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15일 목요일

설. Lunar New Year’s Day.

설. Lunar New Year’s Day.



정의

한 해의 시작인 음력 정월 초하루를 일컫는 말로 설날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
설은 음력 정월 초하룻날로 한 해의 첫날 전후에 치루는 의례와 놀이 등을 통틀어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옛 기록들에 의하면 원일() · 원단() · 원정() · 원신() · 원조() · 정조() · 세수() · 세초() · 연두() · 연수() · 연시()라고도 하는데 이는 대개 한 해의 첫날임을 뜻하는 말이다. 
설은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 첫 아침을 맞는 명절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새로운 기분과 기대를 가지고 명절을 맞았다.

개설

설은 시간적으로는 한 해가 시작되는 새해 새 달의 첫 날인데, 한 해의 최초 명절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설날을 원일()·원단()·원정()·원신()·원조()·정조()·세수()·세초()·연두()·연수()·연시()라고도 하는데 이는 한 해의 첫날임을 뜻하는 말이다. 
신일()·달도()라고도 하는데, 이 말은 근신하고 조심하는 날이라는 뜻이다. 

설을 양력 1월 1일 신정()의 상대적 개념으로 구정()이라고도 하는데 이 말에는 설을 폄하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한편 설이란 용어를 나이를 헤아리는 말로 해석하기도 한다. 
해가 바뀌어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첫 날인 ‘설’을 쇨 때마다 한 살 씩 더 먹는다. 
설을 한 번 쇠면 1년이며 두 번 쇠면 2년이 되는 이치를 따라 사람의 나이도 한 살씩 더 늘어난다. 

‘설’이 사람의 나이를 헤아리는 단위로 정착하여 오늘날 ‘살’로 바뀌게 된 것이라 한다. 
이밖에도 설이 새해 첫 달의 첫 날, 그래서 아직 낯설기 때문에 ‘설다’, ‘낯설다’ 등에서 유래했다는 말도 있다.
설을 설명절이라고도 하거니와 설명절은 하루에 그치지 않는다. 
설이란 용어 자체는 정월 초하룻날, 하루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실제 명절은 대보름까지 이어진다. 
설을 설명절이라고 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에게는 거의 다달이 명절이 있었다. 
그 중에서 설날과 보름명절을 크게 여겼다. 

설날은 한 해가 시작하는 첫 달의 첫 날로서 중요하며 보름명절은 농경성()을 그대로 반영하여 중요하다. 
농경국가에서 보름달, 곧 만월은 풍요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한 해의 시작인 정월 초하루는 천지가 개벽될 때의, 그 순간에 비유되어 최대의 날이 된다. 
보름명절 가운데서도 정월 보름과 8월 보름 추석은 또한 각별하다. 
정월 보름은 첫 보름이라는 점에서 보다 중시되어 대보름명절이라고 한다. 
8월 보름명절은 우리나라와 같은 농경국가에서 여름내 지은 농사의 결실을 보는 시기로 수확을 앞둔 명절이어서 큰 의미를 부여한다.

설의 유래

설이라는 말의 유래는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고 있다. 다만, 이에 관한 여러 의견이 있는데 삼간다는 뜻으로서, 새 해의 첫날에 일 년 동안 아무 탈 없이 지내게 해 달라는 바람에서 연유했다는 견해와 ‘섦다’의 뜻에서 유래된 뜻으로, 해가 지남에 따라 점차 늙어 가는 처지를 서글퍼 하는 뜻에서 생겼을 것이라는 견해, ‘설다, 낯설다’의 의미로 새로운 시간주기에 익숙하지 않다는, 그리하여 완전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생겼다는 견해, 한 해를 새로 세운다는 뜻의 ‘서다’에서 생겼을 것이라는 견해, 마지막으로 설이라는 말이 17세기 문헌에 ‘나이, 해’를 뜻하는 말로 쓰여진 것으로 보아 ‘나이를 하나 더 먹는 날’의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설에 관련한 기록은 삼국시대부터 찾아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백제에서는 261년에 설맞이 행사를 하였으며, 신라에서는 651년 정월 초하룻날에 왕이 조원전에 나와 백관들의 새해 축하를 받았는데 이때부터 왕에게 새해를 축하하는 의례가 시작되었다고 쓰여 있다. 
설은 일제 강점기에 양력을 기준으로 삼으면서 강제적으로 쇠지 못하게 하였으나, 오랜 전통에 의해 별 실효가 없었다. 
이러한 정책은 광복 후에도 그대로 이어져 제도적으로 양력설에 3일씩 공휴일로 삼았으나, 오히려 2중과세의 문제가 사회적으로 대두되기까지 하여 1985년 ‘민속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정하여 공휴일이 되었다가 사회적으로 귀향인파가 늘어나면서부터 본격적인 설날로 다시 정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섣달 그믐날 풍속
그믐 전날, 궁궐에서는 나희()를 하며, 이때 신하들은 윤목()을 던지는 놀이를 한다. 
15세기 말에 저술된 성현의 [용재총화]에 의하면, 나희는 나례라고도 하는데, 어린이 수십 명을 모아서 초라니를 삼아 붉은 옷과 두건을 씌워 궁중에 들여 보내면 관상감에서 북과 피리를 갖추고 방상씨()와 함께 새벽에 이르러 쫓아내는 놀이로서, 잡귀를 쫓는 놀이이다. 
윤목은 12면에 각각 하나씩 동물의 이름을 새긴 것으로 3개를 던져, ‘사()’자가 많이 나오는 사람이 이기는 놀이다.
그믐날 이른 새벽에 처용(), 각귀(), 수성노인(), 닭, 호랑이 등과 같은 그림을 궁궐의 대문과 건물 창문에 붙여, 잡귀를 쫓는다고 하는데, 이것을 문배() 또는 세화()라고 부른다. 
처용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문에 걸어 잡귀를 쫒는 풍속은 [용재총화]에 보이는데, 고려시대의 문헌인 일연의 [삼국유사]에도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러한 풍속은 신라시대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후기에 저술된 문헌에는 이 처용이 세화로 나타나지 않고 다른 그림들의 이름과 내용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도중에 사라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그림들은 도화서()에서 그려 올렸는데, 왕이 신하들에게 하사하기도 하여, 지금 많은 그림들이 민화로 전해오고 있다. 
이러한 풍속은 지방의 관아에서도 있었다. 
섣달 그믐날은 까치설날이리고 하여, 어린아이들은 미리 설빔으로 갈아 입고, 어른들은 서로 찾아보고 인사하는데, 이것을 과세() 또는 ‘묵은세배’라고도 한다. 
아마도 정초에 바쁘기 때문에 미리 세배를 하는 풍속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날 밤에 눈이 오면 풍년이 든다고 한다.
그믐날 밤에 자면 눈썹이 희어 진다고 하여 밤을 세우는데, 이를 수세()한다고 한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조선시대에는 설날 밤에 야광()이라는 귀신이 집에 와서 아이들의 신발을 신어 보고 발에 맞는 것을 신고 가면 그 아이에게 불길한 일이 생긴다고 믿어, 신을 감추고 일찍 잔다고 한다.

설의 역사적 변천

설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7세기에 나온 중국의 역사서에서 볼 수 있다.
『수서()』와『당서()』의 신라에 대한 기록은 왕권국가다운 설날의 면모를 잘 드러내고 있다.  
“매년 정월 원단()에 서로 경하하며, 왕이 연희를 베풀고 여러 손님과 관원들이 모인다. 이 날 일월신()을 배례한다”는 기록은 국가 형태의 설날 관습이 분명하게 보이는 내용이다.

설명절이 역법체계에 따른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3세기에 나온 중국의 진수가 쓴 역사서『삼국지()』위서 동이전( )을 통해서도 추정해 볼 수 있다. 
가령 은 정월( ), 그리고 5월과 10월의 농공시필기 등과 같은 표현은 당시 역법()을 사용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은 정월은 은나라의 역법을 지칭하는데 이는 오늘날로 치면 음력 섣달에 해당된다. 

이처럼 당시 부족국가들이 역법을 사용했다는 추정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역법을 통해 각 달을 가늠하고 세수()인 설이 존재했다는 것은 당연하게 보인다. 
나라에 따라 설을, 또는 정월을 언제로 설정하는가의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우리 문헌에도 설명절의 연원과 관련된 기록이 보인다.

『삼국유사()』권1, 기이() 사금갑()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라 21대 비처왕[(소지왕이라고도 한다)] 때 궁중에서 궁주()와 중의 간통사건이 있어 이들을 쏘아 죽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후 해마다 상해()·상자()·상오()일에는 만사를 꺼려 근신하였다 하여 달도()라 했다. 

달도는 설의 이칭이기도 하므로 설의 유래로 볼 수도 있다. 
상해·상자·상오일은 정초 십이지일()에 해당되는 날로 이때의 금기를 비롯한 풍속은 오늘날까지 그 잔재가 남아 있다.
『고려사』에는 고려 9대 속절(, 명절)로 원단(, 정월 초하루 설날), 상원(, 정월 대보름), 상사(, 후에 삼짇날이 됨), 한식(), 단오(), 추석( ), 중구(), 팔관(), 동지()가 소개되어 있다.

조선시대는 원단·한식·단오·추석을 4대 명절이라 했지만 그렇다고 다른 명절이 약화된 것은 아니다. 
민간에서는 오히려 전 시대보다 세시명절과 그 무렵에 행하는 세시풍속이 다양했다.
그런데 설이란 말이 설날 이외에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아세() 곧, ‘작은 설’이라 불리는 동지이다. 

동지는 24절기의 하나면서 전통명절인데, 설날 떡국 한 그릇 먹으면 나이 한 살 먹는다고 하듯이 동짓날 팥죽 한 그릇 먹으면 나이 한 살 더 먹는다는 말이 있다. 
작은 설로 여기는 까닭은 중국 후한시대(22∼220)에 동지를 세수()로 삼았던 데에서 근거한다. 
사실상 24절기는 동지를 0으로 하고 첫 기번()으로 소한, 두 번째 기번은 대한으로 하며 입춘은 3번이 된다. 

동지 기번을 0으로 한 까닭은 역() 계산의 출발을 동지에 두었기 때문이다. 
흔히 열두 띠로 일컬어지는 십이지를 말할 때 첫 달인 자월()은 정월이 아니라 음력 동짓달이 된다. 
그 후 섣달은 축월(), 정월은 인월(), 2월은 묘월()… … 등의 순으로 불린다.

설의 세시풍속

설날을 비롯하여 각 세시명절에 행해지는 세시풍속은 대체로 소망을 기원하는 의례적인 성격을 지닌다. 
기원의 대상은 신()과 같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만 무언가 ‘초월적인 힘’이 되기도 한다.
세시풍속은 농사를 중심축에 놓고 행해지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농경의례라고도 한다. 대부분의 세시풍속이 풍농의 기원과 예측, 풍흉을 점치는 점세(), 농공과 풍농을 감사하는 내용이다. 
후대에 이르러 어업과도 관련을 갖게 된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바뀌면서 농사가 약화되어 농경의례로서의 성격도 희박해졌다.
명절을 전후하여 행해지는 세시풍속은 정월, 설명절 기간에 집중되어 있다. 
이 기간에 세시풍속이 집중되어 있는 까닭은 정월이 농한기인데다 한 해가 시작되는 신성한 기간이기 때문이다. 
신성한 기간에는 신과의 만남이 수월해져 인간의 기원 사항이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있다.

설날 아침의 풍속

조선시대 국가의 의례서인 [국조오례의()]에 의하면, 정월 초하루 새벽에 종묘에서 임금이 큰제사를 올린다. 


날이 밝으면 궁궐에서는 왕이 왕세자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북쪽을 향하여 망궐례()를 행하고 이어서 왕은 왕세자와 백관, 왕세자빈으로부터 조하의()를 받거나 지방관들에게서 올려 온 방물과 전문 등을 받는다. 


벼슬아치들은 다투어 친척과 동료들의 집에 가서 명함을 문안에 던지는데, 대가집에서는 미리 함을 설치하여 받기까지 하였다. 

이것을 세함()이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새 옷을 갈아 입는 날은 1년에 3일뿐인데, 설날을 비롯하여 수릿날()과 가위날()이 그것이다. 

이러한 명절날에 입는 옷을 특히 ‘비음’이라고 하는데, 이날 새 옷을 입는 것은 새로운 사회적 지위나 생활단계에 들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는 통과의례의 하나인 것이다.

어른들은 설날 아침에 설비음[세장()] 위에 예복을 차려 입고, 사당이나 대청에서 4대 조상의 신주를 내어 모시고 차례로 차례를 지낸다. 
성묘를 하고 돌아온다. 

설차례에는 떡국을 올리고 차례를 지낸 다음에 음복으로 함께 모여 비로소 떡국을 먹는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나이가 삼재에 드는 사람들은 3마리의 매를 그린 부적을 문설주에 붙인다고 하였다. 
차례와 성묘가 끝나면, 이웃의 어른들께나 친구끼리도 서로 집으로 찾아 가서 세배를 하며, 인사를 나눈다. 

서로 나누는 말들을 덕담()이라고 하는데 덕담의 표현은 시제를 항상 과거형으로 하는 특징을 갖는다. 
지금은 단지 덕담의 형식이 미래에 닥칠 일에 대한 축원으로 변하였다. 
어린이들에게는 세배돈을 주는 풍속이 전해오며, 세배를 하러 오는 사람들을 대접하기 위해 마련하는 음식을 세찬(), 그리고 술을 세주()라고 한다.

설의 놀이와 연희


설날 아침에는 조상에게 차례를 지낸다. 

차례는 종손이 중심이 되어 지내는데 4대조까지 모시고 5대조 이상은 시제 때 산소에서 모신다. 

차례를 마치고 가까운 집안끼리 모여 성묘를 하는데 근래에는 설을 전후하여 성묘를 한다.
정초에 집안의 평안을 위해 안택을 한다. 
안택은 무당과 같은 전문적인 사제를 불러 평소 집에서 하는 고사보다는 규모가 큰 굿을 하는 것인데, 정초에 행하는 신년제를 대표하는 것이기도 한다. 
지역에 따라서는 홍수매기[횡수막이]라 하여 주부가 단골무당을 찾아가 비손을 하거나 또 집에 불러다가 비손 형식의 굿을 한다. 
홍수매기는 횡수를 막는 의례로서 가족 가운데 그 해 운수가 좋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각별하게 의례를 행한다. 
홍수매기를 한 후에 짚으로 ‘제웅’을 만들어 뱃속에 액운이 든 사람의 생년월일시를 적은 종이와 돈을 넣어 삼거리나 사거리에 버린다. 
액운을 멀리 보낸다는 의미가 있다.
새해에 개인의 신수를 점쳐 보기 위하여 오행점을 보거나 윷점을 치고, 토정비결을 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3일이 지나면, 어린 아이들이 보름날까지 연날리기를 하다가 14일날 저녁에 줄을 끊어 날려 버리면 그 해에 드는 액을 날려 버린다고 생각하였으며, 이것을 ‘액막이연’이라고 불렀다. 
설을 지내고 3일째 되는 날에 일반 농촌이나 산촌에서는 마을고사, 또는 동제라고 하는 공동제사를 지내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농악을 치고 고사를 지내는 ‘지신밟기’를 하였다. 
지신밟기를 할 때에는 집집마다 조금씩 쌀을 내 놓는데, 이것은 마을의 공동자산으로 삼는다. 
마을제사와 지신밟기는 새해를 맞아 공동의 생활공간을 새롭게 만들기 위한 의미를 갖는다.


대보름에 가정의 평화와 풍요를 위한 용궁맞이를 한다.
『열양세시기』의 상원조에는 “깨끗한 종이에 흰밥을 싸서 물에 던지는 것을 어부슴[어부시=]이라 한다”는 기록이 있다. 
어부슴이란 대보름날에 그 해의 액막이를 위해서 조밥을 강물에 던져 고기가 먹게 한다는 것인데, 이것이 곧 용궁맞이이다. 
용궁맞이는 근래까지도 계속되었는데 반드시 조밥이 아니더라도 제물을 장만하여 강물에 던져 소지를 올리는 등 용신을 위해 제를 지낸다. 
한해 농사를 기원하는 농점()도 다양하다. 
대보름날 저녁에 달이 뜨는 모습을 보며 절을 하며 소원을 기원하고 달의 모양과 색깔을 보고 한 해 농사의 점을 쳐 보기도 한다.
요즘도 서해안지역에서는 정초에 무당을 불러 풍어제를 크게 지낸다. 
한 해 동안 무사하고 고기잡이가 잘 되기를 기원하는 굿이다. 
영남과 호남 등지에서는 정월 대보름 무렵에 마을에서 동제를 지낸다.
충남 서산을 비롯한 여러 마을에서 대보름날 볏가리를 세웠다가 2월 초하루에 털어낸다. 
이는 놀이적인 성격도 있겠으나 애초에는 풍농을 위한 의례였다.

속신

설을 전후하여 세시풍속이 다양한 만큼 속신 역시 다양하게 나타난다. 
설은 사실상 섣달 그믐부터 시작된다고 할 만큼 그믐날밤과 초하루는 직결되어 있다. 
끝과 시작은 동시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섣달 그믐날 밤에는 잠을 자지 않는다. 
잠을 자면 눈썹이 센다는 속신이 있기 때문이다.
설 음식을 세찬이라고 한다. 
세찬의 대표적인 음식인 떡국을 먹어야 나이 한 살을 먹는다고 했다. 
떡국을 먹지 않으면 나이를 먹을 수 없다는 속설도 있다. 

설날이나 상묘일(, 첫 토끼날)에는 여자들이 아침 일찍 남의 집에 출입하면 그 집에 재수가 없다는 속신이 있다. 
지역에 따라서는 정월 대보름에 키가 작은 사람이 남의 집에 출입을 하면 그 해에 목화가 잘 자라지 않는다하여 금하기도 한다. 
복을 끌어 들인다는 복조리 풍속도 속신으로 볼 수 있다.
설날 새벽에 밖에 나가 까치소리를 들으면 길조이고 까마귀 소리를 들으면 불길하다고 한다. 

설날 밤에 야광귀라는 귀신이 와서 신발을 신어보고 맞으면 신고 가는데 신발을 잃은 사람은 그 해에 재수가 없다고 한다. 
지역에 따라서는 정월 대보름에 이런 세시를 행하고 또는 열엿새를 귀신날이라 하여 이 날 밤에 신발을 감추거나 엎어놓는다. 

귀신을 쫓는 방법으로 체나 키를 지붕에 매달아놓거나 저녁에 고추씨와 목화씨를 태워 독한 냄새를 풍기기도 한다.
정초에 여자들은 널을 뛴다. 
널을 뛰면 그 해에 발에 좀[무좀]을 먹지 않는다고 한다. 
연날리기는 섣달 그믐 무렵부터 정월 대보름까지 한다. 

대보름이 되면 ‘액연()’이라 하여 연 몸통이나 꼬리에 “송액()”, 또는 “송액영복()” 등의 글자를 써서 멀리 날려 보낸다. 
예전에는 만일 대보름 이후에도 연을 날리는 사람이 있으면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액을 불러들일 수 있다는 속신이 있기 때문이다.

입춘 날에는 보리뿌리를 캐보아 뿌리가 세 가닥 이상이면 그 해 보리농사가 풍년이고 두 가닥이면 평년작, 한 가닥이면 흉년이 든다고 점친다. 
이는 농점()으로 점복이면서 또한 속신에 포함시킬 수도 있다.
정초 십이지일을 유모일()과 무모일()로 나눈다. 

정월 초하루가 유모일, 곧 털 있는 12지 동물의 날이면 그 해에는 풍년이 들고 무모일이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유모일 가운데서도 소·토끼·호랑이날이 그 중 좋다고 한다. 
이는 주술적인 사고에 따른 것으로 여기 털을 곡식의 성장에 비유했다.
첫 쥐날인 상자일()에 일을 하면 쥐가 곡식을 축낸다고 하여 금한다. 
쥐가 쏠고 갉아먹는 것을 예방하기 위하여 칼질이나 바느질을 삼간다. 
마소를 먹이기 위해서 여물을 썰면 쥐가 벼나락·짚 등을 쏠아버린다고 하며 길쌈을 하거나 옷을 지으면 쥐가 옷감을 쏠아 못쓰게 한다고 금한다. 

첫 소날인 상축일()에는 소에게 좋지 않다 하여 도마질을 하지 않으며 쇠붙이 연장도 다루지 않는다. 
이 날 연장을 다루면 쟁기의 보습이 부러지고 방아를 찧으면 소가 기침을 한다고 한다. 
이 날 곡식을 밖으로 퍼내면 소에게 재앙이 온다고 하여 금한다.
첫 호랑이날인 상인일()에는 일을 하면 호랑이가 나타난다 하여 일을 하지 않는다. 
짐승에 대하여 나쁜 말도 하지 않으며 외출도 삼간다. 
이 날 여자들이 외출하여 남의 집에서 대소변을 보면 그 집 가족이 호랑이에게 잡혀간다는 말도 있다. 

첫 토끼날인 상묘일()에는 여자가 남의 집에 일찍 출입하면 재수가 없다하여 금한다. 
심지어 여자들의 출입을 종일 꺼리기도 한다. 
이 날 여자들은 실을 짜거나 옷을 지으면 장수()한다 하여 베틀에 한 번씩 올라가 베를 짜본다.
첫 용날인 상진일() 새벽에는 여자들이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온다. 
이 날 새벽에 용이 내려와서 알을 쓸어놓고 간다 하여 누구보다도 먼저 물을 길어다 밥을 지으면 그 해 농사가 대풍이 든다고 한다.

『동국세시기』에는 이것을 용알뜨기[)이라 하여 대보름 풍속으로 기록되어 있다. 
경북의 경우 ‘용물뜨기’라 하여 정월 대보름 풍속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날 긴 물건을 다루지 않고 머리도 감지 않는다. 
뱀이 나온다고 하는데 용은 상상의 동물이지만 뱀처럼 몸이 길다고 하여 꺼리는 것이다. 
반면 머리칼이 잘 자라지 않는 사람은 상진일에 머리를 감아 곱고 길게 잘 자랄 것을 기원한다. 

첫 뱀날인 상사일()에는 머리를 빗거나 이발을 하면 뱀이 나타난다 하여 금한다. 
빨래도 삼가고 바느질도 하지 않으며 땔 나무를 부엌에 들이지 않는다. 
첫 말날인 상오일()을 제주도에서는 좋은 날로 보아 장을 담근다. 
첫 양날인 상미일()에 제주도에서는 미불복약()이라 하여 환자라도 약을 먹지 말라고 한다. 
약효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것 외에는 이 날을 무탈하게 본다.

첫 원숭이날인 상신일()에는 부엌에 귀신이 나온다고 하여 남자가 일찍 일어나서 비를 들고 부엌의 네 귀퉁이를 쓴다. 
첫 닭날인 상유일()에 바느질을 하면 손이 닭발처럼 된다하여 금한다. 
지역에 따라서는 닭날 장()을 담그면 달다는 말도 있다. 
개날인 상술일()에는 일을 하면 개가 텃밭을 해친다고 금하고 이 날 풀을 쑤면 개가 평소에 잘 토한다 하여 금한다. 

첫 돼지날인 상해일()에는 팥가루로 세수를 하면 얼굴이 희어진다고 한다.
정월 열나흗날 저녁에 잘 사는 집의 부엌의 흙을 훔쳐다가 자기 집 부뚜막에 바르면 부자가 된다고 한다. 
대보름날 아침에 부럼을 깨면 부스럼이 나지 않고 귀밝이술을 마시면 일년 내내 좋은 소식을 듣는다. 
더위를 팔면 그 해 여름에 더위를 피할 수 있다는 속신도 있다. 
오곡밥은 세 집 이상의 타성받이 집의 밥을 먹어야 그 해 운수가 좋다고 한다.

대보름을 무렵에 하는 동제를 전후해서는 각종 금기가 따르는데 이것들을 어기면 부정을 탄다. 
이는 속신이라기보다 민속신앙이라는 큰 범주에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제의가 끝난 후 제물 진설을 위해 깔았던 백지를 가지고 가서 사용하면 공부를 잘한다고 하고 아들이 없는 가정에서 불종지(기름을 넣고 종이심지를 박아서 켜는 불종지)를 가지고 가면 아들을 본다는 속신도 있다.
줄다리기를 위한 줄을 꼬을 때 여성들이 줄을 건너가면 그 쪽 편 줄이 시합 중 끊어진다는 속신이 있고, 상대방 줄을 넘으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한다. 
이긴 편 줄의 짚을 지붕 위에 올려놓으면 관운이 트고 일이 잘 된다는 속신도 있다.

설음식

복식과 음식

설날에 입는 옷을 설빔이라 한다.
『경도잡지』에는 남녀가 모두 새 옷을 입는 것을 세장(),『열양세시기 』에는 남녀노소가 모두 새 옷을 입는 것을 세비음()이라 기록되어 있다. 
설날에 색깔이 있는 옷을 입는데 특히 여자 어린이들은 색동저고리를 입는다. 
노랑이나 녹색 저고리에 붉은 치마는 오늘날까지도 설에 어린이들이 입는 가장 보편적인 옷이다.

설날 차례상과 세배 손님 접대를 위해 여러 가지 음식을 준비하는데 이 음식들을 통틀어 세찬()이라고 한다. 
세찬에는 떡국, 세주, 족편, 각종 전유어, 각종 과정류, 식혜, 수정과, 햇김치 등 여러 가지 음식들이 있는데 준비는 가세에 따라 가지 수와 양이 다르지만 정성을 다해 만들며 어느 집에서나 만드는 대표 음식은 떡국이다. 
떡국 한 그릇을 더 먹었다는 말이 설을 쇠고 나이 한 살을 더 먹었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설 전에 어른들께 귀한 음식을 보내는 일, 어른들이 아랫사람들에게 보내는 먹을 것들도 세찬이라고 하였다. 
보내는 음식의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었으나, 대표적인 것은 쌀, 술, 담배, 어물(), 고기류, 꿩, 달걀, 곶감, 김 등이었다.


설에 먹는 명절식으로 우선 꼽히는 것은 떡국이다. 
떡국의 기본 재료는 쌀로 만든 가래떡이다. 
요즘에는 방앗간에 가서 가래떡을 해오지만 예전에는 집에서 직접 만들었다. 
조선시대에도 떡국을 시장에서 팔았다는 내용이『동국세시기』기록되어 있어 흥미를 끈다. 
떡국에는 만두를 빚어 넣기도 한다.

설에 먹는 음식인 세찬()은 차례상에 오르고 명절식으로 시식한다. 
세찬에는 가래떡을 넣어 끓인 떡국 외에 시루떡도 있다. 
고사를 지낼 때의 시루떡은 붉은 팥시루떡을 쓰지만 차례를 지내는 시루떡은 붉은 팥시루떡은 금하기 때문에 거피를 한 팥을 사용하여 떡을 찐다. 

이밖에 인절미·전유어·빈대떡·강정류·식혜·수정과 등도 세찬으로 장만한다. 
세주는 맑은 청주이며 역시 차례상에 오르고 산뜻한 봄을 맞는다는 의미에서 차례를 지낸 후 가족들이 함께 마신다.
대보름에는 오곡밥과 묵은나물이 대표적인 명절식이다. 

지역에 따라서는 오곡밥을 찰밥이라고도 하는데 대체로 정월 열나흗날 지어 보름날, 또는 그 이후까지 먹는다.
오곡밥은 찹쌀·차수수·차조·팥·콩 등 각종 곡물을 넣어 지은 밥이다. 
대추와 밤 등을 넣어 맛을 내기도 한다. 
묵은나물류로는 박나물·버섯 등을 말린 것과 대두황권(, 콩나물순을 말린 것)·순무·무우 등을 묵혀둔다. 

그밖에 외꼭지·가지고지도 묵혀두고 무청을 말려 시래기도 만들어둔다. 
대보름이면 이들 나물을 삶아서 무치거나 볶아 나물반찬을 만든다. 
나물반찬을 대보름에 이를 먹으면 여름에 더위를 타지 않는다고 한다. 

오곡밥과 묵은나물은 세 집 이상의 타성()받이 집의 밥을 먹어야 좋다고 그래서 백가반() 풍속이 있다. 
실제로 백집의 오곡밥을 먹을 수는 없지만 그만큼 여러 집의 오곡밥을 먹는다는 뜻이다. 
복쌈이라 하여 오곡밥을 참취나물·배춧잎·김으로 밥을 싸서 먹는다. 

대보름 명절식은 풍년을 기원하면서 예축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대보름날 아침에 부럼을 깬다. 이른 아침, 새벽에 밤·호두·은행·잣·무우 등을 깨물면 일년 열두 달 동안 무사태평하고 종기나 부스럼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부럼을 작절(), 또는 고치지방()이라고 한다. 

설날에 세주를 마시는 것처럼 대보름에도 아침에 청주 한잔을 마신다. 
이 술을 유롱주(), 곧 귀밝이술이라고 한다. 
귀밝이술을 마시면 귀가 밝아지고 한 해 동안 좋은 소식을 듣는다고 한다. 
약밥도 대보름의 명절식이다. 

찹쌀을 쪄서 대추·밤·기름·꿀·간장 등을 섞어 함께 찌고 잣을 박은 음식이 약밥[약반=, 약식이라고도 한다]이다.
찰밥과 오곡밥, 약밥에 대하여 덧붙여야 할 말이 있다. 
경상북도 일원에서는 오곡밥을 찰밥이라 하고 경기도와 충청도·강원도·전라도 등지에서는 오곡밥이라고 한다. 

찰밥은 찹쌀·팥·밤·대추·곶감 등을 넣어 짓고 오곡밥은 찹쌀·팥·수수·차조(또는 기장)·콩 등을 넣어 짓는다. 
찰밥과 오곡밥은 실상 같은 것이다. 약밥은 찰밥에서 분화된 음식으로 찰밥에서 다시 발전 변형된 음식이다.

놀이

설의 놀이는 이미 섣달 그믐 무렵부터 즐기기 시작하여 대보름 무렵까지 즐긴다. 
연날리기는 섣달 그믐 무렵부터 시작하여 대보름까지 즐긴다. 
보름날의 연은 액연()이라 하여 멀리 날려보낸다. 

원래 보름날 이후에는 연을 날리지 않는 것이다. 
그밖에 설날 무렵 윷놀이·널뛰기·승경도놀이·돈치기 등을 한다. 
윷놀이는 남녀노소 구별 없이 모든 사람이 집안에서도 하고 밖에서 마을 사람들이 어울려 하는 정초의 가장 보편적인 놀이다. 
윷의 종류도 장작윷과 밤윷이 있고 놀이 방법도 다양하다. 

윷놀이를 통해 그 해 운수를 점쳐보기도 한다.
승경도()는 승정도()·종경도()·종정도()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린다. 

주로 양반 가문의 젊은이들과 여자들이 즐겨 놀던 실내놀이로 관직이나 학업의 등급을 차례로 기입하고 주사위를 던져서 나온 끗수대로 승진하거나 후퇴하는 방식으로 논다. 
돈치기는 정초에 청소년들이 동전이나 동전 모양의 쇠붙이를 가지고 노는 놀이인데『동국세시기』에는 정월 대보름 편에 기록되어 있다.

대보름에는 더욱 많은 놀이들이 행해진다. 
지신밟기를 비롯하여 줄다리기·고싸움·나무쇠싸움·동채싸움·석전·횃불싸움·놋다리밟기·기와밟기·탈놀이 등 다양한 놀이들이 있다. 
대보름놀이로는 불과 관련된 횃불싸움이 절정을 이룬다. 

쥐불놀이는 첫 쥐날인 상자일에도 하지만 대보름날 밤에 주로 한다. 
보름달 아래에서 즐기는 불놀이는 보름달과 불을 관련시키고 이를 성장, 풍요와도 관련시킨다. 
대보름 놀이는 불놀이 뿐 아니라 다른 놀이들도 풍요를 상징하는 것으로 풍요를 기원·예축하는 의미가 있다.

현대사회의 설

근대국가에 들어 우리나라에는 음력설(구정)과 양력설(신정)로 두 개의 설이 있었다. 이른바 이중과세()라는 것이다.
음력설은 전통적인 명절, 곧 설을 의미하며 양력설은 현재 일상력으로 사용하는 태양력(양력)에 의한 설이다. 

전통명절은 설날이며 구정()이란 용어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 
요즘 설날은 추석과 함께 전후하여 3일간 연휴이다. 
구정으로 일컬어졌던 ‘설날’이 오늘날과 같이 본명을 찾기까지는 우리 민족의 수난의 역사와 나란히 할 만큼 진통을 겪었다.

1896년 1월 1일(음력으로는 1895년 11월 17일, 이 기준으로는 고종 32년)에 태양력(양력)이 수용되고도 우리의 전통명절인 설날은 이어졌지만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수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일본은 우리나라의 ‘전통문화 말살정책’에 의하여 설날과 같은 세시명절마저 억압했다. 

그들은 우리 명절 무렵이면 떡방아간을 폐쇄하고 새 옷을 입고 나오는 어린이들에게 먹칠을 하는 사례가 허다했다. 
반면에 일본의 명절과 그 행사의 의식()을 한국에 이식하여 강요하기도 하였다. 
가령 일본 명절인 천장절()·명치절()·기원절() 등을 국경일로 정하여 갖가지 행사에 한국인을 참가시켰다. 
신정에는 시메나와(표승=)라 하여 새끼에 귤을 꿰어 대문에 달게 하고 단오절에는 고이노보리(리치=)라 하여 헝겊으로 잉어를 만들어 풍선처럼 띄우게 했다.

이처럼 일제강점기에는 일인들의 방식대로 양력과세를 강요했는데, 이는 광복 후 공화국에 들어서도 계속 이어졌다. 
그런 과정에서 우리의 전통적인 ‘설날’과 양력 1월 1일인 신정()을 명절로 여기는 이중과세 풍속이 생겨난 것이다. 
국가에서는 이중과세의 낭비성을 들어 금했으며 산업화시대에 와서는 낭비성과 아울러 외국과의 무역통상 관계를 들어 신정을 권장하기도 하였다. 

국제적으로 신정이 통용되기 때문에 우리도 그 때에 맞추어서 쉬고 ‘구정’ 때에는 외국에서는 모두 일을 하므로 우리 역시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국제무역 수지에 차질이 생긴다고 했다. 
역시 음력 기준의 추석은 휴일로 삼았다는 것은 모순되는 논리였다.

오랫동안 공휴일 또는 비공휴일 문제로 몇 차례 오락가락하던 우리의 설날은 1985년 ‘민속의 날’로 지정되어 1일간 국가적인 공휴일이 되기에 이르렀다. 
한국인의 생활 자체가 민속인데, ‘민속의 날’이라는 명칭은 붙이는 것은 실로 어색하고 궁색했다. 
1989년 음력 정월 초하루부터 본명인 ‘설날’을 찾게 되자 각종 언론매체에서는 70∼80년만에 설날을 되찾았다며 떠들썩했었다.

신정도 3일간 연휴로 하다가 다시 2일로 했으나 1999년 1월 1일부터 하루의 휴일로 축소되어 3일 연휴인 설날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설날이면 온 가족이 모여 차례를 지내고 설날을 전후하여 성묘하는 세시풍속은 오늘날에도 전승되고 있다. 
민속놀이를 비롯하여 갖가지 세시풍속은 퇴색되거나 단절되었다. 
다행히 근래에는 민속박물관과 민속촌 등 민속과 관련이 있는 기관에서 민속놀이판을 벌이고 이를 찾는 가족들이 날로 늘고 있다. 

떡국을 끓일 가래떡을 기계로 빼거나 상품으로 만들어진 것을 사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아직 떡국을 명절식으로 하는 세시풍속도 전승되고 있다. 
떡을 먹지 않아서 밥으로 차례를 지낸다는 가정도 있지만 설날과 떡국이 연장선상에 있다는 점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본다.

특징과 의의

설은 우선 한 해의 첫날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며 특히 신성한 날이라는 신앙적인 의미도 있다. 
오늘날의 설은 신성성을 담보하지는 못한다. 
오늘날의 설은 국가차원의 공휴일이지만 전통사회에서처럼 대보름까지 설명절이 이어지지는 않는다. 

설날은 초하루로서 차례를 지내는 날이다. 
성묘는 설을 전후하여 한다. 
근래에는 설 연휴를 이용하여 국내외 여행을 하는 경우도 많지만 반면 민속박물관이나 민속촌과 같이 설날의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곳을 가족 단위로 찾는 문화가 생성되기도 했다.
우리는 오랫동안 구정과 신정이라는 신년을 두 번 맞는 문화를 만들었다. 

설날이 공식적으로 인정되면서 오늘날에는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와 같은 인사말을 연간 두 번에 걸쳐 한다. 
좋은 말이니 많이 할수록 좋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태양력을 기준으로 한 새해에 이미 인사를 하고 다시 설에 똑같은 인사를 한다는 것이 다소 어색하다.
실상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는 신년 인사말은 전통적인 덕담이 아니라 새로 생긴 현대판 덕담이다. 
일상력인 양력으로 새해를 맞았을 때에는 신식 덕담을 나누고 우리 전통명절인 설날에는 “과세 안녕히 하셨습니까”, “과세 편안히 하셨습니까”와 같은 전통적인 인사말을 하는 것도 무방하리라 본다. 
이는 설이라는 전통문화를 소박하게나마 이해하는 길이다.

설과 추석 무렵이면 ‘민족대이동’이 화두가 되고 있다. 
명절연휴에 고향을 찾는 인파가 물결을 이루기 때문이다. 근래에는 ‘어른’들이 자녀를 찾는 역류현상도 형성되고 있지만 아직은 고향을 찾는 인구가 많다. 
오늘날 설은 ‘전통문화를 보존’한다는 측면과 ‘만남’을 갖는 절대적인 시간이 된다는 측면에서 소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