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23일 금요일

왕유. 王維.

왕유. 王維.


왕유, '벼슬하며 은거한' 삶

중국 당(唐)의 시인이자 화가로서 자연을 소재로 한 서정시에 뛰어나 ‘시불(詩佛)’이라고 불리며, 수묵(水墨) 산수화에도 뛰어나 남종문인화의 창시자로 평가를 받는다.
출생-사망699? ~ 759
마힐()
국적중국 당나라
활동분야문학
출생지중국 산시성[西]
주요저서《왕우승집》
주요작품《창주도()》,《망천도()》
이칭별칭 문행(), 시호 장순()
유형인물
시대고려
출생 - 사망미상 ~ 미상
성격관료
출신지광해주()
성별
본관해주()
대표관직(경력)원외, 동궁기실



정의
생몰년 미상. 고려 전기의 명신.

개설

자는 문행()이다. 
일명 왕유()로 쓰기도 한다. 
본래 성은 박씨()로 광해주(: 지금의 춘천) 사람인데, 고려 태조로부터 왕씨를 받고 해주왕씨()의 시조가 되었다. 
딸이 태조 비 예화부인 왕씨()이며, 현손인 왕자지()는 예종 때 참지정사에 올랐다.

생애 및 활동사항

경사()에 능통하여 처음에는 궁예()의 휘하에서 원외()를 거쳐 동궁기실()에 이르렀으나, 궁예의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출가하여 산곡에 은거하였다. 
918년에 태조가 배현경()·복지겸() 등의 추대를 받아 고려를 창업하자, 이 소식을 듣고 태조에게로 왔다.
이 때 태조는 은나라의 고종이 부암()에서 현상() 부열()을 얻고, 주()나라의 문왕이 위수()에서 태공망()을 얻은 고사에 비유하여 극진히 예우하고 관대()를 하사하였다. 
이 후 기밀을 관장하는 요직에 있으면서 왕씨 성을 받았다.
922년에는 진보(: 지금의 청송)의 성주 홍술()이 귀부를 원하므로 경() 함필()과 함께 위유()하였다. 
932년에 대상()으로 후당()에 가서 조공하고 책봉을 요청하였는데, 그 결과 태조는 고려왕에, 부인 유씨()는 하동군부인()에 각각 봉해졌다. 
시호는 장순()이다.


하동() - 지금의 산서성 - 사람으로 자()는 마힐()이고, 상서우승() 벼슬을 한 적이 있어 흔히 '왕우승()'으로 불린다. 
중소() 관료 집안 출신으로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여러 동생들과 함께 독실한 불교도였던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며, 서른을 갓 넘긴 나이에 부인과 사별한 후 평생을 홀로 살았다.

생애 및 활동사항

본관, 출신과 가계 등은 기록에 전하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다. 
1230년(고종 17) 8월최우()의 동생 최향()이 충청도 홍주()로 귀양간 이후 지역 내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지병마사()로서 병마사(使) 채송년()을 보필하며 군대를 이끌고 가서 난을 평정하였다. 
중앙 정부군을 통솔하고 홍주 지역민을 잘 규합하여 최향 일파를 제거하는데 성공하였다.
그 해 9월 고종이 묘통사()에 도착할 때 말이 놀라, 국왕이 땅에 떨어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당시 지어사대사()였던 왕유가 호위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견룡행수()를 감옥에 가두려 했지만, 어사대부() 차척()이 견룡 두 사람만을 탄핵해서 파면시켰다. 
같은 해 11월 왕유는 팔관회()에서 규례에 어긋난 것 때문에 일을 담당하는 하급 관리를 꾸짖었다. 
차척은 왕유가 재상을 질책하였다고 오해하여 고종에게 그대로 보고하였다. 
왕유는 좌승상() 송순(), 이규보() 등과 같이 섬에 유배되었다.

양귀비와의 애정고사로 유명한 현종()과 그의 아들 숙종()의 시대에 주로 활동했는데, 시뿐만 아니라 그림에도 뛰어나 남종() 수묵산수화의 창시자로 동양 회화사에도 우뚝하다. 
왕유의 동생 왕진()은 대종() 때 재상을 지냈는데, 왕유 사후()에 대종의 요청을 받고 형의 시작()을 모아 바침으로써 마침내 왕유의 시가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

중국 ()의 시인이자 화가로서 자()는 마힐()이고 분주(, 지금의 西 ) 출신이다. 
상서우승()의 벼슬을 역임하여 왕우승()이라고도 불린다. 
그가 태어난 해와 죽은 해는 《구서()》와 《신서()》에 각기 다르게 기술되어 있다. 
《구서()》에는 699년에 태어나 759년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신서()》에는 701년에 태어나 761년에 죽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사마() 벼슬을 하던 왕처렴()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그의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도였다. 
왕유는 어려서부터 불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는데, 그의 이름인 유()와 자()인 마힐()도 《유마경()》에 나오는 거사() ‘유마힐()’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우인 진()과 함께 어려서부터 시()와 서(), 음곡() 등에 뛰어난 재주를 나타냈다. 
9살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15살에는 ()의 수도였던 장안(, 지금의 西)으로 유학을 가서 황실()에까지 이름을 떨쳤다. 

현종(, 재위 712∼756) 때인 721년( 9년)에 진사()에 급제()하여 태악승()이 되었다. 
제주(, 지금의  )의 사창참군()으로 좌천되었다가 관직을 떠나기도 하였으나, 734년( 22년) 우습유()로 발탁되어 다시 중앙의 관직으로 복귀한 뒤 감찰어사(), 좌보궐(), 고부낭중() 등을 역임하였다. 
어머니 최씨()가 죽은 뒤 상()을 치르기 위해 관직에서 잠시 물러나기도 했지만, 현종() 말기에는 이부낭중()과 급사중()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755년 안사의 난이 일어나고, 756년 장안()이 점령되자 왕유()는 반란군에 사로잡혀 뤄양[]으로 끌려갔다. 
이 곳에서 그는 벼슬을 받았지만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남전(西  동남의 )의 중난산[] 기슭에 세운 망천장()에 머물며 시()로서 자신의 마음을 나타냈다. 

758년 현종()의 뒤를 이은 숙종(, 재위 756~762)이 반란군을 물리치고 장안()과 뤄양[]을 탈환한 뒤에 그는 안녹산(祿)에게 벼슬을 받은 일로 문책을 받았지만 사정이 인정되어 사면()을 받았다. 
태자중윤()으로 등용된 뒤, 태자중서자(), 중서사인(), 급사중()을 거쳐 상서우승()이 되었다.

왕유()는 () 문화가 가장 화려하게 번성했던 시기에 고위 관직을 역임했을 뿐 아니라,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화가, 음악가로서 다방면에 모두 이름을 떨쳤다. 
시인으로서 그는 시선()이라고 불리는 이백(, 701~762), 시성()이라고 불리는 두보(, 712~770)와 함께 중국의 서정시 형식을 완성한 3대 시인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그의 시에는 불교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있어 '시불()’이라고도 불린다. 
그는 그림에도 뛰어나 남종문인화()의 개조()로 여겨지고 있다. 
송(, 960∼1279) 때의 소식(, 1036~1101)은 그의 시와 그림을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 )”라고 평하였다.

왕유()의 시는 전기와 후기가 뚜렷한 차이를 나타낸다. 
전기의 시들이 도회지의 삶을 소재로 하고 있는데 비해 후기의 시들은 전원 생활과 자연의 정취들을 나타내는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자연의 청아한 정취를 소재로 한 후기의 작품들이 특히 높은 예술적 성취를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평가를 받는데, 만년()에 남전()의 망천장()에 은거하면서 지은 작품들이 널리 알려져 있다. 

자연을 소재()로 한 오언() 율시()와 절구()에 뛰어난 성취를 보여 육조() 시대부터 내려온 자연시()를 완성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동진(, 317∼419) 도연명(, 365~427)의 전원시()와 송(, 420∼478) 사령운(, 385~433)의 산수시()의 영향을 받아 회화()의 기법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자연시()를 크게 발달시켰다. 

() 시대의 자연시() 전통을 대표하는 인물을 ‘왕맹위유()’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왕유()와 위응물(, 737~804), 맹호연(, 689~740), 유종원(, 773~819)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들 가운데에서도 왕유는 자연시()를 대표하는 중심 인물로 평가를 받는다. 
그의 시는 《왕우승집()》으로 전해진다. 

그는 정건(), 오도자() 등과 함께 중국 남종화()의 개조()로 여겨지고 있으며, 전문적인 화가가 아니라 시인이나 문인들이 그리는 문인화()의 발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인물이나 꽃, 대나무, 산수()의 정경 등 다양한 소재를 그림으로 나타냈는데, 특히 수묵() 산수화()로 이름을 떨쳤다. 

시에는 장안()에 있는 건축물에 그린 ‘장벽산수화()’나 《창주도()》, 《망천도()》 등이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오늘날에 확실한 진본()들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의 작품들이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쳐 구도나 표현들을 모방한 사본()들이 다양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들 사본()들과 기록들에 근거해 어느 정도 그 작품들의 구도와 내용들이 확인되고 있다.

자연은 만물의 고향이요, 안식처이다. 
더욱이 일상의 고단한 삶에 지친 현대인이 본연()의 순수()를 동경하며 편히 쉴 곳은 세속에 물들지 않은 자연뿐이다. 

중국 당()나라 때 결코 득의하지 못한 벼슬아치로서 고뇌에 찬 삶을 살았던 왕유가 "밝은 달빛은 솔숲 사이로 비쳐 오고 / 맑은 샘물은 산석 위로 흐르는" 자연의 품속에서 정신적 해탈을 추구한 것은 분명 공감()의 매력으로 다가온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겠지만, 필자는 강촌()의 자연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후 줄곧 도회()의 삶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몸소 밭가는 전원의 삶에서 인생의 참뜻을 깨닫고 희열의 노래를 부른 전원시인 도연명()보다는 왕유()의 시를 읽으며 한층 더 공감하게 된다.

중국은 '시()의 나라'라고 일컬어질 만큼 역대로 시의 대가()와 명작이 속출하였으며, 특히 당시()의 성과와 지위는 독보적이었다. 
왕유는 이백(), 두보()와 함께 당나라 시단()의 3대가로 꼽히며 중국의 역대 문학은 물론 우리나라 고전 문학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친 대시인이다.

그는 열다섯 살 때 이미 고향을 떠나 장안()과 낙양()을 오가며 사회 진출을 꾀했는데, 초년()의 왕유는 겸제천하()1)의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사상과 태도를 견지하였다. 
스물한 살에 마침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같은 해 뜻하지 않은 일로 좌천을 당하면서 그 벼슬살이가 결코 여의치만은 않을 것임을 감지하였다. 
얼마 후 현상() 장구령()의 발탁으로 재기하여 정치적 열정을 불태웠다. 

그것도 잠시, 다시 얼마 후 그의 정치적ㆍ정신적 지주였던 장구령은 시기와 모함으로 파면 좌천되고, 간신 이임보()가 그 자리를 차지하면서 통치 세력은 급속히 부패하기 시작하였다. 
왕유는 초년의 적극ㆍ진취적인 처세 태도는 사라지고 당시 크게 유행한 불도사상()의 영향과 자신의 비교적 온유ㆍ나약한 개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출사()와 은거의 모순과 갈등 사이를 배회하고 방황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왕유가 선택한 길은 역관역은() 의 조금은 특이한 처세 방안이었다. 
현실 정치에 정면으로 항거하지는 못하였으나, 그렇다고 결코 영합하고 싶지도 않으면서, 완전히 은둔()의 길을 갈 수도 없었던 그의 고뇌에 찬 내심의 표현이었다. 

중년부터 장안 부근의 종남산()에 은거하기 시작하였고, 나중에는 그 산자락에 '망천() 별장'을 장만해 보다 장기적인 은거 생활을 위한 터전을 마련한 후 매양 공무()의 여가나 휴가 때면 으레 그곳으로 돌아와 피세은둔의 정취에 젖곤 하였다. 
날이 갈수록 더욱 불교에 심취하게 된 중년의 왕유는 한껏 한가롭고 자유로운 생활을 추구하면서 산수 전원의 아름다운 풍광과 정취를 즐겼다.


왕유의 나이 50대 중반이던 천보() 14년(755), 당() 왕조의 기틀을 뒤흔든 안사()의 난이 일어났고, 그 와중에 그는 반군()에게 사로잡혀 어쩔 수 없이 그들이 주는 벼슬을 떠맡게 되는데, 그것은 그의 일생 중 가장 고통스럽고 치욕적인 사건이었다. 
난리가 어느 정도 평정이 되고 논죄()의 도마에 올랐을 때, 비록 숙종의 성은으로 특별 사면을 받기는 하였으나, 그 스스로는 절개를 굳게 지키며 살신성인()하지 못한 치욕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결국 의기소침하여 더욱 소극적인 처세 태도로 스스로 슬퍼하고 탄식하며 괴로워했던 왕유는 "만년에는 오직 고요함만을 좋아하며 / 세상만사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온 마음으로 불교를 신봉하면서 치욕의 아픈 기억으로부터 초연한 태도를 보였다.

왕유 자연시, 이백ㆍ두보도 미치지 못한 

왕유는 그 시작의 문학적ㆍ예술적 성취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중국문학사에서 동진()의 도연명 이후 최고의 자연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특히 대시인 이백과 두보도 적지 않은 서경()의 명작을 남기고 있지만 그 성취는 오히려 왕유에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우리는 왕유의 자연시()가 가진 독특한 세계의 원천을 대략 다음 세 가지 측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첫째, 고도의 정경융합()을 통해 세속을 벗어난 고고한 정신을 문학적으로 형상화시키는 데 뛰어났다. 

왕유는 자못 고아한 운치를 자아내는 그윽한 산석()과 맑은 시냇물을 묘사하는가 하면, 수려한 풍광에 도취된 즐거움과 세속적인 번뇌에서 벗어난 데 대한 만족감을 표현하며 어둡고 부패한 현실 정치와 벼슬세계에 대한 혐오의 정서를 시 속에 담아냈다.
텅 비어 허전한 산에 막 새로이 비 내린 뒤
어스름 저녁이라 가을 기운 물씬 풍긴다.
밝은 달빛은 솔숲 사이로 비쳐 오고
맑은 샘물은 산석() 위로 흐르도다.
빨래 나온 여인들 돌아가며 대숲이 떠들썩하고
고기잡이배 내려가며 연잎이 흔들거린다.
향기로운 풀들이 제멋대로 다 시들어 버려도
왕손()은 의연히 산중()에 머무르리라.
-「산거추명()」
여기서 밝은 달빛과 맑은 샘물, 고고한 소나무와 대나무 그리고 연꽃은 곧 고결하고 강직하며 세속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함의 상징이다. 
결국 그윽하면서도 생기 넘치는 가을 저녁녘의 풍경은 한가롭고 유유자적한 삶에 대한 시인의 무한한 동경심을 불러일으켰음이라.

왕유의 전원 묘사는 평화롭고 한가로우며 순박한 일면을 특히 강조하고 있는데, 그 본의는 결코 농촌의 본질을 드러내 보이는데 있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이미지를 혼탁한 사회 현실과 선명하게 대비시킴으로써 벼슬살이에 진저리를 내며 한가롭고 자적함을 희구하는 시인의 심정을 토로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껏 우거진 향기로운 풀에 봄이 푸르고
우뚝 솟은 큰 소나무에 여름도 서늘하다.
소와 양은 저희끼리 마을 골목으로 돌아오고
아이놈은 의관()의 벼슬아치가 무언지도 모른다.
-「전원락()」에서
이 시는 전원의 아름다운 풍광과 예스럽고 순박한 촌민()의 의식 세계를 묘사하였다. 
풀과 나무, 소와 양은 더없이 한가로운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는 곧 시인이 추구하는 한가롭고 자적한 정취를 그대로 대변한다. 
"아이놈은 의관의 벼슬아치가 무언지도 모른다"는 것은 더욱 그 피세 은둔의 초탈 정신을 웅변하고 있다.

둘째, "시속에 그림이 있다"는 '시중유화()'의 예술성이 탁월하다. 
왕유는 수묵산수화()의 대가로, 시 속에 나타나는 회화적 심미성은 일찍이 송나라 때의 대문호 소동파()가 '시중유화' 그 시 속에는 마치 그림이 있는 듯하다고 평가하면서 후세에 크게 공명을 불러일으켰다.
형계() 시냇물 줄어 바닥엔 흰 돌 드러나고
날씨 차가워 어느덧 붉은 단풍잎도 드물다.
한적한 산길에는 본디 비 내리지 않았건만
빈 산중의 짙푸른 녹음이 사람의 옷을 적실 듯하다.
-「산중()」
이 시는 안개와 구름이 내려앉은 가운데 녹음이 우거진 산속의 경치를 배경으로 맑은 시냇물과 흰 돌, 단풍과 산길을 한 폭의 수채화로 그려내고 있다. 
산중에서 짙푸른 운무에 젖는 가운데 세속을 벗어난 듯한 정취를 만끽하며 한가로이 유유자적하는 모습이다. 
결국 시인은 이처럼 산중의 색채와 사람의 정서가 조화ㆍ융합된 정경() 속에서 진정한 삶의 즐거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셋째, 불교적 참선의 정취가 독특하다. 
고뇌에 찬 삶을 살았던 중년 이후부터 왕유에게는 불교적 인생관이 주된 관심사였다. 
그는 후세에 '시불()'의 칭호를 얻을 정도로 그윽한 참선의 정취를 매우 독특하게 표현하였다. 
불교에서는 흔히 고요하고 적막하며 맑고 그윽함을 선정()의 최적 조건으로 꼽는데, 곧 그와 같은 심적 상태에서 참선의 삼매경에 듦으로써 일체의 세속적 번뇌를 잊는 적멸()의 경지에 이르고자 함이다.
그윽한 대숲 속에 홀로 앉아
거문고 타다 또 길게 휘파람을 부는데
깊은 숲속이라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밝은 달빛만 살며시 다가와 비추어 준다.
-「죽리관()」
시인은 대숲 속 별관()의 맑고 그윽함에 젖어 밝은 달을 벗하며 유유자적하는 가운데 선취의 환희에 빠져 있으니, 세상일에 초연()해 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왕유의 자연시는 대부분이 중년 이후의 시기에 지어졌는데, 그는 당시 정치적 실의에 빠지면서 비록 조정()의 역학 관계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벼슬세계를 맴돌았지만 틈틈이 세속을 떠나 대자연의 품속에서 정신적 '해탈'을 추구하였다. 
왕유는 산수 전원의 정취에 젖는가 하면, 고요하고 적막한 참선의 경지를 소요하는 가운데 몸을 닦고 천성을 길러 심신을 편안하게 하고, 동시에 그 한가롭고 평화로운 정서와 감회를 작품으로 형상화해냈다.

왕유의 시 인정이

왕유는 남달리 다정다감한 사람이었으며, 그 아름다운 심성과 성정()에서 우러나온 따스하고 두터운 인정이 넘치는 시편()들은 자연의 풍광과 정취를 노래한 작품 다음으로 후세의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현존 왕유의 시 가운데 절반이 훨씬 넘는 시편에서 집중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애틋하고 두터운 가족간, 친구간, 남녀간의 정()을 통해 우리는 그가 참으로 따뜻한 가슴의 소유자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왕유가 열일곱 어린 나이에 장안()에서 고향의 형제들을 그리는 정을 읊은 「구월구일억산동형제()」나 멀리 변방으로 출사(使)하는 벗을 떠나보내며 지은 「송원이사안서(使西)」, 타향의 남편과 고향의 아내 사이의 은근한 그리움을 묘사한 「잡시() 3수()」 등은 오랜 세월 동안 널리 애송되어온 명작이다.
결코 순탄치 않은 일생을 살았던 왕유는 아마도 그 훈훈한 정감() 생활 속에서 인생의 고통을 잊고 새로운 삶의 의욕과 활력을 찾았을 것이다.

왕유 시, 고도의 예술 

왕유의 시는 내용에서뿐만 아니라 예술 형식상에 있어서도 대가의 면모를 보여주는데, 무엇보다 회화() 및 음악적 형상이 두드러진다. 
왕유 시의 '시중유화'의 회화적 특색은 이미 상술한 바 있지만 이름난 화가였던 왕유는 시작에 있어서도 마치 시각에 호소하는 듯한 선명한 형상을 이뤄내기 위해 회화 예술의 표현 형식을 적절히 도입하였다. 
왕유 시의 음악성은 음절과 운율의 변화 등 그 일반적인 기법 이외에도 왕왕 자연이나 생활 속의 각종 음향()의 운용을 통한 청각적 이미지를 활용해 자못 색다른 예술성을 더하고 있다. 
아니라 왕유 시는 또 청신()하고 자연스러우면서 간결하고 세련된 시어()에다 비유와 상징, 대비()와 도치() 등 다양한 수사 기교의 활용이 매우 적절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왕유 망천() 별장

중년 이후 왕유의 주요 보금자리였던 망천 별장은 지금의 섬서성(西) 남전현() 종남산 자락에 위치하였는데, 당시 그곳에는 '한가로이 노닐기 좋은 곳'으로 문행관()ㆍ죽리관()을 비롯한 이십경()이 있었다. 
왕유는 일찍이 망천이십경 각각의 정경()을 일일이 시로써 읊어 「망천집()」 20수를 남기고 있는데, 대부분이 왕유 산수시의 대표적 가작()이다. 
그 정경을 그림으로도 그렸으니, 중국 회화사상 유명한 「망천도()」가 바로 그것이다.
지금도 궁벽()하고 정적()이 감도는 망천의 산수는 「망천도」 그대로였건만 '인걸()'은 간데없고, 오직 왕유가 손수 심었다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근 1,300년의 세월 동안 하늘을 찌를 듯 거목으로 자라 이국()의 나그네를 맞아주었다. 

진정 왕유의 체취와 숨결이 느껴지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문득 「망천집」 중의 「문행관」이란 시()가 떠올랐다.
문행목() 다듬어 대들보를 해 넣고
향모()풀 엮어 지붕을 이었나니
그 누가 알랴? 이 마룻대 안에 서린 운기()
날아가 인간 세상에 화육()의 비되어 내릴 줄을!
"마룻대 안에 서린 운기"가 저 멀리 인간세상으로 날아가 "화육(세상 만물을 기름)의 비"를 뿌린다는 아름다운 상상을 통해서 문행관의 탈세속적인 그윽하고 고요함을 그리고 있는데, 이렇듯 왕유에게 있어 망천 별장은 가히 '선경'()이었으리라. 찾아가던 길의 흥분은 어느새 사라지고 돌아오는 길엔 시대를 초월할 수 없는 '심은자불우()'6)의 아쉬움과 인생의 덧없음이 절로 가슴을 파고들었다.

왕유의 시, 그 향기

오늘날 가치관의 왜곡과 편향()이 심각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느 누구도 현실적인 고뇌와 갈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소중한 일상 속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와 보람을 찾아가기는커녕 우리는 오히려 물질적 풍요 속에서 시시각각으로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며 심신의 건강을 위협받고 있다. 

정치적인 실의와 안사의 난 속에서 치욕을 딛고 유유히 대자연의 풍광과 정적이 흐르는 선경()을 소요하며 심신의 안녕과 해탈을 추구하는가 하면, 인간미 넘치는 온후한 정감 생활 속에서 심리적 위안과 휴양()을 얻었던 왕유의 시세계는 현대인의 정서를 순화하고 감정을 정화함으로써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는 향기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볼 문제

왕유의 시에서 드러나는 한계는 무엇인가?
대개 왕유의 시는 시인의 현실적인 고뇌와 갈등을 사회ㆍ민중적 화두로 확대시키지 못하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고도의 절제된 서정()으로 승화시키는 데 그치고 있어 문학의 시대ㆍ사회적 의의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 그 한계로 지적되고 있다. 
문학의 효용이란 결코 사회성에 국한되지 않으며, 현대인에게는 오히려 왕유 시의 고원()한 초탈성과 온후한 서정성이 더욱 의미 있고 유용한 것일 수도 있다.

왕유는 이백두보와 그 시작상() 어떤 차이를 보이는가?
시선() 이백은 도가사상의 소유자요, 낭만시()의 대가로, 술과 여인을 가까이 한 삶 속에서 재능이 있으면서도 현실적 성취를 이루지 못한 개인적인 고뇌와 시름을 호방한 필치와 낭만적인 서정으로 읊어냈다. 

시성() 두보는 유가사상의 소유자요, 사회시()의 대가로, 우국우민의 충정을 바탕으로 전란()의 고통에 신음하는 사회 민생을 침울하면서도 사실적인 필치로 여실히 반영해내었다고 할 수 있다. 
시불() 왕유는 불교 사상의 소유자요 자연시의 대가로서, 자연 정취와 불교적 선취가 넘치는 작품을 통해 정치적으로 실의한 시인의 세속적인 삶의 고뇌를 초탈하는 정서를 담박하면서도 고아한 필치로 그려내었다.

왕유 시가 우리나라 고전 시단에 끼친 영향은 어떠한가?
왕유의 시는 이백, 두보, 백거이() 등 대가의 작품과 함께 당나라 때 이미 우리나라로 전해져 애송되었고, 삼국 시대 이후 고려 및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 유행이 끊이지 않았다. 

우리나라 옛날 선비들은 특히 자연시를 즐겨 지었으므로 왕유의 시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일찍이 조선 시대 지봉(이수광()의 아들 이민구()는 "선인들은 시작()에 있어 왕유의 시풍을 숭상하였다"고 하였으며, 『서포만필』의 저자 김만중()은 "어떤 사람들은 시작에 있어 왕유를 숭상하고 두보를 좋아하지 아니 하였다"고 한 바 있다.

각주
『맹자(孟子)』 '진심(盡心)' 상편(上篇)에 나오는 말로서 "곤궁하면 홀로 자신의 품덕을 닦고, 현달하면 널리 천하 만민에게 은택을 베푼다"는 의미였으나, 후세에 "현달하면 널리 천하 만민을 구제하고, 곤궁하면 홀로 수신 양생(養生)한다"는 의미로 고쳐서 사용하곤 했다. 
『맹자』의 본의(本意)와는 달리 전자는 유가의 현실 사상을, 후자는 도가의 피세(避世) 사상을 각각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벼슬하면서 은거한다는 뜻으로, '반관반은'(半官半隱)이라고도 한다. 
몸은 비록 벼슬을 하지만 마음은 오히려 세상을 떠나 있고, 틈만 나면 실제로 은거하며 초세속적인 정취를 즐기는 고뇌에 찬 처세 태도를 말한다.
시인이 주관적인 사상과 감정에다 객관적 자연 경치를 절묘하게 융합시켜 묘사함으로써 문학적 형상미(形象美)와 생동감을 더하는 기법이다.
불가에서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히고 진리를 직관하는 무념무상의 경지에 드는 것으로, 이른바 참선(參禪)을 가리킨다.
일체의 생사번뇌를 초탈하는 경지로서 불교적 해탈론으로서의 소위 '열반(涅槃)'을 가리킨다.
당나라 시인 가도(賈島)의 시(詩) 제목으로, 은자를 찾아갔다가 만나지 못했다는 뜻이다.