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학교보건과학대학
[Yonsei University College of Health Science, 延世大學校保健科學大學]
연세대학교는 그 전신인 세브란스의과대학과 연희대학교가 1957년 통합되면서 출범하였다.
연원 및 변천
세브란스의과대학의 모체는 제중원(濟衆院)의 의학부이다. 제중원은 1885년 대한제국의 궁정어의였던 알렌(Horace Newton Allen)에 의해 설립된 최초의 근대식 의료기관이었는데, 이듬해인 1886년 3월 29일 이 제중원 내에 의학부가 만들어진 것이다. 최초의 입학생은 16명이었다.
1893년 북장로회 의료선교사 에비슨(Oliver R. Avison)이 제중원의 4대 원장으로 취임하였고, 이듬해인 1984년 에비슨은 재정이 어려워진 제중원의 운영권을 완전히 인계받아 1989년 4월 국내 최초의 의학교인 제중원의학교를 설립하였다.
이후 미국인 사업가 세브란스(L. H. Severance)가 기부한 기금으로 1904년세브란스병원이 개원하면서 제중원의학교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로 개편되었고, 1906년 간호학교(지금의 연세대학교 간호대학)를 부설하였다.
1908년에는 제1회 졸업생 7명에게 정부로부터 의료 활동을 할 수 있는 최초의 의사면허증이 발급되었다. 1909년세브란스의학교, 1913년세브란스연합의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으며, 1917년에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로 인가되었다.
1922년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로 교명을 변경하고, 본과 외에 연구과·별과·선과를 설치하였다. 1942년 일제의 강요로 아사히의학전문학교(旭醫學專門學校)로 교명이 변경되었으나 광복 후 1945년 8월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로 교명을 회복하고, 1947년 6년제 세브란스의과대학으로 개편하였다.
연희대학교는 1915년 3월 미국 북장로교·남북감리교, 캐나다 장로교 등 선교부연합위원회의 협력을 얻어 북장로회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한국명 원두우)가 YMCA 구내에 설립한 조선기독교대학(Chosun Christian College)이 그 시초이다.
기독교 정신을 토대로 설립된 민족 교육기관으로 문과·이과·상과·농과를 설치하여 학교의 편제와 교과과정, 교수진이 대학의 체계를 갖추었고, 졸업생에게는 학사학위가 수여되었다.
초대 교장에 언더우드가 취임하고, 부교장에는 세브란스연합의학교의 교장이었던 에비슨이 겸임하였다. 한국인 교수로는 백낙준(白樂濬)·유억겸(兪億兼)·정인보(鄭寅普)·최현배(崔鉉培)·조병옥(趙炳玉)·백남운(白南雲)·이춘호(李春昊)·이관용(李瓘鎔) 등이 강단에 섰다.
1916년 12월 에비슨이 제2대 교장으로 선임되었고, 1917년 4월연희전문학교로 개편하여 문과·상과·신과(神科)·농과·수물과·응용화학과를 두었는데, 보성전문학교(지금의 고려대학교)에 이어 두 번째로 설립된 전문학교이다. 1919년 최초의 졸업생 22명을 배출하였고, 1944년 4월 일제로부터 재산을 몰수당하고 한국인 경연진과 교수진이 추방되면서 경성공업경영전문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었다.
광복과 함께 교명을 연희전문학교로 환원하고, 유억겸이 교장에 취임하였다가 1945년 12월 백낙준이 후임으로 취임하였다. 1946년 8월연희대학교로 승격하여 문학원·상학원·이학원·신학원에 11개 학과를 편성하고 초대 학장에 백낙준이 취임하였다.
1950년에 대학원을 신설하고 문과대학·상경대학·이공대학·신과대학의 4개 대학 17개 학과로 증설하였다. 그 뒤 6·25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난하였다가 1953년 8월 본교로 복귀하였고, 1954년에 정법대학을 신설하였다.
1957년 1월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의과대학이 통합하여 연세대학교로 새롭게 출범하게 되는데,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의과대학의 병합은 이미 1920년대에 그 시도가 있었다.
1922년 2월 공포된 제2차 「조선교육령 」 제12조에서 “전문교육은 「전문학교령」, 대학교육 및 그 예비교육은 「대학령」에 의한다”라고 규정함에 따라 대학 설립의 법적 근거가 마련되어 연희전문학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를 중심으로 통합대학의 설립이 계획되었고, 당시 연희전문학교의 교장이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교장이었던 에비슨이 언더우드(Horace Horton Underwood, 연희전문학교 설립자 언더우드의 아들)와 1925년 대학 설립을 위한 기금 마련을 위해 미국을 다녀오기도 하였다.
결국 일제 당국의 사립대학 설립 승인 거부로 모든 계획이 좌절되었고, 광복 이후 다시 양교의 통합이 구체화되면서 양교의 대표 사이에 통합에 대한 잠정적 합의가 이루어져 1949년에는 세브란스의과대학 예과를 연희대학교에서 수학하게 하여 그 수료생을 세브란스의과대학 본과에 진학하게 하였다.
연세대학교로 새로이 발족하면서 문과대학·상경대학·이공대학·신과대학·의과대학으로 편성하고 초대 총장에 백낙준(白樂濬)이 취임하였다. 같은 해 5월 세브란스간호학교를 의과대학 간호학과로 개편하였으며, 1959년 부산에 있던 분교를 부산연세실업초급대학으로 개편하였다.
1962년 8월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에 의과대학 교사, 간호대학 기숙사 및 세브란스병원을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1963년 신과대학 종교음악과를 음악대학으로 개편하고, 부산의 부산연세실업초급대학을 가정대학으로 개편하였다가 3년 뒤에 신촌캠퍼스로 이전하였다. 1964년 연합신학대학원·경영대학원, 1967년 교육대학원·치과대학을 신설하였다.
1968년 12월 간호학과를 간호대학으로 개편하고, 1970년 12월 행정대학원, 1971년 12월 산업대학원을 신설하였다. 1977년 1월 보건대학원을 신설하였으며, 같은 해 3월 이공대학의 이학부와 공학부를 각각 이과대학과 공과대학으로 분리, 개편하였다.
1977년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에 캠퍼스를 신축하여 의과대학을 설치하였고, 1980년 정법대학을 사회과학대학, 법학과를 법과대학으로 개편하고, 교육학과와 체육교육과로 편성된 사범대학을 신설하였다.
1982년 원주캠퍼스에 국어국문학과·행정학과·법학과를 신설하였다. 1986년 11월 국제학대학원을 신설하고, 원주캠퍼스 의과대학 보건학과를 보건과학대학으로 개편하였다.
1990년 국제적 위상을 높이면서 연구중심 대학으로의 기반을 확대하기 위하여 소련의 모스크바대학교(Moscow State University)·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교(Saint Petersburg StateUniversity) 등과 학술교류협정을 체결하는 한편, 교수연구년제를 도입하고, 1991년 언론홍보대학원, 1993년 특허법무대학원을 신설하였다.
1995년 21세기를 대비한 대학발전 계획의 일환으로 교육내용을 다양화하고 학생중심의 교육과 연구중심의 대학원 교육으로의 전환을 목표로 학제개편 및 교육과정의 개편, 학사관리 개선 등 계열화 및 학부제 시행을 위해서 대폭적으로 학칙을 개정하였다.
1996년 문과대학 11개 학과를 인문학부로, 상경대학 3개 학과를 상경계열로, 이과대학 7개 학과를 자연과학부로, 공과대학 7개 학과와 2개 학과를 각각 기계전자공학부와 사회환경시스템공학부로, 생활과학대학 4개 학과를 생활과학부로, 원주캠퍼스의 문리대학·경법대학·보건과학대학 11개 학과를 인문사회계열로, 문리대학·보건과학대학 12개 학과를 자연과학계열로 개편하였다.
1997년 생활환경대학원을 신설하고, 같은 해 12월 미국 LA에 연세어학당을 개원하였다. 1998년 고려대학교와 학술교류협정을 체결하였으며, 경영대학원에서 경제대학원을 분리하였다.
1999년 3월 공과대학 건축공학과를 사회환경건축공학부로, 화학공학과·생명공학과를 화공생명공학부로, 보건과학대학 보건과학부의 임상병리학전공을 임상병리학과로, 재활의학전공을 물리치료학과와 작업치료학과로, 특허법무대학원을 법무대학원으로 개편하였고, 같은 해 9월 학부대학을 신설하였다.
2000년 신촌캠퍼스의 13개 대학을 6개 모집단위(인문, 사회, 이학, 공학, 의·치의학, 예·체능계열)로 통합하고, 국제학대학원을 전문대학원으로 개편하였으며, 2개의 전문대학원(정보대학원·영상대학원)을 신설하였다. 또한 원주캠퍼스의 보건과학대학 보건과학부의 명칭을 보건환경의공학부로 변경하였고, 서울대학교·한국과학기술원(KAIST)과 학술교류협정을 체결하였다.
2001년 3월 사회복지대학원을 신설하고, 5월 UI 선포식을 가졌으며, 11월 간호대학원을 신설하였다. 2002년 원주캠퍼스 문리대학에 디자인학부·정보기술학부를 신설하고, 경법학부를 사회과학부·경영정보학부·법학부로, 환경의공학부를 환경공학부·의공학부로 개편하였다. 또한 방사선학과·치위생학과와 보건환경대학원 신설하였다.
2002년 11월 경영대학을 신설하고, 2003년 원주캠퍼스에 의료기기테크노타워를 준공하였으며, 신촌캠퍼스에 언더우드기념관과 김대중도서관을 개관하였다. 2004년 3월 산학협력단을 창단하고, 보건대학원에 국내 최초로 국제사이버보건대학(International Cyber Universityfor Health, ICUH)을 설치하였다.
2005년 언더우드국제학부를 신설하고, 전임교원의 복수학과 소속제를 도입하였으며, 세브란스 새병원과 신학관·첨단과학기술연구관을 준공하였다. 또한 같은 해 5월 개교 120주년 기념식에서 ‘2020 세계 속에 자랑스러운 연세’ 선포식을 가졌고, 12월 GS칼텍스와 산학협약을 체결하였다.
2006년 YSPC(주)를 설립하고, 언더우드국제학부를 언더우드국제대학으로 개편하면서 언더우드학부·국제교육부를 설치하였으며, 삼성전자(주) LCD총괄팀·하이닉스반도체(주)와 산학협약을 체결하였다.
2007년 3월 대학원의 신문방송학과와 영상대학원을 통합하여 커뮤니케이션대학원으로 개편하였고, 7월 세브란스병원이 JCI(Joint Commission International, 국제의료기관평가위원회)로부터 인증을 받았다.
같은 해 10월 전국경제인연합회와 산학협약을 체결하였고, 12월에는 교육인적자원부와 한국학술진흥재단에서 발표한 ‘2006년도 대학 연구활동 실태조사 분석 결과’에서 논문 게재 수, SCI급 논문 게재 수, 연구비 규모, 산학협력단 자금 규모, 특허 및 기술이전 성과 등 주요 부문에서 전국 사립대학 1위를 기록하였다.
2008년 5월 연세·삼성학술정보관을 개관하고, 연세재활학교를 설치하였으며, 9월 자유전공학부를 신설하였다. 같은 해 10월 영국 『더타임스』지의 2008년 세계 대학 평가에서 203위를 기록하였고, 11월 인천광역시 연수구 송도동에 국제캠퍼스 기공식을 거행하였다.
기능과 역할
일제강점기 학생운동으로 1919년 3·1운동 때에는 연희전문학교 대표 김원벽(金元壁) 및 학생청년회를 중심으로 한 학생들과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대표 이용설(李容卨)을 중심으로 한 학생들이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학생등과 함께 선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로 인하여 연희전문학교는 1918년에 전교생 94명이었던 것이 1919년에는 17명으로 감소하였다. 또한 1920년에 연희전문학교 학생청년회가 주동이 되어 서울시내 중학교와 전문학교 학생들로 정동예배당에서 조선학생대회(朝鮮學生大會)를 조직하고, 이후 1923년 조선학생회로 개편하여 각종 체육회·음악회·학술강연회 등을 주최함으로써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26년 6·10만세운동 때에는 연희전문학교 학생 이병립(李柄立)·박하균(朴河鈞)이 각 학교 대표 11명으로 된 주동세력으로 검거되면서 일시 휴교령이 내려지기도 하였다.
교훈은 ‘진리·자유’이다. 기독교 정신에 입각하여 학술의 심오한 이론과 광범위하고 정치한 응용방법을 교수·연구하며, 국가와 인류사회 발전에 공헌할 지도적 인재 양성을 교육목적으로 하고 있다.
세계적인 연구중심 대학을 지향해서 연구의 수월성 성취를 위해 교수들의 연구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연구환경을 제도적으로 개선해서 5년 내에 5개 분야에서 세계 10위권 수준, SCI 총 논문 수 기준 세계 50위권 진입을 목표로 하고 있다.
국제교류로 미국 버클리대학교((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일리노이공과대학(IllinoisInstitute of Technology)·캘리포니아대학교 로스엔젤레스캠퍼스(University of California, LosAngeles), 일본 와세다대학교, 러시아 모스크바대학교(Moscow State University), 중국의 베이징대학교 등 해외 580여 개 대학과 교류협정을 맺고, 교환학생제, 해외 인턴십, 어학연수, 교환교수제, 학술교류 등을 시행하고 있다.
SAF(The Study Abroad Foundation)에 가입해 SAF 회원대학들과도 학점교류 등을 시행하고 있다. 2008년에는 국내 대학 중 최대 규모인 약 840명의 교환학생을 파견하였다.
인천 송도국제도시에 조성되고 있는 국제캠퍼스는 2010년부터 2013년까지 약학대학, 한국어학당, UN지속가능발전센터, 국제하계대학, 언더우드국제대학, 동아시아대학, 이공계학부의 융합전공, 아시아지역학대학, 의생명과학기술대, 기숙사 등으로 이루어지고, 학생 4,000명(국내학생 3,000명, 해외학생 1,000명), 교직원 500명, 연구원 500명 등 총 5,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61만 4,000여㎡ 규모의 글로벌 캠퍼스이다.
학생활동으로 220여 개의 동아리가 활동하고 있고, 운동부는 축구부·농구부·야구부·아이스하키·럭비부 등 총 9개를 운영하고 있어 고려대학교와 함께 우리나라 학원 스포츠계의 양대 산맥으로 자리하고 있다.
연례행사로 가장 대표적인 연고전(延高戰)은 양교의 학생, 교직원, 동문 및 연고자가 함께 모여 두 대학간 친선을 도모하기 위해서 매년 9월에 개최하는 행사로 1946년부터 시작된 양교 축구·농구의 정기전이 그 시초이다. 이후 1956년 야구·럭비·아이스하키 세 종목이 추가되었고, 1965년부터는 이틀 동안 다섯 경기가 일제히 치러지는 지금과 같은 경기방식이 완전히 자리를 잡게 되었다.
매년 5월 열리는 대학축제 무악대동제는 삼거리 공연, 민중연대장터, 방송제, 전시회, 영화제 등의 다양한 행사가 열리고, 특히 노천극장에서 열리는 ‘아카라카를 온누리에’는 가수들의 공연과 응원단이 이끄는 응원으로 구성된다. 원주캠퍼스에서는 연희제가 열려 체육대회, 가요제 등의 행사가 진행된다.
매년 5월 개교기념일에는 학부재상봉 행사와 ‘동문의 날’ 행사가 진행된다. 학부재상봉 행사는 1956년 처음 열린 이후로 25주년, 50주년이 되는 동문들을 초청하여 학교를 찾은 동문들이 정든 교정을 행진하고 동문간의 우의와 사제간의 정을 돈독히 하는 자리이고, 동문의 날 역시 동창, 선후배간 우의를 다지는 행사로 진행된다.
음악대학 관현악 전공의 학생들의 관현악 정기연주회와 협주곡의 밤이 있고, 성악과 학생 전원이 참가하는 오페라 공연, 여성합창단의 합창대회 등이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다.
언론활동으로 대학신문인 『연세춘추』는 1953년 6월에 창간되어 주간으로 발간하고 있고, 영자신문 『Yonsei Annals』는 월간으로 간행하고 있으며, 교육방송국·YTV선교방송국(인터넷방송)을 운영하고 있다. 원주캠퍼스는 『연세학보』를 1987년 창간하여 격주로 발간하고 있고, 매지방송국을 운영하고 있다.
연세대학교 보건대학원, 세브란스병원, 치과대학병원(이상 신촌동 소재), 강남 세브란스병원(서울시 강남구 도곡동 소재), 용인 세브란스병원(경기도 용인시 역북동 소재) 세브란스정신건강병원(경기도 광주시 탄벌동 소재) 등을 말한다.
이 중에서 신촌 세브란스병원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종합병원이다. 1884년 갑신정변을 계기로 서양의술의 우수성이 인정되어, 당시 선교의사로 내조한 H.N.앨런이 고종 황제로부터 현대식 병원의 설립허가를 받아 1885년 4월 10일 개원한 광혜원(廣惠院)이 그 시초이다. 당초 대한제국 정부와 미국 장로교 선교부 간의 협력기관으로 시작된 이 병원은, 개원 13일 후 제중원(濟衆院)으로 개칭되었으며, 1886년에 의학교육부를 부설하여 한국에서 최초로 현대의학교육을 시작하였다. 1897년에 운영권이 선교부로 이관되었고, 1900년 미국 클리블랜드의 사업가 L.H.세브란스가 병원신축을 위하여 거액을 기부, 1904년 남대문 밖 복숭아골에 한국 최초의 병원이 준공되었으며, 이름도 세브란스병원으로 바뀌었다.
세브란스병원은 진료기관으로서만이 아니라 현대의학의 교육 및 연구기관으로 한국 의학계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면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아사히[旭]의학전문학교(1942), 세브란스 의과대학(1947) 부속병원으로 발전하였다. 1957년 세브란스의과대학이 연희대학과 통합, 연세대학교로 개편되면서 의과대학 부속병원이 되었고, 1962년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였으나 병원의 명칭은 그대로 세브란스병원으로 쓰고 있다.
2009년 기준 총 병상 수는 3,137병상이며, 전체 시설규모는 대지면적 320,541㎡, 건축면적 71,010㎡, 연면적 493,111㎡ 규모이다. 진료과목은 내과 ·외과 ·정신과 ·신경과 ·정형외과 ·성형외과 ·신경외과 ·흉부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안과 ·이비인후과 ·피부과 ·비뇨기과 ·임상병리과 ·마취과 ·재활의학과 ·가정의학과가 있으며, 부속시설로 외국인진료소 ·통증치료실 등이 있다.
세브란스병원 산하 암센터, 재활병원, 심장혈관병원, 안·이비인후과병원, 어린이병원과 강남세브란스병원 산하 척추병원, 치과병원, 암병원 등 총 8개의 전문병원이 있다.
제중원.Widespread Relief House, 濟衆院.
1885년(고종 22) 4월에 조선 정부가 미국인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1932)의 건의를 받아 설립한 서양의학 병원이다. 정확한 설립 날짜는 확인되지 않으나 《조선왕조실록》에는 1885년 4월 14일(음력 2월 29일)에 고종이 혜민서(惠民署)와 활인서(活人署)를 대신할 의료기관의 설립이 필요하다는 의정부의 건의를 받아 설치를 허락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의정부가 건의할 때의 명칭은 광혜원(廣惠院, Widespread Relief House)이었으나 설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명칭을 제중원(濟衆院)으로 바꾸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4월 26일(음력 3월 12일)에 광혜원을 제중원으로 개칭했다고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이 보고했으며, 5월 4일(음력 3월 20일)에는 예전 혜민서와 활인서에 주던 비용을 새로 설치된 제중원으로 옮겨 배정하자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건의를 고종이 승인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중원은 외아문(外衙門)이라고도 불리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산하의 독립기구로 설립되었으며,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에는 내무아문(內務衙門)의 산하 기구가 되었다. 초기에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독판(督辦)인 김윤식(金允植)이 그 설립과 운영을 관장했으며, 환자 진료는 미국 북장로회 소속의 선교사이자 의사인 알렌이 담당했다. 알렌은 1884년 9월 미국 공사관의 공의(公醫)로 조선으로 건너와 그해 12월 갑신정변(甲申政變) 과정에서 큰 부상을 입은 민영익(閔泳翊)을 치료하면서 궁중의 전의(典醫)로 발탁되었다. 그리고 고종에게 서양의학의 보급과 서양식 의료기관의 설립을 건의해 제중원의 설립을 이끌었다.
알렌 이외에 1885년에 조선으로 온 미국 감리회 소속 선교사이자 의사인 스크랜턴(WilliamB. Scranton, 1856∼1922)도 초기에 제중원에서 알렌과 함께 환자를 진료했다. 하지만 그는 선교 활동을 강조해 곧바로 정동에 따로 병원을 설립해 나갔다. 그 뒤 1885년 6월에 조선으로 건너온 미국 북장로회 소속의 헤론(John W Heron, 1856~1890)이 환자 진료에 참여했는데, 그는 알렌이 1887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에도 제중원의 운영을 실질적으로 담당하다가 1890년 병으로 사망했다.
제중원은 외아문(外衙門)이라고도 불리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산하의 독립기구로 설립되었으며,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에는 내무아문(內務衙門)의 산하 기구가 되었다. 초기에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독판(督辦)인 김윤식(金允植)이 그 설립과 운영을 관장했으며, 환자 진료는 미국 북장로회 소속의 선교사이자 의사인 알렌이 담당했다. 알렌은 1884년 9월 미국 공사관의 공의(公醫)로 조선으로 건너와 그해 12월 갑신정변(甲申政變) 과정에서 큰 부상을 입은 민영익(閔泳翊)을 치료하면서 궁중의 전의(典醫)로 발탁되었다. 그리고 고종에게 서양의학의 보급과 서양식 의료기관의 설립을 건의해 제중원의 설립을 이끌었다.
알렌 이외에 1885년에 조선으로 온 미국 감리회 소속 선교사이자 의사인 스크랜턴(WilliamB. Scranton, 1856∼1922)도 초기에 제중원에서 알렌과 함께 환자를 진료했다. 하지만 그는 선교 활동을 강조해 곧바로 정동에 따로 병원을 설립해 나갔다. 그 뒤 1885년 6월에 조선으로 건너온 미국 북장로회 소속의 헤론(John W Heron, 1856~1890)이 환자 진료에 참여했는데, 그는 알렌이 1887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에도 제중원의 운영을 실질적으로 담당하다가 1890년 병으로 사망했다.
헤론이 죽은 뒤 1891년부터는 미국 북장로회 소속의 빈턴(CharlesCadwallader Vinton, 1856~1936)이 환자 진료를 담당했으나, 그는 제중원 구내에 교회 설립을 추진하다가 조선 정부와 마찰을 빚기도 했다. 1893년부터는 미국 북장로회 소속의 캐나다인 에비슨(Oliver R. Avison, 1860~1956)이 환자 진료를 담당했다. 1886년에는 미국의 여성 선교사이자 의사인 엘러스(Annie J. Elless)가 부인부(婦人部)를 만들어 여성에 대한 진료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제중원은 처음에 재동(齋洞)에 있던 홍영식(洪英植)의 집에 설립되었으나, 1886년 구리개(지금의 을지로 입구)로 옮겼다. 제중원은 문을 연 뒤 1년 동안 10,460명의 환자를 진료하고, 1886년에는 의학당을 설립하는 등 서양의학의 보급에 기여했다. 그러나 1890년대 이후에는 새로 부임한 서양인 의사들이 선교 활동을 강조해 독자적인 운영권을 주장하면서 조정과 갈등을 빚었고, 마침내 1894년 조선 정부는 제중원의 운영과 관리를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 넘겼다.
제중원은 처음에 재동(齋洞)에 있던 홍영식(洪英植)의 집에 설립되었으나, 1886년 구리개(지금의 을지로 입구)로 옮겼다. 제중원은 문을 연 뒤 1년 동안 10,460명의 환자를 진료하고, 1886년에는 의학당을 설립하는 등 서양의학의 보급에 기여했다. 그러나 1890년대 이후에는 새로 부임한 서양인 의사들이 선교 활동을 강조해 독자적인 운영권을 주장하면서 조정과 갈등을 빚었고, 마침내 1894년 조선 정부는 제중원의 운영과 관리를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 넘겼다.
제중원을 인수한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는 미국인 세브란스(Louis H. Severance, 1838~1913)의 기부를 받아 1904년 숭례문 밖 도동(桃洞)에 병원을 신축해 옮기면서 명칭을 세브란스병원(Severance Memorial Hospital)으로 바꾸었고, 제중원의 부지와 건물을 조선 정부에 반환했다. 조선 정부는 1897년부터 새로 국립병원 설립을 추진해 1899년 내부(內部) 직할 병원을 설립했고, 이듬해 명칭을 광제원(廣濟院)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1899년 의학교(醫學校)를 설립해 지석영(池錫永)을 교장으로 삼아 서양의학을 보급하고 의사 양성에 나섰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은 미국인 선교사가 1885년에 만든 광혜원이었어. 선교사들은 대부분 의사를 겸임하였는데, 알렌 또한 마찬가지였다.
알렌은 갑신정변 때 부상을 입은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을 치료해 준 인연으로 고종의 총애를 받게 되었고, 고종의 도움으로 광혜원을 세워 운영할 수 있었다. 이 병원은 나중에 제중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대한 제국 시대인 1899년에는 국립 병원인 광제원이 세워졌었고. 이 병원은 서양 의술과 한방 의술을 모두 할 수 있는 병원으로 1907년에 ‘대한 의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환자 치료뿐 아니라 의료 요원까지 양성했다.
대한 제국 시대인 1899년에는 국립 병원인 광제원이 세워졌었고. 이 병원은 서양 의술과 한방 의술을 모두 할 수 있는 병원으로 1907년에 ‘대한 의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환자 치료뿐 아니라 의료 요원까지 양성했다.
1904년에는 세브란스 병원이 설립되어 가난한 환자의 치료에 힘썼으며, 1909년에는 각 지방에 도립 병원인 ‘자혜 의원’이 세워져서 지방 사람들도 서양 의술에 의해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처음 명칭은 국립 광혜원(廣惠院)이었다. 1876년 문호개방 이후 고종과 조선 정부는 총체적인 근대화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때 의료 근대화도 구상하였다. 1881년 일본에 파견한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을 통해 서양식 병원을 탐색하고, 1884년 정부 신문인 『한성순보』의 사설을 통해 서양의학 교육기관의 설립과 양의(洋醫) 양성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1884년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 매클레이(Robert S. MaClay)가 서양식 병원 설립을 제안했을 때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하였다. 이때 발생한 갑신정변(甲申政變) 당시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교사 알렌(Horace. N. Allen, 安蓮)이 우정국사건(郵征局事件) 당시 중상을 입은 민영익(閔泳翊)을 서양의술로 살림으로써 서양식 국립병원 설립이 가속화되었다.
고종은 알렌의 서양식 병원건립 건의를 받아들여 1885년 2월 29일(음력) 광혜원(House ofExtended Grace)을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곧 한성 재동에 설치된 국립병원이었다.
건물은 홍영식(洪英植)의 집(지금의 헌법재판소 자리)을 쓰게 하였는데, 광혜원이라는 명칭은 2주일 만에 백지화되고, 그 해 3월 12일에 새로 제중원(濟衆院: House of UniversalHelpfulness)이라는 이름을 붙여 개원 당시부터 소급 적용하였다.
알렌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하루에 최고 260여 명의 환자를 보게 된 때도 있었다고 하는데, 그 뒤 환자의 수가 늘어나서 진료업무가 복잡하게 되자 알렌은 한때 미국 감리교회 선교의 스크랜턴(Scranton,W.B.)의 도움을 받기도 하다가, 곧 추가로 파견된 선교의 헤론(Heron,J.H.)과 함께 진료에 종사하였다.
1886년에는 다시 미국으로부터 여의(女醫) 엘러스(Elless, A. J.)가 파견되어 제중원에 부인부(婦人部)를 신설하고 왕실 여인들의 진료에 종사하였다.
이렇게 제중원의 진료업무가 더욱 번창하자 1886년 10~11월경 조선 정부는 한성 남부 동현의 왕실 소유 부지(지금의 을지로 입구와 2가의 중간, 한국외환은행 본점 자리)로 제중원을 옮겼다.
1887년 가을 알렌이 미국특파전권대사 박정양(朴定陽)의 수행원으로 떠나게 되자 제중원의 진료업무는 헤론이 전담하게 되었고, 부인부의 여의는 엘러스가 혼인하게 됨에 따라 호르톤(Horton, L. S.)으로 교체되었다.
그 뒤 알렌이 돌아왔으나 미국 공사관 서기관이 되었으므로 병원진료는 하지 않았고, 1890년 여름 헤론이 병사하자 캐나다에서 다시 파견된 빈턴(Vinton, C. C.)이 의료업무를 이어 맡다가 1893년 다시 추가로 파견된 에비슨(Avison, O. R., 魚丕信)에게 인계되었다.
제중원은 1885년 국립병원으로 개원하여 진료활동을 한 이래, 1894년 6월 갑오개혁의 행정관제개혁 때 내무아문 아래 위생국(衛生局)을 설치하여 종두(種痘) 및 의약·전염병예방업무 등을 맡게 하면서 7월 18일 내무아문으로 폐합되었다.
이 후 선교사업기관으로 분리되어 의료업무를 계속하였는데, 병원 운영을 맡은 관리들의 부패로 업무를 수행할 수 없어 정부에 쇄신을 건의하였다.
고종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모든 권리를 에비슨에게 맡겨 설립한 지 9년 만에 경영권도 완전히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로 이관되었다.
미국인 실업가 세브란스(Severance, L. H.)의 재정지원으로 1904년에 남대문 밖 복숭아골[桃洞]로 현대식 병원을 지어 옮기고 세브란스병원이라 하였다. 에비슨에 의하여 1899년 제중원학교가 설립되었다가 1904년 세브란스병원으로 개편되면서 제중원이라는 이름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1886년 3월 29일, 서양의학을 교육하고 양의(洋醫)를 양성하기 위한 국립 제중원의학당이 개교했다. 아울러 1886년 5월 미국 의사들의 공로에 대한 보상으로 알렌에게 당상관(堂上官)의 벼슬이 하사되었다. 조선 정부는 건물과 예산을 제공하고 학생들을 선발했으며, 제중원 의사 알렌은 교수들을 섭외하고 교육에 필요한 의학도구 등을 준비했다. 본과 학생은 12명이었으며 영어, 화학, 해부, 약 조제법 등을 배웠다. 그러나 1890년경 제중원의학당의 의학교육은 중단된 듯하고, 정식 졸업생은 단 한 명도 배출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