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동부에 있는 나라로, BC 221년 진(秦)나라의 시황제(始皇帝)가 처음으로 통일을 이루었다. 중국 최후의 통일왕조인 청(淸)나라에 이어 중화민국이 세워졌고, 국민당의 국민정부가 들어섰다. 이후 1949년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다.
정식 명칭은 중화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China)이다. 세계 최대의 인구와 광대한 국토를 가진 나라로, 국토는 남북 5500㎞, 동서로 우수리강(江)과 헤이룽강의 합류점에서부터 파미르 고원까지 5200㎞에 달한다.
북동쪽으로 대한민국·러시아연방, 서쪽으로는 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아프가니스탄, 남서쪽으로는 인도·파키스탄·네팔·부탄, 남쪽으로는 미얀마·베트남·라오스, 북쪽으로는 몽골·러시아연방과 각각 국경을 이룬다.
행정구역은 간쑤·광둥·구이저우·랴오닝·산둥·산시[山西]·산시[陝西]·쓰촨·안후이·윈난·장시·장쑤·저장·지린·칭하이·푸젠·하이난·허난·허베이·헤이룽장·후난·후베이·타이완 등 23개 성(省)과 광시장족·네이멍구·닝샤후이족·시짱(티베트)·신장웨이우얼 등 5개 자치구(自治區), 베이징·상하이·충칭·톈진 등 4개 직할시(直轄市), 마카오·홍콩 등 2개 특별행정구(特別行政區)로 이루어져 있다.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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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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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대외경제개방 시행 이전의 중국 경제발전 전략은 자본축적을 가속화하면서 경제성장률을 고도화하는 것이었다. 생산부문에서는 농촌인민공사, 공업부문에서는 국영기업이 위주였으며, 배분에서는 일괄구매·일괄판매[統購統鎖] 방식이 주로 행해졌고, 소비는 각종 배급증표(配給證票)를 이용하였다. 1979년 이후 착수한 경제개혁은 이러한 지난 시기 개발전략의 성과를 토대로 결함을 극복하려고 하였다.
농촌에서는 농업 생산책임제를 도입하여 인민공사가 해체되었고 도시의 기업도 공유제(公有制)에서 다원화된 소유제 구조로 전환하여 개체소유제(個體所有制), 개인소유경영, 각종 경제연합체 등 다양한 소유형태로 발전하였다. 경영과 소유의 분리가 인정되었으며, 경제활동에 관여하는 의사결정권을 다원화시켰다.
지령성(指令性)계획 위주의 경제계획을 지도성(指導性)계획으로 전환하고, 국가는 중장기 계획만 담당하여 경제주체들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보장하였다. 분배의 측면에서도 국가 이익을 강조하던 것에서 집단(기업)과 개인(노동자)의 이익을 고려하는 제도로 전환되고 자유시장이 부활되었다.
1980년 4월에는 선전, 주하이 등의 경제특구(經濟特區)가 지정되어 대외개방의 창구로 삼았다. 1984년에는 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국제통화기금)에 정식 가맹하여 경제개혁과 대외개방을 진행하였다. 이 즈음의 중국 산업정책은 1994년 3월 국무원(國務院) 제16차 상무회의에서 결정한 ‘1990년대 국가산업정책강요(國家産業政策綱要)’에 잘 나타나 있다.
1980년 4월에는 선전, 주하이 등의 경제특구(經濟特區)가 지정되어 대외개방의 창구로 삼았다. 1984년에는 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국제통화기금)에 정식 가맹하여 경제개혁과 대외개방을 진행하였다. 이 즈음의 중국 산업정책은 1994년 3월 국무원(國務院) 제16차 상무회의에서 결정한 ‘1990년대 국가산업정책강요(國家産業政策綱要)’에 잘 나타나 있다.
정책에 의하면 1990년대의 주요과제로 ① 농촌경제의 전면적 발전, ② 기초시설 및 기초공업의 체증 문제 해결, ③ 기간산업(基幹産業)의 가속적 발전, ④ 중국 산업의 국제경쟁력 강화, ⑤ 신고도기술산업(新高度技術産業)의 가속화로 신흥산업과 신상품 개발, ⑥ 3차 산업의 계속적 발전 등을 제시하였다.
1997년 12월 안정 속의 성장을 표방한 가운데 열린 당정연석중앙공작회의에서 아시아 금융위기 등 대내외적으로 직면한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1998도 경제성장률을 8%로 하향조종하고 농촌경제발전, 국유기업개혁, 경제구조조정, 대외개방확대, 지방사회안정 등 6대 목표를 설정하였다.
1997년 12월 안정 속의 성장을 표방한 가운데 열린 당정연석중앙공작회의에서 아시아 금융위기 등 대내외적으로 직면한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1998도 경제성장률을 8%로 하향조종하고 농촌경제발전, 국유기업개혁, 경제구조조정, 대외개방확대, 지방사회안정 등 6대 목표를 설정하였다.
지역별 산업정책은 동부지역의 경우 외국의 선진기술을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전통공업을 개조하며 신흥공업을 육성하여 수출형 산업지역으로 발전시키고, 서부지역은 풍부한 자연을 이용하여 에너지공업과 원자재공업을 중점적으로 개발하고 양쯔강을 이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이러한 목표로 1992년 초 국가계획위(國家計劃委)가 ‘10대 경제구(經濟區)’를 발표하여 경제권역별 특성에 맞게 지역경제 발전전략과 산업정책을 통일적으로 수립·운용하고 산업분포를 합리적으로 재조정하고자 하였다.
모든 성(省)·시(市)·자치구(自治區)를 ① 둥베이, ② 화베이환보하이[華北環渤海], ③ 양쯔강 삼각주, ④ 화난, ⑤ 황허강 중류, ⑥ 양쯔강 중류, ⑦ 황허강 상류, ⑧ 양쯔강 상류, ⑨ 신장[新疆]경제개발구, ⑩ 티베트 특별구 등으로 묶어 지역의 경제지리적 특성과 비교 우위에 맞는 산업을 육성하고 국내외 투자를 유치하고자 한다. 2000년이후에는 황해 연안의 개방구를 중심으로 하였던 막대한 해외투자가 내륙으로까지 확장되었으며, 이에 따라 충칭, 우한 등의 내륙의 공업지역이 급성장하고 있다.
1949년 사회주의 정권의 수립으로 중국은 공산주의 경제 이론에 기반을 둔 계획경제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치우쳤던 계획경제는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계획경제의 실패와 이에 대한 경제정책 수정의 결과로 1979년 이후 개혁개방 정책이 등장하였다. 개혁개방 이후 30여 년 동안 중국은 유례없는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2010년 국민총생산에서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부상했다.
개혁개방 이전의 경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에서 1979년 개혁개방 정책의 시행까지 중국의 경제정책은 아래의 몇 단계로 나눌 수 있다.
경제 회복기(1949~1952)
농촌에서는 반(半)봉건적 경제구조를 변혁하고 도시에서의 반(半)식민지적 경제구조를 변혁하는 것이 이 시기 경제정책의 주요 목표였다. 농촌에서는 소작제를 폐지하고 지주의 농토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균등 분배하는 등 대대적인 토지개혁이 이루어졌다. 도시에서는 주요 산업 시설을 국유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과도기 총 노선(1953~1957)
공업화와 사회주의적 소유의 확대가 이 시기 경제정책의 주요 목표였다. 공업과 농업에서 소유제에 커다란 변화가 시작되었다. 공업에서는 국가소유의 사회주의적 국영기업의 비중이 70% 가까이 높아졌고 농업에서는 합작사의 이름으로 농업 집단화가 진행되었다. 소련을 모방하여 중공업에 우선 투자하였기 때문에 스탈린 모델의 불균형 발전 시기라 불린다.
대약진 시기(1958~1960)
소련 모델을 폐기하고 중국의 특수성을 살핀 새로운 경제발전 정책이다. '일대이공(一大二公, 공유제가 순수할수록, 공유제의 범위가 클수록 좋다)'과 '이강위강(以鋼爲綱, 철강 생산을 강령으로 삼는다)'은 이 시기 경제정책을대 변하고 있다. 과도한 대규모화와 공산화로 인한 생산성 하락, 관료들의 무능과 부패, 3년간의 자연재해로 인해 2,000만 명이 넘는 아사자가 발생하는 경제적 파국에 이르게 된다.
조정 시기(1961~1965)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마오쩌둥의 좌경모험주의 노선은 비판받고 류사오치, 덩샤오핑의 실용주의 노선의 경제정책이 시행된다. 노동의 질이나 양을 고려하지 않은 인민공사의 평균주의를 극복하려 했으며, 농업을 중시하고 국민 생활을 안정시킬 수 있는 정책이 시행되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의 발발로 중단되고 말았다.
문화대혁명 시기(1966~1976)
대약진의 실패로 제2선으로 물러나 있던 마오쩌둥은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주자파(走資派, 자본주의를 추종하는 세력)'로 몰아붙이고 마침내 정권을 다시 잡는다. 그리고 사인방으로 대표되는 그의 추종 세력과 함께 이미 실패한 대약진 시기의 경제정책을 다시 추진하였다. 그 결과 중국의 국민 경제는 더욱 커다란 피해를 보게 되었다.
양약진 시기(1977~1978)
1976년 9월 마오쩌둥 사망 후 화궈펑이 권력을 계승하게 된다. 화궈펑은 사회주의 정권에서도 계속적인 혁명이 필요하다는 마오쩌둥의 '계속혁명론(不斷革命論)'에 경제주의 실용 노선을 결합하는 경제정책을 입안하였다. 정치적 개혁 없이 서양의 자금과 기술을 받아들여 생산성을 크게 도약시키려 했기 때문에 '양약진(洋躍進)'이라고 한다. 그러나 권력 기반이 취약한 상태에서 급진적 정책을 시행하였기 때문에 양약진 시기의 경제정책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농업 개혁 시기(1979~1983)
1979년 1월 중국 정부는 농민들의 생산 욕구를 증대시킬 방안의 하나로 농가생산책임제를 골자로 하는 개혁 정책을 반포하였다. 이로써 농업 생산이 증가하였고, 자급자족 형식의 생산 구조를 전문화되고 상품화된 생산 구조로 변화시켰다. 농가생산책임제로 발생한 잉여노동은 농촌의 소규모 기업인 향진기업(鄕鎭企業)이 흡수함으로써 실업 문제를 해결하고 농촌공업화의 길을 열었다.
도시 상공업 개혁 시기(1984~1988)
1984 년 10월제 12 기 3중 전회는 「경제체제 개혁에 관한 중공중앙의 결정」을 통과시켜 도시 상공업 중심의 경제체제 개혁을 전면적으로 단행하였다. 개혁의 주요 내용으로는 기업의 소유권과 경영권 분리, 가격체제 조정, 꺼티후(個體戶, 자영업)의 허가 등이 있다.
치리정돈 시기(1989~1991)
경제개혁으로 국민소득의 증가, 농촌 경제의 번영 및 대외무역의 확대 등 긍정적인 성과를 거두었으나 다른 한편으로 인플레이션, 소득분배의 불균형 및 각종 권력형 부조리 등과 같은 부작용도 나타났다. 여기에 6·4 톈안먼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계기로 주도권을 장악한 보수파는 경제개혁에 제동을 거는 '치리정돈(治理整顿)' 정책을 시행하게 된다.
개혁 심화, 개방 확대 시기(1992~현재)
1992년 1월 덩샤오핑은 남부지역을 시찰하면서 개혁개방의 심화와 확대를 독려하는 '남순강화'를 발표한다. 이 담화는 거의 모든 내용이 공산당 14차 대표대회의 보고서에 그대로 삽입되었으며, 이에 따라 오늘날 중국식 사회주의 건설이 더욱 가시화되었다. 또한 중국은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여 세계경제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편입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중국이 고도의 경제성장을 구가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정부가 개혁개방 정책을 지속적으로 실시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샤강(下崗), 샤하이(下海)
'下'는 아래로 내려온다는 뜻이며 '崗'은 언덕, 초소를 뜻한다. 즉 샤강의 원래 뜻은 군인이 초소에서 내려오는 것을 뜻했으나 이것이 '직장에서 퇴근하다', '퇴직하다'의 뜻으로 의미가 확대되었다. 개혁개방 정책 이후 국유기업은 달라진 환경과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동생산성을 향상해야 했으며, 이에 대한 조치로 수많은 노동자에 대해 정리해고를 단행했다. '샤강'은 이러한 정리해고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개혁개방 이후 샤강과 함께 유행하는 말이 '샤하이'이다. 직역하면 '바다에 뛰어들다'인데 여기서 바다는 경제적으로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공간이자 알 수 없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90년대 안정적인 국영기업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에 뛰어든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WTO 가입 이후의 경제
2001년 12월 중국은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했다. 이로써 80년대 이래 지속하였던 개혁개방 정책은 더욱 가속화되었고 중국 경제는 명실상부하게 세계 경제의 흐름에 편입하게 되었다. WTO 가입 후 중국은 수많은 관련 법규를 개정하거나 신설하면서 WTO 협정상의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수입, 내수, 서비스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시장 개방이 진행되었고 이에 따라 중국 시장 환경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통계를 보면 WTO 가입 이후 5년간 중국의 수출입 총액은 2조 4천억 달러, 재중 외자기업의 이윤은 579억 달러에 달했으며, 중국의 외화보유액은 2006년 말 1조 달러 대를 넘었다.
11차 5개년 계획(2006~2010)
2002년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16차 전국대표대회는 21세기 들어 처음 열리는 것이었고 WTO 가입 1년 만에 열린 대회여서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대회에서는 WTO 시대라는 새로운 대내외 환경 속에서 중국이 어떤 전략을 가지고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를 전망해 볼 수 있는 보고와 토론이 진행되었다.
개혁개방 이전의 경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에서 1979년 개혁개방 정책의 시행까지 중국의 경제정책은 아래의 몇 단계로 나눌 수 있다.
경제 회복기(1949~1952)
농촌에서는 반(半)봉건적 경제구조를 변혁하고 도시에서의 반(半)식민지적 경제구조를 변혁하는 것이 이 시기 경제정책의 주요 목표였다. 농촌에서는 소작제를 폐지하고 지주의 농토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균등 분배하는 등 대대적인 토지개혁이 이루어졌다. 도시에서는 주요 산업 시설을 국유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과도기 총 노선(1953~1957)
공업화와 사회주의적 소유의 확대가 이 시기 경제정책의 주요 목표였다. 공업과 농업에서 소유제에 커다란 변화가 시작되었다. 공업에서는 국가소유의 사회주의적 국영기업의 비중이 70% 가까이 높아졌고 농업에서는 합작사의 이름으로 농업 집단화가 진행되었다. 소련을 모방하여 중공업에 우선 투자하였기 때문에 스탈린 모델의 불균형 발전 시기라 불린다.
대약진 시기(1958~1960)
소련 모델을 폐기하고 중국의 특수성을 살핀 새로운 경제발전 정책이다. '일대이공(一大二公, 공유제가 순수할수록, 공유제의 범위가 클수록 좋다)'과 '이강위강(以鋼爲綱, 철강 생산을 강령으로 삼는다)'은 이 시기 경제정책을대 변하고 있다. 과도한 대규모화와 공산화로 인한 생산성 하락, 관료들의 무능과 부패, 3년간의 자연재해로 인해 2,000만 명이 넘는 아사자가 발생하는 경제적 파국에 이르게 된다.
조정 시기(1961~1965)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마오쩌둥의 좌경모험주의 노선은 비판받고 류사오치, 덩샤오핑의 실용주의 노선의 경제정책이 시행된다. 노동의 질이나 양을 고려하지 않은 인민공사의 평균주의를 극복하려 했으며, 농업을 중시하고 국민 생활을 안정시킬 수 있는 정책이 시행되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의 발발로 중단되고 말았다.
문화대혁명 시기(1966~1976)
대약진의 실패로 제2선으로 물러나 있던 마오쩌둥은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주자파(走資派, 자본주의를 추종하는 세력)'로 몰아붙이고 마침내 정권을 다시 잡는다. 그리고 사인방으로 대표되는 그의 추종 세력과 함께 이미 실패한 대약진 시기의 경제정책을 다시 추진하였다. 그 결과 중국의 국민 경제는 더욱 커다란 피해를 보게 되었다.
양약진 시기(1977~1978)
1976년 9월 마오쩌둥 사망 후 화궈펑이 권력을 계승하게 된다. 화궈펑은 사회주의 정권에서도 계속적인 혁명이 필요하다는 마오쩌둥의 '계속혁명론(不斷革命論)'에 경제주의 실용 노선을 결합하는 경제정책을 입안하였다. 정치적 개혁 없이 서양의 자금과 기술을 받아들여 생산성을 크게 도약시키려 했기 때문에 '양약진(洋躍進)'이라고 한다. 그러나 권력 기반이 취약한 상태에서 급진적 정책을 시행하였기 때문에 양약진 시기의 경제정책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농업 개혁 시기(1979~1983)
1979년 1월 중국 정부는 농민들의 생산 욕구를 증대시킬 방안의 하나로 농가생산책임제를 골자로 하는 개혁 정책을 반포하였다. 이로써 농업 생산이 증가하였고, 자급자족 형식의 생산 구조를 전문화되고 상품화된 생산 구조로 변화시켰다. 농가생산책임제로 발생한 잉여노동은 농촌의 소규모 기업인 향진기업(鄕鎭企業)이 흡수함으로써 실업 문제를 해결하고 농촌공업화의 길을 열었다.
도시 상공업 개혁 시기(1984~1988)
1984 년 10월제 12 기 3중 전회는 「경제체제 개혁에 관한 중공중앙의 결정」을 통과시켜 도시 상공업 중심의 경제체제 개혁을 전면적으로 단행하였다. 개혁의 주요 내용으로는 기업의 소유권과 경영권 분리, 가격체제 조정, 꺼티후(個體戶, 자영업)의 허가 등이 있다.
치리정돈 시기(1989~1991)
경제개혁으로 국민소득의 증가, 농촌 경제의 번영 및 대외무역의 확대 등 긍정적인 성과를 거두었으나 다른 한편으로 인플레이션, 소득분배의 불균형 및 각종 권력형 부조리 등과 같은 부작용도 나타났다. 여기에 6·4 톈안먼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계기로 주도권을 장악한 보수파는 경제개혁에 제동을 거는 '치리정돈(治理整顿)' 정책을 시행하게 된다.
개혁 심화, 개방 확대 시기(1992~현재)
1992년 1월 덩샤오핑은 남부지역을 시찰하면서 개혁개방의 심화와 확대를 독려하는 '남순강화'를 발표한다. 이 담화는 거의 모든 내용이 공산당 14차 대표대회의 보고서에 그대로 삽입되었으며, 이에 따라 오늘날 중국식 사회주의 건설이 더욱 가시화되었다. 또한 중국은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여 세계경제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편입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중국이 고도의 경제성장을 구가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정부가 개혁개방 정책을 지속적으로 실시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샤강(下崗), 샤하이(下海)
'下'는 아래로 내려온다는 뜻이며 '崗'은 언덕, 초소를 뜻한다. 즉 샤강의 원래 뜻은 군인이 초소에서 내려오는 것을 뜻했으나 이것이 '직장에서 퇴근하다', '퇴직하다'의 뜻으로 의미가 확대되었다. 개혁개방 정책 이후 국유기업은 달라진 환경과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동생산성을 향상해야 했으며, 이에 대한 조치로 수많은 노동자에 대해 정리해고를 단행했다. '샤강'은 이러한 정리해고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개혁개방 이후 샤강과 함께 유행하는 말이 '샤하이'이다. 직역하면 '바다에 뛰어들다'인데 여기서 바다는 경제적으로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공간이자 알 수 없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90년대 안정적인 국영기업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에 뛰어든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WTO 가입 이후의 경제
2001년 12월 중국은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했다. 이로써 80년대 이래 지속하였던 개혁개방 정책은 더욱 가속화되었고 중국 경제는 명실상부하게 세계 경제의 흐름에 편입하게 되었다. WTO 가입 후 중국은 수많은 관련 법규를 개정하거나 신설하면서 WTO 협정상의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수입, 내수, 서비스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시장 개방이 진행되었고 이에 따라 중국 시장 환경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통계를 보면 WTO 가입 이후 5년간 중국의 수출입 총액은 2조 4천억 달러, 재중 외자기업의 이윤은 579억 달러에 달했으며, 중국의 외화보유액은 2006년 말 1조 달러 대를 넘었다.
11차 5개년 계획(2006~2010)
2002년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16차 전국대표대회는 21세기 들어 처음 열리는 것이었고 WTO 가입 1년 만에 열린 대회여서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대회에서는 WTO 시대라는 새로운 대내외 환경 속에서 중국이 어떤 전략을 가지고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를 전망해 볼 수 있는 보고와 토론이 진행되었다.
경제정책의 기본 방향은 '첫째, 2020년까지 GDP를 현재의 4배 수준으로 성장시킨다. 둘째, 이를 위해 향후 20년간 7%대의 성장을 지속한다. 셋째 이를 통해 국민경제의 전면적인 샤오캉(小康) 수준을 달성한다.'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구체적 실천방안으로 '정보화와 공업화가 결합한 신형 공업화의 추진, 농촌 경제의 발전과 도시화를 통한 농촌 문제의 점진적 해결, 서부 지역의 자원 개발을 통한 장기적 성장 동력 확보' 등이 거론되었다.
12차 5개년 계획(2011~2015)
중국은 자본주의 시장경제 시스템을 받아들였지만, 1953년부터 실시해왔던 계획경제 정책을 한 번도 멈춘 적 없이 지속적으로 실시해 왔다. 2011년 3월, 중국공산당은 제17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를 통해 12차 5개년 계획의 기본 틀을 확정하였다. 그 주된 내용은 '내수확대 전략의 지속, 소비요구에 부응하는 장기적인 효력을 가진 제도의 확립, 더 많은 소비의 형성, 투자와 수출전략의 조정을 통한 경제성장 견인'으로 요약할 수 있다.
12차 5개년 계획(2011~2015)
중국은 자본주의 시장경제 시스템을 받아들였지만, 1953년부터 실시해왔던 계획경제 정책을 한 번도 멈춘 적 없이 지속적으로 실시해 왔다. 2011년 3월, 중국공산당은 제17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를 통해 12차 5개년 계획의 기본 틀을 확정하였다. 그 주된 내용은 '내수확대 전략의 지속, 소비요구에 부응하는 장기적인 효력을 가진 제도의 확립, 더 많은 소비의 형성, 투자와 수출전략의 조정을 통한 경제성장 견인'으로 요약할 수 있다.
구체적 목표로는 1) 내수 확대, 2) 농업 현대화의 추진, 3) 산업구조의 경쟁력 강화, 4) 지역 간 협조, 발전의 촉진, 5) 자원 절약형, 환경 보호형 사회로의 전환 가속화, 6) 과학 부국 및 인재강국 전략, 7) 사회사업, 기본적인 공공 서비스 시스템의 강화, 8) 문화 대발전 추진, 9) 사회주의 시장경제시스템 확립 등이 있다.
내수 확대를 핵심으로 하는 12차 5개년 경제개발 계획의 성공을 위해서 중국정부는 공업화와 도시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도시와 농촌, 동부해안지역과 서부내륙지역, 사회계층 간에 존재하는 소득 격차를 줄이고 민생을 개선하는 정책을 우선시할 것이다. 사회의 안정이야말로 13억 인구의 중국이 지속적으로 안정적 경제발전을 추구할 수 있는 유일한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12차 5개년 경제개발 계획의 핵심은 구체적 목표에서 드러나듯 '내수 확대'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지하고 있듯이 지난 이십여 년간 중국의 쾌속경제성장을 이끌어 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투자와 수출이었다. 그런데 투자, 수출과 함께 일국 경제 성장의 3대 요소인 소비는 GDP의 성장과는 어울리지 않게 답보상태에 있었다.
내수 확대를 핵심으로 하는 12차 5개년 경제개발 계획의 성공을 위해서 중국정부는 공업화와 도시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도시와 농촌, 동부해안지역과 서부내륙지역, 사회계층 간에 존재하는 소득 격차를 줄이고 민생을 개선하는 정책을 우선시할 것이다. 사회의 안정이야말로 13억 인구의 중국이 지속적으로 안정적 경제발전을 추구할 수 있는 유일한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12차 5개년 경제개발 계획의 핵심은 구체적 목표에서 드러나듯 '내수 확대'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지하고 있듯이 지난 이십여 년간 중국의 쾌속경제성장을 이끌어 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투자와 수출이었다. 그런데 투자, 수출과 함께 일국 경제 성장의 3대 요소인 소비는 GDP의 성장과는 어울리지 않게 답보상태에 있었다.
중국 정부는 2000년 발표한 제10차 국민경제 및 사회발전 5개년계획(2001~2005)에서 ① 지속적인 고도경제성장 지향, ② 경제구조조정의 지속추진, ③ 서부대개발 전략추진, ④ 과학기술의 진보 및 교육에 역점, ⑤ 전방위적인 대외개방형 경제추구, ⑥ 국민생활수준의 제고를 목표로 삼았다. 2000년에는 투자·소비의 회복, 수출의 증대 등으로 인하여 국내총생산(GDP)이 1조 700억 달러로 처음으로 1조 달러를 넘어섰고 경제성장률은 8%, 외환보유고는 1656억 달러를 기록하였다. 주요 산업은 농업, 에너지산업, 철강·섬유·식품공업 등이다. 현재 경제문제는 지역간 격차의 확대, 농민 수입의 침체 등이다.
중국경제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내수의 확대가 무엇보다 필요한 것으로 인식한 것이다. 특히 2008년 발생한 국제 금융위기는 일정 규모의 내수 시장 없이는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없음을 체득하게 하였다.
개혁개방 이후의 경제
개혁개방은 1979년부터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데, 이 시기 경제개혁 정책은 방법 및 추진과정상 크게 4시기로 분류할 수 있다.
개혁개방은 1979년부터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데, 이 시기 경제개혁 정책은 방법 및 추진과정상 크게 4시기로 분류할 수 있다.
한중 경제교류
중국에서 볼 때, 우리나라는 지리적 인접성의 장점이 있으며 중국에 필요한 산업기술과 시장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우리나라에서 볼 때, 중국은 지리적 인접성과 저렴한 인건비 및 광대한 시장을 가진 나라이다. 따라서 1992년 한중 수교 이래 가장 활발한 성과를 이룩한 분야가 바로 경제 통상 분야였다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대중국 수출액은 1992년 27억 달러에서 2010년 1,168억 달러로 약 43배나 증가하였다. 대중국 수입액은 1992년 37억 달러에서 2010년에는 715억 달러로 약 19배 증가하였다. 1992년에서 2005년에 이르기까지 대중 무역수지 흑자는 927억 달러에 이르렀고, 2010년에는 한 해의 대중 무역 수지 흑자만 450억을 초과하였다. 이처럼 우리나라 무역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위상은 날로 높아졌고 2009년에 이르러 중국은 한국이 수출과 수입을 가장 많이 하는 명실상부한 제1위 교역국이 되었다.
중국에서 볼 때, 우리나라는 지리적 인접성의 장점이 있으며 중국에 필요한 산업기술과 시장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우리나라에서 볼 때, 중국은 지리적 인접성과 저렴한 인건비 및 광대한 시장을 가진 나라이다. 따라서 1992년 한중 수교 이래 가장 활발한 성과를 이룩한 분야가 바로 경제 통상 분야였다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대중국 수출액은 1992년 27억 달러에서 2010년 1,168억 달러로 약 43배나 증가하였다. 대중국 수입액은 1992년 37억 달러에서 2010년에는 715억 달러로 약 19배 증가하였다. 1992년에서 2005년에 이르기까지 대중 무역수지 흑자는 927억 달러에 이르렀고, 2010년에는 한 해의 대중 무역 수지 흑자만 450억을 초과하였다. 이처럼 우리나라 무역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위상은 날로 높아졌고 2009년에 이르러 중국은 한국이 수출과 수입을 가장 많이 하는 명실상부한 제1위 교역국이 되었다.
대중 무역 수출입 동향
년도 | 수출액(백만달러) | 증가율(%) | 수입액(백만달러) | 증가율(%) |
---|---|---|---|---|
2005
|
61,914,983
|
24.4
|
38,648,243
|
30.6
|
2006
|
69,459,178
|
12.2
|
48,556,675
|
25.6
|
2007
|
81,985,183
|
18
|
63,027,802
|
29.8
|
2008
|
91,388,900
|
11.5
|
76,930,272
|
22.1
|
2009
|
86,703,245
|
-5.1
|
54,246,056
|
-29.5
|
2010
|
116,837,833
|
34.8
|
71,573,603
|
31.9
|
「한국무역협회 자료(2001)」
우리나라는 주로 화학공업제품, 섬유, 전자 및 기기, 철강, 금속 제품 등공업용 부자재 중심으로 수출하고, 철강, 금속, 섬유, 전자기기 및 농수산물 등을 중심으로 수입하고 있다. 수교 첫해인 1992년을 제외하고 대 중국교역에서 계속 흑자를 기록하고 있어서, 중국 측과의 무역 불균형 해소 문제가 양국 간 통상현안으로 대두하고 통상 마찰이 증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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