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5일 월요일

평창군. Pyeongchang-gun, 平昌郡.

평창군. Pyeongchang-gun, 郡.


‘오대산에 가서 밥을 먹지 못하면 사흘을 앓는다’는 말은 옛날 강원도 강릉 사람들이 월정사에 가서 밥을 못 먹으면 한이 된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오대산의 품에 안긴 월정사가 있는 평창의 고구려 때의 이름은 욱오현()이었다. 
신라 때 백오현()으로 고쳤다가 고려 때 지금의 이름으로 바꿨다. 
조선 태조 원년에 목조의 비인 효비의 고향이라 하여 군으로 승격되었다.

정탁이 “산을 베개로 하고 골짜기에 깃들인 백성의 집들이 있는데, 옛 고을은 수() 리에 걸쳐 쓸쓸한 모습이로구나. 세월이 오래니 이미 자취는 기와집을 봉하였고, 비가 개니 아지랑이의 푸름은 뜰에 가득하게 서린다”라고 하였고, 정도전 또한 “중원의 서기는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 옛 고을 쓸쓸한 옛 산의 모퉁이로다. 
문 앞의 땅은 좁아서 수레 두 채를 용납할 만하고, 하늘이 낮아 재 위는 겨우 석 자 높이로구나”라고 노래했던 평창군 진부면에 오대산이 있다.
오대산에 있었던 소은백이산()이 『여지도서』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관아의 서쪽 65리에 있다. 
민간에 전하기를 신선이 살던 곳이었다. 
옛날에 사냥꾼이 짐승을 쫓다가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 골짜기 안을 바라보았다. 
오래된 나무와 초가집, 좁다란 길이 죽 이어져 있고, 시냇가에는 무명을 희게 누이고 옷들을 빨아 널어서 다른 곳처럼 사람이 살고 있는 듯하였다. 
산에서 내려가 그곳을 찾아보았지만 구름과 안개가 골짜기에 가득하여 그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그곳은 아마도 오대산의 남쪽 기슭이 아닌가 한다.
오대산 어딘가에 있던 신선이 사는 곳, 그래서 사람들이 오대산을 즐겨 찾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대산 아랫자락 진부에서 대관령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도암면이 대관령면으로 이름이 바뀐 것은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대관령면을 가로지르는 횡계천은 예로부터 명태를 말리는 덕장이 명물이다. 
동해안에서 잡힌 명태는 주문진이나 묵호, 속초 항구에 내려져 내장이 제거된 채 트럭에 실려 이곳으로 오게 되는데, 횡계천의 두꺼운 얼음을 깨고 얼음물 속에 담가서 하룻밤을 둔다. 
얼음물에 말끔하게 씻긴 명태는 두 마리씩 짚으로 엮인 채 덕장에 걸려 긴 겨울잠을 잔다. 
명태는 대관령으로 불어오는 눈보라를 맞으며 얼었다 녹았다 반복하는 동안 살이 부풀어 오르면서 마른다. 
그렇게 마른 명태는 추위가 풀리는 3월 말쯤이면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며 황금빛을 지닌 명태 본연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황금빛이 나도록 말리면 맛좋은 북어가 되는데, 그 북어를 황태라고 부른다. 
가장 맛이 좋은 황태를 만들려면 특히 영하 20도 가까운 매서운 추위와 눈보라 속에서 명태를 잠재워야 한다.

멀리 북태평양 바다에서 잡히는 명태는 동해안의 것보다 크기는 더 크지만 맛이 덜한데, 동해안에서 잡히는 명태는 조금 작아도 짭짤하고 구수한 맛이 난다. 
무엇보다 양념을 빨아들이는 힘이 강해서 맛이 좋다. 
예전에는 함경도 원산에서 말린 명태를 가장 좋은 것으로 쳤지만 지금은 이곳 횡계에서 말린 황태를 제일로 친다.

월정사나 상원사 같은 이름난 절들이 있는 오대산은 불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연꽃을 닮았다는 오대산의 다섯 봉우리에 얽힌 사연은 불교 설화에서 비롯된 이야기다. 
중국 산서성의 오대산과 같은 이름의 이 산은 불교에서 석가여래의 왼쪽에 자리하여 지혜를 다스리는 보살로 추앙받는 문수보살이 머무는 곳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산은 그 이름부터가 불교 신앙과 관련 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자장율사가 중국의 오대산에서 “그대 나라의 동북쪽 명주 땅에 오대산이 있고 거기에 만 명의 문수보살이 늘 머물고 있으니 뵙도록 하시오” 하는 깨우침을 받고 돌아온 뒤 이곳 오대산이 불교의 성지로 터전을 잡게 되었다.

선덕여왕 때인 643년에 이 산에 온 자장율사는 풀을 엮어 집을 짓고 문수보살을 만나려고 했으나 사흘 동안 음산한 날씨가 계속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게 되었는데, 고려 말기의 문신인 민지는 그의 저서인 『묵헌집()』에 이 사실을 기록했다. 
후세 사람들 역시 자장율사가 머물렀던 곳이 바로 지금의 월정사 터이며, 그때부터 오대산이 ‘열려서’ 월정사가 세워진 것으로 기록하였다. 
오대산에 문수보살이 머물고 있다는 오대산 신앙이 「화엄경」에 바탕을 두고 중국의 영향을 받아 이곳에 터를 잡았으며 나아가 일본으로까지 퍼졌다고 보는 것이다.

태백산맥에 위치해 있어 해발고도가 700m 이상인 곳이 전체 면적의 약 60%를 차지한다. 
북·서·동 3면은 높은 산지로 둘러싸여 있으며, 남쪽으로 경사진 지형을 나타낸다. 
북쪽과 서쪽에는 오대산(:1,563m)에서 분기한 차령산맥이 뻗어 있어 계방산(:1,577m)·흥정산(:1,277m)·태기산(:1,261m)·청태산(:1,200m)·백덕산(:1,350m, 일명 ) 등이 솟아 있고, 동쪽에는 황병산(:1,407m)·고루포기산(1,238m)·발왕산(:1,458m)·박지산(:1,394m)·백석산(:1,365m)·청옥산(:1,256m)·가리왕산(:1,561m) 등 높고 험한 산들이 연봉을 이룬다. 

평창강은 계방산에서 발원한 속사천()이 도사천()을 합하여 남서류하면서 덕거천()·흥정천()과 합류하여 남류하다가 대화천()·안미천() 등을 안미리에서 만나 방림리()에서 계촌천()을 합쳐 평창읍에서 심하게 곡류하면서 영월군으로 흘러들고, 오대산에서 발원한 오대천은 진부()를 지난 뒤 심하게 곡류하면서 정선군으로 흘러나간다. 

황병산에서 발원한 송천()은 대기천()을 합류하여 역시 심하게 곡류하면서 정선군으로 흘러든다. 
남한강()의 지류들은 그 유역에 약간의 평지와, 대화·진부·도암() 등지에 대규모의 산록 완사면을 발달시켜 농경지로 이용된다. 

평창읍 중리(), 대화면() 대화리와 안미리, 방림면() 방림리 및 미탄면() 고마루 마을 일대에는 석회암 지층의 카르스트 지형이 발달되어 있고, 대관령 부근과 진부리 일대에는 옛 침식면이 융기한 평탄면이 넓게 나타나 있어 학술적으로 중요시된다. 

내륙 고원지대에 위치하기 때문에 기온의 교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를 나타내어 같은 위도의 어느 지역보다도 기온이 낮고, 여름이 짧다. 
연평균기온 10.3℃, 1월평균기온 -6.3℃, 8월평균기온 24.5℃이고, 연평균강수량은 1,082mm이다.

정의

강원도 중남부에 위치한 군.

개관

동쪽은 강릉시·정선군, 서쪽은 횡성군, 남쪽은 영월군, 북쪽은 홍천군·강릉시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8°46'∼128°14', 북위 37°16'∼37°49'에 위치한다. 
면적은 1,464.16㎢이고, 인구는 4만 3500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개 읍, 7개 면, 191개 행정리(89개 법정리)가 있다. 
군청은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하리에 있다.

자연환경

태백산맥 중에 위치하기 때문에 평균 해발고도가 600m 이상에 이르고, 특히 북·서·동 3면은 높은 산지로 둘러싸여 있으며, 남쪽으로 경사진 지형을 나타낸다.
평창읍 중리, 대화면 대화리와 안미리, 방림면 방림리 및 미탄면의 고마루마을 일대에는 석회암 용식지형인 카르스트 지형이 발달되어 있다. 
대관령면 횡계리 주변의 이른바 대관령면이라고 일컫는 평탄면과 하진부 부근의 진부면 및 봉평면 북부 일대에 분포하는 평탄면들은 옛 침식면이 융기한 것으로 우리나라 중부지방의 지형 발달을 설명하는 데 학술적으로 중요시되고 있다.
북쪽과 서쪽에는 오대산(, 1,563m)에서 분기한 차령산맥()이 뻗어 있어 계방산(, 1,577m)·흥정산(, 1,277m)·태기산(, 1,261m)·청태산(, 1,200m)·백덕산(, 1,350m) 등이 솟아 있고, 동쪽에는 황병산(, 1,407m)·매봉(1,173m)·고루포기산(1,238m)·발왕산(, 1,458m)·박지산(, 1,394m)·백석산(, 1,365m)·청옥산(, 1,256m)·가리왕산(, 1,561m) 등 높고 험한 산들이 연봉을 이룬다.
계방산에서 발원한 평창강()은 속사천()·도사천()을 합하여 남서류하면서 덕거천()·흥정천()과 합류하여 남류하다가 대화천()·안미천() 등을 만나 방림면 방림리에서 계촌천()을 합쳐 평창읍에서 심하게 곡류하면서 영월군으로 흘러들며, 오대산에서 발원한 오대천은 진부를 지난 뒤 심하게 곡류하면서 정선군으로 흘러간다. 
황병산에서 발원한 송천은 대기천()을 합류하여 역시 심하게 곡류하면서 정선군으로 흘러든다. 
남한강의 지류들은 그 유역에 약간의 평지와 하성단구를 발달시켰다.
내륙고원지대에 위치하기 때문에 기온의 교차가 심한 대륙성기후를 나타내어 같은 위도의 어느 지역보다도 기온이 낮고 여름이 짧다. 
평창읍을 중심으로 한 지역은 연평균 기온 10.4℃, 1월 평균기온 -5.6℃, 8월 평균기온 23.3℃이며, 연 강수량은 1,343.8㎜이다. 
대관령은 연평균 기온 7.8℃, 1월 평균기온 -6.9℃, 8월 평균기온 20.5℃이고, 연 강수량은 1,815.5㎜로서 1월과 8월의 기온은 평창읍보다 낮으나 강수량은 훨씬 많고 일조지수가 적어 식물의 생육기간이 짧은 고랭지 기후의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역사

구석기시대 및 신석기시대의 유물·유적이 발견된 적은 없으나 인접한 횡성과 홍천지역에서 구석기시대의 유물·유적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에서도 오래 전부터 인류가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
청동기시대의 유물로는 고인돌이 다수 발견되었으며, 부족국가시대에 예맥국()의 태기왕()이 이곳에서 잠시 국가를 이루었다는 전설이 전해 오고 있다.
삼국시대에는 5세기경 고구려의 영역에 속하여 욱오현() 또는 우오현()이라 하였다가 뒤에 신라에 편입되었으며, 삼국통일 이후 757년(경덕왕 16)백오현()으로 고치고 나성군(: 지금의 영월)의 영현()으로 하였다.
940년(태조 23)평창현()으로 개칭하여 원주의 속현()으로 삼았다가 1299년(충렬왕 25)에 비로소 현령을 파견하여 원주에서 독립시켰다. 
1387년(우왕 13)에는 왕의 총애를 받던 환관 이신()의 고향이라 하여 평창군으로 승격시켰으나 곧 다시 평창현으로 고쳤다. 
별칭을 노산()이라 하였다.
조선 건국 직후인 1392년(태조 1)에 목조()의 비 효공왕후()의 고향이었다는 이유로 다시 평창군으로 승격시켰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수 권두문()을 중심으로 군민들이 천연의 요새인 응암굴에서 왜군에 항전하였다. 
병사들은 장렬히 전사하고 권두문은 사로잡히게 되었다. 
권두문은 탈출에 성공해 당시의 일을 일기로 남김으로써 임진왜란의 증인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 5월에 충주관찰사 소속의 군이 되어 5개 면을 관할하였으며, 다음 해 다시 강원도에 편입되었다. 
1906년 10월 1일에는 강릉군의 대화()·봉평()·진부() 등 3개 면이 편입되고, 신동면()은 정선군으로 이관되었다.
1907년 10월에는 고종 퇴위에 반대한 의병이 봉기하여 하대화()와 하일리에서 운집한 뒤 상대화로 진격하였으나, 남산으로 쫓겨 가던 일본군의 반격을 받아 평창의병 40여 명이 붙잡혀 총살당하였다. 
같은 해 천도교도들이 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계획하다가 탄로되어 실패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천도교인과 유학자들이 대화장날과 평창장날인 4월 4일과 5일에 거사할 것을 계획하던 중 하일리에서 탄로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1931년 4월 1일정선군 도암면()이 편입되었고, 1934년 7월 1일대화면 일부가 분리되어 방림면()이 되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 선발대가 침투하여 이때부터 90일 동안 적 치하에 들게 되었다. 
9월 28일 백골부대 선발대에 의해 잠시 수복되었으나 곧 전선이 남하함으로써 주민들은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다. 
유엔군의 반격으로 적군의 남하가 37°선에서 저지됨으로써 주민들은 귀향할 수 있었다.
1968년 10월울진·삼척 지방에 침투한 무장공비가 11월 말태백산을 넘어 이 지역에 들어왔으며, 군·경과 예비군에 쫓겨 북쪽으로 도주하던 공비 잔당들이 이승복 소년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973년진부면 장평리가 봉평면으로, 도암면 호명리 일부와 봉산리가 진부면으로 편입되었으며, 1979년 5월 1일평창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3년 2월 15일에는 봉평면의 백옥포리·장평리, 진부면의 속사리·노동리·용전리·이목정리·도사리, 대화면의 신리 일부를 통합하여 용평면()을 신설했으며, 1989년도암면 호명리가 진부면에 편입되었다. 
1990년 1월 1일평창읍 하6리와 도암면 횡계7·8·9·10·11·12개 리를 증설하였다. 
1991년 1월 17일 지번 합병에 따라 군청사를 하리 215번지에서 하리 210-2번지로 변경하였다. 
1996년 3월 29일진부면 송정3·4리를 증설하였고, 1998년 9월 25일면온·수항·유천출장소를 폐지하였다. 
2000년 10월 21일백옥포3리와 횡계13리를 증설하였으며, 2003년 10월 4일송정5리를 증설하였다.

유물·유적

국가 지정문화재는 국보 4개, 보물 3개, 사적 1개, 천연기념물 2개, 중요민속자료 1개로 모두 11개이고, 강원도지정문화재로는 유형문화재 20개, 기념물 3개, 무형문화재 3개, 문화재자료 6개가 있다.
선사시대의 유적으로 구석기시대 및 신석기시대의 것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나, 청동기시대에 사람이 살았음을 알려 주는 고인돌과 주거지는 다수 발견되었다. 
고인돌은 평창읍 계장리·대하리·상리·유동리·임하리·종부리·주진리·후평리와 용평면 장평리, 진부면 수항리 등에 분포하고, 평창읍 임하리에서는 선돌로 보이는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 밖에도 돌도끼·홈자귀·바퀴날도끼·간돌칼·반달칼·돌화살촉·돌창·가락바퀴·갈돌·민무늬토기 등이 출토되었으며, 평창읍 여만리와 응암리에서는 초기철기시대의 적석총이 발견되어 삼국시대 이전의 연맹왕국 단계에도 이 지역에 사회구조가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분으로 평창읍 하리에 통일신라시대 석실고분과 종부리고분이 있다.
성지로는 평창읍 중리의 노산성지()를 비롯하여 봉평면 흥정리의 태기산성지, 대화면 대화리의 대화산성 등이 있다. 
노산성은 조선 선조 때 김광복()이 축조하였으며, 높이 1.32m, 둘레 414m의 규모였다 한다.
평창은 진부면 동산리의 월정사()와 상원사()를 비롯하여 대덕사()·법장사()·극락사·천왕사() 등 유서 깊은 사찰과 평창읍의 원당리사지, 진부면의 평창수항리사지(강원도 기념물 제49호) 등 귀중한 문화재가 많이 보존되어 있는 지역이다.
월정사팔각구층석탑(국보 제48호)·월정사석조보살좌상(보물 제139호)·월정사적멸보궁(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8호)·월정사부도군(강원도 문화재자료 제42호)·상원사동종(국보 제36호)·오대산상원사중창권선문(, 국보 제292호)·상원사목조문수동자좌상(국보 제221호)·상원사목조문수동자좌상복장유물(보물 제793호)·상원사목조보살좌상(강원도 유형문화재 제52호) 등이 있다.
이 밖에 월정사육수관음상(,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53호)·대세지보살상()·동진보살상, 평창읍의 중리오층석탑·상리오층석탑·하리석탑·유동리오층석탑(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0호)·방림리석조여래좌상, 진부면의 탑동삼층석탑(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9호) 등도 평창군의 중요한 불교문화재로 꼽힌다.
목조건물로는 평창읍 하리의 평창향교(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01호), 천동리의 평창지동봉가옥(,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74호), 도암면 횡계리의 대관령성황사 및 산신각(강원도 기념물 제54호), 봉평면 평촌리의 봉산서원() 등이 있다.
봉산서원은 조선 중종 때 이이()의 아버지 이원수()가 수운판관()으로 재직하면서 이곳에서 이이를 배태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후세 사람들이 창건한 것으로, 이이의 존영을 모셔 놓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정자로는 봉평면 평촌리에 팔석정(), 진부면 마평리에 청심대(), 평창읍 종부리에 남산정(), 응암리에 아양정(), 미탄면 창리에 장수정(), 방림면 방림리에 삼산정() 등이 있다.
사적으로는 진부면 동산리에 오대산사고지(, 사적 제37호)가 있고, 한말 의병장 이강년()이 왜군과 격전을 벌였던 곳이 대화면에 있다.
비석은 대화면 대화리의 위흥연효자비()와 최한성효자비(), 하안미리의 정씨효열비, 평창읍 유동리 및 대화면 상안미리의 선정비 등이 있다.
천연기념물로는 미탄면 마하리의 평창의 백룡동굴(, 천연기념물 제260호)이 있다. 
방림면 운교리 36·2에는 2008년 11월에 천연기념물 제498호로 지정된 평창운교리밤나무가 있다.
복식 유물로는 월정사 경내에 세조대의 백초회장저고리(, 중요민속자료 제219호)가 보관되어 있다.

교육·문화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으로는 1658년(효종 9)에 군수 최창민()과 나만정()이 유림회를 조직해 창읍 하리에 창건한 평창향교가 최초였다. 
이원수가 봉평에 거주할 때 이이를 잉태하였다 하여 후세 사람들이 이를 기려 봉산서재를 설립하였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1912년평창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으며, 이후 1면 1교의 교육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1945년평창중학교가 설립되어 현재의 평창중학교와 평창고등학교로 이어져오고 있다. 
1967년진부고등학교, 1968년대화고등학교에 이어 1974년축산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
교육기관으로는 2015년 현재 초등학교 20개교, 중학교 8개교, 고등학교 5개교가 있다.
1964년평창문화원이 설립되어 노성제(), 효석() 추모의 밤, 민요·농악 경연 등 각종 문화예술 행사를 통해 향토문화 계승과 군민 단합을 기하고 있으며, 공공도서관은 평창교육청도서관, 진부군립도서관, 대화군립도서관 등이 있으며, 문화공간으로는 공공공연장, 복지회관이 있다. 
체육시설로는 실내체육관, 종합운동장 등이 있다. 청소년수련시설로는 수련원, 야영장, 유스호스텔이 있다.

민속

대표적인 민속놀이로는 농악·탑돌이·대방놀이 등을 들 수 있다. 
농악은 농경과 관계되는 놀이로, 이전에는 동리마다 두레패가 있어 농사철이나 걸립()을 돌 때 농악이 성행하였으나, 지금은 용평면 백옥포리의 농악 등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탑돌이는 원래 종교의식의 하나였다가 이후 민속놀이화한 것이다.
4월초파일이나 추석날, 염불과 불사가 끝나면 승려를 선두로 모든 신도들이 합장한 채 월정사 팔각구층탑을 돌면서 각자의 소원을 비는데, 이 때 범종·북·운판·목어 등 4개의 법악기가 연주된다.
대방놀이는 선행이 있는 머슴을 대방()으로 선출한 뒤 지게로 가마를 꾸며 그를 태우고 온 마을을 돌면서 즐기는 놀이이다.
이 밖에도 전승되지는 않지만 예전에는 횃불싸움이 성행하였다. 
정월대보름날 저녁 홰를 든 젊은이들이 망월을 하다가 동리 대항으로 횃불싸움을 벌였는데 서로 밀고 밀리다가 상대 동리의 근거지를 탈취하면 승리하게 되며, 이 싸움에서 이기면 그 해에는 풍년이 든다는 속신이 있었다.
이 고장에는 산신제·서낭제·당고사제()·고청제() 등 다양한 명칭의 동제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대관령의 국사서낭당제를 들 수 있다. 
시향일은 음력 4월 15일로, 강릉의 단오제와 관계를 맺고 있다. 
국사서낭당은 행정구역상 평창군에 속하나 제향은 평창군에서 하지 않고 강릉에서 시향하고 있다. 
이 곳에는 산신각과 서낭당이 병존하고 있는데, 산신제를 먼저 지내고 서낭제를 지낸다.
이 밖에도 자연마을 단위로 동제를 지내는 곳이 많다. 
그 중에서도 대화면이 대표적으로, 대화3리에 3개소, 대화4리·8리, 상안미1리·4리·5리, 신리3리, 개수1리·2리 등에서 아직도 동제가 성행하고 있다.
신위는 대개 ‘성황지신위()’·‘산신지신위()’가 많고 간혹 ‘토지지신위()’·‘질역지신위()’가 함께 봉안되기도 한다. 제향은 보통 연 1회 행하지만 봄·가을로 2회를 지내는 곳도 있다.

설화·민요

이 고장에 있는 오대산은 널리 알려진 명산이고 월정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되어 그 연대가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본산사찰의 하나였기 때문에 이에 얽힌 지명 전설과 불교 설화가 다수 전해 오고 있다.
월정사의 창건주는 자장율사로 그가 당나라에서 수학할 때 문수보살()을 친견하였는데, 문수보살이 이르기를 “그대의 본국에는 오대산이 있고 여기에 일만 문수가 상주하고 있으니 돌아가거든 그 곳에 절을 짓고 일만 문수를 예배하고 봉안하라.”고 하기에 돌아와서 월정사를 세웠다 한다.
신라의 정신()·효명() 두 왕자가 대관령을 넘어 오대산에 각기 암자를 짓고 수도하고 있을 때 경주에서 난이 일어나 왕위 계승자가 없게 되었는데, 이 때 오대산에서 경주까지 오색 구름이 뻗쳐 사람들이 이를 알고 찾아와 효명왕자를 모셔다 신라의 왕통을 잇게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상원사 아래의 관대거리에는 조선 세조에 얽힌 유래담이 전한다. 
세조가 만년에 오대산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몸에 종기가 나 이 곳에 관대를 벗어 놓고 계곡에서 목욕을 하는데, 동자가 나타나 등을 밀어 주기에 세조가 “너 이놈 어디 가서 임금의 등을 밀어 주었다는 말을 하지 마라.”하니, 동자가 “대왕은 어디 가서 문수동자가 등을 밀어 주더란 말을 마시오.”하며 사라진 뒤에 세조의 종기가 나았다 한다.
「허균과 임세적」설화는 강릉 대화땅에 임세적이라고 하는 113세 노인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113세의 노인의 모습은 흡사 50세쯤으로 보이고 시력이나 청력이 조금도 나빠지지 아니 하였다. 
1603년(선조 36) 허균()이 이 분을 만나보기 위하여 젊은 사람의 예로서 절하고 문안을 드리자 노인의 말이, 젊어서는 갑사()에 예속되어 있다가 회갑이 되어 국적에서 떨어진 뒤 줄곧 이곳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허균이 “노인께서는 특별히 다른 비방을 갖고 계십니까? 어떻게 이렇듯 근력이 정정하십니까?” 하니 노인의 말이 “시골 늙은이가 무슨 비방을 가지고 있겠소.” 했다. 허균이 다시 “그러면 무슨 약을 잡수시는지요?” 하니 노인은 “일찍이 약이라곤 먹어 본 일이 없소” 했다.
허균이 이상하여 다시 묻기를 “세상에 수양을 아니하고 장수를 누리시는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니 노인의 대답이 “나는 어렸을 때에는 병이 많고 허약해서 조금만 과식해도 꼭 탈이 나곤 했는데 하루에 묵은 쌀5합을 먹되 날 음식, 차가운 음식을 먹지 아니하고 이렇게 10여년을 계속하는 동안에 병이 차츰 줄어들었고, 나이 40에 처가 죽었으나 아들 둘이 장성하여 족히 봉양해 줄만 하기에 다시 여자를 얻지 않고 농토와 가산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고 윤번으로 공양하게 했더니 겨울과 여름이면 번갈아 옷을 지어 주고 아늑한 방을 가리어 거처하게 하여 풍우를 모르오. 내 두 아들이 능히 잘 받들어 주어 화 낼 일도 없고 속을 태울 일도 없으니 살아가는 것이 무사하고 조용히 앉아서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잠자고 하는 지가 60여년이 되었소. 
집이 깊은 산골에 있으니 낮이면 나무죽대의 뿌리를 캐어서 이것을 다려 먹기를 오래 하다 보니 차츰 눈도 밝아지고 귀도 밝아지며, 빠진 이도 다시 나고 다리 힘도 더욱 나게 되었습니다. 
두 아들이 죽었어도 손자 5명이 있어 매양 변치 않고 돌보아 주니 내 별로 할 일도 없이 이렇게 오래 살 뿐이지 내게 무슨 별다른 방법이 있겠소.” 했다.
허균이 말하기를 “제가 노인의 말씀을 듣고 양생하는 방법을 터득하였습니다. 
신선 되는 이는 반드시 정력과 기력과 신기()의 세 가지 기운을 잘 보전해야 한답니다. 
다시 재취하지 않으니 정력을 보전하였고 음식을 가리어 과식하지 않으니 기력을 보전하였으며 화내는 일 없이 살았으니 신기를 보전한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굳으면 의당 그 장수하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항차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참된 자기를 지켜 오직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눈 붙여 조용히 진정해 있으니 그 첫째 방법이요, 더욱이 대황정은 또한 약으로도 으뜸가는 것이라 노인께서 이를 행하고 이를 복용하니 어떠하겠습니까? 내 노인을 본받을까 합니다.” 했다.
「세조와 고양이」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세조가 절에 와서 불공 드렸다. 그때 그를 죽이려는 자가 부처 뒤에 있었다. 
그 절에서 키우던 고양이가 암살자의 옷자락을 물고 땡겨 암살을 모면했다고 한다. 
세조는 이에 강릉지역 땅을 고양이 앞으로 분배 해줬다고 하며, 지금 상원사 앞에 돌로 된 것이 해태가 아니고 고양이란 것이다.
「봉산서재와 판관대」설화는 봉평면 평촌리봉산서재와 관련 있다. 
율곡이이와 화서이항로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율곡의 신주를 이곳에 모시게 된 유래는 바로 봉평이 율곡의 잉태지가 되기 때문이다. 
일찍이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가 수운판관으로 재직하고 있을 당시에 산수가 아름다운 봉평에 4년간을 살았었다. 이원수가 여가를 틈타 처가로 오던 중 평창군 대화면 반정에 이르렀을 때 날이 저물고 피로에 지쳐 하루 밤을 쉬어 가려고 길가의 주막집에 여장을 풀었다.
그날 밤 일찍이 혼자 몸이 되어 홀로 주막을 경영하던 주모의 꿈에 용이 가슴 가득히 안겨 오므로 이상히 여겨 홀연 꿈을 깨고 일어나 앉아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주모는 이것이 틀림없이 잉태할 꿈이며 비범한 인물을 하늘이 점지해 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식을 얻을 기회가 왔구나 하였다. 
주모는 자신의 처지를 돌이켜보니 혼자 몸이요, 그날 밤 대상이 될 사람은 주막에 묵고 있는 원수공 뿐이라 여러 모로 살핀 끝에 그 분이 예사 사람이 아니므로 여자의 수치심도 잊어버리고 방으로 뛰어 들어가 “손님 저를 물리치지 마십시오.” 하니 놀란 원수공이 “이 무슨 해괴한 짓이요, 내 그대를 행실 바른 여인으로 알고 묵으려 했는데 이러면 되겠오.” 하고 달래니 “손님 아무 말씀 마시고 하루밤만 정을 맺게 해 주십시오.” 하고 애걸하였으나 원수공이 완강히 뿌리치고 말아 주모는 소원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튿날 아침 부끄럽고도 서운한 마음으로 작별을 하는데 원수공의 얼굴에는 범할 수 없는 상서로운 기운이 어려 있는 것을 보고 이는 도저히 내 운수가 아니구나 하며 체념하였다. 그 무렵 율곡의 어머니 사임당() 신씨()는 강릉 오죽헌 친정에 머물러 있었다. 
하룻밤 꿈에 용이 가슴 가득히 안겨 오는 꿈을 꾸고 나서 즉시 귀가하려고 하였다. 언니는 며칠 더 머무르기를 간곡히 권하였으나 사임당 신씨는 이를 뿌리치고 그날로 140리 길을 걸어서 집에 돌아와 있던 중 마침 원수공이 도착했다.
신씨는 오랜만에 만난 남편을 대하여 반기기는 고사하고 말도 않고 표정에 변화도 없이 묵묵히 남편을 대하였다. 부인의 성품이 남다름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원수공 역시 아무 말 없이 그날 밤 잠자리를 같이 하였는데 율곡을 잉태하게 되었고, 그 후 9개월 만에 강릉 오죽헌에서 율곡을 낳았다 한다. 
원수공은 며칠을 이곳에서 머물다 임지로 돌아가던 길에 또 다시 반정 주막에 들게 되었다. 지난 일을 생각해 보니 사나이 대장부로서 아녀자의 청을 못 들어 준 것이 마음에 걸려 “여보시오 주모, 내 전날에는 대단히 미안하게 되었소. 오늘 밤 당신과 정을 맺을까 하오.” 하니 “어르신네의 말씀은 대단히 고마우나 지난번 하루 밤 모시고자 한 것은 홀로 사는 아낙네에게 하늘이 점시하신 비범한 영재를 얻고자 함이었는데 오늘 어르신네의 얼굴에는 전날의 상서로운 기운이 없어졌으므로 뜻을 받들 수 없습니다.” 하며 말을 이어 “이번 길에 댁에서는 귀한 아들을 얻게 될 것입니다. 
아기를 틀림없이 인시에 낳을 것이니 다섯 살을 넘기지 못하고 호랑이한테 해를 입을 것입니다.” 하니 공이 당황하여 “그 무슨 말이요, 만약 참으로 그러하다면 앞일을 예견하는 당신께서는 그 화를 막을 수 있는 방법도 알 것이니 제발 묘법을 가르쳐 주시오.” 했다. 그러자 주모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그러면 돌아가 사람을 천 명 살리는 셈치고 밤나무 천 그루를 심으십시오. 그랬다가 아이가 다섯 살 되는 해 아무 날에 금강산에서 어떤 늙은 중이 와서 아기를 데려가겠다고 하면, 아기는 절대로 보이시지 말고 나도 덕을 쌓은 사람이니 아기를 함부로 데리고 갈 수는 없다고 버티시고 덕을 쌓은 것을 보자고 하거든 밤나무 천 그루를 보여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했다. 아닌게아니라 그 해 12월 26일 인시에 사임당이 아들을 낳으니 원수공은 주모의 말이 맞았구나 싶어 강릉에서 남쪽으로 백리 쯤 되는 노추산에 밤나무 천 그루를 심었다.
이후 율곡이 다섯 살이 되는 해 주막 여인이 말한 바로 그날 늙은 중 한 사람이 나타나 “금강산에서 살고 있는 중인데 이 댁 아드님을 데려가려고 왔습니다.” 하니 원수공이 “나도 덕을 쌓은 사람이니 우리 아들을 데려가지는 못합니다.” 하자 중이 “무슨 덕을 쌓았다는 것입니까?” 하고 반문했다. 
이원수공이 “노추산에 밤나무 천 그루를 심었습니다.” 하니 중이 “그렇다면 그것을 보여 주십시오.” 했다. 이원수공이 중을 데리고 산으로 가 밤나무를 하나하나 세는데 아무리 헤아려도 천 그루에서 한 그루가 모자랐다. 원수공의 얼굴이 사색이 되자 늙은 중이 “한 그루가 모자라니 기어코 아드님을 데려가야겠습니다.” 했다. 그러자 등 뒤에서 갑자기 나무 한 그루가 “나도 밤나무” 하고 소리치자 늙은 중이 혼비백산하여 큰 호랑이로 둔갑하여 달아나 버렸다고 한다.
방림면〈여우재〉는 옛날 서울에 과거를 보러 가는 과객이나 장사치들이 방림면을 동서로 갈라놓은 태기산의 지맥인 한 재를 넘노라면 백발노인이 난데없이 나타나서 길가는 행인을 괴롭히곤 하였다는 이야기다. 
어느 겨울날에 기골이 장대한 젊은 장정 한 사람이 이 고갯길을 넘는데 고갯마루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흰 두루마기를 입은 백발노인이 나타나서 젊은이의 앞길을 가로 막고 나섰다. 
젊은이의 눈에는 두루마기 속에 감춰진 여우의 꼬리가 보였고 이에 젊은이가 단숨에 주먹으로 노인을 때려눕히고 나니 죽은 시체는 머리로부터 서서히 여우의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꼬리까지 완전히 여우의 모습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이후부터 이 재를 여우재라 불러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밖에「신효거사() 이야기」·「문수사() 석탑 이야기」·「적멸보궁」 등 불교 설화와 태기산·방아다리약수·신선바위·구룡소()·성마령() 등에 얽힌 지명 전설 ·「팔석정」·「청심 이야기」등의 인물 전설이 있다.
이 고장에 구전되고 있는 민요는 「아리랑」이 중심을 이룬다. 「정선 아리랑」의 본고장인 정선군과 인접하여 거의 비슷한 가락으로 불리고 사설도 서로 넘나든다. “한치 뒷산의 곤드레 딱죽이/나지미〔〕 마음만 같다면/병자년 흉년에도 봄살이 나네.”에서 ‘한치’는 미탄면 평안2리에 있는 지명이고, ‘곤드레 딱죽’은 특산 나물로, 이 사설은 「정선 아리랑」의 보편적인 사설이 될 정도로 널리 불린다.
특유의 사설로는 “월정 오대산 박달남근/죽자 왕자로 다나간다/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서 노다 가세.”와 같이 오대산의 박달나무를 노래한 것도 있고, “영월읍에는 덮개(를 덕개라 한 데서 유래한 지명)가 있어도 춥기만 하고요/평창 땅에는 약수()가 있어도 사람만 죽는다.”나 “영평정(··) 삼읍()에 딸 주지 마라/삼베 치다가 잔더위 먹는다.”와 같이 인근 지방의 특색을 함께 노래한 것도 있다.
“청옥산 줄기가 무너져서 육지평지가 되어도/임자하고 나하고는 맘 변치 않는다.”나 “극락암 뒷절에 도는 안개는 눈비나 줄려고 돌지만/소녀집 문전에 도는 청년은 누구를 바라고 도느냐.”와 같이 주변의 산·경치 등과 남녀 관계를 대구()로 하여 흥겹게 부르기도 한다.
이 밖에도 특산물인 감자·옥수수·삼·목기() 등을 소재로 한 특유의 사설들이 풍부하다. 여성들이 일을 하거나 여흥으로 부르는 「시집살이 노래」도 있다. 
“성님오네 성님오네/분고개로 성님오네/……성님밥은 멀(뭘)로짓나/앵도같은 팥을놓고/외씨같은 전이밥을/복지개로 오복소복…….”이 노래도 이 고장에 귀한 쌀로 밥을 짓고 특산물인 팥을 놓는다고 하여, 각 사설이 모두 이 고장의 특색을 담고 있다. 
이 밖에 「자장가」나 「잠자리」·「다리빼기 노래」 등의 동요가 불린다.

산업·

산간지대가 많아 총 경지면적 1만 1008㏊ 중 논이 923㏊, 밭이 1만 85㏊로 밭이 훨씬 많다. 
농가 수는 5,018가구, 농가 인구는 1만 4,134명이다. 
화전정리 사업이 완료되면서 밭이 많이 증가하였다. 
전체경지의 약 80%가 고랭지로, 무·배추 등의 재배가 활발하다. 
채소류 외에 옥수수·감자·홉·약초 등의 생산도 활발하다.
대관령면은 대표적 씨감자 생산지역으로, 감자 원종장, 고령지시험장 등이 있어 과학적인 영농의 연구가 행해지고 있다. 
최근 고랭지채소류 재배지역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자 화훼류 등의 새로운 고소득 작물을 개발하고 있다.
산지의 넓은 초지를 이용한 한우·젖소·육우·돼지·닭 등의 사육이 활발하다. 
한우는 평창읍, 젖소와 육우는 대관령면, 닭은 진부면·대관령면 등지에서 많이 사육된다. 
최근 산양과 오리 사육이 증가 추세에 있다.
영동고속국도의 개통 이후 축산단지 조성 사업에 힘입어 낙농목장이 늘어났다. 
국립종축장을 비롯하여, 특히 대관령면에는 삼양축산·한일목장·명지목장 등 대단위 목장이 조성되어 있다.
전체 임야면적은 11만 9859㏊로 국유림 6만 8281㏊, 공유림 1만 3,162㏊, 사유림 3만 8416㏊이다. 전체 임야 중 입목지는 11만 8031㏊로 98.47%를 차지한다. 
임상별로는 침엽수 4만 6302㏊, 활엽수 4만 4711㏊, 혼요림 2만 7018㏊이고, 무입목지는 1,828㏊이다. 
주요 임산물은 대추·잣·버섯·약초·산나물 등이다.
대관령면 횡계리를 중심으로 겨울철에 송천의 맑은 물과 고랭지 기후를 이용하여 동해안의 명태를 이곳으로 옮겨와 명태덕장에서 황태를 생산하고 있다. 광물은 석회석·규사·금·는 등이 약간 생산되고, 평창읍에는 1989년 4월 19일평창농공단지가 조성되었다.
지형 상 산악이 많은 고지대로서 예로부터 교통이 매우 불편하여 상업활동이 부진했으나 영동고속국도가 개통되면서 상업적 기능이 점차 활기를 띠고 있다. 
정기시장은 5일장으로, 1770년대에 읍내장이 5·10일, 미탄장과 진부장이 3·8일, 통면장과 대화장이 4·9일, 봉평장이 2·7일에 개설되는 등 6개가 있었으나, 1883년대에는 평창읍의 군내장()과 노일장()이 5·10일, 동면장과 대화장이 4·9일에 개설되는 등 4개로 감소되었다.
1912년대에는 읍내장(천변리)과 진부장(하진부리)이 5·10일, 대화장과 미탄장(창리)이 4·9일, 봉평장(창동리)이 2·7일에 개장되는 등 5개로 증설되었다가, 1923년대에는 읍내장이 5·10일, 대화장이 4·9일, 진부장이 3·8일, 미판장이 1·6일에 개설되는 등 4개로 감소되었다.
1926년대에는 앞의 4개장 외에 봉평장이 2·7일에 개장되는 등 부활되어 다시 5개장으로 늘어났고, 1938년대에도 앞의 5개장 외에 방림장(방림리)이 3·8일에 개설되는 등 6개장으로 증설되었다. 
1963년대에는 방림장 대신 6개장이 유지되었고, 1976년대에는 도암장 대신 계촌장(방림면 계촌리)이 2·7일에 개장되었는데, 이는 1994년대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으나 이동하는 상인의 수가 점차 감소하는 추세에 있다. 
2008년 현재에는 읍내장·대화장·봉평장·진부장이 열리고 있다.
주요 관광지는 오대산국립공원·대관령 일대·용평스키장·휘닉스파크 등이다. 
오대산국립공원은 소금강·경포대·오죽헌·설악산과 연계된 최적의 관광지이다. 
공원 내에는 1,300년의 오랜 역사를 지닌 월정사, 선승들의 본거지인 상원사를 비롯하여 불교문화재와 사적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이외 진부면의 방아다리 약수터와 안개자니계곡이 있는데, 방아다리약수는 속병에 특효가 있고, 안개자니계곡은 진고개 노인봉과 황변산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계곡은 소금강을 방불케 하는 기암괴석이 가을철의 단풍과 어우러져 자연경관의 극치를 이루고, 희귀 수목이 자생하고 있다. 
반석 위를 흐르는 맑고 찬 계곡물은 바위 굽이마다 부딪치고 부서져 흐르다가 크고 작은 소()를 만든다.
대관령면 횡계리대관령 일대는 동해 바다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고원 관광지로 횡계팔경()이 있다. 
제1경은 칼산에 휘몰아치는 바람(), 
제2경은 황병산 위에 높이 뜬 흰 구름(), 
제3경은 대관령 아흔 아홉 굽이 돌아 오가는 행인(), 
제4경은 횡계리 삼정평()의 낚시(), 
제5경은 고루산의 맑은 안개(), 
제6경은 효성산의 밝은 달(), 
제7경은 상봉령에 해가 지는 광경(), 
제8경은 능정산의 해 돋는 광경()이다.
대관령면 용산리발왕산 기슭에는 용평스키장이 있는데, 부대시설로 체력단련시설, 사격장·양궁장·수영장·테니스장과 각종 오락시설 등이 있어, 스키를 타려는 사람들 외에 휴양과 피서를 목적으로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다. 
봉평면 면온리의 해발 700m에 자리잡은 산악 휴양지 휘닉스파크는 부근의 문화 유적과 태기산·흥정천·평창강의 수려한 경승지와 잘 어울려 있다.
평창군은 2018년 동계올림픽 유치를 추진중에 있다. 
동계올림픽 유치를 통해 평창군은 대관령면 횡계 시가지 일원의 3.788㎢를 동계스포츠의 메카이면서 국제적인 4계절 고원 관광휴양도시로 개발할 계획이다.
평창군에는 여름에 평창산꽃약풀축제, 메밀꽃오페라문화체험축제, 무이아트페스티발, 강원감자큰잔치가 펼쳐지고, 가을에는 노성제, 오대산불교문화축제, 
효석문화제가 개최된다. 스키의 계절인 겨울에는 대관령눈꽃축제와 정월대보름축제가 개최된다.  
효석문화제와 오대산불교문화축제, 대관령눈꽃 축제는 지역 특성에 알맞은 행사로 각광을 받고 있다.
효석문화제는 이효석의 고향 봉평에서 매년 9월 중순경에 개최된다. 
이 지역은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의 실제 무대이기도 하다.
오대산불교문화축제는 오대산 국립공원이 위치하고 있는 진부에서는 매년 9월 개최된다. 
2006년에는 일본에 반출되엇던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이 환수되는 것을 계기로 환수고유제를 비롯한 다양한 학술행사가 진행되었다.
대관령 눈꽃축제는 대관령 일대에서 매년 열린다. 
대관령 지역은 고도가 높고 기온차가 심해 최대의 황태덕장이 형성된 지역으로 겨울철 많은 관광객들을 모으고 있다. 
인근의 선자령에서는 눈꽃트래킹을 즐길 수 있으며 발왕산에서는 겨울 등산을 할 수 있다. 
축제에서는 황병산 사냥놀이, 소발구퍼레이드, 앉은뱅이썰매타기, 설상축구대회 등 다양한 이벤트가 펼쳐지며 그 외 특별 이벤트인 눈조각경연대회, 스노우카레이스대회, 감자구워먹기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

읍·면

1. 평창읍()
군의 남부에 위치한 읍. 면적 161.40㎢, 3,692세대, 인구 9,470명으로 남자 4,738명, 여자 4,732명이다(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중리이다. 
본래 평창군 소재지라 하여 군내면()이라고 칭하였으며, 상·중·하·천변·종부·노론·이곡 등 10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면의 약수·조둔·천동·도돈·마지 등 10개 리와 북면의 후평·행동·여만·주진·용항·다수 등 11개 리를 병합하여 평창면으로 개칭되었으며, 1979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북쪽에 백덕산·남병산(, 1,150m)·청옥산, 동남쪽에 삼방산(, 980m) 등의 험한 산이 솟아 있다. 
계방산에서 발원한 평창강이 읍내를 종관하며 심하게 곡류하면서 유역에 기름진 평지를 이루어, 주진·후평·약수리 등지에서 벼농사 중심의 농업이 이루어진다.
주요 농산물은 쌀·마늘 등이며, 마늘 생산량은 군내 1위를 차지한다. 
한우 사육과 양돈이 활발하며, 상리에 국립송어양식장과 박달나무묘포장이 있다. 
평창농공단지가 조성되어 앞으로의 발전이 기대된다.

교통

교통은 지형적인 조건 때문에 매우 불편하였으나, 읍의 중심지에서 31번 국도와 42번 국도가 분기하여 북쪽으로는 영동고속국도, 남쪽으로는 영월, 동쪽으로는 정선과 연결된다. 
597번 지방도가 월군 주천면과 연결되고, 1번 군도가 노론∼하안미, 3번 군도가 주진∼방림과 연결되어 종전보다 훨씬 편리해졌다.

영동고속국도가 군의 중북부를 지나므로 고속국도의 인터체인지를 통한 국도나 지방도의 연결이 편리하다. 
6번 국도가 횡성·봉평·진부를 지나 소금강계곡을 잇고, 31번 국도가 운두령·속사·장평·평창·영월 지역을 연결하며, 42번 국도가 안흥·(문치 터널)방림·평창·미탄·정선으로 연결되고 있다. 
지방도는 405번이 하진부∼나전선이 숙암계곡을 따라 개설되어 있고, 446번이 인제 신남·오대산·병내(진부), 456번이 진부∼강릉 등을 연결하는 등 3개 노선이 있다.
시·군도는 16개 노선이 있어 각 읍·면 지역과의 교통이 이루어지는데, 이들 노선을 보면 1번 노론∼하안미, 2번 운교∼방림, 3번 주진∼방림, 4번 계촌∼대화, 5번 한탄∼마하, 6번 신리∼마평, 7번 계촌∼둔내, 8번 무이∼상진부, 9번 하안미∼백옥포, 10번 유포∼생곡, 11번 봉평∼자운, 12번 유천∼수하, 13번 용산∼횡계, 14번 화의∼북평, 15번 횡계∼수하, 16번 하진부∼봉산 등이 있다.
2017년 12월 22일 운행을 시작한 경강선 KTX이 지난다. 경강선 KTX은 평창군 내 평창역과 진부(오대산)역을 지난다.

관광

문화유적은 하리에 평창향교·석실고분·삼층석탑, 유동리에 오층석탑, 천동리에 지동봉가옥, 중리에 오층석탑·노성산성(), 상리에 오층석탑, 종부리에 남산정·고분, 응암리에 아양정·응암굴, 계장리에 선사유적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개 교, 중학교 1개 교, 고등학교 1개 교가 있다.
중()·상()·하()·천변()·종부()·노론()·이곡()·조동()·고길()·지동()·유동()·약수()·조둔()·응암()·마지()·천동()·도돈()·대상()·대하()·입탄()·행동()·여만()·후평()·주진()·용항()·임하()·계장()·다수()·하일()·원당()·뇌운() 등 31개 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