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22일 금요일

은허 Yinxu.

은허  Yinxu.

갑골문, 은허의 세계로"
B.C. 1500년경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은 후기 문화의 대표적인 유적. 1899년 홍수 이후 갑골이 출토된 안양현 샤오툰(지방을 발굴한 결과 청동기, 회도, 수십 명을 순장한 왕묘 등이 발견되면서 이곳이 청동기 문명의 전성기를 누린 유적임이 확인되었다. 

유적은 은나라 후기 200년의 수도였음이 차츰 밝혀졌고, 이에 따라 은나라가 전설 시대에서 역사 시대로 들어오게 되었다.
중국 허난성[河南省] 안양현[安陽縣] 샤오툰촌[小屯村]에 있는 고대 상(商) 나라 수도 유적으로 2006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북경에서 남쪽으로 500㎞쯤 떨어져 있는 은허(殷墟)는 중국 고대 상(商) 왕조 후기(BC 1300~1046)의 수도로, 중국 청동기 시대 전성기의 초기 문화와 기술, 과학의 황금기를 보여 준다. 

이 유적지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자 체계로 밝혀진 갑골문자는 고대 신앙과 사회 체계의 발전상을 증언하는 귀중한 유산이다.

하남성 안양현 소둔촌에서 하천이 범람하여 갑골의 파편이 대량으로 발굴되었다. 이후 본격적인 발굴이 진행되어 궁전과 거주 유적, 청동기와 도자기 등 상나라의 후기 도읍이었던 은의 유적, 은허가 발굴되었다. 이전까지 사람들은 상나라의 실재를 의심했었으나 발굴된 은허가 그 의심을 풀어준 것이다.

유적에서 파낸 귀갑()과 우골()이, 용골(:학질의 묘약)로서 베이징[]의 약방에서 팔리고 있었는데, 1899년 이것을 사들인 유악()이 갑골문자가 새겨진 것을 발견하였고, 고대사학자들의 주의를 끌어 뤄전위[왕궈웨이[] 등이 연구하여, 상() 왕조의 점술사가 왕가를 위하여 점을 친 점괘의 기록이라는 것을 밝혀내었다. 

80채 이상 규모의 궁전 초석과 제단을 포함하여 후대 중국건축의 원형이 된 수많은 왕족의 무덤과 궁전들이 발견되었으며, 상 왕조의 왕족 푸하오(婦好)의 무덤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이곳서 발굴된 수많은 정교한 매장품은 고도로 발달한 상나라의 기술을 확인시켜 준다. 


본문

은허는 기원전 1300년경에 상나라 임금 반경()은 수도를 은허로 옮기면서 웅장한 도시를 지었다. 이때부터 255년 동안 8세대 12명의 왕들이 통치하며 상나라는 청동기 시대의 전성기를 누렸고, 은허는 중국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의 중심지였다. 
기원전 1046년경 상 왕조의 마지막 왕인 주왕()이 주()나라 무왕()에 패하면서 은()은 버려지고 도시는 폐허가 되었다. 이로써 역사 기록에 은의 이름이 은허(은의 폐허)가 된 것이다.

은허 가운데 거주유적은 주로 샤오툰촌 북방 위안수이강[] 연변 대지()에 나타난다. 토단()을 쌓아올린 위에 궁전초석과 토단 주위에는 많은 구덩이식[] 거주유적이 있다. 
종묘(), 제왕()·왕족의 주거는 지상에 있고, 백성은 지하식인 수혈에 있었다. 샤오툰 교외에서는 도기()·골기()·동기()를 만든 장인의 공장과 주거지가 많이 발견되었다. 
진한() 시대(BC 221~AD 220)에는 은허에 대한 언급이 역사책에 자주 등장한다. 송원() 시대(10세기~14세기)에는 금석학이 유행했는데, 샤오툰촌() 주변에서 청동기들이 자주 발견되면서 학자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은허는 상 왕조 후기의 고대 수도로, 중국 청동기 시대 전성기의 유적들이 남아 있다. 기원전 17세기경에 중국 민족의 한 종족인 상족()은 하() 왕조를 무너뜨리고 중국 역사상 두 번째 봉건 왕조를 세웠다.

은허
은허상나라의 수도.
왕조는 동쪽으로 황해 바다, 서쪽으로 지금의 쓰촨성(), 북쪽으로 랴오허강() 유역, 남쪽으로 둥팅호()까지 세력권을 형성했다. 상나라는 청동기 시대 동안 동아시아의 강력한 국가였다.
샤오툰촌은 상 왕조의 열두 번째 왕의 거주지인 샹(Xiang)이라 여겨진다. 1899년에 청나라 말기의 금석학자 왕이룽()이 갑골에 새겨진 비문을 발견하고 이것을 상나라 시대에 사용한 언어임을 밝혀냈다. 
이후 많은 학자들이 연구 고증한 결과, 갑골문자가 발견된 안양()의 샤오툰촌이 중국 고전에 기록된 ‘은허’라는 것이 밝혀졌다.

1928년~1937년에 중앙연구원()에서 대대적인 발굴을 시도하여 은허의 궁전과 조상의 성지, 왕족의 무덤 등 수많은 문화 유적을 발견했다. 이로써 은허는 역사 기록에 남아 있던 중국 최초의 고대 수도라는 지위를 굳건히 지키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발굴 작업이 마무리되었으며, 1995년에 안양시에서는 은허 관리청을 설립해 은허의 보존과 관리를 책임지고 있다.

유네스코 등재.

1) : 은허의 유물들은 인간의 예술, 과학, 기술의 결정체이다. 은허는 상 왕조 후반의 예술, 과학, 기술의 위대한 성취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며, 여기서 발굴된 유물들이 전형적인 예가 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 문자 중 하나인 갑골문자가 체계적인 기록으로 적혀 있는데, 이것은 기원전 1300년보다 더 빠른 시기이다. 
갑골문자 기록에 의하면 상나라 사람들은 이미 양력, 음력과 달과 별의 지형도를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었으며, 상나라 말기에는 과학과 기술의 진보가 상당히 이루어져 있었다.

2) : 은허에 나타난 상나라의 후기 문화는 중국 문화의 형성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갑골문자 체계는 수천 년 동안 중국 문명의 발전과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은허의 청동기 문화는 상나라 말기의 미적 수준과 사회적 관습을 반영한 것이며, 중국 고대 청동기 문화에서 최고의 발전 수준을 보여 준다. 상 왕조의 제례 체계는 조상 숭배를 바탕으로 청동 제기를 사용하는데, 이는 주변 문화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3) : 은허에 있는 궁전, 조상의 성지, 왕족의 무덤을 포함한 건축물들은 중국 역사 초기의 궁전과 능묘 건축의 걸작이다. 80채 규모의 건물 초석은 궁전, 종묘, 제단의 3가지 형태로 뚜렷하게 나눌 수 있다. 
이러한 배치는 후대 중국 궁전 건축의 초기 형태라 할 수 있는데, 앞에는 중앙 건물, 뒤에는 침실들, 왼쪽에는 종묘, 오른쪽에는 제단이 배치된다는 특징을 지닌다. 은허에 있는 왕족의 무덤은 중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완전하게 보존되어 왔다.

4) : 은허에 남아 있는 풍부한 유물들은 역사 속에서 사라진 문화 전통의 증거이다. 은허는 상 왕조 후기의 수도였으며, 뛰어난 청동기 문화를 창조했다. 역사가 흐르고 사회가 발전하면서 점성술, 
고대의 매장 의식, 제물을 바치는 제사 의식, 그 외 상 왕조가 광범위하게 이용했던 의식들은 존재 기반을 잃으며 점점 사라졌다. 은허를 발견하고 발굴하는 것은 이런 잃어버린 문화 전통의 존재에 대한 증거를 제공한다.
5) : 지난 80년에 걸친 은허에서의 고고학적 발굴 작업은 초기 중국의 언어, 고대 신앙, 사회 체계, 중요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신빙성 있는 증거물을 제공했으며, 상 왕조 후기의 풍부하고 개성 있는 역사를 밝혀냈다.


최고()의 왕조,  수도 은허"
은허의 청동기는 발달의 최고정점에 있던 것으로서, 청동기 유래의 경로를 알지 못하였으나, 1950년 이후 중국전토에 걸친 발굴이 진행되면서, 각지에 상()왕조 시대 유적이 발견되었다. 

1915년 뤄전위는 샤오툰촌을 방문하여, 갑골 외에도 청동기·옥기 등을 입수하였다. 1928년 중화민국 중앙연구원 역사어연구소가 둥쭤빈[리지[]를 중심으로 은허 발굴을 실시하였다. 이로부터 1936년까지 15회 대발굴을 비롯하여 1950~1962년에 걸쳐 발굴을 실시하였으나, 아직도 넓은 유적 전체에 미치지 못하고 그 성과도 완전히 발표되지 않았다.

위안수이강 북쪽의 허우자좡[]·다쓰쿵촌[]에는 상() 왕조의 왕묘로 보이는 다수의 거대한 묘가, 지하 10m 이상 깊은 곳에 만들어졌다. 왕·왕족의 널[]은 다수의 시종과 비첩()의 순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묘실에는 청동기·옥기 등의 보물이 있었는데, 그 호화로움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고, 말·원숭이·코끼리 등의 동물 전용 갱()이 있는 것도 있다. 아마도 생전에 기른 동물까지 순장된 듯하며, 죽은 뒤에도 살아 있을 때와 똑같이 생활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결과일 것이다. 

상대의 청동기는 과()와 같은 무기보다는, 오히려 신을 받들어 모시기 위한 주기()·식기·악기()가 주류를 이루었다. 조상을 상징하는 괴수() 무늬가 전면에 빈틈없이 새겨졌는데, 그 정교함은 전세계에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다. 왕·귀족들은 4두()마차를 타고 다녔으며, 또한 전쟁은 차전()이었다. 

무관촌()의 대묘에는 네 마리의 말뼈를 수반한 마차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궁전 옆의 수혈 등에서는 대량의 귀갑·우골이 나왔는데, 점술사가 왕조의 조상에 대한 제사의식을 점친 문장이 새겨져 있다. 갑골문자의 해독과 왕묘의 유물에서 상() 왕조 왕후·귀족의 생활상을 대체로 상상할 수 있다. 


허난성 정저우[]의 유적에서 나온 청동기 유물 가운데에는, 안양의 왕묘에서 나온 것보다 원시적인 것이 포함되어 있어, 청동기 발달경로가 판명되었다. 은허 유적은 규모가 크고, 출토된 호화로운 청동기 등의 미술품이 우수하기 때문에, 메소포타미아·이집트의 신전과 더불어 고대문화의 보고이다. 2006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은허()는 실제 발굴조사를 통해 중국 최고의 왕조로 확인된 은 왕조의 수도다. 하남성 안양시 소둔촌 유적지에서 출토된 유물과 유적은, 은허가 은을 중흥시켰던 반경()에서부터 마지막 주() 왕에 이를 때까지 은 왕조 후대의 수도였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은 왕조 이전에 하() 왕조라는 왕조가 존재했다고 하지만, 은허처럼 유적이 발견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존재가 확인된 왕조 중에서 은 왕조가 중국 최고의 왕조다.

탕() 왕에 의해 처음 시작된 은 왕조는 B.C. 16세기~B.C. 11세기에 번영을 누리며, 현재 하남성을 중심으로 황하 하류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했다. 최초 수도가 어딘지는 확실치 않지만, 몇 차례 수도를 옮기는 과정에서 최후의 수도가 바로 은허였다.

은허는 흔히 상()이라고도 불리는데, B.C. 14세기 말에서 B.C. 13세기 초 사이에 재위했던 반경()에 의해 세워졌다. 그후 B.C. 1027년, 주() 왕 시대에 주() 나라의 무() 왕에게 멸망당할 때까지 은허는 수도의 기능을 담당했다.

은허는 1899년 하남성 안양시 소둔촌에서 발견되어, 1928~1937년에 걸쳐 중앙연구원 역사언어연구소의 이제()와 동작빈() 팀에 의해 발굴조사되었다. 그후 중일전쟁의 발발로 잠시 중단되었다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후 중국과학원에 의해 조사가 재개되어 현재도 조사가 계속되고 있다.

은허 유적은 약 24평방킬로미터 내에 흩어져 있는 유적군을 가리킨다. 소둔촌에서는 왕궁과 사원 등 정치와 종교 시설의 흔적이, 소둔촌 북쪽과 남서쪽에 있는 강촌()에서는 집단으로 조성된 왕들의 묘가 12기나 발견되었다. 둘레가 20미터 이상 되는 대규모 묘도 존재하는데, 청동기 등의 많은 부장품과 다수의 순장자도 함께 묻혀 있어서 역대 왕들의 묘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소둔촌의 'H127갱'에서는 1만 7,096개의 갑골이 발견되어 은의 역사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가 되었다. 거북 껍질이나 동물의 뼈에 새겨진 갑골문자가 한자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은허에는 청동으로 만든 무기와 제기, 백자 등의 유물들이 함께 매장되어 있었는데, 이는 고고학에서 상당히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특히 청동기() 기술이 뛰어났으며, 동기()에 새겨진 문양을 통해 그 정교함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청동기는 특권계급의 전유물로 일반 시민은 사용할 수 없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농사 도구로는 석기가 사용되었으며, 청동기는 제사나 의식 등에 사용되었다.

왕조의 역사

B.C. 5000년 무렵, 화북지방에서는 황하를 중심으로 하는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것이 바로 황하 문명의 시작이었다. 황하 문명은 시기적으로 크게 두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시기적으로 앞선 쪽을 앙소문화(, B.C. 5000~B.C. 3000년), 뒤이어 나타난 쪽을 용산문화(, B.C. 2000~B.C. 1500년)라고 부른다.

앙소문화라는 명칭은 하남성 앙소촌에서 처음 유물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붙은 것이다. 앙소문화의 분포 지역은 황하 중류 지역으로, 주로 지금의 하남성, 산서성, 감숙성 부근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앙소문화와 용산문화를 거쳐 중국 각지에 도시국가가 생겨나고, 이런 도시국가들이 연합해서 은이 탄생되었던 것이다.

은 시대에는 한 곳에 정착해서 농업에 종사하는 정주() 농경이 뿌리를 내리고, 인근 지역이나 유목민과의 교역도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 
용산문화라는 명칭은 산동성 용산진()에서 처음 유물이 발견된 것에서 유래했다. 분포 지역은 황하 하류 지역에서 점차 세력을 넓혀, 요동 반도를 지나 장강 유역으로까지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은은 일종의 신권() 국가로서 왕은 상제(), 즉 하늘을 섬기는 최고 실력자였다. 당시 왕들은 점을 쳐서 하늘의 뜻을 살핀 후에 정치를 했다.

주() 시대에는 은처럼 신권정치로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에서 벗어나 제후 중심의 봉건제도를 확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천은 신을 정점으로 한 사회에서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로 변화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씨족제도는 왕실이나 귀족에 대한 숭배에서 점차 조상과 자연신을 숭배로 변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왕위 계승도 형제 상속에서 친자 상속으로 바뀌게 되었다. 



우리나라(한국)에는기원전 1122년 : 은의 기자()가 조선에 들어왔다고 전해짐.
기원전 1000년경 : 청동기 문화 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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