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19일 화요일

서울의 4대문.4소문.

사대문 [四大門]

조선 건국 초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수도인 한양을 지키기 위해 세운 성곽의 문이다. 한양의 동서남북에는 4개의 커다란 성문인 4대문(四大門)을 두었고, 4대문의 사이사이에는 작은 성문인 4소문(四小門)을 두었다. 

4대문은 세워진 방위에 따라 '동대문, 서대문, 남대문, 북대문'으로 불리나, 정식 이름은 유교 사상의 인의예지(仁義禮智)에 근거를 두어 지어졌다. 동대문은 인(仁)을 일으키는 문이라 하여 '흥인지문(興仁之門)', 서대문은 의(義)를 돈독히 하는 문이라 하여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은 예(禮)를 숭상하는 문이라 하여 '숭례문(崇禮門)'이라 하였다. 그러나 북대문의 이름은 지(智)를 넣어 '숙지문'이라 하지 않고 청(淸)을 넣어서 '숙청문'이라고 하였으며, 이후 '숙정문(肅靖門)'이 되었다.

4소문은 4대문 사이에 있는 작은 성문이다. 서울 도성(都城) 동북쪽의 '동소문'은 '혜화문(惠化門)'으로, 서남쪽의 '서소문'은 '소덕문(昭德門)'으로, 동남쪽의 '남소문'은 '광희문(光熙門)'으로, 서북쪽의 '북소문'은 '창의문(彰義門)'으로 불린다. 

서대문(돈의문): 일제가 1915년 도로를 확장한다면서 헐어버려 4대문 중 현재 유일하게 남아있지 않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에 있었던 조선시대의 성문.
서울 성곽의 4대문() 가운데 서쪽 큰 문으로 일명 ‘서대문(西)’이라고도 한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일제의 도시 계획에 따른 도로 확장을 핑계로 철거되어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다만 원래 자리가 경희궁터에서 독립문 쪽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쯤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890년대 말쯤에 찍은 사진을 통해 대략적인 모습을 알 수 있다. 즉 견고하게 쌓은 돌축대 한 가운데에 위쪽을 반원형으로 두른 홍예문()을 큼지막하게 내어 도성의 출입을 가능하게 하였다. 축대 위에는 단층 우진각지붕의 초루()를 세우고 둘레에 낮은 담을 설치하였다.
건물의 평면 규모나 구조상의 특징은 알 수 없다. 다만 지붕 위에 마루를 양성하고 취두(: 망새)·용두()·잡상()·선인 등을 배열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처음 세워진 것은 1396년(태조 5)으로 도성()의 제2차 공사가 끝나고 8문()이 완성되었던 때이다.
태조 때인 1413년에 폐쇄되어 사용되지 않고 대신 태종 때에 서전문(西)을 새로 지어 도성의 출입문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세종 때 다시 서전문을 헐고 그 남쪽 마루에 새 성문을 쌓고 돈의문이라 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없으나, 1711년(숙종 37) 9월에 고쳐 지으라는 왕명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숙종 때 고쳐 지어졌던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서울 서북쪽의 관문()으로 사용된 중요한 사적인데, 일본인들에 의해 함부로 철거된 것은 애석한 일이다.

남대문(숭례문): 국보 제1호.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목조 건물 중에 가장 오래되었다. 2008년 1월 화재로 큰 피해를 입었으며, 2013년 5월 4일 복원되었다.

조선시대 사소문()의 하나.
속칭 서소문(西)이라고 한다. 숭례문()과 돈의문() 사이, 즉 지금 서소문동 큰길에 위치하였던 서남간문으로 일반적인 통행로가 되었고, 광희문()과 함께 시신()을 성밖으로 운반하던 통로 구실을 하였다.
이 문의 창건 당시인 1396년(태조 5) 9월에 다른 성문과 함께 지어졌을 때는 소덕문()이라 하였다. 이 부근은 지대가 낮아서 태조 때 토성을 쌓았던 곳이며, 1422년(세종 4)에 이것을 석성()으로 개축한 것으로 미루어 소덕문으로 고쳐서 지었으리라 믿어지나 확실한 기록이 없다.
《경성부사 》에 1472년(성종 3)에 예종비() 한씨()의 시호를 소덕왕후()라 한 까닭에 이것을 피하여 문 이름을 소의문으로 고쳤다고 기록되어 있어서 1472년에 ‘소의’로 고쳤다는 것이 통설로 되다시피 되었다.
1738년(영조 14)에 문루()를 건축하였는데, 석문을 개축할 때 왕이 문명()을 고치라는 명을 내리고, 1744년에 문루를 건축한 뒤 문명을 소의로 고쳤다는 것이 《영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문 이름이 소의로 고쳐진 것은 1472년이 아니라 영조 때였음이 확실하다.
남아 있는 사진을 통하여 그 모습을 대략이나마 살펴보면, 광희문과 마찬가지로 성보다 약간 높게 석축()을 쌓고 가운데 홍예문() 하나를 내어 통로를 마련하였다. 석축 위 4면에 나지막하게 벽돌로 쌓은 담을 두르고 양옆에 출입문을 세워 문루로 드나들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로 구조의 그 상세함은 알 수 없으나 단층 겹처마 팔작지붕의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붕 위 용마루에는 용두(), 내림마루에는 여러 상()을 각각 장식하여 건물에 위엄을 더해주고 있다.
1974년에 복원된 광희문과 비슷한 형식이었을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문은 1914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하여 그 부근의 성곽과 함께 완전히 철거되어 그 형태는 사진으로 겨우 전해지고 있다.

북대문(숙정문)사람들이 출입하기 위해 지은 것이 아니라, 동서남북에 하나씩 두는 4대문의 형식을 갖추기 위해 지어진 것으로 평소에는 닫아두고 비상시에 개방되었다. 

서울성곽을 이루는 사대문() 가운데 하나로, 도성의 북쪽 대문이다. 1396년(태조 5) 9월 도성의 나머지 삼대문과 사소문()이 준공될 때 함께 세워졌다. 원래 이름은 숙청문()으로, 도성 북쪽에 있는 대문이라 하여 북대문·북문 등으로도 부른다.

1413년 풍수지리학자 최양선()이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상소를 올린 뒤에는 문을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 이후 숙청문은 음양오행 가운데 물을 상징하는 음()에 해당하는 까닭에 나라에 가뭄이 들 때는 기우()를 위해 열고, 비가 많이 내리면 닫았다고 한다.

숙청문이 숙정문으로 바뀐 시기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숙정문이 처음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1523년(중종 18)이다. 숙정문 외에 북정문()이란 표현도 나오는데, 숙청문과 숙정문이 혼용되다가 뒤에 자연스럽게 숙정문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1504년(연산군 10)에 연산군이 원래 있던 자리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옮기라고 명령한 기록이 보이는데, 실제로 문을 옮겼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지금의 숙정문은 1976년에 복원한 것이다.

도성 북문이지만, 서울성곽의 나머지 문과는 달리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는 험준한 산악지역에 위치해 실질적인 성문 기능은 하지 않았다. 1968년 1·21사태 이후 청와대 경비를 위해 일반인의 접근을 금지하다가, 2006년 4월부터 서쪽 성곽 0.5㎞, 북쪽의 진입로 0.6㎞ 구간과 함께 다시 일반에 개방하기로 하였다. 1963년 1월 21일 서울성곽에 포함되어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산 2-1번지(북악산 동쪽 고갯마루)에 있다.

동대문(흥인지문): 보물 제1호. 서울 4대문ㆍ4소문 중 유일하게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큰 성문 밖에 원형으로 쌓은 작은 성 옹성(甕城)을 갖추고 있다.

서울 4대문중 하나로 보물 제1호이다.

서울의 성곽은 옛날 중요한 국가시설이 있는 한성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도성(都城)으로, 동대문은 성곽 8개의 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이다. 

정식명칭은 흥인지문(興仁之門)으로, 조선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가 단종 원년(1453)에 고쳐 지었고, 지금 있는 문은 고종 6년(1869)에 새로 지은 것이다.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그 형태가 가늘고 약하며 지나치게 장식한 부분이 많아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바깥쪽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반원 모양의 옹성(甕城)을 쌓았는데, 흥인지문은 도성의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성문의 앞을 가리어 빙둘러 축조한 성문을 방어하기 위한 성)을 갖추고 있다.

동소문(혜화문): 서울 도성의 동북 방향 관문. 처음에는 '홍화문(弘化門)'으로 불렀으나, 창경궁의 동쪽 문과 이름이 같아서 중종 때 '혜화문'으로 이름이 고쳐졌다. 

서울 도성에 딸린 8문 중의 하나로서 서울 도성 정동()쪽에 있으며 원래의 이름은 흥인지문()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동대문이라고 부른다. 1396년(태조 5)에 건립되고 1453년(단종 1)에 중수되었으며, 1869년(고종 6)에 이르러 이를 전적으로 개축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화강암의 무사석()으로 홍예문()을 축조하고 그 위에 중층의 문루를 세웠으며 문 밖으로는 반달 모양의 옹성()을 둘리고 있으나 이것도 1869년(고종 6)에 다시 개축한 것이다. 문루의 아래층은 주위 4면을 모두 개방하였으나 위층은 기둥 사이를 모두 창문과 같이 네모나게 구획하여 각각 한 짝 열개의 판문()을 달았다. 중층()의 우진각 지붕이며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부는 중앙에 고주()를 일렬로 배치하였으며 위·아래층의 대량()들은 모두 이 고주에서 양분되어 여기에 맞끼워져 연결되는 맞보로 되었다. 위층에는 마루를 깔았고 아래층에는 가운데 칸에만 마루를 깔았는데 이는 그 아래에 위치한 홍예문의 윗 부분을 가리는 구실을 한다.  위층 천장은 이 문루가 다포집 계통에 속하는 건축이면서도 성문이라는 특수한 건물이기 때문에 지붕 가구재()를 전부 노출한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공포()는 아래층이 내삼출목() 외이출목()이고 위층은 내외삼출목()인데 쇠서[]의 형태는 매우 섬약하고 번잡하게 장식화된 부분이 많으며 조선 후기의 쇠퇴된 수법이 곳곳에 엿보인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서소문(소의문): 서울 도성의 서남 방향 관문. 처음에는 '소덕문()'으로 불렀으나 이후 '소의문(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서대문과 남대문 사이에 있었으며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해 철거되었다. 과거 서소문 밖에서 주로 사형을 집행하였다.

정의

조선시대 사소문()의 하나.
속칭 서소문(西)이라고 한다. 숭례문()과 돈의문() 사이, 즉 지금 서소문동 큰길에 위치하였던 서남간문으로 일반적인 통행로가 되었고, 광희문()과 함께 시신()을 성밖으로 운반하던 통로 구실을 하였다.
창건 당시인 1396년(태조 5) 9월에 다른 성문과 함께 지어졌을 때는 소덕문()이라 하였다. 이 부근은 지대가 낮아서 태조 때 토성을 쌓았던 곳이며, 1422년(세종 4)에 이것을 석성()으로 개축한 것으로 미루어 소덕문으로 고쳐서 지었으리라 믿어지나 확실한 기록이 없다.
《경성부사 》 1472년(성종 3)에 예종비() 한씨()의 시호를 소덕왕후()라 한 까닭에 이것을 피하여 문 이름을 소의문으로 고쳤다고 기록되어 있어서 1472년에 ‘소의’로 고쳤다는 것이 통설로 되다시피 되었다.
1738년(영조 14)에 문루()를 건축하였는데, 석문을 개축할 때 왕이 문명()을 고치라는 명을 내리고, 1744년에 문루를 건축한 뒤 문명을 소의로 고쳤다는 것이 《영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문 이름이 소의로 고쳐진 것은 1472년이 아니라 영조 때였음이 확실하다.
남아 있는 사진을 통하여 그 모습을 대략이나마 살펴보면, 광희문과 마찬가지로 성보다 약간 높게 석축()을 쌓고 가운데 홍예문() 하나를 내어 통로를 마련하였다. 석축 위 4면에 나지막하게 벽돌로 쌓은 담을 두르고 양옆에 출입문을 세워 문루로 드나들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로 구조의 그 상세함은 알 수 없으나 단층 겹처마 팔작지붕의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붕 위 용마루에는 용두(), 내림마루에는 여러 상()을 각각 장식하여 건물에 위엄을 더해주고 있다.
1974년에 복원된 광희문과 비슷한 형식이었을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문은 1914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하여 그 부근의 성곽과 함께 완전히 철거되어 그 형태는 사진으로 겨우 전해지고 있다.

동소문(혜화문): 서울 도성의 동북 방향 관문. 처음에는 '홍화문(弘化門)'으로 불렀으나, 창경궁의 동쪽 문과 이름이 같아서 중종 때 '혜화문'으로 이름이 고쳐졌다.
동소문()이라고도 한다. 도성에는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이 설치되었는데, 이 문은 동문과 북문 사이에 세워졌다. 처음에는 문 이름을 홍화문()이라 하였다가 1483년(성종 4) 새로 창건한 창경궁의 동문을 홍화()라고 정함에 따라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1511년(중종 6) 혜화로 고쳤다. 

1684년(숙종 10) 문루()를 새로 지은 후 한말까지 보존되어 오다가 1928년 문루가 퇴락하였으므로 이를 헐어버리고 홍예()만 남겨 두었는데, 일제는 혜화동과 돈암동 사이의 전차길을 내면서 이마저 헐어버려 그 형태도 찾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당시 북문(북대문)은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이 문은 양주·포천 방면으로 통하는 중요한 출입구 구실을 하였다. 1975년부터 시작되어 1980년에 완공된 서울성곽의 일부로 1992년에 복원하였다.

남소문(광희문): 도성의 동남 방향 관문. 남산 일대의 물이 빠져나가는 곳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수구문(水口門)'으로 불렸다. 또한 도성 안의 시체는 주로 서소문(소의문)과 광희문 밖으로 내보냈기 때문에 '시구문(屍口門)'으로 불리기도 했다. 현재의 광희문은 6.25 전쟁 때 파괴된 것을 복원한 것으로, 도로를 개통하면서 원래 위치보다 약간 남쪽으로 옮겨졌다.
시구문() ·수구문()이라고도 하였으며 서소문(西)과 함께 시신()을 내보내던 문이다.1396년(태조 5) 도성을 축조할 때 창건되었으며, 1422년(세종 4) 개축된 것으로 추측된다. 《숙종실록()》에 1711년(숙종 37) 민진후()의 건의로 금위영()으로 하여금 개축하게 하고, 문루()는 목재를 구하기가 어려우므로 후에 개축하기로 하였다는 기사가 있으며, 1719년 문루를 세워서 광희문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그 후 1975년 도성복원공사의 일환으로 석문을 수리하고 문루를 재건하였다.

북소문(창의문): 도성의 서북 방향 관문. 현재 서울 도성의 4소문 가운데 온전하게 남아있는 유일한 문으로, '자하문(紫霞門)'이라고도 한다.
북문() 또는 자하문()으로도 불린다. 1396년(태조 5) 서울 성곽을 쌓을 때 세운 사소문()의 하나로 창건되어 창의문이란 문명()을 얻었다. 북한() ·양주() 방면으로 통하는 교통로였으나 1416년(태종 16) 풍수지리설을 주장하는 자들이 이 곳의 통행이 왕조에 불리하다 하여 폐문()한 채 일반의 통행이 금지되었다가 1506년(중종 1)에 다시 열어놓았다. 1623년 인조반정() 때는 능양군(:인조)을 비롯한 의군()들이 이 문을 부수고 궁 안에 들어가 반정에 성공한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문루()는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740년(영조 16) 다시 세우고 다락 안에 인조반정 공신들의 이름을 판에 새겨 걸었다. 1958년 크게 보수하였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의 우진각 기와지붕으로 서울 사소문 중에서 유일하게 완전히 남아 있는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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