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19일 화요일

숭례문.(남대문) 1

숭례문.(남대문) 
조선의 도읍지였던 한양에는 도성을 둘러싼 4개의 문이 있었다. 남쪽의 숭례문, 북쪽의 숙청문, 동쪽의 흥인지문, 서쪽의 돈의문 등이다. 각각의 성문은 조선 태조 때인 1396년에 지었는데, 네 개의 문 가운데 정문은 남쪽의 숭례문이다. 숭례문의 ‘숭례’는 예를 숭상한다는 뜻이다. 문의 위쪽에 걸린 현판은 조선의 제4대 임금 세종의 형인 양녕 대군이 썼다고 알려져 있다.
서울 남대문에는 ‘남대문 문턱이 대추나무라고 한다’는 말이 있다. 문턱도 없는데 그 문턱이 대추나무라고 하듯이 터무니없는 말로 우김질을 한다는 뜻이다. 남대문은 국보 제1호로 지정되어 빌딩숲에 갇혀 외롭게 서 있다가 2008년 방화로 인해 소실되고 말았다.

남대문은 도성의 4대문과 4소문 중 남쪽으로 난 정문이다. 조선 태조 7년에 창건된 숭례문은 1448년(세종 30)에 재건되었다. 당시 재건하려던 이유가 『세종실록』 15년 조에 실려 있다.

숭례문은 여러 번 고쳐 지은 것이다. 1398년에 창건한 이후 세종 때인 1448년, 성종 때인 1479년에 크게 고쳐 지었다. 여러 번 고쳐 지은 것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경복궁과 도성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1962년에도 대대적인 보수 공사가 있었고, 2008년에 방화 사건으로 건물의 대부분이 불타 없어져 지금은 옛 모습으로 복원하여 다시 지었다.
숭례문은 거대한 석축 기단과 2층의 다포집, 그리고 우진각 지붕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포집은 기둥 위에 여러 개의 공포(나무쪽)를 올려 짓는 집을 뜻하고, 우진각 지붕은 앞에서 보면 사다리꼴이고 옆에서 보면 삼각형인 지붕을 가리킨다. 석축 기단 가운데에는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문이 있는데, 무지개 모양을 하고 있어서 ‘홍예문’이라고 부른다.

풀이

우리나라 성문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클 뿐 아니라 웅장하고 아름다운 목조 건축물의 대명사로 통하는 숭례문
숭례문의 현판은 다른 문과 달리 세로로 걸려 있다.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서울 남쪽에 있는 관악산은 불의 기운이 강한 곳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숭례문의 현판을 세로로 걸어 불의 기운을 막고자 한 것이다.

심화

숭례문 방화 사건은 2008년 2월 10일 저녁에 일어났다. 숭례문 2층 누각에서 불길이 일어나자 소방대가 출동하여 진화 작업을 벌였으나 화재를 막지 못해 결국 누각을 받치고 있는 석축과 현판, 홍예문을 제외한 모든 부분이 불에 타 버리고 말았다. 개인적인 불만 때문이었다는 범인의 어처구니없는 방화로 인해 국보 제1호의 문화재가 불길 속에 사라진 것이다. 숭례문 방화 사건은 범인뿐 아니라 서울특별시와 문화재청, 중구청, 소방 당국 등의 관리 소홀과 잘못된 진화 작업이 비판받았다.



숭례문(남대문)숭례문(남대문)
출처: 공유마당_사진
조선시대 서울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불렀다.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경복궁의 오른팔이 대체로 산세가 낮고 미약하여 멀리 헤벌어지게 트여서 품으로 껴안은 형국이 없으므로 남대문밖에 연못을 파고 문안에 지천사()를 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남대문 터가 지금같이 낮고 평평한 것은 필시 당초에 그 땅을 낮추어서 평평하게 한 것으로 여겨지는 만큼 이제 그 땅을 다시 돋워서 양편의 산맥과 잇닿게 한 다음 그 위에 문을 세우는 것이 어떻겠는가?” 또 “청파역()에서부터 남산으로 잇닿은 여러 산맥의 봉우리와 흥천사() 북쪽의 봉우리에도 소나무를 심어 무성하게 가꾸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고 임금께서 말씀하시니 여러 신하들이 좋다고 하였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숭례문의 현판 글씨를 세종대왕의 큰형인 양녕대군이 썼다고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 남대문의 현판 글씨를 좋아했는데, 특별히 좋아했던 사람이 바로 천하의 명필이라고 알려진 추사 김정희였다고 한다. 추사가 과천에서 오갈 때면 항상 이 문 앞에서 황홀해하다가 해가 저무는 줄도 모르고 현판의 글씨를 쳐다보고 또 쳐다보았다는 것이다.

화재로 소실되기 전까지는 남대문이 밤낮으로 항상 열려 있었지만 조선시대에는 밤이 되면 대문을 닫고 통행을 막았기 때문에 아무리 고관대작이라 할지라도 밤에는 성안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1796년 1월 24일, 정조가 화성에 능행을 갔다가 조금 늦게 돌아왔는데 숭례문이 열리지 않아 길에 어가를 세우는 변고가 일어났다. 그때의 일이 『정조실록』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임금이 돌아오다 만천()에 이르러 날이 이미 저물었는데, 성문이 먼저 닫혀 어가가 노차()에 머물게 되었으므로 수궁승지() 신기, 이경운, 병조참의 이우진을 파직하였다. 그런데 옥당의 여러 신하들이 차자()를 올려 그들을 찬배()하기를 청하니, 따랐다. 그로 인하여 유도대신 영돈녕부사 김이소를 파직하였다. (······) 우의정 윤시동이 차자로 청하기를 “병방승지 이익운, 병조판서 이득신, 선상대장 서용보는 아울러 삭출하고, 수궁대장 정호인을 파직하소서”라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일반 평민들은 대부분 한강을 건넌 뒤에 밤이 늦으면 용산구에 있던 이태원이나 성동구 사근동에 있던 살곶이원 또는 청파역 근처에서 하룻밤을 묵었다고 한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다. 현존하는 서울의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2008년 2월 10일에 발생한 화재로 2층 문루가 소실되고 1층 문루 일부가 불에 탔다. 홍예문과 석축은 남았다.
복구 작업은 역사적 고증을 토대로 전통 방식을 그대로 재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기존의 것에서 살릴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살리고, 그 위에 불탄 부분을 재현하였다. 전통 기와를 올리고, 일제 시대에 일본에 의해 변형된 부분들을 다시 되돌려 놓는 데 주력했다. 이로써 숭례문은 약 3년의 복구 공사를 거친 뒤 2013년 5월 4일 복구 기념식을 거행하고 시민에게 공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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