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21일 수요일

도연명. 陶淵明. táo yuān míng. (도잠 . 陶潛 .)

도연명. 陶淵明táo yuān míng .



동진 말에 이름을 잠()으로 개명한 것으로 전해지며, 심양(= 현 강서(西) 구강시())의 시상()에서 출생하였다. 
이 곳은 바로 양자강의 중류에 위치하며, 남쪽으로는 파양호()에 임하여 있고, 북쪽으로 여산()을 바라보고 있어 풍광이 명미한 곳이다. 
도연명의 증조부는 진()나라의 명장인 도간()이며, 외조부는 일대의 풍류 인물이었던 맹가()로 알려져 있으나, 그의 부친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자() 연명 또는 원량(). 이름 잠(). 문 앞에 버드나무 5 그루를 심어 놓고 스스로 오류() 선생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장시성[西] 주장현[]의 남서 시상() 출생.

출생 - 사망365년 ~ 427년
그의 증조부는 서진(西)의 명장 도간()이며, 외조부는 당시의 명사 맹가()였다고 전한다. 
이와 같은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생활이 그렇게 풍족하지 못한 소지주 정도의 가정에서 자랐다. 
29세 때에 벼슬길에 올라 주()의 좨주()가 되었지만, 얼마 안 가서 사임하였다. 
군벌항쟁의 세파에 밀리면서 생활을 위하여 하는 수 없이 진군참군() ·건위참군()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항상 전원생활에 대한 사모의 정을 달래지 못한 그는 41세 때에 누이의 죽음을 구실삼아 펑쩌현[]의 현령()을 사임한 후 재차 관계에 나가지 않았다. 
이때의 퇴관성명서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유명한 《귀거래사()》이다. 
사전()에는 상관의 순시 때에 출영()을 거절하고, “나는 5두미()를 위하여 향리의 소인()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라고 개탄하였다고 적혀 있다. 

향리의 전원에 퇴거하여 스스로 괭이를 들고 농경생활을 영위하여 가난과 병의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62세에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한 것처럼 그 생애를 마쳤다. 
후에 그의 시호를 정절선생()이라 칭하였다. 
그의 시는 4언체() 9편과 그때에 유행하던 5언체() 47편이 전해지고 있지만, 기교를 그다지 부리지 않고, 평담()한 시풍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로부터는 경시를 받았지만, 당대 이후는 6조() 최고의 시인으로서 그 이름이 높아졌다.

그는 평생의 거의 대부분을 민간인으로 보냈기 때문에, 그의 시는 생활로부터 스며나온 마음의 부르짖음이었으며, 당시 유행하던 귀족적 생활에서 풍겨나온 여유 있는 유희문학()이 아니라 민간생활 그 자체를 노래한 문학이었다. 
그의 시는 따스한 인간미가 있으며, 고담()의 풍이 서려 있다. 
형식면으로는 대구적 기교()나 전거() 있는 표현은 별로 쓰지 않았으므로, 같은 시대 시인인 사영운()과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양()나라의 종영()의 《시품()》에서는 “고금 은일시인()의 종()”이라 평가하였으며, 후세에도 똑같이 평가되고 있다.

그의 시풍은 당대()의 맹호연() ·왕유() ·저광희() ·위응물() ·유종원() 등을 비롯하여 많은 시인들에게 영향을 끼쳐, 문학사상으로 남긴 업적은 매우 크다. 
양()나라의 소명태자()는 《문선()》에다 9 편을 수록하여 전집을 편집하였다. 
판본() 및 주석서가 나왔다. 
시 외에 《오류선생전()》 《도화원기()》 등 산문에도 뛰어났으며, 또 지괴소설집() 《수신후기()》의 작자로도 알려져 있다.


도연명의 일생은 세 시기로 분류할 수 있는데, 제 1기는 출생으로부터 관직에 처음으로 나갔던 29세를 전후로 한 시기이다. 
이 때에 지어진 그의 작품을 가려낼 수 없으나, 그의 「명자시()」, 「제정씨매문()」을 통해서 어릴 때에 아버지가 없었고, 12세 때에 계모마저 여의게 되어 고아로 자랐고, 청년 시절 역시 가난하여 끼니를 제대로 이을 수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 2기는 29세부터 41세까지로, 적어도 벼슬길을 따라 다섯 차례 이상 집을 떠나야 했다.

이 시기는 정치·사회적으로 복잡하여 안정을 찾을 수 없었고, 41세 되던 가을 팽택령()이 되었는데, 얼마 후에 정씨매()가 죽었다. 
정씨매의 죽음과 장례를 구실로 관직을 버리고 전원으로 돌아왔는데, 그 인생의 제 3기로 접어든 시기였다. 

중국 동진(東晋)말기 부터 남조(南朝)의 송대(宋代)초기에 걸쳐 생존한 중국의 대표적 시인. 기교를 부리지 않고, 평담(平淡)한 시풍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로부터는 경시를 받았지만, 당대 이후는 6조(六朝) 최고의 시인으로서 그 이름이 높아졌다. 
그의 시풍은 당대(唐代)의 맹호연(孟浩然) , 왕유(王維), 저광희 등 많은 시인들에게 영향을 줬다. 주요 작품으로 《오류선생전》,《도화원기》,《귀거래사》등이 있다.
「귀거래사()」는 당시의 상황과 결심에 대하여 분명히 밝히고 있다. 

대부분의 시들이 제 3기에 지어졌고, 가난과 질병으로 고생하면서도 끝까지 다시 벼슬에 나가지 않았으며, 마침내 63세로 어렵고 긴 인생 여정을 마쳤다.

전해지고 있는 도연명의 시는 모두 130여 수로, 4언 9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5언시인데 시어가 평이하고 간결하며 내용이 소박하다. 

도연명 시의 중요한 주제는 전원 생활이며, 다음으로 적지 않게 철리시()가 있다. 
그의 문집 『도연명집()』은 양() 소통()이 편찬한 것으로, 100여 편의 시들이 실려 있으며, 「귀거래사()」, 「도화원기()」, 「오류선생전()」 등은 시 못지 않게 널리 읽혀지고 있다. 
「귀전원거()」를 보기로 든다.
젊어서부터 속세에 어울리지 못하고
천성은 본시 언덕과 산을 좋아했네,
먼지 같은 속세에 잘못 떨어져,
어언 삼십 년이 지났구려.
갇힌 새는 옛 숲을 그리워하고,
못 속의 물고기는 옛 연못을 그리워하네.
남녘 들가의 거친 땅을 일구어,
졸속함 지키려 전원으로 돌아왔네.
택지 넓이 십여 묘()에,
초가 팔구 간() 지었네.
느릅나무, 버드나무가 뒤뜰 처마를 덮고,
복숭아나무, 오얏나무는 안채 앞에 늘어섰네.
아득히 마을이 멀리 보이고,
하늘하늘 마을엔 연기가 피어오르네.
개는 깊숙한 골목에서 짖어대고,
닭은 뽕나무 꼭대기에서 울고 있네.
집 안에 먼지, 쓰레기 없으니,
텅 빈 방엔 한가로운 여유 넘치네.
오랫동안 새장 속에 갇혀 있다가,
다시 자연 속으로 돌아온 것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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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적으로 도연명의 시는 위·진 낭만주의 시대에 속하고 있으나, 내용·시풍이 과거 시와 비교할 때 완전히 새로웠다. 
육기, 반악, 반니와 같이 시구를 아름답게 다듬고, 화려하게 수식하는 것으로부터 자연스럽고 청아한 새로운 시풍으로 변화를 꾀했다. 
혜강의 현설(), 완적, 곽박 등의 유선()에서 벗어나 전원의 삶을 소재로, 새로운 문학을 창작하였다. 
도연명은 밭 매고, 글 읽고 하는 전원의 하루 생활을 사실적으로 그려냄으로써 삶의 숨결을 느낄 수 있도록 하였으며, 넓은 도량, 심오한 사상을 노래하여 높은 절개를 자연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당대에는 그렇게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해, 『시품』에서는 중품()으로 평가하고 있고 『문심조룡』에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당나라 때에 이르러 시의 예술적 가치를 새로이 인정받기 시작하였고, 송대에는 소식을 비롯한 모든 시인들이 그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으며, 그의 영향을 받았다.

자() 연명 또는 원량(). 이름 잠(). 문 앞에 버드나무 5 그루를 심어 놓고 스스로 오류() 선생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장시성[西] 주장현[]의 남서 시상() 출생. 그의 증조부는 서진(西)의 명장 도간()이며, 외조부는 당시의 명사 맹가()였다고 전한다.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생활이 그렇게 풍족하지 못한 소지주 정도의 가정에서 자랐다. 
29세 때에 벼슬길에 올라 주()의 좨주()가 되었지만, 얼마 안 가서 사임하였다. 
그 후 군벌항쟁의 세파에 밀리면서 생활을 위하여 하는 수 없이 진군참군() ·건위참군()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항상 전원생활에 대한 사모의 정을 달래지 못한 그는 41세 때에 누이의 죽음을 구실삼아 펑쩌현[]의 현령()을 사임한 후 재차 관계에 나가지 않았다. 
이때의 퇴관성명서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유명한 《귀거래사()》이다. 
사전()에는 상관의 순시 때에 출영()을 거절하고, “나는 5두미()를 위하여 향리의 소인()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라고 개탄하였다고 적혀 있다. 
향리의 전원에 퇴거하여 스스로 괭이를 들고 농경생활을 영위하여 가난과 병의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62세에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한 것처럼 그 생애를 마쳤다. 
후에 그의 시호를 정절선생()이라 칭하였다. 
그의 시는 4언체() 9편과 그때에 유행하던 5언체() 47편이 전해지고 있지만, 기교를 그다지 부리지 않고, 평담()한 시풍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로부터는 경시를 받았지만, 당대 이후는 6조() 최고의 시인으로서 그 이름이 높아졌다.

그는 평생의 거의 대부분을 민간인으로 보냈기 때문에, 그의 시는 생활로부터 스며나온 마음의 부르짖음이었으며, 당시 유행하던 귀족적 생활에서 풍겨나온 여유 있는 유희문학()이 아니라 민간생활 그 자체를 노래한 문학이었다. 

그의 시는 따스한 인간미가 있으며, 고담()의 풍이 서려 있다. 
형식면으로는 대구적 기교()나 전거() 있는 표현은 별로 쓰지 않았으므로, 같은 시대 시인인 사영운()과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양()나라의 종영()의 《시품()》에서는 “고금 은일시인()의 종()”이라 평가하였으며, 후세에도 똑같이 평가되고 있다.

그의 시풍은 당대()의 맹호연() ·왕유() ·저광희() ·위응물() ·유종원() 등을 비롯하여 많은 시인들에게 영향을 끼쳐, 문학사상으로 남긴 업적은 매우 크다. 
양()나라의 소명태자()는 《문선()》에다 9 편을 수록하여 전집을 편집하였다. 
이후 판본() 및 주석서가 나왔다. 시 외에 《오류선생전()》 《도화원기()》 등 산문에도 뛰어났으며, 또 지괴소설집() 《수신후기()》의 작자로도 알려져 있다.





평생을 가난하게...

심양() 시상(, 현 장시(西)성 주장()) 사람으로 자는 원량()이고 송나라가 들어선 다음 이름을 잠()으로 고쳤다. 
집 문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어 놓고 스스로를 오류선생()이라 부르기도 했다.
유토피아 무릉도원을 노래한 <도화원기>라는 불세출의 명작을 남긴 시인 도연명은 평생을 가난하게 살다간 사람이었다. 
남북조 시대라는 중국사 대분열기에 남조의 동진과 송이 교체되는 시기를 살았다.
그의 증조부 도간은 대사마 벼슬을 지낸 동진의 명사였고,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태수를 지냈다. 
도연명 대에 와서 가세가 기울어 힘든 생활을 했다.
어려서부터 그는 책 읽기를 좋아했고 도교와 불교에도 관심이 많아 관련 서적들을 외고 다닐 정도였다. 
좨주(, 국자감의 우두머리)를 시작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참군(, 참모)을 거쳐 팽택현령()에 임명되었으나, 쌀 다섯 말 때문에 허리를 굽힐 수 없다며 관직을 버리고 고향 전원으로 돌아가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고 살았다. 
관직에서 물러나면서 유명한 시 <귀거래사>를 썼다.


도잠 .  .


동진() 여강() 심양() 사람. 자는 연명() 또는 원량()이고, 문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어 놓고 오류선생()이라 자호했다. 
일설에는 이름이 연명()이고, 자가 원량이라고도 한다. 
도간()의 증손이다. 
고을의 좨주()가 되었지만 관리의 직무를 감당하지 못하고 사직한 뒤 돌아왔다.
다시 생활을 위해 진군참군()과 건위참군() 등의 관직을 지냈다.

팽택현령() 때 오두미() 때문에 허리를 굽히는 일을 견뎌내지 못하면서 항상 전원생활에 대한 사모의 정을 달래지 못하다가 안제() 의희() 2년(406) 41살 때 누이의 죽음을 구실 삼아 팽택현령을 사임한 뒤 다시는 관계()에 나가지 않았다. 
이때쓴 「귀거래사()」다. 의희 말에 저작좌랑()으로 불렸지만 나가지 않았다. 
스스로 증조가 진()나라 때의 재보()였으면서 후대에 몸을 굽힌 것을 부끄럽게 여겨 남조 송나라에 들어서자 다시는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지은 문장에는 모두 연월()을 달았는데, 의희 이전에는 진나라 연호를 썼다가 남조 송나라 이후에는 갑자()만 달았다. 
직접 농사를 지어 자급했고, 술을 좋아했으며, 시문을 잘 지었다. 
시풍()은 후대의 많은 시인들에게 영향을 끼쳐 문학사상 큰 업적을 남겼다. 
시 외에 「오류선생전()」과 「도화원기()」 등 산문에도 뛰어났고, 지괴소설집() 『수신후기()』의 작자로도 알려져 있다. 
사시()는 정절()이다. 저서에 『도연명집()』이 있다.

인간미와 담담한 기풍 과 시풍

도연명집 판본 시골로 은거한 그는 직접 괭이와 삽을 들고 농사를 지었고, 평생 가난과 병에 시달렸지만 권세와 타협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았다. 
그는 직접 노동하면서 가난한 농민들과 함께 살았기 때문에 그의 작품세계도 생활에서 나오는 순수함 그 자체였다.
따스한 인간미와 담담한 기풍은 당시의 선비들이 즐겨했던 유희문학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기교를 부리지 않고 평범한 시풍이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멸시에 가까운 평을 받았지만 당나라 이후 육조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되었다.
그의 시풍은 당나라 때의 맹호연왕유위응물유종원백거이 등을 비롯하여 많은 시인들에게 영향을 미쳐 문학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타계 뒤 ‘정절()’이란 시호를 받아 ‘정절선생’이라 불리었고, 양나라 소명태자는 『문선』에 그의 시 9편을 수록하여 그에 관한 소중한 기록을 남겼다.
『오류선생전』, 『도화원기』 등과 같은 산문과 『도연명집()』을 남겼고, 유명한 괴기소설집 『수신후기()』의 작자로도 알려져 있다.

고향 관련 유적




장강 중류에 위치한 도연명의 고향 시상은 북으로는 명산으로 꼽히는 여산()을 등에 지고 남으로는 파양호()를 바라보는 명승지이다. 

그는 이 아름다운 전원에서 농민들과 더불어 농사지으며 시를 통해 자기 삶의 애환과 그들의 생활을 노래했다. 

그를 고고한 인품의 소유자로 칭찬하는 까닭도 사람들과 더불어 울고 웃으면서 인간의 삶을 한 점 부끄럼 없는 진솔한 문학적 경지로 승화시켰기 때문이다.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백거이가 도연명의 고향인 시상(, 현 장시(西)성 주장())의 사마()로 부임한 뒤 도연명이 살던 옛집을 찾아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오늘 당신의 옛집을 찾아
숙연한 마음으로 당신 앞에 섰습니다
당신의 단지에 담긴 술이 그리운 것도 아니고
줄 떨어진 당신의 거문고가 그리운 것도 아닙니다
오직,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산과 들에서 자유롭게 스쳐간 당신이 그리울 뿐입니다
도연명과 관련된 유적으로는 장시성 주장시에 남은 무덤이 대표적이다. 
여기서 멀지 않은 여산 서쪽 기슭 구강현에는 그를 기념하는 도연명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기념관에는 도연명의 사당인 도정절사()가 있는데 도연명의 신상이 모셔져 있다.

도연명 자식들에게 보낸 편지

도연명이 강희 11년 그의 나이 51세에 지은 「여자엄등소()」라는 글이다.
엄아, 사야, 분아, 일아, 동아 보거라.

천지가 만물에 생명을 부여하여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기 마련이다. 
예로부터 어진 이도 성스러운 이도 이것만은 피할 수 없었다. 

공자의 제자였던 자하(복상)는 “삶과 죽음은 운명 속에서 벌써 정해진 것이며, 부귀는 하늘이 안배하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공자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자하께서 이런 생각을 하셨다는 것은 곤궁과 영달은 멋대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수명의 길고 짧음도 정해진 수가 있어 달리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겠느냐?

내 나이 벌써 50이 넘었다. 
젊어서부터 궁하고 힘들게 살다보니 집안이 가난하여 늘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살았단다. 
성격은 강하고 재주는 아둔하여 항상 세상과 어울리지 못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렇게 끝까지 가다간 세속의 환란을 피할 길이 없을 것 같아 억지로 관직을 사퇴하고 세상을 피해 은거하다보니 어려서부터 너희들을 춥고 배고픈 생활로 내몰고 말았구나. 

유중(, 민중이나 백성)의 현명한 아내가 “담담하게 자신의 지조를 지킨다면 생활이 빈곤하여 헤어진 솜이불을 덮고 산다한들 자식들에게 무슨 부끄러움이 있을 소냐?”라고 한 말에 깊이 감동을 받았단다. 

청렴결백하게 명예와 세상을 피한 이중 같은 이웃도 없고, 집안에 어질고 후덕한 래부 같은 아내도 없는데 쓸데없이 자기 혼자 이런 고민을 안고 있으니 이것이 정말 부끄러울 뿐이구나!

어려서 거문고를 배웠고 책을 읽었다. 조용하게 혼자 있는 것이 좋았단다. 
책을 읽고 깨닫는 바가 있으면 너무 기뻐 밥 먹는 것조차 잊었단다. 
잎사귀 무성한 나무와 나무 그늘을 보거나 때맞추어 새들이 날아와 지저귀면 마음이 절로 들떴단다. 
그래서 늘 5월이나 6월에 북쪽으로 난 창 아래에 누워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을 맞으면 내가 바로 ‘복희 이전의 태고적 사람이구나’ 했단다. 

마음속에 품은 뜻이 차분하고 담담하여 굳이 무엇을 만들거나 구하는 바가 없다면 스스로를 깨끗하고 높게 지킨다고 할 수 있다. 

세월이 흐르면 재치와 속임수도 점점 멀어지고 오로지 고인의 경지를 추구하게 되니 이런 유유자적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 줄 아느냐! 병을 얻은 뒤로 몸이 점점 쇠약해졌으나 다행히 친척과 옛 친구들이 버리지 않고 약을 마련하여 나를 도왔단다. 

내가 죽은 뒤 어린 너희들이 가난 때문에 늘 생계를 걱정하고 힘들게 일해야 할 테니 언제 그것을 면할 수 있을까 이것이 걱정될 뿐이다. 
마음속에 깊이 맺혀 있으니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느냐?

너희들이 비록 같은 어미에게서 난 형제들은 아니지만 ‘사해의 모든 사람이 형제다’라는 이치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포숙과 관중은 모은 재물을 나눌 때 터럭만큼도 셈을 따지지 않았고 서로 시기하지 않았다. 

귀생과 오거는 정과 의리가 돈독하여 서로 기대고 돕고 살았단다. 
그들은 끝내는 실패를 성공으로 바꿀 수 있었단다. 
친척이 아닌데 이렇게 할 수 있거늘 하물며 너희들은 모두 한 아버지에게서 난 형제 아니냐! 영천의 한원장()은 동한 시대의 명사로 재상이란 높은 자리에 있었고 80까지 사시다가 세상을 뜨셨는데 형제들이 끝까지 함께 살았다. 

북조 사람 치춘()은 진 왕조에서 덕행으로 이름이 높은 분이셨는데 7대가 분가하지 않고 함께 살면서도 누구도 원망하는 기색이 없었다고 한다. 
시경』에 “높은 산은 사람이 우러러보고 큰길은 가려 한다”는 구절이 있다. 
이런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더라도 충심으로 그렇게 하려면 너희들은 삼가 경계해야 할 것이다! 이제 더 할 말이 없구나.


도연명의 은거 . 陶隱.

도잠()은 도연명()이라고도 하며, 심양() 시상(, 강서성 구강) 사람이다. 
대대로 벼슬을 한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할아버지 도간은 동진 초기에 대공을 세우고 여덟 개 주의 군사를 총괄했던 장군으로서 매일 벽돌을 1백 장씩 나르며 단련했다는 바로 그 사람이다. 
도연명 대에 이르러서는 가세가 이미 기울어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도연명은 어렸을 때부터 글읽기를 즐겨했으며 ‘제세구민(,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구한다)’의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조부 도간을 매우 존경했으며 자신도 조부처럼 큰일을 하고 싶었다. 

도연명은 스물아홉이 되어서야 다른 사람의 추천을 받아 ‘참군’ 같은 작은 벼슬을 할 수 있었다. 
벼슬을 하는 13년 동안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벼슬아치들의 아첨과 탐욕뿐이었고, 결국 그는 젊었을 때 품었던 포부와 열정을 잃어버리고 낙향했다. 
여기에서 바로 ‘다섯 되 쌀 때문에 허리를 굽힐 수는 없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도연명이 팽택현(, 강서성 호구현) 현령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관청의 공전()에다가 술을 빚는 데 쓸 찰벼를 심게 했다. 
“나는 술만 있으면 족하다. 
다른 것은 더 바라지 않는다.” 

그의 부인은 술만 먹고 어떻게 살 수 있겠냐며 먹을 것이 있어야 한다면서 매벼를 심자고 했다. 
그래서 그들 부부는 다투었다. 
결국 도연명이 양보해서 공전 2백 무(, 1무는 약 30평) 중에서 1백50무는 찰벼를 심고 나머지 50무는 매벼를 심기로 했다. 

도연명은 잠시 이렇게 해놓고 수확을 하고 난 후에 다시 조정하기로 했다.

그런데 80여 일 후에 군에서 독우(, 지방 감찰관)가 조사를 하러 내려온다는 기별이 왔다. 
현청의 아역 하나가 허술하게 대했다가는 큰 야단을 맞는다고 도연명에게 귀띔해 주었다. 
그러면서 옷을 단정히 입고 공손한 태도로 맞이해야 한다는 둥 잔소리가 많았다. 

도연명은 큰 한숨을 내쉬더니 이렇게 말했다.
“내가 다섯 되 쌀 때문에 시골의 소인에게 허리를 굽힐쏘냐.”
그러고는 관복을 훌훌 벗어 던지고 관인을 내맡긴 다음 관청을 떠났다. 
집으로 돌아온 도연명은 농사를 지었다. 
처음에는 심심풀이로 했지만 나중에는 생계를 잇기 위해 농사를 지었다. 
새벽 일찍 밭에 나가서 저녁 늦게 호미를 메고 밤이슬을 맞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도연명은 농사를 소재로 한 시를 많이 지었으며, 그리하여 ‘전원시인()’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가 쓴 시 중에 ‘만나도 쓸데없는 말이 없고 뽕나무 얘기만 하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구절만 보더라도 그와 농민들 간에 서로 사귈 수 있는 말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알 수 있다. 

도연명은 봉건시대 농민들의 절박한 요구와 염원들을 반영하는 작품들을 적지 않게 썼는데 그중 만년에 지은 『도화원기()』는 가장 뛰어난 대표작이다. 

『도화원기』는 당시 전란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안정된 생활에 대한 갈구, 착취와 억압이 없는 사회에 대한 염원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했으며 백성들의 마음속에 있는 유토피아 사회를 그리고 있다.


무위() 사상은 도연명의 붓 아래에서 성인이 없는, 자연과 조화된 ‘도화원’으로 나타났다. 도화원은 노장() 철학의 현실적인 구도를 이루었으며 역대 정치가들이 피로하면 찾게 되는 휴식처가 되었다. 오늘날의 호남성 도화원에 있는 전설 속의 ‘도화원’ 유적지이다.
도연명은 농민들과 가까이 지냈으며 관리와 귀족들은 멸시했다. 
그가 쉰다섯이 되던 해에 자사 왕홍()이 내왕하고 싶은 마음에 하루는 사람을 보내어 그를 관청으로 청했다. 
도연명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왕홍은 한 가지 꾀를 생각해 냈다. 
도연명과 가까운 사람에게 시켜서 그가 늘 지나다니는 길목에 주안상을 차리게 한 것이다. 

지나가는 도연명을 잡아당기며 같이 술을 먹자고 했다.
도연명은 이름난 애주가였다. 
술을 보자 도연명은 좋아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들이 흥이 나서 한창 술을 마시고 있는데 왕홍이 나타났다. 
그는 마치 지나가다가 우연히 만난 것처럼 수인사를 하고 술상 앞에 앉았다. 
그제야 왕홍은 도연명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고 만날 수 있었다.

몇 년 후에 동진의 일대 명장인 단도제()가 강주 자사로 부임해 왔다. 
그는 강주에 오자 도연명의 집을 직접 찾아가서 벼슬길에 나서기를 권유했다. 
그리고 좋은 술과 음식을 보내기도 했다. 
도연명은 그 호의를 거절했다. 

그 당시에 유유민(), 주속지()도 그 일대에서 도연명처럼 은거생활을 했다. 
당시 사람들은 그들을 ‘심양삼은()’이라고 불렀다. 
이 둘은 도연명과 달랐다. 
그들은 부유했으며 관리들과의 교제도 잦았다. 
그들이 은거를 한 이유는 은거생활을 통해서 명성을 날리기 위해서였다.

참고문헌
『진서(晉書)』 「도잠전(陶潛傳)」
『남사(南史)』 「도연명전(陶淵明傳)」
『송서(宋書)』 「도잠전(陶潛傳)」
『명문가의 자식교육』, 김영수, 아이필드, 2005.

육조(六朝) : 오, 동진(東晋), 송, 제, 양, 진(陳)나라를 합쳐서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