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20일 수요일

진시황릉.

진시황릉.

중국 산시성의 리산 남쪽 기슭에 있는 진시황릉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의 무덤이다. 수도인 셴양의 도시 계획을 반영하여 설계하도록 한 것으로, 무덤 안은 유명한 병마용에 둘러싸여 묻혀 있다. 말이나 마차를 타거나 무기를 지닌 병마용들은 형상이 사실적이어서, 당시의 의복과 무기 등의 형태와 구성, 시황제의 사상 등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중국 최초의 황제인 진나라 시황제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엄청난 토목 건설을 펼쳤습니다. 여러분도 잘 알고 있는 만리장성과 화재로 사라진 아방궁에 이어 불로장생을 꿈꾸며 거대한 무덤을 건설하였지요. 진시황제의 무덤은 지금까지 발굴된 규모와 유물만 놓고 보아도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모습이다.
진시황제의 거대한 무덤에 관한 이야기는 옛날부터 입에서 입을 통해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그러다가 고대 중국 역사가인 사마천의 《사기》라는 책에 처음 수록되었습니다.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유적지는 20세기에 접어들면서 하나둘씩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진시황제의 무덤 유적지는 산시 성의 고도 시안 동북쪽에 있습니다. 현재 발견된 유적지는 진시황제 무덤과 3곳의 병마용갱입니다. 병마용 지하 유적지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유적지는 아직 발굴이 끝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가장 중요한 유적인 진시황제가 잠들어 있는 거대한 무덤은 발굴을 시작하지도 않았습니다. 진시황제의 무덤 발굴이 시작되면 전 세계 사람들은 다시 시안을 주목하게 될 것입니다.

원대한 야망을?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 국가를 세운 사람은 열세 살에 왕위에 오른 영정이었어요. 어린 나이에 왕위를 이었지만 그의 야망은 웅대했어요. 왕위에 오른 지 16년이 되자 본격적으로 주변 국가를 하나씩 공격하기 시작했지요.

기원전 230년, 국력이 가장 약한 한나라를 공격하고 곧이어 조, 위, 초, 연나라를 정복했어요. 그리고 기원전 221년에는 막강한 국력을 갖춘 제나라를 점령하면서 불과 9년 만에 주변의 여섯 나라를 정복하고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를 완성하였습니다.

영정이 주변 나라를 침략하는 데 동원한 군사는 백만 명이 넘었어요. 또 장군과 지휘자들이 사용했던 말도 만 필이나 되었지요. 지금도 세계적으로 백만 명의 군인이 있는 나라는 미국과 중국, 러시아 정도가 전부입니다.
그런데 2200여 년 전에 군사 백만 명을 이끌고 정복 전쟁을 했다는 사실이 잘 믿기지 않지요? 영정의 군대는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했는데, 기록에 의하면 단 한 차례 전투에서 적군을 4만 명이나 몰살시킨 경우도 있었다고 해요.

천하를 통일한 영정은 자신에게 어울리는 새 칭호가 필요했어요. 작은 진나라 왕에서 통일 국가의 왕이 된 영정은 자신을 ‘황제’로 칭하고, 새로운 대국의 왕을 의미하는 진시황제로 부르도록 했어요. 오늘날 중국의 영어 명칭인 차이나(China)도, 바로 진(Chin)에서 비롯되었답니다.
진시황제
진시황제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 국가를 세운 사람은 열세 살에 왕위에 올랐다.

개혁을 추진한 황제

통일 국가를 완성한 진시황제는 서둘러 새로운 정책을 세웠어요. 진시황제는 봉건주의를 무너뜨리고 전국을 쉽게 다스리기 위해 강력한 중앙 집권체제를 세우는 데 집중했지요. 전국을 군현으로 개편하고 자신의 지시가 빠른 시간에 전국에서 시행될 수 있도록 행정 조직도 개편했어요.
관료는 물론이고 백성들에게도 이전에 사용하던 여러 문자체를 쓰지 못하게 하고 비교적 단순한 예서체만 사용하도록 했어요. 문자를 통일하여 많은 백성들이 보다 쉽게 학문을 접할 수 있게 만든 동시에 중앙 정부의 뜻을 곧장 전달하려는 의도에서 한 일이었지요.
복잡했던 도량형을 표준화시키고, 마차 바퀴의 모양도 통일시켰어요. 문자와 도량형의 표준화는 진나라는 물론이고 이후 중국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진시황제는 정책 개편에 이어 대규모 공사를 시작했어요. 만리장성 건설을 시작으로 농업 생산량을 늘리기 위하여 관개 시설을 고치고, 변방과 수도 시안(당시 장안)을 연결하는 도로와 운하를 건설했지요. 또한 황제가 살 아방궁과 죽은 뒤 묻힐 묘지까지 공사를 했습니다.
진시황제 묘지 주변서 발굴된 엄청난 유물"진시황제는 시안에서 동북쪽으로 약 37km 지점에 자신이 죽은 뒤 묻힐 안식처를 짓기 시작했어요.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7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10년 넘게 공사를 했다고 해요.
진시황릉은 인공으로 만든 묘지라기보다 산처럼 보여요. 한 면이 400m가 넘고 높이가 76m에 이르러, 현존하는 단일 무덤 가운데 가장 크답니다. 한 세기 뒤에 기록된 책에 따르면, 무덤 안에 ‘아름다운 가재도구와 보석, 진귀한 물건뿐 아니라 궁궐과 탑, 관청 건물까지 세워져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요.
2000년 넘게 전해지던 소설 같은 이야기는 1932년 묘지 주변에서 일하던 농부들에 의해 처음 세상에 알려졌어요. 농부들이 무릎을 꿇고 있는 인형을 발견한 거예요.
주변에서 같은 모양의 인형 4개가 잇따라 발견되었다. 이후 40여 년 동안은 특별히 발견된 것이 없다가 다시 관심이 집중된 것은 1974년이었어요. 진시황릉 근처의 들판에서 우물을 파던 농부들이 흙을 빚어서 만든 170~190cm 정도 크기의 인형을 발견한 거.
과거에 황제를 호위하던 병사로 진시황제가 죽기 전에 미리 지하에 묻어 둔 것 이후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많은 유물이 동시에 발굴되면서 전 세계의 관심이 진시황릉 근처의 들판에 쏠리게 되었다.

지하 군대

제1호 병마용갱으로 불리는 이 발굴 현장은 진시황릉에서 약 1.5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어며. 진시황릉 제1호 병마용갱은 길이 230m, 폭 62m에 달하는 직사각형 모양으로, 이전에는 어떤 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유물이 이곳에서 발견되었어요. 유물의 숫자 도 엄청나다. 
약 2200년 동안 지하에 잠들어 있다가 햇빛을 보게 된 유물은 6000여 점이나 되었다. 제1호 병마용갱에서 쏟아져 나온 유물 중 나무로 만든 40대의 전차를 제외한 나머지는 대부분 흙으로 빚어 가마에 넣어 구워 낸 실물 크기의 도용(무덤 안에 묻기 위해 흙으로 만든 인물상이나 인형)이었다.
제1호 갱 북쪽에는 제2호와 제3호 병마용갱이 발굴되었다. 제2호 병마용갱은 제1호 갱에 비해 면적이 좁은데, 현재 발굴작업이 진행 중이에요. 제2호 병마용갱에서는 장군과 병사, 마차를 끌고 있는 기병, 말의 도용과 함께 말의 뼈가 여러 개 발굴되었어요. 살아 있는 말을 묻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이지요.

제1호 병마용갱 앞쪽에는 총 204점의 보병 군사들이 3줄로 세워져 있어며. 갑옷과 투구를 입지 않고 길게 늘어선 보병 뒤로는 11개의 통로에 세로 38열로 수많은 도용들이 놓여 있는데, 이 도용들은 갑옷을 입고 있다. 중간마다 기마 부대를 상징하는 말과 마차가 있으며, 끝쪽에는 말과 장군 모습의 도용이 있다.

제1호 병마용갱의 최대 자랑거리는 6000여 점에 달하는 도용이 저마다 다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이고, 병사를 지휘하는 장군은 물론이고 수많은 보병들과 말과 마차까지도 표정과 모습이 다르다.
얼굴 표정은 물론, 직위에 따른 갑옷과 머리 모양, 자세 등 어느 한 곳도 똑같은 것이 없습니다. 병마용갱의 도용들이 단순한 복제품이 아니라 하나하나 실제 살아있는 장군과 병사, 말, 마차를 모델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1호 갱 북서쪽에는 제3호 갱이 있어요. 제3호 갱은 1, 2호 갱과 입구의 모습, 도용의 배치, 사용된 자재가 조금 달라요. 제3호 병마용갱 입구에는 1, 2호 갱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경사진 넓은 도로가 만들어져 있어요. 지휘관이 탔던 커다란 마차가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든 도로. 

보병과 병사들을 지휘했던 간부, 기마병과 말이 세워져 있습니다. 한눈에도 각기 다른 역할을 담당하는 병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용들은 너무 많아 처음 본 순간에는 모두 비슷해 보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얼굴 크기와 표정은 물론, 머리 모양과 손동작 하나까지도 제각각입니다. 좌우 끝에는 옆을 바라보고 있는 도용들이 세워져 있으며, 기마병들의 말도 규모에 따라 3~4마리씩 배치되어 있습니다.

제1호 병마용갱 뒤쪽 끝에는 대규모 병사들을 지휘했던 장군과 말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튼튼해 보이는 갑옷을 입은 장군은 얼굴은 물론이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훨씬 섬세하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장군의 말도 기마병의 말에 비해 큽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곳이 너무 넓고 가까이 다가가는 데 한계가 있어, 자세한 부분까지 보기는 어렵다는 점입니다. 이런 아쉬움은 유리관 안에 따로 병사와 말을 전시해 놓은 제2호 병마용갱 전시장에서 달랠 수 있답니다.

제2호 갱에는 병마용갱을 건설하는 데 사용되었던 청동으로 만든 도구와 칼, 창이 전시되어 있어요. 청동 제품들은 전투용 칼, 창뿐만 아니라 일반 생활용품으로도 사용되었다고, 제2호 병마용갱에서 발굴된 도용들도 하나같이 다른 모습을 하고 있어요. 그중 눈에 띄는 것은 무릎을 꿇고 앉아 활을 쏘는 도용입니다. 활 쏘는 병사들의 모습은 마치 전쟁터를 옮겨 놓은 듯한 분위기를 느끼게 해 준다.

실제로 제3호 병마용갱에서는 4마리의 말이 마차를 끌고 있는 청동 마차가 발굴되었어요. 도용의 배치도 1, 2호 병마용갱처럼 장군과 병사, 마차, 말이 적군을 향하여 공격하는 형태가 아니라 최고 지휘부를 보호하는 형태로 되어 있어요. 또한 청동 유물도 많이 발굴되어, 제3호 갱이 1, 2호 갱에 비해 더 중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화를 알 수 있는 박물관"

병마용갱 서쪽에는 진시황제 때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박물관이 있어요. 병마용갱 주변에서 발굴된 주요 유물이 보관되어 있는 곳이지요. 당시 사용했던 거울과 건축하는 데 사용했던 도구 등의 생활용품, 아름다운 회화와 조각, 서예, 마차까지 무척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유물들은 하나같이 소중하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은 1980년 진시황제 무덤 서쪽 20m 지점에서 발굴된 두 대의 마차입니다. 1호와 2호 마차로 불리는데, 각각 4마리의 말이 끌고 있다.
진시황제가 전국을 순회할 때 탔던 마차를 모델로 만든 것으로 보고 있지요. 실물 크기의 2분의 1로 축소해서 만든 것이라고 해요. 청동 위에 금과 은으로 도금하고 그 사이사이에 색을 칠해 놓은 채색 마차로, 최고의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말은 높이 90cm, 길이 110cm에 무게가 170~190kg에 달하며, 말 4마리가 끌고 있는 청동 마차는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무겁고, 또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어요. 작은 1호 마차의 경우 자그마치 3064개의 부품을 연결하여 만들었고 2호 마차는 이보다 더 많은 3462개의 부품을 사용했다고 함.
마차 하나를 만드는 데 이토록 많은 부품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좀처럼 믿기지 않는다. 이 마차들의 무게는 자그마치 1000kg이 넘는다.

진시황제가 살았던 진나라의 수도 시안에는 병마용갱 외에도 흥미로운 유적지가 많다.
아직 발굴을 시작하지도 못한 진시황제의 능을 비롯하여 거대한 성곽 유적지와 당나라 때 건설한 양귀비의 흔적으로 가득한 화칭츠,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을 보존해 놓은 쯔언사 다옌탑 등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어요. 중국 최고의 문화 도시 시안은 중국 고대 문명을 알 수 있는 문화의 보고다.
명십삼릉"
중국 베이징 북쪽 천수산 주변에는 명나라 황제 13명이 잠들어 있는 무덤 유적지, 명십삼릉이 있습니다. 명십삼릉은 시안 외곽에 자리한 진시황릉과 더불어 중국 최대 규모의 무덤 유적이다.
겉모습만 보면 자연의 일부로 느껴질 정도로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인공 산 형태의 묘지로, 능과 그 부속 건물들이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명나라 수도를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긴 영락제가 묻힌 장릉을 중심으로 헌릉과 경릉, 사릉까지 명십삼릉에는 총 13개의 무덤이 모여 있습니다. 명나라의 황제는 모두 16명이었으나 초대 황제 주원장과 2명의 황제는 난징과 금산에 묘가 있기 때문에 이곳에는 13개의 묘만 있는 것이다.

실제 묘지는 지하 8m에 만들어 놓았는데, 궁궐과 비슷한 형태를 갖추고 있습니다. 현재 발굴된 유적지는 제14대 황제인 신종 주익균의 묘인 정릉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발굴되지 않은 상태라서 정릉만 관람객에게 개방되고 있다.
벽면이 옥으로 장식된 묘지에서는 황제들이 사용하던 각종 생활용품과 황금으로 만든 호화로운 부장품이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이 부장품들은 앞뜰의 전시실에서 전시되고 있어 명나라 황제들의 화려한 삶을 엿볼 수 있다.

산시 성 역사 박물관

시안 도심에는 산시 성에서 발굴된 주요 유물을 전시해 놓은 산시 성 역사 박물관이 있습니다. 자그마치 36만 점에 달하는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 거대한 박물관이다.
중국 최초의 글자인 갑골 문자부터, 고대의 화폐, 병마용갱에서 발굴된 도용과 생활용품, 수나라와 당나라 황제가 사용했던 물건에 이르기까지 고대 중국을 상징하는 소중한 자료로 가득 차 있는 곳입니다.
산시 성 역사 박물관은 크게 3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1관에는 구석기와 신석기 유물과 진나라 때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반드시 보아야 할 것은 다양한 도용입니다.
진시황릉 병마용갱에서 발굴된 도용도 있지만 여러 시대에 만들어진 다른 도용들도 있어 서로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제2관에는 한나라, 남북조 시대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데, 바위를 깎아 만든 조각과 아름다운 불상이 눈에 띕니다.

제3관에는 수, 당, 송, 명, 청나라 시대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수나라 인형, 당나라 불상과 고분에 그려졌던 벽화, 송나라 도자기와 자주색 석영으로 만든 술잔, 명나라 생활용품 등 탄성을 자아내게 만드는 유물이 가득합니다.
단연 돋보이는 것은 당나라 때의 커다란 불상으로 중국 불상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꼽힙니다. 산시 성 역사 박물관은 전시품 하나하나가 곧 중국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다.

제1호 병마용갱

진시황릉 병마용갱에서는 제1호 병마용갱이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합니다. 제1호 병마용갱은 중앙 관람대에서 관람하는 것이 가장 좋다.

중앙 관람대 바로 앞에는 3줄로 보병의 도용이 세워져 있습니다. 무기는 물론 없고, 투구도 쓰지 않은 도용이지만 같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각기 조금씩 다른 얼굴 표정과 머리 모양 등을 보면 신기하다는 생각이?

坑" 진시황릉 병마용갱.
중국 산시성[陝西省] 린퉁현[臨潼縣]에 있는 진시황릉원 동쪽 담에서 1km 떨어진 병마도용을 수장한 지하 갱도.
1974년 중국 서안 외곽의 시골마을에서 우물을 파기 위해 땅을 파던 농부에 의해 발견되었다. 양취위안이라는 농부는 땅속에서 발견된 도기인형의 조각과 쇳조각을 보고 이 사실을 신화사통신 기자(린안인)에게 알렸다. 
인민일보을 통해 보도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산시성 고고학발굴팀은 1974년 7월 15일부터 본격적인 발굴작업에 착수하였으며, 7월 21일 진시황릉에 딸린 병마용갱임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발굴이 시작되어 현재까지 총면적 25,380m2에 달하는 4개의 갱이 발굴되었으나 그 중 4호갱은 완성되기 전에 폐기된 빈 갱도였다. 
완전히 발굴되지 않은 1호갱은 길이 210m, 너비 60m, 깊이 4.5~6.5m의 총면적 12,000m2로서, 본래 이 갱 위에는 길이 210m, 넓이 9칸의 회랑식 건축이 있었으나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매장된 전체 도용은 약 6,000개로 추정되지만, 진나라로 쳐들어온 항우에 의해 많은 도용들이 파괴되어 정확한 개수의 파악은 어렵다. 
도용의 크기는 1.75~1.96m, 도마용은 높이 1.5m, 길이 2m로 실물보다는 조금 크게 만들어졌다. 병사들은 겉옷만 입은 것과 겉옷 위에 갑옷을 입은 병사로 구분되어 있다. 무장한 무사의 엄격한 표정은 모두 다르게 생겼다. 도용들이 만들어질 당시에는 모두 컬러로 채색된 도용이었으나 발굴과정에서 햇빛에 노출되자 불과 몇시간만에 모두 색이 바래버렸다.

1976년 4월 1호갱의 동북쪽 20m떨어진 곳에서 또하나의 병마용갱이 발견되었다. 이 병마용갱을 2호갱이라고 부르며 약 6,000m2의 넓이이며 길이는 96m, 폭은 84m이다. 갱도는 정방형인 1호갱에 비해 L자 형으로 생겼다. 2호갱 역시 완전히 발굴이 완료되지 않았으며 부분적으로 발굴되었다. 89대의 목제 전차와 이를 끄는 마용 356건, 기병용 116건, 안마 116건, 보병용 2000건이 발견되었다. 병사가 도열해 있는 1호갱과 달리 2호갱은 궁노병, 기마병, 전차병이 포진하고 있다.
1976년 5월 11일에는 1호갱 서북쪽 25m 떨어진 지점에서 520m넓이의 3호갱이 발견되었다. 3호갱은 군사 지휘부로 추정되는데, 장군의 것으로 보이는 채색된 전차 1량과 갑옷 입은 보병용 64건, 마용 4건이 출토되었다. 이 밖에도 진시황릉 서북측에서 동마용과 동용이 딸린 대형 동전차가 1대 발견되었다.

세계의 8대 경이 중의 하나로 꼽히기도 하는 이 병마용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훌륭한 예술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 이 병마용들은 진시황 친위군단의 강력한 위용을 과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진나라의 군사편제 ·갑옷 ·무기 등의 연구에도 구체적인 자료를 제공하고 있으며, 이와 아울러 일부 도용에서 확인되는 북방 민족의 두발형식은 친위군단의 민족적 구성을 짐작하게 한다.
중국 산시성의 리산(驪山) 남쪽 기슭에 있는 진시황릉(秦始皇陵)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BC 259~BC 210)의 무덤이다. 1974년에 발견된 이 고고학적 유적지에는 아직도 발굴되지 않은 수많은 병마 형상들이 남아 있다. 
진시황릉은 수도인 셴양(咸陽)의 도시 계획을 그대로 반영하여 설계하도록 한 것으로, 무덤 안은 유명한 병마용(兵馬俑)에 둘러싸여 묻혀 있다. 말이나 마차를 타거나 무기를 지닌 병마용들은 형상이 제각각이며 매우 사실적이어서, 당시의 의복과 무기, 마구 등의 형태와 구성, 그리고 시황제의 사상 등을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하고 흥미로운 자료이다.

본문

진시황릉은 중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보존 지역으로, 독특한 건축학의 총체라 할 수 있다. 두 겹의 담장으로 둘러싸인 황제의 궁전이 있는 진시황릉의 배치는 수도 셴양의 도시 계획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진시황릉은 기원전 221년에 중앙집권적 통일국가를 이룩한 강력한 절대군주의 능으로 세계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중국의 첫 번째 황제 진시황(본명은 영정())은 왕좌에 오르기 오래전부터 자신이 묻힐 곳을 준비했다. 기원전 247년 진나라의 왕이 되었을 때, 그는 점술가를 시켜 리산의 산자락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고르도록 했다. 이 사업은 경쟁국이었던 한(), 초(), 위(), 조(), 연(), 제()를 넘어서 정치적·군사적으로 큰 성공으로 거둠으로써 더욱 활기차게 진행되었다. 기원전 221년에 중국을 통일한 이후, 그의 묘와 관련된 사업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전국에서 모인 70만 명의 노동자들은 황제가 죽을 때까지 거대한 고분 안에 지하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쉬지 않고 일했다. 그곳은 궁전과 제국, 세계의 진정한 비례 모형이었다. 무덤 도굴꾼들을 막기 위해 고안된 자동발사 무기가 무덤의 보물들을 지켰다. 진시황이 죽은 후, 지하 무덤과 관련된 주요 건축가들은 비밀 유출을 우려한 다음 왕의 명령에 따라 감금당했다. 진시황릉은 시안(西)에서 35㎞ 떨어진 곳에 있으며, 43m 높이의 거대한 봉분은 지금도 주요 역사적 건조물이다. 능은 동서남북 기본 방위에 대응하는 네 개 각각에 문이 달린 최초의 정방형 담장 안에 지어졌다. 그리고 이 정방형 담장은 다시 남북으로 뻗은 더 큰 장방형 담장으로 에워싸여 있다.

영묘의 거대한 구조물은 사라져 버렸으며, 오직 꼭대기가 떨어져 나간 피라미드와 닮은 나무 둔덕만이 350㎡의 토대 위에 남아 있다. 영묘 안쪽에 있는 방의 외부 동쪽 벽으로부터 1.5㎞ 떨어진 곳에서 우물을 파던 농부 3명이 진흙으로 만들어진 실물 크기의 병사 도용()이 있는 갱을 우연히 발견했고, 곧바로 발굴 작업이 시작되었다. 1호 갱에서는 측면을 보호하는 궁수들과 함께 전투 대열로 서 있는 보병대와 기병대의 병사 1,087명이 나왔다. 길이 230m에 이르는 이 하나의 갱에만 하더라도 6,000개의 병마용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 주변은 박물관으로 보호되고 있다.

두 개의 다른 갱은 1호 갱의 바로 북쪽에서 발견되었고 비슷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2호 갱에서는 병사 1,500명과 수레 및 말이, 3호 갱에서는 지휘관과 고관 68명과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가 나왔다. 이 갱들은 임시로 다시 메워졌고 갱에서 꺼낸 물건들은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그 밖에 봉분의 서쪽 비탈면에서는 청동 주물로 만든 반()실물 크기의 4두 2륜 전차 두 대가 발견되었다. 진시황릉의 병마용은 황실 근위대의 정확한 숫자를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13년간 발견된 유물들로 영묘의 규모가 드러났으며, 그 부지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경이로운 고고학적 유적지이다. 진흙으로 된 병마용과 청동으로 만들어진 장례용 수레는 기술적·예술적 우수성이 매우 뛰어나, 한()나라 이전의 중국 조각품 역사상 대단히 귀중한 작품이다. 도용들로 이루어진 군대 역시 춘추전국시대(BC 475~221)와 짧았던 진나라 시대(BC221~210)의 중국 군사 조직을 짐작케 한다. 창, 검, 도끼, 미늘창, 활과 화살 등의 물건들은 그 확실한 증거물이다.

등재기준

진흙으로 된 병마용과 청동으로 만들어진 장례용 수레는 기술적·예술적 우수성이 매우 뛰어나, 한나라 이전의 중국 조각품 역사상 대단히 귀중한 작품이다.

도용 군대는 춘추전국 시대와 짧았던 진나라 시대의 중국 군사 조직을 짐작게 한다. 창, 검, 도끼, 미늘창, 활과 화살 등의 물건들은 그 확실한 증거물이다. 병사들의 옷과 무기에서부터 말의 고삐 같은 세세한 것에 이르기까지 초현실주의적인 병마용의 기록적 가치는 막대하다. 더욱이 도공의 공예, 기술과 관련된 도용에 담긴 정보는 헤아릴 수 없다.

진시황릉은 중국에서 가장 큰 보존 지역으로, 독특한 건축학의 총체라 할 수 있다. 두 겹의 담장으로 둘러싸인 황제의 궁전이 있는 진시황릉의 배치는 수도 셴양의 도시 계획을 반영하고 있다. 
진의 수도는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통합(진시황은 전 중국에 통일된 문자, 화폐, 도량형을 도입하고자 했다)과 사방 어디서든 침략할 수 있는 적들로부터 보호(군대는 무덤에서 바깥을 향하고 있는 죽은 황제의 얼굴을 지키고 있다)하기를 바랐던 중국의 축소판이다.

진시황릉은 기원전 221년에 중앙집권적 통일국가를 이룩한 강력한 절대군주의 능으로 세계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진시황릉"
진시황릉

중국 산시성 시안. 세계적으로 개인을 위한 묘로서는 최대의 크기로 진시황제가 즉위한 때부터 39년에 걸쳐 만들어 졌다.
중국 산시성[陝西省] 린퉁현[臨潼縣] 여산(驪山) 남쪽 기슭에 위치한 시황제의 구릉형 묘.

춘추전국시대의 혼란했던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 시황제의 무덤으로 동서 485m, 남북 515m, 높이 약 76m의 거대한 능이다. 사마천이 저술한《사기》 <진시황본기()>에 의하면 시황제 즉위 초부터 착공되어 중국 천하를 통일한 이후에는 70여 만명이 동원되어 완성되었다고 한다. 
내부에는 수은으로 강과 바다를 만드는 등 천상과 지상을 모방한 지하 궁전을 만들고 도굴자가 접근하면 화살이 자동발사하는 비밀스러운 장치도 갖추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아직 발굴로 밝혀진 바는 없다.
능은 장방형의 두 겹의 담장으로 싸인 능원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안쪽 담과 바깥 담의 사변 길이는 각각 2,525.4m, 6,294m이며, 현재는 지상에서는 능의 흔적을 알아볼 수 없는 부분이 많다. 
담벽 아래에서는 도수도(), 능원 내외에서 3곳의 건축유지와 수많은 배장묘와 순장묘가 발굴되어 전체적인 규모와 구조가 확인되었다. 능원 동문 밖의 거대한 병마용갱은 세계적인 관심거리가 되었고, 능원 밖에서 발견된 100여 개의 형도묘는 건설 당시의 가혹한 강제노역의 실상을 짐작하게 한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BC 210.9 불사()의 꿈이 허망하게 무너지다"

“중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역사인물은 누구인가?” 중국에서 이런 설문을 해보면 거의 언제나 진시황과 마오쩌둥 두 사람이 1, 2위를 다툰다. 마오쩌둥은 오늘날의 사회주의 중국을 만들었고, 진시황은 그 중국 자체를 만들었다고도 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물론 진시황 이전에도 중국 역사는 오래 이어져 왔다.

중국을 하나의 거대한 제국으로 통일하지 않았다면, 중국은 마치 유럽처럼 여러 나라로 나뉜 채로 발전해 왔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중국사는 물론이고 세계사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런 뜻에서 마이클 하트가 펴낸 <세계사를 바꾼 사람들: 랭킹 100>에서는 진시황이 카이사르와 나폴레옹을 제치고 18번째로 세계사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 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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