을 품게 된다.

만리장성에는 망루, 봉화대, 성문이 많지만 바다링 주변에는 특별히 규모가 큰 망루, 봉화대, 성문이 많습니다. 그만큼 이곳이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바다링 지역에 지어진 망루는 대부분 사각형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다른 지역에 비해 규모도 크다.
바다링 주변에 많은 군사들이 머물면서 경계를 했다는 것을 알려졌다. 봉화대도 크고 성문도 다른 곳에 비해 크고 많습니다. 또한 바다링 근처에는 진산링과 무톈위, 쓰마타이 같은 크고 시설이 잘 갖춰진 장성이 모여 있답니다.

북방에서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하여 만든 만리장성은 인류가 건설한 가장 웅장한 인공 구조물입니다. 비록 나라를 지키기 위해 건설한 장성이지만 건설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생각하면 훌륭한 문화유산이라고 말하기에는 아쉬움을 주는 유적지다.
하드리아누스 성벽
만리장성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성벽은 영국 북부를 동서로 이어놓은 하드리아누스 성벽입니다. 만리장성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약 118km에 이르는 하드리아누스 성벽은 건축 시기로 보나 규모로 보나 세계적인 성벽임에 틀림없습니다. 영국을 점령한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픽트 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지었다고 합니다.

처음 하드리아누스 성벽 건설을 시작한 것은 122년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초기 만리장성처럼 흙으로 성을 지었습니다. 영국 중부 지역과 북부 지역의 경계이자 군사 요충지였던 하드리아누스 성벽은 200년경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로마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북쪽에 살던 스코틀랜드인들이 침공해 오자 중요한 기점마다 돌을 이용하여 성벽을 늘려 짓고, 17곳의 요새와 80곳의 성문을 세운 것입니다. 이전에 비해 군사 요충지로서의 역할이 강화된 것이지요.

성벽을 따라 만들어진 17곳의 요새에는 약 1만 명의 군사가 머물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요새를 중심으로 각종 편의 시설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주거공간은 물론이고 식량을 보관하는 창고와 물 저장소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로마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면 어김없이 있는 목욕탕도 건설되는 등 다양한 시설이 갖추어졌답니다.
이찬칼라
우즈베키스탄 서북쪽 히바라는 작은 도시에는 이찬칼라라는 독특한 분위기의 성벽이 있습니다. 이 성벽은 산이나 구릉, 들판에 세워진 만리장성이나 하드리아누스 성벽과 다르게 사막에 있는 성벽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사막에 성벽을 세우고 그 안쪽에 성곽을 지은 성곽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찬칼라 안에는 20개의 모스크(이슬람 예배당), 20개의 마드라사(이슬람교의 학교)를 비롯한 수많은 이슬람 중세 유적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찬칼라는 흙과 나무, 갈대로 만든 완벽한 토성입니다. 망루와 궁전이 있는 곳을 제외한 대부분의 성벽은 높이가 8~10m, 두께가 6m에 달하는데 오직 흙을 다지거나 흙벽돌을 이용하여 완성했습니다.

이찬칼라를 보면 흙을 이용해 지은 성벽이 얼마나 견고한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찬칼라 성벽을 보고 있으면 흙으로 지은 초기 만리장성이나 하드리아누스 성벽이 얼마나 견고했을지 알 수 있답니다. 흙으로 만든 성벽은 마무리 작업이 돌로 지은 성벽보다 깔끔하여 마치 현대적인 공법으로 지은 성벽으로 착각할 정도입니다.
바다링 망루
만리장성은 매우 큰 건축물이라서 다 둘러보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설령 모두 둘러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대부분 현대적인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없어 걸어서 둘러보아야 하니, 최소 2~3년은 걸리겠지요.
만리장성을 볼 때는 만리장성의 주요 요충지를 중심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가장 좋은 장소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바다링입니다.
바다링 망루에 올라 주변을 살펴보면 만리장성의 주요 요충지가 어떤 형태를 갖추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만리장성의 주요 길목이 어떤 곳에 지어졌는지는 기본이고 실제 성벽의 높이, 망루들의 차이점, 무기를 사용하기에 적합하게 만든 건축 기법까지 한눈에 보인답니다. 능선을 따라 동서로 이어진 수십 킬로미터 거리에 장성이 어떤 형태로 지어졌는지를 살펴보기에도 그만입니다.

이곳에서는 말과 군사들이 신속하게 이동했다는 성벽 위 도로도 볼 수 있습니다. 길이 평탄하고 넓지만 망루와 누각, 도로 사이에는 계단이 있어 마차가 과연 달릴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중국(China)
랴오닝(), 지린(), 허베이(), 베이징(), 톈진(), 산시(西), 내몽골, 산시(西), 닝샤(), 간쑤(), 신장(), 산둥(), 허난(), 후베이(), 후난(), 쓰촨(), 칭하이(), 그 밖의 자치주(LiaoningJilinHebeiBeijingTianjinShanxiInner MongoliaShanxiNingxiaGansuXinjiangShandongHenanHubeiHunanSichuanQinghai provincesmunicipalities andautonomous Regions)
N40 25 0.012, E116 4 59.988지도
1987년

(ⅰ), (ⅱ), (ⅲ), (ⅳ), (ⅵ) *참고: 세계유산 등재기준.

중국인들이 ‘만리장성’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방어용 성벽을 유럽인은 ‘중국의 성벽(Wall ofChina)’ 혹은 ‘대성벽(Great Wall)’이라고 부른다. 탁월한 성벽 구축의 역사는 춘추시대(BC722~BC 481)와 전국시대(BC 453~AD 221)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벽 건설은 기원전 408년 위()나라가 진나라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지은 성벽처럼 봉건적인 갈등에서 시작하였다. 중국 중심부에 보존된 유적들에 따르면 기원전 300년 무렵 북방의 침략자에 대항하여 진·조()·연()나라가 축성한 성벽들보다 먼저 축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기원전 220년 통일된 진나라를 건국한 진시황은 기원전 3세기 혹은 그 이전 시대에 구축된 몇몇 성벽을 연결시켜 재건하였다. 이는 내몽골의 오르도스(Ordos)에서부터 만주까지 성벽을 증축하는 것이었다. 그는 기원전 206년 한나라가 들어서기 이전에 이미 최초의 통합 방어체계로서 성벽을 서쪽으로 확장하였다. 이 시대에 만들어진 성벽의 모습은 황허() 유역의 계곡 지대와 란저우()에 여전히 중요한 유적으로 남아 있다.

만리장성은 그 이후 더 확대되었는데, 한()나라의 무제(BC 140~BC 87)는 중국 서쪽의 둔황 지역부터 동쪽의 보하이만()까지 약 6,000㎞에 해당하는 성벽을 더 지었다. 중국 북방 경계지역에서는 몽골족·투르크족을 비롯해 초원 지대 최초의 제국인 흉노 제국의 퉁구스족 등의 침략 위험이 커짐에 따라 이전보다 더욱 견고한 방어책이 필요했던 것이다.

서기 200년 한 왕조가 몰락하자 만리장성은 중세 시대에 접어들었다. 당시 중국은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추가적인 방어책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이상 만리장성을 증축하거나 유지 관리할 필요가 없었다. 몽골족의 멸망으로 오랜 갈등 기간을 끝낸 뒤 명나라는 진시황의 성벽 구축의 전통을 부활하여 5,650㎞에 이르는 성벽을 구축하였다. 북방 민족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한 만리장성은 수비대가 아닌 군이 관할하는 9개의 진() 체제로 관리되었다.

요새는 마을, 산길, 여울을 방어할 수 있도록 전략적으로 지었다. 성벽의 맨 위쪽 길은 군대가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게 하고 연락병의 이동도 가능하게 했다. 2개의 상징적인 기념물이 오늘날까지도 성벽의 양 끝에 서 있다. 동쪽 끝 산하이관()이 첫 번째 성문이고, 1949년 이후에 완전하게 복구된 요새 자위관()이 북서쪽 끝에 있는 마지막 성문이다.

만리장성은 복합적·통시적() 문화재로서 2,000년 동안 오직 전략적 목적으로 유지된 군사 건축물의 특별한 사례이다. 그리고 성벽 건설의 역사는 방어 기술과 정치 상황의 변화에 따라 계속 발전했다. 만리장성의 목적은 외부의 공격을 막아내고, 동시에 침략자들의 관습으로부터 중국인의 문화를 보존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성벽의 축조 과정 중에 백성의 고난이 있었기 때문에 만리장성에 대한 이해는 중국 문학을 이해하는 필수 요소이기도 하다.

명나라 시기의 만리장성은 거대한 공사를 수행하기 위한 대담성뿐 아니라 건축학적으로 완벽성을 지닌 걸작이다. 광대한 대륙의 경치와 어우러진 성벽은 완벽한 건축물의 예이다. 춘추시대 중국인들은 북쪽 변방을 따라 방어벽을 구축하면서 독자적인 건설 공법과 공간 구조를 확립하였다. 또한, 만리장성 공사에 동원하기 위해 인구를 이동시킴으로써 중국 인구의 확산이 두드러졌다. 만리장성은 탁월한 고대 중국 문명에 대한 증거이다. 당시 명나라는 간쑤() 지역에 남아 있는 서한(西) 시대 진지 안에 흙을 다져 채워 넣는 방식으로 축성하였다.

등재기준

기준 (ⅰ) : 명나라 시기에 건축한 만리장성은 대담한 공사 수행의 특징뿐 아니라 건축학적 완벽성을 갖춘 절대적인 걸작이다. 만리장성은 광대한 대륙의 경치와 어우러진 완벽한 건축물의 예이다.

기준 (ⅱ) : 춘추시대 중국인들은 북쪽 국경을 따라 방어벽을 구축하면서 독자적인 건설 공법과 공간 구조를 확립하였다. 중국의 확산은 만리장성 공사에 동원된 인구 이동으로 더욱 두드러졌다.

기준 (ⅲ) : 만리장성은 고대 중국 문명의 탁월한 증거이다. 간쑤 지역에 남아 있는 서한 시대 진지 안에 흙을 다져 채워 넣는 방식으로 건축한 성벽은 명나라의 놀라우면서도 보편성을 지닌 축성술이라는 찬사를 받는다.

기준 (ⅳ) : 만리장성은 복합적이고 통시적인 문화재로서 2,000년 동안 오직 전략적 목적으로 유지된 군사 건축물의 특별한 사례이다. 하지만 성벽 건설의 역사는 방어 기술과 변화하는 정치 상황 속에서 계속 발전했음을 보여 준다.

기준 (ⅵ) : 만리장성은 중국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상징이다. 성벽의 목적은 외부의 공격을 막아내는 동시에 침략자들의 관습으로부터 중국인의 문화를 보존하는 데 있었다. 성벽의 축조 과정에는 중국 백성들의 고난이 내포되어 있고, 그것은 중국 문학사상 중요한 작품인 진림(AD 200년경)의 『음마장성굴행()』이나 두보(, 712~770)의 시, 명나라의 소설 등 작품 속에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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