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21일 일요일

금강산, 金剛山. 1

금강산, 金剛山.

금강산의 주봉은 비로봉(1638미터)이다. 북쪽으로는 영랑봉(1601미터), 옥녀봉(1424미터), 상등봉(1227미터), 오봉산(1264미터)이 있고, 남쪽으로는 월출봉(1580미터), 일출봉(1552미터), 차일봉(1529미터), 미륵봉(1538미터), 백마봉(1510미터), 호룡봉(1403미터), 국사봉(1385미터) 등이 솟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금강산의 서쪽 봉우리로 만경봉, 백운대, 국망점, 비로봉을 큰 봉우리로 싣고 있다.
비로봉은 금강산의 주 봉우리로 바위에 무늬가 있다. 
오랫동안 산 기운과 안개로 인하여 아롱지게 섞이고 어리어 눈[설()]빛 같다. 
산 이름을 개골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글이다. 
금강산에는 일출봉과 월출봉이 있는데 해와 달이 뜨는 모습이 그 어느 곳보다 아름답다.
금강산은 우리나라 동해 위에 있다. 
지형의 아름다움이 세상에 높이 뛰어났다. 
그런 까닭에 그 이름이 천하에 퍼진 것이다.
내가 어릴 때 듣기로, 세상 사람들이 와서 보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나, 그렇게 되지 못함을 한탄하여 그 그림을 그려놓고 예배()하는 사람까지 있었다고 하였다. 그 사모함의 간절함이 이러하였다.
나는 다행스럽게도 이 나라에 나서, 이 산과의 거리가 수백 리도 못 되건만 벼슬에 얽매이고 세속의 명리에 분주하여 일찍이 한 번도 가보지 못하였다. 
표연히 떠나 멀리 가고 싶은 마음은 일찍이 가슴속에서 오락가락하지 앓을 때가 없었다. 
병자년 가을에 중국에 가서 천자를 뵈었더니 황제가 친히 글제()를 내시어 시 20여 수를 짓게 하였다. 
그중의 하나가 금강산이라는 제목이었다. 
이 산의 이름이 과연 온 천하에 높아서 내가 어릴 때 들은 말들이 헛말이 아닌 것을 알았다.
조선 초기의 문장가인 권근의 글이다. 그는 명나라에서 귀국하는 즉시 금강산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그전보다 더 바빠져서 끝내 금강산에 갈 수 없었다. 
가고 싶다는 마음은 누구나 먹지만 그 소원대로 되는 것은 아니어서 조선시대 사대부들 중 금강산을 유람했던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당시 권근이 중국의 황제에게 바쳤던 금강산 시는 다음과 같다.
높고 높은 천만봉()이 눈처럼 희게 섰으니, 바다 구름이 옥부용()을 열어 내놓았네. 
신령한 빛이 출렁거리니 창해()가 가깝고, 기운이 굼실굼실 조화()가 모임이로다. 우뚝 높이 솟은 언덕과 봉우리는 조도()에 임하고,
맑고도 그윽한 동학()은 신선의 자취를 숨기었네. 동쪽으로 노닐어 문득 그 높은 정상에 올라, 
홍몽(, 천지가 아직 나누어지지 않은 상태, 광대하고 뚜렷하지 않은 상태를 말함)을 굽어보며 한번 시원히 가슴을 씻어볼 것인가.
권근과 동시대의 사람으로 조선 왕조를 개창하는 데 한몫을 했던 하륜도 금강산에 대한 글을 남겼다.
풍악은 진실로 기이하고 뛰어나서 사랑할 만하다. 
납의(, 중이 입는 옷)를 입은 자들이 그 사이에 살고 있으니, 돌계단이 1000길이나 되어서 사람의 발자취가 드물게 이르기 때문에 마음이 경계와 더불어 고요할 수 있다. 그리하여 간혹 그 도()를 깨닫는 자가 있다. 
그 산을 금강산이라고 일컫는 것은 『장경()』의 설을 빌린 것이다. 『장경』에 금강산을 말하기를 “동해 속의 팔만유순()의 곳에 1만 2000의 담무갈(, 보살의 이름)이 항상 그 가운데에 머무른다”라고 하였으니, 풍악을 말한 것은 아니다. (······)
풍악을 일컬어 금강산이라고 하는 것은 그 풍악의 기이하고 뛰어난 것을 사랑함인가. 그 금강()이라는 가설()을 사모함인가. 거짓된 설()이 한 번 나와 온 세상 사람들이 그치지 않고 분주히 달려가기에 내가 변박()하려 한 것이 오래다. 
이제 그대가 시를 청하는 것을 인연으로 알고 이미 그 옛일을 생각하고, 산을 사랑하는 뜻에서 이 글을 쓴 것이니 그대는 참작할지어다. 
“모든 상()은 상()이 아니며, 진()도 가()도 다 공()이라고 말한다면, 내가 감히 변론할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하륜은 금강산에 대한 이야기가 불교에서 유래되어 사람들에게 잘못 전해지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서 금강산 답사를 떠나는 승려에게 이 글을 보냈던 것이다.
금강산을 유람했던 사람들은 아주 많다. 그중 고려 말의 문장가이자 목은 이색의 아버지인 이곡이 남긴, 회양도호부 북쪽 57리에 있던 회령()에 대한 글이 재미있다.
지정(, 중국 원나라 순제 때의 연호) 기축년 가을에 장차 금강산을 유람하려고 천마령()을 넘어서 산 아래의 장양현에서 자고, 아침 일찍 잠자리에서 식사를 한 뒤에 산에 오르니, 구름과 안개에 덮여 어두컴컴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풍악을 유람하는 이가 구름과 안개 때문에 보지 못하고 돌아가는 일이 허다하다’ 하니, 같이 유람하려 하는 자들이 다 근심하는 빛으로 묵묵히 기도하고 있었다.

산에서 떨어지기 5리쯤 되는 곳에 이르자, 그늘진 구름이 차츰 엷어지면서 햇빛이 새어 나오더니, 배점()에 올랐을 때는 하늘이 밝고 기운이 맑아서 산의 밝기가 다듬은 것 같았다. 
이른바 1만 2000봉을 낱낱이 셀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산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은 반드시 이 고개를 경유한다. 
고개에 오르면 산을 보게 되고, 산을 보면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이마를 조아리게 된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배점(절하는 고개)이라고 한다.
식산() 이만부는 금강산의 1만 2000봉을 바라보며 이런 글을 남겼다.
앞을 바라보니 1만 2000봉과 마주하여 산맥은 아득하고 구불구불 이어졌는데, 날카롭게 치솟고 갑자기 우뚝한 물체가 날아오는 듯하여 무섭고 놀랍고 기쁘고 사랑스러우며 공경할 만하고 두려워할 만하여 내장까지 상쾌하게 물에 잠긴 듯하였다.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지식인들도 금강산에 많이 올랐다. 
소설뿐 아니라 기행 문학도 하나의 장르이고, 그것이 바로 독자의 범위를 넓힐 것으로 예측했던 춘원 이광수도 금강산을 유람한 뒤 『금강산유기』를 남겼다.
우리는 점심을 먹고 이럭저럭 1시간이나 넘게 기다렸으나 인()해 운무가 걷히지를 아니합니다. 
나는 새로 2시가 되면 운무가 걷히리라고 단언하고 그러나 운무 중에 비로봉도 또한 일경()이리라 하여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동으로 산령을 밟아 줄 타는 광대 모양으로 수십 보를 올라가면 산이 뚝 끊어져 발아래 천인절벽이 있고, 거기서 북으로 꺾여 성루 같은 길로 몸을 서편으로 기울이고 다시 수십 보를 가면 뭉투룩한 봉두에 이르니 이것이 금강 1만 2000봉의 최고봉인 비로봉 정상입니다.
운무가 사색()하여 봉두의 바윗돌밖에 보이지 아니합니다. 
그 바윗돌 중에 중앙에 있는 큰 바위는 배바위라고 부른다는데 배바위라고 함은 그 모양이 배와 같다는 말이 아니라 ‘동해를 다니는 배들이 그 바위를 표준으로 방향을 찾는다는 뜻’이라고 안내자는 설명합니다. 
이 바위 때문에 해마다 여러 천명의 생명이 살아난다고, 그러므로 선인들은 멀리서 이 바위를 향하고 제사를 지낸다고 합니다. (······)
2시가 되니 문득 바람의 방향이 변하며 운무가 걷히기 시작하여 동에 번쩍 일월출봉이 나서고 서에 번쩍 영랑봉의 모양이 나오며 다시 구룡연 골짜기의 봉두들이 백운 위에 드러나더니 문득 멀리 동쪽에 심벽한 동해의 파편이 번뜩 반뜩 보입니다. 
영랑봉 머리로 고고한 7월의 태양이 번쩍 보이자 운무의 스러짐이 더욱 속()하여 그러기 시작한 지 불과 4, 5분 사이에 천지는 그물로 씻은 듯한 적나라()가 아니라 청나라()한 모양을 드러냈습니다. 
그 장쾌함이야 무엇에 비기겠습니까. 마치 홍몽 중에서 새로 천지를 지어내는 것 같습니다. 
“나는 천지창조를 목격하였다” 또는 “나는 신천지의 제막식을 보았다” 하고 외쳤습니다.
운무에 싸였다가 서서히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느닷없이 드러나는 금강산의 모습에 넋을 잃은 춘원의 묘사가 감칠맛 난다.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언론인 문일평이 금강산을 유람하고 지은 『동해유기()』에 실린 구룡연 부근을 보자.

구룡연은 깎아지른 암벽에 내리붓는 200여 척의 폭포로서 그 웅대하고 장엄한 것이 사람을 압도하여 형용할 수 없는 일종의 위협의 감을 주었다. 
나는 일찍이 박연폭포를 보았지만 박연폭포가 비록 기승하다고 하나 열 박연을 가지고도 한 구룡연을 대적할 것인가. 
구룡연은 하나로써 미치는 것이 아니요, 이 밖에 상팔담()이란 것이 있어서 대자연미를 이 위에는 더할 수 없이 아주 구족()하게 만들어놓은 조화의 기적이다. (······)
내외금강에 연담계폭()이 몇천 백으로 헤일 수 있으나, 
오직 구룡연으로서 폭포미의 극치를 삼는 것이 마땅하니, 이것이 금강뿐 아니라 세계적 절승이 될 것이다. 
아마 모르면 모르지만 저 일본의 화엄폭포와 중국의 여산폭포 같은 것도 도저히 이와 견주지 못할 것이다.

구룡폭포 © 유철상
깎아지른 듯한 암벽에서 내리붓는 200여 척의 구룡폭포는 그 웅대하고 장엄한 것이 사람을 압도하여 형용할 수 없는 감탄을 자아낸다.

문일평은 이 폭포를 보고 나면 10년 동안을 유람한 것보다 오히려 나은 영감이 생기리라고 극찬을 하면서 산 수양은 오로지 대자연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역설하였다.

금강산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들이 서려 있는데, 금강산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던 김시습에 대한 이야기가 윤근수가 펴낸 『월정만필()』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김시습이 금강산을 유람하기 하루 전날이었다. 
추강 남효온을 비롯한 여러 이름난 사람들이 그가 머물던 용산()의 수정()에 찾아왔다. 
그들과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던 김시습이 갑자기 창밖 두어 길 밑으로 떨어져 몹시 다쳐서 숨을 쉬지 못하였다. 
당황한 여러 손님들이 달려가서 그를 잘 모시고 와서 누이자 한참 만에 깨어났다.

누워 있는 그에게 일행들이 “그대가 이렇게 많이 다쳤으니 내일 어떻게 금강산 유람을 떠나겠는가? 몸조리나 잘하고 있게. 우리는 내일 답사를 떠나겠네”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김시습이 “조섭(調)을 잘해서 조금이라도 나으면 아픔을 참고 갈 것이니 자네들은 다락원에 가서 나의 송별을 기다리게나” 하였다. 
다음 날 아침에 여러 손님들이 다락원에 가니, 김시습이 벌써 와 있었다. 
다친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태연하게 웃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본 남효온이 “매월당은 필시 환술()을 가지고 우리를 속이고 있는 것이네” 하고 그를 나무랐다.

구룡연 연주담 © 유철상
금강산 등산로를 따라 줄 타는 광대 모양으로 수십 보를 올라가면 산이 뚝 끊어져 발아래 천인절벽이 있고 연못이 구슬처럼 박혀 있다.

“조선의 국토는 산하 그대로 조선의 역사며 철학이며 시며 정신입니다”라고 했던 최남선도 『금강예찬』의 서두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조선인으로서 조선의 제일이 무엇인지를 모르면 아무튼 큰 수치입니다. 
그것이 세계의 제일을 겸하는 것이면, 그를 모르는 수치도 그만큼 클 것입니다. 
금강산은 어떠한 의미로든지 조선의 제일이요, 겸하여 세계의 제일인 것입니다. 
조선뿐 아니라 세계를 통틀어 다시는 짝이 없고, 견줄 이 없는 유일 특별한 천지간의 기적입니다.
산도 많고 명산도 많습니다. 
금강산처럼 온갖 조건이 구비되고, 또 인류가 희기()할 줄 모르는 데까지를 미리 배포하여 가진 경승는 과연 세계에 둘도 없는데, 이 하나밖에 없는 조화의 기적이 조선에 있게 된 것은 생각하면 아슬아슬한 우리의 행복인 동시에 알뜰살뜰한 하늘의 은총입니다.
그는 “금강산을 읊은 시를 한자리에 모을 수 있다면 도서관을 하나 채울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금강산을 예찬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처럼 금강산에 가서 꼭 먹어봐야 할 음식이 있다. 
북한 정부가 자부심을 갖고 운영하는 온정각의 평양냉면과 털게 요리다. 
평양냉면은 커다란 놋그릇 한가득 냉면이 채워진다. 
돼지고기 편육을 덤으로 먹으면 세상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별미다. 남한 관광객들의 금강산 여행이 시작되면서 금강산 기념품도 속속 등장하였다. 
금강산 기념품은 온정리 금강산관광특구의 면세점에 모두 구경할 수 있다.

외금강, 내금강, 해금강
화엄경에서 금강산에 1만 2천 봉우리가 있다고 할만큼 많은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는 금강산은 최고봉인 비로봉(1,638m)을 중심으로 동서 40km, 남북 60km, 면적 530㎢에 펼쳐져 있다. 
금강산 주능선은 호룡봉-외무재령-내무재령-월출봉-비로봉-옥녀봉-상등봉-온정령-오봉산으로 이어진다. 

금강산은 만폭동 계곡미의 극치를 자랑하는 내금강, 만물상 산악미로 대표되는 외금강, 그리고 동해를 따라 호수와 바다, 기암괴석과 푸른 소나무가 아름다운 절경을 연출하는 해금강으로 나뉜다. 

주능선의 분수령을 경계로 동쪽은 산세가 웅장하고 기발하고 씩씩한 것이 남성적이라고 하여 '외금강'이라 하고, 
서쪽은 산세가 온유하고 수려하며 우아한 것이 여성적이라고 하여 '내금강' 구역으로 설정되어 있다. 
고성의 남강 하구와 통천의 총석정·시중호 일대의 바닷가 절경들을 묶어 '해금강'이라 한다.
'해금강'은 총석정이 유명한데, 총석정은 현무암 바위기둥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표면에만 균열이 생겨 다각형 기둥으로 변해 동해의 검푸른 파도에 씻기면서 만들어진 신비로운 경관으로 특히 4개의 돌기둥이 우뚝 선 높이 수십m의 입상4선봉이 뛰어나다. 

'외금강'에는 한국에서 가장 긴 폭포로 물줄기가 139미터나 되는 비봉폭포, 구룡폭포와 구룡연, 선녀와 나무꾼 전설을 가진 상팔담, 만물상 구역 등이 유명하다. 
'내금강'은 금강산 계곡미의 자랑으로 가장 경치가 좋다는 만폭동을 비롯해 백운대, 비로봉, 구성동, 명경대, 태상동 등 명승구역들이 있으며, 표훈사, 삼불암, 아미타여래좌상(묘길상) 등 불교유적들이 많다.

금강산은 한반도 중부지방의 동,서해안의 분수령을 이루고 있는 태백산맥 줄기의 북부에 자리잡고 있는 산. 
행정구역 상으로는 강원도 고성군과 금강군, 통천군의 일부에 해당된다.

옛부터 뛰어난 절경으로 유명한 금강산은 1998년 한국 분단 50여 년만에 남한의 주민들에게 개방된 최초의 북한관광지이기도 하다. 


계절에 따른 금강산 이름?
금강산은 계절에 따라 독특하고 매혹적인 장면을 연출하여 계절마다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봄에는 화강암으로 된 산을 둘러싼 아침이슬이 떠오르는 태양에 빛나 마치 7대 보석 중에 하나인 금강석과 같다하여 '금강산(金剛山)', 
여름에는 계곡과 봉우리에 짙은 녹음이 깔려 신록의 경치를 볼 수 있다해서 '봉래산(蓬萊山)', 
가을에는 붉게 타는 단풍이 바위, 소나무와 조화롭게 어울려 아름다운 '풍악산(楓岳山)', 겨울에는 나뭇잎들이 다 떨어져 금강산의 바위를 구석구석 다 보여주어 마치 금강산 봉우리들이 모두 뼈를 드러낸 것 같다하여 '개골산(皆骨山)'이라 불린다.

금강산관광. 金光.
금강산은 1998년 11월 한국 분단 50여 년만에 남한의 주민들에게 개방된 최초의 북한관광지이기도 하다. 

금강산 관광은 지난 1989년 고 정주영 회장이 방북하여 금강산 남북공동개발 의정서를 체결한 후, 
1998년 6월부터 현대아산에 의해 추진되어 2002년 11월까지 50만명이 넘는 남한주민이 금강산을 찾았다. 
2003년 2월엔 육로관광을 위한 실무진 사전답사가 이루어졌다. 

북한은 2002년 11월에 금강산 일대를 관광특구(금강산관광지구)로 지정하였다.
현대그룹의 주도로 북한의 금강산을 둘러보는 관광 상품.
1998년 11월 18일 시작된 금강산관광은 한국의 민간인들이 북한을 여행하는, 남북 분단 50년사에 새로운 획을 그은 사건이다. 

이 관광은 한국의 기업인 현대그룹의 오랜 노력과 정부의 햇볕정책이 맞물려 그 결실을 맺었는데, 1989년 1월 현대그룹의 정주영 명예회장이 방북하여 금강산 남북공동개발 의정서를 체결하면서 그 씨앗이 잉태되었다. 
그 후, 1998년 2월 14일 정몽헌 회장이 중국 베이징[]에서 북한측과 첫 협의를 거친 다음, 6월 23일 금강산관광 계약이 체결되었음을 발표하였다. 
당해 8월 6일 통일부는 현대상선, 현대건설, 금강개발의 협력사업자를 승인하였고, 10월 13일 장전항 공사를 위한 자재와 장비를 실은 배가 출항하였다. 
이어 11월 14일 금강산 관광선인 금강호의 시험 운항을 마치고, 11월 18일에 금강호가 처음으로 출항하였다.

1999년 2월 28일에는 금강산 온정리휴게소 및 금강산 문화회관 준공식을 갖는 등 순조롭게 진행되던 금강산관광은 관광 시작 7개월 만인 6월 20일 관광객 민영미()가 북한 환경감시원에게 귀순 공작을 했다고 억류되면서 잠정적으로 중단되었다가, 현대측과 북한이 베이징에서 관광 세칙과 신변안전보장 합의서를 체결한 후 다시 진행되었다.

금강산관광지역 내 숙박시설이 없었던 처음에는 유람선을 타고 금강산 앞바다에 위치한 장전항까지 가서 낮에는 소형 선박으로 육지로 이동하여 관광하고, 
밤에는 유람선으로 돌아와 숙박하면서 4박 5일간 진행되었다. 
2004년 1월부터 해로관광이 중단되었으며 2003년 9월부터 육로관광이 시작되었다. 
2004년 7월 금강산 당일관광, 1박 2일 관광을 시작하였고, 2005년 6월 금강산 관광객 100만명 돌파하였다. 
2007년 5월 내금강관광을 시작하였으며 2008년 3월 승용차관광을 실시하였다.

2008년 7월 11일 관광객 박왕자가 북한군의 피격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금강산 관광이 잠정 중단되었다.
북한 최초의 관광특구로, 
2002년 10월 23일 금강산 일대를 국제적인 관광지역으로 규정하는 정령을 발표한 뒤, 같은해 11월 25일 '금강산 관광지구법'을 발표하면서 명문화되었다. 
그해 9월 지정된 신의주경제특구와 다른 점은 신의주가 경제특구로서 입법·사법·행정권이 보장되는 반면, 금강산 특구는 북한의 주권이 그대로 적용된다는 점이다.

관광지구법의 주요 내용은, 
① 관광지구 개발을 위한 법인·개인은 물론 경제조직의 자유로운 투자가 허용되고, 재산이 법적으로 보호를 받는다. 
② 관광지구에서 자유로운 외화의 반출입이 허용된다. 
③ 관광 허용대상은 한국 주민과 해외 동포 및 외국인이다. 
④ 개발업자가 하는 관광지구 개발과 영업활동에는 과세하지 않는다. 
⑤ 관광지구 이외에 다른 관광지의 관광도 가능하다. 
⑥ 관광지구의 관리나 관광에 지장을 주는 사람은 손해배상 등의 제재가 가능하고, 심할 경우에는 추방을 할 수도 있다.

이에 금강산 일대가 완전히 개방되어 자유관광이 허용되고, 여행업·숙박업·첨단과학 시설에 대한 투자가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게 되었다. 
개발과 관광사업 전권은 현대아산(주)이 맡아 2005년까지 5억 9000만 달러, 2006년 이후에는 13억 달러를 투자해 금강산 일대를 제주도와 같은 종합관광단지로 개발하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북한 쪽에서도 남북경제협력과 시장경제를 실험하는 계기가 되고, 아울러 개성공단이나 신의주경제특구에 대한 투자와 연계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금강산관광특구.
금강산 일대에 지정된 북한의 관광특구"
북한의 관광특구로 금강산 일대의 관광을 통한 수입의 증대와 경제활성화를 꾀할 목적으로 2002년 지정되었다. 
금강산 관광지구를 개발하는 투자자에게 개발과 영업활동, 세금면제 등을 통해 투자를 유인하고 있다. 
금강산관광지구에는 강원도 고성읍 온정리, 성북리 일부 지역과 삼일포, 해금강 지역, 통천군 일부 지역이 포함되며, 
이곳에서는 북한 주권이 행사되지만 관광지구 개발을 위한 개인과 법인, 기타 경제조직들의 자유로운 투자가 허용되고 재산을 법적으로 보호받도록 했다.

특구법은 특히 관광업 외에 소프트웨어 등 무공해 첨단과학기술부문의 투자도 허용하는 한편, 사업 주체인 현대아산이 사업권한의 일부를 다른 투자자에게 양도, 임대할 수 있도록 했다. 
현대아산은 금강산관광특구의 토지를 2052년까지 50년간 이용할 수 있는 토지 이용권을 확보했다.

이곳은 남북 상황에 따라 그 영향을 그대로 받는 민감한 지역이다. 남북관계가 비교적 우호적이고 남북교류가 활발했던 김대중ㆍ노무현 정권 당시에는 남한 관광객의 방문이 많은 편이었으나,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남북관계가 급속히 냉각되었고 2008년 7월 11일 남한 관광객이 피격되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함에 따라 금강산관광사업이 중단되었다.

관광객의 신변안전이 보장되지 못한 상태에서 북한은 금강산관광 재개를 주장하였고, 이에 응하지 않자 금강산관광 중단의 책임을 남한 측에 떠넘기며 답보상태를 이어왔다. 
급기야 2010년 4월에는 금강산지구 내 남한 측 시설 및 재산을 몰수하고 체류인원을 전원 추방하기에 이르렀다. 
2011년 4월에는 현대아산의 독점사업권을 취소한 데 이어, 5월 '금강산국제관광특구법'을 채택하여 남한 측의 금강산관광 참여를 배제하고, 2011년 11월 4일 중국을 통한 금강산국제관광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