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시대에 건립된 천문대이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31호로 지정되었다.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소재하며 높이 9.17m, 밑지름 4.93m, 윗지름 2.85m이다. 밑에서부터 4.16m 되는 곳의 남쪽 허리에 한 변이 1m인 정사각형 문이 달려 있다.
모양은 원통형으로 남쪽 문에 사다리를 걸었던 자리가 있다. 30cm 높이의 돌 361개 반을 사용하여 상층부와 기단을 제외한 27단을 쌓아 올렸다.(전체 돌의 개수는 401개)
첨성대가 제단이었다는 학설도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재위 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내부는 제12단까지 흙이 차 있고, 제19단에서 제20단까지와 제25단에서 제26단까지의 두 곳에 정(井)자형 장대석(長大石)이 걸쳐 있는데 그 양끝이 밖으로 나가 있다.
혼천의(渾天儀)와 같은 관측기구를 정상에 설치하고 춘분 ·추분 ·동지 ·하지 등의 24절기를 별을 통하여 측정하였고, 정자석을 동서남북의 방위를 가리키는 기준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제27단 내부의 반원(半圓)에는 판석(板石)이 있고, 맞은편에는 판목(板木)을 놓았던 곳으로 보이는 자리가 있다. 판석은 길이 156cm, 너비 60cm, 두께 24cm이다.
꼭대기에는 정자석(井字石)이 2단으로 짜여 있는데, 그 위에 관측기구를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정의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신라시대 천문을 관측하던 건물.
별을 보기 위하여 높이 쌓은 대.
개설
국보 제31호. 높이 약 9.5m. 첨성대가 위치한 곳은 옛날에는 경주부(慶州府) 남쪽 월남리(月南里)라고 하였고, 계림(鷄林)의 북방 약 150∼200m, 내물왕릉 동북방 약 300m 되는 곳이다. 이 근방을 속칭 비두골이라고도 한다.
첨성대는 『삼국유사』기이(紀異) 권2의 별기(別記)에 “이 왕대(王代)에 돌을 다듬어서 첨성대를 쌓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신라 선덕여왕 때(재위 632∼647)에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같은 책 왕력(王曆) 제1에 신라 제17대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 이야기 끝에 “능은 점성대(占星臺) 서남에 있다.”라는 기사가 있는데 현재의 내물왕릉과 첨성대의 위치 관계와 잘 부합된다. 이 기록에서 첨성대가 별명으로 점성대라고 불렸던 것을 알 수 있다.
내용
첨성대의 기능에 대해서는 조선 말기 이후 일제강점기까지도 천문대(天文臺), 즉 천문관측을 하는 곳으로 이해되었다. 그런데 광복 이후에 갑자기 이에 대한 이설이 제기되며, 제단(祭壇)·기념물·불교관계 건축물 등의 여러 가지 설과 이견이 속출되었다. 이런 설에 대하여 종전의 전통적인 입장에서 천문대로 해석하는 연구도 물론 진행되었다.
이설들이 나온 이유의 하나는 현존하는 첨성대가 평지(平地)에 있다는 것, 첨성대 자체의 구조상 그 위로 오르내리는 통로가 매우 불편하다는 점 등이다. 그러나 당시의 역사적 환경은 나라마다 다른 첨성대 또는 점성대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고대천문학은 크게 천문(天文)과 역법(曆法)으로 양분된다. 중국의 사서(史書)에도 『역지(曆志)』 또는 『율력지(律曆志)』와 『천문지(天文志)』가 뚜렷하게 구별되어 기재되어 있다. 천문관측은 크게 두 분야로 나눌 수 있겠는데, 첫째는 역법을 만들기 위한 태양·달·행성의 운행을 관측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점성(占星)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바와 같이 항성(恒星)의 배치로 정해진 별자리[星座]를 지방 또는 국가로 분배하였다.
그 분야에서 일어나는 제반 천문현상을 관찰하여 국가의 길흉을 점치는 일이다. 이러한 점성은 조선시대 말까지도 계속되었는데, 고대로 올라갈수록 그 비중이 컸던 것이다. 그러므로 또는 고대인의 자연철학적인 천문관측이 국가나 왕조에는 매우 중요하였으며, 되도록이면 왕궁에 가까워야 하였음은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점성적인 것이 제사(祭祀)나 점복(占卜)과 가까울 수도 있음직한 것이다.
구조는 아래의 기단부(基壇部), 그 위의 술병형의 원통부(圓筒部), 다시 그 위의 정자석(井字石) 정상부(頂上部) 등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땅속에는 잡석(雜石)과 목침(木枕) 크기의 받침돌, 그리고 기단부 서쪽으로는 일렬로 자연석이 놓여 있다. 이 기초를 다진 돌 위에 2단으로 된 기단석이 놓여 있다.
기단부는 정방형으로 한 변의 길이가 하단은 5.36m, 상단은 5.18m이며, 두 단이 다 높이가 39.5㎝로서 두 단을 합쳐서 79㎝의 높이가 된다. 이 기단부는 남쪽 변이 정남(正南)에서 동쪽으로 19° 돌아서 있다.
기단 위의 원통부는 높이 약 30㎝인 부채꼴의 돌로 27단을 쌓아올렸는데, 27단의 높이는 8.08m이며, 최하단의 원둘레는 16m, 제14단의 둘레는 11.7m, 최상부인 제27단의 둘레는 9.2m이다.
제13∼15단에 걸쳐서 정남에서 동쪽으로 약 16°가 되는 방향을 향하여 한 변이 약 95㎝인 정방형의 창구(窓口)가 나 있다. 이 창구의 아랫변의 돌은 대형의 평판석(平板石)으로 되어 있어서 내부의 면적을 크게 차지하고 있다.
창구의 내부 아래쪽은 잡석으로 채워져 있으며, 그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는 형태이다. 그 내벽은 선형석(扇形石)의 꼭지 부분이 삐죽삐죽 나와 있다.
원통부의 제19단과 제20단에는 각각 남북·동서로 2개씩의 장대석이 걸쳐 있어 네 개가 ‘井’자를 이루는데, 그 장대석의 끝은 원통부의 바깥까지 뚫고 나와 있다. 같은 구조가 제25단과 제26단에도 있는데, 여기서는 아래의 것이 동서, 위의 것이 남북으로 걸쳐서 ‘井’자를 이룬다.
맨 위인 제27단에는 동쪽 절반이 평판석으로 막혀 있다. 이 평판석은 그 아래의 장대석에 놓여 있는데, 윗면이 둘레의 제27단보다 약 6㎝가 낮게 되어 있다. 그리고 평판석이 없이 환하게 뚫린 서쪽 절반의 공간으로 나온 제27단의 선형석의 끝에는 3개에 걸쳐서 일직선으로 인턱이 패어 있다. 두께 6㎝ 정도의 나무판[木板]을 동반부의 평판석과 이 인턱에 걸치면 중앙에서 위로 뚫린 공간이 막히고 상부에는 ‘井’자석 안에 네모난 방이 형성된다.
제27단의 원통부 위에는 각 네 개씩으로 짜인 ‘井’자석이 두 단에 걸쳐서 놓여 있어서, 사각형의 정상부를 이룬다. 이 ‘井’자석의 길이는 306㎝, 높이와 너비는 각각 32㎝, 두 단의 높이를 합치면 64㎝, ‘井’자석이 이루는 내부 정방형의 한 변은 220㎝로서 재래의 한옥방 한 칸의 넓이가 된다.
이 ‘井’자석은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에 자리를 바로잡아서 떨어지지 않게 수리를 하였다고 한다. 수리한 사람의 말에 의하면, 그때 방향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고 하나, 현재로서는 남쪽면이 정남에 대하여 서쪽으로 약 8°가 돌아간 방향을 향하고 있다.
첨성대의 석재는 화강석(花崗石)인데 표면에 노출된 부분은 모두 다듬어져 있다. 석재의 개수는 종래 365개라고 하였으나 기단석까지 포함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정확히 365개는 아니다.
이와 같은 구조로 총 높이가 9.51m가 되는데, 홍사준(洪思俊)은 사다리 세 개를 마련하여 한 개는 지상에서 중앙 창구까지, 한 개는 중앙 창구 안에서 내부의 제19·20단의 ‘井’자석까지, 나머지 한 개는 제19·20단에서 제25·26단의 ‘井’자석까지 걸쳐서 정상의 ‘井’자석 안으로 올라갈 수 있으며, 오르내리는 데 큰 불편은 없었다고 한다.
1715년(숙종 41) 하나의 관상감을 경희궁 개양문(開陽門) 밖에 만들었는데, 거기도 관천대가 있었다고는 하나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다만 <도성도 都城圖>에만 표시되어 있을 뿐이다.
현존하는 첨성대 중 대표적인 것은 신라시대 경주에 있었던 것이다. 별을 보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의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국가의 길흉을 점치기 위하여 별이 나타내는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역법(曆法)을 만들거나 그 오차를 줄이기 위하여 별이나 일월오성(日月五星:해와 달 그리고 지구에서 가까운 금성·목성·수성·화성·토성의 다섯 행성)의 운행을 관측하는 것이다.
전자는 미신적인 점성학이고, 후자는 과학적인 천문학 또는 역학(曆學)이다. 이 두 가지 관측의 비중은 시대가 지날수록 후자 쪽이 강하게 작용하였음은 물론이다. 우리 나라의 첨성대도 점성학적인 비중이 컸던 시대에 시작되었다고 생각된다.
(1) 고구려
고구려의 첨성대에 대하여는 ≪세종실록≫지리지에 “평양성 안에 9묘(廟)와 9지(池)가 있는데…… 그 못가에 첨성대가 있다.”는 기록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평양의 첨성대 옛터가 평양부 남쪽 3리(里)에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모두 고구려의 첨성대를 말하는 것인데 현재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2) 신 라
신라의 첨성대는 경주에 실물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삼국유사≫·≪고려사≫지리지·≪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증보문헌비고≫ 등에 기재되어 있다. 선덕여왕 때에 축조된 것으로 상방하원(上方下圓:위는 네모지고 아래는 둥근 모양)이며, 높이는 19척5촌, 위의 원둘레가 21척6촌, 아래의 원둘레가 35척7촌이며, 중간 이상이 위로 뚫려서 사람이 그 속으로 오르내리며 별을 관측하였다는 기록이 현존 실물과 일치한다.
이 첨성대는 ≪삼국유사≫에 의하면, 점성대(占星臺)라고도 불렀음을 알 수 있는데, 얼마 뒤에 일본에서 점성대를 쌓았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이 이ㅅ다고도하는데??? 밑기어렵다. 경주의 첨성대는 국보 제31호로 지정되어 있다.
(3) 백 제
백제의 첨성대에 대해서는 문헌의 기록도 없고 건축물이 있었던 터도 없다. 그러나 백제가 일본과 천문역법을 교류한 역사적 사실로 보아서 ≪일본서기≫에 나타난 첨성대가 없었다고 할 수는 ??.
(4) 고 려
고려의 첨성대에 대한 기록도 별로 없다. 강화도마니산(摩尼山) 정상의 참성단(塹星壇)의 기록과 터, 개성만월대(滿月臺) 서쪽에 첨성대라고 구전(口傳)되는 석조물이 전해오고 있다.
여러 지리지에 따르면, 참성단은 돌을 쌓아서 만든 것으로 높이가 10척 상방하원이며, 위의 사면(四面)이 각각 6척6촌, 아래의 원 너비(지름)가 각각 15척이다.
세간에 전하기를, 단군(檀君)이 하늘에 제사를 올린 곳으로 산기슭에 재궁(齋宮)이 있어서 매년 봄·가을에 대언(代言:承旨)을 보내어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점성과 제천(祭天)의 관계, 참성단과 경주 첨성대의 상방하원의 형태상의 비슷함과 명칭이 소리가 서로 비슷한 것,
그 뒤 조선시대에 마니산 산정에서 천문관측을 하였다는 기록 등으로 보아 고려가 몽고의 침공을 받았던 강화도에 도읍이 있었던 때의 첨성단이 아니었던가 하는 의심이 가는 곳이다.
만월대의 첨성대는 높이 3m 가량의 다섯 개의 돌기둥으로 받친 석대(石臺)로서 위의 평면넓이가 대략 3m×3m로 9㎡이다. ≪고려사≫에는 충렬왕 7년(1281) 원나라에서 수시력(授時曆:원나라 곽수경이 만든 달력)이 들어 왔는데, 왕은 태사원(太史院)에 명하여 영대(靈臺:임금이 기상을 보는 대)와 천문기기(天文器機:觀象)를 만들어서 일월(日月)을 관측하여 도수(度數:각도나 광도 등의 크기)가 맞는가를 자세하게 참고하고 살폈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아 이때부터 그 영대 위에 측기(測器)를 놓고 천문관측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현존하는 만월대의 첨성대가 설령 이 밖의 기록은 없다 해도 위의 기록과 같은 관측에 사용되었던 관천대(觀天臺)일 가능성은 매우 크다.
(5) 조 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개국 초부터 고려의 서운관(太卜監과 太史局을 합친 것)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였는데, 1420년(세종 2)에는 첨성대를 세우고, 그 뒤에 다시 경복궁 안의 서운관을 확충하여 간의(簡儀:장영실과 이천 등이 만든 관측기)를 비롯한 천문기기를 10여 종이나 만들어서 설치하고 관측하였다. 그 중 간의를 올려놓은 간의대(簡儀臺)는 돌로 쌓은 것으로 높이가 31척, 길이가 47척, 너비가 32척이었다.
이 관상감(서운관의 바뀐 명칭)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경복궁과 더불어 불타 없어지자, 1688년(숙종 14) 남구만(南九萬)이 북부 광화방(廣化坊)에 터를 잡아 관상감을 재건하였다.
이것이 곧 창덕궁 금호문(金虎門:지금의 현대건설 자리) 밖에 있는 높이 3.5m, 넓이 2.4m×2.5m인 관천대(觀天臺)로서 현재까지 남아 있다.
이 대 위에는 높이 1m의 네모진 돌이 있는데 관측할 때에 소간의를 설치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이 대를 일명 소간의대(小簡儀臺)라 하고 속명(俗名)으로는 첨성대라고 한다고 ≪서운관지 書雲觀志≫에 적혀 있다.
관천대와 비슷한 것이 현재 창경궁 안에도 남아 있는데 높이 3m, 넓이 2.9m×2.3m이며, 역시 그 위에 높이 1m 정도의 네모진 돌이 놓여 있다. 그러나 제작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이상에서 우리 나라 첨성대의 변천에 관하여 대략 살펴보았다. 첨성대는 처음에는 점성대라고도 불려서 다분히 점성적이었던 것이 시대가 지남에 따라 영대라고도 하였다가 다시 관천대, 즉 더 정확하게는 간의대·소간의대라고 하는 과학적인 명칭으로 변하여 왔다. 한편으로는 예로부터의 습성에 따라 후세에까지 여전히 첨성대라고 불렸던 것이 사실인 듯하다.
정상부에 서거나 앉거나 또는 누워서 하늘을 관찰하는 데 매우 편리하였다고 한다.
몸체 중앙의 네모난 창은 태양이 남중하는 모습에 따라 춘분과 추분, 하지와 동지를 알려주는 기준점이 된다.
이 밖에도 몸체를 이루는 돌은 360개로써 1년을 뜻하며 기단부와 몸체를 합한 28단은 별자리 28수를 상징한다. 창문을 기준으로 위, 아래 12단으로 나뉜 것은 1년 12달과 24절기를 의미한다.) 첨성대를 살펴보면서 선조들의 놀랍고 정확한 자연과학과 자연에 순응하며 하늘을 공경했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천문대이자 세계에서 가장 오랜 천문대로, 1300여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변함없이 서 있을 수 있는 첨성대, 그 비밀은 무엇일까요?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반월성과 대릉원 사이 벌판에 우뚝 서 있는 첨성대... 특이한 점은, 7세기 중반, 신라시대 선덕여왕 때 세워져 지금까지 단 한번의 보수나 개축이 없었다는 겁니다. 고대 건축물 중에 유일하게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 첨성대가 갖는 의미는 특별할 수밖에 없습니다.
3층 건물 높이에 달하는 첨성대의 돌의 개수는 음력으로 1년을 의미하고, 단의 수는 신라 27대 선덕여왕을 상징한다고 전해집니다. 쌓아올린 돌의 개수와 단의 수에서도 그 치밀함이 엿보이는 첨성대, 천년이 넘는 세월을 버텨 현재까지 그 모습을 유지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첨성대의 축조방식을 면밀히 살펴보기 위해, 대전 국립 문화재 연구팀이 함께 했습니다. 실측결과, 첨성대는 1300여년 이란 세월 속에 미세하게 기울어져 있을 뿐이었고, 첨성대를 이룬 화강암의 강도는 콘크리트에 2배가 될 정도로.. 아직도 견고함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재료의 선정과 건축기술에 있어 뛰어났음을 보여주는데, 그렇다면, 내부 구조에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요? 첨성대의 출입문은 독특하게도 중간 위쪽 부분에 위치해 있습니다. 출입문 아래에는 당시, 사다리를 댔던 흔적이 보입니다.왜 출입구가 높은 곳에 있어야 했을까요? 어쩌면 그 안에 비밀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문화재 연구팀의 도움으로, 늘 궁금했던 첨성대 내부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첨성대의 내부는 조직적으로 돌을 쌓아 두른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위로 하늘이 보이는 구조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첨성대의 바닥을 보면, 출입문 4.5미터 높이까지 자갈과 흙으로 채워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갈과 흙의 적절한 배합은 1300여년 동안 첨성대의 좋은 배수로 역할을 했습니다. 자세히 보면 바닥 뿐 아니라, 쌓아 올린 단에서도 흙과 자갈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요즘의 시멘트와 같은 접합제 역할을 했습니다.
안정적인 볼록한 아치형 하단부를 만들어 흙과 자갈을 적절히 섞어둔 건, 첨성대를 지탱하게 한 힘이었습니다. 바로, 이 부분이 첨성대가 1300여년 동안 무너지지 않았던 비밀입니다. 당시 신라인의 건축기술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알 수 있는데, 지진으로 100여명이 사망했던 당시에도,무너지지 않았던 기록이 전해집니다. 몸체를 비집고 나온 이 돌 역시, 건축기술의 과학성을 보여주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내부 구조를 가로지르는 돌의 끝부분으로, 이 길다란 돌은 둥근 구조를 잡아주어 첨성대의 견고함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돌은 상층부로 올라가는 받침대 역할까지 했습니다. 신라인들은 이런 모습으로 상층부 꼭대기에 올라갔을거라 여겨집니다. 그렇게 첨성대에 오르면, 보이는 판석 하나. 한 명 정도 앉을 크기의 판석으로, 신라인은 이 위에 앉아 천문을 관측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세계 최초의 천문대란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자랑스런 우리의 문화유산 천문대. 여전히 신비에 쌓인 채 그 웅장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천문대는, 신라인의 건축과학이 빚어낸 자존심으로, 1300여 년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