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28일 목요일

경주 첨성대 . 慶州瞻星臺.

경주 첨성대 . 慶州瞻星臺.

신라시대에 건립된 천문대이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31호로 지정되었다.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소재하며 높이 9.17m, 밑지름 4.93m, 윗지름 2.85m이다. 밑에서부터 4.16m 되는 곳의 남쪽 허리에 한 변이 1m인 정사각형 문이 달려 있다. 

모양은 원통형으로 남쪽 문에 사다리를 걸었던 자리가 있다. 30cm 높이의 돌 361개 반을 사용하여 상층부와 기단을 제외한 27단을 쌓아 올렸다.(전체 돌의 개수는 401개)

첨성대가 제단이었다는 학설도 있다. 《삼국유사()》에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내부는 제12단까지 흙이 차 있고, 제19단에서 제20단까지와 제25단에서 제26단까지의 두 곳에 정()자형 장대석()이 걸쳐 있는데 그 양끝이 밖으로 나가 있다. 

혼천의()와 같은 관측기구를 정상에 설치하고 춘분 ·추분 ·동지 ·하지 등의 24절기를 별을 통하여 측정하였고, 정자석을 동서남북의 방위를 가리키는 기준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제27단 내부의 반원()에는 판석()이 있고, 맞은편에는 판목()을 놓았던 곳으로 보이는 자리가 있다. 판석은 길이 156cm, 너비 60cm, 두께 24cm이다.

꼭대기에는 정자석()이 2단으로 짜여 있는데, 그 위에 관측기구를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정의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신라시대 천문을 관측하던 건물.
별을 보기 위하여 높이 쌓은 대.

개설

국보 제31호. 높이 약 9.5m. 첨성대가 위치한 곳은 옛날에는 경주부() 남쪽 월남리()라고 하였고, 계림()의 북방 약 150∼200m, 내물왕릉 동북방 약 300m 되는 곳이다. 이 근방을 속칭 비두골이라고도 한다.
첨성대는 『삼국유사』기이() 권2의 별기()에 “이 왕대()에 돌을 다듬어서 첨성대를 쌓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신라 선덕여왕 때(재위 632∼647)에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같은 책 왕력() 제1에 신라 제17대 내물마립간() 이야기 끝에 “능은 점성대() 서남에 있다.”라는 기사가 있는데 현재의 내물왕릉과 첨성대의 위치 관계와 잘 부합된다. 이 기록에서 첨성대가 별명으로 점성대라고 불렸던 것을 알 수 있다.

내용

첨성대의 기능에 대해서는 조선 말기 이후 일제강점기까지도 천문대(), 즉 천문관측을 하는 곳으로 이해되었다. 그런데 광복 이후에 갑자기 이에 대한 이설이 제기되며, 제단()·기념물·불교관계 건축물 등의 여러 가지 설과 이견이 속출되었다. 이런 설에 대하여 종전의 전통적인 입장에서 천문대로 해석하는 연구도 물론 진행되었다.
이설들이 나온 이유의 하나는 현존하는 첨성대가 평지()에 있다는 것, 첨성대 자체의 구조상 그 위로 오르내리는 통로가 매우 불편하다는 점 등이다. 그러나 당시의 역사적 환경은 나라마다 다른 첨성대 또는 점성대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고대천문학은 크게 천문()과 역법()으로 양분된다. 중국의 사서()에도 『역지()』 또는 『율력지()』와 『천문지()』가 뚜렷하게 구별되어 기재되어 있다. 천문관측은 크게 두 분야로 나눌 수 있겠는데, 첫째는 역법을 만들기 위한 태양·달·행성의 운행을 관측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점성()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바와 같이 항성()의 배치로 정해진 별자리[]를 지방 또는 국가로 분배하였다.
그 분야에서 일어나는 제반 천문현상을 관찰하여 국가의 길흉을 점치는 일이다. 이러한 점성은 조선시대 말까지도 계속되었는데, 고대로 올라갈수록 그 비중이 컸던 것이다. 그러므로 또는 고대인의 자연철학적인 천문관측이 국가나 왕조에는 매우 중요하였으며, 되도록이면 왕궁에 가까워야 하였음은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점성적인 것이 제사()나 점복()과 가까울 수도 있음직한 것이다.
구조는 아래의 기단부(), 그 위의 술병형의 원통부(), 다시 그 위의 정자석() 정상부() 등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땅속에는 잡석()과 목침() 크기의 받침돌, 그리고 기단부 서쪽으로는 일렬로 자연석이 놓여 있다. 이 기초를 다진 돌 위에 2단으로 된 기단석이 놓여 있다.
기단부는 정방형으로 한 변의 길이가 하단은 5.36m, 상단은 5.18m이며, 두 단이 다 높이가 39.5㎝로서 두 단을 합쳐서 79㎝의 높이가 된다. 이 기단부는 남쪽 변이 정남()에서 동쪽으로 19° 돌아서 있다.
기단 위의 원통부는 높이 약 30㎝인 부채꼴의 돌로 27단을 쌓아올렸는데, 27단의 높이는 8.08m이며, 최하단의 원둘레는 16m, 제14단의 둘레는 11.7m, 최상부인 제27단의 둘레는 9.2m이다.
제13∼15단에 걸쳐서 정남에서 동쪽으로 약 16°가 되는 방향을 향하여 한 변이 약 95㎝인 정방형의 창구()가 나 있다. 이 창구의 아랫변의 돌은 대형의 평판석()으로 되어 있어서 내부의 면적을 크게 차지하고 있다.
창구의 내부 아래쪽은 잡석으로 채워져 있으며, 그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는 형태이다. 그 내벽은 선형석()의 꼭지 부분이 삐죽삐죽 나와 있다.
원통부의 제19단과 제20단에는 각각 남북·동서로 2개씩의 장대석이 걸쳐 있어 네 개가 ‘’자를 이루는데, 그 장대석의 끝은 원통부의 바깥까지 뚫고 나와 있다. 같은 구조가 제25단과 제26단에도 있는데, 여기서는 아래의 것이 동서, 위의 것이 남북으로 걸쳐서 ‘’자를 이룬다.
맨 위인 제27단에는 동쪽 절반이 평판석으로 막혀 있다. 이 평판석은 그 아래의 장대석에 놓여 있는데, 윗면이 둘레의 제27단보다 약 6㎝가 낮게 되어 있다. 그리고 평판석이 없이 환하게 뚫린 서쪽 절반의 공간으로 나온 제27단의 선형석의 끝에는 3개에 걸쳐서 일직선으로 인턱이 패어 있다. 두께 6㎝ 정도의 나무판[]을 동반부의 평판석과 이 인턱에 걸치면 중앙에서 위로 뚫린 공간이 막히고 상부에는 ‘’자석 안에 네모난 방이 형성된다.
제27단의 원통부 위에는 각 네 개씩으로 짜인 ‘’자석이 두 단에 걸쳐서 놓여 있어서, 사각형의 정상부를 이룬다. 이 ‘’자석의 길이는 306㎝, 높이와 너비는 각각 32㎝, 두 단의 높이를 합치면 64㎝, ‘’자석이 이루는 내부 정방형의 한 변은 220㎝로서 재래의 한옥방 한 칸의 넓이가 된다.
이 ‘’자석은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에 자리를 바로잡아서 떨어지지 않게 수리를 하였다고 한다. 수리한 사람의 말에 의하면, 그때 방향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고 하나, 현재로서는 남쪽면이 정남에 대하여 서쪽으로 약 8°가 돌아간 방향을 향하고 있다.
첨성대의 석재는 화강석()인데 표면에 노출된 부분은 모두 다듬어져 있다. 석재의 개수는 종래 365개라고 하였으나 기단석까지 포함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정확히 365개는 아니다.
이와 같은 구조로 총 높이가 9.51m가 되는데, 홍사준()은 사다리 세 개를 마련하여 한 개는 지상에서 중앙 창구까지, 한 개는 중앙 창구 안에서 내부의 제19·20단의 ‘’자석까지, 나머지 한 개는 제19·20단에서 제25·26단의 ‘’자석까지 걸쳐서 정상의 ‘’자석 안으로 올라갈 수 있으며, 오르내리는 데 큰 불편은 없었다고 한다. 
1715년(숙종 41) 하나의 관상감을 경희궁 개양문() 밖에 만들었는데, 거기도 관천대가 있었다고는 하나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다만 <도성도 >에만 표시되어 있을 뿐이다.
현존하는 첨성대 중 대표적인 것은 신라시대 경주에 있었던 것이다. 별을 보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의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국가의 길흉을 점치기 위하여 별이 나타내는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역법()을 만들거나 그 오차를 줄이기 위하여 별이나 일월오성(:해와 달 그리고 지구에서 가까운 금성·목성·수성·화성·토성의 다섯 행성)의 운행을 관측하는 것이다.
전자는 미신적인 점성학이고, 후자는 과학적인 천문학 또는 역학()이다. 이 두 가지 관측의 비중은 시대가 지날수록 후자 쪽이 강하게 작용하였음은 물론이다. 우리 나라의 첨성대도 점성학적인 비중이 컸던 시대에 시작되었다고 생각된다.
(1) 고구려
고구려의 첨성대에 대하여는 ≪세종실록≫지리지에 “평양성 안에 9묘()와 9지()가 있는데…… 그 못가에 첨성대가 있다.”는 기록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평양의 첨성대 옛터가 평양부 남쪽 3리()에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모두 고구려의 첨성대를 말하는 것인데 현재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2) 신 라
신라의 첨성대는 경주에 실물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삼국유사≫·≪고려사≫지리지·≪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증보문헌비고≫ 등에 기재되어 있다. 선덕여왕 때에 축조된 것으로 상방하원(:위는 네모지고 아래는 둥근 모양)이며, 높이는 19척5촌, 위의 원둘레가 21척6촌, 아래의 원둘레가 35척7촌이며, 중간 이상이 위로 뚫려서 사람이 그 속으로 오르내리며 별을 관측하였다는 기록이 현존 실물과 일치한다.
이 첨성대는 ≪삼국유사≫에 의하면, 점성대()라고도 불렀음을 알 수 있는데, 얼마 뒤에 일본에서 점성대를 쌓았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이 이ㅅ다고도하는데??? 밑기어렵다. 경주의 첨성대는 국보 제31호로 지정되어 있다. 
(3) 백 제
백제의 첨성대에 대해서는 문헌의 기록도 없고 건축물이 있었던 터도 없다. 그러나 백제가 일본과 천문역법을 교류한 역사적 사실로 보아서 ≪일본서기≫에 나타난 첨성대가 없었다고 할 수는 ??.
(4) 고 려
고려의 첨성대에 대한 기록도 별로 없다. 강화도마니산() 정상의 참성단()의 기록과 터, 개성만월대(滿) 서쪽에 첨성대라고 구전()되는 석조물이 전해오고 있다.
여러 지리지에 따르면, 참성단은 돌을 쌓아서 만든 것으로 높이가 10척 상방하원이며, 위의 사면()이 각각 6척6촌, 아래의 원 너비(지름)가 각각 15척이다. 
세간에 전하기를,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린 곳으로 산기슭에 재궁()이 있어서 매년 봄·가을에 대언()을 보내어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점성과 제천()의 관계, 참성단과 경주 첨성대의 상방하원의 형태상의 비슷함과 명칭이 소리가 서로 비슷한 것, 
그 뒤 조선시대에 마니산 산정에서 천문관측을 하였다는 기록 등으로 보아 고려가 몽고의 침공을 받았던 강화도에 도읍이 있었던 때의 첨성단이 아니었던가 하는 의심이 가는 곳이다.
만월대의 첨성대는 높이 3m 가량의 다섯 개의 돌기둥으로 받친 석대()로서 위의 평면넓이가 대략 33m로 9㎡이다. ≪고려사≫에는 충렬왕 7년(1281) 원나라에서 수시력(:원나라 곽수경이 만든 달력)이 들어 왔는데, 왕은 태사원()에 명하여 영대(:임금이 기상을 보는 대)와 천문기기()를 만들어서 일월()을 관측하여 도수(:각도나 광도 등의 크기)가 맞는가를 자세하게 참고하고 살폈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아 이때부터 그 영대 위에 측기()를 놓고 천문관측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현존하는 만월대의 첨성대가 설령 이 밖의 기록은 없다 해도 위의 기록과 같은 관측에 사용되었던 관천대()일 가능성은 매우 크다.
(5) 조 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개국 초부터 고려의 서운관(과 을 합친 것)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였는데, 1420년(세종 2)에는 첨성대를 세우고, 그 뒤에 다시 경복궁 안의 서운관을 확충하여 간의(:장영실과 이천 등이 만든 관측기)를 비롯한 천문기기를 10여 종이나 만들어서 설치하고 관측하였다. 그 중 간의를 올려놓은 간의대()는 돌로 쌓은 것으로 높이가 31척, 길이가 47척, 너비가 32척이었다.
이 관상감(서운관의 바뀐 명칭)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경복궁과 더불어 불타 없어지자, 1688년(숙종 14) 남구만()이 북부 광화방()에 터를 잡아 관상감을 재건하였다. 
이것이 곧 창덕궁 금호문(:지금의 현대건설 자리) 밖에 있는 높이 3.5m, 넓이 2.42.5m인 관천대()로서 현재까지 남아 있다.
이 대 위에는 높이 1m의 네모진 돌이 있는데 관측할 때에 소간의를 설치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이 대를 일명 소간의대()라 하고 속명()으로는 첨성대라고 한다고 ≪서운관지 ≫에 적혀 있다. 
관천대와 비슷한 것이 현재 창경궁 안에도 남아 있는데 높이 3m, 넓이 2.92.3m이며, 역시 그 위에 높이 1m 정도의 네모진 돌이 놓여 있다. 그러나 제작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이상에서 우리 나라 첨성대의 변천에 관하여 대략 살펴보았다. 첨성대는 처음에는 점성대라고도 불려서 다분히 점성적이었던 것이 시대가 지남에 따라 영대라고도 하였다가 다시 관천대, 즉 더 정확하게는 간의대·소간의대라고 하는 과학적인 명칭으로 변하여 왔다. 한편으로는 예로부터의 습성에 따라 후세에까지 여전히 첨성대라고 불렸던 것이 사실인 듯하다.


정상부에 서거나 앉거나 또는 누워서 하늘을 관찰하는 데 매우 편리하였다고 한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 관측대인 국보 제31호 첨성대는 규모는 작지만 천체의 상징성과 계절의 변화를 정확하게 측정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네모난 받침에 둥근 몸체를 하고 있으며(天圓地方)꼭대기의 정자석(井字石) 4면은 자오선의 표준이다. 

몸체 중앙의 네모난 창은 태양이 남중하는 모습에 따라 춘분과 추분, 하지와 동지를 알려주는 기준점이 된다. 

이 밖에도 몸체를 이루는 돌은 360개로써 1년을 뜻하며 기단부와 몸체를 합한 28단은 별자리 28수를 상징한다. 창문을 기준으로 위, 아래 12단으로 나뉜 것은 1년 12달과 24절기를 의미한다.) 첨성대를 살펴보면서 선조들의 놀랍고 정확한 자연과학과 자연에 순응하며 하늘을 공경했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천문대이자 세계에서 가장 오랜 천문대로, 1300여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변함없이 서 있을 수 있는 첨성대, 그 비밀은 무엇일까요?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반월성과 대릉원 사이 벌판에 우뚝 서 있는 첨성대... 특이한 점은, 7세기 중반, 신라시대 선덕여왕 때 세워져 지금까지 단 한번의 보수나 개축이 없었다는 겁니다. 고대 건축물 중에 유일하게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 첨성대가 갖는 의미는 특별할 수밖에 없습니다. 

3층 건물 높이에 달하는 첨성대의 돌의 개수는 음력으로 1년을 의미하고, 단의 수는 신라 27대 선덕여왕을 상징한다고 전해집니다. 쌓아올린 돌의 개수와 단의 수에서도 그 치밀함이 엿보이는 첨성대, 천년이 넘는 세월을 버텨 현재까지 그 모습을 유지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첨성대의 축조방식을 면밀히 살펴보기 위해, 대전 국립 문화재 연구팀이 함께 했습니다. 실측결과, 첨성대는 1300여년 이란 세월 속에 미세하게 기울어져 있을 뿐이었고, 첨성대를 이룬 화강암의 강도는 콘크리트에 2배가 될 정도로.. 아직도 견고함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재료의 선정과 건축기술에 있어 뛰어났음을 보여주는데, 그렇다면, 내부 구조에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요? 첨성대의 출입문은 독특하게도 중간 위쪽 부분에 위치해 있습니다. 출입문 아래에는 당시, 사다리를 댔던 흔적이 보입니다.왜 출입구가 높은 곳에 있어야 했을까요? 어쩌면 그 안에 비밀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문화재 연구팀의 도움으로, 늘 궁금했던 첨성대 내부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첨성대의 내부는 조직적으로 돌을 쌓아 두른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위로 하늘이 보이는 구조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첨성대의 바닥을 보면, 출입문 4.5미터 높이까지 자갈과 흙으로 채워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갈과 흙의 적절한 배합은 1300여년 동안 첨성대의 좋은 배수로 역할을 했습니다. 자세히 보면 바닥 뿐 아니라, 쌓아 올린 단에서도 흙과 자갈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요즘의 시멘트와 같은 접합제 역할을 했습니다.

안정적인 볼록한 아치형 하단부를 만들어 흙과 자갈을 적절히 섞어둔 건, 첨성대를 지탱하게 한 힘이었습니다. 바로, 이 부분이 첨성대가 1300여년 동안 무너지지 않았던 비밀입니다. 당시 신라인의 건축기술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알 수 있는데, 지진으로 100여명이 사망했던 당시에도,무너지지 않았던 기록이 전해집니다. 몸체를 비집고 나온 이 돌 역시, 건축기술의 과학성을 보여주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내부 구조를 가로지르는 돌의 끝부분으로, 이 길다란 돌은 둥근 구조를 잡아주어 첨성대의 견고함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돌은 상층부로 올라가는 받침대 역할까지 했습니다. 신라인들은 이런 모습으로 상층부 꼭대기에 올라갔을거라 여겨집니다. 그렇게 첨성대에 오르면, 보이는 판석 하나. 한 명 정도 앉을 크기의 판석으로, 신라인은 이 위에 앉아 천문을 관측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세계 최초의 천문대란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자랑스런 우리의 문화유산 천문대. 여전히 신비에 쌓인 채 그 웅장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천문대는, 신라인의 건축과학이 빚어낸 자존심으로, 1300여 년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 있습니다.

2017년 12월 27일 수요일

아론 . Aaron.

아론의 지팡이 . Aaron's rod.
아론은 모세의 형으로서 모세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을 애급(,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사람이다. 그는 지팡이를 가지고 다녔다. 아론의 지팡이는 2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 애급의 바로 왕 앞에서 이적을 행한 것과 둘째, 대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는 데 아론의 합법성을 입증하는 데 의미가 있다. 

이적을 행한 것에 구약성서 《출애굽기》 7장 9절에 “바로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이적을 보이라 하거든 너는 아론에게 명하기를 너의 지팡이를 가져 바로 앞에 던지라 하라 그것이 뱀이 되리라”고, 19절에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에게 명하기를 네 지팡이를 잡고 네 팔을 애급의 물들과 하수들과 운하와 못과 모든 호수 위에 펴라 하라 그것들이 피가 되리니 애급 온 땅에와 나무 그릇에와 돌 그릇에 모두 피가 있으리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절대적인 의미를 뜻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각 지파에서 낸 12개의 지팡이 중 레위지파에 속하는 아론의 지팡이에 순이 나고 꽃이 피어 살구가 열렸다는 것이 나타나 있다(민수기 17:8~). 이것은 레위지파는 하느님의 택하심이 있었다는 것을 뜻하며, 대제사장직이 절대적인 것임을 나타내었다.

모세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궤약의 궤(언약궤) 앞에 두어 제사장권을 높였으며(민수기17:10), 후에는 계약의 궤 안에 보관하였다(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계약의 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다(히브리서 9:4).
12 가지 보석 사아론.Aaron.나이

아론이 명성을 떨칠 만한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그는 모세의 형이자 오른팔이었고 이스라엘최초의 제사장(후대 사제들의 조상)이었다. 신이 불붙은 떨기나무로 모세에게 나타나 히브리인들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라고 명했을 때 모세는 자신의 말이 어눌한 것을 애석해했다. 그러자 신은 그의 형 아론에게 '입'의 역할('대변인')을 맡기라고 명했다. 
모세보다 세 살 위인 아론은 출애굽기에 나오듯이 모세가 이집트 파라오와 여러 차례 만나 설전을 벌일 때 늘 모세의 곁을 지켰다. 아론이 가지고 다니는 지팡이는 뱀으로 변하는 기적을 보였다. 이집트 마술사들도 그 기적을 따라했으나 아론의 뱀이 그들의 뱀을 삼켜버렸다(출애굽기 7). 또한 아론은 신이 이집트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릴 때도 모세의 곁에 있었다.
아론은 이스라엘의 초대 제사장이었다. 아론은 미술과 문학에서 꽤 중요한 인물이다. 보통 모세의 곁에 그려지지만 수치스러운 금송아지 사건에 등장할 때가 많다. 아론은 이스라엘인들을 우상숭배로 인도하고, 성난 모세는 십계명을 들고서 시나이 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모습이 많이 그려졌다. 아론은 대개 성서에 설명된 사제의 복장이다. 
출애굽기 28장에는 제사장의 복장과 모자, 허리띠, 특히 열두 가지 보석(이스라엘 12지파의 이름들이 새겨졌다)으로 장식된 '흉패'에 관한 상세한 설명이 나온다. 그 보석들은 사제가 회막으로 들어갈 때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잊지 않겠다는 각오를 상징했다.

옛날 성서에는 구약성서의 첫 부분에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의 선지자와 사제를 대표하는 자격으로 함께 그려지곤 했다. 작곡가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오페라 「모세와 아론」에는 금송아지 사건이 삽입되어 있다. 
출애굽기를 다룬 영화, 예를 들면 1956년의 걸작 「십계」 같은 영화에서는 대개 아론에게 모세보다 훨씬 사소한 역할을 할당한다.
아론은 공을 많이 세웠으나, 모세가 시나이 산 위에서 신과 함께 있는 동안 우상을 만들어달라는 이스라엘인들의 요구에 굴복한 죄과가 있다. 
모세가 부숴버린 그 수치스러운 금송아지를 만든 사람이 바로 아론이다(출애굽기 32). 아론은 누이인 미리암과 형제끼리 다툼을 벌였고, 함께 모세를 질시하다가 신의 노여움을 샀다(민수기 12). 모세와 아론은 이스라엘인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죽었다.


아론은 훌륭한 사람이었을지 모르지만, 그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못난 자들이었다. 그들은 '이상한 불'―성서학자들은 그 불이 무엇인지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을 피운 벌로 신에게 죽음을 당했다(레위기 10). 그들이 예기치 않게 죽는 바람에 이스라엘의 제사장직은 나답과 아비후의 혈통이 아닌 아론의 셋째 아들 엘르아살의 혈통으로 계승되었다.

아론은 신이 보낸 '선지자'로 불린 동생 모세의 빛에 가려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이스라엘인들은 대체로 사제보다 선지자를 더 존경했다(선지자는 신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이라고 간주되었다). 
구약과 신약 사이의 시대에는 선지자가 없었으므로 사제―'아론의 자손'―가 더 중요했다. 구약성서에 '모세와 아론'의 이름이 나란히 언급된 경우가 많은 것을 보면 두 사람의 비중이 엇비슷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원후 70년, 로마가 유대 성전을 파괴한 이후 사제직은 영원히 없어졌고 아론의 자손이라는 것도 무의미해졌다. 신약성서의 히브리서는 하늘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제사장으로 있기 때문에 아론 같은 인간 사제가 필요 없다고 주장한다. 누가복음 1장은 선지자인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이 아론의 후손이라고 전한다.

민수기 17장에 따르면 아론의 지팡이에서 싹이 자라 살구가 열렸다고 한다. 그래서 꽃이 피는 정원수들 중에는 '아론의 지팡이(Aaron's rod)'라고 불리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아론의 수염(Aaron's beard)'이라고 불리는 정원수도 있다. 이는 보배로운 기름이 아론의 수염을 타고 흘렀다는 시편 133의 구절에서 유래한다.

유대인과 그리스도교가 모두 자주 암송하는 '아론의 기도(Aaronic benediction)'는 민수기 6:24~26에 나온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로 예배를 끝마칠 때 올리는 기도다. 무슬림들도 아론을 하룬(Harun)이라 부르며 선지자의 한 사람으로 존경한다.

모세 . Moses - 구약성서 속의 영웅.

모세"  Moses - 구약성서 속의 영웅.

성서 속에도 영웅이라 불릴 만한 인물들이 다수 등장하고 있다. 그들은 무기를 들지 않고 민중을 교화시킨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들이었다.

여기서는 성서 속의 영웅들에 초점을 맞춰보겠다.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킨 지도자 모세는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매우 겸손하고 이해심 많은 사람이었다.

모세는 구약성서 『출애굽기』부터 『신명기』에 걸쳐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집트 왕의 박해 & 모세의 탄생

이집트에서는 요셉의 등장 이래로 이스라엘 민족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이집트의 왕은 이스라엘 백성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왕은 이스라엘인들이 권력을 잡지 못하도록 강제노동을 시키는 한편 갓 태어난 사내아기들을 모두 죽여버리라고 지시했다.

산파들은 신의 노여움을 살 것이 두려워 감시를 피해 아기들을 빼돌리곤 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왕은 사내아기가 태어나면 모두 나일 강에 내다버리라고 전국에 포고령을 내린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고 있을 때 막중한 운명을 짊어진 한 사내아기가 태어난다. 어머니 요게벱은 갓난아기를 차마 나일 강에 버릴 수가 없어 파피루스로 짠 바구니에 아기를 담은 다음 갈대 사이에 내려놓고 떠난다. 
아기는 때마침 그곳에서 목욕을 하고 있던 왕의 딸에게 발견되어 궁정에서 자라게 되었다.
공주는 아기에게 물에서 태어났다는 뜻에서 '모세'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신 만난 모세

어느 날 모세는 한 이스라엘인이 이집트인 근로감독자에게 무지막지하게 구타당하는 모습을 보고 격분하여 그 잔인한 이집트인을 죽여버렸다. 그러고 나서 이집트를 탈출한 모세는 미디안 으로 가서 그곳 사제의 딸과 결혼했다.

어느 날 모세는 양떼를 몰고 신의 산 호렙에 올라갔다가 활활 타오르고 있는 가시덤불을 본다. 그 순간 모세는 자신을 이름을 부르는 신의 목소리를 듣는다.

신은 모세에게 이집트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으로 가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모세는 자신에게는 그럴 만한 능력이 없다고 항변하며 주어진 소명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신은 모세에게 지팡이를 뱀으로 바꿀 수 있는 마력, 새하얘진 손을 원상태로 되돌릴 수 있는 마력, 나일 강물을 피로 바꿀 수 있는 마력을 내려주었다.

그래도 모세는 자신의 부족한 말솜씨로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 수 없다며 제발 무거운 짐을 벗겨 달라고 신에게 간청했다. 이에 신이 언변이 뛰어난 모세의 형 아론에게 자신의 대변자 역할을 맡기겠다고 약속하자, 모세도 신의 대리인으로서의 소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집트로 향한 모세와 아론은 민중에게 신의 계시를 전했다. 그리고 모세는 세 가지 기적을 행함으로써 자신이야말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 진정한 지도자임을 보여주었다.

신 대 왕의 협상"

모세와 아론은 이스라엘 백성의 대리인 자격으로 이집트 왕과 협상을 벌였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흘간 휴가를 주어 황야로 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의 신을 위해 제사를 지내게 해주십시오. 이것은 신의 명령입니다."

모세의 제안을 강제노동에서 벗어나기 위한 허튼수작이라고 단정지은 왕은 제안을 들어주기는커녕 이스라엘 백성을 보다 더 가혹하게 다루기 시작했다. 곤경에 처한 모세와 아론은 신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모세와 아론은 왕에게 재차 자신의 뜻을 전달하라는 신의 지시에 따라 또다시 왕을 찾아갔다. 이때 신은 모세의 몸을 빌려 다음과 같은 기적을 보여주었다.

1). 지팡이를 던지자 나일 강이 피로 물들었다.
2). 이집트 전역을 개구리로 들끓게 만들었다.
3). 지팡이를 던지자 땅의 먼지가 이로 변했다.
4). 이집트 전역에 파리 떼를 보냈다.
5). 역병이 돌게 하여 이집트의 가축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6). 아궁이의 검댕을 부스럼을 일으키는 세균으로 변하게 했다.
7). 엄청나게 큰 우박을 내렸다.
8). 메뚜기 떼가 극성을 부렸다.
9). 이집트를 암흑세상으로 만들었다.
10). 이집트 땅의 사람과 짐승의 처음 난 것을 죽게 했다.

이러한 재앙을 직접 목격하고도 왕은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최후의 수단으로 이집트의 모든 장자를 죽이기로 마음먹은 신은 이스라엘 민족은 그 화를 면할 수 있도록 어린양의 피를 두 개의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다음 집안에서 죽인 양의 고기를 구워 '누룩이 들어 있지 않은 빵'과 함께 하룻밤 안에 먹으라고 명령한다.

신의 계시대로 이집트의 모든 장자가 죽어버리자, 왕은 울며 겨자 먹기로 모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집트 에서 탈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홍해에 면한 광야로 나아갔다. 이때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그들의 앞길을 비춰주었다.


맹렬한 기세로 달려온 이집트 군이 모세 일행을 거의 따라잡았을 때, 망망한 바다가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사면초가의 신세가 된 모세의 귀에 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에 든 지팡이를 바다 위로 내밀어라."

모세는 신의 말씀대로 지팡이를 든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바닷물이 양옆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신의 가호에 감사드리며 바다 건너편으로 달아났다. 
이집트인의 노예로 마음껏 부려먹을 수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대로 순순히 보내줄 수는 없다고 생각한 이집트 왕은 군대를 정비하여 모세 일행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이집트 군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후, 모세는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며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쉼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모세 일행은 그로부터 석 달 후 시나이 광야에 도착했다.



일행의 뒤를 바짝 쫓아오던 이집트 군도 전속력을 다해 바닷길로 몰려들고 있었다. 
모세는 다시 지팡이를 든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러자 갈라졌던 바닷물이 엄청난 파도를 일으키며 원래 대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이집트의 병사들은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모조리 바다 속에 수장되고 말았다.

십계

시나이 광야에 도착한 지 사흘째 되는 날, 신이 무시무시한 바람과 함께 시나이 산에 강림했다. 신은 모세를 불러 십계를 비롯한 여러 가지 규율을 내려주었다. 
신과의 계약을 모두 받아 적은 모세는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여주었다.

신과의 계약서에는 가나안은 이스라엘 민족의 땅이라는 것, 그리고 가나안에서 그들이 지켜야 할 규율이 상세히 규정되어 있었다. 
모세 일행은 신과의 계약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신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번제() 와 수은제()를 드렸다.

금송아지

어느 날 모세는 신의 부름으로 시나이 산에 올라갔다가 장기간의 산상 금식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모세는 신에게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사해 줄 것을 간청했다. 그리고 언제든 신이 강림하여 계시를 내릴 수 있도록 신의 처소인 '만남의 성막'을 건조했다.
모세의 부재에 불안을 느낀 이스라엘 백성은 아론에게 달려가 모세가 섬기는 신과는 다른 우상을 만들어달라고 청한다. 이에 아론은 여자들의 금귀걸이를 모아 금송아지 상을 만든다.

이스라엘 백성은 금송아지를 모셔 놓고 번제와 수은제를 드린 후 빙 둘러앉아 먹고 마시며 가무를 즐겼다. 산에서 내려와 이 광경을 목격하고 그들의 얄팍한 신앙심에 격분한 모세는 금송아지 상을 부숴버렸다.

신에 대한 불신

다음해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을 향해 출발했다. 그들은 구름이 성막에서 걷혔을 때 앞으로 나아가고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 때 행군을 멈췄다.

약속의 땅 가나안이 눈앞으로 다가오자, 모세는 그곳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열두 명의 정찰병을 파견했다. 정찰병들은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땅이긴 하지만, 방비가 튼튼하여 정복하기가 여의치 않을 것 같다고 보고했다.
여행이 장기화되면서 처음에는 신을 믿었던 사람들조차 불만의 소리를 높이기 시작하자, 모세는 때때로 신의 기적을 보여주며 끈기 있게 그들을 설득했다. 이처럼 순탄치 못한 여정을 거쳐 이스라엘 백성은 마침내 바란 광야에 도착했다.


절망에 빠진 사람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이집트로 돌아가 노예생활을 하는 것이 낫겠다는 회의적인 목소리도 들려왔다.

이스라엘 백성의 끊임없는 불신과 원망에 분노한 신은 이렇게 모세에게 말했다.

"나를 믿지 않은 스무 살 이상의 자들은 모두 죽게 될 것이다. 그 자녀들은 40년간 광야에서 양치기로 떠돌며 죽은 자들의 죄갚음을 한 후에야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대부분의 정찰병들이 죽고 갈렙과 여호수아만이 살아남아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가나안을 향한 모세 일행의 여정은 40년간이나 계속되었다.

그런데 여행 도중에 모세 자신도 신의 노여움을 사는 우를 범하고 만다.

모세는 식수부족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위해 신에게 기도를 드렸다. 신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지팡이로 바위를 치면 물이 솟아날 것이라고 계시했다. 이때 모세는 바위를 치기 전에 우선 명령을 내리라는 신의 말씀을 거역하고 아무런 말 없이 바위를 내리쳤다. 신은 순종과 겸손의 태도를 잃어버린 모세와 아론 역시 가나안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모세는 신의 계시에 따라 여호수아를 '만남의 성막' 안으로 불러들였다. 신은 여호수아에게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임무를 맡겼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모든 율법을 부지런히 가르쳐야 한다.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라 할지니라."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의 말을 남기고 피스가 산으로 올라갔다. 그곳은 모세 자신은 결코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약속의 땅 가나안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장소였다.

출애굽의 지도자요, 율법의 기록자며, 대선지자로서, 사실상 구약을 대표하는 인물. 그의 부친은 레위 지파 출신 아므람, 모친은 요게벳, 형은 아론, 누나는 미리암(출 2:1; 6:20; 민 26:59).

모세의 생애는 40년씩 3기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40년 간은, 생후 3개월 때 갈대 상자에 담겨 나일 강에 버려졌으나 애굽 공주의 도움으로 구출된 뒤 그녀의 양자로 바로의 궁정에서 산 40세까지의 세월(출 2:1-15; 행 7:20-29; 히 11:23-26). 모세는 히브리인 사내아이를 죽이라는 바로의 칙령에 의해(출 1:16), 태어난 지 석 달 만에 갈대 상자에 넣어져 나일 강에 버려졌으나 하나님의 간섭으로 바로의 공주에게 건져졌고(출 2:2-6; 행 7:20; 히 11:23), 어머니를 유모로 하여 바로 궁에서 애굽의 학문을 배우며 성장할 수 있었다(출 2:5-10; 행 7:22). 
나이 40세 때 동족 이스라엘 백성을 돌아볼 마음이 생겼고 우연찮게 동족을 괴롭히는 애굽인을 살해한 뒤 모래에 숨기고는 그것이 탄로날까 두려워 미디안 땅으로 도피하게 된다(출 2:11-15; 행 7:23-29; 히 11:24-26).

두 번째 40년 간은, 살인자요 도망자이자 또 목자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미디안 광야에서 80세까지의 도피 생활(출 2:16-3:1; 행 7:24-29). 미디안에 도피한 모세는 그곳 제사장의 딸 십보라와 결혼하여(출 2:16-21), 두 아들을 얻고(출 2:22; 18:2-4; 대상 23:15; 행 7:29), 호렙광야에서 장인 이드로의 목자가 되어 생활했다(출 3:1).

마지막 40년 간은, 시내(호렙) 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고(출 3:1-22), 하나님이 주도하신 10가지 재앙을 통해 애굽의 바로를 굴복시키고(출 5:1-12:51) 출애굽의 이상을 실현한 후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대면하여 율법을 전해받고, 
성막을 완공하였다(출 19-40장). 그후 가데스 바네아 불신앙 사건으로(민 13-15장)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40년 광야에서 생활하게 된다(신 2:13-15; 행 7:34-36).  
향년 120세를 일기로 약속의 땅 가나안이 바라다 보이는 모압 땅 느보 산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생을 마감했다(신 34:1-8). 모세는 5경(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을 기록했으며, 신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약 인물이기도 하다.

성경 이 평가 한 모세

하나님과의 내밀한 대화를 나눌 정도의 친분 관계(출 33:11; 민 12:8), 중보자(갈 3:19; 출 32:11-14, 32), 선지자 또는 예언자(신 18:15; 호 12:13; 행 3:22-23; 7:37), 율법의 전수자(출 12:14; 신 28:58, 61; 29:27; 30:10; 31:25-26; 단 9:11, 13; 말 4:4; 막 7:10; 요 1:17; 7:19), 계시의 전달자(신 18:18), 말씀의 기록자(출 17:14; 24:4; 민 33:2; 신 31:9-11, 24; 막 12:26; 눅 20:37; 요 5:46-47), 율법의 대표자(눅 16:29, 31), 백성의 지도자(민 11:16-17; 사 63:12-13; 미 6:4; 고전 10:1-2).

모세는 성격이 급한 편이었고(출 5:22-23; 6:12; 32:19; 민 16:5), 종종 화를 내거나(출 32:19),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출 5:22-23).  
전체적으로 그는 믿음이 있었으며(민 10:29; 신 9:1-3; 히 11:23-28), 온유하고(출 4:13; 민 12:3), 관대했다(민 11:27, 29). 그리고 하나님께 충성스러웠고(민 12:7; 히 3:2-5), 순종적이었다(출 7:6; 40:16, 19, 21).

모세 & 그리스도 의 공통점

1)  선지자다. 즉, 모세는 최초의 선지자요 그리스도는 최후의 선지자다(행 3:22-23; 7:37; 신 18:15-19). 
2)  태어나면서 죽음의 위기를 맞았다(출 2:2-10; 마 2:14-15). 
3) 세속적인 유혹을 물리쳤다(히 11:24-26; 마 4:8-11). 
4) 40일 간 금식했다(출 34:28; 마 4:2). 
5) 바다를 제어했다(출 14:21; 마 8:26). 
6) 사람들을 배불리 먹였다(출 16:16-18; 마 14:20-21). 
7) 얼굴에 광채가 났다(출 34:29; 마 17:2). 
8) 가까운 가족에게서 인정을 받지 못했다(민 12:1; 요 7:5). 
9) 하나님의 대언자였다(출 32:32; 요 17:8). 
10) 70인을 세웠다(민 11:16-17). 
11) 절기를 제정했다(출 12:14; 눅 22:19). 
12) 하나님의 계시로 말씀했다(신 18:18; 요 7:46). 
13) 죽은 후 다시 살아났다(마 17:3; 행 1:3). 
14) 변화산에서 더불어 말씀을 나눴다(마 17:3-4; 눅 9:30-33). 
15) 백성을 죄악 세상에서 약속의 나라로 인도했다(히 3:16; 벧전 3:18).

모세  의 한계 는?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켰지만 정작 자신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모세로 대표되는 율법의 한계를 지적하는 학자들이 많다. 모세의 한계는 다음과 같다.

모세는 철저히 오실 메시야 예수를 예언하는 위치에 서 있을 뿐이다(눅 24:44; 요 1:45; 5:46-47; 행 3:22; 7:37; 26:22-23). 모세는 장차 십자가에 달려 인류를 대속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이다(요 3:14). 모세의 율법으로는 의롭다함을 얻지 못한다(행 19:39). 
모세로 대표되는 율법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고 다만 고소하고 정죄하고 죽게 하는 역할을 한다(요 5:45; 롬 4:15; 5:20; 7장; 고후 3:7-11). 모세의 할례가 구원의 증표가 될 수는 없다(요 7:22-23). 
모세(율법)는 죄인을 참 구주요 생명의 길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롬 5:20-21; 히 10:1-22). 모세의 만나는 하늘에서 내린 생명의 참 떡이 되지 못했다(요 6:32). 모세 자신은 하나님을 뵈옵고 심히 두려워하며 떨었다(히 12:21),

파라오 열 가지 재앙

아론과 함께 이집트로 돌아온 모세는, 파라오를 만나서 신의 명령임을 설명하고 이집트 출국 허가를 얻으려 했다. 그러나 이 일은 파라오의 분노를 사서 유대인은 중노동을 강요받게 되었다.

이 일로 인해 같은 민족에게도 미움을 받게 된 모세는 여호와의 말에 따라 재차 파라오를 방문했다. "파라오가 너희에게 이적을 보이라고 요구하거든, 너는 아론에게 지팡이를 집어 파라오 앞에 던지라고 하여라. 그러면 그것이 뱀이 되리라." 이 기적을 본 파라오는 현자들과 마술사들을 불러들여 똑같은 마법을 부리게 했다. 하지만 아론이 던진 뱀은 파라오의 뱀을 몽땅 삼켜버렸다.

갈라지는 바다

그리고 결국 파라오가 유대인을 막은 것을 한탄하게 되는 날이 왔다. 여호와의 힘으로 이집트의 모든 맏아들의 생명을 하룻밤 사이에 빼앗은 것이었다. 파라오는 모세와 아론을 불러내어 마침내 재앙의 원흉인 유대인을 이집트에서 나가라고 간청했다. 이리하여 60만 명의 유대인이 해방되어 황야를 향해 여행길에 올랐다. 하지만 유대 민족이 떠나간 후, 파라오와 그의 부하들은 거대한 노동력을 잃었다는 사실을 재차 깨달았다. 그들은 후회하며 지금이면 따라잡을 수 있으리라는 일념으로 전차와 군대를 일으켜 추적하기 시작했다.

백성을 이끈 모세는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나타난 신의 인도를 따라, 갈대바다(홍해라고 알려져 있다)로 향했다. 그런데 뒤에서는 추격해오는 이집트 군대의 모래먼지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내몰린 백성들은, 자기들을 황야에서 죽게 하려고 데리고 나왔느냐며 모세를 비난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진하라고 명령하여라. 너는 너의 지팡이를 들고 바다 위로 팔을 뻗쳐라."

여호와의 말에 따라 모세는 지팡이를 들어올리면서 바다를 향했다. 그러자 바다는 둘로 갈라지며 백성들의 눈앞에 마른 땅이 열렸다. 백성들은 그 길을 따라 맞은편 해안으로 도망쳤다. 뒤늦게 쫓아온 이집트 군대가 추격하려고 바다 틈새로 돌입해 들어왔지만, 신의 힘과 바다 밑바닥의 진흙에 마차바퀴가 엉켜 좀처럼 나아가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에 유대인은 바닷길을 다 건너가고 말았다.

"네 팔을 바다 위로 뻗쳐라." 여호와의 말에 따라 모세가 재차 지팡이를 들어올리니, 좌우로 나뉘어 벽처럼 솟아 있던 바닷물이 한꺼번에 무너지면서 이집트 군대를 덮쳤다. 파라오의 군대는 한 사람도 남김없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구약성서에서 말하는 출애굽기의 결말이다.

마술사의 지팡이

모세의 지팡이는 그 자체가 마력을 갖고 있는 것도, 특별한 재질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이집트의 마술사들이 뱀의 머리를 끝에 장식한 마법 지팡이를 갖고 있는 것에 비해서, 이것은 특별히 다를 것도 없는 양치기의 지팡이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팡이를 통해서 나타난 기적의 힘은 강한 인상을 남겼다.

모세는 신의 힘을 대행하는 자가 되어 많은 기적을 일으킨 최초의 사람이며, 또한 신과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눈 최후의 예언자이다. 카발라 마술을 전해준 인물로도 전해진다. 후세의 자연마술 연구자처럼 기적을 탐구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모세는 목표를 삼을 만한 현자, 위대한 마술사였다. 
연금술 계열의 문헌에는 모세가 썼다고 추정되는 것도 적지 않고, 『솔로몬의 열쇠』의 사본 중 마술왕 솔로몬을 인도하는 선각자로서 모세의 모습을 삽화로 그려넣은 것도 있다.

율법자 모세는 후세 사람들에게는 최초의 마술사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기적을 행한 지팡이가 마술의 상징으로 각인되어 있는 것이리라. 서양적 마법사의 원형으로서 갠달프나 멀린을 예로 드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에 모세의 이름을 첨가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파라오는 여호와의 위대함을 인정하지 않고 완고하게 백성들의 해방을 거부했다. 그래서 모세는 차례대로 지팡이로 나일 강을 쳐서 피의 강을 만들고 먼지를 지팡이로 쳐서 모기나 등에로 바꾸는 등, 온 이집트를 들끓게 하는 열 가지 기적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이집트의 마술사들도 똑같은 마법을 사용할 수 있어서 파라오는 그다지 걱정을 하지 않았지만, 역병과 종기, 태풍과 메뚜기 등 엄청난 재해가 이집트를 습격하게 되자,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되었다. 파라오는 유대인을 해방시키겠다고 모세에게 약속하여 재앙을 몇 번씩 멈추게 했지만, 즉각 말을 바꾸어 그때마다 약속을 깼다. 그리고 차례대로 새로운 재앙이 모세의 지팡이로부터 나온 것이다.



모세의 지팡이
기적을 부르는 마법의 지팡이. Staff of Moses.
서양의 환상문학에는 빠지지 않고 늙은 마법사가 등장한다. 이 지혜로운 노인은 깊은 지식과 마법의 기술을 상징하는 지팡이를 짚고 있는 게 보통이다. 이런 이미지의 원형 중 하나가 된 것이, 서양인들에게 친근한 구약성서의 위인, 예언자 모세의 지팡이이다. 모세의 지팡이는 신의 힘을 나타내는 매체로서 갖가지 유명한 기적을 실현했다.

 모세 (예언자)지팡이

예언자 모세의 생애는 구약성서 「출애굽기」에서 시작하여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걸쳐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따르면 모세는 이집트로 이주해온 유대인의 자녀로 태어났다. 
당시(기원전 13세기경이라 일컬어진다), 유대인은 파라오가 위기감을 느낄 정도로 숫자가 불어났기 때문에 강제노역에 동원되고 남자 아기가 태어나면 나일 강에 빠뜨려야 하는 가혹한 운명이 주어졌다. 모세는 이집트 왕녀가 물에서 건져내는 행운과 만나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성인이 된 후, 이집트인을 죽인 죄로 인해 모세는 미디안이라는 땅으로 도망쳐 양치기로 살았다. 긴 세월이 흐르고 모세가 노년에 접어들었을 때, 그가 양을 몰고 성지 호렙 산에 오르자, 불타오르는데도 타지 않는 이상한 섶나무를 발견했다. 
불꽃 속에서 말을 거는 음성은 유대의 신 여호와의 목소리였다. 그 음성은 모세에게, 유대인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와 젖과 꿀이 흐르는 땅(가나안)으로 인도하라는 사명을 주었다.

모세는 놀랐지만 신의 말을 거역하지 않았다. "그들이 저를 믿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제 말을 듣지 않고, 야훼께서 저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헛소리라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자 신은 물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지팡이입니다. "그 지팡이를 땅에 던져라."

신의 말대로 하자, 지팡이는 곧 뱀으로 변했다. 모세는 놀라서 달아났지만 다시 뱀의 꼬리를 잡자 지팡이로 되돌아왔다. 계속하여 신은 모세에게 손을 품에 넣어보라고 했다. 지시에 따르자 빼낸 손은 피부병에 걸려 새하얗게 되었다. 다시 한 번 품에 손을 넣자 원래대로 돌아왔다.

"만일 그들이 이 두 증거를 보고도 믿지 않고 네 말을 듣지 않거든 나일 강의 물을 퍼다가 마른 땅에 부어라. 네가 강에서 퍼다가 마른 땅에 부은 물이 피가 되리라."

모세는 여전히 천성적으로 말재간이 없음을 이유로 물러나려 했다. 여호와는 노하면서 이제부터 웅변가이자 모세의 형인 아론이 올 테니까 달변은 그에게 맡기라고 명했다.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거라. 이것으로 증거(신의 위대한 힘과 권위를 증명하는 기적을 가리킨다)를 보여주어라."(신으로부터 받은 기적의 지팡이가 양치는 지팡이와는 다른 것이었다고도 한다. 또한 이 지팡이는 사용하는 자의 이름을 따서 '아론의 지팡이'라고도 불렸다.)

모세의 죽음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결국 모세는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은 40년간의 방랑 끝에 모압이라는 곳에 도착했다. 모압은 요르단 강을 사이에 두고 가나안과 대치하고 있는 지역이었다. 
모세의 나이는 백스무 살이었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모세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때까지의 여정을 반추하며 십계명을 상기시킨 후 다음과 같이 설교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명기 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