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21일 일요일

금강산, 金剛山.

금강산, 金剛山.

태백산맥 북부 강원도(북한) 금강군·고성군·통천군에 걸쳐 광범위하게 펼쳐진 산.

동서길이 약 40km, 남북길이 약 60km, 면적은 약 530㎢이다. 최고봉인 비로봉(1,638m)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오봉산·옥녀봉·상등봉·선창산·금수봉, 서쪽에는 영랑봉·용허봉(룡허봉), 남쪽에는 월출봉·일출봉·차일봉·백마봉, 동쪽에는 세존봉 등이 솟아 있다. 1952년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 전에는 회양()·통천()·고성()·인제()의 4개군에 걸쳐 있었다.

신생대 제3기 중신세 이후에 진행된 경동성 요곡운동으로 형성되었으며, 화강편마암이 노출된 신금강()의 일부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조립질()의 흑운모 화강암과 반상() 화강암으로 형성되어 있어 절리가 발달되고 풍화침식이 쉽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금강산을 부르는 이름이 5가지 있다. 첫째가 금강산()이고, 둘째는 개골산(), 셋째가 열반산(), 넷째가 풍악산(), 다섯째가 기달산()이다. 금강과 열반은 불교적 이름이다. 이와 달리 사계절의 변화에 따라 그 경색이 달라져 판이한 정취를 주므로 계절에 따라 부르는 이름도 있다. 봄에는 온 산이 새싹과 꽃에 뒤덮이므로 금강이라 하고, 여름에는 봉우리와 계곡에 녹음이 무성하므로 봉래()라고 하며, 가을에는 1만 2000봉이 단풍으로 곱게 물들기 때문에 풍악이라고 하며, 겨울이 되어 나뭇잎이 지고 나면 암석만 뼈처럼 드러나므로 개골이라고 부른다. 여러 이름으로 불리면서도 사람들이 금강산으로 통칭하는 것은 이 산이 불교의 영적인 산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남북으로 뻗은 대단층선을 따라 지층이 단락()하여 기복이 천수백m에 달하는 단층지괴를 형성함으로써 경관의 골격이 구성되었다. 화강암체가 식어서 굳어질 때 생긴 무수한 수직·경사·판상·궁융상 틈결이 오랜 세월 풍화·삭박 작용으로 다종다양한 절리가 조밀하게 진행되어, 1만 2000봉이라 일컫는 기묘한 봉우리를 비롯한 천태만상의 기암괴석을 이루고, 거대한 암괴()·암판() 등이 변화무쌍한 계곡을 이룬다. 수많은 계곡 곳곳에는 폭포·소·여울을 이루는 맑은 물이 흐른다.

눈·비가 많은 지역으로 태백산맥을 기준으로 서쪽은 7월, 동쪽은 8월에 비가 집중적으로 오며, 겨울에는 눈이 2~3m씩 내린다. 따라서 여행은 우기가 시작되기 전인 4~5월이나, 우기가 끝나는 9월 중순이나 10월이 적기이다. 동해안에 근접해 있어 짙은 안개가 자주 끼며, 산악기후로 일기가 고르지 못해 갑자기 바람이 불거나 순간적으로 폭우가 내리기도 한다. 단풍은 설악산보다 빠른 9월 하순부터 시작된다.

금강산에는 동해로 흘러드는 남강·온정천·천불천·선창천과 서해로 흘러드는 금강천·동금강천 등의 하천이 있다. 각양각색의 크고 작은 폭포들이 많은데 그중 4대 폭포로 이름난 구룡연계곡의 구룡폭포와 비봉폭포, 구성계곡의 옥영폭포, 석문동계곡의 십이폭포 등이 있다. 또 관동팔경의 하나로 이름난 삼일포를 비롯하여 영랑호·감호 등 자연호수들이 있다.

식물분포는 해발고도 300~400m 아래에는 소나무림, 해발 300~800m에는 소나무·참나무의 혼성림, 800m 위로는 활엽수림을 이룬다. 940여 종의 식물이 있고 그중 880여 종은 꽃피는 식물이며, 세계적으로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1속 1종인 금강국수나무·금강초롱꽃과 한국 특산식물인 금강봄맞이꽃·만리화 등이 있다. 또한 칼새목·딱따구리목·도요새목 등 20여 목의 새와 금강모치·열목어·어름치 등 희귀보호어종이 산다.

곳곳에 자연미와 인공미의 조화를 보이는 유서 깊은 사찰과 석탑·불상·불당()·암자 등이 많다. 금강군 일대에는 고인돌 16기, 만폭동·옥류동에는 바위글씨가 있다. 계절에 따른 아름다움이 각각 달라, 봄에는 금강산, 여름에는 봉래산(), 가을에는 풍악산(), 겨울에는 개골산()이라고 한다.


금강산의 주봉은 비로봉(1638미터)이다. 북쪽으로는 영랑봉(1601미터), 옥녀봉(1424미터), 상등봉(1227미터), 오봉산(1264미터)이 있고, 남쪽으로는 월출봉(1580미터), 일출봉(1552미터), 차일봉(1529미터), 미륵봉(1538미터), 백마봉(1510미터), 호룡봉(1403미터), 국사봉(1385미터) 등이 솟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금강산의 서쪽 봉우리로 만경봉, 백운대, 국망점, 비로봉을 큰 봉우리로 싣고 있다.
비로봉은 금강산의 주 봉우리로 바위에 무늬가 있다. 오랫동안 산 기운과 안개로 인하여 아롱지게 섞이고 어리어 눈[설()]빛 같다. 산 이름을 개골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글이다. 금강산에는 일출봉과 월출봉이 있는데 해와 달이 뜨는 모습이 그 어느 곳보다 아름답다.
금강산은 우리나라 동해 위에 있다. 지형의 아름다움이 세상에 높이 뛰어났다. 그런 까닭에 그 이름이 천하에 퍼진 것이다. 내가 어릴 때 듣기로, 세상 사람들이 와서 보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나, 그렇게 되지 못함을 한탄하여 그 그림을 그려놓고 예배()하는 사람까지 있었다고 하였다. 그 사모함의 간절함이 이러하였다.
나는 다행스럽게도 이 나라에 나서, 이 산과의 거리가 수백 리도 못 되건만 벼슬에 얽매이고 세속의 명리에 분주하여 일찍이 한 번도 가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표연히 떠나 멀리 가고 싶은 마음은 일찍이 가슴속에서 오락가락하지 앓을 때가 없었다. 병자년 가을에 중국에 가서 천자를 뵈었더니 황제가 친히 글제()를 내시어 시 20여 수를 짓게 하였다. 그중의 하나가 금강산이라는 제목이었다. 이에 이 산의 이름이 과연 온 천하에 높아서 내가 어릴 때 들은 말들이 헛말이 아닌 것을 알았다.
조선 초기의 문장가인 권근의 글이다. 그는 명나라에서 귀국하는 즉시 금강산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그전보다 더 바빠져서 끝내 금강산에 갈 수 없었다. 가고 싶다는 마음은 누구나 먹지만 그 소원대로 되는 것은 아니어서 조선시대 사대부들 중 금강산을 유람했던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당시 권근이 중국의 황제에게 바쳤던 금강산 시는 다음과 같다.
높고 높은 천만봉()이 눈처럼 희게 섰으니, 바다 구름이 옥부용()을 열어 내놓았네. 신령한 빛이 출렁거리니 창해()가 가깝고, 기운이 굼실굼실 조화()가 모임이로다. 우뚝 높이 솟은 언덕과 봉우리는 조도()에 임하고,맑고도 그윽한 동학()은 신선의 자취를 숨기었네. 동쪽으로 노닐어 문득 그 높은 정상에 올라, 홍몽(, 천지가 아직 나누어지지 않은 상태, 즉 광대하고 뚜렷하지 않은 상태를 말함)을 굽어보며 한번 시원히 가슴을 씻어볼 것인가.
권근과 동시대의 사람으로 조선 왕조를 개창하는 데 한몫을 했던 하륜도 금강산에 대한 글을 남겼다.
풍악은 진실로 기이하고 뛰어나서 사랑할 만하다. 납의(, 중이 입는 옷)를 입은 자들이 그 사이에 살고 있으니, 돌계단이 1000길이나 되어서 사람의 발자취가 드물게 이르기 때문에 마음이 경계와 더불어 고요할 수 있다. 그리하여 간혹 그 도()를 깨닫는 자가 있다. 그러나 그 산을 금강산이라고 일컫는 것은 『장경()』의 설을 빌린 것이다. 『장경』에 금강산을 말하기를 “동해 속의 팔만유순()의 곳에 1만 2000의 담무갈(, 보살의 이름)이 항상 그 가운데에 머무른다”라고 하였으니, 풍악을 말한 것은 아니다. (······)
풍악을 일컬어 금강산이라고 하는 것은 그 풍악의 기이하고 뛰어난 것을 사랑함인가. 그 금강()이라는 가설()을 사모함인가. 거짓된 설()이 한 번 나와 온 세상 사람들이 그치지 않고 분주히 달려가기에 내가 변박()하려 한 것이 오래다. 이제 그대가 시를 청하는 것을 인연으로 알고 이미 그 옛일을 생각하고, 산을 사랑하는 뜻에서 이 글을 쓴 것이니 그대는 참작할지어다. 만약 “모든 상()은 상()이 아니며, 진()도 가()도 다 공()이라고 말한다면, 내가 감히 변론할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하륜은 금강산에 대한 이야기가 불교에서 유래되어 사람들에게 잘못 전해지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서 금강산 답사를 떠나는 승려에게 이 글을 보냈던 것이다.


내금강·외금강·신금강·해금강의 4개 지역으로 구분되는데 최고봉인 비로봉이 솟아 있는 중앙 연봉을 경계로 서쪽은 내금강, 동쪽은 외금강, 외금강의 남쪽 계곡은 신금강, 동단의 해안부는 해금강이다.

1998년 9월부터 바닷길을 통한 해로관광이 시작되었으나 2004년 1월에 중단되었고, 육로 관광은 2003년 9월부터 개방되었다. 2008년 7월 북한군의 피격으로 관광객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모든 관광이 잠정 중단되었다. 

내금강.

주맥인 옥녀봉(1,424m)·비로봉·월출봉(1,580m)·차일봉(1,529m)·호룡봉(1,403m) 등 연봉의 안쪽에 위치하며 동쪽 외금강과 접한다. 수려한 계곡미로 유명하며, 암석과 계류, 잣나무·전나무 등의 수림 및 사찰로 구성되어 우아하고 조화된 경관으로서의 특색을 지녀 외금강이 남성적이라면 내금강은 여성적인 절경을 이룬다.
만천·만폭·백운대·명경대·망군대·태상·구성·비로봉 구역의 8개 명승구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내금강의 진수는 내강리에서 장안사터를 거쳐 표훈사·정양사터·만폭동을 지나 보덕암·마하연·묘길상을 도는 만폭동 코스이다.

장안사·명경대·망군대·삼불암·표훈사·정양사·만폭동 등의 빼어난 명승고적과 경관이 있다. 장안사는 내금강의 입구부인 노송()이 늘어선 곳에 자리잡은 신라 때에 창건한 거찰로 여러 차례에 걸친 흥망의 역사를 지닌다.
내금강의 주된 계곡을 이루는 동금강천의 상류는 백천동으로 이어지고, 그 동쪽으로 황천강 계곡이 갈린다. 그 계곡에 하늘을 가로막고 우뚝 솟은 암벽이 명경대인데, 이름 그대로 거울처럼 생긴 암벽이 그 아래에 짙푸르게 괸 벽담()에 그림자를 만들며 신비로운 경승을 이룬다.
백천동에서 서쪽으로 갈리는 백탑동()을 따라 올라간 곳에 망군대가 있다.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는 평면을 이루는 망군대는 수십 길 암벽 위에 있어 산중에서 제일가는 전망대로, 내금강의 여러 봉우리와 골짜기 및 비로봉을 비롯한 금강산 주맥의 연봉이 이루는 장관을 내려다볼 수 있다. 부근에는 폭포의 경승으로 알려진 수렴동()이 있다.
백천동 본류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명연담()·삼불암()의 명소에 이어 계곡 서쪽 기슭에 표훈사가 있다. 그 뒤의 정양사 헐성루()는 망군대와 더불어 금강산을 조망하기에 좋다. 표훈사에서 금강문()을 거쳐 올라가면 비로봉을 정면으로 하는 만폭동 계곡이 나타난다. 만폭동은 길이 약 2km 계곡으로 바위와 물이 내금강에서 으뜸가는 경승을 이루는데, 특히 흑룡담·벽하담·분설담·진주담·구담·선담·화룡담 등 8개의 담이 층층으로 놓여 있는 8담이 있다.
비로봉 아래 계곡에는 거대한 암상()에 양사언()의 웅혼한 필적으로 된 '(봉래풍악원화동천)'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고, 비로봉 북쪽 4km 지점의 용마석 위에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태자인 마의태자의 무덤이 있다. 계곡 말단부 가까이에 있는 사선교()는 비로봉을 오르는 등산구()로 금강산의 최고봉인 비로봉 정상에 오르면 멀리 동해가 보이고, 금강산 1만 2000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1998년 금강산 여행이 시작될 때 내금강을 오르는 코스는 개방되지 않았다.

외금강과 신금강.

태백산맥 동쪽 비탈면에 자리잡은 외금강은 내금강과 동해안 해금강 사이에 펼쳐져 있다. 내금강에서와 같은 사찰 등 인공적인 요소가 가미되지 않은 순수한 자연경관으로 한층 웅대하고 대담한 경관을 드러낸다.
비로봉을 기준으로 북쪽에는 옥녀봉(1,423m)·상등봉(1,229m)·온정령(858m)·오봉산(1,264m)이, 남쪽에는 월출봉(1,580m)·일출봉(1,552m)·내무재령(1,275m)·차일봉(1,529m)·외무재령(1,137m)이 주능선으로 있다.

온정·만물상·구룡연·수정봉·천불동·선창·백정봉 구역 등 7개 명승구역이 있는데, 온정리에서 한하계·육화폭포·만상정·천선대·만물상을 도는 만물상 코스와 온정리에서 신계사터·옥류동·비봉폭포·구룡폭포·상팔담을 도는 구룡연 코스에서 외금강의 진수를 느낄 수 있다.

온정구역은 외금강휴양소 일대를 포괄하는 금강산 관광의 중심지로서 금강산혁명사적관이 있으며, 대자봉에는 금강산온천이 있다.
신계천 계곡 입구에 있는 신계사()는 지금은 대웅전 앞의 고탑()이 있을 뿐이나, 집선봉(1,351m)과 채하봉의 조망이 뛰어나고, 신계사를 지나면 정면의 옥녀봉을 중심으로 오른쪽의 세존봉(1,222m), 왼쪽의 관음연봉 등이 내금강에서는 볼 수 없는 웅혼한 산의 모습을 드러낸다.
일응대()에서 계곡을 건너 남하하면 계곡미의 절정을 이루는 옥계류가 나타나는데, 특히 대반석 위를 맑은 물이 비단폭처럼 흘러내리면서 곳곳에 주렴 같은 폭포를 이루는 비봉폭포와, 거대한 바위 위를 흘러내린 물이 짙푸른 소를 이루는 옥류동의 경승이 뛰어나다. 계곡이 끝나는 곳에는 병풍처럼 둘러쳐진 암벽을 낙하하는 높이 74m, 너비 4m의 구룡폭포가 있다. 그 위에는 8개의 맑고 푸른 상팔담 연못이 있고, 아래에는 수심 13m의 폭호() 구룡연이 있다.
만물상()은 금강산의 가장 대표적인 경승지로, 온정리에서 약 6km 지나면 입구인 만상정()이 있고, 그곳에서 물도 없고 수목도 거의 없는 한하계가 시작된다. 삼선암·귀면암 등 유명무명의 암봉들이 각각 천태만상의 기괴한 모습들을 드러내어 자연의 조화에 의한 걸작을 보여줌으로써 천하에 둘도 없는 장관을 형성한다.
금강산 주맥의 월출봉에서 동쪽으로 뻗어 채하봉·집선봉 등 산봉을 일으키는 지맥을 경계로 남쪽에 외금강과 분리된 신금강()이 있다. 신금강의 대표적인 경승에는 급경사의 계곡을 흘러내리는 물이 곳곳에서 폭포를 이루는 십이폭과 은선대·칠보대·직류폭포·채하폭포·바리소·무지개다리·송림굴·소연소·구룡소·선담 등이 있다. 그밖에 금강산 제일의 거찰 유점사와 송림사가 있다.
유점사는 신라시대에 창건한 고찰로, 본당 능인전에는 53불이 안치되어 있고, 부근에 반야암·백련암·명적암 등 암자가 있다.

을사조약(을사늑약이라고도 흔히 불린다)

을사조약(을사늑약이라고도 흔히 불린다)은 1905년 11월 17일 경술년에 대한제국과 일본간에 맺어진 조약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후, 일본은 더 이상 눈치를 볼 필요 없이 대한제국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결국 1905년 11월 17일 아홉 명의 고위 대신들 중 다섯 명의 대신들이 이 조약에 서명하면서 효력을 발휘하였다.
이후 1965년 대한민국과 일본은 국교를 정상화하면서 이 조약이 무효임을 한일기본조약에다 못박아두었다.일부에선 경술국치보다 이 조약의 체결을 더욱 치욕적이고 중요한 것으로 여긴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는 것만도 이런데 그 당시 국민들이 여겼을 분노와 비애는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면에서는 을사조약으로 인해 애국계몽운동이 폭발적으로 활발하게 일어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독립협회 시절부터 애국계몽운동이 진행되었지만, 앞서 위에 나온 을사조약 전문 중에 한국이 부강해질 때까지라는 구절 때문에 당시 민족주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부강만 하면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의식이 생긴 것이다. 
대표적으로 대한 자강회의 활동을 들 수 있고, 그 밖에도 오산학교나 대성학교 등 민족주의 계통의 학교 설립, 신소설 · 신체시 · 신극 등 근대 예술의 등장, 박은식의 유교구신론 같은 민족주의계 종교운동 등이 전부 다 을사조약 이후에 생겼다. 
일본이 한국이 부강해지는 걸 놔둘 리가 없었을 뿐더러, 부강해진다 하더라도 외교권을 돌려줄 이유가 없다는 게 슬픈 일이지만. 

"일본국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의 유지를 보증한다.
"라는 말은 후에 경술국치때 조선 황가를 귀족으로 대우할 것을 황족과 동등한 대우로 해준다고 바꾼 것에 불과하다.
 왕공족 문서 참조. 하지만 이 조항은 나중에 고종의 장례와 함께 3.1 운동과, 순종의 장례와 함께 6.10 만세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어찌되었던 황족과 동등한 대우니까 총독부의 입장에서 이왕가인 고종과 순종의 국장을 안 치뤄줄 수 없기 때문.

원래는 전문도 없이 4개의 조항이었으나, 이완용의 협상으로 인해 앞서 말한 전문과 5번째 조항이 생긴 것이다. 
원래 나온 것은 조약의 명칭 자체가 없었다! 나중에 전후 사정을 서양 열강에 보낼 때 제목이 생겨났던 것. 법을 공부해 보신 분은 알겠지만 외국과 조약을 맺을 때 조약의 명칭이 없으면 단순히 각서로 취급될 뿐이다. 
후에 이완용이 '시국은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종묘사직을 지키고자...'라는 개소리를 지껄이는 근거도 여기에 있다. 
이 단서가 그냥 말뿐이라는건 근현대사를 제대로 배우지 않은 사람이라도 알 것이다.

이완용의 변명

1905년 12월 16일, 사실상 온 조선의 공적이 돼버린 을사5적이 고종황제를 찾아가 변명한다. 
다음은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이완용의 주장이다.
“삼가 생각건대, 신들이 성조(聖朝)에 죄를 짓고 공손히 천토(天討)를 기다린 날도 여러 날이 되었는데 황상(皇上)께서 특별히 더 관대하게 우선 폐하의 위엄을 늦춘 것은 참으로 하해(河海)와 같은 도량으로 너그럽게 포용한 바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신들이 버젓이 묘당(廟堂)에 있는 것은 염치가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시국(時局)을 보건대 또한 어찌할 수 없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신들이 요즘 상소들을 보았는데 거기에서 탄핵(彈劾)하고 논열(論列)한 것들은 신들이 스스로 폄하(貶下)한 것과 크게 다르니 어찌된 일입니까? 그들은 국가가 이미 망하고 종사(宗社)가 존재하지 않으며 인민(人民)들은 노예로 되고 강토는 영지(領地)로 되었다고 인정하는데 이렇듯 이치에 어긋나는 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저 무리들이 과연 새 조약의 주지(主旨)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은 이것이 모두 어리석은 사람들이 흐리멍덩하게 하는 말이니 상대할 것이 못된다고 생각하지만, 국가가 이미 망하고 종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까지 말하고 있으니 철저하게 힘껏 해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새 조약의 주지로 말하면, 독립(獨立)이라는 칭호가 바뀌지 않았고 제국(帝國)이라는 명칭도 그대로이며 종사는 안전하고 황실(皇室)은 존엄한데, 다만 외교에 대한 한 가지 문제만 잠깐 이웃 나라에 맡겼으니 우리나라가 부강해지면 도로 찾을 날이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이것은 오늘 처음으로 이루어진 조약이 아닙니다. 
그 원인은 지난해에 이루어진 의정서(議定書)와 협정서(協定書)에 있고 이번 것은 다만 성취된 결과일 뿐입니다. 
가령 국내에 진실로 저 무리들처럼 충성스럽고 정의로운 마음을 가진 자들이 있다면 마땅히 그 때에 쟁집(爭執)했어야 했고 쟁집해도 안 되면 들고 일어났어야 했으며, 들고 일어나도 안 되면 죽어버렸어야 했을 것인데 일찍이 이런 의거(義擧)를 한 자를 한 사람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중대한 문제가 이미 결판난 오늘날에 와서 어떻게 갑자기 후회하면서 스스로 새 조약을 파기하고 옛날의 권리를 만회하겠다고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일이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은 오히려 말할 것도 없고 나중에는 국교 문제에서 감정을 야기시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어찌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조약 체결의 전말에 대하여 말한다면, 일본 대사(日本大使)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서울에 올 때에 아이들과 어리석은 사람들까지도 모두 중대한 문제가 반드시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과연 11월 15일 두 번째로 폐하를 만나본 뒤에 심상치 않은 문제를 제출하니, 폐하께서는 즉시 윤허하지 않으시고 의정부(議政府)에 맡기셨습니다. 

이튿날 16일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 민영기(閔泳綺), 법부 대신(法部大臣) 이하영(李夏榮) 및 신 이지용, 권중현, 이완용, 이근택은 대사가 급박하게 청한 것으로 인하여 이 우관(寓館)에 가서 모였고, 경리원 경(經理院卿) 심상훈(沈相薰)도 그 자리에 있었으며, 박제순은 주둔한 공사(公使) 하야시 곤노스께〔林權助〕의 급박한 요청에 의하여 혼자서 이 주관(駐館)에 갔습니다. 
모두 어제 제출한 문제를 가지고 문답을 반복하였으나 신들은 끝내 허락할 수 없다는 뜻을 보였습니다. 
밤이 되어 파하고 돌아와 폐하의 부름을 받고 나아가 뵙고 응답하였는데 문답한 내용을 자세히 아뢰었고 이어 아뢰기를, ‘내일 또 일본 대사관에 가서 모여야 하는데 만약 그들의 요구가 오늘의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이라면 신들도 응당 오늘 대답한 것과 같이 물리쳐 버리겠습니다.’라고 하고는 물러나왔습니다.

이튿날 17일 오전에 신 등 8인(人)이 함께 일본 대사관에 모였는데, 과연 이 안건을 가지고 쟁론한 것이 복잡하였습니다. 
권중현은 ‘이 문제는 비록 대사가 폐하께 아뢰었고 공사가 외부(外部)에다 통지하였지만 우리들은 아직 외부에서 의정부에 제의한 것을 접수하지 못하였으니 지금 당장 의결(議決)할 수 없으며 또 중추원(中樞院)의 새 규정이 이미 반포된 만큼 반드시 여론을 널리 수렴해야만 비로소 결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일본 공사는 언성을 높여 말하기를, ‘귀국(貴國)은 전제 정치(專制政治)인데 어찌하여 입헌 정치(立憲政治)의 규례를 모방하여 대중의 의견을 수렴합니까? 나는 대황제(大皇帝)의 왕권이 무한하여 응당 한 마디 말로써 직접 결정하는 것이지 허다한 모면하려는 법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이미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에게 전통(電通)을 하여 곧바로 폐하를 만나볼 것을 청하였으니, 여러 대신(大臣)은 함께 대궐로 나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여러모로 극력 반대하였으나 끝내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먼저 의정부 내의 직소(直所)에 와서 기다렸으며, 일본 공사는 관원을 데리고 뒤따라와서 휴게소에서 기다렸습니다. 

조금 있다가 신들이 입대(入對)하여 폐하께 각기 경위를 진달하였던 것입니다. 
이때에 폐하께서는 몹시 괴로워하시며 이후의 조처에 대해 여러 번 신중히 하문(下問)하셨으나, 신들은 다만 절대로 허락할 수 없다는 말로써 대답하였을 뿐입니다. 
폐하께서 하교(下敎)하시기를, ‘그렇지만 감정을 가지게 할 수는 없으니 우선 늦추는 것이 좋겠다.’ 하셨습니다. 

이완용이 아뢰기를, ‘이 일은 나라의 체통과 관련되는데 폐하의 조정을 섬기는 사람으로서 누가 감히 허락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겠습니까? 다만 군신(君臣)의 관계는 부자(父子)의 관계와 같으니 품고 있는 생각이 있으면 숨김없이 다 진달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 대사가 찾아온 것은 전적으로 이 때문이며 공사가 와서 기다리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 안건의 발락(發落)하는 것이 눈앞에 닥쳤는데도 군신 간에 서로 묻고 대답하는데 다만 안 된다는 한 마디 말로 다 밀어치우니, 사체(事體)를 가지고 논한다면 합당하지 않음이 없겠지만 이 또한 형식상 처리하지 않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 여덟 사람이 아래에서 막아내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일본 대사가 폐하를 나아가 뵐 것을 굳이 청하는데 만약 폐하의 마음이 오직 한 가지로 흔들리지 않는다면 국사(國事)를 위하여 진실로 천만 다행일 것이지만, 만일 너그러운 도량으로 할 수 없이 허락하게 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런 부분에 대하여 미리 대책을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이때 폐하께서 하교하신 것은 없었으며 여러 대신도 입을 다물고 말이 없었습니다. 

이완용이 또 아뢰기를, ‘신이 미리 대책을 강구하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만일 할 수 없이 허용하게 된다면 이 약관(約款) 가운데도 첨삭(添削)하거나 개정(改正)할 만한 매우 중대한 사항이 있으니, 가장 제때에 잘 헤아려야 할 것이며 결코 그 자리에서 구차스럽게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폐하께서 하교하시기를, ‘이토오 히로부미 대사도 말하기를, 이번 약관에 대해서 만일 문구를 첨삭하거나 고치려고 하면 응당 협상하는 길이 있을 것이지만, 완전히 거절하려고 하면 이웃 나라간의 좋은 관계를 아마 보존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을 가지고 미루어 보면, 그 약관의 문구를 변통하는 것은 바랄 수도 있을 듯하니 학부 대신의 말이 매우 타당하다.’ 하셨습니다. 권중현이 아뢰기를, ‘지금 이 학부 대신이 말한 것은 꼭 허락해 주겠다는 말이 아니라 한 번 질문할 말을 만들어서 여지를 준비하는 데 불과할 뿐입니다.’ 

폐하께서 하교하시기를, ‘이런 것은 모두 의사(議事)의 규례이니 구애될 것이 없다.’ 하셨습니다. 
이때 여러 대신이 아뢴 것이 모두 권중현이 아뢴 것과 비슷하였습니다. 
폐하께서 하교하시기를, ‘그렇다면 이 조약 초고(草稿)는 어디 있으며 그 가운데서 어느 것을 고치겠는가?’ 하셨습니다. 
이하영이 품속에서 일본 대사가 준 조약문을 찾아내어 연석(筵席)에서 봉진(奉進)하였습니다. 

이완용이 나아와 아뢰기를,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이 조약 제3조 통감(統監)의 아래에 외교라는 두 글자를 명백히 말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훗날 끝없는 우환거리가 될 것이라고 봅니다.  
외교권을 도로 찾는 것은 우리나라에 실지 힘의 유무(有無)와 조만(早晩)에 달렸다고 하였는데 지금 그 기간을 억지로 정할 수 없지만 모호하게 하고 지나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폐하께서 하교하시기를, ‘그렇다. 짐(朕)도 고쳐야 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첫머리의 글 가운데서 「전연 자행(全然自行)」이라는 구절은 지워버려야 할 것이다.’ 하셨습니다. 
권중현이 아뢰기를, ‘신이 외부에서 얻어 본 일본 황제의 친서 부본에는 우리 황실의 안녕과 존엄에 조금도 손상을 주지 말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번 약관은 나라의 체통에 크게 관련되지만 일찍이 여기에 대해서는 한 마디의 언급도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부득이해서 첨삭하거나 고치게 된다면 이것도 응당 따로 한 조목을 만들어야 하리라고 봅니다.’ 하니, 폐하께서 하교하시기를, ‘그건 과연 옳다. 
농상공부 대신의 말이 참으로 좋다.’ 하셨습니다. 
이에 여러 대신 가운데는 폐하의 하교가 지당하다고 하는 사람 이완용의 주장을 찬성하는 사람, 권중현의 주장을 찬성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모두 찬성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연석에서 아뢰는 것이 거의 끝날 무렵에는 우리 여덟 사람이 똑같이 아뢰기를, ‘이상 아뢴 것은 실로 미리 대책을 강구하는 준비에 불과할 뿐입니다. 
신들이 물러나가 일본 대사를 만나서, 안 된다는 한 마디 말로 물리쳐야겠습니다.’ 

폐하께서 하교하시기를, ‘그렇기는 하지만 조금 전에 이미 짐의 뜻을 말하였으니 잘 조처하는 것이 좋겠다.’ 하셨습니다. 
한규설과 박제순이 아뢰기를, ‘신들은 한 사람은 수석 대신이고 한 사람은 주임 대신으로서 폐하의 하교를 받들어 따르는 데 불과합니다.’ 하였습니다.

우리들 8인(人)이 일제히 물러나 나오는데 한규설과 박제순은 폐하의 명을 받들고 도로 들어가서 비밀리에 봉칙(奉勅)하고 잠시 후에 다시 나와 모두 휴게소에 모이니, 일본 공사가 어전(御前)에서 회의한 것이 어떻게 결정되었는가를 물었습니다. 
한규설이 대답하기를, ‘우리 황상 폐하(皇上陛下)께서는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뜻으로 하교하셨으나, 우리들 8인은 모두 반대하는 뜻으로 복주(覆奏)하였습니다.’ 

공사가 말하기를, ‘귀국(貴國)은 전제국(專制國)이니 황상 폐하의 대권(大權)으로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하교가 있었다면 나는 이 조약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것으로 알지만 여러 대신은 정부(政府)의 책임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여 한결같이 군명(君命)을 어기는 것을 주로 삼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이러한 대신들은 결코 묘당(廟堂)에 두어서는 안 되며 참정대신(參政大臣)과 외부 대신(外部大臣)은 더욱 체차(遞差)해야 하겠습니다.’하였습니다. 

한규설이 몸을 일으키면서 말하기를, ‘공사가 이미 이렇게 말한 이상 나는 태연스럽게 이 자리에 참석할 수 없습니다.’ 하니, 여러 대신이 만류하면서 해명하기를, ‘공사의 한 마디 말을 가지고 참정대신이 자리를 피한다면 그것은 사체(事體)에 있어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한규설이 다시 제자리에 가서 앉았습니다.

조금 뒤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대사가 군사령관(軍司令官) 하세가와〔長谷川〕와 함께 급히 도착하였고, 헌병 사령관(憲兵司令官)과 군사령부 부관(軍司令部副官)이 뒤따라 왔습니다. 
일본 공사가 대사에게 전후 사연을 자세히 이야기하니 대사가 궁내부 대신(宮內部大臣) 이재극(李載克)에게 폐하의 접견을 주청(奏請)한다는 것을 전해 주도록 여러 번이나 계속 요구하였습니다. 

이재극이 돌아와서 ‘짐(朕)이 이미 각 대신에게 협상하여 잘 처리할 것을 허락하였고, 짐이 지금 목구멍에 탈이 생겨 접견할 수 없으니 모쪼록 잘 협상하라.’는 성지(聖旨)를 전하였습니다. 
이재극이 또 참정대신 이하 각 대신에게 성지를 널리 퍼뜨렸습니다. 
대사가 곧 참정대신에게 토의를 시작하자고 요청하니, 한규설이 여러 대신에게 각기 자기의 의견을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대사가 먼저 참정대신을 향하여 말하기를, ‘각 대신들은 어전 회의의 경과만 말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가 한 번 듣고자 합니다. 
참정대신은 무엇이라고 아뢰었습니까.’ 하였습니다.
한규설이 말하기를, ‘나는 다만 반대한다고만 상주(上奏)하였습니다.’ 
대사가 묻기를, ‘무엇 때문에 반대한다고 말하였는지 설명하여야 하겠습니다.’ 
한규설이 말하기를, ‘설명할 만한 것이 없지만 반대일 뿐입니다.’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외부 대신에게 어떻게 했는가를 물으니 박제순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명령이 아니라 바로 교섭(交涉)이니 찬성과 반대가 없을 수 없습니다. 
내가 현재 외부 대신의 직임을 맡고 있으면서 외교권(外交權)이 넘어가는 것을 어찌 감히 찬성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하니, 대사가 말하기를, ‘이미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폐하의 명령이 있었으니 어찌 칙령(勅令)이 아니겠습니까? 외부 대신은 찬성하는 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탁지대신) 민영기에게 물으니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반대입니다.’ 하였습니다. 
대사가 묻기를, ‘절대 반대입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하니, 대사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탁지부 대신은 반대하는 편입니다.’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법부대신) 이하영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지금의 세계 대세와 동양의 형편 그리고 대사가 이번에 온 의도를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우리나라가 외교를 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귀국이 이처럼 요구하는 것이니, 이는 바로 우리나라가 받아들여야 할 문제입니다. 
이미 지난해에 이루어진 의정서(議定書)와 협정서(協定書)가 있는데 이제 또 하필 외교권을 넘기라고 합니까? 우리나라의 체통에 관계되는 중대한 문제이니 승낙할 수 없습니다.’ 하니, 대사가 말하기를, ‘그렇지만 이미 대세와 형편을 안다고 하니, 또한 찬성하는 편입니다.’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학부대신) 이완용에게 물으니 속으로 스스로 생각하기를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폐하의 하교에 대하여 이미 참정대신의 통고가 있었으니 이 안건의 요지가 이미 판결된 셈이다.’라고 하고서 대답하기를, ‘나는 조금 전 연석(筵席)에서 여차여차하게 아뢴 바가 있을 뿐이고 끝내 찬성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대사가 말하기를, ‘고칠 만한 곳은 고치면 그만이니 이 또한 찬성하는 편입니다.’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에게 물으니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연석에서 면대하였을 때에 대체로 학부 대신(이완용)과 같은 뜻이었습니다. 
한 가지 딴 의견은 바로 황실(皇室)의 존엄과 안녕에 대한 문구였습니다. 
찬성과 반대 사이에서 충신과 역적이 즉시 판별되기 때문에 참정대신이 의견을 수렴하는 마당에서는 반대한다는 한 마디로 잘라 말하였던 것입니다.’ 
하니, 대사가 말하기를, ‘황실의 존엄과 안녕 등에 대한 문구는 실로 더 보태야 할 문구이니 이 또한 찬성하는 편입니다.’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군부대신) 심근택(이근택)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나도 연석에서 학부 대신과 같은 뜻이었으나 의견을 수렴하는 마당에서는 충신과 역적이 갈라지기 때문에 농상공부 대신과 같은 뜻으로 말하였습니다.’ 
하니, 대사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이 또한 찬성하는 편입니다.’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내부대신) 이지용에게 물으니, 그가 대답하기를, ‘나 또한 연석에서 학부 대신과 같은 뜻이었습니다. 
내가 일찍이 작년 봄에 하야시 곤노스께〔林權助〕 공사(公使)와 의정서를 체결하였는데 이 조약의 약관 중 독립을 공고히 하고 황실을 편안히 하며 강토를 보전한다는 등의 명백한 문구가 있으니, 애당초 이 사안에 대하여 가부를 물을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하니, 대사가 말하기를, ‘이 또한 찬성하는 편입니다.’ 하였습니다.

이재극에게 다음과 같이 전달해 달라고 요구하며 말하기를, ‘이미 삼가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폐하의 칙령을 받들었기 때문에 각 대신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그들의 논의가 같지는 않지만 그 실제를 따져보면 반대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 가운데서 반대한다고 확실히 말한 사람은 오직 참정대신과 탁지부 대신 뿐입니다. 
주무대신(主務大臣)에게 성지를 내리시어 속히 조인(調印)하기 바랍니다.’ 하였습니다.  

한규설이 의자에 앉아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우는 모양을 지으니 대사가 제지하면서 말하기를, ‘어찌 울려고 합니까?’ 하였습니다. 
한참 있다가 이재극이 돌아와서 폐하의 칙령을 전하여 말하기를, ‘「협상 문제에 관계된다면 지리하고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다.」 하셨습니다.’ 
이하영에게 칙령을 전하여 말하기를, ‘「약관 중에 첨삭할 곳은 법부 대신이 반드시 일본 대사, 공사와 교섭해서 바르게 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셨습니다.’ 하였습니다.

각 대신 중 오직 한규설과 박제순이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지용, 권중현, 이완용, 심근택 및 민영기, 이하영은 모두 자구(字句)를 첨삭하는 마당에서 변론하는 것이 있었으나 이때 한규설은 몸을 피하기 위하여 머리에 갓도 쓰지 않고 지밀(至密)한 곳으로 뛰어들었다가 외국인에게 발각되어 곧 되돌아 들어왔습니다. 
양편에 분분하던 의견이 조금 진정되어 대사가 직접 붓을 들고 신들이 말하는 대로 조약 초고를 개정하고 곧 폐하께 바쳐서 보고하도록 하여 모두 통촉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가 부강해진 다음에는 이 조약이 당연히 무효로 되어야 하니 이러한 뜻의 문구를 따로 첨부하지 않을 수 없다는 문제에 대하여 다시 폐하의 칙령을 전하니 대사가 또 직접 붓을 들어 더 적어 넣어서 다시 폐하께서 보도록 하였으며, 결국 조인하는 데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의 사실은 단지 이것 뿐입니다. 

신들이 정부의 벼슬을 지내면서 나라의 체통이 손상되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죽음으로 극력 간쟁하지 않았으니 신하의 본분에 비추어볼 때 어찌 감히 스스로 변명할 바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탄핵하는 사람들이 이 조약의 이면을 따지지 않고 그날 밤의 사정도 모르면서 대뜸 신 등 5인(人)을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이요, ‘나라를 그르친 역적’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만일 이 조약에 대한 죄를 정부에다 돌린다면 8인에게 모두 책임이 있는 것이지 어찌 꼭 5인만이 전적으로 그 죄를 져야 한단 말입니까? 한규설로 말하면 수석 대신이었습니다. 

거센 물살을 견디는 지주(砥柱)와 같은 위의와 명망, 하늘을 덮을 만한 수단이 있었다면 비록 자기 혼자서라도 앞장서 밤새도록 굳게 틀어쥐고 갖은 희롱을 막는 등 술수가 없는 것을 근심할 것이 없겠지만, 연석에서 면대할 때에는 전적으로 상(上)의 재가(裁可)만 청했고 외국의 대사와 문답하는 자리에서는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말이 성지였다는 것을 성대하게 말함으로써 전제(專制)하는 데 구실이 되게 하였습니다. 

여러 대신의 숱한 말들이 무력한 지경에 똑같이 귀결되게 하고 빈 말로 반대한다고 하면서도 울고 싶고 도망치고 싶다고 하며 거짓으로 명예를 꾀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 대의(大議)가 이미 결정됨에 미쳐서 조약 초고를 찢어 버리거나 인신(印信)을 물리칠 수 없었으니 신 등 5인과는 애당초 같다 다르다 말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외국 대사가 일을 끝내고 돌아간 후 정부에 물러가 앉아서는 정해진 규례도 준수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상소하여 신들에게 죄를 떠넘김으로써 허실(虛實)이 뒤섞이게 하였습니다. 
그의 본심을 따져보면 다만 죄를 면하기 위해 스스로 도모한 것에 불과합니다. 시험 삼아 한규설의 잘못을 논해 보면 응당 우리들 5인의 아래에 놓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밖에 반대한다고 말한 대신들로 말하면, 처음에는 비록 반대한다고 말하였지만 끝내는 개정하는 일에 진력(盡力)하였으니, 또한 신 등 5인과 고심한 것이 동일하며 별로 경중의 구별이 없습니다. 그런데 무슨 연유로 걸핏하면 5인을 들어 실제가 없는 죄명을 신들로 하여금 천지(天地)간에 몸 둘 곳이 없게 하는 것입니까? 신 등 5인은 스스로 목숨을 돌볼 겨를이 없이 하였건만 당당한 제국의 허다한 백성들 속에 깨닫고 분석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이 마치 한 마리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모든 개가 따라 짖듯이 소란을 피워 안정되는 날이 없으니 이 어찌 한심한 부분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탄핵하는 글로 말하면 반드시 증거를 확실하게 쥐고서야 바야흐로 등철(登徹)할 수 있는데 저 무리들에게 과연 잡은 증거가 있습니까? 사실을 날조하여 남에게 죽을죄를 씌운 자에게는 의당 반좌율(反坐律)이 있는 것이 실로 조종(祖宗)의 옛 법입니다.

무릇 위 항목의 일들은 폐하께서 환히 알기 때문에 곡진하게 관대히 용서하고 차마 신들에게 죄를 더 주지 않았으며, 파면시켜 줄 것을 아뢸 때에는 사임하지 말라고 권했고, 스스로 인책할 때에는 인책하지 말라고 칙유하셨습니다. 이는 진실로 신들의 몸이 진토가 되어도 기어이 보답하여야 할 기회이건만 저 무리들은 폐하께서 어떤 뜻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르고 날로 더욱 떠들어대면서 치안(治安)에 해를 주고, 정령(政令)이 지체된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으니 이것은 진실로 무슨 심보입니까?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나라의 체통을 깊이 진념하시고 속히 법사(法司)의 신하에게 엄한 명을 내리시어 이런 혼란스런 무리들이 무리지어 일어나 구함(構陷)하는 경우를 만나게 되면 모두 죄의 경중을 나누어 형률을 적용하여 징계함으로써 신들이 실제로 범한 것이 없음을 밝혀 주신다면 이것이 어찌 신 등 5인에게만 다행한 것이겠습니까?”

이 말을 좀 쉽게 풀어보자면 을사조약을 체결했지만 제국과 황실의 존엄도 건재(?)하고 종사도 안전한데 오로지 외교만 일본에 잠시 맡긴 것이고 언제든 나라가 부강해오면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인데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어차피 을사조약 이거 미뤄봤자 어차피 체결될 것이었고 과거 의정서, 협정서 체결할땐 조용하다 왜 이제와서 이렇게 시끄럽게 구는 건지 참 어이가 없네요."라는 이야기 되겠다.

오병서의 반박

이에 격분한 전 주사 오병서는 1906년 1월 5일에 소를 올려 을사오적의 주장을 반박했다.(출처는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아! 금년 10월 새 조약이 체결된 이후로 위로는 임금이 계신 서울부터 아래로는 궁벽한 산골에 이르기까지 높은 관리와 일반 관리들, 선비들과 하인들, 아이들과 여인들까지 모두 정신없이 뛰어나와 통곡하면서 ‘종묘와 사직이 망하였다, 강토(疆土)가 남에게 넘어갔다, 

백성들이 포로로 되었다.’ 
하면서 안절부절 못하고 진정할 줄을 모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박제순(朴齊純), 이지용(李址鎔), 이근택(李根澤), 이완용(李完用), 권중현(權重顯) 오적(五賊)을 죽여야 한다고 말하며 성토하는 상소를 연명(聯名)으로 계속 올리고, 충성스럽고 절의가 있는 많은 선비들은 자살까지 함으로써 노복이 될 수 없다는 뜻을 보였으니 저 무리들은 마땅히 사형에 처해야 함은 변론할 필요도 없이 알 수 있습니다.

아! 선왕들께서 세우신 법은 지엄한 것으로서 폐하께서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인데, 한 달이 지나도록 아직 오적이 사시(肆市)에 처해졌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고, 도리어 주제넘게 높은 관직에 처하기도 하고 태연히 지위와 녹봉을 그대로 누리기도 한다하니, 사람들은 모두 의혹을 가지고 그 까닭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폐하께서 참으로 저 무리들이 처단할 죄가 없다고 여겨서가 아니겠습니까? 아니면 실로 처단할 만한 죄는 있는데 저들이 외세를 끼고 있어서 어쩔 수가 없어서 그러는 것입니까? 저들에게 처단해야 할 죄가 있음을 명백히 알고는 있지만 과연 끼고 있는 세력을 꺼려서라면 여기에는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저들이 비록 함부로 날뛰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 한국의 신하입니다. 
폐하께서 처단하고자 하지 않는다면 그만이지만, 만일 처단하려고 한다면 단지 한번 명령하기에 달린 것인데 무엇을 꺼려서 집행하지 않으십니까? 이 때문에 저 무리들이 스스로를 해명하는 상소를 올리기까지 하였지만 저들의 역적 행동은 더욱 더 드러났습니다.

신들이 이른바 저들의 변명이라는 것을 가지고 변론해 보겠습니다.
저들이 말하기를, ‘독립이라는 칭호는 고치지 않고 제국이라는 명칭을 예전대로 두어서 종묘사직이 안녕하고 황실이 존엄하며, 단지 외교에 대한 문제만 잠시 이웃 나라에 맡겼다.’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이것은 오늘 처음으로 체결된 조약이 아니라 지난해의 의정서(議定書)와 협정서(協定書)에 의하여 최종 채결된 것이다.’라고 하며, 말하기를, ‘만일 저들처럼 충성스럽고 절의를 지킬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그때에 목숨을 내걸고 반대해 나설 것이지 대사(大事)가 이미 결판난 오늘에 와서야 갑자기 후회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구절구절 모순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저들의 속내가 여지없이 드러났습니다. 
종묘사직이 안녕하고 황실이 존엄하다고 하였으니, 저들이 이른바 대사가 이미 결판났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가리켜 하는 말입니까? 작년의 의정서와 협정서 등은 다른 사람이 작성한 것입니까? 이지용이 이 두 문서를 작성하였으니 이지용에게 이 두 조약에 대한 과오가 돌아갔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작년의 이지용은 역적이 되는데 금년의 이지용이라고 면할 수 있겠습니까? 성토한 사람들을 가리켜 충성스럽고 절의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비난하고 있으니, 저들의 흉악한 역적 같은 심보를 오히려 장려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저 무리들이 여러 차례 외국 대사들을 만나 절대로 허락할 수 없다고 운운한 것으로 본다면 저 무리들도 이 문제가 나라의 존망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저들의 말대로 독립이란 칭호를 고치지 않고 제국이란 명칭을 예전대로 둔다면 무엇 때문에 절대로 허락할 수 없다는 말을 하였겠습니까? 그들이 말하기를, ‘폐하께서 결단하지 않고 정부에 맡겼다.’고 합니다. 

일본대사가 폐하를 알현하기를 청하였지만 폐하께서는 단연코 허락하지 않았고 심지어 ‘사직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겠다.〔殉社稷〕’라는 세 글자까지 말씀하셨는데 저 무리들이 정부에 맡겼다고 운운하니, 도대체 무슨 일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저들이 말하기를, ‘신 등 여덟 사람이 아래에서 막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나, 폐하께서 너그럽고 큰 도량으로 허용하게 되실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무슨 심산입니까? 저 무리들이 무슨 권한을 가졌기에 막아내기가 용이하다고 하면서 폐하가 부득이 허용하게 될 것이라 사전에 짐작한단 말입니까? 암암리에 함정을 파놓고 사전에 강구하여 약관(約款)을 수정한다고 핑계 댄 것은 교묘하게 문제를 만들어 놓은 데 지나지 않으니, 폐하께서 하교하여 대답하지 않을 수 없게 함으로써 뒷날에 핑계 거리로 삼으려 한 것이 어찌 아니겠습니까? 아! 저들이 마음을 먹고 계책을 꾸민 것은 더없이 흉악하고 참혹합니다.

말단에 마침내 ‘이상 아뢴 말씀은 사실 준비를 강구하여 준비한 것에 불과하니, 물러나 일본 대사를 만나면 불가하다고 하고서 물리치겠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아! 저들이 과연 물리치려고 하였다면 어째서 물리칠 대책은 강구하지 않고 굳이 그 수정할 것에 대해 강구한단 말입니까? 과연 무슨 심산이겠습니까? 이것으로 보건대 그들이 호응한 정상이 명백하여 덮어 버릴 수 없습니다.

성상께서 ‘감정을 가지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라고 한 하교를 끌어대고, 또 ‘어구(語句)를 변통하는 것은 방법이 있을 것이다.’라고 한 하교를 끌어대며,  
‘잘 처리하라.’고 한 하교까지 끌어대어, 이것을 가지고 허락하려는 것이 성상의 뜻이었다고 하면서 저 무리들이 조약을 제멋대로 체결한 죄를 모면하려고 기도하였습니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감정을 가지지 않게 하면서 자기의 이익을 성취하는 것이 외교를 하는 법으로 볼 때 본래 당연한 것인데 어떻게 감히 이것을 가지고 저 무리들이 제멋대로 허락한 구실로 삼는단 말입니까?

‘어구를 변통하는 것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성상의 하교는 저 무리들이 아뢴 내용으로 인해 범상히 대답한 것에 불과한데, 어떻게 감히 이것을 가지고 어구를 수정하는 빌미로 삼는단 말입니까? ‘잘 처리하라.’는 말은 나라의 체면을 보존하면서 관계가 벌어지지 않게 하라는 의미인데, 어떻게 감히 온 나라를 남에게 넘겨주면서 잘 처리하는 것이라고 이를 수 있겠습니까? 저 무리들이 물러나겠다고 고하는 마당에 성상의 하교를 받들어 따를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는 것은 성상께서는 허락하고자 하셨는데 저 무리들이 반대하였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려는 것이니, 아!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성상의 하교는 단지 잘 처리하라는 것뿐이었는데 저 무리들이 ‘감히 따를 수 없습니다.’고 하였으니, 저들의 심중은 온 나라를 넘겨주는 것을 잘 처리하는 것으로 여겼단 말입니까?

저들이 명령을 받은 뒤에 들어가 비밀리에 칙지를 받든 것이 있었는데, 이미 비밀이라고 한 이상 재적(在敵)이하의 말은 드러내어서는 안 됩니다.
저들에게 만일 조금이라도 경외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더없이 중한 비밀스러운 칙지를 어찌 감히 소장에 대서특필하여 남들이 보고 듣도록 전파시킬 수 있겠습니까. 이 죄는 진실로 이루 다 주벌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한규설(韓圭卨)이 외국 대사를 만나 대답하면서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고 하교하였다고 운운한 말로 살펴보면, 이른바 비밀리에 받든 칙지란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協商妥辦〕’는 네 글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뜻은 일의 원칙에 맞게 협상해서 결과가 좋게 잘 처리하라는 것인데, 저 무리들이 어떻게 감히 이런 식으로 말꼬리를 잡아 성상께 과오를 돌린단 말입니까?
《춘추(春秋)》의 ‘군친(君親)에게 반역하면 주살한다.’는 것과 한(漢)나라의 법의 ‘불경(不敬)한 자에 대해서는 참형을 처한다.’고 한 것이 바로 저 무리에게 딱 맞는 법률입니다.

저들은 찬성하는가 반대하는가 하는 사이에 충신과 역적이 갈라진다고 하면서도, 외국 대사가 찬성하는 편이라고 한 데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변론하지 않아 스스로 찬성한 것으로 인정함으로써 결국 조인(調印)까지 하고 말았으니, 저 무리들은 스스로 역적이 된 것이며 저들이 비록 주둥이가 석 자라도 해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자복한 결안(結案)이 아니겠습니까? 저들이, ‘탄핵하는 사람들은 걸핏하면 신 등 다섯 사람을 매국 역적 내지는 망국 역적이라고 하는데, 만일 정부에 죄를 돌린다면 여덟 사람에게 모두 그 책임이 있는 것인데 하필 다섯 사람만 전적으로 죄를 져야 하겠는가?’라고 합니다. 

여덟 사람이 다같이 매국 역적, 망국 역적이 된다면 나라를 팔아먹고 나라를 망친 저 무리들의 죄가 가벼워질 수 있단 말입니까? 남을 끌어들여 같이 역적의 죄를 쓰려는 데서 더욱 더 그들의 말이 궁하고 그 심정이 딱함을 볼 수 있습니다. 

말하기를, ‘실상이 없는 죄를 뒤집어씌운다.’고 합니다.  
죄가 은폐되어 밝히기 어렵기 때문에 사람들이 의심스럽다고 지목하는 것은 실상이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저들의 손으로 조약의 문구를 수정하였고 저들의 손으로 인장을 찍어주었으며 저들의 입으로 스스로 그 죄를 열거하여 놓고도 이를 실상이 없는 것이라 하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리고 탄핵을 받은 사람이 도리어 탄핵한 사람에게 죄를 주도록 청하는 일이 종전에도 더러 있었습니까? 염치에 대해서는 저 무리들에게 추궁할 가치도 없지만, 극도로 염치가 없어서 결국 역적이 되고야 말았으니, 이것도 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 무리들은 이미 온 나라가 자기들을 원수로 여긴다는 것을 알고 많은 외국 군사들을 달고 의기양양하여 길에서 부르고 화답하면서 사람들이 우리를 감히 어쩌지 못한다고 여기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정말 제 나라를 배반하기를 꾀하고 암암리에 다른 나라 사람을 따르는 대역모반(大逆謀反)이라는 것입니다.

신 등은 뜨거운 피가 가슴에 끓어 넘쳐 지위를 벗어난 망령된 말로 숭엄하신 성상을 번거롭게 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황상께서는 시원스레 결단을 내리시고 미천한 신의 말을 받아들여 속히 오적을 참수함으로써 천하에 사죄하신다면 기강이 서고 군주의 위엄이 떨쳐져 이미 실추된 국권이 다시 회복되게 될 것입니다.”


을사오적만 있던게 아니라...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을 펴냈다.)의 윤덕한은 사실 "을사늑약"의 최고 책임자는 고종이라고 주장했다. 
그 주장에 따르면, 당시 신문들은 유림들의 상소만 믿고 을사오적에게만 책임을 물었다는 것이다. 고종은 "을사늑약"을 체결했어야 하나, 이걸 내각에게 책임을 넘겼으며 "협의하여 처리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대한국 국제에서는 '제9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각 국가에 사신을 파송 주찰(駐紮)케 하옵시고 선전 ·강화 및 제반약조를 체결하옵시느니 공법에 이른바 자견사신(自遣使臣)이니라.'라고 나와 있다. 
한마디로 원래 을사조약을 체결할 권리는 신하가 아니라 고종에게 있었다는 것이다.

유림들로써는, 감히 임금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었고 사실 궁궐 내부의 일들을 몰랐기에 그들은 그저 '고종이 반대했는데, 신하들이 감히 체결'한 걸로만 알고있었다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때문에 그 유명한 "을사육적" 드립이 나왔다. 
고종이 끝끝내 을사조약을 반대했을 뿐더러 비준을 하지 않았던 사실을 생각하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을사조약에 찍힌 도장이 고종의 옥새가 찍은 도장이 아닌 박제순의 도장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위에서 보듯 을사오적 외에 반대한 3명 중 한규설만 제외하고는 모두(이하영, 민영기)가 변절했으며, 조약 체결 후 궁내대신으로 고종을 협박한 이재극이라는 인물도 있었다.

또한 조약이 체결되던 손탁호텔 밖에선 이토 히로부미가 불러온 일본군이 무력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그 결과 조약에 참여한 8명의 대신들은, 겨우 찬성한 것 처럼 5대 3으로 조약체결에 찬성했다는 것이다. 박제순의 경우엔 조약에 반대했으나 협박에 못 이겨 "마음대로 하라"라고 하여 찬성했다고.

참고로 저 때 반대한 참정대신 한규설은 궁에서 결사반대했다가 일본군에게 감금되었다. 이후 감금된 것이 풀리자마자 즉각 탁지부대신(민영기), 법부대신(이하영)을 제외하고 전원을 해임시켰지만 자신이 오히려 해임당했다.

여담

조약체결 1년 전인 1904년에 공교롭게도 체결장소였던 덕수궁에 화재가 발생했는데 이유는 궁궐 안에 있는 온돌장비를 교체하려다가 목조로 된 궁 안에 불이 붙은 게 원인이라고 한다.

영화 《한반도》에서 이것을 가지고 이런 플롯을 짰다.
을사조약을 비롯한 여러 불평등조약에 찍힌 것은 황제의 국새다. 
고로 조약에 의거, 한국의 여러 권리는 일본에 있으며, 영화에서는 경의선 철도 부설권이라든가... 그러므로 국새가 조작되었다는걸 밝히면 조약을 무효화시킬 수 있다!

패전 이후로 이어진다는 것은 허무맹랑한 판타지다. 
을사조약은 국제법 위반의 소지가 큰데다가 박정희 때 일본과 맺은 한일기본조약 중 '1910년 8월 22일 이전에 일본과 맺은 조약은 무효다'가 있기 때문에 어차피 성립되지 않는다. 
정확히는 '이 조약이 맺어지기 전에 맺은 조약은 이미 무효다'인데... 원래 한국측에서는 기존 조약 및 협정을 '원천 무효'라고 주장했고, 일본측에서는 '이제 무효'라고 주장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논란이 있었으나 차관이 급했던 한국이 양보함으로서 결국 한국어본과 일본어본에는 각각 '이미 무효', '이제 무효(もはや無効)'라고 표현하고 영어본에서 'already void and null(이미 무효하며 효력이 없음)'이라고 표기하기로 합의하게 되었다. 
조약 당사자의 서명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무효 요건이 된다는 주장도 있다. 애초에 대한제국의 비준절차는 황제의 부서였다. 
비준절차도 거치지 못한 조약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므로 무효.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 날 11월 17일을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 독립투사들의 추모절(오늘날의 순국선열의 날)로 지정하며 을사조약 강제 체결에 대한 역사적인 치욕을 새기기 위해 지정하게 되었다.

2015년, 도츠카 에타로 전 류코쿠대 법과대학원 교수가 을사조약의 원본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고 지금도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며, 당시 일본 법학계에서 조약에 관하여 비준필요설을 따르고 있었던 만큼 '법적 부재의 사실'에 의하여 조약이 무효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어록
"아! 원통하구나. 아! 분하다. 우리 이천만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과 기자 이래 4천년 국민 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히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구나! 동포여! 동포여!"
장지연, <시일야방성대곡>
민영환은 한번 죽어 황제의 은혜에 보답하고 이천만 동포에게 사죄하려 한다. 나는 죽지만 죽지 않고 구천에서도 기필코 여러분을 도울 것이니 바라건대 우리 동포들은 더욱더 분발하여 힘쓰고 뜻을 굳게 갖고 학문에 진력하며 마음을 합하고 힘을 다해 우리의 자주 독립을 회복한다면 나는 지하에서나마 기뻐할 것이다.
충정공 민영환의 유언
"신은 어제 정부가 조약을 체결한 일에 대해 너무나 놀랍고 의심스러워 줄곧 근심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 일이 과연 얼마나 중대한 관계를 가지는 문제입니까? 조정에 물어서 협의하여 타당하게 처리하여야 할 것이었으나 바로 한밤중 대궐에서 그 누가 알까 두려워하면서 부랴부랴 회의를 열어 이렇듯 일을 크게 그르쳤습니다. 

이것은 지금 모든 사람들의 울분을 터뜨렸을 뿐 아니라 실로 천하의 영원한 죄인으로 되었으며 또 국법으로 볼 때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황상(皇上)께서는 빨리 처분을 내려 그날 회의한 모든 대신(大臣)들을 모두 법에 따라 처벌하심으로써 온 나라의 한결같은 울분을 풀어 주소서." 궁내부 특진관 이근명


"천하라는 것은 천하 사람들의 천하이지 한 개인이나 한 집안의 사적인 소유물이 아닙니다. 
나라에 중대한 일이 생기면 존엄한 임금도 위에서 독단(獨斷)하지 못하고 반드시 시임 및 원임 대신(大臣), 2품 이상의 관원들, 지방에 있는 유현(儒賢)들과 의논한 다음에 결안(決案)하는 것이 바로 조종조(祖宗朝)의 변함없는 법이었습니다. 

일본 공사가 청한 5가지 조목은 관계되는 것이 어떠하며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런데 한두 신하들이 폐하의 뜻을 받들지도 않고, 옛 법을 따르지도 않고 어찌 제 마음대로 옳거니 그르거니 하면서 나라를 남에게 넘겨준단 말입니까?원임 의정 조병세


이것은 일조일석(一朝一夕)의 일이 아니라 저들이 오랜 세월을 경영해서 이룩한 것이니, 그 형세가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저들이 마관조약(馬關條約; 시모노세키 조약) 및 일본과 러시아 간의 선전 포고서를 낸 이래로 대체 우리나라의 독립과 자주 및 영토를 보전한다고 말한 것이 몇 차례이며, 우리나라의 이익을 약탈하고도 걸핏하면 한국과 일본 양국이 서로의 우의를 더욱 친밀하게 한다고 말한 것이 또한 몇 차례입니까? 그 사기와 모욕을 헤아릴 수 없음이 이와 같은데 지금 저들이 이른바 황실을 보전한다고 하는 것을 폐하께서는 과연 깊이 믿으십니까? 최익현. 그리고 그의 말은 이루어지고야 말았다.

슬프다. 이 종사는 장차 무너질 것이요. 온 겨레가 남의 종이 되겠구나. 구차히 산다 한들 욕됨이 더할 뿐. 어찌 죽는 것보다 나으리오?   주영 서리공사 이한응

1] 서구 열강국들의 아메리카,아프리카 등의 식민지 지배 및 법 발효 등과 국제적인 지위.

2] 자기네끼리 땅따먹기하던 걸 정리하려고 헤이그 회의를 열었고, 이걸로 해결 안 되니까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것이다.3]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에 이런 내용이 들어 있다.이토 히로부미는 실질적으로 온건파였고, 어차피 먹을 거지만 국제 정세도 있고 해서 지금은 보호국으로 냅두자, 이런 식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견해를 설명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당하면서 일본 급진파의 주도대로 조선합병이 빨리 이루어졌다고 적혀 있었으나 최근 개정판에서는 일본 우익의 주장이라는 견해를 반영해서인지 완전히 수정되었다.4] 세로쓰기임에 유의하자.5] 하지만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일제의 관리하에 만들어 졌으므로 그걸 감안해서 보자.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도 1863년 그러니까 철종실록까지만이다.6] 이는 8인이 모두 반대를 하여도 잘라버리면 그만이라는 것이다!7] 이 발언 응답으로 이하영은 간신히 을사'육적'의 신세를 모면하나 이후의 행보는... 알다마다다.8] (...) 고종의 말도 문제가 있지만 이렇게 알아서 잘 팔아먹는다.9] 오적+이하영의 발언들 가운데 가장 뻔뻔한 대답이다(...)10] (...) 이렇게 은근슬쩍 넘어간다. 하긴 5적에 민영기나, 이하영, 이재극이 끼지 않고, 박제순처럼 민영기와는 반대로 조약 내용엔 참여하지 않은 자도 있으니 자기들 딴엔 억울 할 수도 있겠다. 특히 이완용 정도라면 억울할 만도 할 것이고... 이 글의 후반부는 한규설을 위선떤다고 까고 있다.11] 물론 이완용의 말은 원론적으로는 맞다. 종사도 여전히 건재해있었고 나라가 (일본보다) 부강해지만 자연스레 되찾을테고 어차피 체결되는건 황제 이하 내각 전원이 다 반대하든 그 정반대든 같았고 한일의정서의 주 골자중 하나가 대한제국에 재정고문,외교고문을 두는건데 당연하겠지만 외국인 고문에 이들은 모두 일본이 앉힌 각각 일본인,미국인이다. 말만 1905년에 외교권이 강탈된거지 실질적으로는 이전에 이미 뺏겼다. 하지만 종사가 곧 나라이란건 아니고 각 부처에 일본인 고문이 들어와 사실상 내정간섭까지 당하게 되었으며 부강하게 일본이 놔둘리 없으며 어차피 체결될 조약이긴 하지만 이런 부당한 조약에 찬성한것만으로도 욕먹을거리가 되며 의정서,협정서 맺을때 이들도 조용했다. 한마디로 방귀뀐놈이 성낸것보다도 더 "헐~" 이란 말밖에 안나올 말뿐이다.12] 김완섭에게 사랑받는 학자. 해당 문서 참조. 참고로 친일인명사전 편찬에도 참여.13] 내각 회의를 주도하는 2번째 책임자. 좌의정이나 부총리급이다. 실상은 의정대신(영의정)을 대신한 국무총리 대행급인데, 의정대신이 조병세를 마지막으로 공석이었기 때문이다. 1907년 6월 폐지되었다.

1905년 11월 17일​ 조선의 외교권을 일본에 위임한다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을사조약은 고종황제가 끝까지 거부한 조약으로
강제로 맺어졌다는 의미에서 늑약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을사조약의 무효를 선언한 고종황제의 글
을사조약이 늑약인 다섯가지 이유는
1. 군대를 앞세워 강제로 맺어진 조약
2. 조약문의 공식 명칭이 없다
3. 부실하게 보관이 이루어졌다.
4. 고종황제의 도장이 없다.
5. 국제협약 표준을 지키지 않음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