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22일 금요일

天安門 , 천안문.

門, 천안문.

명나라 때인 1417년(영락 15)에 착공되어 1420년(영락 18년)에 완공되었다. 당시에는 지붕에 황색기와를 얹고 처마 귀퉁이가 하늘로 치켜든 패루()였으며 이름도 승천문()이었다. 1457년에 화재로 훼손된 것을 1465년에 재건하면서 정면 폭이 9칸인 문루식() 패루로 만들었다. 이 문루식 패루는 1644년 이자성()이 이끈 농민봉기군이 베이징을 공격할 때 소실되었으며, 1651년에 다시 복구되었다. 이 과정에서 목조 패루에서 성루()로 증축하고 승천문을 톈안먼[]이라고 변경하였다.   

문 앞의 대광장 주위에는 중앙관청이 모여 있고, 국가적 대행사 때에는 반드시 이 문이 사용되었다. 1919년의 5 ·4운동 이래 중국인들의 시위집회에 많이 이용되었고, 1949년의 중국정권 수립식도 여기서 행하여졌으며, 매년 5월 1일 노동절 비롯한 국경일의 의식도 이곳에서 행한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문 중앙에 마오쩌둥[]의 대형 초상화가 걸렸고, 양옆에는 '중화인민공화국만세()'과 '세계인민대단결만세()'라고 새겨진 현판이 걸려 있다. 광장 중앙의 남쪽에는 높이 38m의 화강석으로 된 인민 영웅기념비가 있다.

성루는 수미좌(), 성대(), 성루()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되며  높이는 33.7m이다. 수미좌는 한백옥()을 다듬어 만들었으며, 높이는1.59m이다. 수미좌와 성루 사이의 성대는 무게 24㎏의 대성전()을 쌓은 뒤 겉면에 붉은색 흙을 발랐으며, 높이는 14.6m이다. 성루는 겹처마 헐산식() 건축물로 정면 폭은 9칸, 안 길이는 5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9와 5는 황권()을 상징한다. 지름이 2m인 60개의 붉은색 나무기둥으로 떠받치고 있는데, 60은 '갑자()'의 뜻으로서 왕조가 끊임없이 계속 순환된다는 상징성을 지닌다.

성루 성대의 밑에는 문동(;대문에서 집 안에 이르는 지붕이 있는 통로)이 5개 있다. 한 가운데 있는 문동이 제일 크다. 이는 황제가 황궁을 출입할 때 드나드는 통로이다. 성루의 정면과 후면에는 각각 돌 사자 한 쌍과 화표() 한 쌍이 있다. 문 앞의 동쪽에는 숫사자가 있는데 오른발로 공을 가지고 재롱을 피우고 있는 모습으로, 이는 황실의 위엄을 상징한다. 왼쪽은 암사자가 왼발로 아기사자를 쓰다듬고 있는 모습인데, 이는 황실의 후손이 대대로 번창함을 상징한다.

성루의 앞뒤에는 정교한 능화() 문창() 36개가 줄 지어 있다. 천장, 두공(), 양방()에는 중국의 고대 건축물에서 최고 권력을 나타내는 금룡() 문안을 그려 넣었다. 처마 밑에는 붉은 궁등()이 17개 걸려 있다. 성루의 지붕에는 황색 유리기와()를 얹어 멀리서 바라보면 눈부시다. 지붕의 용마루 양 켠에는 용()·봉황()·사자()·기린()·해마()·천마()·물고기()·해태()·후() 등 아홉 짐승과 신선 한 명이 있다. 성루 네 면의 성대 위에는 한백옥 난간과 낮은 성곽이 둘러져 있다.

화표는 한백옥을 조각해 만들었는데, 높이는 10여m에 이르고 무게는 5000㎏이 넘는다. 화표는 그 모양이 돌기둥처럼 생겼으며 구름과 반룡() 문양을 그 속에 조각해 넣었다. 화표 꼭대기에는 원반()이 하나 있는데 승로반()이라고 부른다. 승로반에는 준수()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이름을 망천후()라 부른다. 성루 앞에는 진수이허[]가 흐른다. 진수이허에는 한백옥으로 다듬어진 돌다리인 와이진수이차오[]가 있다. 

자금성으로 들어가는 입구 중 하나, 
정치적 사건의 현장이었던 곳"
'천상의 평화의 문'이라는 의미의 천안문()은 베이징의 자금성으로 들어가는 네 개의 주 관문 중 하나이며, 광대한 천안문 광장은 이 문에서 이름을 얻었다. 이 광장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880m, 동쪽에서 서쪽으로 500m의 넓이로 뻗어 있어, 세계에서 가장 넓은 도시 광장이다.

천안문의 건축은 1417년 명나라의 자금성 건축의 일부로 시작되었는데,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대략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699년의 개조 작업 때였다. 20세기까지 천안문 앞의 구역에는 정부 관청들이 들어서 있었으며, 이 지역은 1902년 의화단 운동()으로 피해를 입어 비워지게 되었다. 1950년대 초에 중화문()을 헐고 그 주변에 형성되었던 좁은 거리들을 없애면서 공지는 더욱 넓어졌다. 마오쩌둥 시대에 광장 주변에 여러 채의 중요한 건물들이 세워졌다. 인민대회당(), 국립 박물관, 마오쩌둥 기념관 등으로, 기념관에는 1976년 사망한 '위대한 키잡이' 마오쩌둥의 방부 처리된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천안문 광장은 그곳을 배경으로 하여 일어난 정치적 사건들로 유명해졌으며, 심지어 악명 높은 장소가 되었다.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이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 인민 공화국의 탄생을 선언했으며, 이후 광장은 공산주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집단적인 친정부 집회와 퍼레이드가 벌어지는 장소가 되었다. 좀 더 최근으로 와서는 이 광장에서 저항 시위, 특히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시위는 1989년에 정점을 이루었고, 결국 당국에서는 무자비한 폭력을 가해 시위대를 진압하였다. 한 자료에 따르면 당시 충돌로 인해 사망한 시위자의 수가 186명이었다고 한다.
마오쩌둥의 대형 초상화가 걸린 천안문과 그 앞으로 펼쳐진 광장은 금수교()라 불리는 다섯 개의 흰 대리석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천안문 광장은 베이징 중앙부에 위치한 동서 500m, 남북 880m, 총 면적 44만m2의 세계 최대 광장이다. 광장 북쪽에 서 있는 높이 33.4m의 천안문은 원래 1417년에 명 영락제에 의해 건설되었던 승천문()이 그 전신으로, 청대에 불탄 것을 1651년에 재건해 천안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성문 앞의 광장도 명청 시기에는 천보랑()이라 칭했으며 황제 전용 통로가 있었던 곳이다. 1651년의 재건 이후 1958년 확장 공사를 거쳐 현재의 규모가 되었으며, 100만 명의 인원도 거뜬히 수용할 정도라서 대규모 군중시위, 집회, 행렬, 경축행사 등의 장소로 빈번히 활용된다. 1919년의 5 · 4운동, 1949년의 중화인민공화국 선포, 문화대혁명, 두 차례의 천안문 사태 등 굵직한 사건들이 벌어진 중국 근현대사의 상징적 장소이다.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한 천안문의 누각 위에서 드넓은 천안문 광장을 내려다볼 수 있어 뒤로 펼쳐진 광장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는 관광객도 많다.

광장 중앙에는 인민영웅기념비, 남쪽에는 마오주석 기념당, 동쪽에는 중국혁명박물관과 중국역사박물관, 서쪽에는 인민대회당사가 있다. 이곳에서는 하루 두 차례 국기 게양식과 강하식이 치러진다. 매일 동틀 무렵과 해질녘에는 이 식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광장 주변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놀랍게도 대부분의 식 참가자는 지방에서 올라온 중국인 여행자들로 이들에게는 이 식에 참가하는 것이 일생일대의 과업이라고 한다. 햇살이 비치기 시작할 무렵 펄럭이며 하늘로 올라가는 오성홍기를 바라보노라면 가슴속 깊이 뭉클한 애국심이 느껴진다는 중국인들. 무척 진지하고 엄숙하게 의식을 치르는 중국인의 모습이 외국인 여행자에게 이색적인 볼거리를 제공한다.

개혁의 바람은 개방 정책과 더불어 더욱 가속화되었다. 특히, 외국과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지식인들이 정책 입안과 결정에 참여하고 정치 개혁을 요구하였다. 이들의 운동은 확대일로에 있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당 안에서 개혁을 주장하면서도 보수적인 파와 대대적인 개혁·개방을 주장하는 개혁파의 대립이 있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완전 개혁·개방을 주장하였던 세력은 물러나고, 등소평의 지지 아래 강택민(), 이붕()으로 이어지는 보수파가 당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때문에 6·4 사건은 다음의 강택민 시대에 한동안 인권 문제로 지적되어 국제 사회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 지식인과 학생들의 자유화, 민주화 바람이 전국적으로 크게 일어났다. 1987년 1월 초하루에는 북경에서 3천여 명의 학생 시위가 경찰과 충돌하여 20여 명이 체포되었다가 하루가 지나서야 석방된 일이 일어났다. 이에 따라 등소평은 호요방과 조자양에게 이를 신속하게 진압해 주기를 바랐고, 호요방은 이 때문에 당 총서기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현대화를 위하여 등소평이 제시한 4개항의 견지를 확인하고 자유화를 반대하였다.

1989년은 국제적으로 세계 인권 선언 40주년, 5·4 운동 70주년, 중화 인민 공화국 수립 40주년의 뜻깊은 해였으며, 또 북경의 봄, 즉 중국의 민주화 운동 10주년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 해 1월 6일에 민주화 운동의 기수였던 방여지(勵)가 중공의 최고 실권자인 등소평에게 10년 전에 체포된 위경생()의 특별 사면과 정치범의 석방 등을 요구하였다. 여기에 많은 지식인들이 호응하여 지식인들이 또 한 차례 성역에 도전하였다.

4월에 중남해에서 소집된 중앙 정치국 회의에 참석하였던 호요방이 갑자기 심장병 발병으로 쓰러져 4월 15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학생 운동으로 인하여 당 총서기에서 물러났기 때문에 당 중앙에 대하여 그의 평가를 공정하게 해 줄 것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4월 17일부터 학생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시위를 계속하였으며, 참가자 수는 갈수록 늘어났다. 이를 수습하지 못한 조자양도 비판받고 물러나고 5월 20일에 부분적으로 계엄령을 내렸다. 6월 4일에는 계엄군이 천안문 광장으로 들어가 시위 군중을 진압함으로써 민주화 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이를 '6·4 사건' 또는 '천안문 사건'이라고 하며, 북경의 정치 풍파라고 표현한다.

(천안문사건).
중국 마오쩌둥[毛澤東] 체제 말기인 1976년 4월에 있었던 대중반란.(2) 1989년 6월 4일 미명에 민주화를 요구하며 베이징의 톈안먼 광장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던 학생 ·노동자 ·시민들을 계엄군을 동원하여 탱크와 장갑차로 해산시키면서 발포, 많은 사상자를 낸 사건.
중국공산당 총서기를 지냈던 호요방의 죽음으로 그를 추모하는 사람들이 천안문으로 모여들었다. 추모 집회는 등소평의 개방정책으로 인한 사회 혼란과 불평등 현상에 대한 불만으로 민주화 시위로 이어졌다. 그러나 등소평의 강경진압으로 인해 천안문에서 전개되었던 50여 일간의 민주화 운동은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
그때 우리나라에서는1986년 : 서울 제10회 아시안 게임 개최
1987년 : 6월 민주화 항쟁; 6 · 29 선언 공표
1988년 : 서울 제24회 서울올림픽개최; 국회청문회 열림.
1; 중국 문화대혁명 이래의 마오쩌둥 사상 절대화의 풍조와 마오쩌둥 가부장 체제에 대한 중국 민중의 저항을 나타낸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1976년 1월 저우언라이[] 총리가 사망하자, 중국에서는 ‘주자파(:자본주의의 길로 나아간 )’비판운동이 일제히 일어났다. 
오랜 기간 중국의 혁명과 건설 및 국제적 무대에서의 중국의 위신증대에 기여한 저우언라이 총리를 추도하려던 중국 민중의 의지는 꺾이고, 다시 극좌적 조류가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1976년 4월 4일 청명절()에, 베이징[]의 민중은 손에 손에 화환과 플래카드를 들고 톈안먼 광장에 있는 인민 영웅기념비를 향해 시위행진하였다. 저우언라이의 자필 비문이 새겨져 있는 기념비는 민중의 화환에 의해 제단으로 변하였다. 
베이징시 당국과 관헌은 이 기념비에 바친 화환을 모두 철거하였고, 다음날인 5일 격노한 대중은 반란을 일으켜 건물과 자동차 등에 방화를 하는 등 일대 소요가 야기되었다. 플래카드에는, 후에 ‘4인방’이라 하여 체포된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과 측근인 야오원위안[] 등을 비판하는 시가 많이 게재되어 분명하게 마오쩌둥체제에 대한 반역의 의사를 나타내고 있었다. 이 사건은 공안당국과 군에 의해 반혁명사건으로 철저히 탄압되였으며, 덩샤오핑[:당시 중국공산당 부주석 ·부총리]에게 책임을 물어, 4월 7일 그의 모든 직무를 박탈함으로써 실각시켰다. 
이 사건으로 해서 화궈펑[]은 정식으로 총리의 자리에 올랐다. 중국은 그해 9월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10월에는 ‘베이징정변’으로 4인방이 체포되는 등의 격동의 시기를 체험하였으나, 이러한 와중에서 비마오쩌둥화()가 진행되어, 1978년 11월에는 톈안먼 사건이 혁명적 행동이었다는 대역전의 평가를 받게 되었다. 이후 이 사건은 1919년의 역사적인 5 ·4운동을 본떠서 ‘4 ·5운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2; 당시 베이징에서는, 그해 4월 15일 후야오방[耀]이 사망한 후, 팡리즈[] 등 지식인을 중심으로 후야오방의 명예회복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빈번히 일어나고 있었다. 특히, 학생들은 노동자 ·지식인을 포함한 광범위한 시민층을 대표하여 5월 13일 이래, 베이징대학과 베이징사범대학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모인 학생대표들과 함께 톈안먼 광장에서 단식연좌시위를 계속했다. 
5월 15일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베이징에 도착했으나, 17일 발생한 100만 명이 넘는 대규모시위로 일정을 변경해야만 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당국은 학생들의 시위를 난동으로 규정, 베이징시에 계엄을 선포했다. 한편, 학생들의 요구에 유연한 대응을 보이던 공산당 총서기 자오쯔양[]의 행방이 묘연해지고 그의 해임설이 떠도는 가운데, 덩샤오핑의 후계자로 알려진 양상쿤[] 국가주석과 리펑[] 국무원 부총리 등 강경파가 주도권을 잡았다. 
이들은 6월 3일 밤 인민해방군 27군을 동원, 무차별 발포로 톈안먼 광장의 시위군중을 살상 끝에 해산시켰으며, 시내 곳곳에서도 수천 명의 시민 ·학생 ·군인들이 시위 진압과정에서 죽거나 부상했다. 이 사건은 당시 중 ·소 수뇌회담 취재차 입국했던 외국 기자들에 의해 즉각 전세계로 보도되었으며, 미국을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는 이와 같은 비인도적 처사에 항의, 강력한 비난성명을 냈다. 이 사건 이후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인물이 된 천체물리학자 팡리즈는 미국 대사관으로 피신하였다. 
이른바 ‘피의 일요일’로 불리는 이 사건 이후 중국 지도부는 반혁명분자에 대한 숙청, 개인숭배 조장, 인민들에 대한 각종 학습 등 체제굳히기와 함께 개방정책 고수를 천명하고,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확립을 내세우는 등 이율배반적 태도를 보여왔으며, 특히 동유럽의 민주화 물결을 극복하는 데 안간힘을 쏟고 있다.
1989년 6월 4일 오전 1시 40분, 약 10만에 가까운 인민해방군은 전차와 장갑차를 앞세우고 민주화를 요구하던 시위대들이 밤을 새우고 있는 천안문 광장을 습격했다. 인민의 군대인 인민해방군은 시위대를 향해 총을 겨누고 사격을 시작했다. 광장은 순식간에 피바다를 이루었다. 이로써 약 50여 일간에 걸친 중국인민들의 민주화 시위는 막을 내렸다.
다음 날 중국정부는 이 사건에 대한 중국 내 언론의 보도를 통제하면서 '6월 4일 천안문 광장에서는 한 사람의 사망자도 없었다. 학생들은 해산했고 총에 맞거나 전차에 치인 학생은 없다. 폭도들이 소란을 피운 곳은 다른 곳이다. 폭도들은 군으로부터 총을 탈취하여 국가를 전복시키려 하고 있다. 이 전투에서 사망자는 300여 명이다. 희생자의 절반은 군인이며 절반은 폭도 및 질 나쁜 구경꾼들이다'라고 발표했다.

계엄부대, 천안문 학살 정당화"

4일 한밤중의 대살육전이 끝나고 날이 밝아지자 계엄부대 사령부는 '수도에서 어제 저녁 중대한 반혁명 동란이 발생했다. 폭도들은 광기의 상태로 해방군 장병들을 습격하여 무기를 빼앗고 군용차를 불 질러 바리케이드를 쳤으며 해방군 장병을 연행하는 등 중화인민공화국을 전복하고 사회주의 체제를 뒤엎으려고 획책했다'라고 하면서 천안문의 학살을 정당화했고, 천안문 시위대들을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폭도로 몰아붙였다.



민주화 운동의 비극적 최후"

천안문 광장에서 죽음을 간신히 피한 한 학생은 홍콩으로 탈출하여 기자들에게 그날 밤의 상황을 생생히 증언했다.
"많은 동료 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에서 전차에 깔려 갈기갈기 찢겨졌다. 군대는 찢겨진 시체를 삽으로 모아 포대기에 넣어 불태웠다."
이날 사건의 희생자는 중국 당국의 발표, 대만 그리고 외국 언론에 따라 각각 다르다. 정확한 보도로 정평이 있는 영국 BBC 방송이 6월 7일 보도한 바에 따르면, 사망자만 7,000여 명에 이르렀다. 그중 군인이 1,000여 명이었다. 당연히 부상자는 수만 명에 이르렀을 것이다. 천안문 광장에서 몸을 피한 시위대 지도부들, 특히 시위를 주도했던 학생대표들에게 수배령이 내려졌고, 잡히면 총살당했다. 이것이 1989년 봄, 중국에서 전개되었던 민주화 운동의 비극적 최후를 장식하는 천안문 사건의 전모이다.

주은래 추모집회의 공통점, 등소평"

이 사건은 어떤 면에서 1976년 주은래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위집회와 비슷했다. 두 사건 모두에 관련된 사람은 등소평이다. 그는 1976년에는 시위대를 배후 조정한 혐의로 실각했지만, 1989년 사건 때 중국 최고지도자로서 시위대를 무력 진압하는 위치에 섰다.

호요방의 죽음, 천안문 시위 계기 되다

북경대 학생들이 시작하고 시민들이 합세하여 대규모 군중 집회로 발전한 천안문 시위의 직접적인 계기는 중국공산당 총서기를 지냈던 호요방의 죽음이었다. 4월 15일, 호요방은 당면의 과제를 놓고 당시 중앙당 간부들이었던 조자양 · 이붕 · 양상곤 등과 격론을 벌이다 졸도하여 그대로 죽었다. 학생들은 "죽어야 할 사람은 죽지 않고 죽지 않아야 할 사람이 죽었다"라고 애석해 했다. 죽어야 할 사람이라고 지칭한 것은 등소평이었다. 호요방의 죽음을 추모하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그것이 천안문 광장의 약 50여 일간의 긴 시위로 이어졌다.

등소평의 개방정책, 중국을 혼란에 ??

호요방의 죽음은 하나의 계기였을 뿐,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사회주의 중국의 체제에서 비롯된다. 중국은 모택동이 죽고 등소평이 실권을 장악한 이후 10여 년간 개혁과 개방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러한 개혁 및 개방정책은 사회주의 체제에 묶여 있던 중국을 커다란 혼란 속에 빠뜨렸다. 1980년대 중반에 인민공사가 해체되면서 개인농, 즉 사유제 하의 농민이 생겨났으며 생산량도 향상되기에 이르렀다.
농산물의 생산량이 무한히 증가할 수는 없었다. 중국정부는 농업을 장려하기 위해 농산물 수매가격을 전체적으로 약 30%가량 인상했고 이로 인해 중국정부의 재정상태가 악화되었다.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화폐를 발행하게 되었다. 그것은 또 물가상승, 즉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다. 외국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했으나 이 돈은 일부 기업과 당 간부 수중으로 들어가 경제에 큰 보탬이 되지 못했다.
시장경제의 발달, 소수의 독점으로?..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중국은 시장경제가 발달했다. 배금주의적인 풍토가 만연하게 되었으며, 당 간부들이나 엄청난 재산을 모은 소수가 출현하게 되어 심각한 소득 불평등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1988년 중국공산당 13기 삼중전회에서는 긴축경제정책이 채택되면서 미래에 대한 불안이 커졌다. 점차 당 간부들은 특권신분층으로 지위와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다. 개방정책에 의해 새로 세워지는 회사들은 당 간부와 결탁할 수밖에 없고, 당 간부들은 권력뿐 아니라 개인의 부도 증대시켰다. 고위 당 간부들의 자식들은 그 부모를 이어 요직을 차지했다.
공산당 통치에 대한 비판, 정부에 탄압받다
대학생들은 부패한 당 간부에 의한 국가경영으로 인민들만 고통을 받고 있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천안문 민주화 시위가 있기 전부터 이미 일부 지식인들로부터 공산당의 통치에 대한 비판이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과 개선요구는 공산당 중앙정부에 의해 탄압을 받았으며, 그 결말이 천안문의 비극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등소평의 강경진압으로 비극적 종말을 맞다
시위대는 호요방의 재평가, 명예회복과 언론보도의 자유, 그리고 제반 민주화 조치를 요구했다. 학생들의 움직임을 보고받은 등소평은 강력한 진압을 명령하였다. 이어 〈인민일보〉가 이를 비합법 조직의 계획적인 음모에 의한 동란으로 규정하고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학생들을 더욱 자극했다. 시위대는 시간이 흐를수록 늘어났다. 

당 중앙에 의해 조자양은 연금 상태에 들어가 실각되고 이붕 수상은 시위대에 대한 강경진압을 명령했다. 5월 20일 북경의 중요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군대는 시위대를 포위했다. 포위된 상태에서 북경 중앙미술학생들은 민주의 여신상을 만들어 천안문 광장에 세웠다. 그러나 민주의 여신상은 군인들에 의해 넘어뜨려졌으며 많은 학생들이 희생되고, 민주를 부르짖던 시위운동은 엄청난 희생자를 낸 채 비극적인 종말을 맞게 되었다.

중국을 공식방문하고 있던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천안문 광장에 있는 인민영웅기념비에 헌화하기로 예정이 잡혀있던 5월 17일에는 1백만의 인파가 모여들었다. 결국 고르바초프는 이 헌화계획을 취소하게 된다. 시위대의 행위에 동정적이었던 총서기 조자양은 천안문 광장의 시위대를 방문하여 눈물을 글썽이며 학생들의 시위가 정당하다고 위로했다. 그는 실권자인 등소평에 대항하려 했던 것이다.

중국 현대사와 정치 이념의 상징"
한 나라의 광장은 그 나라의 얼굴이며 상징이라고 할 수가 있다. 천안문 광장은 세계에서 가장 큰 광장으로 명대(明代)부터 청(淸), 그리고 모택동에 의해 중화인민공화국이 선포된 장소이다. 중국 역사의 부침에 따라 천안문 앞에서는 여러 차레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났다.
북경()의 천안문() 광장은 미디어를 통해 그 위용이 우리에게 이미 친숙한, 세계에서 제일 큰 광장, 또는 중국 현대사의 현장 등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그러나, 광장 자체가 워낙 허허벌판이어서(약 800×500m) 주변의 다른 건물이나 구조물들이 광장 자체, 또는 상호간에 어떤 연관성이나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는가에 관해서는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20세기 초기부터 천안문 앞에서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났다. 1919년 5월 4일의 항일 운동인 5·4 운동, 1925년 5월 30일 상해의 외국인 조계()에서 일어난 학살 사건에 대항하는 학생 데모, 1949년 10월 1일 모택동()의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 선포, 1976년 청명절()의 주은래() 추모 민주 항거 사건, 그리고 가장 최근에 세계를 놀라게 한 사건으로는 1989년 6월 3~4일의 호요방(耀)의 추모를 계기로 일어난 민주 항쟁 탄압 사건 등이다.
천안문은 명대()부터 있었던 중국의 황성()인 자금성() 남쪽 외벽의 중앙에 위치한 문이다. 명대에는 승천문()으로 불렸으나 청() 세조(, 재위 기간 1643~1661년) 때 궁성을 대거 보수하면서 천안문으로 개칭되었다. 자금성 자체의 남쪽 정문은 오문()이다.
청대()에는 천안문 앞에 T자형으로 벽을 쌓고 그 세 끝에 모두 문이 있었다.(1911년대 이전의 천안문 부근 평면도 참조) 일반인들이 황성 앞을 지나가려면 이 벽을 돌아서 다녀야 했고 그 양쪽에는 관가들이 늘어서 있었다. 이러한 구조는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1911년 신해혁명() 이후 청조()의 멸망과 동시에 이들 문은 모두 열려 그 앞을 통과할 수 있게 되었고 1952년에는 완전히 헐리게 되었다.
중국 정부가 1958년 과거의 '황도()'를 '인민의 광장'으로 탈바꿈시키기로 함에 따라 T자형의 벽을 모두 헐어버리고 가운데를 넓혀 광장을 만들어 주위를 정비하기 시작하였다. 현재의 천안문 광장은 북쪽으로 천안문, 동쪽으로는 중국혁명박물관과 역사박물관, 서쪽으로는 인민대회당, 남쪽으로는 모주석() 기념관으로 둘러싸였고 그 중앙 축 선상에 인민영웅기념비()가 서 있다.
인민영웅기념비는 1949~1958년 사이에, 역사박물관과 인민대회당이 195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10주년을 계기로 완성되었고, 모주석 기념관이 가장 늦은 1977년에 완성되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모습이 갖추어진 것은 중국 역사를 볼 때 아주 최근의 일이다.
천안문은 중앙에 큰 문과 그 양쪽에 다소 작은 문이 둘씩 모두 다섯 개의 아치형 문이 뚫린 돌 기단 위에 이층 누각 구조를 보이는 중국 전통 건축이다. 이에 비해 인민영웅기념비는 동양의 비석과 서양의 기념비 형식이 절충적으로 배합된 구조이다. 즉, 이중 기단() 위에 입방형의 비신()이 있고 그 정상은 동양 건축의 기와지붕과 같은 형태로 마감되었다.
기단은 서양의 기념비처럼 윗부분은 식물의 잎과 꽃 문양으로 화려한 장식이 부조()되어 있고, 아래층은 19세기 이후 일어났던 주요 역사적 사건을 묘사한 10장면의 부조가 연속적으로 펼쳐져 있다. 이들은 연대순으로 동쪽 면에서 시작하여 시계 방향으로 가면서 아편전쟁(1840~1842년), 태평천국()의 난(1851~1864년), 남쪽 면에는 무창() 거사() 사건(1911년), 5·4 운동(1919년), 서쪽 면에는 남창()사건(1927년), 중·일 전쟁(1937~1945년), 북쪽에는 남경() 해방(1949년)과 양자강 도강()의 장면들이다.
이들 '역사 부조'는 사회주의 이념을 강하게 부각시키기 위한 예술이므로 극사실주의의 양식을 보인다. 이러한 사회사실주의() 미술 경향은 1930년대 독일과 러시아에서 시작하여 그 후 노신(, 1881~1936년)의 판화 운동을 통하여 중국에 도입되었다. 대리석을 곱게 연마하여 조각한 인물들의 역동적 운동감의 표현, 얼굴 표정의 세밀한 묘사는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숨을 죽이게 만들 정도로 감동시키는 힘이 있다.
기념비 남쪽 면의 두 사건은 결국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으로 이어진 것이며 모주석 기념관을 마주보는 면에 위치해 있는 것이 그 상호 연관성을 말해준다. 이러한 이유로 모주석 기념관의 입구는 전통적 중국 건축의 남향 선호에서 벗어나 북쪽을 향하고 있으며, 또한 비석의 북쪽 면에는 모택동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그 반대쪽에는 주은래의 글이 새겨져 있다).

서양의 한 미술사학자는 모주석 기념관의 열주식 구조가 워싱턴 내셔널 몰(National Mall)에 건립된 링컨 기념관과 매우 비슷한 점에 주목하였다. 일직선상에 놓인 모주석 기념관, 인민영웅기념비, 그리고 천안문의 배치가 링컨 기념관, 워싱턴 기념탑, 그리고 의회 건물로 이어지는 구조물들의 배치와 매우 비슷한 점을 지적하고 이들이 모두 정치적 이념을 표현하고자 한 건축 기획의 일환인 점을 상기시키기도 하였다.
천안문 광장은 그 안에 있으면 도무지 주변에 아무 것도 없는 듯 거대한 황야처럼 빈 공간이라는 느낌이 압도적이지만 그 주변에 둘러 있는 모든 건물들은 이처럼 뜻깊은 역사적 이념적 내용을 체계적으로 전달하는 의미 심장한 건축물이다. 자금성()의 모든 건물들이 신격화한 황제들을 위한 것이라면 천안문 광장과 그 주변의 건물들은 영웅화()된 현대사의 주역들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휴관일연중무휴
주소
가는방법버스 1, 2, 10, 20, 82, 120, 728번 탑승 후 톈안먼둥()에서 하차. 또는 버스 1, 5, 10, 22, 37, 728번 탑승 후 톈안먼시(西)에서 하차. 지하철을 이용할 경우 1호선 탑승 후 톈안먼둥()역 또는 톈안먼시(西)역에서 하차.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