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21일 목요일

자금성. Forbidden City. 1

자금성"Forbidden City.
자금성은 5세기 이상 중국 최고 권력의 중심지에 있던 황궁으로, 이곳에는 가구와 예술품이 있는 약 10,000개의 방과 잘 조성된 정원이 있다. 이 황궁과 이곳의 유물은 명과 청 시대 중국 문명의 가장 귀중한 증거로 여겨진다.
한자로 ‘자금성[, 쯔진청]’이란 자주색의 금지된 성이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중국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이었던 궁궐, 자금성은 오랫동안 백성들이 드나들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궁궐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황제, 황후, 고위 관리와 궁녀, 내시, 시종, 외국 사절단 정도가 전부였지요.

지금은 자금성을 ‘고궁박물원’이라고 부릅니다. 자그마치 5세기 넘게 백성들의 출입이 금지되었던 황제의 공간은 박물관으로 옷을 갈아입어,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금성은 명나라와 청나라 두 왕조 시대, 거대한 나라 중국의 중심지였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이곳을 세상의 중심이자 신성한 장소로 생각했지요.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넓은 공간에 수많은 건축물이 들어서 있는데, 건축물 하나하나가 중국 고대 사상과 전통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자금성은 과거 중국 왕조가 얼마나 눈부신 문화를 이루고,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는지 잘 보여 주는 문화유산입니다.

지상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궁궐
중국 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천안문[톈안먼] 성벽은 길고 높아 보입니다. 거대한 문을 지나 조금 이동하면 500년 넘게 절대 권력의 중심지였던 거대한 궁궐이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중국 황제들이 살았던 궁궐, 자금성입니다.
자금성에 살았던 중국 황제들은 하늘의 아들이란 의미로 ‘천자()’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명나라 제3대 황제 영락제는 황제가 된 지 4년째인 1406년, 수도를 남쪽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기면서 거대한 궁궐을 짓도록 했습니다. 약 100만 명의 사람들이 14년에 걸쳐 건설한 끝에 모습을 드러낸 자금성은 이전까지의 어떤 궁궐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웅장했습니다.
전체 면적 72만m2, 건축 면적만도 15만m2에 이르는 거대한 건축물이었지요. 길이 960m, 폭 750m인 직사각형의 공간에 수많은 건물이 들어서 있고, 방의 개수도 약 9000개나 될 정도였답니다.

자금성은 도시 속에 지어진 하나의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면적만 보면 마을 정도의 규모이지만 동서남북으로 설치된 폭 50m의 해자(성 주위에 둘러 판 못)와 10m 높이의 성벽을 보면, 완벽한 하나의 도시로 보인답니다.

자금성 건설에는 여러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어요. 자금성의 건축 재료는 여러 곳에서 가져왔는데, 돌은 가까운 팡산 채석장에서, 벽돌은 산둥 지방에서 가져왔어요. 이 두 지역에서 자금성까지는 수십, 수백 킬로미터에 불과하지만 대리석과 나무는 쑤저우와 윈난 성 등 2000km가 넘게 떨어진 곳에서 가져와 건물을 지었다고 해요.
자금성의 방에 대해서도 여러 이야기가 전해 오는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처음 건설될 당시의 소문을 믿고 있다고 해요. 예를 들면 자금성 방의 개수가 9999개라고 믿고 있는 거예요. 실제로 자금성에 있는 방은 모두 8886개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소문을 더 믿고 있답니다.
명, 청조의 궁전 1407년부터.

1644년 명나라 뒤를 이어 들어선 청나라의 열 명의 황제들은 자금성을 정부 소재지로 삼았다. 1912년, 신해혁명에 뒤이어 중국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가 퇴위했고, 자금성은 결국 박물관이 되었으며 많은 보배와 진기한 물품들을 전시하게 되었다(유물들의 일부는 국공내전() 동안 대만으로 옮겨졌다). 중국 공산당의 정책이 완화되면서 자금성은 중국인과 외국인 관광객 모두가 찾는 주요 명소가 되었다.
쯔진청(자금성)은 명·청시대에 500여 년간 24명의 황제가 살았던 궁전이다. 궁전의 규모는 동서 길이가 약 760m이며 남북으로 960m이다. 면적은 72만㎡이며 담장의 길이는 약 4km에 이른다. 8백 여 채의 건축물과 8886칸의 방이 있으며 10m에 이르는 높은 성벽과 50m 너비에 6m 깊이를 가진 거대한 해자로 에워 싸여있다. 명나라의 3대 황제 영락제는 권좌에 오른 지 4년째 되던 1406년 수도를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기고 만리장성 이후 중국 최대의 역사라 불리는 쯔진청 쌓기에 나섰다. 
14년간 100만 명의 인부가 이 공사에 동원됐다. 건축자재는 벽돌 1억만 개와 기와 2억만 개가 사용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기둥에 쓰인 나무는 중국 서부 사천성에서 조달된 것으로 운송에만 4년이 걸렸다. 전각의 받침대와 부조에 쓰인 돌은 50km 떨어진 채석장에서 가져왔다. 돌은 하나의 무게가 200톤에 달하는 것도 있었다. 당시 부역자들은 겨울철 길에 물을 뿌려 빙판을 만든 뒤 돌들을 날랐다. 이런 과정을 거쳐 완성된 쯔진청에는 황제 일가를 제외하고 9천 명의 시녀와 1천 명의 내시도 함께 살았다.
 
성 내부는 정무 처리를 위한 구역(외조)과 황제의 주거 구역(내정)으로 크게 나뉜다. 남쪽에 있는 외조는 쯔진청의 정문인 오문()에서 시작된다. 오문은 3개의 문이 있는데 가운데 문은 황제가 이용했던 문으로 현재까지도 일반인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는다. 북쪽 방향으로 태화문·태화전·중화전·보화전이 한 줄로 늘어서 있고, 동서에 문화전·무영전 등의 전각(殿)이 있다. 높이 35m, 면적 2377㎡의 웅장한 태화전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나라의 주요 의식이 치러지던 곳이다. 태화전의 앞마당에는 병사 9만 명이 모일 수 있는 넓은 뜰이 있다. 
외조의 북쪽으로 내정이 펼쳐진다. 내정의 주요 건축물로는 건청궁·교태전·곤녕궁 등이 있다. 쯔진청은 적의 침입으로 부터 황실을 보호하기 위한 다양한 장치를 마련하였는데 바닥에는 걸을 때 발자국 소리가 나도록 특별하게 고안된 벽돌이 깔려 있다. 땅 밑에서 뚫고 올라올지 모를 침입자를 막기 위해 40여 장의 벽돌을 겹쳐 쌓았다. 침입자가 담을 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쯔진청 내에는 후원을 제외하고는 나무가 전혀 없다. 쯔진청은 중국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뒤 일반에 공개되었으며 중국에서는 '고궁'으로 불린다.


정식 명칭은 ‘고궁박물원(구궁보우위안:)’이지만 ‘자금성’이라는 옛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천제가 사는 자궁()과 같은 금지() 구역'이란 의미로 '자금성(쯔진청:)'이란 이름을 얻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고대 건축물로, 전체 면적이 72만㎡에 이른다. 약 20만 명의 노동력이 동원되었고 15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1420년에 완성됐다. 청조의 마지막 황제 푸이까지 명・청대의 황제 24명이 이곳을 거쳐갔다. 황제가 의식이나 축전 등 대외적인 정무를 책임지고 관리하던 장소인 외조와 황제의 개인적인 공간을 엿볼 수 있는 내정으로 나뉜다.

건축 당시 무려 700여 개의 건축물과 9,999개의 방이 있었으며, 105만 점의 희귀하고 진귀한 문물이 소장되어 있다. 1987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자금성의 정문인 오문(, 우먼)을 지나면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이 있는 외조가 있다. 건청문을 지나 내정으로 들어가면 건청궁, 교태전, 양심전, 동륙궁, 창음각, 어화원, 신무문, 종표관을 볼 수 있다. 중국에 현존하는 3대 구룡벽 중 하나를 자금성에서 볼 수 있다.
성은 1406년부터 1420년에 걸쳐 명나라 영락제(1360~1424년)가 수도를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기면서 지은 건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거대한 궁전은 10미터 높이의 성벽과 52미터 너비의 해자가 둘러싸고 있다. 성벽 안은 중앙의 남북 축을 따라 전조(, 궁정의 바깥채)와 내정()으로 나뉘어 있다.

태화전(殿)은 금란전(殿)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황제가 관료들을 접견하던 정전(殿)으로, 전조 안, 중앙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세 번의 화재를 비롯하여 여러 차례의 재해로 인해 1420년 이후 수없이 다시 태어나야만 했다. 

외부에서 보면 새하얀 대리석 축대 위에 위압적으로 앉아 있는 모습이나 일흔두 개의 나무 기둥으로 받친 노란 기와의 이중 처마 지붕 등 한눈에 확 들어오는 건물이다. 일흔두 개의 나무 기둥 중 열두 개는 건물 앞쪽 지상 높이에서 주랑을 형성하고 있다. 호화로운 황금 실내에는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대들보와 처마, 그리고 정교한 단청이 그야말로 숨이 멎을 정도이다. 
건물 전체는 상징들로 뒤덮여 있는데 특히 황제를 상징하는 용은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천장 한가운데에는 이빨 사이에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이 조각되어 있다. 황제의 옥좌를 둘러싼 여섯 개의 나무 기둥에도 역시 용이 새겨져 있는 것은 물론 옥좌 자체와 모든 들보와 서까래에서도 용을 볼 수 있다.
현존하는 건물은 1695년 청나라 강희제(1654~1722년) 때 세운 것이다. 2,377제곱미터의 면적에 35미터 높이로 솟아 있는 태화전은 자금성 안에서도 가장 큰 건물이며, 중국 최대의 현존하는 목조 건물로 중국 전통 건축의 매우훌륭하다.
중국 베이징[北京]의 쯔진청[紫禁城] 내 와이차오[外朝]에 있는 건물.  
속칭 '진롼뎬[殿]'이라고 한다. 쯔진청[]의 남북으로 뻗은 주축선에서 눈에 띄는 위치에 있다. 1420년에 세워졌고 펑톈뎬[殿]이라 하였다. 1562년에 황지뎬[殿]으로 명칭을 바꿨으며 1645년에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하였다. 여러 차례 중건을 했으며, 현재의 모습은 1695년에 중건된 이후의 형태이다. 
건축 면적은 2377㎡로 쯔진청 내에서 가장 큰 전당이다. 명()과 청() 양 대의 24명의 황제들은 황제즉위식, 혼례, 황후책봉, 출정 외에도 만수절(寿), 설날(), 동지()의 3대 명절 등 성대한 전례를 올렸다. 황제는 이곳에서 문무관원의 아침 문안을 받았고, 왕족과 대신들을 위해 연회를 열기도 하였다.
쯔진청()에서 국가적인 행사와 의식이 치러졌던 공간인 외조()에 있는 건물로, 중화전(殿), 보화전(殿)과 함께 삼대전의 하나. 명 영락() 4년(1406) 건축을 시작하여 영락 18년(1420) 완공되었으며 원래 명칭은 봉천전(殿)으로 길이 95m, 폭 48m, 면적 4,522㎡이었으나, 영락 19년인 1421년 벼락으로 소실되었으며 정통() 원년인 1436년부터 정통 6년인 1441년 기간 중 중건하였고 또한 가정() 36년(1557) 벼락으로 소실되었으며 가정 41년(1562) 중건 및 황극전(殿)으로 개명하였다가 청 순치() 2년(1645)에 태화전으로 개칭하였다. 
강희 18년(1679년)에도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다가 1695~1697 기간 중 중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길이 64m, 폭 37m, 면적 2,368㎡로 원래의 봉천전의 규모에 비해 절반 정도이나 현존하는 중국 최대의 목조건물이다.

태화전은 형태상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건축양식인 3단의 하얀 다이리석위에 지어진 기단이 있는 형태로 다른 외조의 건물들과 다른 특성을 보이고 있으며, 모두 72개의 기둥으로 건물을 받치고 있다. 그중 중앙의 6개 기둥에는 용이 승천하는 문양의 금박 기둥이 황제의 보좌 주변을 장식하고 있으며 나머지 기둥 붉은 옷 칠이 되어 있다. 황제의 보좌는 아홉 마리의 용으로 장식되어 태화전의 중앙 7단의 수미단 위에 놓여 있다.

태화전의 기단 위에는 해시계와 장수를 상징하는 학과 거북 등 다양한 동물상이 놓여 있고, 지붕은 황금 빛 유리 기와로 찬란한 빛을 발휘하고 있으며, 지붕의 네 모서리 끝에는 목재로 지어진 건물의 화재를 우려해 물과 관련된 동물 문장들이 상징적으로 장식되어 있다. 
태화전은 황제의 즉위, 황태자의 탄생 축하, 새해와 동지의 제사의식 및 조서반포 등 국가의 중요한 행사들이 치러진 장소로 사용되었다.
쯔진청과 선양의 황궁은 건축학적 경관을 비롯해 가구, 예술작품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살아 있는 중국의 전통과 수 세기 동안 이어져 온 만주족의 샤머니즘적 관습을 보여 주고 있어 중국의 문명을 잘 나타내는 특별한 유적이다. 

유네스코 등재

1) : 쯔진청과 선양의 황궁은 중국에서의 황실 궁전 건축의 발전을 보여 주는 걸작이다.

2) : 황궁의 건축물 중에서 특히 선양 지역의 궁은 17세기와 18세기 중국의 전통 건축과 궁전 건축의 중요한 분기점임을 보여 준다.

3) : 황궁에는 주변 경치, 건축물, 가구와 예술작품 등이 있는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또 살아 있는 전통과 수 세기 동안 만주족들의 샤머니즘 전통 관습을 보여 주는 중국 문명의 이례적이고 독특한 증거이다.

4) : 황궁은 중국에서 가장 웅장한 건축 유적의 뚜렷한 예이다. 청 왕조 이전의 명나라 원나라뿐만 아니라 만주족의 전통까지 아우르는 웅장함과 17세기, 18세기 중국의 건축 발전의 주요한 증거를 보여 주고 있다.



명, 원, 청, 만주의 전통을 모두 보여 주고 있는 쯔진청과 선양의 황궁은 17세기, 18세기 중국의 건축 발달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톈안먼() 광장 북쪽, 베이징()의 중심부에 있는 쯔진청은 명과 청 시대의 황궁이었다. 쯔진청은 현재 고궁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데, 그 모양은 직사각형이고 면적은 74㏊에 이르는 세계 최대의 궁전이다. 성벽 양쪽에는 문이 있으며, 궁전 내부와 바깥 도시를 동시에 볼 수 있도록 4개의 모서리에 탑이 설치되어 있다.

쯔진청의 건축학적 형식은 특별하다. 배치 형식은 거의 좌우 대칭을 이루며 주종 관계식으로 배치했고, 중요한 건물들은 모두 남북 중앙축에 배치했다. 외조는 타이허뎬(殿), 중허뎬(殿), 바오허뎬(殿)으로 구성되었는데, 이곳은 황제가 권력을 행사하는 곳으로 사용됐다. 내정은 황제의 가족이 생활하던 곳으로 치안칭궁(), 자오타이뎬(殿), 쿤닝궁()으로 구성되었으며, 
남북의 중앙축선을 중심으로 배치했다. 풍수지리를 따라 정문은 남쪽에 자리 잡고 궁의 북쪽에는 인공 언덕을 만들어 궁을 보호하도록 건축되었다. 쯔진청은 고대 중국의 궁전 건축 양식과 예술적 특징을 구체적으로 잘 드러내고 있어 중국뿐 아니라 세계 건축 역사에 남을 만한 것이다.

쯔진청의 건설은 1406년 명 황제 영락제(, 1360~1424)의 명령으로 시작되었다. 1407년에 건축이 시작되어 1420년에 완성되었으며, 건축에 쓰인 돌은 베이징 외곽의 방산에서 채석했다. 겨울철에는 20,000명의 농부들이 거대한 원통형 돌을 나르고, 기술자들은 언 땅에 물을 뿌려 거대한 빙판길을 만들었다. 베이징 중심부까지 수천 마리의 말들이 빙판 쪽으로 돌을 끌어서 날랐다. 
나무를 운반하기는 더 어려웠다. 본 궁전을 건축할 때는 쓰촨() 지역에서 자라는 거대한 나무들을 벌목했는데, 이 나무들은 너무 거대해서 운반하기가 어려웠다. 인부들은 폭우가 쏟아져 나무가 강 쪽으로 쓸려 내려가기만을 기다렸으며, 나무가 떠내려 오면 뱃사공들은 북쪽으로부터 베이징까지 대운하를 따라 이를 운반해 궁전을 지을 장소까지 가지고 갔다.

선양의 황궁은 1625년에 공사를 시작해 1636년에 완성했다. 이곳은 쯔진청보다 크기가 작은데, 쯔진청의 축소형으로 여겨진다. 이 시기의 건축물은 만주족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중앙축선 상에 있는 주 건물인 충정뎬(殿)은 황제가 정치 업무를 위해 참석했던 곳이다. 
뒤쪽에는 황제와 황제의 첩들이 살던 펑황러우(, 불사조탑)와 정녕궁이 있다. 다이젱뎬(殿)은 동쪽 축선 상에 자리 잡고 있다. 건물 앞에는 만주족 왕이 중요한 의식이나 국무를 논의하기 위해 모였던 8개의 부속 왕궁이 있다.

선양의 황궁은 1625년~1626년과 1783년 사이에 건설된 114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원쑤거라는 대규모 도서관이 있는 것으로 보아,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기기 전까지 이 황궁이 중국을 지배했던 왕조의 기틀이었음을 증명해 준다. 
궁은 나중에 쯔진청의 보조 궁이 되었다. 선양의 황궁이 건축학적으로 특별한 점은 청나라 시대의 역사와 중국 북방계 부족, 만주족의 문화적인 전통을 잘 증명하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자료라는 점이다.

천단(天壇)"Temple of Heaven园"
1; 15세기 전반에 지어진 천단(天壇)은 정원 안에 제례용 건축물들이 모여 있는 경건한 장소로, 오래된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전체적인 설계와 개별 건물의 배치를 보면, 천단은 고대 우주론의 핵심인 ‘땅과 하늘’, 즉 ‘인간 세계와 신의 세계’의 관계를 따르고 있는데, 이러한 관계 속에서 황제만이 특별한 역할을 가지고 있음을 상징한다.
천단은 세계 주요 문명들 중 하나인 중국 문명의 발전에서 중요 역할을 한 중국의 우주생성론을 단순하면서도 생생하게 보여 주며, 건축과 경관 설계 방면의 최고 걸작이라 할 수 있다. 천단의 상징적인 배치와 설계는 수 세기 동안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지역의 건축과 설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또한 천단은 중국을 2,000년 이상 통치한 봉건 왕조의 권위를 상징한다.

명나라 영락제() 재위 18년인 1420년에 정원을 둘러싼 담과 함께 천지단()이 지어졌다. 당시 세워진 중앙 건물은 커다란 장방형 전각으로, 그곳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올렸다. 천지단의 남서쪽에는 제궁()이 있으며,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정원에는 소나무들을 심었다.

가정제() 재위 9년인 1530년에는 하늘과 땅에 각각 별도의 제사를 올리기로 정하고, 그에 따라 중앙 건물의 남쪽에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원구단()이 지어졌다.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는 ‘천지단’이라는 이름 또한 이때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단’으로 바뀌었다. 그와 더불어 베이징의 북쪽에는 땅에 제사를 지내는 지단()이, 동쪽에는 태양에 제사 지내는 일단()이, 서쪽에는 달에 제사 지내는 월단()이 각각 세워졌다.

청나라 건륭제() 재위 14년인 1749년에는 원구()가 확장되고, 원래 청색 유리였던 기와는 흰 대리석으로 바뀌었다. 2년 후에는 중앙 건물인 대향전(殿)의 개수에 들어가, 대향전 대신 풍요로운 수확을 기원하는 ‘기년전(殿)’이라는 새 이름을 붙였다. 천단의 전성기이기도 했던 당시 천단공원의 넓이는 273㏊에 이르렀다. 1911년 중화민국 정부가 금지하기 전까지, 490년 동안 명·청 왕조 22명의 황제들이 천단에서 654차례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천단은 1918년 일반 공원으로 개방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천단은 베이징의 치안먼()에서 남동쪽으로 3.5㎞ 떨어진 곳에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네모진 땅 위에 지어져 있는데, 땅의 남쪽 두 모서리는 직각이며 북쪽 모서리는 둥글다. 이러한 땅의 모양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라는 고대 중국인들의 신앙을 상징한다. 아울러 이는 2,000년이 넘도록 중국 황실의 정치적 권력과 권위가 기반을 두어 왔던 우주생성론을 공간적으로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3단으로 된 주요 제례 구조물들이 천단공원 중심을 기점으로 남북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주로 건물 안에서 제사를 올리는 내부 제단 형태이다. 그리고 이 제단들은 동서로 뻗은 외벽에 의해 남쪽 제단인 원구단과 곡물 신을 위한 제단인 북쪽 기곡단()으로 나뉜다. 이 남북 두 제단은 단계교()라 불리는 360m 길이의 벽돌로 된 오르막길로 연결되어 있다.

원구는 천단의 중심으로, 하늘을 의미하는 중앙의 원형이 땅을 의미하는 울타리로 둘러쳐진 사각형 안에 놓여 있는 모습이다. 이는 남북 두 제단을 나누는 외벽의 상징성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원구는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3개의 둥근 단으로 구성된다. 이 단들은 위로 올라가면서 지름이 줄어들며 좁아지고, 각각의 단들은 흰 대리석 난간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여러 개의 입구들이 울타리로 둘러쳐진 사각형 공간으로 이어진다.

난간에 있는 360개의 기둥은 고대 중국인이 사용했던 음력의 1년인 360일을 의미한다. 황제의 왕관은 정중앙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는데, 이는 하늘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하늘과 땅의 중재자인 황제의 역할을 상징하는 것이다. 원구의 북쪽에 있는 황궁우()는 황제가 ‘금욕의 궁’으로 불리는 제궁에 들어가기 전에 제사를 올리는 곳이었다.

북쪽에 있는 기곡단은 풍요로운 수확을 비는 제단이다. 기곡단은 길이 440m, 폭 25m의 긴 회랑에 의해 천단으로 연결되며, 모양과 재질은 천단의 흰 대리석 3층 원형 구조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설계도면으로 보아도 기곡단은 3층으로 된 청색 유리 기와 지붕 건물이 원형 제단 위에 얹혀 있는 모습이다. 황제는 이곳에서 풍작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렸다. 기곡단은 거대한 목골로 지지되며, 내부는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2;면적 283만m2에 이르는 광대한 공원으로, 원래 천단은 제천의식, 즉 오곡풍양()을 위한 기우제와 풍년제 등을 올리기 위해 1420년 명대의 영락제가 건설한 제단이다. 자금성을 중심으로 남쪽에는 천단(), 북쪽에는 지단(), 동쪽에는 일단(), 서쪽에는 월단()이 있어 각각 하늘, 땅, 해, 달에 제사를 지냈는데 천단은 황실 최대의 제단이었다. 이후 낙뢰로 소실되었다가 1896년에 재건되었으며 황제의 상징인 용보다 황후의 상징인 봉황이 더 크게 조각된 것은 당시 서태후의 권력이 반영된 것이라고 한다.


천단은 벽으로 내단()과 외단()이 나뉘는 자의 형태를 띠고 있고 땅을 의미하는 남쪽이 사각형, 하늘을 의미하는 북쪽이 원형의 모습을 한 남방북원() 형세로 남북으로 환구(), 황궁우(), 기년전(殿)이 차례로 배치되어 있으며 북쪽으로 갈수록 지대가 높아진다. 중심은 가장 북쪽에 세워진 기년전으로 천단에서 가장 먼저 지어졌다. 총 3층, 높이 38m, 지름 32.7m의 원형 목조 건축물로 대들보와 마룻대,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황제가 목욕재계를 하던 재궁()과 소리를 반사시킨다는 삼음석(), 소리가 전해진다는 회음벽() 등이 있다. 회음벽은 황궁우의 돌담으로 총 길이 193.2m의 원형 벽인데 동서로 떨어진 위치에서도 벽에 대고 이야기하면 상대방과 대화가 가능하다고 하니 기회가 있다면 실험해 보자.

‘유리기와’라 불리는 푸른 지붕은 하늘을 나타내는데, 명대에는 아래부터 자주색, 황색, 푸른색의 세 가지 색으로 이뤄져 있었다고 한다. 중앙의 4개의 기둥 용정주()는 사계절을, 주위 12개의 기둥은 12개월을, 바깥쪽의 12개 기둥은 12시간을, 내외 처마 기둥 24개는 24절기를 각각 상징한다. 

남쪽에는 한백옥()으로 된 3층의 기단()인 원구가 있는데 황제가 제사를 올리던 곳이다. 제사를 올릴 때 기단 북쪽의 황궁우에 선대 황제의 위패를 안치했다. 원구의 계단과 포석, 난간의 수는 9의 배수로 되어 있다.

유네스코 등재

1) : 천단은 세계 주요 문명 가운데 하나인 중국 문명의 발전에 중요 역할을 한 우주생성론을 단순하면서도 생생하게 보여 주는, 건축과 경관 설계 방면의 최고 걸작이라 할 수 있다.
2) : 천단의 상징적인 배치와 설계는 수세기에 걸쳐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지역의 건축과 설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3) : 천단의 설계와 배치는 중국을 2,000년 이상 통치한 봉건 왕조의 권위를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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