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미인, 虞美人.
중국 진(秦)나라의 무장 항우(項羽)의 총희(寵姬). 항우가 ‘사면초가’의 막다른 상황에 다다르자, 최후의 주연을 베풀고 자진(自盡)했다고 한다.
우희(虞姬)라고도 한다. 진나라 말기 항우가 한나라 고조의 군사에게 해하(垓下: 安徽省 靈璧縣)에서 포위되어 ‘사면초가(四面楚歌)’의 막다른 상황에 다다르자, 최후의 주연을 베풀었다.
이때 시름에 찬 항우에게 ‘대왕의 의기가 다하였으니 천첩이 어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라고 답하고는 자진(自盡)하였다고 한다. 후대 송나라 증공(曾鞏)은 ‘우미인의 피가 변하여 우미인초(虞美人草: 개양귀비)가 되었다’는 시를 남겼다.
‘서초패왕(西楚霸王)’ 항우(項羽)의 애첩(愛妾). 우미인은 속칭이고 우는 성(姓)이면서 이름이라고도 한다. 항우는 진(秦)을 타도하고 서초(西楚)의 패왕(霸王)이라고 칭하여 한(漢)의 유방(劉邦 ; 고조(高祖))과 패권을 다투었으나 패배하여 포위되었다.
항우는 밤에 사방을 포위한 한군(漢軍)이 초나라의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고 유방이 이미 초를 점령하고 초나라 백성이 모두 적이 되었다고 생각하여, 진중에서 주연을 베풀고 우미인에게 석별의 노래를 부르게 하자, 우미인이 이에 노래로 대답하고 자살하였다 한다. 안후이 성[安徽省] 정원(定遠) 동쪽에 묘가 있는데 묘에 돋아난 풀이 우미인곡(虞美人曲)을 들으면 춤을 추어 움직이므로 이 풀을 우미인초(草)라고 한다는 전설이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우희의 용모가 지극히 아름다웠고, 재능과 기예가 뛰어나며, 춤추는 자태가 매우 아름다웠다고 한다. 그래서 ‘우미인(虞美人)’이란 칭호를 얻게 되었다. 일찍이 사면초가의 곤경에 처한 항우의 옆을 지켰으며, 후대 사람들은 항우가 지은 <해하가(垓下歌)>를 근거로 우희가 자살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로부터 ‘패왕별희’의 설화가 전해지게 되었다.
우희에 대한 역사의 기록은 매우 적어서 심지어 본명, 출생지, 민족, 사망 경위 등 그 어떠한 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다만 역사학자 사마천이 지은 『사기』의 「항우본기」에 “우(虞)라는 이름의 미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이로 인해 후대에 두 가지 이야기가 나왔다. 하나는 ‘우’가 미인의 이름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사원』에 나온 내용으로 ‘우’는 미인의 성이었다는 것이다.
‘우희(虞姬)’의 ‘희’는 후대에 사람들이 그녀에게 붙여준 이름인데, 이 ‘희’라는 글자에 대해서도 두 가지 해석이 있다. ‘희’가 그녀의 성이라는 것, 또 다른 해석은 ‘희’가 고대의 아름다운 여성을 부르는 칭호라는 것이다. 대체로 두 번째의 의미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설화
항우의 숙부 항량이 사람을 죽인 후, 항우를 데리고 오중(吳中, 지금의 장쑤성 쑤저우(蘇州) 지역)으로 피신했다. 우희는 회계군(會稽郡, 지금의 저장성 사오싱(紹興)현)에 있었는데, 항우를 흠모하여 그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고, 죽기 전까지 항상 그의 곁을 지켰다.
초한전쟁 막판에 항우가 패배하고 전세가 기울자 항우는 술자리를 베풀며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덮을 만한데, 시운(時運)이 불리하니 오추마가 나아가지 않는구나. 오추마가 나아가지 않으니 이를 어찌할꼬? 우(虞)여, 우여, 그대를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라는 노래를 불렀다. 그 가사가 몹시 슬펐고, 헤어지기에는 정이 너무 깊고 마음이 아픈 정서가 담겨 있었다. 이것이 <해하가>이다.
이에 우희가 검무(劍舞)를 추며 “한나라 군사들이 이미 땅을 차지하여 사방에 초나라 노랫소리가 가득하고, 대왕의 의기(義氣)가 다했으니 천첩(賤妾)인들 어찌 편히 살겠습니까?”라는 노래로 답했다. 이를 <복해하가(复垓下歌)> 또는 <화해하가(和垓下歌)>라고 한다.
노래를 마친 후 우희는 자결함으로써 항우가 사사로운 정을 끊고 전쟁에 집중할 수 있게 했다고 하며, 끝까지 항우의 승리를 기원하며 죽었다고 한다. 『사기』에 우희의 죽음에 관한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진나라 말기 때 사람. 항우(項羽)의 애첩(愛妾)이다. 항우가 해하(垓下)에서 유방(劉邦)의 군대에 포위되어 군량도 떨어지고 군사마저 부족하자 군막(軍幕)에서 함께 술을 마시고 비분강개하여 노래하니 그녀가 화답하고는 “장부(丈夫)에게 짐이 될 수 없다.”고 말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노래를 부르고 자결하여 항우를 격려했다.
그 노래가 「답항왕가(答項王歌)」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나라 병사가 이미 점령을 했는지, 사방에서 초나라 노래 소리 들리네. 대왕께서 전의(戰意)와 기개(氣槪)가 다했으니, 천첩인들 어찌 살기를 바라리오.(漢兵已略地 四面楚歌聲 大王意氣盡 賤妾何聊生)”
"우희의 무덤이 지금의 안후이성(安徽省) 영벽현(靈璧縣)에 남아있다고 한다.
궁중정재(宮中呈才) 항장무(項莊舞)에 등장하는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